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어느 화가의 노익장

노익장(老益壯)은 나이가 많음에도 젊은이 이상으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는 노인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의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에 전하는 이야기다.

나이 60이 넘은 대장군 마원이 반란군 진압을 위해 출전을 자원하자 광무제는 전쟁에 나가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며 만류한다. 이에 뜻을 굽힐 마원이 아니다. 그는 비록 예순이 넘었지만 아직도 갑옷을 입고 말을 탈 수 있으니 늙었다고 할 수 없다며 출정을 강행한다. 노장의 단단한 결기가 느껴진다.

노익장은 평소 마원의 좌우명이었다. ‘대장부가 뜻을 품으면 궁할수록 더욱 굳세고, 늙을수록 더욱 기백이 넘쳐야 한다’(丈夫爲志, 窮當益堅, 老當益壯). 마원은 이런 평소의 다짐을 난국을 맞이했을 때 유감없이 발휘하는 용기로 실천했던 것이다.

한 때 자주 쓰이던 노익장이라는 용어가 이제는 사어(死語)가 되다시피 세상이 많이 변했다. 요새 마원처럼 나이 60을 내세우며 노익장을 과시했다간 바보 취급받기 십상이다. 기대수명이 한참 높아지다 보니 여든 살은 돼야 노익장 소리를 들을까. 불과 얼마 전까지 만해도 생애 꼭 치러야 할 통과의례였던 61세 회갑연(回甲宴)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세태가 변했다고 노익장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아니 들어서 더욱 빛을 보는 노익장의 이야기는 시대와 세대를 떠나 여전히 깊은 울림을 준다.

최근 내게 감동을 준 노익장 한 명을 꼽는다면, 세계 첫 우주 관광의 꿈을 이룬 영국 버진그룹의 창업자 리처드 브랜슨이다. 심한 난독증 때문에 문서를 보지 못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거대 다국적 기업을 일궜다. 그런데 올해 그의 나이 ‘겨우’ 71살. 노익장이라고 부르기엔 아직도 어린 나이일지 모르겠지만, 우주를 향한 만인의 꿈을 현실화시킨 그 도전은 구국을 위해 전장에 나간 마원의 노익장 못지않다.

노익장은 전장과 우주, 정치, 남성의 세계에만 통하는 건 아니다. 창의성이 생명인 예술의 세계야말로 노익장의 보물창고다. 영국 화가 로즈 와일리 이야기도 그 목록에 들어갈 만하다. 1934년에 태어났으니 올해 나이 87세다. 76세에 ‘영국에서 가장 뜨거운 신예작가(<가디언>)’가 됐고, 여든이 넘은 나이에 세계 미술계의 슈퍼스타로 떠올랐으니 이보다 감동적인 노익장 스토리가 어디 있을까.

그런데 그 노익장이 더욱 와 닿는 이유는 한없이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그림의 세계 때문이다. 와일리는 전혀 때 묻지 않은 아이 같은 감성을 감미로운 색과 형태, 생물, 일상의 이야기, 위트 있는 기법으로 자유분방하게 표현하는 작가다. 그림 즉 회화의 장점을 맘껏 발산하면서 대중적인 방식으로 소통한다. 아흔을 앞둔 이 화가의 노익장이 고양 일산의 아람누리미술관에서 펼쳐지고 있다. 코로나19에 지친 마음을 위로받기에 충분한 시간이 될 터다.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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