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북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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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갑자기 찾아온 더위를 탓하며 북한산을 올랐다. 구파발에서 일행을 만나 산아래 마을에서 냉면 한 그릇으로 더위를 가라앉히고 출발하였다. 바로 접어드는 산길은 녹음이 한창인지라 옆을 흐르는 계곡물과 함께 조금 전에 느끼던 더위를 한결 누그러지게 한다. 산길은 널찍하게 잘 정비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이십분 남짓 올라 대서문에 이르렀다. 북한산성의 정문 중 하나다.

 

북한산성은 북한산에 쌓은 산성이다. 조선 숙종 때 축성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건축기간은 반년 정도인 걸로 미루어 이전의 중흥산성을 기반으로 더 높이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산성에는 모두 14개의 성문이 있는데 대서문은 그중 가장 크고 편한 길로 연결되는 주된 연결 통로다. 대서문을 지나면서 경기도다.

 

다시 십여 분을 올라가면 계곡을 따라오던 길과 만나면서 제법 너른 공터가 나온다. 식당과 민가가 있는 남한산성과 달리 북한산성 내에는 다른 시설이 없다. 이곳은 원래 식당이 모여있어 등산객들을 맞았으나 정비사업을 통해 모든 시설을 산아래 이전하였다. 예전 북한동의 모습은 북한동역사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십여 분을 더 오르면 중성문에 이른다. 북한산성의 서쪽의 평탄한 지형을 보완하기 위하여 쌓은 중성의 출입문이다. 사실 북한산성으로 가는 다른 길은 상당한 수준의 등반이니, 조선시대에도 거의 대부분의 인원이 이 문을 통했을 것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중흥사와 산영루가 보인다. 북한산성 안에는 제법 많은 절이 남아있다. 축성 후에 13개의 사찰이 산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하는데 중흥사는 이들을 관장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기단과 주춧돌만 있었으나 발굴조사 후에 건물을 복원하고 있다. 산영루는 중흥사 앞에 위치한 누각인데, 산그림자가 수면에 비치는 곳이라 하여 이름 붙인 곳이다. 계곡에 제법 넓은 웅덩이가 있어 많은 시인문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다. 홍수로 사라지고 초석만 남아있던 곳인데 최근에 복원하였다.

 

중흥사에서 십여 분을 더 올라가면 행궁지가 나온다. 북한산 상원봉 아래 위치한 이 행궁은 산성과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행궁은 내전과 외전, 부속건물을 다 하면 백여 칸이 넘는 규모다. 전란에 대비해 지어졌지만 실제로 활용되지는 않았다. 숙종과 영조가 이곳을 찾은 기록은 있으며, 평소에는 서고를 마련하여 선원록과 왕실의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1912년부터 15년까지는 영국 성공회의 선교사들이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기도 하다가 1915년의 큰 비로 산사태가 나면서 매몰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행궁터는 유적의 발굴과 정비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산사태로 매몰된 터를 걷어내면서 남아있는 초석과 축대의 위치를 잡아가면서 정리하는 중이다. 선교사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촬영한 사진을 통해 우리는 과거 행궁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축성기록이 남아있고, 한세기 전까지 그 자리에 있던 건물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는 것은 원형성을 살피는 중요한 자산이다. 건물의 기초 원형도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라 복원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산길을 내려오면서 간간이 올라오는 등산객들 중에는 외국인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이 왜 이곳을 찾는지 궁금증이 생겼다. 뭔가 좋다는 것을 느끼나 보다, 공감하는 가치가 있다고 짐작만 할 뿐이다. 낯선 이에게 가는 길 멈추고 물어보기에는 너무 지쳤다.

 

김상헌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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