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누구에게나 살아갈 권리가 있다

춥지 않은 겨울이 계속되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극지의 빙산이 녹고 머지않은 미래에는 한반도도 아열대 기후가 될지 모른다 하니, 인간의 탐욕을 응징하는 자연의 저항인가 싶어 따뜻한 겨울도 마냥 반갑지 않다. 하지만 예년 같지 않은 포근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번 겨울에 느끼는 추위는 별다르다. 침체된 서민경제가 끝을 모르고 추락하면서 연일 들려오는 가슴 아픈 소식들 때문이다.

엊그제도 세상에 저항력을 잃은 무기력한 한 가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자살이라는 가장 극한 방식으로 자기의 절망을 호소하며 스러졌다. 자살에 대한 도덕적인 비난은 밀쳐두자. 하지만 그가 목숨을 끊기 전 다섯 살짜리 아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일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책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작 다섯 살 배기 아들의 미래를 왜 아버지 마음대로 재단하고 판단했는지, 그가 아들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면 자식은 결국 부모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한 아이의 어미인 나는 원치 않았던 죽음을 맞이한 어린 생명을 생각하며 가슴 아팠다. 아이가 세상에서 아버지에게 느낀 ‘공포’라는 마지막 감정보다, 아이를 거친 세상에 홀로 두고 떠나지 못해 함께 데리고 가야 했던 아비의 ‘사랑’이 더 컸을까? 나는 아무래도 그 무서운 사랑을 용납할 수 없다.

세상이 고아에게 얼마나 가혹한지 전부 상상할 수는 없다. 아이를 죽여야 했던 아버지도 오직 그 가혹함을 상상하기만 했을 뿐 실제로 겪지는 못했을 것이다. 세상의 냉대와 비정함은 상상보다 클 수도 있지만, 아이가 그것을 견디고 극복하여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아버지의 상상을 뛰어넘을 수 있다. 고아원에서도 아이들이 자란다. 교육을 받고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한다. 부모의 공백은 영원한 결핍으로 남겠지만, 최소한 자기 몫의 삶을 살아갈 권리를 가진다. 우리 사회가 아직 관용으로 충만한 곳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어쩌면 비정한 사회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가족에게 개인의 행복에 관한 모든 것을 떠맡기고 그 배타성을 허용하는 가족이데올로기다.

아침 산책길에 자주 만나는 아이 하나가 있다. 등교 시간은 벌써 한 시간쯤 지났는데, 아이는 이제야 학교에 가고 있다. 늦잠을 잔 것이 아니다. 아이의 다리는 휘청거리고 어깨에 멘 가방이 무거워 보인다. 내 아들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는 두 개의 특수학급이 있는데, 다운증후군 장애를 가진 아이는 그 반의 소속인 듯하다. 3학년쯤 되어 보이는지라 배웅하는 부모 없이 혼자 등교한다. 언제까지 부모가 부축해줄 수는 없기에, 모질게 마음을 먹고 등 떠밀어 내보낸 길이리라.

아이는 작은 돌부리 하나에도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기 일쑤다. 늘 통과하는 작은 교문이 닫혀있으면 큰 교문이 활짝 열려있어도 들어갈 길을 찾지 못해 헤맨다. 손을 끌어 큰 교문으로 들어가라고 하니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꾸벅 인사한다. 발길을 멈추고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세상을 살아가기에 아무리 버거운 장애가 있어도 아이는 간다. 살겠노라고, 제 몫의 삶을 감당하리라고 아이의 뒷모습이 웅변한다. 누구에게 타인의 삶을 행복하리라 불행하리라 추측하고 판단할 자격이 있는가. 사회도, 그를 낳은 부모마저도 그럴 권리는 없다.

빗나간 어리석은 ‘사랑’으로 살해된 어린 생명의 명복을 빈다.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