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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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광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놈의 콩나물대가리만 보면 어지러워” 여기서 ‘콩나물대가리’는 음표를 뜻한다. 누구나 한두 번쯤 악보를 접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악보를 보면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검은색의 음표다. 음표를 점차 익히다 보면 또 다른 존재를 발견한다. 쉼표다. 쉼표, 보편적으로 한 마디 안에 4박자부터 1/4 박자까지 쉬도록 되어 있다.

 

거장 작곡가들의 쉼표를 살펴보자. 이들에게 쉼표의 존재란 단순히 연주를 멈추는 행위를 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전파시대의 선두주자, 유복한 생활을 즐긴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은 쉼표를 유머와 위트의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하이든에게 레슨도 받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는 짧지만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모차르트의 쉼표는 절규와 한탄이 내포되어 있다. 모차르트는 중요한 전환점에서 절묘하게 쉼표를 사용하여 극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 

모차르트를 존경한 독일 출신의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은 신과 자신 외에는 누구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다. 베토벤의 쉼표는 열정을 나타낸다. 베토벤은 크레셴도(점점 크게)를 쉼표 위에도 적용시킨다. 그는 쉼표에서도 열정의 표출이 중단되지 않고 오히려 증폭되도록 요구한다. 베토벤을 흠모한 독일 출신의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는 마치 쉼표가 신에게 보내는 신실한 메시지 또는 우주를 아우르는 휴머니스트의 외침같기도 하다.

 

브람스의 쉼표는 단지 쉬는 것(rest)이 아닌 침묵(silence)으로 드러난다. 한 곡의 하이라이트에서 오케스트라 전체가 중요한 부분을 반복적으로 연주하다가 갑자기 짧은 쉼표를 통해 정지된 느낌을 준다. 이때 소름 끼치도록 짧은 쉼표는 오히려 뜨거운 침묵으로 청중에게 전달된다. 위의 서술은 전적으로 나의 개인적인 음악적 해석이다.

 

존경하는 작곡가들의 사용한 쉼표가 어떻게 우리 주변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해본다. 첨단 디지털시대에 우리는 원하는 많은 것을 영상으로 남길 수 있다. 이전 아날로그시대의 영상기법은 나 자신을 제외한 ‘남’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주요한 미션이었다면 오늘의 디지털시대는 셀카라는 혁명을 통해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진화되었다. 대학원시절 나의 스승님은 이런 회한의 표현을 자주 하셨다.

 

“Shinik, a life is a full of memory (신익군, 인생이란 기억을 채워가는 것에 불과하네)” 그 당시에는 교수님의 표현을 완전히 이해하기 쉽지 않았지만 이제는 절절히 동감한다.

가슴 뛰는 순간들, 귀가에 맴도는 정감어린 대화들, 사랑하는 사람들의 잊을 수 없는 촉감들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어릴 적 아버지는 나의 작은 손을 크고 따뜻한 손으로 감싸 쥐고 산동네를 아무 말없이 걸으셨다. 

나는 아버지의 온기를 기억한다. 연주 후 땀 흘리며 무대에서 내려오는 나를 안타까운 눈길로 멀리서 바라보는 어머니를 나는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나는 어머니가 가슴 아파하실까봐 가깝게 갈 수 없었다.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면 다시 가슴이 저려온다. 그런 어머니의 미소가 그립다. 사랑스런 첫 딸을 가슴에 안으며 스치던 놓치고 싶지 않은 부드러운 촉감! 최첨단 디지털카메라가 이런 그리움의 추억들을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위대한 작곡가들이 남긴 방법을 쓰기로 했다. 숨을 크게 그리고 길게 들이마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도 부족한 것은 그리움이라는 단어로 채워놓기로 했다.

쉼표를 통해 그리움을 위로받을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발견이 아니겠는가?

함신익 심포니 송 지휘자·예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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