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온갖 것에 지는 내 정체를 들킨 것 같아 가슴이 철렁했다. 치열하게 살지 못하고 편함과 자그마한 욕망들에 지는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러운데……. 조금 전 이층 매장에서 일주일치의 식자재와 한 달치의 양식을 사면서 살까 말까 만지작거린 물건들, 한순간 혹했던 의상들, 때마침 저녁 무렵이라 시식 코너를 지날 때마다 입에 고이던 침들. 그래서 대형마트에 올 때마다 범속해지는 자신이 싫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장보는 횟수를 줄였던 것이다.
“오늘도”라는 말의 뉘앙스는 또 어떤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대형마트에 새 직원이 들어왔음에 틀림이 없다. 새 마케팅 전략은 고객의 약점을 찌르고 들어가는 것이리라. “도”라는 조사에서 이것이 일회성이 아니라 늘 있어온 일이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조금 전 마트 계산대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줄을 서서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직원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오늘 세시부터 비가 예약되어 있어”
“주문이 밀려 있는데 언제 다 배달하지? 비 오기 전에 배달 끝내야 할 텐데.”
기상청에서 예보한 비는 예약된 비로, 예약했다 취소하면 그만인 비로 이들의 머릿속에 입력돼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트에는 예약돼 있는 것 투성이다. 주문받아서 배달이 예약돼 있는 고등어·시금치·소고기 등 식품과 라면·샴푸 등 공산품, 그리고 이곳을 이용하는 우리들에게는 죽음이 예약돼 있다.
대형마트에만 들어서면 빽빽한 상품들의 미로에 갇혀서 어리바리 미아가 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 마트에는 미끼 상품이라는 게 있다. 시중보다 훨씬 싼 가격에 나온 생필품을 보면 앞뒤 잴 것 없이 사고 보는 습성이 내게는 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품을 사놓고는 후회하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생각해보니 나는 늘 항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상에, 자본주의의 속성에, 거짓 욕망에, 자신의 비겁함에, 희망불가의 현실에…….
오늘도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키며 꼭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사고 ‘성공했다’며 자축하는데 “항복하세요”라니, 너무 하다 싶었다.
정말 내가 항복하고 싶은 대상은 따로 있다. 아기의 살보다 더 촉촉하고 부드러운 꽃잎에, 그 향기에 항복하고 싶다. 비를 “움직이는 비애”라고 표현한 김수영의 시 한 구절,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는 이성부의 ‘봄’에 항복하고 싶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하고 맑은 눈망울, 거기에 담긴 소망에 항복하고 싶다.
누가 저런 문구를 무례하게 떡하니 걸어놓았을까 혼잣말하며 출구를 빠져나가려는데 아, “오늘도 행복하세요”라는 문구가 온전히 다 보인다. 천장에서 아래로 드리워진 조명 하나가 공교롭게 “행복”을 “항복”으로 보이도록 시야를 방해했던 것이다. 지레 잘못 읽은 글자에 항복한 꼴이었다.
밖에 나오니 내가 늘 항복해 마지않는 맑은 하늘이 그러니까 너는 한 수 아래라는 듯이 환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세먼지 없는 민낯이었다.
박설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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