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무제(無題)

이 글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고의적 자해로 인한 사망, 즉 섬뜩한 ‘자살’은 사회통념상 가슴 아픈 흉사의 주제이기에 제목으로 피하고 싶어 ‘무제’로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우리나라 자살자 수가 연간 1만3천여명인데 표준인구 10만명당 23.6명으로 평균 11.1명보다 두 배가 넘는다. 그래서 자살 시도자와 유족에 대한 예방과 치유의 사회학자나 심리학자의 영역이 아닌 행정가의 관점에서 2023년 제정된 ‘자살예방법’에 의거, 제5차 자살예방기본계획의 ‘자살 유족 긴급서비스’에 대한 관리 상황을 공유하고자 한다. 필자가 한국유품정리관리협회 최우선 과제로 오랫동안 추진해 오고 있으나 아직 미해결 사안인 ‘생활유품정리사’ 민간자격 인증과 한국표준직업분류 등재로 반듯한 직업인이 되는 유품정리의 절대적 필요성에 대해 언론과 강의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이에 웰다잉을 연계하는 장례업종 중에서 특히 바람직한 과제로 경비 걱정을 더는 후불제 상조와 ‘(사)웰다잉문화운동’의 역점 사업인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과 애도와 추모 장례문화의 사회적 가치에 공감해 유력 언론 오피니언에 기고하면서 삶의 어두운 한 면인 자살에 대한 연찬을 위해 보건복지부 산하기관 ‘한국생명존중재단’과 ‘서울시자살예방센터’ 그리고 지역별 정보를 담당하는 서울시 자치구 보건소 산하 ‘정신건강복지센터’ 등에서 간담회를 가졌다. 이들 기관이 주관하는 ‘유족 원스톱 서비스’, 대체로 자살 시도자와 유족 입장이 아니고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관심 밖의 영역이다. “나를 사랑해, 너를 기억해, 우리가 함께해“ 캐치프레이즈로 시행하고 있는 자살 유족 긴급 서비스 지원사업을 소개해본다. 고인과 함께 거주한 유족 대상 일시 주거비, 고등학교, 대학에 재학 중인 고인의 자녀 대상 학자금, 사체 검안비 등 사후 행정처리비, 미성년 후견인 지정신청 등 법률 및 행정처리, 사망현장 폐기물 처리 등의 특수청소비, 사별 기간 1년 이내 자살사망자의 배우자 및 사촌 이내 친인척의 정신건강 치료비, 이외에 자살 유족 심리지원으로 애도 상담 및 자조모임 등의 다변화된 시책이 있다. 자살 시도자가 이같이 잘 정리된 지원 서비스들을 알게 되면 부담을 덜 가질 수 있다는 또 한 번 불경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음은 필자만의 편견과 냉정한 단견이 아님을 부인해본다. 어찌됐든 행정기관은 모순되지만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들 지원사업에 대해 일선 행정기관 복지 담당 공무원들과 사회복지사들의 실무적 의견을 청취해 필요하면 이를 전달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서비스 지원에 간과한 점을 든다면 유족들의 상황이 각자 다르기는 해도 자살 사망자가 독립해 따로 사는, 특히 홀몸노인 경우 장례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으며 젊은 세대에서도 가출 등의 문제로 유족이 기피적인 경우 장례 지원이 우선되기를 지적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소견은 유족이 무빈소의 조용한 장례를 원하고 있고 무엇보다 갑작스럽게 닥치는 장례인 점에서 공영장례의 일환으로 경비가 저렴한 후불제 상조업으로 행정기관의 신뢰가 확보된 기업을 선정해 위탁하면 효율성이 높을 것을 것으로 이를 적극 제안한다.

[아침을 열면서] 문화재 개발 그리고 발목

“야~ 참 좋다. 여기 미니신도시 들어서면 아주 대박이겠어요.” 몇 년 전 전곡리 구석기 유적을 둘러보던 선출직 공무원 몇몇이 매우 아쉬워하며 한 말이다. 물론 농담이었겠지만 말이다. 전곡리 구석기 유적이 한탄강변의 경치 좋은 곳 77만㎡(약 23만평)를 차지하고 있으니 건설과 교통 정책을 담당하던 그들 입장에서는 미니신도시가 들어서기에 좋은 곳이었다. 만일 이곳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주먹도끼가 출토되지 않았다면 전곡리 유적 일대에는 진즉에 고층 아파트 단지가 빼곡히 들어섰을 것이다. 문화재가 개발의 발목을 잡는다는 인식이 팽배한 요즘은 23만평은커녕 2, 3평도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래서 그때 (1979년) 전곡리 구석기 유적의 경관을 보존하기 위해 너른 면적을 사적으로 지정한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더구나 사적으로 지정된 구역 내의 개인 땅을 국가가 모두 매입했고 경기도에서 전곡선사박물관까지 건립했으니 전곡리 구석기 유적의 발견과 보존은 ‘한탄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한 세계적인 문화재 활용의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파트가 들어서야 할 곳에 문화재가 보존된 땅을 가진 사람들에게 문화재는 그저 나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개발의 걸림돌일 뿐이고, 선출직 공무원들에게는 내 표를 깎아 먹는 애물단지일 뿐이다. 문화재, 개발, 발목의 세 가지 키워드로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문화재가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도심의 개발을 가로막는 과도한 규제의 원흉이라는 기사들로 가득했다. 지금의 시대정신이 문화재 보존만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시대의 변화와 요구를 등한시한 문화재 보존 정책이 결국 문화재는 개발의 걸림돌일 뿐이라는 인식을 만들었고 마침내 문화재 보존의 결정적 장면은 법원의 판결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국면까지 맞이하게 됐다. 그래서 여전히 개발 붐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개발과 보존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 문화재 정책은 어렵지만 중요한 과제다. 문화재를 파헤치며 아파트를 짓게 되더라도 애물단지가 사라져 속시원하다는 사람들보다는 내가 사는 아파트를 위해 사라진 문화재에 경의를 표하며 문화재들을 더 사랑해야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문화재 행정이 시행되길 바란다.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지금과는 또 다른 시대정신에 의해 아파트를 허물고 문화재 경관을 복원하는 그때를 대비한 백년대계의 정교한 문화재 정책이 등장하기를 꿈꿔 본다.

[아침을 열면서] 인간관계 생명론-감성 불공감

직관적이고 주관적이어서 나를 표현하는 데 충심인 예술의 분야는 다양하다. 예술은 그 다양한 분야에서 주체와 객체 그리고 여건에 따라 사람을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가 하면 비관에 빠지게도 한다. 그러나 그 다름을 구분하는 민감도 정도와 그 정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표현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언어에 대한 유전적 탁월성과 훈련의 배경 정도는 물론 문화적 배경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봄을 맞아 주변은 다양한 색깔로 치장될 것을 기대한다. 노란 색깔을 표현하는 형용어를 따져보면 잘 알 수 있다. 우리말은 ‘노리끼리’, ‘누리끼리’, ‘노르스름’, ‘누르스름’, ‘샛노란’, ‘누런’ 등 마음의 감정을 싣는 다양한 색표현이 가능하다. 상황에 따르는 색깔의 섬세한 차이의 구분이 어려운 문화는 ‘병아리색’, ‘유채꽃색’ 등 정형화된 피사체를 활용해 소통한다. 사실 이 정형으로 규정된 색은 심리적, 물리적 등의 상황 여건에 의해 색을 수용하는 객체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바른 뜻을 반영하지 못한다. ‘싱가포르 저녁노을(Singapore Sunset)’이라는 색은 그 객체의 마음을 대변할 수 있을까마는 싱가포르에서 일몰을 보지 못한 사람은 그 색에 의한 느낌을 공유하지 못할 것이다. 케이팝 아이돌이 한류를 이끌고 있다. 한류를 즐기는 세계인은 각자 그들의 음악을 다양하게 수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 감성의 다양함 속에 이르는 깊이는 각자로 하여금 김밥을 즐기거나 한국어까지도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강도를 주거나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정도 등 다양할 것이다. 타고난 문화예술의 감성과 수용성 정도에 따라 그 음악을 혼자 즐기거나 꼭 친구를 끌어들여 함께 즐겨야 만족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한류는 세계 어디에나 있는 ‘병아리’의 색으로 정형화되며 공감된다. 감성이 아닌 감성도 있다. 한류라는 트렌드에 자신을 띄워 그 흐름 자체를 즐기는 개체, 흐름의 부류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싶은 개체, 그 흐름의 부류에서 소외되지 않으려고 불가피하게 속하는 개체 등 문화 예술 자체보다는 사회 시스템이 중요한 개체도 있다. 예술적 감흥에 스스로가 행복할 정도로 감성과 수용성이 큰 공연이라면 삶의 질이 높은 사회다. 그러나 그 감성과 수용성은 내 형질보다는 주변에 의한 사회적 영향에 의해 조성된 것이라면 조용한 인위적 행복으로 그쳐야 한다. 나의 형질과 개성에 솔직해진다면 공연한 부추김으로 다른 사람의 감성을 힘들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에는 나의 본질과 정직함을 버리고 ‘따라오라!’나 ‘따라가자!’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없다.

[아침을 열면서] 남극 날씨와 극지연구 : 인내와 기다림의 시험

남극장보고과학기지는 지난 2월12일 준공 10주년을 맞았다. 10주년을 맞아 언론 인터뷰와 기념 행사로 기지도 분주한 한 달을 보냈다. 동시에 10주년은 기지가 건설된 지 10년이 됐다는 뜻이다. 노후 시설을 손볼 곳이 필요하고 초기보다 늘어난 방문 수요 대응과 안전한 기지 운영에 따른 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건설 공사를 진행 중이다. 사실 기지 현장에서는 10주년보다도 사업 진행을 위한 건설자재 해상하역이 2월에 가장 큰 현안이었다. 무려 1만4천784t 화물선에 가득 찬 건설자재를 20일 넘게 내리는, 기지 건설 이래 가장 큰 하역이었다. 하역업무에서의 핵심은 안전과 날씨 변화였다. 안전을 위해 기지에서는 한 달 전부터 하역 방법과 장소를 결정하고 공정에 따른 위험성을 평가해 안전 대책을 마련하고 사전 안전교육을 하는 등 안전에 온 힘을 쏟았다. 그 결과 22일간 이어진 하역 동안 단 한 건의 부상이나 사고 없이 무재해로 하역을 마칠 수 있었다. 또 다른 관건은 날씨였다. 지난 시즌 기지 앞 해빙(海氷)이 모두 깨져 나가면서 올해 해상에서 하역하는 것으로 전환하면서 우리 차대 임무가 된 상황이었다. 올해는 해빙이 모두 깨져 나간 2월 바다 위에 정박한 화물선에서 크레인으로 바지선에 자재를 내리고 바지선이 도착하면 다시 크레인으로 화물을 들어올리는 작업을 수행하다 보니 당일 날씨가 상황이 작업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2월, 특히 중순이 넘어가며 바다가 얼기 시작하면서 바지선을 밀어주는 보트 운항이 점점 어려워졌고 남극 대륙에서 공기가 내려오는 시기가 되면서 초속 25m가 넘는 바람이 불기도 했다. 날씨가 좋지 않고 바람이 세게 불면 작업이 중단됐고, 조건이 맞아 화물을 선적하고 기지 앞 부두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바람이 강해져 결국 작업을 중단하는 상황도 있었다. 기지에서도 주변 지역에 설치한 관측장비를 활용해 매일 기상예보를 하지만 대자연의 변화를 완벽하게 예측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속은 타들어 가지만 그저 날씨가 바뀌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어느덧 우리 차대가 남극 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5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당장은 월동대가 한국에서 받아온 임무에 매진하고 있지만 이제는 남극에서 무엇을 얻어가고 배워 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시기다. 그 첫째로 한 달간의 하역작업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인내와 기다림이다. 조급함과 서두름은 적어도 남극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인내와 기다림 속에서 안전하게 하역을 마칠 수 있었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많은 화물을 내리는 것도 가능했다. 기후위기로 남극 환경도 급변하고 있어 변화를 관측하고 예측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지만 극지 연구를 통해 해답은 한 번에 나와 주길 바라는 조급한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겪은 남극에서 해결과 목표 달성을 위한 방안은 노력과 오랜 준비 속에서 인내와 기다림이다. 남극에서 본 극지 연구는 긴 호흡으로 차분하게 오랜 기다림 속에 지속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일이었다.

[아침을 열면서] 대동회 풍속문화

이 글은 풍속학자의 견지에서가 아닌 행정인 시각에서 쓴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 필자가 1960년대 소년 시절 거주한 서울 한수 이남(漢水以南) 노량진 한강변의 마을에서는 정월 대보름경에 손없는 날을 택해 일몰 전 마을 뒷산에 위치한 서낭당(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신을 모셔놓은 신당)에서 주민들의 무병(無病)과 물놀이 사고, 액운(厄運) 방지 등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 제사인 당제(堂祭)를 지냈다. 동네 입구 가게집에 며칠 동안 장부를 놓고 주민들이 모금해 음식을 장만하고 어른들이 한복 두루마기 정장으로 제사를 지내는 일종의 토속신앙이다. 아이들은 음식 먹는 기대에 심부름을 하며 따른다. 제사 후에는 마을 마당에 모두가 모여 술과 음식을 즐기며 동네 한 해 일들을 상의하고 결정한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 안팎인 어려운 시대의 이야기이지만 우리 민족은 조상의 얼을 소중하게 지켜가는 혼을 가진 국민이라는 데서 값진 의미를 찾고 싶다. 필자는 지금 배나무골로 불리는 수원의 촌락형 마을에 50년을 거주하고 있는데 빠짐없이 해마다 정월 대보름경에 대동회 행사를 개최한다. 대동회는 마을 살림살이를 의논하고 통장 선출 등 주요 사안을 의결하는 자치적인 집회다. 옛적에는 마을의 안녕을 위해 동제(洞祭)를 지내고 난 이튿날 마을회관 등에서 대동회를 여는 것이 일반적이나 근자에는 동제 없이 부녀회 주민들이 음식을 직접 장만해 행사를 한다. 올해는 통장 이‧취임과 경비 결산 보고 등이 주요 의제였고 서로 설 명절 인사를 나누고 술과 식사를 들며 화합을 도모하는 데 큰 의의를 두고 있다. 통장 이‧취임식에는 외·내조의 역할이 큰 부인과 남편이 곁에서 같이 자리를 하고 아울러 한 해 동안 함께 마을 일을 돌보는 반장을 소개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임하는 통장에게는 노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선물 증정도 바람직한 조치다. 한편 새로 이사를 온 분들에 대한 소개는 주민들 간에 얼굴을 익힐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한편 따로 날을 잡아 상품을 준비해 윷놀이를 즐기는데 술과 음식은 물론이다. 시대와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풍속의 형태도 달라지고 있음을 반추해 볼 때 1970년대부터 행정기관에서 전국적으로 본격화된 반상회의 유래라고도 볼 수 있다. 이 같은 풍속문화를 소개하는 의도는 한마디로 주민의,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성격의 취지를 살려 이웃 간의 우애와 소통의 자리를 갖는다는 데 의의를 둔다. 필자도 도농복합형의 신도시 지역에서 행정기관장을 경험한 바 있어서인지 일선 행정 조직의 책임자인 동장이 방문, 인사를 통해 안면을 익히는 것도 필요하다고 여긴다. 이 같은 회합이 대부분 어른들이 중심이 되고 있는데 장차 마을의 중추가 될 청소년층도 함께 참여해 애향심을 고취하고 한편 자연스럽게 이웃을 모르고 지내는 도시 생활 세태에서 서로 소통과 친목을 도모하는 자율적 마을(동네) 풍속문화로 정착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에 제도적으로 대동회 육성 방안을 모색하면 어떨까 제안한다. 대동회는 다른 한마디로 가치 있는 전통이고 우리만의 아름다운 세시풍속이다.

[아침을 열면서] 100년 가게, 100년 박물관

지난 2월19일은 경기도에 소재한 박물관 미술관 121곳이 회원으로 활동 중인 (사)경기도 박물관협회의 창립 20주년 기념일이었다. 경기도박물관의 기념식장에는 20년 전 협회 창립에 한 뜻을 모았던 사립박물관·미술관 관장님들이 많이 참석했다. 우리나라 사립박물관계의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수십년간 시간과 돈을 써가며 집요하게 박물관의 가장 기본인 소장품을 모아온 수집가 정신이 살아있는 분들이다. 이분들의 헌신으로 차곡차곡 쌓여온 사립 박물관·미술관의 소장품은 우리 사회를 문화의 힘으로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하지만 세월은 흘렀고 많은 것이 변해가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의 사립박물관, 미술관들도 시대적 소명 의식을 가지고 컬렉터의 열정을 불태운 1세대에서 박물관이라는 가업을 승계하는 차원의 2세 경영 체제로 바뀌는 곳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사립박물관의 직계 자녀들에 의한 2세 경영을 바라보는 현실은 우려되는 부분들도 있다. 사립박물관 운영을 시간과 돈이 남아서 골동품이나 사 모으는 한가한 사람들의 소일거리로 폄훼하는 시각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가업 승계가 되지 않고 문을 닫는 사립박물관들이 늘어나고 있어 안타깝다. 지난 수십년간 국가가 전부 책임질 수 없었던 지역 문화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던 사립박물관의 순조로운 세대교체는 문화국가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다. 사립박물관의 전문 인력을 지원해 주는 정부 사업 심사차 설립자의 직계 자녀들을 심층 면접해 본 경험이 있다. 설립자 관장의 직계 자녀들을 박물관 직원으로 채용해 국가 예산을 지원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해 생긴 제도였다. 하지만 그때 만난 박물관 2세들은 부모 잘 만나 박물관이라는 사업체를 물려받는 소위 ‘금수저’들이 아니었다. 박물관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온 부모님의 열정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꿈도 미래도 희생해 가며 가업으로 박물관을 물려받겠다는 또 다른 차원의 열정을 가진 분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사립박물관들은 직원 채용이 매우 어려운 지방의 격오지에 위치한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립박물관이 부모의 뜻을 물려받겠다는 자녀들이 없으면 아예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립박물관 2세대들은 아예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지원을 받더라도 몇 차례 인력 채용 공고를 내도 해당 박물관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없을 때 마지막 단계에서 지원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열악한 환경의 사립박물관에 최소한의 인건비를 지원해 주는 것도 꼭 필요하지만, 문화 기관 운영자로서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라는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100년 가게 인증 제도라는 게 있다. 100년 이상 가게를 잘 유지해 달라는 염원과 격려의 제도다. 100년 가게처럼 존경과 사랑을 받는 100년 된 사립박물관, 미술관 보유국이 되기 위해선 현장의 깊은 속사정을 제대로 반영한 지혜로운 정책 시행이 필요할 것이다.

[아침을 열면서] 무전공 유감

우리 사회는 상대의 신상을 털어 나름대로 계열, 서열로 정리하는 일이 우선인 편이다. 협력이 요구되고 관계에 대한 정도 관리가 중요한 농경산업사회의 특징일 것이다. 이 ‘신상털기’는 산업사회의 경제활동과는 별도로 생활공동체로서의 인간사회에도 만연해 있다. 어느 집 자식은 어떤 학교, 어느 전공에 입학, 졸업했으며 현재 어떤 일을 하고, 경제적으로 잘 또는 못 살고 있고를 내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심지어 이 정보는 나의 일상보다 더 중요하다. 사회의 특성에 따라 신상털기가 중요한 주관적 성향인 주체의 상대로서, 신상털기가 중요하지 않은 객관적 성향이 있기 마련이다. 어차피 인간관계는 상대적이어서 터는 사람이 있으면 털리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털고 털리는 일에 대한 중요도의 깊이에 기인하는 것 같다. 터는 사람의 주관적 성향은 매우 강해 털어지지 않는 일을 참기가 어렵다. 털지 않고는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다. 인문의 특성인 주관과 직관이다. 털리기 일쑤이며 털리는 일이 대단한 일이 아닌 사람은 사람의 관계에 대해 크게 괘념치 않는다. 나를 털고자 하는 상대의 일이 너무 주관적 비교라서 내 머리에 담기가 어렵고 복잡하다. 변함없이 돌아오는 날씨의 변화에 여러 작물을 경작하고 수확하는 일이 쉽다. 과학의 특성은 객관과 계량이다. 이동과 이주로 목축을 하는 노마드와 달리 정착으로 작물을 경작하는 농경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는 신상을 털고 사는 주관적 사회에 가깝다. 대부류 집단으로서 국민의 정서는 때때로 규정과 법보다 중요하다. 객관화된 노마드의 서구 사회와는 차이가 크다. 이 주관에 의한 인문적 정서는 조선 왕조를 500여년이나 지속하게 했다. 사농공상의 사회적 서열은 뚜렷했으며 이에 근거한 신상털기는 여전히 현재의 생활에 남아있는 듯하다. 인문적 성향과 과학적 성향은 타고난 유전자에 기반하며 발현과 후성적 습관 및 훈련에 의해 구분된다. 각자는 나름대로 어떤 부류인지 스스로 짐작은 한다. 그러나 아직 개체는 애매하지만 오히려 효율적이고 심오한, 그래서 언제나 후성적으로 빛을 발할 수 있는 스스로의 자질에 대한 자각이 어려운 사회 속에 가둬져 있다. 그래서 자율 전공, 무전공, 융복합 전공이 더 어렵다. 그중에는 수능 점수라는 신상털기로 구분되는 학원의 배치표에 의존해 전공을 정하기도 한다. 전공과 무전공이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는 대치적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아직 신상털기의 사회에는 여전히 전공과 무전공이 다르기 때문이다. 디지털과 빅데이터 그리고 인공지능의 시대에 고정된 판박이의 전공지식으로 무장해 사회에 기여하기 또는 두각을 나타내기는 쉽지 않다. 전공을 정하지 않는 자율 기반의 학업은 스스로 무한한 잠재성을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인간의 뇌는 그 씀씀이에 대해 유전적 다양성보다 더 큰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후성적 변화요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관계 그 자체가 고정적인 틀이 없기 때문이다. 고정적 전공이 아닌 잠재적 변화의 요인이 적용된 능동적 호기심을 만족하는 과정에서 인류의 다양한 문명이 발생했다. 무전공의 잠재성을 보장하는 사회에 더 이상 신상털기식의 서열과 구분은 없어야 한다.

[아침을 열면서] 남극의 소리

남극에 머물러 좋은 점을 꼽으라면 필자는 두 가지를 뽑는다. 첫째는 자연의 소리를 마음껏 들을 수 있는 고요함과 둘째는 벌레가 없다는 점이다. 남극이라 해서 미생물까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육지에 있을 때처럼 날벌레나 기어다니는 벌레는 없다. 만약 기지 안이나 주변에서 발견된다면 외래종 유입에 따른 비상 상황으로 반드시 벌레를 잡아 박멸하고 표본 처리해 국내 연구자에게 분석을 의뢰해야 한다. 남극에 처음 와서 느낀 점은 조용하다는 점이다. 물론 기지가 바쁘게 돌아갈 때는 작업을 위해 운행하는 중장비 소리, 우리 생명 유지를 위해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발전기 소리 등으로 생각만큼 조용하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해가 지지 않는 여름 밤이라 기지 일과 시간이 끝나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건물에서 벗어나 기지 앞 부두 및 바닷가 갯바위 위에 가만히 앉아 있거나 기지 영내를 벗어나 사람이 만든 시설이 전혀 없는 곳에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적막한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 고요함은 오래가지 못한다. 가만히 앉아 귀가 그 고요함에 적응하면 남극이 결코 조용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꽥꽥 거리며 해빙 위를 지나가는 아델리펭귄의 울음소리, 웨델물범이 낑낑대며 기어가는 소리, 보이지 않는 해빙 밑에서 날 것 같은 깊은 울림의 얼룩무늬물범이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되면 저 펭귄 무리 중 누군가가 바다에 뛰어들면 곧 물범에게 잡아먹힐 운명임을 소리로 예측해 볼 수 있다. 더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전혀 소리가 없을 것 같았던 쌓인 눈이 녹는 소리도 들린다. 뽀드득 하면서 무언가 갈라질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살짝 눈이 주저앉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남극을 생각해보면 춥고 바람이 세고 하얀 눈으로 뒤덮인 광경을 대개 떠올린다. 그러기에 남극을 체험하는 시설의 대부분은 이런 추위와 눈으로 느끼는 남극을 재현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시각과 촉각으로만 남극을 느끼게 되지 싶다. 아직 남극에서 여름을 살고 있어 이런 평온한 생각을 할 수도 있으나 백야 기간 남극은 소리로 접해도 충분할 가치가 있는 고요 속에 자연의 화성이 살아 있는 공간이다. 우리나라의 극지연구소 격인 독일의 알프레드베게너연구원(AWI)은 극지방 기후변화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2년 동안 남극과 북극에 설치한 수중마이크로 해저 환경과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를 녹음한 극지방 소리를 온라인으로 들을 수 있도록 해뒀다. 춥고 하얗다고만 느끼던 극지를 이제 소리로도 접해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아침을 열면서] 조장행정의 가치

장례의례의 실질적 마무리인 생활유품정리는 고인이 생전에 사용하던 생활물품 및 거소의 정리다. 2018년 11월 창립한 한국유품정리관리협회의 설립 목적은 유품정리업의 행정적 제도화를 마련해 우리 사회에 유품정리업을 반듯하게 정착시키는 데 있다. 이에 따른 첫 번째 과제는 유품정리업의 필요성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 및 전문적인 서비스와 편의 제공으로 유족이 믿고 맡길 수 있는 기능인을 양성해 신직업군으로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는 생활유품정리사의 민간자격 등록과 아울러 한국표준직업분류의 등재에 있다. 유품은 생활용품조차도 쓰레기가 아닌 고인의 혼이 담긴 물품인 관점에서 반듯한 정리를 통해 자손이 끝까지 효를 행한다는 마음가짐은 교육적 측면에서도 가치가 있다. 생활유품정리업은 업무 성격과 비즈니스 측면에서 최대 협력체가 장례업종이다 보니 상장례전문학회, 장례 및 상조 관련 기관‧단체, 웰다잉 관련 단체, 장례전문 언론인 등과 교감을 갖게 된다. 이들 단체의 공통적인 과제와 이슈가 ‘죽음’이라는 점에서 매우 조심스럽지만 삶의 중요한 문제이므로 웰다잉과 연계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생활유품정리업의 필요성에 대해 장례업계는 물론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공감하고 적극 성원하고 있음에도 직무성격상 소관부처인 보건복지부는 관련 법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명시돼 있지 않아 부적격하다는 단편적인 판단이다. 협회가 4년에 걸쳐 추진하고 있는 이 과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어 다음 단계로 발자국을 떼지 못하고 있다. 법규 적용의 소극적인 행정 탓에 고인 관련 사안을 다루는 유품정리업에 진전이 없는 현실을 지금으로서는 답답하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외에 행정적 판단의 재량 문제를 단면이지만 몇 가지 사안을 예시해 소견을 피력해본다. 먼저 행정의 근본적인 가치를 밝혀두고 싶다. 행정은 사람답게 살게 만들고 기업은 비즈니스답게 효율적으로 경영하고 보호받을 수 있도록 조장하는 데서 실현돼야 한다. 법규의 명시 여부를 우선하는 일변도가 돼서는 안 되며 길을 열어주고 포용력을 가질 때 행정의 가치가 그 의의를 갖게 한다. 또 법규도 시대 변화에 따른 사회 환경에 부응하도록 신속하게 보완 및 개정을 통해 효율성을 제고시켜 나가야 한다. 이는 입법기관인 국회 그리고 행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이자 의무다. 2025년 초고령사회를 목전에 두고 전체 가구의 34.5%를 차지하는 1인 가구, 특히 홀몸노인이 급증하고 있는 우리에게 곧 ‘언젠가는 내가, 나의 가족이 마주해야 할 일’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유품정리업을 통해 현장과 유족을 가까이에서 접하는 바에 의하면 현재 1인 가구 무연고 사망자에 대한 행정관리는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다만 지자체에서 무연고 사망자를 고독사로 추정하는 실정으로 법적으로 확립된 개념의 구분이 필요하다. 무연고 사망자에 대해 유가족이 시신을 거부, 기피할 때 보건위생상의 위해를 방지하고자 장례비를 지원하는 데 대해서도 무연고를 양산하는 사회적 책임 문제를 먼저 숙고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법규와 행정은 사회구조와 시스템을 실용성 있고 조화롭게 조장하는 데서 더욱 빛을 발하고 그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아침을 열면서] 시드니에서 만난 이점순 여사

호주 시드니의 파워하우스(Powerhouse) 박물관은 1880년대에 지어진 시드니 최초의 전기발전소 건물을 개조해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과학, 기술, 예술, 디자인, 역사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그야말로 호주를 대표하는 박물관이다. 특히 과학과 예술의 만남을 주제로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시각으로 과학을 바라보는 감각적인 전시를 자주 개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발전소 건물에서 착안한 명칭인 파워하우스 뮤지엄은 이제 그 자체로 하나의 브랜드가 돼 그야말로 호주 문화의 ‘파워하우스’ 가 됐다. 파워하우스 박물관에 들어서자 1785년 제작돼 런던의 화이트브레드 양조장에서 무려 102년 동안 현역으로 활약하던 ‘볼튼 앤 와트’ 엔진이 시선을 압도했다. 그 유명한 제임스 와트가 만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회전식 증기 엔진으로 산업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박물관에 기증된 후 수리를 거쳐 지금도 여전히 잘 작동되고 있다는 이 위대한 인류의 산업 유산 앞에서 잠시 넋을 잃고 있던 나를 호주 박물관계의 유일한 한국인 큐레이터 김민정씨가 안내한 곳은 ‘1001’이라는 상징적인 숫자의 특별전(展)이었다. ‘1001’은 파워하우스 박물관의 50만점에 달하는 소장품 중에서 시대와 문화를 대표하는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 1천1점을 선정해 개최한 특별전인데 전시실 이전 및 개편 작업을 위해 장기간 휴관을 앞두고 펼쳐진 마지막 전시였다. 이곳에서 특별히 김민정 학예사가 안내한 곳은 도자기 파편을 퍼즐 맞추듯 이어 붙이고 금으로 틈을 메워 새롭게 재창조하는 작업으로 유명한 이수경 작가의 작품 ‘번역된 도자기’ 앞이었다. 김민정씨의 설명에 따르면 파워하우스 박물관의 50만점이 넘는 소장품 중 사실상 유일한 한국 작품이라고 한다. 이수경 작가의 작품 앞에는 어머니 이점순 여사를 기억하기 위해 딸 김문주 씨가 2019년에 기증한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 시절 우리 어머니들의 흔한 이름의 상징과도 같은 이름 ‘점순’을 뜻밖의 장소 시드니에서 만나니 가슴 한 곳이 찡했다. 내가 시드니에서 이점순 여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왜 한국 것은 없나요”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됐다. 김민정 큐레이터의 지인인 김문주씨가 파워하우스 뮤지엄을 둘러보고 난 후 김민정씨에게 한 첫 질문이었다고 한다. 그 질문을 시작으로 몇 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마침내 파워하우스 50만점의 소장품 중 첫 번째 한국 작품이 됐다고 한다. 어머니를 기리는 딸의 소중한 기억이 함께 기증돼 더욱 의미가 있어 보였다. 바야흐로 전 세계에 ‘K-Culture’의 바람이 불고 있다. 자랑스럽기도 하면서 언제 이 바람이 끝날지 일말의 걱정이 있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 대중문화로 시작한 한류의 바람이 이제는 다양한 분야로 확산했으면 하는 기대를 품은 노력들이 다각도로 펼쳐지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또 다른 ‘이점순 여사’를 만날 수 있을 때 비로소 한국문화의 저력을 바탕으로 한 튼튼한 K-컬처의 나무가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아침을 열면서] 인간관계 생명론-물 흐름, 사람 흐름

‘장강의 뒷 물이 앞 물을 밀어내니(長江後浪推前浪)…’는 옛 사람이 새 사람으로 바뀌는 때(一代新人換舊人)의 타당성을 설명할 때 인용하는 어구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인 바다로 물이 밀려가는 이 흐름은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중력의 법칙이다. 테스토스테론의 활동이 왕성한 나이를 시대의 중심으로 보자면 그 나이 전후의 세대 교체는 물의 흐름처럼 자명해진다. 세포분열 과정에서 완전히 복제되지 못하는 염색체 말단의 반복적 염기서열 텔로미어는 결국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짧아질 수밖에 없어 노화는 막을 수 없는 현상이 된다. 나름대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보지만 세포분열의 가용성 저하는 어찌할 수 없는 생명의 법칙이다. 결국 장강의 앞 물이 되는 수밖에 없다. 논리와 합리를 앞세워 자신의 주장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할 때 가장 타당하게 인용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이 매개되지 않는 자연의 법칙을 인용할 때 자신의 시각을 고집하지 않는 ‘객관적’ 표현이 되기도 한다. 거시적 시각에서 볼 때 이 자연의 흐름은 잘 보이지만 당사자가 보는 미시적 시각은 꼭 그렇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하상 등의 지형 변형 등 변곡점에서는 물의 와류가 발생해 ‘앞 물’과 ‘뒷 물’은 순서가 없어진다. 결국 ‘앞 물’과 ‘뒷 물’의 혼조 끝에서 바다로 먼저 밀려 나가는 물이 ‘앞 물’이 된다. 이 변곡점은 때로 특정한 인간의 출현에 의해 그 정도와 빈도가 다양하게 만들어진다. 특정한 정치적 리더가 내세우는 치산치수 노력으로 물은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지만은 않게 된다. 다수를 위한 인간 스스로의 애씀이 때로는 장강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도록 하며, 이로 인해 ‘앞 물’과 ‘뒷 물’은 서로 할 말이 많아진다. 세포분열에 따라 짧아지는 텔로미어는 이를 저항하는 텔로머라제의 발현 정도에 따라 개인적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또 정신세계의 독특함 또는 생활습관이나 훈련으로 후성적 인지 및 각성 능력에 따라 개인의 노화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청년기를 지나면서 테스토스테론의 활성에 따라 동일한 연령이어도 그 지배욕과 호전성이 다르게 나타난다. 즉, 사회에서의 물 흐름과 시간 흐름은 미시적인 각자의 시각이 중요해진다. 어느 사회에서나 인간이 만들어내는 정치적 분위기와 경향성은 물 흐름을 복잡하게 만든다. 자연적이고 거시적인 객관의 법칙보다는 인위적이고 미시적인 주관이 법칙을 주장하고 싶은 호전적인 테스토스테론의 기능이 다른 호르몬의 조화를 누를 때 흔히 발생한다. 물의 흐름이 복잡해지는 이유는 사회를 오히려 간단하게 간주하려는 움직임 때문이다. 호전적인 사회 또는 부류일수록 간단하고 단순한 테스토스테론을 움직이려고 한다. 쉽게 끓어오르며 쉽게 따라와 준다. 쉽게 통계적 다수가 돼 주며 쉽게 동류를 만들어준다. 그러나 가족에서는 그 테스토스테론으로 움직이는 방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 가족의 전통과 의미가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기도 하지만 여성 몸속의 다양한 호르몬이 관리하는 가정의 물 흐름은 일관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의 물 흐름에 참여하기 전에 내 가정의 물 흐름을 먼저 보는 게 내 가정을 도와주는 일이다.

[아침을 열면서] 남극의 총무

‘남극의 쉐프’란 영화가 있다. 월동연구대 면접 때 어떤 계기로 남극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묻는 말에 대해 많이 듣는 답 중의 하나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갑작스럽게 일본 남극기지에 요리사로 파견돼 요리에 대한 고민, 고립된 환경에서 각각의 개성을 지닌 대원들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며 남극에서 생활상을 전한다. 현재 함께 지내고 있는 우리 조리대원도 영화에서처럼 매일 대원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제한된 식자재로 한국에서 느끼던 맛을 재현하고자 평일과 휴일 모두 계속 고민하고 있다. 이 영화에 총무라는 역할은 없지만 주인공인 조리대원 역할에서 우리나라 남극기지의 총무 역할을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기지에서는 라면 같은 보급품을 내놓거나 배분 수량을 조정하는 일을 총무가 한다. 보급이 제한적이기에 수량이 부족하거나 누군가 혼자서 많이 소비한다면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총무는 사전상 “단체의 전체적이며 일반적인 사무, 또 그 일을 맡아보는 사람”이라고 나와 있지만 사실 남극기지 총무는 일반적인 사무 이상의 일을 한다. 영어로 매니저라도 표현하는데 오히려 이 표현이 더 적절한 표현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사무 외에도 월동대 구성과 운영, 식자재를 비롯한 보급, 또 남극까지 월동대를 인솔하는 역할을 한다. 또 대장을 보좌해 1년간 기지 생활을 어떻게 할지 방향과 원칙을 마련하고, 당직 근무표를 짜거나 숙소를 배정하고, 대원들이 기지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살피는 역할을 한다. 추가로 눈이 오면 기지 제설작업도 해야 하고, 주방 도우미로 돌아가면서 설거지도 해야 하고, 월동대뿐만 아니라 연구를 위해 방문하는 분들의 편의를 위해 화장품과 칫솔 등 각종 생활용품 배급과 이불 관리 등 호텔의 하우스키핑(객실관리) 성격의 업무도 있다. 무엇보다도 업무 분장에 나와 있는 가장 어려운 일은 ‘대원 상호 간 인화 도모 및 사기 진작에 관한 업무’다. 구체적인 듯 구체적이지 않은 이 업무가 사실 매년 새로이 구성돼 파견되는 월동연구대의 임무 수행을 성공으로 이끄는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여기서부터 고민은 시작된다. 고립되고 제한적인 환경에서 정말 라면이라도 모자라거나 배분이 공평하지 않으면 월동대의 인화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또 6개의 과학연구 분야와 시설유지 쪽 5개 분야, 대기과학에서부터 기계, 중장비, 의료, 조리 등 각각 다른 16개 분야에서 온 18명이 모이다 보니 의견을 조율해 나가는 것은 필수적이다. 대원들의 의견을 듣고 기지 대장과 연구소와 의견을 조율해 방향을 설정해 나가는 역할은 중요하지만 중간자적 입장이 쉽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영화에서는 개성이 강한 캐릭터들이 장보고기지보다 더 내륙에 고립된 기지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설정돼 다소 조마조마하지만 현재 필자가 함께하는 대원들은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자 노력하고 있어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대장과 함께 1년의 월동과 연구소가 부여한 임무를 달성할 수 있도록 차대 운영을 지원해야 한다는 막중한 부담감이 앞서지만 서로가 존중하고 배려해 정감 어린 기지 생활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지지를 부탁드린다.

[아침을 열면서] 장례문화

인간다운 가치 있는 죽음을 준비하는 웰다잉(well-dying)은 무겁고 어두운 부분을 밝게 변환시키는 방안을 찾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감정의 순화가 필요하다. 장례식장을 둘러보면 분위기가 꽤 다름을 마주하게 된다. 죽음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는 장례식장에서 보이는 장례문화의 차이에서 그치지 않고 죽음 이전인 이 땅에서의 삶에도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장례문화는 장례방법, 장례절차, 장사방법, 장례서비스, 제례 등이 있다. 우리나라는 생활의 몇몇 대사(大事)에서도 장례를 제일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이젠 장례도 주거환경의 변화와 아울러 효율적이고 격조있게 모시기 위해 장례전문 상조회사 이용이 일반화됐다. 특히 고인에게 생전에 못다 한 효(孝)를 장례식을 통해 정성을 다해 받들고 용서를 빈다는 사고에서 마음과 자세를 가다듬게 됨은 물론 생활에 다소 부담이 되더라도 되도록 좋은 장례용품으로 후하게 모신다. 이 같은 한국적 특유의 정서로 선불제 상조기업들이 자산을 조(兆) 단위 대규모로 성장할 수 있었으나 일부 불합리한 문제도 발생, 근래에는 후불제전문 상조기업 상품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필자는 장례문화 중에서 고인에 대한 존경심과 유족들의 슬픔을 함께하고 위로하는 조문의 최고 가치인 ‘애도와 추모문화’를 살펴본다. 이를 위해 현장, 즉 장례식장을 운영하는 종합병원과 장례전문 영안실 몇 곳을 둘러봤다. 빈소는 고인의 죽음을 위로하고 추모하기 위해 찾아오는 조문객들을 접대하는 엄숙한 자리다. 그러나 일반 조문객들의 고인과 유가족에 대한 애도와 추모는 인사치레 정도가 대부분이다. 참고로 조상(弔喪)과 문상(問喪)은 어떻게 다른지를 밝혀둔다. 고례(古禮)에서는 고인을 생전에 알았으면 고인과 상주에게 문상했다. 반면 고인을 알지 못하고 상주만 알면 빈소에 조상하지 않고 상주에게만 문상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구분 없이 조상과 문상을 함께 한다. 대부분이 이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전혀 의식조차 없다. 현실적으로 고인보다는 상주들에 대한 인사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위로 정도이지 애도에 대한 감정은 미약하다. 한편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을 보며 술잔을 나누거나 식사 후에는 간단한 화투 등을 즐기는 자리도 유족들의 고단함을 생각해 사라지고 있다. 고인이 천수를 다한 소위 호상에서는 웃음소리도 듣게 되는데 주위의 다른 조문객들이 이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지도 않을 만큼 조문문화도 변했다. 필자는 조문의 애도와 추모는 유족과 상조업체가 빈소 환경을 어떻게 꾸미는지가 중요함을 살펴본다. 이 문화는 한국상장례문화학회장을 지낸 최고 전문가 교수가 강조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이와 관련, (사)웰다잉문화운동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유언장 작성 등 외에도 조문 때 고인의 발자취를 글과 사진으로 보면서 유족과 슬픔을 함께할 수 있도록 ‘조문보(弔問報)’ 팸플릿을 조문객에게 제공하는 일을 선도하고 있다. 이는 가치있는 장례문화로 조문의 취지를 살릴 뿐만 아니라 자손들에게는 교육적으로도 값어치 있는 일이다. 필자는 웰다잉단체협의회와 한국장례문화포럼 창립 회원으로서 애도와 추모의 ‘K-장례문화’ 가치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 전하고 있다. 잊혀져가는 동방예의지국 미덕에 대한 행정적 관심과 사회적 인증을 받은 상조 기업에 대한 지원 방안을 모색해주길 바란다.

[아침을 열면서] 인간관계 생명론_수컷열세시대

진화의 방향은 생식과 번식의 기회를 높이기 위한 특정 수컷 개체의 노력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를 통해 특정한 개체의 유전자는 해당 개체군의 유전자급원에 담기게 되고, 이 유전 형질은 이어지는 세대에게 선택된다. 따라서 생식과 번식에 성공하는 수컷 유전형질은 해당 종의 진화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이를 받아들이는 암컷의 생리적 조건이 잘 맞아야 번식에 성공할 수 있다. 더군다나 자손 형질의 반은 암컷의 형질에서 오니 암컷의 선택은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더욱 중요한 요인이 된다. 자연 환경의 생존에 있어 가장 중요한 행위는 먹이 확보이다. 특히 육식 동물의 경우 사냥은 먹이 확보를 통해 신체 능력을 증강 할 수 있으니 이로 인해 생식과 번식의 기회를 더욱 높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냥은 수컷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기능과 밀접하다. 사냥을 위한 민첩성과 일관된 행위를 유도하는 테스토스테론은 집단 내 경쟁에도 작동된다. 피가 튀는 잔혹한 게임 포함, 행위 결정에 대한 속도를 요구하는 게임 등을 즐기는 남성이 여성보다 많고 또 잘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뒤늦게 지구상에 출현한 인류도 당연히 자연의 법칙을 따라간다. 식물의 경작과 동물의 가금화를 통한 자본주의의 출현 전에는 적어도, 사냥은 매우 중요한 테스토스테론, 즉 남성의 기능이다. 즉시적이고 단편적이며 목적이 뚜렷한 테스토스테론은 사냥에 매우 유용해 남성성의 상징이 된다. 생물학적 신체의 기능이 매우 활발한 10대에는 테스토스테론 치매기, 소위 만용과 마초의 남성다움이 그 어느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행위를 모두 누르는 시기를 겪기도 한다. 수렵시대의 여성은 남성이 포획해 온 먹거리로 출산과 육아 등을 안배한 적정한 관리를 했을 것이다. 다양한 여성성을 나타내는 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 옥시토신 등 호르몬은 개체의 역할과 기능을 하기 위해 테스토스테론처럼 혼자 작동하지 않는다. 이 호르몬들은 서로의 조화를 통해 청소와 육아는 물론 테스토스테론에게 더 훌륭한 사냥솜씨를 발휘하도록 보이지 않는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이 여성 호르몬의 조화는 유전자급원을 잘 가꾸는 관리유전자의 발현 결과이다. 경작과 가금화를 통해 인간은 필요 이상의 먹거리를 축적하고 이 먹거리는 자본이 되며 힘이 된다. 테스토스테론의 즉시적 시각은 인간의 노동력에 근거해 막강한 교권과 왕권으로 자본을 축적하는 중세와 근세까지 남성우위의 시대를 만든다. 전쟁은 가장 흔한 이 시대의 남성우위활동 중의 하나이다. 교회중심의 중세는 암흑기였고 테스토스테론을 뛰어넘는 여성에 대한 마녀사냥이 있었다. 유교를 통한 왕권강화로 조선은 세계사에는 드문 긴 왕조였으며 여자에게는 칠거지악을 가르쳤다. 산업혁명 이후 경제수준이 국가 간은 불론 사회내부의 경쟁 지표가 되는 지금, 테스토스테론은 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 옥시토신 등의 관리 호르몬에 그 힘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남편’은 줄고 있고 ‘밥 잘사주는 예쁜 누나’는 늘고 있다. 출산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으며 가족은 조선시대의 틀과 기능을 유지하고 있지 않다. 테스토스테론의 기능은 남성의 생애를 통해 그 기능을 발휘하는 시기가 상대적으로 길지 않다. 사냥감 냄새는 나이 먹은 남성에게 더 이상 나타나 주지 않는다. 남성의 평균 수명이 여성의 평균 수명에 비교해 길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테스토스테론의 고집이 그리하도록 한다.

[아침을 열면서] 남극으로 가는 길

우리나라는 남극에 세종과학기지와 장보고과학기지 두 곳의 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세종기지는 사우트셰틀랜드군도 킹조지섬에 위치하고 있고 장보고기지는 로스해의 테라노바만에 위치하고 있다. 거리상으로 세종기지는 우리나라에서 1만7천240㎞, 장보고기지는 1만2천740㎞ 떨어져 있다. 필자가 근무 중인 장보고기지는 인천에서 뉴질랜드 오클랜드를 거쳐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대기 후 이탈리아 공군기를 타고 7시간을 가서 바다 위 해빙 활주로에 내리거나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아라온호를 타고 10여일을 항해해야 도착할 수 있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주변에서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에 매년 기지 월동 생활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첫 단추는 기지를 운영할 인력을 모으는 것부터 시작한다. 남극에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기지를 운영할 수 있는 우수한 전문 인력을 뽑아야 한다. 고립된 환경에서 1년 이상 체류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매년 18명으로 구성된 새로운 월동연구대를 구성하는데 이 과정만 반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월동연구대는 기지 운영을 책임지는 대장, 살림을 책임지는 총무, 중장비, 기계설비·전기·발전을 책임지는 유지반, 남극에서 대기·해양·생물·지구·우주 연구를 지원하는 연구반, 여기에 기지 주변 기상예보를 위해 기상청에서 파견되는 기상대원, 기지 주변 활동에서 안전 확보를 위해 소방청에서 파견하는 안전 대원, 여기에 식사를 책임지는 조리 대원, 마지막으로 1년간 대원들의 건강을 돌봐주는 의료 대원까지 구성되면 남극에서 겨울을 나기 위한 첫 준비를 마치게 된다. 이렇게 대원들이 구성되면 출발 전까지 대원들은 기지에서 각자 업무 수행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연구소와 전문 기관에서 연구 활동, 장비 운용 등 직무교육을 받는다. 또 월동연구대의 의무와 책임, 스트레스 관리법 등 고립된 환경에서 잘 지낼 수 있는 소양도 쌓는다. 필자가 맡은 총무는 대원들의 생활과 복리를 책임진다. 쌀과 김치에서부터 커피, 과자, 라면등 1년간 월동연구대와 하계 기간 방문하는 연구자들이 먹을 800여 종류의 식자재를 챙겨야 한다. 또 혹한 환경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극지에서 입을 방한 의류와 신발, 안전 장구류를 준비하고 청소, 세면용품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주변에 가게가 없어도 불편함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1년 치를 준비한다. 이렇게 준비된 보급품들은 우리나라 쇄빙연구선 아라온호에 10월에 선적돼 12월 남극 장보고기지까지 운송된다. 남극으로 가는 길을 이렇게 나열한 이유는 남극에서 기지 운영은 다양한 분야와 우리나라의 역량이 집결되는 하나의 종합적인 시스템이라는 것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이제 우리나라는 남극 내륙으로의 진출을 꿈꾸고 있다. 이를 위해 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길이 2천200㎞의 남극 내륙 진출로(K-루트)를 개척하고 있다. 진출로 개척이 완료되면 내륙 연구를 강화하기 위해 앞으로 남극 내륙 기지 건설이 필수적인데 내륙 기지 운영은 세계 6개국이 5개 기지만을 운영할 정도로 국가적 역량이 집결돼야 하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남극 내륙 활동 지원이 가능한 진정한 선도국이 되기 위해 지금까지의 역량을 바탕으로 더 높은 수준의 남극 활동을 위한 연구 지원 및 보급 체계 혁신 방안도 함께 고민을 시작해 할 시점이다.

[아침을 열면서] 236원

집 앞 편의점을 몇 바퀴 돌았다. 236원으로 살 수 있는 게 있을까? 예상대로 236원으로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은 없었다. 300원이 있다면 그나마 볼펜 한 자루를 살 수는 있었다. 600원을 손에 쥐고 있다면 우유 맛이 나는 음료수 하나 정도는 사 먹을 수 있었다. 천원이라면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은 대여섯 가지로 늘어난다. 하지만 삼각김밥은 언감생심. 애석하게도 236원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하찮은 돈이었다. 그럼 236원은 무슨 돈일까? 경기문화재단이 위탁 운영하는 경기도립 박물관·미술관 7곳의 2024년 총사업비로 예정된 33억원을 1천400만 경기도 인구수로 나눈 돈이다. 즉, 내년도에 경기도민 1인당 236원 정도의 예산으로 경기도립 뮤지엄들에서 전시도 하고 교육도 하고 소장품도 관리하고 관람객 서비스 등등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경기도민 1인당 236원의 예산으로 지속가능한 지식 생산과 활용의 장소가 돼야 함은 물론 지역의 복합문화공간 역할까지 수행해야 하는 경기도립 뮤지엄들의 임무는 실로 가혹하다. ‘문화로 가꾸는 살기 좋은 경기도’를 외치고 있지만 정작 경기도를 대표하는 문화기관인 경기도립 뮤지엄들의 실상은 ‘236원’이 대변해 주고 있다. 이쯤되면 경기도립 뮤지엄들은 사실상 존립 자체의 위기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기문화재단이 위탁 운영하고 있는 경기도립 뮤지엄은 경기도박물관, 경기도미술관, 경기도어린이박물관,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 백남준아트센터, 실학박물관, 전곡선사박물관 등 7곳이다. 경기도자재단이 위탁 운영하는 경기도자박물관과 경기도자미술관 등을 포함해도 1천400만의 경기도민이 좋은 전시를 관람하고 재밌는 교육프로그램을 향유할 기회를 얻기에는 한참 모자라는 숫자다. 더구나 경기도립 뮤지엄들의 사업 예산은 무슨 이유에선지 경기가 좋아도 줄어들고, 경기가 나쁘면 더 줄어들어 매년 이제는 바닥이겠지 하는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는 추세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박물관들은 이미 비교 대상이 안 되게 멀리 달려가고 있고 전국으로 범위를 넓혀 봐도 경기도립 뮤지엄들의 사업 예산은 맨 끝 쪽에 자리 잡고 있다. 대단히 안타깝지만 ‘236원’이 말해주는 경기도 문화 현장의 현실이다. 얼마 전 경기 김포의 한 구석기 발굴 현장을 찾았다. 개발을 목전에 둔 산업단지의 진입로를 닦는 건설현장이었다. 여기저기 어지럽게 붙어 있는 현수막에는 ‘경기도는 싫다, 서울이 좋다’라는 구호가 선명했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기도를 버리고 서울로 가고 싶다는 그 애절한 소망의 한끝에는 ‘236원’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도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영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그래도 이번 경기도의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행정사무 감사에서 경기도립 뮤지엄들을 이 상태로 방치하는 것은 경기도민의 문화 향유권 보장 차원에서 큰 문제라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적어도 삼각김밥 하나는 사 먹을 수 있는 예산 폭탄을 꿈꿔 본다.

[아침을 열면서] 상조산업 고찰

장례의 실질적 마무리인 고인 생활유품과 거소 정리의 행정적 제도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웰다잉문화운동과 병행해 죽음 이전의 상조준비 상품에 대한 실용성을 살펴본다. 2025년 예정의 노인 인구 20%를 넘어서는 초고령사회를 목전에 둔 우리나라는 1인 가구, 특히 돌봄(홀몸)노인 증가의 핵가족화 추세에 부응해 대부분 장례식장과 상조전문업체에 의존, 상조업이 산업 차원으로 발전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마지막 길에서만큼은 불효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중시하고 있어 장례 관련 비용에 다소 관대한 경향이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상조산업은 보험 형태의 금융상품으로 선불제상조업(일반상조)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큰 동력의 하나가 됐다. 소비자로서 필요한 사전 조치라는 가치로 상조산업은 자산 규모 5천억~1조원대의 여러 대기업을 중심으로 상조시장을 넓혀 왔다. 그러나 일부 상조대기업이 축적되는 자산으로 효도관광, 건강관리 등 부가서비스 명목의 마케팅에 투자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부실한 경영과 도덕적 해이로 부도, 폐업 등의 부정적 문제들이 사회적 문제로 야기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소비자의 불안감을 극복하는 대체 상품으로 후불제상조의 순기능에 점차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필자는 굳이 양자의 비교 차원을 넘어 각기 특화된 장점과 단점이 있지만 아직 사회적 인지도가 부족한 후불제상조서비스에 대해 피력해본다. 여기에는 상장례학회 및 업계 전문가, (예비)사회적기업인 후불제 상조업체의 자료와 현장 장례지도사들의 의견을 토대로 정리했다. 후불제는 갑작스레 닥치는 장례에도 당황하지 않고 편안하게 치를 수 있게 도와주는 상품이다. 요약하면 월 납입금 없이 장례를 치른 후 모든 비용을 지불하도록 해 안정성과 만족도를 지향하는 장례서비스다. 구분해서 살펴보면 원가구조에서 소비자의 개별 상황에 따른 맞춤식 순수 장례비용이고, 서비스 안정성 측면에서는 재무 위험이 없는 상부상조 서비스다. 장례 시 기본구성상품 외에 추가비용이 없으며 서비스 품질면에서도 유가족의 개별 요구사항을 일대일 책임 반영한다. 무엇보다 사전에 납입금이 없으므로 중도해지의 위약금이 없으며 사전상담만으로도 할인 혜택을 주고 있는 점들이 차별화되고 있다. 그러나 옵션 추가로 가격이 올라가는 것은 사전에 확인이 필요하다. 지난 9월 웰다잉을 주제로 진행한 노인종합복지관 노인대학 강의에서 자손들에게 장례경비 걱정을 덜어주는 일환으로 상조 준비의 필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이어 개별상담에서 경비는 오히려 부의금으로 정산하는 방안이 효율성과 합리적이라는 데 적극 공감을 표한다. 또 다른 분은 형제들 중 자신이 가입한 상조 대금으로 장례를 모셨다는 생색과 연계해 분담금 문제가 형제 간 불화의 소지도 될 수 있다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선불제이건 후불제이건 상품의 서비스 질과 성격에 유불리는 소비자의 선택의 차이지 절대성은 없다고 본다. 다만 유족의 요구에 따라 정해지는 별도 부담인 빈소, 접객실, 음식비 등 몇 가지 이외의 공통적인 상조상품은 합리적인 정찰제 및 상조서비스의 표준규제를 한국상조산업협회와 공정거래위원회를 통한 행정지도, 무엇보다 예(禮)를 갖춘 품격 있는 서비스와 노잣돈, 사례비 등 부당행위보호시스템이 기업 간 경쟁력이 돼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아침을 열면서] 인무천일호

한문은 영어와 같이 우리말과 어순의 차이가 있어 ‘인무천일호(人無天日好)’에 대한 우리말 표현은 해석의 여지가 있다. 어순에 충실하자면 ‘천 일이 좋은 사람은 없다’이지만 ‘사람이 천 일 좋을 수 없다’고 풀어 쓸 수 있다. 각각 ‘늘 좋은 사람은 없다’ 또는 ‘사람이 늘 좋을 수만은 없다’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해석 간에 수동과 능동의 차이가 있다. 즉, ‘늘 좋은 사람...’을 이야기할 때 타인에게 좋은 수동의 이타적 성향으로 말할 수 있고 ‘사람이 늘 좋을 수...’를 이야기 할 때는 스스로가 능동적인 긍정적 성향으로 말할 수 있다. 결과론적으로 인간관계를 이야기할 때 모두 좋다는 의미는 될 수 있지만 ‘좋음’에 대한 주체와 객체는 구분된다. 사람에게 천 일이 한결같기는 어렵다. 한결같음에 대해 사람이 주체가 되거나 객체가 되더라도 이 좋다는 성향을 천 일간 지속하기 어렵다. ‘좋음’은 사람의 관계에서 항상 상대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지구 탄생 46억년에 비교한 인류 출현 400만년은 너무나 최근의 일이지만 인간은 두뇌 발달과 더불어 더 오래전에 출현한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유전적 다양성 속에서, 그 민감도는 호기심과 함께 인간의 두뇌 발달을 이끄는 진화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안정적 편안함을 추구하는 이타적인 수동의 ‘좋음’과 비교해 능동의 ‘좋음’은 안정적 편안함에서 쉽게 지루함을 느끼게 한다. 유전적 다양성에서 능동적 개체가 가지고 있는 이 호기심은 급속한 ‘좋음’을 추구하고 바로 쉽게 지루해진다. 인류의 진화 라인은 능동적 ‘좋음’에 의해 호기심과 지루함으로 진행하고 있는 듯하다. 인류의 서식 환경뿐만 아니라 종교를 포함한 인본위주의 정치 외교적 관점에서 이 능동적 ‘좋음’에 의한 호기심과 지루함의 반복은 늘 작동되고 있다. 능동적 ‘좋음’에 의한 국제적인 갈등 구조는 전쟁, 폭력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기후변화에 의한 생물종 다양성 파괴, 그리고 그로 인한 멸종 등은 많은 과학적 증거와 추정으로 예견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수동의 이타적 좋음에 의한 안정보다는 능동적 좋음에 의한 호기심과 지루함을 택하고 있음은 400만년의 인류의 진화 라인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 생명론적 관점에서도 ‘천 일 좋음’은 없다. 뇌가 발달된 인류에게는 더구나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 뒤에 남을 인류를 위해 수동의 이타적 성향으로 ‘늘 좋은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늘 좋은 사람은 성립되지 않지만 인간 고유의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가능하다. 인간만이 가능한 영역이다. 이 상상력은 지구의 생명과 존속을 유지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를 호기심과 지루함의 반복으로 끝없는 갈등구조를 생성하는 능동의 ‘좋음’을 견제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달리는 호랑이 등 위에서 내려올 수 있을 것이다.

[아침을 열면서] 우리가 극지에 가는 이유

지난 2일 중국은 제40차 남극 과학탐사대가 출발하는 날 남극에 다섯 번째 과학기지를 건설한다고 밝혔다. 올해 개최된 제45차 남극조약협의당사국회의(ATCM)에서 사무국은 사우디아라비아가 남극 탐험 계획 수립을 위해 사무국에 접촉해왔고, 이어 8월에도 아랍에미레이트(UAE)가 남극조약 가입을 위해 사무국에 절차를 문의해 왔다고 밝혔다. 신장된 국력을 투사하고자 하는 국가들을 중심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남극활동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2022년 12월 ‘제1차 극지활동 진흥 기본계획’에 남극 내륙 활동 강화 등 중장기 전략을 담으며 미래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가적 관심을 구체화하고자 했다. 다만, 이 계획에 담긴 극지활동에 대한 국민관심도는 60대 이상에서 71.7%로 가장 높고, 40~50대 67.9%, 20대 55.9%, 만15~18세 미래세대에서 44.6% 순으로 미래세대에서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 남극에 우리나라가 두개의 과학기지와 쇄빙연구선을 운영하며 과학연구를 수행하는 이유는 미래 변화 예측을 위한 목적이 상당히 크지만 정작 미래세대에서 관심도가 가장 낮은 것이 문제다. 남극에서 우리 과학자들이 빙하를 시추하고, 생태계 변화를 모니터링하며, 대기와 해양 환경을 관측하고 변화를 분석하는 이유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남극 환경 변화가 미래에 어떠한 영향을 초래할지 예측하기 위함이다. 과거의 기체를 담고 있는 빙하를 분석해 과거 지구 환경을 복원하여 미래 지구 기온 변화를 예측하고, 남극 빙하가 녹으면 해수면이 얼마나 높아질지, 바다로 흘러든 빙하 녹은 물은 해양 환경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지구의 열 순환과 관련성이 깊은 해류 순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분석하는 연구 모두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연장 선상에서 또한 남극은 미래 기술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지난 2일 극지연구소는 남극에 스마트 관측 시스템을 구축한다고 밝혔다. 남극 환경은 혹한의 추위뿐만 아니라 자기장 영향으로 통신이나 무인기, 무인이동체 운용에 어려움이 있는 공간이다. 극지연구소와 한국로봇융합연구원 등이 함께 남극 환경에서도 안정적으로 관측 시스템을 운용할 수 있는 극한지 통신 기술과 탐사용 로봇시스템 운용 기술 등을 개발한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향후 우주탐사 등에 활용될 수 있어 기술적 측면에서도 미래를 위한 준비가 남극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이처럼 남극은 과거만을 바라보며, 몇몇 국가들만 활동하는 정체된 공간이 아니다. 지구의 미래를 위해 관심 주제와 활동 주체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글로벌한 협력 공간 중 하나다. 그러나 1988년부터 시작해 36년째를 맞이한 우리나라 남극과학연구가 또다시 30년을 내다보기 위해서는 우리 미래세대의 관심과 지지가 꼭 필요하다. 미래세대는 남극이 초래한 변화를 피부로 더욱 느껴갈 세대이며, 다양해지는 남극 이슈를 이끌어갈 주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남극기지에 가서 1년을 월동연구대로 지낸다고 하면 대부분 우리가 왜 남극에 가야 하는지 질문을 많이 받는데, 이제는 우리의 미래세대 때문이며 지금의 작은 관심이 바꿀 우리의 미래 때문이라 답하고 싶다.

[아침을 열면서] 경기예술나무

신문에 고정칼럼을 연재하다 보면 정말 세월이 화살같다는 말이 실감 난다. 원고 마감의 압박이 느껴지기 시작할 때부터 이달 칼럼은 ‘경기예술나무’를 주제로 써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다가 글의 첫머리가 잘 잡히지 않아 국어사전에서 나무를 검색해봤다. 나무, 줄기나 가지가 목질로 된 여러해살이 식물. 정말 짧고도 명료했다. 굳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나무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지만 나무라는 생명체는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는, 그냥 나무였다. 얼마 전 아프리카 잠비아의 칼람보 폭포 인근에서 약 50만년 전부터 인류가 통나무집을 짓고 살았던 흔적이 발견됐다는 뉴스의 헤드라인이 고고학계를 흥분시켰다. 유기물질인 나무는 오랜 기간 원형대로 보존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무려 50만년 전의 나무가, 그것도 의도적으로 다듬은 흔적이 뚜렷한 나무가 발견됐다는 소식은 매우 흥미로웠다. 발견자들은 도구로 홈을 파서 십자 모양으로 맞물린 형태의 통나무가 건축물 기초의 한 부분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무려 50만년 전에 이미 통나무를 다듬어 집을 짓고 살았다는 뜻인데, 고인류의 주거생활 방식에 대한 일반 상식을 깨는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인류는 나무에서 비롯된 존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속하는 영장류의 진화가 나무 위 생활에 적응하면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울창한 나무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하기 위해 원근을 구별할 수 있도록 두 눈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됐고, 잘 익은 나무 열매를 찾아내기 위해 색을 구분하는 능력이 더해졌다. 숲은 풍부한 먹을거리를 제공해 주는 삶의 터전이었고 편히 쉴 수 있는 은신처였다. 인류 진화의 최대 전환점인 두발 걷기도 나무 위에서 내려와 땅을 디디면서 시작됐다. 길고도 험난했던 코로나19의 시절, 우리가 잠시나마 기대어 쉴 수 있던 곳은 자연과 문화예술뿐이었다. 역병의 창궐을 피해 들로 산으로 떠돌던 우리에게 나무 우거진 그 숲이 없었다면, 그리고 일상의 고단함을 달래줄 문화예술의 향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위로받을 수 있었을까? 코로나19가 물러가고 온전한 일상으로 되돌아온 지금 문화예술이 보듬어 주던 따뜻한 위로에 대한 기억은 어느새 가물가물하다. 마음방역과 예술백신은 벌써 빛바랜 구호가 돼버렸다. 아쉽게도 문화예술이라는 나무의 뿌리는 너무나 허약하다. 경제위기의 극복을 위해 제일 먼저 삭감되는 예산은 언제나 문화예술 쪽 예산이다. 우리에게 일상의 문화예술은 정말 사치란 말인가? 자조적인 한탄이 나오는 대목이다. 이 하 수상한 세월에 경기문화재단에서는 문화예술을 우리가 함께 키워야 할 나무로 형상화해 문화예술의 가치를 확산하고 문화예술 후원을 목적으로 ‘경기예술나무’의 씨앗을 뿌리는 기부 캠페인을 시작한다. 식목일마다 부지런히 나무를 심었던 덕에 우리는 제법 울창한 숲을 갖게 됐다. 이제는 예술나무를 심을 차례다. 경기예술나무의 숲이 우거질 질 때 우리의 삶은 더욱더 풍성해질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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