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사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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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타 사진작가

1592년 임진년 4월, 칼로 일본 열도를 제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은 조선을 향했다. 명을 치기 위해 길을 열라는 명분은 시비였다. 부산포에 상륙한 지 20일 만에 도성이 함락됐다. 임금은 왜(倭)의 총칼에 도륙 당하는 백성을 버리고 나라 끝까지 도망을 갔다. 그해 7월, 백척간두에 선 절체절명의 시간, 조선의 존망이 걸린 해전이 한산대첩이다. 명량해전과 시제(時制)가 다를 뿐 풍전등화 같은 조선의 운명은 같다.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왜(倭), 오직 혼자 결정해야 하는 절대 고독의 순간, 장군 이순신이 있었다.

모함과 시기, 파직과 백의종군, 칠흑 같이 어두운 절망적 현실과 대적했다. 판옥선에서, 수루에서, 꿈속에서도 장군의 사유는 계속됐다. 절망적 환경은 바람에도 길을 묻는다. 울돌목의 급류, 병의 목처럼 긴 견내량의 협수로, 항아리처럼 생긴 옥포만, 작은 섬들로 직조된 남도의 자연 등 장군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장군의 배가 됐다. 사유는 눈앞에 닥친 현상만 보지 않고 전체를 보게 한다. 한산대첩의 결정적 승기인 학익진은 지독한 환경을 우군으로 승화시킨 사유의 완성이다. 여진족 기병의 기습으로 큰 피해를 입은 녹둔도 전투가 장군의 꿈에서 영화 ‘한산’의 미장센으로 소개된다. 손자병법에도 없는 진법이 학익진이다. 장군의 인문주의가 그것을 완성했다. 인문이 무엇인가? 인간의 조건을 완성하는 창의적인 인간의 가치다. 전쟁은 죽지 않고 살 수 없는 가장 야만적인 게임의 법칙이다. 살신성인하는 그것이 사유의 절정, 사즉생(死則生)이다.

모든 인간은 절망의 순간 현자가 된다. 장군의 시간, 사유의 흔적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먹의 농담(濃淡)으로 남았다.

8년 전 강연 날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선생은 몇 척의 배가 남았습니까? 파격적인 작업을 계속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나는 한 척의 배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지점이 내 좌표입니다. 나를 살게 한 것은 오직 사유, 사유의 힘입니다.” 내가 가장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물음이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다. 나에게 한 척의 배도 남아 있지 않다. 여기가 사유의 시작이다. 절망과 대적했던 내 사유의 열반이 배로 부활한다. 비로소 수백, 수만 척의 배가 된다. 사유는 추상이 아니다. 구상이고 실존이다. 모든 에너지를 작업에 쏟았다. 여분의 배가 남을 리 없다. 파격은 그냥 오지 않는다. 파격은 내적 혁명이며 내적 혁명은 사유의 꽃이다.

2022년, 조선의 귀선(龜船)은 무엇인가? 반도체다. 칩 4가 그것을 입증한다. 대만에서 반도체 산업은 호국 신기(護國神器)라 불리듯이 그 핵심은 반도체이다. 과거도 현재도 한국과 대만의 입지적 환경은 엄혹하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더 작은 것에 더 많은 것을 집적하는 일, 그것이 반도체다. 이는 절망적 환경에서 연전연승했던 위대한 장군의 부활, 사즉생 정신으로 무장한 기업하고 경영하는 대한국인들의 사유의 힘이다. 조선의 생살 여탈은 결국 우리의 몫이다.

장군께서 대한민국에 묻는다. “몇 척의 배가 남았는가?”

김아타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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