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울 도심의 대형서점에 들렀다. 출판가의 장기침체가 예사롭지 않다지만, 종합병원에 가면 어쩌면 아픈 사람이 이다지도 많은가 새삼 놀라는 것처럼 그래도 서점엔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일은 도서관의 서가를 거니는 것과 또 다른 재미를 준다. 빳빳한 신간서적과 베스트셀러들, 지금 이 순간의 소용과 필요를 위해 출간된 책들을 뒤적이며 종이 위에 선명하게 인쇄된 타인의 꿈을 엿본다.
하지만 서점을 돌아보는 내 발걸음은 웬지 차츰 무거워진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매대에 높다랗게 쌓인 책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경박한 현실 때문이다.
책을 고르는 사람들의 표정은 자못 심각하다. 눈에 잘 띄고 발길이 닿기 좋은 곳에 아예 따로 판을 벌인 그 책들은 하나같이 날렵한 표지에 금박 은박 글자가 번쩍거린다. 저마다 원조를 내세우는 향토음식 거리처럼 이 책이야말로 ‘필수’이며 ‘실전’에 가장 적합한 우리 모두의 ‘베스트셀러’라고 광고한다.
그들의 제목에 하나같이 박힌 단어는 바로 ‘부자’. 몇 억을 몇 년 만에 버는 법, 몇 살에 몇 억대 부자 되는 법, 나는 이렇게 해서 바야흐로 부자가 되었다!
부귀와 영화를 꿈꾸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오랜 소원이다. 누구든 세상에 한 번 태어나 살면서 가난과 불운에 시달리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돈은 사람이 바라는 많은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이다. 때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기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돈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래서 어찌 보면 돈은 자유의 도구다. 돈이 없고 돈을 벌 능력을 갖지 못했을 때 사람은 돈 그 자체의 노예로 예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나는 부자가 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지만, 남의 우물에 진흙 풀 듯 내가 원치 않는 소원이라고 남의 뜻을 폄하하거나 훼손할 생각은 없다.
사실 나는 서점 매대에 매달려 부자가 되는 비법을 허술한 책 몇 권에서 찾는 소박한 사람들이 모두 부자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음은 그 책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그들조차 번연히 알게 될 것이다. 어디에도 ‘비법’이란 없고 ‘실전’은 오로지 공짜라곤 없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 몸을 부딪쳐 치러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 말이다. 그리고 ‘부자’에 관해 써서 베스트셀러를 만든 저자들은 실제로 자신이 부자이기보다 그 책을 팔아 부자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사실도.
나는 지금도 낱장마다 글자가 빽빽하게 박힌 두꺼운 책을 좋아한다. 말초적인 감각을 자극하기보다는 지루하고 따분하나마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둔중한 감동을 주는 고전을 사랑한다. 그것들이 진열된 서가는 해가 바뀔수록 점점 구석으로 몰리고 장소도 협소해진다.
그나마 입시생들의 ‘필독서’가 아니라면 번역되어 출판되지 못한 불후의 명작들도 수두룩하다. 발자크와 토마스 만과 에밀 졸라가 어떻게 잘 먹고 잘 사는 법을 가르치겠는가. 그들이 엿본 세계와 삶의 비의가 어떻게 좋은 대학의 간판을 따주겠는가. 오로지 그 천잡한 이유만으로, 그들의 작품은 서서히 도태된다. 초판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한 책은 절판되어 헌책방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대형서점 귀퉁이 서가에 등을 기대고 앉아 가슴 두근거리며 그것들을 읽곤 한다. 모두가 파랑새를 쫓아 동분서주할 때 나는 빈 새장을 부둥켜안고 기다리리라. 나는 아직도 돈이, 물질이 행복의 절대적인 조건이 될 수 없음을 확신하는 시대착오적이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래서 더욱 진정한 행복을 갈구하는 사람이다.
/김 별 아 소 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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