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인생극장의 배우들

#배우1 : 필자인 나는 배우다. 정확히 말하면 ‘배우 호소인’이다. 일간지 연극담당 기자일 때 연극 출연을 꼭 하고 싶었다. 이 뜻을 기특하게 여긴 저명한 연출가가 기회를 줘서 배우가 됐다. 대학로 어느 대극장 무대서 데뷔했다. 쟁쟁한 출연진 틈에 끼어 ‘기자 역’을 열연했다. 분장을 하고 배우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정이 복받쳤다. 이후 순정한 연극 사랑이 짙어졌다.

#배우2 : 변호사 선배도 배우다. 첫 출연이 아직까지 마지막인 나와 달리 꽤 이름 있는 연극과 영화에 수차례 출연한 베테랑이다. 주연급도 있지만 대부분 단역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광역시 연극에 아역 출연이 계기가 돼 연기의 매력에 빠졌다고 한다. 섭외가 뜸한 요즘도 언젠가 불러줄 날을 고대하고 있는 준비된 프로다. 그 뜸한 이유를 묻고 놀리면 ‘몸값이 오른 탓’이라고 응수한다.

#배우3 : 다음은 진짜 배우 이야기다. 아무리 단역이라도 배우1과 2의 연기가 가짜일 리 없다. 여기서 진짜라 함은 ‘참’을 뜻한다. 참 배우, 배우다운 배우. 어느 작품이든 역할과 직분에 빈틈이 없는 배우를 나는 ‘참 배우’라고 부른다. 올해 여든이 된 배우 박정자는 참 배우다. 지난주 막 오른 팔순 기념 공연 <해롤드와 모드>는 그 증거물이다.

극 중 19세 청년과 교감하는 박정자는 사뿐사뿐 무대 위를 종횡무진하는 진짜 배우다. 한자로 배우(俳優)의 배자는 ‘사람이 아니다’는 의미. 사람이 아니면 신이어야 한다. 연기의 신이 있다면, 연극에서 훌륭한 연기를 펼치는 배우는 신이 아닐까? 배역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페르소나(persona, 가면을 쓴 인격)는 인간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다.

#배우4 : 배우 윤여정. TV 브라운관의 주인공이었던 그가 영화 <미나리>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5천년 한민족 역사의 첫 오스카상의 주인공. 칸느·베니스·베를린 등 명성 있는 유럽 대안 영화제가 있다 해도, 할리우드 아카데미 영화상은 주류 영화의 정상이다. 여기서 다른 부문이 아닌, 연기상을 탄 것은 가문의 영광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세계의 배우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국격의 차원을 높인 쾌거로 나는 본다.

#배우5? : 다섯 번째 이 자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바로 당신, 여러분이다. 우리의 일상은 배우의 삶이나 다름없다. 나를 감추고 상황에 따라 연기해야 하는 배우의 그것. 연기법으로 메소드 연기라는 게 있다. 의사면 의사, 기자면 기자 등 어떤 배역의 정형성에 몰입해 최대한 사실감(리얼리티)을 끌어내는 연기법.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메소드 연기의 현장이다. 리얼해야 덜 까이는 냉혹한 현장. 셰익스피어는 ‘세상은 무대요, 인생은 연극’이라고 했으니, 따지고 보면 배우로 살다가는 게 우리의 일생이다. 주연이냐 조연이냐는 그 사람의 몫.

보통 사람들은 조연보다 주연으로 살고 싶지만, 그 또한 허망한 일이다. 조연도 됐다가 주연도 되는 게 인생이다. 오스카상 조연상이 주연상과 다를 게 뭐람! 그때그때 주어진 자신의 역할에 올인하면 인생극장의 명배우가 될 수 있다. 윤여정의 오스카상이 우리에게 준 선물 같은 교훈이다.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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