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

하루하루를 길고 지루하게 만들었던 폭염과 태풍의 나날도 어느덧 지났다. 하지만 열대야는 물러간 지 오래인데 아직도 나는 불면의 밤에 종지부를 찍지 못하고 있다. 중독 된 듯 빠져 나오기 어려운 스포츠의 매력, 올림픽 경기 관람의 재미 때문이다.

나는 운동신경이 발달한 편이 아니다. 학창 시절 몸으로 경쟁하는 거의 모든 종목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지금의 직업도 지극히 정적인 것이라 땀을 흘리며 숨차게 달리는 일 따위와는 완전히 무관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처지와 상관없이 나는 항상 스포츠 관람을 좋아했고 스포츠 자체를 즐겨왔다.

작은 분교의 관사에 살면서 군인아저씨들이 벌이는 ‘군대스리가’ 축구 경기를 관람하며 인류 최고의 정열적인 스포츠 축구를 즐겼고, 그것이 독재정권의 ‘3S’정책인지 무엇인지 문제의식도 가질 수 없었던 국민학교 때부터 OB베어스의 최고투수 박철순의 부침을 바라보며 퍼즐처럼 집요하면서도 그 속에 숱한 이야기를 가진 야구의 재미를 알았다.

어린 나의 영웅들은 네 번 쓰러져도 다섯 번 일어나는 홍수환과 라면을 좋아한다는 말이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보도로 와전된, 어쨌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달리던 임춘애였다.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기도 하다. 정보통제가 극심하고 욕망의 탈출구가 제한되었던 시절, 우리의 극적이고 자랑스러운 영웅들은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는 또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그토록 금메달에 목을 걸고 공식적으로 집계하지도 않는 국가순위에 일희일비했던 기억은 차라리 한 편의 코미디였다. 2등은 존재하지도 않고, 그나마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은 패잔병의 모습으로 남의 눈을 피해 입국해야 했던 시절. 그때 스포츠는 스포츠가 아니라 전투였기 때문이다. 불행한 근현대사를 가진 아시아 변방의 나라가 유일하게 스스로를 과시하고 선전할 수 있었던 기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반의 진실이 그렇다고 하여 나머지 절반의 진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그들은 분명히 우리에게 감동과 환희를 주었다. 일상의 가난과 피로에 찌들고 비겁함에 주눅들은 우리를 일시에 고양시키는 신비로운 체험을 선사했다.

우리는 그 뻔하게 반복되는 드라마에 기꺼이 감동 받았다. 역경을 이겨낸 불굴의 투지, 각본 없는 휴먼 스토리. 우리와 꼭 닮은 못나고 초라한 얼굴들이 필사적으로 스스로의 틀을 깨고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비로소 생을 긍정했다. 어떻게든 계속 살아내야만 할 이유, 그 거룩한 존재의 의미를 알았다.

의미야 차치하고라도 일단 운동 경기 관람은 즐겁다. 나는 손에 땀을 쥐며 내 맘이 닿는 선수를 응원한다. 오직 맨몸뚱이 하나로 거짓 없이 이 생애와 맞서는 나의 투사를 응원한다. 여실히 아름답고 찬미할만한 육체가 한껏 기예를 펼쳐 보이며 비상한다.

이제는 그놈의 금메달 타령을 듣지 않아도 될 만큼은 세상이 성숙해지고 살만해져서 다행이다. 땀방울을 쏟아낸 선수들 모두를 치하하는 목소리들이 이번 생에서 썩 별 볼일도 없고 성적조차 시원찮은 모두를 격려하는 듯하여 듣기 좋다.

물론 번쩍거리는 금메달을 딴다면 더욱 좋겠지만, 우리의 레이스는 경기가 끝나고 관객이 모두 떠난 후에도 지속된다. 지치지 말고, 쓰러져도 일어서 끝까지 가야 할 일이다.

/김 별 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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