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필자가 탔던 지하철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객차 내부는 착석한 승객과 입석 승객의 숫자가 엇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한눈에도 70대쯤으로 보이는 큰 덩치의 백발 노인이 탑승한 뒤 경로석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경로석에는 노인들 사이에 중장년쯤으로 보이는 작은 체구의 승객이 한 명 있었다. 백발 노인은 그 사람 앞에서 “어른이 앞에 서 있는데 왜 경로석에 앉아 있느냐”라면서 시비를 걸었다.
처음에는 앉아 있던 승객이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주변 승객들이 들으라는 듯 백발 노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급기야 ‘배운 것도 없는 어린 놈의 자식’이라는 등 거친 언사를 쏟아내자, 이번에는 앉아 있던 승객도 지지 않고 자기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다며 응수했더니 심한 욕설이 난무하는 말싸움이 돼 버렸다. 주변 노인들이 말려도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앉아 있던 승객이 자기 주민증을 꺼내 보이며 “내가 보기에는 염색해서 그렇지 XX년생이다. 너는 몇 년생이냐? 네 주민증 한번 까봐라” 했더니 객차 안의 승객들 시선이 일제히 그 백발 노인 쪽으로 쏠렸다. 그러자 백발 노인은 갑자기 바닥에 드러누워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십중팔구 자기보다 더 나이가 많았으리라.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는 자신의 감각을 기준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것에서 온다. 하지만 객관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감각이란 신뢰할 수 있는 척도가 전혀 아니다. ‘착시현상’이 대표적이다. 똑같은 크기의 옷이라도 가로 방향 줄무늬보다 세로 방향 줄무늬가 더 키를 크게 보이도록 만든다.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퇴역 군인들을 대상으로 장기간에 걸쳐 추적 조사를 한 보고서가 발표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군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전투 경험담이 점점 강화되는 추세를 보였고 심지어 행정병이어서 전투현장에 없었던 군인들마저 그런 경향이 보고됐다. 즉, 기억의 왜곡이 일반적으로 관찰됐으며 대부분은 왜곡된 기억을 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현대물리학에서는 원자와 그 이하의 미시적인 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그런데 완전히 상반되는 두 상태가 한 시점에 공존할 수 있다는 양자역학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 세기에 걸쳐 유명한 논쟁이 있었다. 예를 들면 동전을 던지면 앞면 또는 뒷면의 두 가지 경우만이 나와야 하는데 앞면과 뒷면이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슈뢰딩거의 고양이’라고도 표현되는 양자역학의 모순점은 분명 우리의 감각 세계에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은 이렇게 되묻고 있다. “왜 인간의 감각과 언어가 척도가 돼야 하나?” 그래서 현대물리학은 양자역학의 모순점에 대한 공격에 이렇게 답한다. “Shut up, and calculate it!(닥치고 계산이나 해!)” 즉, 양자역학의 내용을 인간의 감각과 표현으로는 모순점을 도저히 해결할 수 없지만, 그건 인간의 문제이지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양자역학의 파동방정식은 현재 모든 전자제품의 제조에 전혀 오차가 없이 적용되고 있다.
즉, 내게 보이고 들리는 것이 모든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내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까지 고려해야 한다. 심지어 내가 알지 못하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겸손해져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그릇을 계속 키우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되새겨 보자.
최동군 지우학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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