초록불이 반짝 켜진 횡단보도. 폐지 수레를 힘들게 끌고 건너는 할머니가 있다. 뒤에서 속삭이던 두 청춘이 후다닥 달려가 수레 뒤를 밀었다. 그 순간 할머니가 큰소리를 쳐서 주변이 다 놀란다. 그냥 두라는 것! 고맙지만 됐다고 말하면 될 것을, 지나던 사람들마저 멈추게 한 폐지 수레의 한 장면이었다.
뜻밖의 모습에 놀라 뒤를 따라봤다. 이후 할머니는 좁은 길로 들어가서도 큰소리와 함께 수레를 당당하게 밀고 갔다. 뒷모습만 봐도 머쓱함이 짚인 두 청춘은 어디론지 사라졌다. 힘든 할머니 수레 좀 밀어 드리려는 좋은 마음에 벼락 치듯 닥친 거절이 퍽이나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그러할진대, 당사자야 말할 수 없이 쑥스러워 다른 골목으로 피한 듯싶다.
며칠 전에 본 폐지 수레의 뒤끝이 여러 생각을 일깨운다. 남을 돕는다는 것. 그것은 이타적인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행동이다. 두 여성은 힘들어 뵈는 할머니를 잠깐이라도 돕자는 선한 동기에서 묻지도 않고 수레를 밀었을 것이다. 그런데 폐지 수레 할머니는 도움 받을 마음이 애초에 없었던 게다.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할머니는 왜 선의가 무안하도록 큰소리 거절을 했을까. 그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도움도 서로의 이해를 전제로 이뤄져야 편하다는 생각을 돌아보게 된다. 어떤 순간만 아니라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실천이 필요한 정책들처럼.
그 장면을 돌려보니 ‘주다’라는 말의 안팎도 다시 뵌다. 표현에 민감한 입장에서는 ‘가지도록 건네거나 베풀다’라는 뜻풀이의 ‘베풀다’도 좀 걸린다. 선물을 준다는 말은 괜찮은데 어떤 경우에는 시혜적 표현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동등한 사이에서 ‘밥 살게’ 하면 편할 것도 ‘밥 사줄게’ 하면 기분이 좀 다르게 닿는 것이다. 실제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듯한’ 말투나 태도는 젊은 층의 거부감을 부른다. 이와 비슷한 상황을 일찍이 집어낸 소설(김유정, ‘동백꽃’)에 무릎을 친 적이 있다. 마름 딸 점순이가 소작인 소년 ‘나’에게 감자를 주면서 “느 집엔 이거 없지?”라고 해서 호의가 더 마음 상하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폐지 수레와 관련해 시선과 표현을 다시 본다. 문학에서도 어려운 타자를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쉽게 그려온 시선의 반성이 늘었다. 복지 같은 문제 제기를 떠나 일방적인 태도나 시선에 담긴 대상화의 우려 때문이다. ‘상명하달’ 같은 위계적 태도에 대한 반발이 성찰로 이어지는 것도 이런 의식과 닿아 있다. 진심의 연민도 상대의 입장에서 깊이 살피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해와 배려도 대등하고 평등한 마음으로.
정수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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