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밤이라니. 백야(白夜)는 낭만적 매혹이었다. 우리와는 거리가 먼 북반구의 현상이기 때문인가.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백야들은 낯섦의 유혹으로 마음을 더 당겼다. 밝은 밤이라는 백야의 환상이 빙하 이상의 동경을 품게 한 것이다. 하지만 아주 먼 곳의 매력이라 벼르던 백야 체험은 쉽지 않았다.
실제로 맞아 보니 백야는 훤한 저녁이었다. ‘위도 48.55° 이상의 지역에서 여름 동안 밤하늘이 밝아지는 현상’이라는 백야도 곳에 따라 다른 게다. 대낮처럼 태양이 떠 있어 ‘한밤의 태양’이라 불리는 지역이 아니면 대부분 밝은 저녁의 지속이다. 저녁 10시와 새벽 3시의 하늘빛이 거의 같다. 가장 어두울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에도 불빛 없는 뜰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개똥벌레 불빛으로 공부했다는 옛날 선비의 형설지공(螢雪之功)도 아니고, 백야 설렘에 잠은 계속 밀려났다. 오 백야의 난간에서 책을 읽다니, 불면이 대책 없이 깊어져 여정은 힘들었지만.
무릇 여행은 낯선 것을 만나러 가는 길. 낯선 곳에서는 낯선 생각들이 낯선 감각을 깨워낸다. 백야도 먼 곳의 낯선 매혹으로 우리를 낯선 시공간에 세운다. 6월 하지부터 8월 중순까지의 신비로운 백야. 처음 맞은 사람도 그러한데, 현지인들은 밤새 마시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크랴. 8시 이후 마트의 주류 판매 금지에 끄덕이게 된다. 매년 백야를 다양한 축제로 즐기는 문화도 당연한 인생의 찬가라 할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오래된 전언처럼.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는 백야 아닌 열대야로 고문 중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지구별의 기후 차별 속에서 곳곳의 산불 비명도 터져 나온다. 빙하가 가속도로 녹는 환경오염에 맞물려 폭염이 점점 거세질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도 몇 년 간은 폭염이 드셀 전망이라니, 그야말로 세계적 대책과 실천이 시급한 때다. 독하게 길어지는 열대야에 우리도 비책을 마련해야 뜨거운 여름을 웬만큼 넘길 것이다. 하여 낮일 대신 밤일을 늘려볼까. 노트북을 붙잡고 씨름하며 기나긴 열대야를 노려본다. 이 또한 지금 이 곳에서의 백야라고, 새롭게 사귀어볼 수 있을지 마음을 내어본다.
밤새 뒤척거리다 보면 조금 서늘해지는 새벽 공기의 맛. 그런데 새소리, 매미소리, 벌레소리가 또 뜨겁게 달라붙는다. 낭만적이던 매미소리마저 그악스러워지니 자연의 소리들이 열대야의 공범 같다. 모두 피해자려니 하지만. 활짝 열어놓은 창으로 소음의 열기가 들이치며 서서히 달궈진다. 아 팔팔 끓는 8월이 온 게다. 그래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찬물 끼얹으며 열을 식혀본다. 백야 며칠 즐기다 와 열대야에 늘어지다 들러보니, 코앞에 입추가 있다. 곧 서늘한 바람 데리고 처서도 준비할 터, 다시 오늘의 자세를 가다듬는 한여름 아침이다.
정수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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