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느림의 미학을 꿈꾸며

‘느림의 미학’ 이라는 아날로그적이고 인문학적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전남 완도군의 작은 섬 ‘청산도’를 소개하는 홍보글이 그랬다. 청산 도는 느리게 사는 섬이라는 것이다. 빠르게, 좀더 빠르게, 음악적 용어를 빌리자면 알레그로! 비바체!! 하고 삶을 재촉하는 세상에서 느린 것을 미덕으로, 더구나 미학으로 까지 내세우는 섬이라니, 가보고 싶었다.

쫓기듯 사는 일상에서 벗어나 느리게, 일탈한 삶을 음미해 보자. 그래서 떠난 여행이었다.

완도에서 배를 타고 45분, 물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내내, 멀리, 가까이 섬들이 나타났다. 삶이 지겨워지고 사람들과의 부대낌이 버거울 때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일주일만이라도 살아봤으면 했는데, 그런 섬, 작고 한가로운 섬들이 바다 한가운데 점점이 떠있었다. 어떤 것은 모양새가 둥글고 아름답다고 해서 진주 섬이라는 우아한 이름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그야말로 이름도 없는 무인도가 마침표처럼 떠있었다. 청산 도는 9개의 무인도와 5개의 유인도가 어우러진 섬이라고 했다.

‘청산도’라는 이름은 바다가 푸르고, 하늘이 푸르고, 사람들 마음이 푸르다고 해서 지어진 것이라고 했다. 마음이 푸르다는 것은 무슨 뜻 일까. 속내가 시커멓다, 허옇다는 표현으로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 것에 비추어 보면 푸르다는 것은 아마도 순박하고 때가 묻지 않았다는 뜻쯤 되는 것이 아닐까.

느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청산 도 곳곳에는 달팽이 모양 관광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슬로시티 청산도’ 라는 다소 세련미를 낸 표지판도 있었다.

그런데 무엇이 느리다는 것일까. 청산도에서 느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육지에 뻬곡한 아파트, 빌딩이 없고, 대형마트가 없고, 정신없이 달리는 자동차며 전철이 없고, 학원이 없고, 이른바 문화시설이 없다는 것이 느리다는 것일까.

빨강 파랑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은 집들이 길섶에 핀 야생화처럼 납작 엎드려 있는 청산도, 영화 서편제에 등장한 유명한 돌담길이 느릿하게 언덕등성이를 기어올라가고 있었다. 그 길 위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언덕 위에서는 치맛자락처럼 넓게 펼쳐진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김 양식을 위한 모판이 바둑판 모양으로 떠있고, 멀리 조업중인 배들도 보였다. 한가로워 보였다. 놀랍게도 길가 밭 한 귀퉁이에 이엉으로 감싸놓은 무덤 초분이 보였다. 청산도에서는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면 배를 타고 나간 피붙이가 돌아올 때까지 매장을 하지 않고 이엉을 얹어 둔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바다에서 돌아온 이가 애끓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아쉬워 매장을 미루다 육탈이 되면 그제야 매장을 한다는 것이다. 청산도의 초분은 섬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아름답고 서럽고 한스러운 풍습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청산도가 말하는 ‘느림의 미덕’ 같았다.

작가 박경리 선생은 생전에 ‘빠른 세상’을 경계했다. 자동차가 등장하고, 세탁기며, 전기 밥솥 따위 빠른 문명적 이기가 발달되며, 거침없는 삶의 질주 속에 사람들은 성찰하고 반성할 시간을 놓치고 있다고 했다. 인간적 품위가 사라지고, 생존의 진정한 의미며, 가치관을 잃어버리는 세상이 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세상이 어지럽다. 총선이 끝나고 나자 독버섯처럼 불거지는 문제들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실감하게 한다. 무엇을 위해 우리는 사는 것이고, 무엇이 우리 삶의 가치가 돼야 하는 것일까.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 것일까. 일제 강점기와 6·25를 겪으며 삶의 나락 끝까지 갔던 우리는 빠른 경제성장으로 가난과 궁핍을 벗어났지만 우리의 품격도 빠르게 상승하여 격조있고 우아한 인성을 갖게 되었는가. 느리지만 순박하고 아름다운 감성을 품고 있는 세상이 그립다.

신효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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