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예산, 시민참여가 필요하다

시청, 군청이 지역 사회에서 갖는 의미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매우 큰 자금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의미도 있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시군은 3천억 원에서 2조원, 도청은 10조원에 이르는 매우 큰 현금을 운영한다. 그러나 민간기업과 달리 그 현금의 주인은 시민이다. 정부가 공권력으로 징수한 세금이긴 하지만, 그것은 주민이 정부에 이용을 위임한 것이다. 문제는 대리인으로서 정부가 그것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느냐이다. 복잡한 절차, 난해한 용어, 접근이 차단된 폐쇄성 등으로 인해 시민은 예산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 지를 확인할 기회도 없었다. 예산은 정책이 실현되는 수단이고 우리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사업임에도 시민은 예산 과정에서 수동적인 지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민주화의 진행 속도에 따라 예산과정에 참여하려는 시민의 노력이 활발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예산 집행과정에서 발생하는 낭비를 지적하는 사후적인 참여이었으나 이제는 사전적 참여로 바뀌고 있다. 공무원의 예측 능력 부족, 중복 투자, 활용되지 않은 시설, 현장과 괴리된 결정 등으로 인한 예산 낭비가 지적되면서 시민의 분노가 분출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책상에서 결정되는 과정, 몇몇 소수자의 솔깃한 말에 경도되어 결정되는 관료적 절차에 맡길 수가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투자가 잘못되면 민간 기업은 망한다. 그래서 민간 기업은 생사를 걸고 예산을 결정한다. 반면 정부는 매년 세금이 들어오기 때문에 책임의식이 결여될 가능성이 크다. 공조직에 나타나기 쉬운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방지하기 위해 예산 과정의 시민 참여가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앙정부는 다음 회계연도 90일전(10월 1일경)까지 제출하면 30일 전까지 국회가 결정한다. 그래서 이미 예산안이 국회에 되었다. 경기도는 다음 회계연도 50일전(11월 10일경)까지 의회에 제출하면 15일 전까지 의회가 결정한다. 각 시군은 40일 전(11월 20일경)까지 제출하면 10일 전까지 의회가 결정한다. 그래서 지역 주민의 입장에서 지금이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집행부가 예산 제출을 앞두고 마지막 사업 조율을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과거와 같은 일방적 홍보인 공청회가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지역 사회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정부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검토 받는 기회도 갖고 민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활용하는 기회도 가질 수 있다. 이는 주민에게 사전적으로 정보를 공개하는 의미도 있다. 최근 안성시에서 개최한 예산정책 토론회에 참여하면서 참으로 소중한 이야기를 들었다. 시민은 이런 자리를 마련하여 준 것 자체에 대해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했고, 공무원은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함께하여 주는 시민이 있어서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러한 노력이 축적될 때 우리 사회의 신뢰 수준이 제고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하였다. 예산에 대한 주민의 관심 제고는 민주 시민사회에서 권리이자 의무이다. 이제 고조되고 있는 시민 사회의 참여 욕구에 대해 정부가 성실하게 대답을 해야 할 시기이다. 이원희 한경대 행정학과 교수

놀아도 논 근처에서 놀아

동화를 쓰는 관계로 이런 저런 모임에 불려 나가 이야기를 하곤 한다. 며칠 전엔 젊은 주부들의 문학 모임에 초청을 받았다. 한 시간 남짓 문청 시절의 이야기와 그동안에 쓴 동화 이야기를 했더니 다들 재미있게 들어주었다. 강의를 마치고 단을 내려서려는데 한 주부가 손을 들더니 질문을 한다. 선생님은 등단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작품을 내놓는데 그 비결이 뭐냐는 거였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한 뒤 이렇게 되물었다. 농사꾼의 농사 철학이 뭔지 아십니까. 그랬더니 그 주부는 “열심히 땀흘려 일하는 거 아니에요”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하나를 더 덧붙였다. 농사꾼은 놀아도 논 근처에서 놉니다. 작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놀 일이 있어도 멀리 가지 않고 글 근처에서 노는 일, 이게 중요합니다. 제가 뛰어난 글은 아닐지라도 꾸준히 동화를 써내는 것은 되도록 글 근처에서 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적 앞 집에 에헴 노인이 계셨다. 항상 뒷짐을 지고 다니면서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한다고 해서 에헴 노인으로 불린 분이다. 이 에헴 노인의 하루 일과는 늘 같았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사립문을 나서서 집 근처 논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오는 게 고작이었다. 남들이 어딜 다녀오느냐고 물으면 그냥 심심해서 바람 좀 쐬고 온다고만 하셨다. 점심 때도 그랬고, 저녁 때도 그랬다. 조금 커서야 나는 에헴 노인의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노인은 한시도 논을 떠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쉬어도 논 근처에서 쉬었던 것이다. 노인의 벼 수확이 동네에서 가장 많은 이유는 거기 있었다. 내가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작가의 길에 들어섰을 때 마음속에 다짐한 것은 바로 그 에헴 노인의 농사 철학이었다. 나도 항상 글 근처에서 살자. 놀아도 글 근처에서 놀고, 잠을 자도 글 근처에서 자자. 나는 남들에 비해 안 가진 게 몇 가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자동차다. 내가 생각해도 참 이상한 것이 내 차를 가져보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지금까지 한 번도 없다. 우리 집사람은 내가 겁이 많아서 차를 못 가진다고 하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하지만, 조금이라도 글 근처에서 지내려고 차를 안 가졌다. 만약에 차를 가졌다고 가정해 보자. 운행을 하는 동안 나는 어쩔 수 없이 기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앞뒤는 물론 좌우의 차를 살펴야 할 것이고, 신호등은 물론 이정표도 열심히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 제아무리 좋은 풍경이 있어도 눈에 담기는 어려울 것이 틀림없다. 글 한 줄 생각하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대중교통의 단골 손님이 되었다. 주로 버스를 타고 다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전동차도 타고 택시도 탄다. 또 멀리 갈 일이 생기면 기차로 이동한다. 내 스스로 선택한 이동 수단이다. 대중교통은 내게 무한한 자유를 선사한다. 기차나 버스에 몸을 의지하고 산과 들녘을 바라보는 그 즐거움. 책을 펴 들 수도 있고, 상상의 날개를 펼 수도 있으니 이 얼마나 달콤한 자유인가. 아니 가슴 설레는 여행인가. 내 동화의 대부분은 버스나 기차 안에서 얻었다. 그러니 이런 행복한 여행을 놔두고 그 따분하기 짝이 없는 기사 노릇을 왜 자청하겠는가. 며칠 후면 새 동화책이 나온다. 서늘한 가을 바람을 타고 서점마다 놓일 새 책을 생각하면 어린애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이 역시 농사꾼의 철학 속에서 얻은 삶의 수확이다. 놀아도 글 근처에서 놀았기에 얻은 기쁨이다. 윤수천 동화작가

대중교통이 편리한 경기도를 기대하며

9월20일부터 서울과 경기도를 운행하는 광역버스를 이용할 때에도 환승할인 혜택을 받게 되었다. 한 사람당 연간 50만원의 교통비를 절감할 수 있다고 하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07년 7월 서울과 경기도를 운행하는 일반버스, 마을버스, 지하철·전철간에 환승할인이 이루어졌을 때 많은 대중교통 이용객들이 환영하였다. 지금은 언제 그랬냐 싶지만 한때 경기도의 대중교통은 참 불편했다. 시 경계를 넘나드는 버스를 탈 때면 버스 운전기사한테 어디를 가는지 알려줘야 했고, 기억력 좋은 기사는 요금표를 다 외우고 있다가 내야 할 요금을 알려 주곤 하였다. 타는 사람마다 목적지를 물어봐야 하니 승차시간이 오래 걸려서 정류장 정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서울은 환승할인이 2004년 7월부터 이루어졌는데 경기도는 2007년 7월 이전까지는 환승할인이 이루어지지 않아 서울주변 도시에서는 환승할인 혜택을 받기 위해 혼잡한 서울버스를 골라 타는 일도 생겼다. 불과 1년 3개월전 경기도 대중교통의 모습이었다. 이제는 이러한 문제가 다 없어지고, 승객은 이동한 거리만큼만 요금을 내도록 바뀌었다. 민선 4기 경기도가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고 하면 많은 도민들이 대중교통 환승할인을 꼽고 있다. 광역버스 환승할인까지 이루어진 이 시점에서 경기도의 대중교통을 보다 편리하게 만들기 위한 최우선 과제는 버스노선 체계의 개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거리를 다니는 광역버스가 동네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는 현재의 노선체계는 바뀌어야 한다. 도시간 주요 지점을 연결하는 버스노선은 직선화하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버스와 환승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간선도로를 운행하는 버스의 통행속도를 높이기 위해 버스전용차로를 확대 운행하여야 한다. 노약자와 장애인들이 이용하기 편리하게 저상버스도 확대해 나가고, 도시에 있는 정류장에는 버스 도착시간을 알려주는 정보표지판도 확대 설치할 필요가 있다. 농어촌지역에는 버스운행 시각표를 정류장에 설치하여 하루에 몇 대 다니지는 않지만 언제 오는지 시각만이라도 알 수 있게 해 주면 좋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산과 관련이 있다. 그동안 경기도에서는 일반시내버스 환승할인에 1천200억원 정도의 예산을 투입하였는데, 이번에 광역버스 환승할인까지 실시하게 되면 내년부터는 1천500억원 이상의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도민에게는 정말 필요한 서비스이지만 그에 따른 비용도 엄청나다. 외국의 경우는 대중교통을 정부에서 제공해야 하는 기본 서비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중교통 운영에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중앙정부의 교통예산을 도로건설에 우선 투자하고,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에 대한 예산지원은 부족하여 광역자치단체 자체예산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현재 정부에서는 저탄소 녹색성장을 외치고 있는데, 승용차 위주의 교통체계보다는 철도와 버스 중심의 교통체계로 변화시킬 때 지속가능한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향후에 경기도의 대중교통 서비스가 지속적으로 개선되어 나가기 위해서는 자체 예산도 안정적으로 투입되어야 하겠지만, 중앙정부로부터 대중교통 운영과 관련한 예산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개선을 요구하는 노력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2010년쯤에는 경기도의 대중교통이 훨씬 더 편리하게 개선되어 있기를 희망한다. 조응래 경기개발연구원 부원장

이 사회에 진정한 선생님이 필요하다

필자는 어릴 적 잘못된 짓을 하면 선생님이나 부모님으로부터 회초리로 아프게 맞았던 생각이 난다. 울면서도 다시는 안하겠다며 두 손으로 싹싹 빌고 반성문도 썼다. 그리고는 가능하면 같은 일로 다시 혼쭐이 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떤 경우에는 내 친구도 같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은 적이 있다. 이 시대에 생각해 보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선생님이란 명칭은 옛부터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에게 쓰이는 단어다. 단지 돈이 많다고 해서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양심과 풍부한 경험, 전문 분야에 뛰어난 소질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선생님의 지위가 하락되고 샌님, 고리타분한 사람, 월급쟁이, 틀에 박힌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도대체 우리 사회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언젠가 혼자 사는 할머니가 죽었는데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아서 며칠이 지나서야 이웃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그의 죽음을 알았다는 뉴스 보도가 있었다. 이 뉴스를 접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물질만능주의의 세상에서 우리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누구도 주변에서 자신의 잘못됨을 말해주지 않고 각자 자신의 일에만 신경 쓰는 이기주의적 현상이 사회 전반에 걸쳐 발생하면서 서로의 일에 방관하고 심지어 이런 사건까지 발생하는 사회에서 살게 됐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며 살고 있다. 무슨 일이든지 빨리빨리 해야 하며 결과에 대해서도 빠른 답을 요구하고 있는 현실은 덕분에 IT 최강국의 한국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물적 자본이 부족한 우리의 현실은 인적자본의 무한경쟁 속에서 살고 있기에 지식위주의 학교 교육은 인간성보다 우수한 인재를 키우는데 주력을 쏟고 있으며 존경받는 선생님보다 능력을 인정받는 직업적 선생님을 만들어 가고 있다. 지식정보화의 세계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과 같이 한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매를 들어 잘못 됨을 지적하고 꾸짖는 풍토가 아쉽다. 엄하게 자란 자식일수록 부모에게 효도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예를 우리는 많이 보았다.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한다면 소신을 갖고 가르치는 선생님을 부모들이 먼저 존경하는 사회가 돼야 할 것이다. 진정한 이 시대의 선생님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우리가 지켜가야 한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인생 한방이라는 생각으로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누군가가 먼저 용기 내어 만류하고 그것이 잘못 되었음을 따끔하게 충고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감히 어느 누구도 그 조언을 하려 하지 않는다. 고래를 춤추게 하는 칭찬도 중요하지만 잘못되어 간다고 생각하면 무섭게 호통치며 바른길을 가르쳐 줄 수 있는 호랑이 선생님이 이 시대의 진정한 선생님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로 지금 당신이 우리 사회의 선생님이 되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김동훈 홍익대 건축대학 교수 경기도건축사회부회장

허상 그리고 실상

경제 개발기엔 영·호남 갈등이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발전이 되고 나니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갈등이 노정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경기도가 서 있다. 중앙의 각종 언론에 김문수 도지사가 1면을 차지하고 있으니 정치적인 쟁점화에는 성공한 듯하다. 경기도 정치인들이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사실 국회가 새로이 구성되고 나면 의례적으로 수도권 국회의원이 수도권정비계획법 수정안을 제출하지만 상징적 행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통령 선거 이후 기싸움 양상을 보이면서 보다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다. 무엇이 수도권인가. 흔히들 수도권이라고 하면 강남, 서초 등을 떠올린다. 그래서 수도권에 사는 사람은 아파트 하나에 몇 십억씩 하는 상상을 한다. 지역에 있는 인사들은 이런 밀집지역에 더 투자를 해 봤자 국가경쟁력 제고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지역의 가난한 농촌 지역과 비교한다. 꿈과 미래가 사라진 지역사회에 비친 수도권의 화려한 고층 빌딩과 사치스러운 모습은 우리 사회의 균열을 야기하는 소재가 된다. 비수도권에 있는 한 전문가의 다음 표현은 지역의 정서를 고스란히 전갈하고 있다. “세계화의 탈을 쓴 수도권의 경쟁력 강화라는 관점에서의 수도권 집중 강화 시도는 정부정책의 혼선을 가져오는 것으로서 지금까지 ‘지방의 재발견’이라는 미사여구 속에서 지역균형발전의 꿈을 갖고 있던 지방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사실 수도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기도 하다. 수도권에는 군사보호구역, 상수도보호구역으로 묶여서 주민의 기본적인 삶조차 위협받는 지역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수도권 규제도 힘이 약한 지역에만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동반발전의 가능성을 찾자. 수도권 규제완화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이다. 여주, 동두천, 포천 등의 지역 주민이 차라리 강원도로 편입시켜 달라고 하소연 하는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인위적인 선으로 그은 수도권이라는 도면이 인간의 삶을 해체시키고 지역의 발전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비수도권의 발전을 위한 지원 강화는 더욱 박탈감을 야기시킨다. 그러나 한편 비수도권 지역의 불만을 생각할 때 지역 발전도 필수적이다. 이것은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 동반발전의 문제이다. 균형발전이 공간적 개념이라면 동반발전은 시간적 개념이다. 이제 목표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 수도권 규제완화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 수도권 과밀을 방치하자는 것이 아니라 각종 규제로 숨통을 조이고 있는 지역에게도 희망을 주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차별적인 규제완화보다는 ‘수도권의 정비발전 지구’를 지정하여 차별화된 전략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비수도권의 지역개발을 보장하는데 협력하여야 한다. 이제 정치적인 공방이 아니라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우선 비수도권에 거점 지역을 발전시켜야 한다. 수도권을 괴롭혀서 공장을 빼오는 전략이 아니라, 지역의 특성을 고려한 개발 전략을 지원해야 한다. 구미, 창원, 광양, 거제, 포항, 울산 등의 개발에서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향토산업 육성이나 지역연고산업을 발전시키는 토착화된 노력이 또한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최근 제안되는 상생발전기금은 참신한 제안이다. 수도권 규제완화로 더 징수되는 법인세가 있으면 이중 일부를 기금으로 마련하여 비수도권 지역 개발을 위한 기금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규제완화와 지역발전은 동시에 추구되어야 한다. 서로가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만 이야기하면 평행선을 그릴 뿐이다. 국가 비전을 통해 다 함께 미래로 가는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수도권 규제의 환상, 이원희 한경대 행정학과 교수

꿈은 행복한 것

얼마 전에 쓴 ‘아람이의 배’란 동화가 올 가을에 그림동화책으로 나올 예정으로 있다. 아람이란 아이가 자기 아버지가 만들어 준 나무배를 들고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이야기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떡장수, 과일장수, 장난감 장수 등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지만, 아람이는 그 어느 것하고도 자기 배를 바꾸지 않는다. 또 아이들이 같이 놀자고 꾀어도 고개를 흔든다. 신기한 일은 그때 일어난다. 들고 가던 배가 점점 커지는 것이다. 배가 커지자 아람이는 배에 끈을 매달아 끌며 간다. 마침내 바다에 다다른 아람이는 배를 타고 넘실대는 파도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고는 산만큼 커진 배 위에서 아버지가 이야기해 준 넓은 세상을 바라본다. 내 딴에는 꿈의 소중함을 나타내 보려고 한 것인데, 얼마큼 내 생각을 어린이들에게 드러내주었는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이름만 대면 금방 알 수 있는 한 영문학 교수는 나이가 들어 슬픈 일 중 하나는 남들이 꿈이 뭐냐고 물어주지 않는 거라고 했다. 생각할수록 그 올바른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꿈은 어디까지나 아이들의 것이지 나이 먹은 사람들의 것은 될 수 없다는 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왜 어른이라고 해서 꿈을 지니면 안 되는가. 어른들도 아이들처럼 얼마든지 꿈을 지닐 수가 있는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여기서 꿈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꿈은 사람이 일생 동안 살아가면서 가슴에 품는 단 한 번의 커다란 희망일 수도 있겠지만, 십년, 오년, 그보다 못한 한 해 동안의 작은 소망도 얼마든지 꿈일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일 년은 고사하고 한달, 단 하루만의 바람도 얼마든지 꿈인 것이다. 내가 아는 한 후배 여성은 고등학교 동창끼리 매달 돈을 모아 3, 4년에 한번 꼴로 해외여행을 하는 꿈을 지니고 산다. 해서 그동안 많은 나라들을 둘러보았고, 그 날의 여정을 사진첩 속에 차곡차곡 쟁여두고 있다. 그것도 멋진 꿈이다. 또 학창 시절부터 글을 좋아했던 K는 백일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문학 모임을 만들어 해마다 동인지를 낸다. 책이 나온 날은 남편들까지 불러내어 조촐한 맥주 파티까지 연다. 이 역시 아름다운 꿈이다. 그런가 하면 두 자녀를 결혼시키고 난 오십 대의 H는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매주 토요일에 야외로 그림을 그리러 가는 꿈을 지니고 산다. 게다가 가을엔 그동안 작업한 그림 가운데서 몇 점씩을 골라 전시회까지 연다. 이것 또한 삶에 기쁨을 주는 어여쁜 꿈이다. 이런 것도 얼마든지 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꿈이라고 해서 굳이 거창한 것만은 아니다. 미국에서 오랜 동안 의사 생활을 하다가 돌아와 시만 쓰고 있는 마종기 시인의 책에 이런 얘기가 있다.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것인데, 사람의 참된 행복은 지위나 돈보다도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소한 것들 안에 있다고 했다. 중병이 든 사람들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해서 얻은 결론이라는 것이다. 장관을 한 사람, 경제계의 거물이었던 사람들이 설문서에 답한 지난날의 행복은 가족과 식탁에서 밥 먹으며 담소하던 시간이거나 아내의 생일에 외식을 하고 거리를 산책했던 일이라고 한다. 거창한 이야기를 잔뜩 기대했던 시인은 거기서 새로운 삶의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가을이다! 올 가을엔 어떤 꿈을 지닐까. 아니 어떤 꿈을 꿀까. 꿈이라는 말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설레는 것을. 윤수천 동화작가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강하게

베이징 올림픽에서 연일 우리나라 선수들이 맹활약을 보이면서 메달을 따고 있다. TV를 통해 올림픽 경기를 시청하고 있는 우리들도 늘어나는 메달 수와 선수들의 활약을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이제 이러한 즐거움을 주던 올림픽 경기도 꺼져가는 성화와 함께 다음 런던 올림픽을 기약하고 있다. 올림픽에서 선수들이 보여주고 있는 여러 인간승리의 이야기들이 우리의 마음에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필자가 오늘 아침에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은 올림픽의 정신에 관한 것이다. 근대 올림픽의 이상은 스포츠에 의한 인간의 완성과 경기를 통한 국제평화의 증진에 있다고 한다. 올림픽의 표어도 라틴어인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강하게(Citius, Altius, Fortius)’라고 하였다. 이것은 아르퀼대학의 학장이기도 했던 헨리 디데옹 목사가 학교 운동선수들의 공로를 치하할 때 한 말을 근대올림픽의 창시자인 피에르 쿠베르탱이 인용한 것이다.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강하게’라는 올림픽의 표어는 올림픽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각자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생각해 보아야 할 말이다. 나는 지금 나의 위치에서 어떻게 하면 과거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어떻게 하면 과거보다 높은 목표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과거보다 강한 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욕망을 갖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이라고 한다. 어떤 분야에서든 큰 업적을 가진 사람은 큰 결심을 하고 그 결심은 그 사람을 성공으로 인도하게 된다. 그러한 결심은 아주 크지만 그 실행은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차츰 높여가야 할 것이다. 올림픽의 높이뛰기나 역도경기에서처럼 자신의 목표를 조금씩 높여가며 결국 승리하는 것을 볼 수 있었듯이. 어떤 때에 우리는 결심만 하고 실행을 머뭇거리는 경우가 가끔 있다. 혹시 이 일이 잘못되지는 않을지, 계획한 대로 성과가 있을지, 내가 지금 올바른 결정을 내린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모든 것에는 다 그 정해진 기한이 있는 법, 그 때를 놓치게 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게 될 것이다. 결심을 했다면 그 결심을 빠르게 실천하고 또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람마다 저마다 처지가 다르고 그 바라는 바가 다를진대 필자가 이 아침에 모든 것을 다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자신의 목표를 가지고 실행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서 올림픽의 정신을 생각해 본다면 더 좋은 인생,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남경현 경기대 응용정보통계학과 교수

무늬만 민영화를 우려하는 목소리

한나라당과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 독도 문제, 금강산 피격사건 등 크고 작은 대내외 문제들이 안정되자 드디어 민영화 카드를 꺼내들었다. 주공과 토공을 통폐합하고 그동안 공적자금이 들어갔던 대우건설 등 회사들의 실제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대표적인 공기업들의 민영화가 빠져 있어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민영화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듯 보이지만 그동안 기치로 내세우던 작은 정부를 실제로 실천해 가려는 것이 아닌지 기대를 모으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무늬만의 민영화로 그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왜 이런 우려가 나오는 것일까? 우선 민영화를 제대로 실천해 내려면 먼저 왜 민영화를 하려는 것인지 그 이유부터 분명히 해 민영화 본래의 취지를 흐리는 발상들을 차단해야 하는데 ‘국민주’와 같은 본래의 취지를 흐리는 아이디어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영화는 시장에서 거래가 가능한 재화와 서비스를 시장에 맡겨두지 않고 정부가 공급할 때 발생하는 비효율성과 부패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공기업은 적자가 발생해도 세금으로 메울 수 있다. 그래서 비용을 절약하고 소비자들의 필요를 가장 저렴하게 잘 충족시키고자 하는 유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민간기업의 경영자들은 소비자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자 노력하지만 공기업 경영자들은 소비자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임면에 영향을 미치는 관료와 정치인들 그리고 그 공기업 노조에 잘 보이려 노력한다. 가격 대비 품질로 소비자들에게 잘 보이려는 유인은 그 기업의 성과가 자신의 이윤과 손실에 직결되는 주인(지배 주주)이 있을 때 왕성해진다. 공기업의 주식을 국민주 형식으로 분배해 무수한 주인들을 만들어서는 공기업 민영화의 본래 취지를 살릴 수 없다. 오히려 실질적 주인이 없게 된다. 공기업에 이윤의 극대화와 손실 최소화에 적극적 의지를 지닌 주인들이 등장해야 한다. 한 모임에서 최광 교수(전 국회예산정책처장)는 공기업이야말로 이미 완벽한 국민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었다. 어쩌면 국민주 아이디어가 공기업에 주인을 만들어 주는 과정에서 헐값매각 논란, 특혜시비가 발생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제안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논란을 무서워 할 것이 아니라 공기업 매각시 제 값을 받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 어떻게 했는지 벤치마킹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무늬만의 민영화를 걱정하는 또 다른 이유는 민영화 추진 주체와 관련해서이다. 정부 관료들은 산하기관이나 공기업이 많을수록 퇴직이나 이직 후 좋은 자리로 갈 수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공기업의 민영화에 적대적이거나 최소한 적극적이기 어려운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일본은 우정국(우체국)을 민영화할 때 이를 평소 소신으로 가진 학자들을 중용하는 한편 관련 문제점을 가장 잘 아는 젊은 관료들을 선별해 민영화 이후 복직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민영화에 적극 참여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민영화 추진은 생태적으로 이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관료들이 주도하고 있고, 이들이 민영화에 적극 나서도록 하는 조건들에 대한 고민도 별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무늬만의 민영화를 걱정하는 이런 목소리들이 기우에 불과했으면 좋겠다. 시장경제를 내세운 신정부의 성공은 우리 경제의 성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런 우려들을 경청해 시장경제를 내세운 신정부는 역시 종전의 정부들과는 다르구나, 이제 제대로 된 민영화가 이루어지겠구나 하는 신뢰가 확보되고 이를 통해 민영화 추진에 강한 탄력이 붙었으면 한다. 김이석 경기개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宇都宮에서 생각해 본 우리 교육

8·15 광복절에 즈음하여 오늘 문득 필자는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을 떠올려본다. 얼마 전 일본 우쯔노미아에서 생애교육국제세미나가 열렸었다. 그곳에서 얄밉도록 무서운 나라 일본의 혼과 저력을 충격으로 감지해 볼 수 있었다. 왜 하필 광복절을 맞으며 역설적으로 일본의 힘을 되뇌어 보고 싶어진 것일까? 국제적인 분쟁의 핵으로 떠오른 독도문제를 접하며 필자는 조금은 냉정하게, 그래도 배워야 할, 여전히 무서운 일본의 힘을 곰곰 되새겨 보게 된다. 우쯔노미아에서 필자는 온종일을 묵묵히 그다지 연고도 없어 보이는 낯선 국제회의에 그 누가 의무적으로 오라 청한 적도 없건만, 행사가 종료될 때까지 앉아있는 일본의 수백명 나이든 시민 참석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쯤해서 필자는 우리의 세미나 장면들을 떠올려 보며, 얼굴이 불그레 상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미나가 열린다하면, 일부의 관심 있는 전문가 또는 조금은 억지스럽게 동원된 청중들로 메워지기 십상인 우리의 상황과는 다름에 놀라웠다. 이것이야말로 무서운 일본 시민 대중의 힘이라 느꼈다. 끝까지 남아있던 시민들 중에는 그야말로 촌부, 촌로들이 상당수였다. 그들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그들은 우쯔노미아대학 생애학습연구소 시민대학의 나이든 마을 학습자들이었다. 거의 한평생을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짬을 내어 ‘배우는 즐거움’에 사로잡혀 있는 시민학습객들이라 하겠다. 무슨 힘일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왜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배우려들고, 그 배움을 진지함 속에 진한 지적 희열로 연결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왜 그들은, 그렇게 많은 질문을 외국 그것도 한국에서 온 우리들에게 하고 싶었던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이 자리에 늦은 밤까지 남아있도록 유인하고 있는 것일까? 우쯔노미아에서 필자는 우리 교육을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거창한 교육개혁의 화두가 요란한 슬로건들과 함께 내걸어지는 우리 교육의 실체가 조금은 우려스럽게 스쳐 지나갔다. 참으로 많은 교육개혁 사업들이 반세기 동안 우리의 교육을 강타해왔건만, 여전히 내실보다는 슬로건이 더 앞서는 듯 씁쓰레한 우리 교육을 지켜보며 필자는 새로운 자성의 마음으로 2008년의 광복절을 맞고 싶어졌다. 세미나의 대미를 장식한 ‘사사끼’라는 한 젊은 일본교수의 ‘충전과 방전과 축전의 학습으로 부활하라’라는 메시지 또한 필자에겐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젊은 교수의 폐회 강연은 같은 대학교수로서 평생을 스스로 식자층이라 자부해왔던 필자에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매일 매일 일상의 삶을 통해 배움의 에너지를 백배 충전하고, 그 중의 절반 이상을 축전하는 향기로운 배움의 삶을 살라고 사사끼교수는 외치고 있었다. 참석자들은 모두 진지하게 백분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충전한 배움의 에너지의 절반 이상은 절대 방전하지 말라’고 그는 역설했다. 우리는 어떠했는가? 오히려 역으로 십을 충전하고, 백을 방전해버린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던가? 조금 배운 내용, 조금 알고 있는 지식, 조금 들은 정보들로 전국을 돌고 강연으로 방전하는 그런 교육자로 살아온 것은 아니었던가? 세계적인 교육열의 위대한 학습국가 대한민국이 8·15 광복절을 기해 대인의 마음으로 우쯔노미아의 교훈을 되새기며 이젠 백배 충전하고, 축전하는 교육의 힘으로 부활하기를 기대한다. 최운실 아주대 교수·한국평생교육총연합회 이사장

변호사 수와 정의사회

천당에서는 소송을 할 수 없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다. 변호사가 1명도 천당에 오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변호사를 남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선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남의 돈만을 탐하는 악한 사람으로 풍자한 것이다. 분명 변호사 중 일부는 자기가 행한 업무행위에 비해 과다한 보수를 요구하거나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변호사는 정당한 대가 하에 법에 익숙하지 못한 국민들을 위하여 자신의 법률적 지식을 활용하여 자문이나 소송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모든 사회활동이나 경제활동은 법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한 사회현상이나 경제현상이 나날이 복잡해지고 있는 오늘날, 다양한 법적 분쟁의 사전 예방이나 사후 해결을 위해 법률전문가의 도움은 필요불가결한 실정이다. 우리가 겪게 되는 각종 분쟁이나 갈등이 폭력이나 금력 등 부정한 수단이 아니라 법에 의하여 정당하게 해결되는 사회를 정의사회라고 한다면 이 정의사회에는 반드시 변호사가 있어야 한다. 국민의 질병 퇴치와 건강보호를 위해서 의사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정의사회 구현을 위하여 매년 몇 명 정도의 변호사를 어떤 교육방법과 시험을 통하여 배출하는 것이 적정한 것인가가 계속 논란되어 왔고, 그 결실로써 내년에 총 정원 2천명 규모의 법학전문대학원 즉 로스쿨이 출범하게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로스쿨 정원과 맞물린 적정한 변호사 수를 둘러싼 논쟁이 끝난 것이 아니다. 시민단체와 학계는 배타적 진입장벽을 없애고 변호사 선임비용을 낮추기 위해서는 변호사 공급을 절대적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법조계는 법조인의 양산은 사법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고 영리추구를 위한 폐해를 증대시킨다면서 변호사 수의 동결을 주장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법조인 1인당 국민 수는 5천783명으로, 미국 266명, 영국 557명, 독일 578명, 프랑스 1천509명과 큰 차이가 난다. OECD 회원국 등 외국과 비교하여 우리나라의 변호사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라마다 고유의 법률문화가 있고 경제력이나 법조유사직역 등 사회적 여건이 다양하기 때문에 변호사 1인당 인구나 GDP 대비 변호사 수를 바로 비교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적정 변호사 수에 대한 검토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지만, 결코 간과해서 안 될 점은 단순히 변호사 수를 늘리는 것만으로 정의사회가 구현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국민에게 봉사할 수 있는 소양과 인품을 가진 변호사를 양성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말하자면 양에 못지않게 질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법조특권의 해소, 전문적 변호사의 양성, 법률서비스의 제고 등은 로스쿨에서 어떻게 학생들을 교육하고 실습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이제부터는 변호사 수만이 아니라, 변호사를 양성하는 로스쿨의 교육도 정의사회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인식이 확대되었으면 좋겠다. 백윤기 아주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기브 앤 테이크와 패스 잇 온

‘기브 앤 테이크 ’ 주고 받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이 말은 어찌 보면 거래의 한 종류라고 할 수도 있다. 일단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주어야 그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다시 받을 수 있는 사회생활의 한 가지 단면일 수 있다. 혹자는 일단 주고 나중에 받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손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 자신의 손실을 피하고자 하는 본능에 의하여 남에게 주는 것은 나중에 하고 우선 내 것을 확보하기 위한 ‘테이크 앤 기브’를 선호하기도 한다. 또한 각박한 개인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노기브 노테이크’에 익숙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남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다시 받는 것도 귀찮고 하니 혼자서 모든 것을 꾸려 나가려 하는 지극히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사회에서는 품앗이나 계라는 풍습이 있다. 십시일반의 개념으로 우선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주고 후에 자신이 필요할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품앗이의 예로서는 경조사비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내가 저 집에 얼마 정도의 부조를 하였으니 후에 그에 상응하는 혹은 그보다 더 많이 받게 되기를 기대한다거나 지난번 우리 집 행사에 저 집으로부터 얼마 정도의 부조를 받았으니 이번에 그에 상응하는 것을 보답한다고 하는 것 등이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그러한 기대감에 따른 ‘기브 앤 테이크’의 행위는 아직도 어색하게 다가오고 있다. 주위에 무엇인가를 주어야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없애기 위해 오늘 아침에 필자는 조금 다른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또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내리사랑처럼 ‘기브 앤 테이크’와 같은 양방향이 아닌 ‘패스 잇 온’과 같은 일방통행식의 실천을 생각해 본다.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것들에 그분들이 우리에게 다시 그에 대한 대가를 돌려받기를 원하는 기대가 포함되어 있으리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는 선생님이나 선배들로부터 어떠한 가르침을 받을 때에도 그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돌려 받을 기대를 가지고 그분들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었다고 보기는 쉽지 않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어느 정도의 양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 필요한 양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선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주위의 다른 분들에게서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해 부끄러운 생각을 갖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뻔뻔스럽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 있을 지도 모르겠으나 부끄러운 마음보다는 감사의 생각이 앞서야 할 것이고 내가 받은 도움에 대해 그 사람에게 다시 보답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으나 그 보다는 나보다 적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어 주는 ‘패스 잇 온’이 더 나은 방법이라고 하겠다. 어렸을 때 배운 국민 교육 헌장 중에 나오는 이러한 글이 생각난다.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나에게 무엇인가 되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기브 앤 테이크’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보다 적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패스 잇 온’으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해 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조금씩 더 성장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 아침에 해보게 된다. 남경현 경기대 응용정보통계학과 교수

고유가 시대의 에너지 절약 - 통제보다는 가격으로

고유가 시대에 접어들었다. 미국 경제의 침체 전망에 따라 석유 수요가 감소할 것이 예상됨에 따라 가파르게 상승하던 고유가가 다시 하락하고는 있지만 이것이 계속 이어질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에너지 절약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공공부문이 솔선수범한다는 의미에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승용차 격일제를 시행하고 아울러 석유를 이용하여 생산되는 전기, 가스 등 공공요금의 연차적 인상을 계획하고 있다. 석유가격이 일정 이상 오르면 이런 차량사용 통제를 민간부문으로까지 확대한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있다. 얼핏 생각하면 차량사용 통제가 더 직접적이어서 에너지 절약에 효과적인 정책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홀짝제 차량운행이 시행되던 날, 뉴스에서는 이를 위반한 차량이나 에너지 문제를 담당하는 지식경제부 차량이 정부청사 부근에 주차해 있는 것을 촬영, 이들의 규칙 준수의식 부족을 질타했다. 그러나 엄연히 공무원들의 개인차량은 그들의 의사에 따라 쓸 수 있는 그들의 재산이므로 오히려 규칙을 지켜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해야 한다. 그들인들 기름 값이 아깝지 않을까? 다른 나라의 경험에서도 차량사용 통제는 별로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반드시 차량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 사람들은 차량을 한 대 더 구입해 홀수차와 짝수차를 모두 가지는 것을 선택했다.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더 들어가는 시간, 혹은 여러 번 갈아타야 해서 돈이 더 들어가는 문제를 감수해야 했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 복잡한 사정을 다 감안해서는 정책을 제대로 시행할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런 점이 모든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규제를 가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이다. 이에 비해 가격이 상황을 잘 반영하도록 하는 정책은 스스로 거기에 각자가 적응하도록 해준다. 높아진 기름 값이 아깝지만 자기가 알아서 자신의 상황을 모두 감안한다. 우리 국민들은 그렇게 우둔하지 않다. 그래서 고유가로 인해 전기, 가스 등의 값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을 때 이해할 수 있었다. 낮은 가격을 유지하면서 적자가 난 부분을 세금으로 메운다고 하더라도 이 세금은 결국 우리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사실 재정을 투입해 억지로 낮은 가격을 유지하려는 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잘못된 신호를 주는 에너지 낭비적인 정책이다. 실은 우리 호주머니에서 실제 가격만큼 지출되는데도 그보다는 훨씬 싼 것처럼 느껴져 에너지를 절약할 마음이 별로 생기지 않는다. 언제가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본 ‘급커브, 감속주의’라는 표지판이 감속을 주의하라는 것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 것처럼 빨간 불인데도 마치 파란 불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지식경제부에서 공공요금을 연차적으로 인상해 나가겠다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다. 하지만, 혹시 기름 값이 더 높아지더라도 차량사용 통제와 같은 조치들을 민간으로까지 확대하는 그런 정책은 펴지 말았으면 좋겠다. 관용차를 제외한 공무원 개인 차량의 사용통제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고유가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적응한다. 다만 당장 바꿀 수 없을 때 시간을 두고 행동을 바꿀 뿐이다. 그런 시간을 너무 억지로 줄이려고 하면 고통은 더 커진다. 신호를 분명하게 해주고 이에 각자가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최선의 정책이다. 김이석 경기개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유네스코 세종대왕상의 힘

필자는 지금 세느강과 에펠탑이 내려다보이는 유네스코 파리 본부 3층에서 활력과 생동감이 넘쳐나는 파리의 아침을 맞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오랜 역사의 궤적을 안고 유럽 연합 EU의 의장국으로 그 위용을 과시하며 유럽세계의 중심 국가로 다시금 부상하고 있는 프랑스의 안방, 파리의 아침은 오늘도 기다란 바게트 봉지를 들고 총총히 메트로 안으로 사라지는 파리잔느들의 발걸음처럼 힘이 넘쳐난다. 필자는 이곳에서 지금 세계 문해교육상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세계 각국의 정부와 NGO시민사회단체 등이 추진하고 있는 ‘만인을 위한 교육사업’의 현장들을 각종 다큐멘트 자료와 동영상 및 사진들을 통해 심사에 임하고 있다. 5년째 이 일을 맡아 매년 7월이면 늘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 오고 있다. 세계 각 대륙에서 추천된 5명의 대상 심사위원들이 일주일 동안 꼬박 심혈을 기울여 심사에 임하고 있으며 필자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이른바 문해교육상이라 불리우는 이 상은 한국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는 유네스코 세종대왕상과 IRA라고 하는 국제문해교육기구(미국 소재)가 후원하는 유네스코 IRA상 그리고 중국 정부가 지원하는 유네스코 공자상 등 세 종류로 수여된다. 여기에 HM(Honorable Mention) 이라고 하는 특별상 성격의 명예대상이 함께 수여된다. 2008년 올해에도 예외 없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아랍 등 39개 나라의 교육 프로젝트들이 정부와 국제기구들의 추천을 받아 대상 후보로 경합을 벌였다. 아직 최종 확정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현재 심사위원단이 추천을 하여 최종 합의단계에 있는 대상 심사후보들은 영국의 BBC 방송의 RaW(읽기 쓰기 기초교육사업)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이디오피아, 잠비아 등 5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해교육 사업들이다. 한국 정부가 유네스코 세종대왕상을 책정하여 매년 5만불에 가까운 정부후원금을 수여하게 된 배경에는 역사적으로 한글을 창제해 모든 백성들이 문자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한 세종대왕의 뜻을 기리고 이를 전 세계에 알리고 싶은 큰 뜻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열과 교육수준을 자부하는 학습국가로서의 한국의 교육적 저력과 위용을 알리고 이를 전 세계적 벤치마킹의 모델로 확산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본받아 중국정부 또한 매년 15만불을 유네스코 공자상에 지원하고 있다. 매년 9월8일은 세계 문해의 날이다. 유네스코 상은 바로 이 날 수여된다. 뒤늦게 동참한 중국은 대대적으로 이 상의 수여식을 하고 심사위원단과 수여국들을 초청해 성대한 국제세미나를 개최할 만큼 이 일에 적극적이다. 우리 정부 또한 국가 차원의 평생교육진흥사업과 맞물려 이 상에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필자는 오늘 문득 파리에서 5백여년전 조선의 어린 백성을 위해 한글을 창제하고 그들의 문민화를 위한 가르침에 온 힘을 기울이셨던 대왕의 위대한 혼이 머나먼 타국 땅 이 곳 파리 유네스코에서 다시금 이 상을 계기로 부활하고 있음을 강한 감동으로 느껴본다. 대왕의 위대한 교육문화사업의 혼과 정신이 오백년을 건너 그 후예인 우리 한국민들을 통해 저 멀리 아프리카 대륙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를 위한 교육의 저력’으로 부활할 수 있기를 희망으로 기대해 본다. 그 희망만큼이나 왠지 오늘 파리의 커피향과 바게트의 고소함이 더욱 진하고 향기로운 파리지앵 여인네들의 한 여름 검은 롱 부츠와 겨울 세무 코트가 내게 친근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최운실 아주대 교수·한국평생교육총연합회 이사장

대학교수와 방학

흔히들 대학교수는 방학이 있어서 참 좋겠다고 주위에서 말한다. 필자 역시 몇 년전 대학에 올 때까지 같은 생각을 했었다. 아마도 방학기간 중에는 강의가 없으니까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고 따라서 마음대로 여유와 휴식을 가질 것이라는 추측 때문일 것이다. 물론 방학기간 중에 정규강의가 없기 때문에 교수의 입장에서 시간 운용이 자유로운 측면도 있다. 그러나 교수사회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방학이 교수 개개인에게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방학은 교수로 하여금 학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쌓게 하는 고된 연구의 기간임과 동시에 학내의 다른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대학에서 교수는 주로 교육, 연구, 봉사의 3가지 과업을 담당하고 있다. 이 중에서 교육과 학내 또는 대외 봉사는 학기 중에 주로 행해지는 반면, 연구는 방학기간이 아니면 사실상 그 성과를 낼 수 없다. 요즈음에는 각 대학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연구실적을 승진이나 승급의 요건으로 삼고 있고 이러한 연구실적의 공인을 담당하는 각종 학회에서는 연구 성과의 수준을 높게 요구하면서 연구결과에 대한 엄격한 심사를 행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교수는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집중적으로 연구를 수행하지 않으면 우수한 성과를 내놓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방학이 대학교수에게 결코 자유로운 기간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아주대학교 법과대학에 있어서 이번 여름방학은 특별히 소중한 기간이다. 무엇보다도 내년 3월에 개원하게 될 법학전문대학원을 전국 최고의 수준으로 빈틈없이 운영하기 위한 제반 준비를 착실히 다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당면과제 중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법학전문대학원 학생들이 입학 이후에 배우게 될 교과과정 편성안과 실무교과목 강의방안, 실습과정 운영계획이나 학생지도계획 등을 내부적으로 마련해야 하고, 나아가 법학전문대학원 독립건물의 신축, 법학전문대학원 체제에 상응하는 도서관 제도 재편,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학생실습을 위해 필수적인 로펌, 공공기관, 기업체의 확보 등과 같은 문제를 학교본부나 외부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이처럼 복잡다기한 업무들은 대체로 전례가 없거나 긴밀한 협동을 요하는 것들로서 법과대학 교수들이 전부 또는 팀별로 모여서 논의하고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방학이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법학전문대학원에서는 단기간 집중적으로 종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법이론 및 실무교육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교수 개개인은 자신이 담당한 교과목에 대한 강의교재를 반드시 미리 저술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마도 대부분의 법과대학 교수들은 올 여름방학 내내 연구와 새로운 교재 집필을 위해 저녁 늦게까지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일 것이다. 대학교수들이 그 본연의 역할을 다하려고 하는 한 방학은 ‘일’을 위한 시간이지 ‘휴식’을 위한 시간이 되지 못하는 듯 하다. 무더운 여름방학을 연구실에서 책과 씨름하고 계신 교수님들께 진심어린 성원을 보내고 싶다. 백윤기 아주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삶의 원동력은 자신 안에 있다

비밀이란 숨기어 남에게 드러내거나 알리지 말아야 할 일, 또는 밝혀지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말한다. 오랜 세월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이라는 부제를 단 론다 번의 책으로서 ‘시크릿’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돼 많은 사람들이 읽은 책이 있는데, 그 책의 결론은 간절히 원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단순한 내용으로 끌어당김의 법칙을 설명하면서 이를 이용해 체중 줄이기도 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 책이 체중 줄이기에 대한 책은 아니지만, 요즈음 들어서 과체중에 대한 심각한 생각을 하고 있는 필자에게 꽤 관심이 가는 대목들이 있어 읽어 보게 되었다. 너무나도 단순한 방법이지만 사실 단순한 것 속에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 많듯이 혹시 자신의 과체중으로 잠시라도 고민해 본 독자라면 이 방법도 새로이 시도해 볼만 할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사람들이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인식하든 못하든 스스로 ‘살찌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몸무게 줄이기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계속 몸무게를 줄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몸무게를 줄여야 해’라는 생각에 집중하지 말고 ‘날씬해지는 생각’에 초점을 맞추라고 말한다. 먼저 자신이 원하는 몸무게를 정한 후, 그리고 자신이 이미 완벽한 몸무게에 이른 것처럼 믿고, 그 멋진 느낌을 마음속에서 그려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긍정적인 생각과 간절한 믿음이 만났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미래의 삶을 창조하는 원동력이 ‘자신’안에 있다는 믿음은 원하는 것을 실제로 이루어지게 하는 창조력을 지닌다. 이 강력한 법칙의 힘은 잘못된 사례들을 생각해보면 더 쉽게 이해된다. ‘난 안돼’, ‘난 할 수 없어’라는 부정적인 생각은 결국 그 사람이 원하지 않던 일을 끌어당기는 셈이다. 이러한 연쇄반응은 우리의 인식여부에 상관없이 고작 생각 하나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쁜 생각 하나가 그와 같은 생각을 더 끌어당기고, 거기에 갇혀서 결국 나쁜 일(우리의 관심에서는 과체중)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우리의 삶이 힘겹고 전쟁 같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끌어당김의 법칙’에 따라서 힘들고 전쟁 같은 삶을 경험했을 것이다. 저자는 지금부터 우주에 소리를 지르라고 제언하고 싶다. “인생은 정말 쉬워! 정말 멋져! 온갖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과체중의 우리는 저자가 권하는 대로 우주에 소리칠 것까지는 없겠지만, 나름대로 “체중감량은 정말 쉬워! 체중감량을 하면 나에게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이라고 자기 암시를 한다고 해서 크게 나쁠 것은 없으리라 본다. 이제 점점 우리 몸을 감싸고 있는 의복들이 얇아지면서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잉여분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이 비밀을 이용해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자신의 멋진 모습을 상상해보면서 오늘 아침을 시작해 보자. 필자자신이 아직 완성하지 못한 방법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약간의 모순이 없지는 않으나 이 여름의 시작에 이러한 쉬운 방법을 소개한다고 해서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는 자신의 몸을 어느 정도 움직이는 등의 최소한의 자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독자는 없으리라고 본다.

민생과 망효과 때문에 민영화를 미뤄야하나?

고등학교 때 시인이었던 국어선생님께서 들려준 이야기이다. 고등학교 시절, 그를 포함한 몇 명이 유독 한 친구의 집을 열심히 드나들었다. 그 친구의 여동생이 유난히 예뻤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배짱이 두둑했던 한 친구가 “그녀는 나의 것”이라고 선언해버렸고, 이에 다른 한 친구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는 아쉽게도 “그녀는 누구의 것도 아닌 그녀 자신의 것”이라고 외칠 기회를 놓치고 배짱 좋은 친구가 예쁜 여학생을 자신의 여인으로 기정사실화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최근에 나오는 기정사실화의 한 사례가 “민생과 관련된 공기업, 혹은 망효과(network effect)가 있는 공기업들은 민영화하지 않는 게 좋다”는 주장이다. 먼저 이렇게 질문을 해 보자. “민생에 관련된 기업들은 공기업으로 경영되어야 할까?” 또한 우편배달 서비스를 민간에 개방한 경험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다. “우체국에서만 할 때에 비해 택배회사들을 포함, 민간 기업들이 들어오면서 훨씬 더 편리해지지 않았나?” 이렇게 반문해 보면 민생을 앞세운 공기업 민영화 연기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민영화를 반대하는 또 다른 전문적인 논리로는 망효과 혹은 망외부성(network externality)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휴대)전화의 유용성은 높아지는데 이처럼 망(網)이 커질수록 유용성이 높아지는 효과를 망효과라고 부른다. 망효과와 관련된 걱정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시장에서 나타나는 사용자들의 숫자가 망효과를 통한 이득을 감안하지 못하고 별로 크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이를 망외부성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걱정은 망효과가 있을 때의 표준의 선택 문제다. 특정 기술이 기술적으로 열등함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먼저 보급되면 한계생산비가 일정하다는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망효과 덕택에 그 시장 전체를 차지하게 된다. 망효과로 인해 생산규모가 늘어날수록 수익이 늘어날 수 있어 망효과가 없을 때 단위당 생산비가 하락할 때처럼 그 기술을 가진 기업이 자연독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충분히 우월한 기술은 선점효과를 극복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우월한 기술의 경우에는 기존기술의 망효과로 인한 선점효과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신기술(표준)에 대해 사용자들이 느낄 만족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가정이 성립되지 않는 한 정책적으로 개입하여 더 나은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는 종류의 문제이다. 망효과와 공기업민영화를 연결해 생각해 보자. 국영기업일 경우 경영실패의 몫은 경영자가 아닌 소비자와 납세자의 부담이다.(맨큐의 경제학, 4판, 380~383면) 우월한 기술의 출현과 채택의 가능성도 전화국일 때가 아니라 KT, SK, LG 등의 전화사업자들이 등장했을 때 더 기대할 수 있다. ‘민생을 위해, 망효과를 감안하여’라는 이유로 민영화를 연기하려는 논리는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식의 주장이 정치권에서 나오는 것은 민영화를 추진할 때 시장의 경쟁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있고 싶은 기득권층의 저항에 맞서야 하는 수고로움을 비켜가려는 신호는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수고 없이 어떻게 개혁을 이루나? “그녀는 그녀 자신의 것일 뿐”이라고 외칠 용기도 없이 어떻게 예쁜 그녀와 사귈 수 있나?

프레이리 선생의 민중교육론 회고

연일 촛불 시위로 시청 앞 광장이 흰 새벽까지 하얗게 물들고 있는 요즘 문득 지난 ‘97년 작고하신 근세기 민중교육의 선봉 프레이리 선생을 회고해 보게 된다. 압박받는 민초집단들을 위해 생을 바치셨던 선생이 남기신 ‘굴레를 벗어나는 희망의 교육학’이 오늘 유독 생경함으로 다가온다. 빛바랜 연구실 서가의 한 구석에서 오랜만에 선생의 ‘압박받는 자들을 위한 교육학’과 ‘민중교육론’을 꺼내 들어 먼지를 털며 70년대 말, 80년대 초 나의 젊은 대학원생 시절의 상념을 떠올려 본다. 당시 교육사회학도였던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선생의 민중교육론에 심취해 있었다. 아마도 70~80년대 이 시대의 젊은 지성들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밤을 새워 가며 열정과 흥분으로 읽어 내렸음직한 선생의 민중교육론이었을 게다. 선생의 책 속에는 ‘압박받는 자들을 위한 해방의 민중교육’을 위한 혼이 담긴 글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선생이 외쳤던 종속론과 민중교육의 무대는 당시 압박받는 제3세계 라틴 아메리카 대륙이었다. 선생은 그 시대, 그 곳에서 압박받는 민중들을 위해 ‘참 의식’을 깨우치기 위한 성인문해 교육운동을 몸소 실천했었다. 참 대화를 통한 프락시스 실천교육을 통해 선생은 ‘앎과 생각하는 의식과 행동’이 하나로 엮어지는 실천의 학습망 연대를 외쳤었다. 암묵지를 끼워 맞추는 식의 길들여진 죽은 교육을 강하게 거부했던 선생은 단순한 지식의 저장식 교육을 강요하는 ‘은행저축식 교육’의 종식을 위해 절규했었다. 자신이 처한 사회 경제 문화적 구조의 모순을 깨닫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실천적 행동에 나설 수 있는 의식화 교육으로서의 ‘문제제기식 교육’을 피력했었다. 최근 평생교육법 정부 개정안에 의해 국가적 평생교육정책 사업의 일환으로 강화되고 있는 한국의 성인문해 교육을 지켜보며 다시금 선생의 민중교육으로서의 성인문해 교육 실천운동을 떠올려 보게 된다. ‘민중의 학습권’ 이라는 차원에서 문해교육의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단순히 문자교 육, 즉 단순히 글을 읽고 쓰게 가르치는 도구적 교육이 아니라 학습권 보장을 위한 평생교육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교육의 차원에서 문해교육에 접근해야 한다. 글자 익힘의 교육을 넘어서는 일이다. 읽기·쓰기·셈하기 교육을 넘어 ‘생각과 의식과 실천’을 키워줄 수 있는 교육이어야 한다. 평생교육 차원에서 전국의 야학과 평생학습관, 문해교육기관,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들 그리고 수많은 복지관과 여성교육기관, 노인교육기관들이 땀흘려 일궈내고자 애쓰고 있는 성인 기초문해 교육사업들이 선생의 민중교육의 참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교육으로 승화되기를 바란다. 선생의 민중교육론이 다시금 이 땅에 의미 있는 성인 기초문해 교육실천을 통해 부활하기를 기대한다. 문해교육 종사자들에 따르면 이 땅에 아직도 400만 이상의 성인 기초문해 교육 대상자들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을 위한 인권이자 학습권 보장으로서의 ‘디딤돌 교육’이 리얼한 삶의 교육으로 살아 숨쉴 수 있기를 기대한다. 1920~30년대 ‘민중 속으로의 보나로드 운동’ 처럼 오늘 이 땅의 평생교육실천가들이 새로운 각오로 ‘문해교육의 대장정’에 나설 때가 온 듯하다. 최운실 아주대 교수·평생교육총연합회 이사장

대학과 지역사회

6월의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아주대학교 캠퍼스를 거닐다 보면, 다양한 국적을 가진 외국인 학생들이 눈에 많이 띈다. 불과 십여년 전만 하더라도 벽안의 외국인들은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우리 사회 속에 같이 숨 쉬고 더불어 생활하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개방화됐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예전에는 우리 사회를 관찰의 대상으로 보았지만, 이제는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터전이 되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외국인들이 이제는 스스로 지역화 했다는 의미이다.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세계화에 발맞추어 대학도 세계화를 지향했다. 이에 따라 연구수준의 세계화, 연구 인력의 세계화, 대학행정의 세계화, 학생의 세계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화가 지향되었고, 그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 아주대학교 캠퍼스에 다양한 외국인 학생들이 보이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세계화 쪽에만 중점을 두게 되면 대학의 대외적 명예는 높여질지 몰라도 대학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사회 발전에는 관심이 적어 질 수 있다. 지역사회에 기반하지 않는 대학은 스스로 지역사회에 대한 관찰자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대학을 바라보는 지역사회 역시 방관자일 수밖에 없다. 지역사회와 유리된 대학은 지역주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지역기업들로부터 외면당해 결국 외톨박이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대학이 세방화(世方化)니 글로컬(Glocal)이니 하면서 지역사회의 발전과 함께 세계화를 이루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일 것이다. 아주대학교는 지역사회와 함께하기 위해 여러가지 일들을 해왔다. 다양한 형태의 산학협동연구를 통해 지역사회 산업발전에 참여해 왔으며 지역 주민을 위한 무료 건강강좌나 교양강좌를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특히 대학축제인 원천대동제가 열릴 때에는 아주대 삼거리의 차량을 통제하고 아주대길에서 시민과 함께 하는 문화행사를 진행, 시민과 더불어 호흡하고자 하고 있다. 대학이 지역사회에 한걸음 더 다가가고자 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도서관, 체육시설, 학생식당 등의 개방과 관련해 미흡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대학이 지역사회와 함께 나아가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제 법학전문대학원 개원이 8개월 여 앞으로 다가왔다. 법학전문대학원은 법조인을 배출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지역사회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는 대학이 지역사회와 호흡하지 않고도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만큼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은 지역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거나 실시 중에 있다. 이미 중소기업법무센터를 개원해 실무와 이론적 배경을 탄탄히 갖춘 전문가인 전공교수들이 중소기업법무와 관련된 다양한 법률상담을 무료로 해오고 있다. 또한 지역 사회에서 중소기업법무와 관련한 좀 더 심화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실무진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법학전문대학원이 개원되면 학생들은 인턴쉽 또는 익스턴쉽의 형태로 기업체에서 법무실습을 행하며 시민들을 위한 무료 법률상담도 아울러 행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과 인적 네트워크의 확장으로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학생들이 졸업 후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면서 궁극적으로는 서울로 가지 않고 자연스레 지역사회에 동화될 수 있는 여건이 이루어 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대학의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지역사회도 법학전문대학원의 성공을 위하여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대학은 지역 속에 존재한다는 당연한 명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백윤기 아주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

이달 초 해외 출장을 다녀오며 비행기에서 읽은 책 제목이다. 여느 책과 비슷한 내용으로 퇴직 후의 삶이나 연금 등 노후설계 관련 책 인줄 알고 별 관심 없이 책장을 넘겨 읽어보는데 3백여 페이지에 이르는 책을 금방 읽게 되었다. 요즘 들어 나이가 드는 것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필자에게는 아주 새로운 느낌을 주어서 독자들과 같이 나누어 보고 싶은 마음에 소개해 보고자 한다. 저자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겪게 되는 네 단계의 연령기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퍼스트 에이지는 배움을 위한 단계로, 태어나서 학창시절까지의 시기를 포함한다. 이 시기는 학습을 통하여 기본적인 성장이 이뤄지는데 주로 10대에서 20대 초반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세컨드 에이지는 일과 가정을 위한 단계로 직업을 갖게 되고 가정을 이루는 20·30대의 시기가 이 연령대에 해당된다. 인생의 네 단계 중 가장 긴 기간을 차지하는 서드 에이지는 40대에서 70대 중후반의 시기로서 확연히 업그레이드된 2차 성장을 통해 자기실현을 추구해 가는 단계로 우리 생애 중간쯤의 시기이다. 마지막으로 제4연령기는 노화의 단계로 이 때의 목표는 나이 들수록 젊게 사는 것, 최대한 오래 살다가 젊게 죽는 것이라 한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노후 대책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근의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7년 전체 인구 중 40세 이상 인구비율은 43%이며, 2010년에는 46%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은퇴 후의 경제적 대비책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이때에 이 책에서는 심리적 측면과 삶의 방식 측면에서도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마흔 이후 30년에 해당하는 서드 에이지가 청년기 못지않은 가치를 지녔음을 일깨워 주면서 나이 들어 늙어가는 것을 두려워만 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실감을 딛고 정서적 성숙함과 심리적 안정감을 위한 준비 또한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충고를 하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마흔 이후의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서드 에이지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부모 세대와는 달리 장수 혁명으로 얻은 30년의 수명 보너스가 주어진 상황에서, 마흔 이후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삶의 방식으로 임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최종적인 삶의 질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2차 성장은 창조적 에너지에 더해 역설과 모순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6가지의 원칙을 제안하고 있다. 첫째, 중년의 정체성 확립하기. 둘째, 일과 여가활동의 조화. 셋째, 자신에 대한 배려와 타인에 대한 배려의 조화, 넷째, 용감한 현실주의와 낙관주의의 조화. 다섯째, 진지한 성찰과 과감한 실행의 조화. 여섯째, 개인의 자유와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의 조화로서 언뜻 보면 서로 대립되어 동시에 실행할 수 없을 듯 보이는 역설적인 각각의 두 요소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이 마흔 이후 새로운 삶을 위한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2차 성장을 해 나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구식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의 속도를 떨어뜨릴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청년을 깨워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 즉 경험에서 나오는 원숙함과 자신감, 낙관주의와 유머감각으로 무장한 40대 이후의 젊은 중년들은 20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기만족을 갖게 될 것이다. 자, 우리 젊은 그대! 나이 들어감의 신화를 깨뜨리고 죽어가는 과정이 아닌 창조적인 과정 속에서 자신의 삶 뿐만이 아니라 우리 주위 사람들의 삶까지 비옥하게 만들 수 있는 쓸 만한 사람들이 되어 보자. 우리의 계획을 실행으로 옮겼을 때 우리의 나머지 인생은 행복으로 가득 찰 것이다.

쇠고기 문제에 대한 또 다른 생각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연일 온 나라가 시끄럽다. 더구나 이것이 한미 FTA의 국회 비준이 이뤄지지 않는 빌미가 되고 있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여기에서 기존에 제기되었던 30개월 이상의 소에서 나온 쇠고기, 위험 부위 등에 대해 다시 왈가왈부할 생각도 없고, 과학적 근거를 논할 생각도 없다. 그래서 일부러 광우병이란 말도 삼갔다. 과학적 근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할뿐더러 밀가루로 만든 약이라도 약이라고 생각하고 먹으면 일정한 효과가 난다는 플라세보 효과라는 것도 있으니까 현재의 쇠고기 문제에 대한 태도가 과학적인 것인지를 논할 생각도 없다. 마치 만두 파동, 닭고기 파동 때처럼 이 문제는 아마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진정될 것 같다. 다만 소비자로서 쇠고기 문제에 대해 떠오른 한 또 다른 생각이 있어서 언급하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더 세분화된 시장의 진전이다. E-마트에 매장을 마칠 무렵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것을 보고 놀란 일이 있다. 알고 봤더니 신선도가 생명인 생선과 같은 상품들을 다른 시간보다 더 싸게 처분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주부들이 일부러 이때를 기다려 장을 보러 왔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은 다른 곳에서도 일어난다. 유통기한이 하루 이틀 밖에 남지 않은 식품만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곳도 있다. 이런 현상은 달걀의 유통에서도 나타난다. 품질이 다르지만 서로 섞여 있고 값이 똑같은 달걀들을 파는 경우, 사람들이 와서 일단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더 좋은 품질의 달걀을 골라가기 때문에 품질이 떨어지는 달걀은 더 긴 기간 동안 재고로 남는다. 물론 쉽게 식별되지 않는 좋은 특성의 달걀이 이런 달걀들 속에 있으면 제 값을 받기 어렵다. 그런데 달걀의 품질을 구별해 주는 제도를 시행하자 등급이 떨어지는 싼 달걀도 더 값이 싸다는 매력을 안고 있어 팔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유정란 등 식별이 어려운 달걀들의 좋은 특성도 제 값을 받기 위해 이런 정보를 앞세운 새로운 브랜드로 출시된다. 그렇다면 쇠고기 문제도 이런 방식으로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소비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쇠고기에 대한 정보에 목말라 있고 이의 부족으로 단순히 수입산 뿐 아니라 국내산 쇠고기 수요를 줄이고 있다. 소비자들이 정확한 정보를 알았더라면 장을 봐와서 식탁에 올랐겠지만 실제로는 장바구니 속에 들어가지 못한 쇠고기가 많았을 것이다. 정보의 부족으로 거래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쉬운 일이다. 안전을 최우선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안전하다고 믿는 부위나 연령대의 것은 좀 더 높은 가격에 사고, 그런 발생가능성이 별로 높지 않는 위험 정도는 감수하고 오히려 이를 값싸게 쇠고기를 즐길 기회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더 값싸게 쇠고기를 즐길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산이라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속성을 지닌 것의 생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컴퓨터에 어떤 소프트웨어가 들어가 있느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듯이, 물리적으로 똑같은 쇠고기라도 그 쇠고기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드러난 것은 더 비쌀 수 있다. 이처럼 이런 정보의 생산에는 일정한 비용이 들지만 이것이 쇠고기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회복하여 쇠고기 문제를 풀고 더 나아가 쇠고기 시장을 발전시키는 길이 아닐까? 만약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정보가 왜곡될 가능성을 소비자들이 의심한다면, 이런 분야야 말로 축산농가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방식이 유망한 정보생산 방식이 될 수 있다. 축산분야 기업가들의 혁신을 기대해 본다. 아울러 쇠고기 수입문제의 빌미가 일정 부분 정부에도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정부의 관심도 있었으면 한다. 우리나라의 축산업은 특히 돼지고기는 수입 개방에 부위별 등급별 판매 등을 도입해 성공적으로 대응한 바 있다. 이번 쇠고기 문제가 우리 축산업이 한 단계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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