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개구리들의 기준

이광용 수원여대 산학협력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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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개구리가 제일 큰 줄만 알고 있던 아기 개구리들이 연못 밖으로 놀러 나갔다가 황소를 본다. 개구리들은 엄마개구리에게 그 얘기를 하고, 엄마개구리는 자존심이 상해서 배를 한껏 부풀려 크기를 비교하게 한다. 그래도 그보다 더 크다고 하니 엄마개구리는 계속해서 배를 부풀리다가 배가 터져 죽고 만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개구리 이야기다. 자기들보다 더 큰 동물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우물 안 개구리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물 밖을 경험하고 보다 큰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고들 한다.

그런데 우물 밖 세상에 대한 경험과 인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기준이다. 아기 개구리들은 우물 밖 세상인 황소의 존재를 경험했음에도 불행한 결말을 맞았다. 삶의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큰 것’이 최고라는 삶의 기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엄마가 작아보였고, 엄마 개구리는 자식들에게 자존심을 내세우다 그만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다. 소가 큰 몸집을 자랑한다고 개구리들과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 가치로 내세우는 기준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삶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가치기준을 적용하며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기준은 키도 커야 하고, 몸매도 날씬해야 하고, 집도 커야 하고, 자동차도 커야 한다. 동양인이면서 서양인의 얼굴형을 선호하며 성형수술을 한다. 이웃집 애가 미술학원을 다니니 우리애도 다녀야 하고, 해외 어학연수를 가니 그것도 가야 할 것 같다. 경제적 상황, 개인의 능력, 취미, 체질 등은 아랑곳없다. 서로 내 것을 찾고 키우는 일도 벅찬데 따라갈 것만 많다. 우리 자신을 남의 기준에 짜 맞추려 하다 보니 삶이 행복할 리가 없다.

교육제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기준은 늘 소위 경제 선진국의 제도다. 우리 실정에 대한 고려보다 우리의 상황을 그들의 제도에 맞추려 하는 것이다. 개개인의 개성과 능력은 평준화에 희생되어야 하고, 개개인의 취미와 적성은 성적에 양보해야 한다. 그러니 개인도 기관도 특성이 없다. 그러다보니 교육은 개인의 자존감을 살리기보다 열등감만 키우고 있다.

세계화시대에 세계의 기준을 따라가야 한다고?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라면? 내 것을 세계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라도 우리 자신의 자존감과 행복을 키워주는 기준이 무엇이어야 하고, 어디에서 나와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이광용 수원여대 산학협력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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