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수원의 능실종합사회복지관에서는 경기도 노인복지과에서 지원을 받아 글쓰기 수업이 진행되었는데 12강을 마무리하면서 시화전과 시낭송회가 열렸다. 그 시간에 줄곧 참여한 사람들은 정지용과 백석의 시집을 상으로 받았다.
“시라는 걸 처음 써 본 데다가 내가 쓴 시를 스스로 읽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게다가 시집 선물도 처음이고요.”
70대 중반의 참여자가 밝힌 소감처럼 80년, 90년을 산다 해도 세상의 첫 경험은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다.
탈북 청소년들에게 첫 기억을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 등에 업혀서 압록강을 건넌 기억이 나요. 발목까지 젖어들던 강물이 어찌나 차갑던지요. 강을 다 건너서 중국 공안에 잡혔어요. 총부리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외치는 엄마를 보다가 엉엉 따라 울면서 살려달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한참을 쳐다보던 공안이 총부리를 내리면서 가라고 하더라고요.”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떤 걸까. 뼛속까지 스미는 차가운 강물과 총부리를 그의 몸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때때로 정치인들이 말한다. 초심을 잃지 않겠다. 그러나 초심, 첫 마음은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가 찾았다고 생각한 초심은 또 다른 첫 생각일 뿐이다.
무척 기쁜 ‘첫’들도 있지만 무척 가슴 아프고 슬픈 ‘첫’들도 있다. 내 속 어디엔가 그러한 ‘첫’들의 무덤이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지금도 ‘첫’은 내 삶에서 진행 중이다. 처음 맞는 서른, 마흔, 쉰, 예순…. 이대로 간다면 첫 죽음이 다가오리라.
<월든>으로 유명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에 여동생 소피아에게 자신의 첫 저서 <강>의 마지막 장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동생의 책 읽는 소리를 듣다가 “이제야 멋진 항해가 시작되는군”하고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리다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에게 죽음이란 또 다른 멋진 시작이었던 것이다.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하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가 있다. ‘갓 태어난 송아지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그래서 모든 시는 세상과 삶을 새로이 첫 대면한 순간의 기록이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 상투성을 걷어내고 세상의 이면을 곰곰이 들여다보기. 그 과정에서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세상에서 맨 처음으로 꿈을 꾸었던 사람”(첫 꿈, 빌리 콜린즈)을 그려보고 “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 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의 첫, 김혜순)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 날 한 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새해 첫 기적’ 부분, 반칠환
밤새 내릴 것 같던 눈이 이 글을 쓰는 동안 어느새 그쳤다. 새해 첫눈을 밟으며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각각의 속도와 방식에 상관없이 ‘새해 첫 기적’은 시작되었다. 올해에도 많은 기적들이 이어졌으면 한다.
박설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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