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의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다고 하며,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다고도 한다.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하는데,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나름대로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세조 등의 왕이 재위한 조선 초기를 거치며 절은 계속 성장했고, 성종 3년(1472)에는 이 절을 더 크게 중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유학자들의 힘이 강해지고, 점점 숭유억불 정책도 강력해지면서 회암사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진다. 거대한 규모의 왕실 원찰이라는 지위는 유학자 입장에서는 이념과 맞지 않는 존재였다. 여러 차례 유생들의 상소로 공격받게 된다. 결국 명종 때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지원을 받으며 회암사에 거처하던 승려 보우는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맞아죽었고, 회암사 또한 16세기 후반에 원인 모를 화재로 인해 폐사가 되었다.
이런저런 수난과 전란을 겪은 결과 지금의 절터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의 방대함은 조선시대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회암사터의 발굴과정에서 국내 고건축유적중 최대규모의 온돌구조가 확인되었다. 고려말 학자 목은 이색의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의 기록에 따르면 ‘서승당’(西僧堂)에 해당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지난 2005년 발굴된 석실은 그 용도가 여러 가지로 추정되었나 유구의 분석결과 뒷간의 하부구조물로 확인되었다. 그 규모는 한 번에 20여 명이 용변을 처리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등학교의 화장실 설치 기준으로 따져보면 500여 명 이상을 수용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화장실의 실제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는 전시가 회암사지박물관에서 진행되고 있다.
회암사지 뒷간터의 발굴과정과 유구의 분석과정에서 확인된 기생충과 음식물 그리고 당시의 식기 등 생활사를 되짚어 볼수 있는 결과를 소개한다. 또한 실록을 비롯한 당시의 기록을 통해 회암사를 다녀간 인물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추론하고 있다.
특히 ‘뒷간을 상상하다’에서는 길이 12.8m의 석실 위에 건축된 최대 24명의 인원이 동시에 사용 가능했을 회암사지 뒷간의 구조를 추정해 현재 남아있는 유구의 형태와 동시대의 건축양식을 토대로 뒷간의 입구부 일부를 실제 크기에 가깝게 재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뒷간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과 영상을 통해 해우소의 다양한 의미를 새겨볼 수 있다.
뒷간은 절집의 일부이지만 이 전시를 통해 회암사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어 관련 연구가 지속적으로 확충되고, 예전의 화려한 모습을 재현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김상헌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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