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샛길

그냥 새버릴까 샛길을 보면 문득 만발하는 생각들이 있다. 그것도 매양 반복되는 출퇴근길에서라면 더더욱. 하지만 대개의 샛길은 바라보다 돌아서는 한숨의 사잇길이다. 위험할 수도 있는 샛길이 그토록 마음을 헤집는 것은 평소와 다른 길의 유혹 때문일 것이다. 샛길은 새고 싶은 마음만 아니라 빨리 가려는 욕망도 부추긴다. 샛길이 공원에도 많이 생기는 것을 보면 그런 심리가 더 보인다. 공원 안의 길은 기존의 보행 노선을 고려해 잘 배치했지만 어느새 질러가는 샛길이 난다. 그것도 길옆의 잔디밭으로 지름길이 홀연히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떤 길은 본래부터 있었나 싶을 만큼 묵은 길맛이 제법 난다. 대부분 새로 난 길의 풋내를 풍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걸음의 흔적들이 매끈하게 다져진다. 본래의 길을 버젓이 놔두고 그 옆으로 오종종 생긴 자국들이 샛길로 위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누군가 걷기 시작하고 따라 걸은 흔적들. 처음엔 따라 걷기도 망설여진다. 공원 안의 샛길이 대부분 잔디밭에 나 있는 까닭이다. 샛길의 유혹 앞에서 선뜻 못 들어서는 것은 지엄한 명령의 기억도 작용한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어린 시절 곳곳에서 눈을 부라리던 경고의 팻말은 얼마나 오래 가는 것인지. 그에 대한 저항으로 일부러 밟은 발길도 더러 있었다. 겨울 보리밭처럼 밟아줘야 잔디에도 좋다나. 하지만 잔디가 남아 있는 길은 미안스러워 머뭇대게 마련이고, 초록이 다 진 겨울에야 편하게 걸을 수 있다. 특히 시멘트나 벽돌 길에 발바닥이 아플 즈음이면 푹신한 잔디밭의 유혹이 아주 크다. 추운 마룻방에서 따스한 안방을 그리듯 흘끔거리며 바라보다 에잇 잔디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공원에 점점 늘어나는 반려견 산책자들 또한 다른 마음을 불러낸다. 그들이 거의 다 잔디밭을 마음껏 걷고 뛰기 때문이다. 개들이 끄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 마지못해 잔디밭을 걷는지는 모르지만, 개 없는 산책자들 입장에서는 묘한 느낌이 든다. 견권이 인권보다 앞이던가? 누구든 잔디밭을 왜 걷느냐고 따지면 개가 사람보다 먼저냐고 나름의 응대를 장착하고 잔디밭을 걸어본다. 개들은 저리 마구 다니는데 사람은 왜 견제하느냐 준비했는데, 잔디밭 산책은 아무에게도 시비 당하지 않는다. 그것도 겨울 산책일 뿐, 봄여름가을이면 잔디밭은커녕 잔디밭 속 샛길조차 잔디에게 미안해서라도 못 들어간다. 그러고 보니 샛길에 때때로 끌렸다. 낯설고 색다른 호젓한 샛길. 인적 드문 산속이나 들판에서 희미한 샛길을 만나면 따라 가고 싶어 설렜다. 무슨 생의 샛길을 꿈꾸다 다 지나오니 마음만 먼저 들떠 걷는 게다. 비유를 떠나 길 자체만 봐도 번다한 큰길보다는 호젓한 샛길의 매력이 크다. 더 들어가 보고 싶은 묘한 끌림과 울림. 그런 속삭임에 샛길이 자꾸 생기나 보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우공(愚公)과 지수(智叟)

우공과 지수는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 고사(古事)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이름에서 보듯이 우공(愚公)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지수(智叟)는 지식을 쌓은 똑똑한 사람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바깥으로 나다니기 힘들게 마을 앞을 가로막은 태행산(太行山)과 왕옥산(王屋山)을 우공이허물려고 한다. 산을 허문 흙은 수레에 싣고 700여리 떨어진 발해만으로가져가서 버려야 하는데 거기까지 한번 다녀오자면 거의 일 년이 걸린다. 나이 90에 이른 우공이 이 엄청난 일을 시작하자 지수가 참 어리석다며 비웃는다. 그러자 우공은 내 생애에 다못하면 내 자식이 할 것이고 내 자식이 다 못하면 내 손자가 할 것이니, 자자손손 대가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 두 산이 없어질 것이다라고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고사성어가 이 이야기에서 나왔다. 우리는 우공이산을 열심히 하면 반드시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만 알고 있으나 여기에 깊은 의미 하나가 더 숨겨져 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분별하라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할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어리석지만 할 수 없는 일인데도 굳이 하려는 사람도 어리석다. 그러하므로 할수 있는 일은 열심히 하면서 할 수 없는 일에 손대지 않는 이가 참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런 지혜로운 사람이모이면 버리는 일 없이 모두 제 할 일을 잘해서 세상의 결이 반듯하게 잘서게 된다. 그런 지혜로운 사람이 필요한데 세상에는 내남없이 오만과 편견에 빠진사람들이 득시글거린다. 제 일은 팽개쳐 두고 마치 제 것이기나 한 양 남의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입에 거품물고 훈수 드는 걸 정의로운 행동이라여기는 사람들이 세상에 차고 넘친다.그러다 급기야 내 편 네 편으로 패거리 지어 서로 다투기까지 한다. 이런혼탁한 세상이 올 줄 오래전에 예단한 열자(列子)가 우공(어리석은 사람)을 지혜롭게, 지수(똑똑한 사람)를 어리석게 이름이 주는 의미를 뒤집어서이야기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우공이산에 숨겨 놓은 이 깊은 뜻을 새기지 못하고 나만 할 수 있다며 여전히 오만과 욕망을 좇는다.어느 모임에 참석했을 때다. 독설가로 소문난 한 문학평론가가 지식인들이 지금 우리 사회를 망치고 있다고 했다. 지식인들이라 자처하는 분들이 들으면 언짢아할지 모르나 듣고 나서 가만히 새겨 보니 영 틀린 말은 아닌 듯해 나는 씁쓸하게 속웃음을 웃었다. 참지식인은 켜켜이 쌓은 지식(知識)을 말로 드러내지 않고 그 지식을 녹인 지혜(智慧)로 행동한다. 우공이산에 나오는 우공이 그러한 사람이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아름다운 경쟁을 위하여

넷플릭스 9부작 한국드라마 오징어게임이 장안에 화제였다. 개봉하자마자 넷플릭스 TV쇼 부문 최장 기간 1위에 이어 전 세계 1억1천100만가구 이상 시청해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잔혹하고 폭력적인 내용이 불편하면서도 생존 경쟁 앞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승선을 넘어야 한다는 게임의 룰이 현재의 삶과 닮아 있다는 공감 때문이지 않을까 추론해 본다. 옆 눈 가리고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쉼 없이 앞만 보며 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경쟁은 과연 삶에서 필요한 것일까? 엄혹한 무한경쟁 말고 아름다운 경쟁은 없는 것일까? 동양고전 『중용』에서 공자는 과정이 공정한 경쟁을 칭송했다. 활쏘기는 군자다운 모습과 유사하다. 활을 쏘아 정곡을 맞추지 못하면 돌이켜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는다.(射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 고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사냥으로 전투기술을 연마했고, 사냥을 대신해 짐승 가죽을 과녁으로 삼아 포획하는 활쏘기 연습을 했다. 평시에는 활쏘기가 덕행을 함양하거나 인재를 선발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활쏘기는 마음이 편안하고 몸이 바르며, 활과 화살을 잡은 것이 모두 확고해야 적중할 수 있다. 자기가 바른 후에 활을 쏘고, 적중시키지 못하면 반구저기(反求諸己)라 하여 돌아봐 자신에게서 잘못의 원인을 찾는다. 패자는 승복하고 벌주를 마시며 승자를 원망하지 않는다. 승자 역시 술을 권하고 축하받되 과시하지 않는다. 자신을 이긴 자에 대해 원망하지 않는 것은 적중의 실현 여부가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경쟁은 승패를 다투는 것이 기본이지만 활쏘기의 목적은 힘자랑을 하거나 남을 이기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의 수준을 파악하고, 집중하며 활을 쏘아 자기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있다. 경쟁에서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 찾지 않고 환경 탓, 남 탓만 하며, 이기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경쟁의 목적이 자기함양이 아닌 남을 이기는 데만 있는 것이다. 그런 경쟁은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하여 잔혹하게 만든다. 서로에게 발전을 가져오는 경쟁, 지고 나도 아쉽지 않은 경쟁은 경쟁의 과정에서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고 스스로 떳떳하도록 정해놓은 규칙 안에서 공정하게 해야 가능하다. 물론 경쟁의 과정과 결과가 좋은 것은 목적이 바르기 때문이다. 경쟁의 목적은 자기답게 살고 자기를 완성하는 데 둬야 한다. 남들이 규정하고 사회가 우선하는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영혼없이 메마른 경쟁을 하는 게 아니라 죽는 순간에도 아쉽지 않은 가슴 뛰는 일에 매진해야 경쟁이 즐겁고 결과와 상관없이 후회되지 않는다. 경쟁은 모름지기 방향도 올바르고 과정도 정직해, 경쟁으로 승패가 나뉘어도 참여한 사람 모두 격려받고 자아실현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경쟁이어야 한다. 아름다운 경쟁은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가꾸면서, 나로 인해 주변에 감동을 선사하는 가슴 뛰고 멋진 일이다. 고재석 성균관대 유학대학 교수

[아침을 열면서] 마음과 근육

근력은 여전하시고? 어른들이 주고받던 아침 인사였다. 근력이 기운인지 기분인지, 갸우뚱거린 어린 시절 기억의 하나다. 그때 근력이란 어른들끼리 통하는 표현으로 담아뒀다. 그런데 요즘 실감하는 말이 근육이고 근력이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새록새록 일깨워주는 실감이다. 최근에는 연금보다 근육이라는 표현도 자주 보인다. 근육이야말로 노후를 뒷받침하는 힘이자 장수의 바탕인 게다. 건강을 잃어봐야 소중함을 깨닫듯, 근육도 소실이 일어나야 비로소 중요성을 알게 된다. 계속 다지지 않으면 근육도 노화로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대응을 마련해야 하는 게다. 그나마 남아 있는 헐렁한 근육이라도 지키자면 꾸준한 운동이 필수라는 경고다. 요즘은 시에도 근육이 많이 불려나온다. 마음의 근육이라는 낯선 표현이 등장하나 싶더니 비슷한 표현들이 늘었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었던가. 비유로 보면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 신선한 활용으로 다양해지는 것이다. 실제로 마음 근육 키우기 같은 심리프로그램이 벌써 나왔는데 멘탈 헬스 영역에서 많이 다룬다. 특히 경쟁이 치열한 기업의 스트레스 관리로 마음 챙김이며 명상 프로그램에 활용 중이다. 한때 힐링이 유행하며 매스컴을 휩쓸더니 마음의 근육이니 회복 탄력성이 확산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실체가 없는 마음에 근육을 붙인 점에서 무척 신선했다. 회복 탄력성의 느낌이라도 더 구체적으로 뚜렷해지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마음 근육의 세 가지 구성요소를 자기조절력, 대인관계력, 자기동기력이라고 한 견해를 짚어보면, 그동안 써온 표현들을 달리 집약한 거나 진배없다. 자기조절은 일찍부터 강조해온 자기 수양의 하나고, 자기동기력도 자신이 동기부여를 해야 효율적인 능력 발휘가 된다고 익히 들어온 바와 같다. 대인관계력 또한 적응과 대응 그리고 포용력과 크게 다르지 않은 표현이라 하겠다. 그보다 크게 닿는 것은 회복 탄력성이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랭보)라는 외침처럼, 살면서 누구나 상처를 주거나 받는다. 그것을 빨리 딛고 일어서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 힘을 회복 탄력성으로 보면 이 또한 마음의 근육에 상관성이 크다. 웬만한 상처쯤 훌훌 털어내려면 마음의 근육부터 단단해야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예민한 사람은 상처가 물이 될 때까지 곱씹어야 천천히 낫겠지만. 마음의 근육도 결국은 자신이 키워야 하는 것. 어떤 도움도 마음이 따르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그러고 보면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데는 독서만 한 게 없다. 타인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이해와 배려 같은 정신의 성장을 얻는다. 그 과정에서 위안과 정화도 큰 힘을 발휘하니,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한 카타르시스의 작용이다. 시를 읽는 일 또한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아름다운 일. 그렇게 꼭 덧붙이고 싶은 새맑은 아침이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매월당 김시습의 ‘사청사우’

2022년 새해 벽두에 문득 매월당 김시습의 시 사청사우(乍晴乍雨)를 떠올린다. 사청사우는 날이 개었다 비가 내렸다 한다는 뜻이다. 한 해를 여는 문 앞에서는 대개 밝고 행복한 이야기를 한다. 희망은 언제 들어도 반가운 말이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입에 발린 소리보다 좀 더 솔직한 이야기가 희망에 한 걸음 다가가는 덕담일 듯해 있는 그대로 세상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에서나 바람 잘 날 없다. 어떤 분은 삶이 다 그런 거라고 말한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게 살면 그렇게 살아가는 거려니 하겠으나 이왕이면 그 빈틈에 아름다운 꽃 한 송이라도 피우는 여유를 가진다면 더 향기로운 인생이 되지 않을까. 옥토만이 땅이 아니다. 바위틈을 비집고 나와 자라는 꽃도 있다. 코로나19가 창궐해 세 해째 우리 삶을 위협하며 괴롭힌다. 자영업을 하는 분들은 영업이 안 돼 생계를 위협받고, 평범한 시민들 가운데는 일상을 빼앗겨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분들도 있다. 이 난국을 빠져나가야겠는데 어느 곳을 돌아보아도 당장은 딱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정치하는 분들은 이런 현상이 보이지 않는지 서로 자리를 안 뺏기겠다며 싸움질만 한다. 국민은 어느 쪽이 나를 도와줄까 눈치를 보며 저울질해 보지만 어느 쪽도 쉬이 희망을 가져다줄 것 같지 않다. 잠시 개었다 다시 비가 오고, 비가 오다가 다시 날이 개는구나 하늘의 이치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세상의 인정이랴 나를 칭찬하던 이가 오히려 나를 헐뜯고 공명을 피하던 이가 다시 명예를 구하려 하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봄이 어찌 상관할 수 있으랴 구름이 가고 오는 것을 산은 다투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아, 모름지기 내 말 잘 새겨들으시오 즐겁고 기쁜 일을 평생 누리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오 - 매월당 김시습 사청사우 전문 행복과 희망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내 가슴에 있다. 내 안을 못 보고 욕심스레 밖에다 산처럼 쌓는 행복은 크게 쌓일수록 빨리 무너진다. 즐겁고 기쁜 일을 평생 누리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오 하는 매월당의 시구처럼 평생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무너지지 않는 내 안에 있다. 한 편의 문학 작품이 이렇듯 가슴에 묻어둔 자신의 마음과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을 만들어준다. 사청사우(乍晴乍雨)를 음미하며 꽃이 피고 지는 내 안의 봄을 보게 되면 바위에서 피는 꽃도 볼 수 있다. 김호운 소설가ㆍ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자기다움을 위한 길

평소 거울을 볼 때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가. 만족스러운지, 아니면 쌍꺼풀이 있었으면 좋겠다, 코가 조금 높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누구처럼 닮아가기 위해 성형을 고민하지는 않은지. 남과의 비교는 자신을 가꿔가는 분발의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자신을 초라하게 하고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시작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를 존중하고 자기답게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 동양고전 논어는 말한다. 자공이 남과 비교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는 어진가 보다. 나는 그럴 겨를이 없다.(子貢方人, 子曰 賜也, 賢乎哉! 夫我則不暇) 자공은 스승보다 31세 어렸지만, 언변과 정치에 뛰어나 노나라와 위나라의 재상을 역임했다.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골고루 알려지게 된 것도 그가 앞뒤로 도왔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공자는 자공이 예측을 잘한다고 평가했다. 한번은 공자가 제자 자천을 군자답다고 칭찬하자, 자공은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다. 공자는 그릇(器)과 같다고 말했다. 그릇은 하나의 고정된 기능만을 지녔기에, 군자가 경계해야 할 인재의 모습이다. 제자의 좌절이 염려된 공자는 다시 그릇 가운데 제사에서 쓰이는 화려한 예기(瑚璉)와 같다고 말해준다. 남과 비교하는 것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해 만족을 느끼려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비교하고 비교당해왔다. 성적, 외모, 대학, 취업, 결혼 등을 위해 남과 비교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해왔다. 어른이 되면 그칠 줄 알았던 비교는 자동차, 집, 승진, 자녀 등으로 전환돼 지속되고 있다. 비교는 끊임없는 부족을 야기해 불행의 씨앗이 되곤 한다. 자기 모습을 부정하고 남만 모방해 자신을 다그치면 나은 능력을 지닐 수는 있지만 오히려 공허하게 될 수 있다. 비교 대상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남에 있기 때문이다. 남과 비교를 통해, 내가 남보다 나은 점이 있다 해서 우쭐댈 필요는 없다. 자기 모습대로 삶을 가꿔가는 자들은 비교를 통해 우열을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과 비교를 통해 얻은 우월감은 지속적인 자존감을 주기 어렵다. 그럴 여유가 있다면 그 시간에 자신을 성찰하고 부족을 메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꽃은 제 모습대로 피어날 때 아름답고 감동스럽다. 장미꽃이 인기가 있다고 해서 안개꽃을 빨갛게 염색하고 가시를 단다고 장미꽃이 될 수 없다. 비교는 자기다움을 찾고 완성하는 과정에서 이뤄져야 한다. 어진 이의 행동을 보면 그와 같아지기를 생각하라.(見賢思齊焉)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남의 좋은 점을 배워 자기다움을 완성하는 비교는 공자도 권장했다. 거울을 보며 나를 자세히 바라보고, 나의 모습에 애정 어린 시선을 가져보자. 그리고 나의 일상을 돌아보며 나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고, 나의 장점에 대해 살펴보는 자세를 가져보자. 자기 모습을 존중하고 자기다움을 완성하기 위해 분발하는 비교는 자기답게 사는 지름길임을 논어는 말하고 있다. 고재석 성균관대 유학대학 교수

[아침을 열면서] 마감

무엇으로 쓰는가. 도구를 묻는다면 연필이고 펜이다가 자판으로 바뀌었다. 손글씨 원고를 보기 어려울 만큼 모두 자판을 두드려 쓴다. 조용히 쉬는 자판을 마구 깨워내서 때리며 쓰기 부역을 시키는 것 같다. 한동안 엉덩이로 쓴다는 말이 회자됐다. 엉덩이는 의자에 꾹 눌러앉은 붙박이 시간의 비유다. 쓰기 노동을 날마다 수행하는 소설가들에게 더 합당한 표현이었다. 그만큼 쓰기라는 게 의자와 뗄 수 없이 맞물린 관계인 것이다. 작가만 아니라 모든 필자가 그러하다. 사무직도 대부분 그렇지만, 쓰기 노동자야말로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과 비례하는 쓰기가 있다. 그러고 보면 엉덩이론에 공감할 사람이 많겠다. 한때는 의자에 자신을 묶거나 졸음 대비용 바늘을 책상에 깔아놓았다는 연구자의 전설도 있었다. 지난 시절 얘기지만, 오래 앉아 있기가 쓰기의 한 전제임은 분명하다. 읽어야 쓰고, 읽은 만큼 쓰듯, 앉아있는 시간만큼 쓰기가 쌓이는 까닭이다. 쓰기의 양이 꼭 질의 담보는 아니어서 퇴고의 시간도 포함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또 다른 말도 가능하다. 글은 마감이 쓴다. 얼마 전부터 지어 쓰는 말이다. 마감이 코앞에 닥쳐서야 머리 싸매고 쓰는 필자가 많은 까닭이다. 마감이 닥치면 머릿속에 맴만 돌던 것들까지 죄다 끌려나와 쓰기에 복무하게 된다. 마감의 채근이 쓰고 고치고 다시 쓰기에 마침표를 찍게 만드는 게다. 보통 원고를 쓰고 보내는 과정을 보면 마감의 독촉이 크게 느껴진다. 마감이 곧 전쟁임은 신문사가 더할 터라 이만 줄이지만, 무릇 글은 마감이 있어서 마무리에 이르지 싶다. 그런 마감이 때로는 좋은 핑계도 된다. 마음에 덜 차는 글도 마감을 앞세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퇴고를 해도 미흡할 때, 지친 쓰기 노동자 앞에 마감은 구세주 같다. 그렇게 또 한 편의 덜 여문 글을 지면에 내보내기도 하는 것이다. 엉덩이로 쓰거나, 마감으로 쓰거나, 쓰기라는 업에서 살아남게 하는 마감은 채근과 긴장의 든든한 근육이다. 간혹 마감에 자유롭던 필자도 있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필자가 많아져서 마감 못 지키는 자유까지 굳이 지켜주지는 않는 것. 원고도 마땅한 것 없다고 한두 번 사양하면 이후 청탁이 끊기니 쓰기 동네 사정은 비슷하다. 그래서 매번 좋은 작품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더 나은 작품을 내려 애쓰지만, 글이 영 모자라도 웬만하면 보내는 것이다. 사실 100% 마음에 드는 글은 불가능하므로 80%만 돼도 괜찮다고들 한다. 그 수준의 유지 혹은 이상의 어려움이 상존하는 가운데도. 마감, 그것이 늘 문제다. 실은 어떻게 쓰느냐가 더 문제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무서운 문제이듯. 그래도 마감이 있어 부족함도 맺고 넘어간다고 자신을 추스른다. 올해 마감은 무엇을 어떻게 칠 것인지, 두려운 직전이다. 미룬 원고부터 얼른 마무리해야겠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나비를 잡는 아이의 마음으로

나비를 잡는 아이의 마음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사기를 집필한 중국의 사마천이 그러했다. 나비를 잡는 아이의 마음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절친이자 경쟁자였던 창애(蒼厓) 유한준(兪漢雋, 1732~1811)에게 보낸 편지글에 나오는 말이다. 창애가 사기를 다 읽은 기쁜 마음을 연암에게 편지로 전했다. 그러자 연암은 사기의 내용을 읽은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비를 잡는 아이의 마음으로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라고 답장을 보냈다. 책을 읽을 때는 지은이의 마음도 함께 읽으라는 뜻이다. 나비를 잡기 위해 아이는 잔뜩 몸을 낮추고 엄지와 검지를 ㄷ모양으로 만들어 조심스럽게 나비에게 다가간다. 그러고 나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힘으로 나비를 잡아야 한다. 힘이 넘치면 잡은 나비에게 상처를 입히고 힘이 모자라면 나비를 놓친다. 넘치는 것보다 모자라는 게 더 낫다는 걸 알기에 아이는 자주 나비를 놓친다. 나비를 놓친 아이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주위를 한번 돌아보며 부끄럽고 아쉬운 마음을 혼자서 달랜다. 나비를 놓친 텅 빈 이 아이의 가슴에는 이제 세상을 담을 아름다운 꿈 하나가 싹을 틔울 것이다. 나비를 잡는 아이의 이런 마음이 세상에 사기를 남기게 했다. 우리 문학인들이 남기는 작품 역시 그러하다. 우리가 나비를 잡는 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러한 세상은 참 아름답고 평화로울 것이다.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준 세상과 지혜를 쌓게 해준 자연을, 그 스승과 벗을 액자에 갇힌 좁은 잣대로 움직이려 하거나 거스르려고 하면 자연과 세상은 우리에서 멀어진다. 연암이 열하(熱河)로 갈 때 요동 땅 고죽성 옆을 흐르는 롼허강을 지나갔다. 함께 가던 사신 일행들이 빼어난 풍광을 보고 산수(山水)가 그림 같다며 감탄하자 연암은 그대들은 그림도 모르고 산수도 모르네. 그림이 산수에서 나왔는데 어찌 산수를 보고 그림 같다고 하는가하고 나무랐다. 자연을 보지 못한 채 산수화(山水畵)만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은 액자 속에 든 그 산수가 자연의 모든 것인 줄 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을 보지 못한 채 액자(틀) 안에 갇힌 시선으로 자연과 세상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아는 건 보고 배운 틀 속의 모양일 뿐이다. 그 작은 그릇에 세상을 다 담았다고 여기면 그릇은 깨지고 만다. 깨지지 않은 넉넉한 그릇을 가진 사람만이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세운다. 김호운 소설가ㆍ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흔히 사람을 두고 사회적 존재라고 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살기란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직간접적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의 긍정적인 평가나 알아주는 인정은 행동의 중요한 동력이 되곤 한다.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면 기분이 좋아지고 힘도 난다.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는 맛에 세상을 산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존재감 없는 자기 모습에 처량한 생각도 들고 서운하면서 화도 난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인정받아 나의 존재가 빛날 수 있는 길에 대해 『논어』는 말한다.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자신이 능력 없음을 근심해야 한다.[不患人之不己知, 患其不能也ㆍ불환인지불기지, 환기불능야] 좋은 학벌과 번듯한 직장은 분명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끄는 조건 가운데 하나다. 특별한 재능이나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 역시 인정받는다. 많은 돈(富)과 높은 지위(貴)를 지녔다면 어딜 가든 조그만 행동에도 주목받는다. 하지만 나의 존재 가치는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이나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남이 요구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거나 돈과 권력을 뽐내기 위해 주력하기보다, 시선을 안으로 전환해 내면을 살필 필요가 있다. 『명심보감』에서는 말한다. 세력으로 사귀는 사람은 가까이하던 세력이 다하면 관계가 없어지고, 재물로 사귀는 사람은 긴밀하게 여기던 재물이 다하면 관계가 소원해지며 여색으로 사귀는 사람은 친히 여기던 여색이 쇠해지면 관계가 끊어진다.[勢交者, 近勢竭而亡, 財交者, 密財盡而疎, 色交者, 親色衰而絶ㆍ세교자, 근세갈이망, 재교자, 밀재진이소, 색교자, 친색쇠이절] 육체적 욕망과 물질적 욕구는 지속적인 만족을 주기 어렵다. 그보다 강력한 것이 나오면 인정의 대상은 옮겨가게 돼 있다. 권세가 약해지고, 재력이 고갈되며 육체가 노쇠해도 나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것은 자기답게 살아갈 때 비로소 가능하다. 진정한 인정은 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인정이어야 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남의 인정을 갈구해 하기 싫은 것도 억지로 하며 자신을 학대하거나 자신을 몰라주는 것에 화를 내기보다 시선을 거두어 들여 스스로 성찰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하는지, 그리고 나에게 부족한 것을 직시하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지. 물론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은 객관적인 한계가 존재할 수 있다. 자기 모습을 존중하고 자기다움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남들이 몰라주는 경우다. 지리산 산속에서 대지의 기운을 한껏 받으며 자라나는 소나무는 보는 순간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광화문 대로에서 매연과 조명 속에서 자라나는 소나무도 지나가는 이들에게 마음의 휴식을 안겨준다. 부단히 노력하여 자기 모습을 꽃피우는 소나무는 모두 감동을 줄 수 있다. 감동의 넓이는 다를지라도 깊이는 동일하다. 남의 평가나 인정이 나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낼 이유가 없다. 자기다움을 완성하기 위해 부족한 것을 부단히 메워가는 노력이 진정한 인정을 받아 나를 빛나게 하는 길임을 고전 『논어』는 말하고 있다. 고재석 성균관대 유학대학 교수

[아침을 열면서] ‘꾼’의 발견과 이면

무슨 회의에 가면 직장(직업) 소개가 편치 않다. 명함을 주고받을 때도 좀 그렇다. 무슨 서류들 앞에서도 난감하긴 마찬가지. 시인이라 적기도 뭣한 직업란에 딱히 채울 것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왜 직책까지 적으라는지, 그런 관행의 속내는 알 수가 없다. 가끔은 글꾼으로 적어본다. 흔히 글쟁이라고들 하지만, 꾼이 더 어울릴 법해서다. 일꾼, 농사꾼, 장사꾼, 살림꾼 등은 직업에 일종의 표식으로 꾼을 붙인다. 춤꾼, 소리꾼처럼 전문가 행위에 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즐기는 쪽에 능숙한 사람을 낮잡는 말로 술꾼, 노름꾼, 사기꾼이라 쓸 때는 편치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사랑에까지 꾼을 붙여 쓰는 판이니 꾼 붙여 쓰기도 조심스럽긴 하다. 하지만 꾼이 요즘은 편한 높임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특히 소리꾼이 그러한데 방송의 높임 분위기에 따른 영향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소리꾼은 예나 지금이나 소리꾼이다. 그런 호칭이 다른 느낌을 환기하니 세간의 인식 변화도 돌아보게 한다. 무엇보다 한국 홍보 영상에서 국악의 색다른 매혹을 활짝 깨워낸 이날치의 공이 크지 싶다. 이날치라는 천하의 소리꾼 이름을 딴 것부터 자부심 어린 명명이라 우리 소리의 창의적 확장까지 바람을 얹어보게 된다. 일찍이 꾼처럼 ㄲ이 들어간 표현에 주목한 말이 있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꿈, 끼, 깡, 끈, 꾀 같은 5ㄲ이 있어야 한다나. 말놀이 같아도 가만 보면 바람직하고 필수적인 자질과 요소의 조합이다. 끈이 우리 사회의 고질인 ~연(緣)의 면면을 건드리지만, 좋은 연 만드는 능력(네트워킹)으로 보면 괜찮다. 한참 지나온 말인데 ㄲ의 나열이 볼수록 올차고 차지다. 이 모두의 합을 잘만 발휘한다면 진정한 꾼으로 우뚝 설 것 같으니 말이다. 젊은 소리꾼들을 안타깝게 보다가 꺼내본 생각이다. 풍류대장이라는 뜻밖의 이름을 단 모 방송국 프로그램의 소리꾼들 앞에 놀랐다. 소리에 바친 생은 절절해도 눈앞은 캄캄하건만, 소리를 위해 자신을 불사른다. 득음에 생을 거는 소리꾼들의 고난 행군 앞에는 변방의 글꾼이 무색할 지경이다. 특히 국악과 양악의 합을 통해 새로운 흥과 한과 가락을 펼쳐내는 꾼들의 신명에는 넋을 앗긴다. 국내보다 국외에서 우리 소리의 깊은 맛을 찾고 즐긴다는 현실은 씁쓸하지만. 이참에 얹는 것은 우리 소리의 더 폭넓은 향유와 드높은 활약이 터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리저리 보니 꾼이 새삼 크게 닿는다. 판소리의 이면 같은 것도 비친다. 득음까지는 멀어도 피맛 삭인 저만의 소리를 질러보는 꾼들. 어느 분야나 비슷하니, 글도 쓰고 버리고 다시 쓰는 기나긴 수행 끝에 자기 문체를 조금 얽게 된다. 끈기 없이는 꿈도 못 꿀 끼와 깡의 발현인 꾼, 그 앞에 새삼 글길 여미는 아침이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책 속에서 길을 찾는다

문청(文靑) 시절 수차례나 읽기를 반복하다가 겅중겅중 건너뛰며 읽다가 결국 완독하지 못하고 꽂아두었던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를 얼마 전에 다시 꺼내 읽었다. 그동안 어쩌다 이 작품이 화제에 오르면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꽁지를 내리곤 했던 내게 실존철학에 대한 콤플렉스를 안겨준 작품이다. 이 작품을 다시 읽고 싶어진 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 해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사회는 참 복잡한 구조로 엮여 있다. 알면 알수록 더 혼란스럽다. 그래서일까. 관심은 가지지만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똑똑할수록 더 단순하게 생각하며 그냥 흘러가는 대로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가고 싶어 한다. 반복되는 학습효과에 빠져버렸다. 보편적인 게 행복하다는 등식이 굳어진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 적당히 아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변질했다(더닝 크루거 효과ㆍDunning Kruger effect). 실존주의의 선언임과 동시에 문학예술에 대한 설득이다라고도 하는 소설 구토는 문학과 철학의 경계에 서 있다. 주인공 앙트와느 로캉탱(Antoine Roquentin)은 실존과 본질 사이를 오가며 현실에서 부조화가 일어날 때마다 구토 증상을 일으킨다. 토악질이라 번역했지만, 사실은 그런 증상이다. 이 증상은 존재의 가치를 줄타기하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차이와 반복을 계속한다. 어쩌면 이것은 사르트르가 프랑스어로 젊어 보이려고 하는 늙은이라는 뜻을 가진 roquentin(로캉탱)을 주인공의 이름으로 선택한 까닭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일까.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20세기를 정리할 철학자라며 극찬했던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차이와 반복이라는 두툼한 철학서를 우리에게 화두로 던졌다. 이 책 역시 젊은 날 내가 읽다가 내던진 구토처럼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올 한 해 동안 다 읽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터에 다행히 우리에게는 사르트르가 있었다. 후덥지근한 좁은 방에 갇혀 있던 우리에게 그는 신선한 공기였으며, 시원한 뒷마당의 상큼한 바람이었다라고 한 질 들뢰즈의 말을 발견하고 사르트르의 구토를 꺼내 다시 읽었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이해하게 될 때 제대로 사는 방법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사르트르 저작 중 가장 뛰어나다고 했던 소설 구토, 그리고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완독하고 나면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긴다. 김호운 소설가ㆍ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

당당함이 먼저 떠오르는 MZ세대에게 최근 명품 플렉스 문화가 유행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수입차를 가장 많이 구매한 연령대가 30대라고 한다. 명품매장에서 가장 많은 소비를 하는 연령대 역시 2030세대라고 한다. 명품은 분명 이름값을 한다. 품질이나 구성 면에서 소비자를 만족시킬 만한 탁월함이 있다. 다만 좋은 명품을 소비하며 자신을 꾸미는 일에 신경 쓰는 노력에 동의가 되면서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계기가 그저 명품 소유에서 가능하다는 흐름은 다소 의문이 들게 한다. 부끄러움은 무엇일까?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논어는 말한다.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서도, 거친 옷과 맛없는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아직 함께 도를 의논할 수 없다. 남루한 옷을 걸치고 초라한 음식을 먹고 있으면 누구나 부끄러운 마음이 들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물질적 빈곤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고 부끄럽게 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던 것 같다. 악의악식(惡衣惡食)은 몸을 장식하고 살찌우는 외물을 상징한다. 물론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돼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또한 다른 것을 절약하더라도 자기 노력으로 가치를 두고 있는 것에 과감히 소비해 당당하게 꾸미는 것은 자신에 대한 투자일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부끄러움(恥)은 나를 당당하게 만드는 것이 그저 남의 평가와 인정에 의해 결정되거나 명품 같은 물질적인 과시를 통해 충족될 수 있다고 여기는 현상을 지칭한 것이다. 부끄러움의 의미를 담은 恥자는 마음(心)에서 수치심을 느끼면 귀(耳)가 붉어지는 모습을 형상하고 있다. 수줍으면 얼굴이 빨개지고, 부끄러우면 귀가 빨개진다. 양심은 스스로의 잘잘못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맑고 밝은 마음이다. 양심에 거스르는 행위를 하면 저절로 마음이 찔리고 얼굴도 화끈거린다. 부끄러움은 양심 없는 것에 있지, 허름한 옷과 거친 음식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공자는 지혜를 갖춘 선비를 갈망하는 자라면 외물이 아닌 선한 마음에서 드러난 도(道)에 뜻을 두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매순간 내면의 선한 마음에서 길을 찾겠다고 노력하는 선비가 외물의 조건이 남보다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겉으로만 도에 뜻을 두고 있거나, 실천의지가 부족한 경우이다. 지혜로운 자는 내면의 마음을 중시하고 외면의 물욕을 경계한다. 도에 뜻을 두었다고 말하면서도 외부 사물에 쉽게 이끌려 변하니 안타깝다. 부끄러움은 내 마음의 생명력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반가운 증표이다. 부끄러움이 없다면 자율적인 힘으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는 절망이다. 부끄러움에 아파하며 부끄럽지 않기 위해 주어진 길을 바르게 걸어가야겠다는 실천의지는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지혜로운 인간의 최고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다. 고재석 성균관대 유학대학 교수

[아침을 열면서] 손님처럼 맞는 일상

날마다 반복되는 보통의 일. 일상은 대부분 지루한 반복이었다. 소중히 여겨지지도 않았다. 때로는 일상 자체가 삶을 옥죄는 밧줄 같았다. 끊어버릴 순 없지만 틈만 나면 벗어나려 꾀를 쓰기도 했다. 별 탈 없는 일상 속에서도 호시탐탐 탈출의 기회를 엿봤다고 할까. 그러던 일상이 근자에 소중해졌다. 일상의 회복도 간절해졌다. 매일 출근을 힘들어하다 퇴직 후 문득 지난 아침들을 그리워하듯, 친구가 멀리 떠나고 나서야 치고받은 시간의 온도를 되새겨보듯, 그저 그렇고 그랬던 일상의 힘을 새삼 깨워준 것은 팬데믹이다. 팬데믹이라는 지구적 위기는 삶의 다른 힘들도 일깨웠다. 무심히 지내온 사람들의 안부까지 물으며 무릇 곁들이 애틋해진 것이다. 그뿐인가 긴 방역의 고독 속에서 새삼 자기를 발견하거나 눌러둔 자기 계발을 더하기도 했다. 그토록 기다려온 일상의 회복을 이달 들어 조금씩 시도하고 있다. 팬데믹 이전과 똑같을 수는 없을 거라는 예측이 많지만. 그나날이 같은 날이라고 하품을 했던 팬데믹 이전의 일상도 실은 매일 다른 날이었다. 나날의 차이를 별로 못 느낄 만큼 어슷비슷 반복이라 평범함의 귀중함을 지나친 것이다. 아무튼 모두가 간절히 바란 일상을 되찾고 있지만, 이 또한 오래되면 평상의 지루함에 빠질 것이다. 틈만 나면 일상 탈출이며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 다시 몸을 뒤틀 것이다. 그럼에도 일상을 삼가 맞이하는 중이다. 먼 데서 오는 반가운 손님처럼. 회복도 단계적이라니 본래 삶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되찾는 초입이다. 돌파감염 같은 예측불허도 있어서 방역의 해방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터다. 그럼에도 이전의 일상을 조금씩 찾아가며 삶도 가꾸기 나름이라고 주변을 돌아본다. 우리에게 똑같이 주어진 것은 시간밖에 없으니 시간 잘 쓰기부터 다시 본다. 시간도 여럿이 내어야 더 즐거운 저녁의 표정들도 그려본다. 소소한 즐거움도 더 찾고 오늘의 것으로 만들어야 수수한 일상의 구석이 환해지니 말이다. 요즘 하늘에는 별이 없다고 쓸쓸해했던가. 한적한 공원 같은 데서 오래 올려다보면 별은 아직 거기 있다. 우주 어딘가에서 지구의 당신을 보고 있다고 반짝 눈을 맞추기도 한다. 가을이 지나가는 하늘을 보며 그리움을 부르듯 별을 불러보는 것도 마음 회복에 좋은 일이다. 지난날 함께 웃고 울던 사람을 잃은 입장이라면 성심껏 잘 보내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렇듯 떠난 영혼을 배웅하며 다가오는 것들을 새뜻이 맞는 것도 사람다운 세상의 일이겠다. 입을 막고 사는 동안 깊어진 일상의 발견. 사람과 삶의 귀함을 다시 느끼며 아침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평범한 나날이라고 시큰둥했던 일상을 손님처럼 맞이하다 보니 단풍 끝물이 한결 찬란하다. 조금씩 되찾는 일상의 소중함을 또 놓치지 않도록 나날이 마음을 새롭게 차려본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어릴 때 동화책을 사달라는 내게 어머니는 책에서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하면서 책을 사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이 말이 몹시 서운해서 나는 돌아서서 한참 울었다. 책 한 권보다 쌀 한 됫박이 더 소중했던 현실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이 말에 대한 해답은 내가 소설가가 된 뒤 평론집 『한국 문학의 위상』(김현, 문학과지성사, 1977)을 읽으면서 찾았다. 김현 선생은 이 저서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문학은 곧장 쓸모 있게 써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당장 무엇을 만들어 써먹을 수 있는 게 아니기에 문학은 인간을 구속하지도 억압하지도 않는다. 여기에서 쓸모 없다는 의미는 순수하다 또는 자유롭다와 통한다. 인간을 억압하는 건 인간에게 쓸모 있어 보이는 것들이다. 유용하기에 사람들은 아귀다툼해서라도 그걸 손에 쥐려 하고, 이 욕망으로 인간은 쓸모있는 것에 붙들려 자유로운 삶을 포기했다. 문학은 그 쓸모없는 눈으로 쓸모있는 걸 바라보며 쓸모 있음 뒤에 감추어진 허상을 투시한다. 그리하여 쓸모있는 것으로부터 억압당하거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 그 사슬을 풀고 자유로운 세상으로 나오도록 부추긴다. 문학으로 곧장 무엇을 만들 수는 없으나 문학은 그렇게 사슬을 풀고 나온 사람들에게 향기로운 삶을 만들도록 해준다. 이것이 문학이 가진 힘이다. 문학의 이러한 속내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문학이 쓸모없는 게 될 것이고, 이 향기를 맡은 사람에게는 문학이 그 어느 것보다 강한 삶의 지혜가 된다. 이것이 문학의 총체(總體)며 문학의 기능이다. 하늘 한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2044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 게 있다면 2044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것뿐이다 2044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의 가지 하나라도 2044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기꺼이 팔 한 짝을 2044 잘라 줄 마음 자세는 언제나 가지고 산다 - 도종환 시 가죽나무 중에서.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마지막 편에 가죽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벌판에 비뚤비뚤하게 자란 커다란 가죽나무 한 그루가 있다. 사람들이 쓸모없다며 내버려 둔 나무다. 쓸모없다고 여겼기에 이 나무는 오히려 제 결대로 잘 살아서 사람들에게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하며 천수를 누렸다. 죽죽 잘 자라 쓸모 있다며 사랑받던 나무들은 모두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잘려나가 목재로 사라졌다. 유용한 걸 많이 쥐어서 돋보이는 게 아니라 온전하게 결대로 사는 게 올바로 가는 길(道)이다. 이런 나무들이 함께 모이면 아름다운 숲이 된다. 김호운 소설가ㆍ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개고기는 잘못이 없다

지난달 27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주례회의에서 유기 반려동물 관리체계 개선 관련 대책을 보고받고, 이제는 개 식용 금지를 신중하게 검토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일부 대선주자도 인간과 정서적 교감을 하는 반려동물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개 식용은 사회적 폭력일 수 있다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동아시아, 특히 동이의 후예들이 활동한 지역에선 개를 가축으로 간주한 사례가 많이 발견된다. 맹자를 보면 닭과 돼지, 개와 멧돼지의 번식 때를 놓치지 않게 하면 칠십 넘은 노인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사면이 바다인 섬에서 물고기 음식이 발달하고,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곳에서 양고기 음식이 발달하듯, 산과 들이 많아 농경을 생업으로 삼은 사람들에게 가축문화는 자연스럽게 형성됐으리라 짐작된다. 다만 가축 중 소와 말은 농업과 전쟁에 필수적인 동물이라 함부로 도축ㆍ판매할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사로이 소와 말을 도살하는 것을 금지하고, 한성부가 이를 관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개고기는 백성들의 배를 불려주고 병을 치료해주는 민중의 음식이자 약으로 기능했다. 18년간 강진 유배를 간 다산 정약용은 당시 함께 유배를 떠나 흑산도로 보내진 친형 손암 정약전이 보낸 편지에서 짐승 고기를 전혀 먹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것이 어찌 생명을 연장하는 도리느냐며 질타한다. 섬에 들개(山犬)가 수천마리 있을 테니 그물이나 덫을 설치해 5일에 한마리씩 잡아 삶아 먹으면, 1년에 52마리를 먹게 돼 충분히 고기를 섭취할 수 있다고 권유한다. 또 조선시대 실학자 홍만선은 농업 관련 지식이나 일상생활의 지혜를 수록한 산림경제에서 약의 조제와 복약 금기 등을 기술하며, 개고기(狗肉)도 상세히 적었다. 사실 개고기 식용 금지를 주장하는 입장의 본질은 동물학대 반대도, 인간과 교감하는 개를 차마 먹을 수 없다는 감정의 문제도 아니다. 주장 이면에 내재해 있는 문화에 대한 치우친 태도가 핵심이다. 미국과 유럽의 Pets 문화가 유입되고 융합하면서, 익숙했던 문화와 가치적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동물학대 문제는 간과해서도 용납해서도 안 된다. 다만 자신이 지닌 삶의 방식과 문화인식을 중심이나 보편으로 간주하면, 다른 삶의 방식과 문화인식을 계몽의 대상이나 제거의 적폐로 여기게 된다. 문화에는 중심이나 보편의 잣대가 적용돼선 안 된다. 그러면 반드시 자신과 다른 상대의 문화는 옳음을 지향하더라도 천박하고 척결의 대상이 돼 충돌이 불가피하다. 주체와 객체의 다름을 존중하고 관계 속에서 새롭게 규정되는 주체를 전제해야,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변화하는 옮음을 인정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새로운 차이와 다름의 문화가 꽃필 수 있다. 개고기 식용 금지 문제는 대중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결정될 것이다. 문화의 형성은 그렇게 순조롭다. 비록 다수가 익숙했던 문화를 폐기하고 서양의 Pets 문화를 수용한다 할지라도, 다수가 옳다는 규정은 위험하다. 소수의 다름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20여년 전 국토훼손이란 명목으로 수천년간 이어져 온 매장 문화가 순식간에 화장 문화로 대체됐다. 한국 철학사상의 원형은 밝음에 있다. 밝음을 숭상해 반만년을 상장례에서 흰 옷을 주로 입었던 민족이, 이제 검은 옷을 입는다. 다른 종교ㆍ문화ㆍ사유 등과의 만남에서 익숙했던 것들이 공정하게 매도되지 않는 현상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의 근대는 그렇게 불공정했고, 여파는 여전하다. 다시금 문화의 공정한 만남과 융합, 그리고 창조를 기대한다. 개고기는 잘못이 없다! 고재석 성균관대 유학대학 교수

[아침을 열면서] “커피 나오셨습니다!”

독자들께서는 하루에 몇 잔의 커피를 드시는지 궁금하다. 필자는 두 잔 정도 마신다. 어느 통계를 보니 우리나라의 1인당 커피 소비량은 1.4잔으로, EU 다음 수준이다. 그래서인지 어딜 가나 커피를 마실 수 있다. 100원짜리 동전 넣고 빼먹던 커피 자판기는 사라진 지 오래다. 커피 품질이나 값도 장난이 아니다. 두 세 잔이면 교과서 한 권 값이다. 수업 때마다 커피는 한 잔씩 들고 오면서, 정작 교과서는 돈이 아까워 안 사는 학생도 있다. 커피 주문해놓고 기다리다 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말 커피 나오셨습니다!. 손님보다 커피가 대접을 받는 세상이다. 커피가 아무리 좋기로서니 커피 나오셨습니다!가 뭐람? 그뿐이 아니다. 만원이세요, 그 커피는 없으세요, 카드는 안 되세요, 아메리카노세요 이런 말들이 에스프레소처럼 내 입맛을 쓰게 한다. 아르바이트 하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 쓰지 말자 했더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손님들이 싫어한단다. 그런데 한국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외국 유학생들은 이런 말을 별로 안 쓰는 것 같다. 한국어능력시험 준비하며 배운 대로 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엉터리 존대어를 퍼뜨렸을까. -시-는 사람을 높여주는 표현법이니 제발 사람에게만 붙여 주기를 바란다. 프랑스에 이런 커피점이 있다고 한다. 손님의 주문 표현에 따라 커피값을 다르게 받는다. 어이, 커피 한 잔! 이렇게 주문하면 우리 돈으로 1만원을 받는다. 그런데 커피 한 잔 주세요! 하면 6천원, 안녕하세요? 커피 한 잔 주시겠어요? 하면 3천원만 받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커피 체인점이 이런 할인 이벤트를 한 적이 있다. 좋은 시도라 생각한다. 가끔 뉴스에 진상 고객이 소개되곤 한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사람을 전화로 대하는 콜 센터, 직접 대하는 은행 창구, 고속도로 통행료 접수 창구의 여성 직업인들이 언어폭력과 성회롱으로 상처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사랑합니다, 고객님!으로 시작하던 KT의 안내 목소리도 그래서 사라졌다. 사람을 상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들도 그래서 많이 힘들어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은 어떻게 느낄까? 이런 역지사지의 공감이 아쉽다. 서비스를 받는 고객은 왕이고, 서비스 제공자는 종이라는 생각은 이제 접어야 한다. 모두가 존중받아야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 그리고 이런 말도 자주 쓴다. 저한테 여쭤보신 분, 제가 호명하신 분, 제 이름은 김 자, 한 자, 솔 자입니다그런데 이런 말들은 남이 아니라 자신을 높여주는 표현이니 고쳐 써야 한다. 대박먹방김밥 등 한국어 낱말 스물 여섯 가지가 최근 영국의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표제어로 새로 올랐다고 한다. 우리 말과 글은 한류 문화의 씨앗이다. 우리에게 훌륭한 말과 글이 있음을 자랑스러워 하며 잘 가꿔나갔으면 한다. 사물보다 사람을 존중하고, 나보다 남을 존중하는 배려의 말들이 우리 삶 속에 넘쳐나기를 기대하며, 독자들께 영화 말모이 시청을 권한다. 이의용 전 국민대 교수(생활커뮤니케이션연구소장)

[아침을 열면서] 연다는 것

연다는 것. 폭이 매우 넓은 표현이다. 시간과 공간과 관계 같은 인간사부터 천지개벽처럼 우주의 일에까지 쓰이는 까닭이다. 그뿐인가 한 세계를 열었다는 등 예술과 학문의 개화니 개척에도 두루 쓰인다. 아침을 열면서에 따라나온 생각 열기다. 아침을 연다고 하니 하루의 개시도 더 신선해진다. 시작이 좋으면 하루가 좋을 수 있고, 그런 날이 여일하게 이어지면 일생이다. 예부터 마당을 정갈히 쓸며 아침을 열어온 것도 그런 생의 마중이 아니었을까. 어머니들이 아침 든든히 먹여 내보내는 것 역시 하루 개시에 대한 무언의 응원일 것이다. 흔히 마음에도 연다는 표현을 쓴다. 거기서 시작에 대한 일종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우선 내 마음을 열어야 상대도 열 준비를 하는 것. 그렇게 상대를 더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서로 열어 보임으로써 소통의 길도 훤히 트는 것이다. 물론 마음을 열더라도 여는 정도의 넓이나 깊이에 따른 이해의 심급은 달라지겠지만. 귀도 연다는 표현을 입을 때가 많다. 여닫을 수 없는 귀를 연다고 하면 어떤 태도를 함축한다. 귀를 여는 게 곧 마음을 여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귀를 여는 것은 무엇보다 귀담아듣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내포한다. 상대의 말부터 경청해야 마음을 여는 의미도 사니 말이다. 경청의 자세는 남의 말 듣기보다 내 말하기 바쁜 세상이라 점점 귀해 보인다. 귀는 둘이요 입은 하나임을 익히 알 건만, 잘 듣기만도 그리 쉽지는 않은 것이다. 귀를 여는 것은 세상 만물의 말도 듣는 일이다. 풍진 세상에 나와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뭇 생명의 말을 듣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오늘 아침 길에 나서며 무엇을 처음 만났는가. 맨 먼저 얼굴에 닿은 게 삽상한 가을바람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하루를 같이 여는 자동차라고 할 수도 있겠다. 늘 같이 아침을 여는 세상의 많은 동행들 수고 속에 일상이 돌아간다. 연다는 것을 톺아보니 새삼 넓은 의미를 발휘한다. 그만큼 무엇인가를 잘 연다는 것은 큰일이다. 특히 새로움을 열고 싶다는 것은 간절해서 더 어려운 일이다. 어느 분야나 새로움이 양식인 세상에 그 새로움을 열어내기가 점점 힘든 것이다. 글쓰기만 봐도 새로움에 대한 열망이 강할수록 무력감이 커진다. 게다가 자기 복제에 대한 두려움까지 데려오기 일쑤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을 또 시작하는가. 쓰기를 닫고 싶다가도 쓰기로 다시 아침을 연다. 무릇 여는 것은 새로운 출발이다. 한 세계를 여는 것도 거기서 비롯된다. 마음 열기로 좋은 연을 만날 수 있고, 귀 열기로 좋은 작품을 얻을 수 있다. 여는 자세를 견지할 때, 바람의 말이나 외진 고샅의 신음도 들을 수 있다. 그것이 어려워도 잘 열면 잘 나가니, 직전의 고역쯤은 일용할 양식이다. 연다는 것, 그 새삼스러운 귀띔과 바람에 설레는 가을 아침이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거꾸로 가는 ‘생각의 시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인간의 조건으로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를 제시했다. 노동은 먹고살고자 하는 일, 작업은 질 높은 삶을 위해 하는 창조적인 일, 행위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기 위해 하는 행동을 말한다. 이 가운데 노동과 작업은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하는 일이며, 행위는 수많은 사람으로 구성된 오늘날 사회에서 서로 의견을 내놓고 소통하는 일로서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행위에서의 소통은 서로 같은 생각을 이루는 게 아니라 각기 다른 의견을 가지고 조화를 이루는 다원화사회(多元化社會)를 일컫는다. 이것이 곧 우리가 인간임을 나타내는 조건이다. 인간다운 삶과 정치적 삶은 이런 행위로 말미암아 만들어진다. 지금 우리는 이와 반대로 가고 있다. 자기 목소리를 감추거나 포기하면서 같은 의견으로 통일된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다른 목소리를 내면 설득하거나 응징하며 동질성으로 다듬어 집단 속으로 끌어들인다. 다른 목소리를 내고 싶은데도 외톨이가 되는 게 두려워 같은 목소리를 내야만 살아가는 세상이 됐다. 옳고 그름으로 소통하는 게 아니라 내 편 네 편으로 가르고 내 편이 하는 일은 무조건 정당하며 상대편이 하는 일은 옳은 일도 그르게 조작해서라도 삭제 시켜야 한다. 이렇게 나뉜 틀(frame)에 들어가지 않으려면 침묵해야 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 해야 하는 행위가 사라지고 먹고살기 위해 다른 동물들도 하는 노동과 작업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그런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수많은 철학자가 이 명제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눈부시게 진보한 21세기에 이르러 생각하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늘어 간다. 머리 아프게 이것저것 고민할 필요 없이 만들어준 틀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힘들이지 않고 주류에 편입하며 일정한 지분의 권력까지 챙겨 큰소리칠 수도 있다. 이 빠르고 쉬운 지름길을 두고 누가 힘들게 에움길로 가려고 하겠는가. 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정치인들은 눈치 빠르게 이 달콤한 지름길을 맛깔스럽게 요리해서 제공한다. 그런 지름길을 만들면 쉬 동조자를 모아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모두 정치인이 되거나 정치인의 추종 세력이 돼버렸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편에 5E96人雖不治5E96(포인수불치포) 尸祝不越樽俎(시축불월준조) 而代之矣(이대지의)라는 말이 있다.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고 해서 제사장이 제사를 내버려 둔 채 주방에 들어가 요리사를 대신해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각기 제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함에도 마치 내가 다 할 수 있다는 오만으로 내 일을 팽개치고 이 일 저 일 남의 일에 참견하면 조화와 질서가 무너진다. 김호운 소설가ㆍ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동굴에서 광장으로

나는 말 많은 사람을 말다공증 환자라고 부른다. 그는 상대방의 관심이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감정을 쏟아내기에 바쁘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피한다. 남을 가르치거나 영업을 하는 사람 중에 그런 이들이 많다. 소통을 가르치는 나조차도 남들에게 그렇게 할 때가 있다.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내가 대화를 주도할 때가 잦다. 그런가 하면 묵언 수행자도 있다. 도무지 말이 없다. 듣기만 한다. 말을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답답하기 짝이 없다. 듣기만 하니 두려울 때도 있다. 그래서 소통을 가르칠 때 토킹스틱이란 걸 자주 사용한다. 토킹스틱은 작은 막대다. 여럿이 둘러앉아 어떤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다 보면, 말다공증 환자가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한다. 그때 토킹스틱을 꺼내 그 사람 앞에 놓는다. 이제부터 말할 사람은 토킹스틱을 자기 앞에 옮겨놓고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그러면 말다공증 환자들은 토킹스틱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게 된다. 덕분에 목소리 작은 사람, 말주변 없는 사람, 숫기없는 사람 앞에 토킹스틱이 놓인다. 회의 때 토킹스틱을 이용하면 골고루 발언할 수 있다. 토킹스틱은 물병 같은 걸로 대신해도 된다. 말하기, 듣기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남에게 도움을 주고, 남으로부터 도움을 얻으며 살아간다. 남으로부터 도움을 구하는 기술이 말하기, 남에게 도움을 주는 기술이 듣기다. 이 두 가지를 잘해야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 말하기, 듣기에도 유형이 있다. 말하기, 듣기로 X, Y축을 만들면 4가지 유형이 나온다. 첫째, 말도 하고 듣기도 균형적으로 하는 사람. 둘째, 말은 안 하고 듣기만 하는 사람. 셋째, 듣기는 안 하고 말만 하는 사람. 넷째, 말하기도 듣기도 안 하는 사람. 첫째는 광장형. 내 이야기도 하고 남 얘기도 듣는다. 둘째는 정보원형, 또는 묵언 수행자. 내 이야기는 안 하고 남 얘기만 듣는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관계가 생기지 않는다. 셋째는 마네킹형, 또는 말다공증 환자. 내 얘기만 하고 남 얘기는 안 듣는다. 쇼윈도 안의 마네킹처럼 다른 사람은 다 나를 아는데, 정작 나만 나를 모른다. 넷째는 동굴형. 말하지도 듣지도 않고 소통을 거부한다. 나는 과연 어느 유형에 가까운지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다. 말하기와 듣기에 균형을 이루는 광장형이 되면 좋겠다. 그런데 그 균형이란 게 반드시 5대 5로 말하라는 건 아니다. 상대나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떤 때에는 불가피하게 묵언 수행자가 돼야 하고, 어떤 때에는 불가피하게 말다공증 환자가 되기도 한다. 부모와 자녀는 2대 8이 좋다. 그러면 상사와 부하, 상담자와 내담자, 고객과 봉사자, 교사와 학생은 몇 대 몇이 좋을까? 상대방이 좋아하면 된다. 상대방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말다공증 환자가 돼주자. 중요한 건 동굴에서 광장으로 함께 나오는 것! 이의용전 국민대 교수ㆍ생활커뮤니케이션 연구소장

[아침을 열면서] 인생 올림픽의 필승 조합

홍수ㆍ화재ㆍ폭염 등 전 세계적인 이상기후로 지구촌 곳곳이 몸살을 앓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폭염 한가운데서 힘겨운 여름을 보냈다. 코로나19 유행으로 폭염 속에서도 마스크를 벗을 수 없었던 이중고가 더 긴 여름을 실감하게 했다. 그 사이 2주간의 도쿄올림픽 중계는 높은 단계의 사회적 거리두기 탓에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던 학생들이나 어른들에게 그나마 시원한 볼거리와 모처럼 마음 모은 응원으로 속풀이 같은 심리적 치유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올림픽을 비롯한 많은 국제적 스포츠 축제는 세계 여러 나라 선수들이 인간 신체와 정신력의 한계를 극복하는 이야기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실화로 쏟아져 나와 답답한 일상을 환기시켜주고 긍정적 자극을 준다. 이번 도쿄올림픽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선수는 브라질의 서핑 금메달리스트 이탈로 페헤이라가 아닐까 한다. 어릴 때 어부였던 아버지의 스티로폼 생선상자 뚜껑을 타는 것으로 서핑을 시작했다는 그는 올림픽 결승까지 얼핏 불운의 아이콘처럼 보였다. 올림픽 출전권 딸 때는 여권과 비자를 도둑맞고, 태풍 탓에 우여곡절 끝에 겨우 이미 시작한 경기 시간에 도착, 입고 간 청반바지를 그대로 입고 친구 보드 빌려서 예선을 치렀다고 한다. 그런 그가 올림픽 첫 경기에서 자기 보드가 두 동강이 나 또 다른 보드를 탔다. 페헤이라는 결승에서 어릴 때부터 잘 키워진 서퍼였던 강력한 경쟁자를 누르고 우승했다. 좋은 파도를 타겠다고 시간을 보냈던 경쟁자와 달리, 파도를 고르지 않고 자기만의 경기를 했던 그의 파란만장한 올림픽 여정은 올림픽 공식 트위터에 만화로 소개됐다. 정말 만화 같은 일이다. 한쪽 팔을 상어에게 잃고도 서핑으로 월드챔피언이 되었던 서퍼 배서니 해밀턴의 삶을 영화화한 소울 서퍼가 생각난다. ?즐기는 자와 포기하지 않는 자가 결합된 최고의 스포츠선수로 기억될 두 서퍼 이탈로 페헤이라와 배서니 해밀턴. 이들의 남다른 정신력과 투지는 이들만의 것이 아니다.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 저절로 주어지는 신의 선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결과를 얻기까지 그 과정 안에는 연습과 시간이라는 두 가지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승 조합이 있다. 올림픽이 많은 감동을 전해주는 것은 그곳이 필승 조합의 결과를 보여주는 향연의 장이기 때문이다. 연습과 시간. 이 두 가지는 우리 삶에 남다른 내공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도구다. 나이가 젊든 아니든 스포츠를 떠나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고 숙련하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속도와 효율에 대해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우리의 사회문화적 인식 속에서 긴 시간 연습하고 숙련하고 훈련하는 과정이 조급함과 조바심을 줄 수 있지만, 이러한 과정이 필요한 일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는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그런 시간을 기다려줄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그것이 디지털 사회 속에서 인간을 진보하게 하는 힘을 발전하는 또 다른 축의 아닐까 한다. 전미옥 중부대 학생성장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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