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경지하다… 지경하다 <1>

image
김아타 사진작가

춤이 절로 나왔다. 그림을 보는 순간 크게 웃었다. 태어난 지 22개월 된 아이가 세상에 와서 처음한 황칠이었다. 당장에 밑 칠해 두었던 하얀 캔버스를 벽에 세워 두었다. 두발로 직립하고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아이는 왔다 갔다 하면서 찌르고 긋고 두드렸다. 열흘 남짓 되었을까 상상 밖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감동이었다. 의식과 도식이 흉내 낼 수 없는 본성과 본능의 향연, 무아의 경지였다. 아이가 의식의 통제를 받으며 선을 긋거나 현대미술의 흐름을 읽고 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이의 마음이 궁금했지만 헤아릴 길 없다. 10년 전의 일이다. 손녀의 황칠은 경지(境地)와 지경(地境)에 대한 절절한 화두가 되었다.

“벽에 똥칠하기 전에 죽어야지!” 노망을 예비하는 노년의 시린 독백이지만, 생에 대한 강한 의지의 역설이다. 무아의 경지 황칠과 지경의 표정 똥칠은 닮았다. 둘 다 의식의 통제밖에 있다. 아이의 황칠은 인문의 시작이며 창의적 본성의 싹이다. “그냥”하는 예쁜 짓이다. 어른의 “그냥”은 멀쩡한 의식이 허하지 않지만, 아이는 단박에 해치운다. 똥칠은 슬픈 해프닝이다. 우주를 방황하는 혜성이다. 인간은 황칠에서 그림으로 진화하여 꽃이 되었다가 의식의 경계에서 추방되어 똥칠로 생을 마감한다. 본래로 돌아간다. 황칠과 똥칠, 여기가 화양연화의 실경이다.

35년 전, 정신병원에서 정신이 마실 나간 많은 사람을 만났다. 무쏘의 불처럼 의지가 의식에 앞섰던 살 불 살 조의 시절, 인간의 정신을 보겠다고 덤벼들었다. 융과 프로이트의 의식과 무의식의 텍스트가 미덥지 않았던 터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나?” 지경을 위로하는 비감한 말이다.

다빈치의 후예들이 있다. 칸딘스키다. 피카소다. 죽었거나 살았거나 그들의 붓질도 결국은 경지를 탐하는 여정이다. “나는 라파엘로처럼 그리기 위해 4년이 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피카소의 고백이다. 황칠처럼 마음 가는 대로 칠한 것 같지만, 잭슨폴록도 바스키야도 산발한 의식의 패치워크다. 치밀하게 의식을 제어한다는 말이다. 변기를 예술로 둔갑시킨 뒤샹은 서명 하나로 의식을 개념으로 만들었다. 회화의 외연을 캔버스 밖으로 확장한 혁명적 사건, 회화의 파앤드어웨이다. 하지만, 뒤샹의 서명도 의식의 변주다. 서명은 문명사회에서 성문화된 자의식의 아바타이다.

경지와 지경을 가늠하는 일은 제정신으로는 불가하다. 양자역학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 피카소의 고백도 “아이처럼” 황칠하고 싶은 희망 사항이듯 경지와 지경은 스스로 자기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자유가 스스로 자유라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자유라 말하는 순간 자유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이는 “진리는 길 없는 경지다”는 크리슈나무르티의 말과 어순만 다를 뿐 같은 맥락이다. 분명한 것은 습(習)에 물든 어른은 황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신줄을 놓아야 한다. 용맹정진, 기적처럼 그 경계를 넘어서면 그 순간, 벽에 똥칠하게 된다. 일장춘몽이다. 그 얄궂은 위치가 경지와 지경이다.

경지와 지경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밖에 있다. 돌아갈 수 없다. 건너뛸 수 없다. 둘 다, 제정신이 완벽하게 디가우징된 불가역적 세계다. 어찌하오리까?

무애(無㝵)다. 원효의 화쟁(和諍)터로 간다. 의식과 무의식, 경지와 지경, 황칠과 똥칠, 모든 정체들의 화해가 화쟁의 참모습이다. 씨 뿌리는 일, 쌀 씻는 일, 설거지하는 일상이 무애다. 그냥 하는 막춤이 무애의 춤이다. 이를 넘어설 재간은 없다. 순간을 경배하는 일, 여기가 화양연화의 진경이다.

생의 모든 순간이다. 춤이 절로 한다.

김아타 사진작가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