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고가 울고 있다

신문고(申聞鼓)는 왕권시대에 백성이 원통한 일을 호소할 때 치게 한 큰 북이다. 조선조 태종2년(1402)부터 대궐문루에 달아 놓은 이 신문고를 치면 당부에서 고충을 알아 처리했다. 태종원년(1401)에 처음으로 설치할 때는 등문고(登聞鼓)라고 하였다. 조선 세종16년(1434)에 승문고(升聞鼓)로 잠시 이름을 고쳤었는데 아무튼 신문고의 위력은 대단하였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신문고의 설치목적은 왕권시대에도 백성의 고충을 직접 듣는 민주적인 제도였지만 억울한 사정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문제점도 있었다. 오늘날이나 옛날이나 백성이 통치자에게 호소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권력있는 자, 금력있는 자들로부터 받는 억압과 서러움 밖에 더 있겠는가. 지난 1994년 4월 발족한 국민고충처리위원회는 ‘현대판 신문고’라고 할수 있는데 그동안 위법·부당한 행정처분 등 국민들의 크고 작은 억울함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러나 일부 지방자치단체와 행정기관들이 국민고충처리위원회가 시정권고권만 갖고 있고 집행권이 없는 점을 악용, 고충처리위의 시정권고 조치를 묵살하고 수용치 않는 사례가 빈발한다고 한다. 공무원 사회의 관료적인 폐해를 지적하는 3무(無)형태(선례가 없다, 규정이 없다, 재정이 없다는 핑계)가 국민고충처리 과정에도 예외가 없는 것이다. 특히 지방자치단체들은 민선시대 이후 고충처리위의 시정권고조치를 외면하는 사례가 크게 늘어 정부행정이 중앙과 지방정부가 손발이 맞지 않음을 입증한다. 문제는 고충처리위에 행정집행권이 없다는 점이다. 민원사무처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시정권고권과 언론공표권, 대통령보고권을 갖고 있지만 제대로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그렇게 질타해도 시큰둥한 판국에 공문서로 전달되는 시정권고조치가 무슨 힘을 받겠는가. 대통령이 호령 호령하고 감사원이 들쑤셔놔도 위법과 부당한 행정처분이 계속 자행되는 실정이다. 공직사회에도 위계질서가 무너진지 오래됐다는 이야기가 들려 나온다. 옛날 대궐에처럼 청와대 정문에 신문고를 매달아 놓으면 청와대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국민의 쓴소리를 들을 것인가. 지금 현대판 신문고는 전국 도처에서 밤낮으로 울고 있다. 위정자들은 그 아픈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답답하고 또 답답하다.

광우병 문제점, 사실대로 밝혀야

광우병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동물사료를 국내에서 사용하고 동물사료를 수입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는 등 광우병 파문이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어 심히 걱정스럽다. 더구나 동물성 성분이 섞인 음식물 사료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축산농가는 물론 사료업체·소비자들이 모두 골탕을 먹고 있어 사태가 심각하기 짝이 없다. 지난 1998년 쇠고기·뼈 등이 포함된 음식물 찌꺼기를 사료로 사용하도록 적극 권장했던 농림부가 최근 광우병 문제가 불거지자 동물성 사료로 인한 광우병 발병 가능성을 차단한다는 이유로 음식물 찌꺼기로 만든 사료를 소 등 반추동물에 일절 먹이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공문을 전국 시·도에 보냈었다. 그런 농림부가 지난 6일 다시 “음식물 사료는 광우병과는 무관하다”고 정정 발표했으니 누가 신뢰하겠는가. ‘병주고 약주는’ 정부의 입장이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축산농가와 사료업체는 도산 직전에 처했고 소비자들은 불안한 나머지 쇠고기를 먹지 않고 있다. 한갑수 농림부 장관이 “정부가 국민보건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철저한 광우병 대책을 시행중이므로 믿고 쇠고기를 먹어 달라”고 한 말도 안심이 안된다. 한 장관 스스로 “광우병은 발병원인이나 전염경로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음식물 찌꺼기를 사료로 먹인 소가 광우병에 걸리는지도 확실하지 않다”고 토로했기 때문이다. 말꼬리를 붙잡으려는 게 아니라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미 광우병의 원인이 ‘재활용된 사료’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동물성 사료를 초식동물인 소에 먹이는 것을 광우병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도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광우병 문제는 단순히 농정이나 경제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보건에 대한 장기적 안전보장의 측면에서 신중하고 완벽하게 대책을 수립, 시행하여야 한다. 눈앞의 난관이나 책임회피 때문에 임기응변으로 이 문제를 처리한다면 그 후환은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다. 광우병 사태의 정면대응을 위해서는 모든 관련자료와 사실들을 추호도 가감없이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 지금이라도 광우병의 유입, 발생위험이 있는 모든 분야를 빈틈없이 점검, 확인하고 실상을 투명하게 국민들 앞에 알리는 동시에 국가가 책임지고 대책을 마련, 시행하여야 할 것이다.

대우차 自滅하자는 건가

대우자동차의 앞날이 갈수록 암담하다. 대우자동차가 정리해고 통보에 앞서 부평공장의 가동을 3주동안 중단키로 한데 대해 노조측이 반발, 창원 군산 등 5개 지부와 함께 총파업에 돌입키로 결의하는 등 노사가 벼랑끝 극한 대치로 내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노조측은 회사측이 휴업하는 동안에도 조합원들을 출근시켜 농성장을 확보하고 파업투쟁을 벌이기로 함으로써 휴무가 끝난다 해도 정상가동의 지장은 물론 노사간 물리적 충돌이 예상되는 등 심상치 않은 상황이다. 대우자동차 노사의 이같은 극한적 대립은 인력감축 등 현안에 대한 이성적 해결보다는 상호 불신속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우차가 협력업체의 부품공급 중단이나 노조원의 파업아닌 자체결정으로 장기간 공장가동을 중단하는 것은 지난해 11월 부도 이후 처음으로 재고물량을 줄이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는 것이 회사측 주장이다. 그동안 매각협상 지연과 내수시장 위축으로 지난달 내수 및 수출실적이 지난해 1월보다 52%나 줄어 1개월 이상의 재고물량이 쌓였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노조측은 이달 중순께 희망퇴직자 등을 제외한 1천918명의 정리해고를 앞두고 집단 반발을 우려한 의도적 조치라며 반발하고 있다. 노사의 이같은 엇갈린 시각으로는 순조로운 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우차는 지금 노사가 상호 이해와 양보로 협력체제를 구축하지 않으면 파국을 면치 못할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회사측이 휴업 이유로 든 매출급감도 따지고 보면 노사 모두의 책임이 크다. 내수시장 위축도 한 원인이겠지만 노사갈등에 대한 수요자의 외면도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일관성이 요구되는 생산 라인에서 파업과 조업중단이 반복되고 있으니 그런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제품의 품질을 수요자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대우차가 회생하려면 노사합의의 신속한 구조조정과 정상가동에 의한 신뢰회복, 그리고 품질제고가 최우선 과제다. 본란이 누차 지적한 바 있지만 사측의 정리해고안에 대해 노조가 선뜻 합의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은 심정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노조측이 한치의 양보없이 고집만 부릴 상황은 아니다. 구조조정에는 고통이 따를 수 밖에 없는 냉엄한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사측도 일방적 가동중단조치로 노조를 자극할 것이 아니라 대화분위기 조성방안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제야말로 노사 모두 극단적 사고와 행동이 파멸로 이어지지 않도록 자제하고 구조조정에 합의함으로써 회생의 길을 모색해야 할 때임을 각성해야 한다.

홍역

지난해 말부터 크게 유행하던 홍역(紅疫)이 올해에도 여전히 번지고 있어 어린 자녀를 둔 가정에 비상이 걸렸다. 주로 어린이들이 앓는 홍역은 처음에는 발열·기침·콧물·눈곱이 끼다가 얼굴·목·가슴·몸통의 순서로 온 몸에 붉은 반점이 생긴다. 환자 1천명 중 1명은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진 홍역은 40여년전만 해도 많은 어린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주범이었다. 전염병으로 인한 비극은 동서고금이 비슷하지만 우리나라도 참혹했다. 조선시대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약 200년간 전염병이 무려 79차례나 휘몰아쳤고 그 결과 어떤 해에는 인구의 7.8%인 50만명 이상이 죽기도 했다. 전염병이 ‘오랑캐보다 더 무섭다’는 말은 그래서 생겼다. 그 전염병을 역병(疫病) 또는 염병(染病)이라고도 했으며 반 우리말로는 ‘돌림병(病)’이라고도 했다. 이 돌림병이 한번 ‘돌고’ 지나가면 삼천리 강산이 온통 죽음의 강토로 변하곤 했다. 시체가 도처에 널리지만 행여 옮을까 치우기도 겁이 나 아예 정든 고향을 등지고 멀리 타향으로 떠났다. 당시 전염병은 콜레라나 장티푸스, 이질, 홍역 등이 있었는데 그 중 홍역은 특히 무서웠다. 누구나 한 번은 걸린다고 하는 이 홍역은 일단 발생하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갔다. 조선 숙종 33년(1694)의 경우, 초봄에 평안도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여 1만여명이 죽었고 그해 가을에는 전국적으로 만연돼 죽은 자가 이루 셀수 없을 정도로 많아 ‘동네 골목에 어린아이가 드물었고, 한 집안이 몰수한 경우도 부지기수’에 이르렀다. 요행히 홍역에서 살아 남아도 사후(事後)에 겪는 고통은 죽은 자나 별반 다름없었다. 역병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므로 기근이 그림자처럼 따랐고 주위의 소나무는 모두 벗겨지고 풀뿌리조차 남아나지 않을 정도였다. 초근목피로 연명한 것이다. 그래서 ‘홍역을 치렀다’는 표현은 비참의 극을 형용하는 말이 되었다. 최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는지 정부가 4월말까지 전국의 모든 초등 1년생에서 고등 1년생 600여만명을 대상으로 일시에 무료로 홍역 백신을 접종하는 캐치업(catch-up)을 한다고 발표했다. 예방은 하지 않고 꼭 큰 일이 터져야만 허둥지둥대는 게 정부가 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싶다. 홍역은 ‘평생에 안 걸리면 무덤에서라도 앓는다’는 전염병이다. 자녀는 국가가 키워주는 게 아니다. 먼저 부모들이 미리 미리 예방해주는 게 도리이다. /淸河

부끄러운 음란사이트 1위

한국이 아시아 국가 중에서 음란사이트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통계가 발표되어 부끄럽다. 그 동안 한국이 아시아 국가 중에서 일본보다도 컴퓨터, 무선전화의 보급률 등이 앞서 정보화 수준이 높아 21세기를 선도하는 정보사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어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러나 최근 외국 언론사의 보도에 의하면 지난 1월 한달 동안 인터넷에 접속한 한국 네티즌들의 56%가 성인물사이트를 방문해 홍콩, 싱가포르, 대만보다도 높은 수치를 나타냈으니 인터넷 강국이라는 자부심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선다. 현재 한국은 약 300만명의 네티즌이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어 명실공히 인터넷 강국을 나타내고 있다. 인구 대비로 보면 미국 18%, 홍콩 17%, 일본 14%에 비하여 34%라는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최근같이 각종 유해 음란사이트를 접속하는 것 때문에 인터넷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면 이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유해 음란사이트의 각종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도박 사이트로 가산을 탕진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자살 사이트까지 등장하여 동반 자살은 물론 청부살인까지 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청소년들의 유해 음란사이트 접속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들의 무관심 속에 청소년들이 유해 음란사이트를 접속하여 각종 살인, 폭력 등 모방 범죄를 자행하는가 하면 성범죄까지 증가하여 중요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음란사이트는 성적으로 호기심 많은 청소년들을 유혹하여 성범죄를 유발시키고 나아가 유흥비마련 등을 위한 강도행위까지 유발시키는 예가 허다하여 철저한 단속이 요구된다. 유해 음란 사이트에 대한 단속이 검찰이나 경찰의 힘으로만 되지 않는다. 물론 경찰 등에서 지속적으로 단속하면 일정한 수준의 효과는 기대되나, 인터넷의 특성상 이를 완전히 폐쇄하거나 또는 음란사이트 운영자를 모두 처벌하기는 어렵다. 이를 단속하기 위하여 범사회적 노력이 요구된다. 가정과 학교에는 물론 언론 등에서도 지속적으로 유해 음란사이트의 문제점을 지적함은 물론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퇴치 운동을 전개하여야 된다. 정보화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가 더 이상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물들지 않도록 우리 모두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土公의 잘못된 환경의식

공기업인 한국토지공사(토공)가 아직도 개발연대의 낙후된 사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엉터리 환경영향평가로 용인 신봉지구 1만여평의 자연녹지를 훼손한 토공이 경기도의 원상복구명령을 3개월째 묵살 방치하고 있는 배짱을 이해할 수 없다. 더욱이 토공측이 원상복구와 관련한 주민과의 합의서 서명을 기피하고 숲내 도로건설과 단독택지개발 등을 요구하는 행태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당초 경기도가 용인 신봉지구 훼손산림에 대한 원상복구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은 시민환경운동의 결과였다. 13만5천평을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받은 토공이 ‘잘못된 환경영향평가’를 근거로 20∼30년생 상수리나무 6천그루 등 울창한 숲을 베어버리자 주민들이 산림벌목의 부당성을 제기하고 환경당국에 재조사를 요구하는 등의 노력끝에 얻어진 땀의 결실이었다. 그런데도 토공측이 울창한 산림을 훼손한 책임을 통감하기는 커녕 당국의 원상복구명령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상식밖의 일이다. 물론 환경영향평가 용역업체가 기초조사를 하면서 보존할 가치가 충분한 녹지(8등급)를 개발가능한 6등급으로 엉터리 분류했는데도, 환경부 산하 환경정책평가연구원이 오류를 잡아내지 못하고 무사통과시킨 허술한 제도도 문제지만 뒤늦게라도 이를 원상복구해야 할 토공측이 나몰라라 하고 있는 것은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국토의 산하 곳곳이 ‘개발’이란 명분아래 무분별하게 파헤쳐져 자연보전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터에 공기업이 환경보호에 앞장서기는 커녕 자신이 훼손한 산림을 복구하지 않고 오히려 단독택지개발을 추진하는 처사는 개탄스럽다. 개발지상주의에 함몰된 토공이 환경보전을 위한 시민환경단체의 힘으로 비롯된 원상복구명령을 무시하고 ‘시간이 지나면 녹지보존지역도 개발될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뀔 수 있다’ 등 무책임한 발언이나 하고 있으니 개탄의 정도를 넘어 분노를 느끼게 한다. 산림이 목재를 생산하는 경제적 가치외에 대기를 정화하고 풍수해를 방지하며 야생조수나 생태계를 보호하고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공익적 효용도 지니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관계당국은 이같은 ‘도시의 허파’인 신봉지구 산림을 다시 볼수 있도록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하루속히 토공으로 하여금 복구토록 해야 한다. 아울러 복구명령을 이행치 않고 있는 토공측의 책임도 단호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庶民別曲

거액의 남의 돈을 받은 사실에 처벌을 승복지 않는 풍조는 누구는 그런 일이 없었느냐는 생각을 갖기 때문이다. 법의 집행이 권위를 갖지 못한다. 현대 사회의 불행이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는 식이다. 먼지를 터는 사람 또한 털면 먼지가 나오므로. 다만 터는 입장과 털리는 입장의 차이지만 이런 입장 역시 영원한 것은 아니다. 희극인지 비극인지…. 해서, 위법사실이 새삼 문제되는 것만 걱정할뿐 위법사실에 수치를 모른다. 불운하게 문제가 된 사람도, 행운으로 문제가 안된 사람도 모두 자신의 문제거리엔 막상 수치심을 갖지 않는다. 법치는 중요한 것이지만 윤리성을 상실한 법치는 이처럼 사람들을 몰염치하게 만드는 허점이 있다.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은 내각제 대통령이었던 윤보선, 신군부에 의해 하야한 최규하, 두분을 제외하고는 절대권력자들이다. 법보다 더 막강한 힘을 갖는 것이 이른바 ‘대통령의 분부사항’이다. 절대권력이 절대부패를 낳는 것은 불변의 정치철학이다. 절대권력의 압제를 받은이도 절대권력을 쥐고나면 그 역시 풀줄을 모르고 절대권력을 행사한다. 기이한 악순환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억! 하면 억대더니 이젠 몇조, 몇십조라니 참 ×같은 세상이네!”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의 비리를 보도하는 라디오뉴스를 듣던 한 택시기사의 한숨섞인 탄식이다. 1억원만 해도 서민들에겐 꿈같은 금액이다. 생전에 만져보기는 커녕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돈이다. 그 택시기사의 말은 다음이 더 걸작이다. “지금 난다 긴다 하는 정치인치고 과거에 김우중돈 안먹은 사람 있겠어요?” 대답을 요구받는다고 여긴 승객이 ‘그럼, 차라리 일이 안터진 것보다 못하네요…”하자 기사는 펄쩍 뛰었다. “안터지다뇨? 언제 터져도 터지지 안터질수 있습니까.” 우리의 미래가 과거의 족쇄로부터 해방될 날은 과연 언제쯤일는지. 열심히 살려는 서민대중에게 절망의 무력감을 안겨주는 절대권력의 횡포, 염치모른 부패를 청산할 날은 정녕 있을수 없는 것일까. /白山

문예진흥기금 배정 공정하게

경기문화재단에 접수된 2001년도 문예진흥기금 신청이 총 1천26건, 금액은 180여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올해 문예진흥기금 예산은 15억원에 불과하기 때문에 신청종목 지원여부 심사를 앞두고 경기문화재단이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온다. 이달중에 지원여부를 결정하고 3월초 발표할 예정이라는 경기도 문예진흥기금심의를 앞둔 시점에서 몇가지를 당부하고자 한다. 재정이 열악해 홀로서기가 어려운 문화예술계에서 그동안 문예진흥기금은 그야말로 유일한 자양분이자 구제금융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매년 문예진흥기금의 지원대상이 결정된 뒤에는 잡음이 생겨났고 진흥기금의 심사와 운영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제도개선이 시급하다는 주장도 끊이질 않았다. 따라서 경기문화재단은 과거지사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지원심의위원회를 구성할 때 최근 2∼3년간 연임한 위원위주보다는 심의위원뱅크제를 통해 분야별로 안배하기를 바란다. 기금의 혜택을 보려는 단체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인사가 심의에 참여한다면 심사의 공정성을 의심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 유명 예술 페스티벌은 총감독 한 명이 수십억, 수백억원 규모의 예산을 집행하면서 지원단체를 면밀하게게 심사한다. 미국이나 유럽의 지원금 심의에서는 현장 실사가 따른다. 심의위원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지우는 방식이다. 그러나 한국의 문예진흥기금 지원은 그 해 그해의 심사위원 취향이나 개인적인 호불호에 따라 지원여부가 결정되는 일이 많고, 신청서류 중심으로 심사를 하는 경향이 있다. 또 단체나 개인에 편중하지 말아야 한다. 특정단체의 경우 사업비보다 경상비 비중의 높아서는 안된다. 매년 답습하는 행사보다는 신규개발사업이나 주요사업에 대한 집중적 지원방식으로 전환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소액이라도 많은 예술가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능성있는 곳에 집중 지원해야 ‘물건다운 물건’ 즉 ‘작품다운 작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문화재단은 한정된 예산에 과다한 신청금액을 공정하게 심의, 배정하기를 기대한다.

대보름날의 선심행사

지방자치단체들의 선심쓰기가 여전하다. 대보름을 맞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역축제에 지방자치단체들이 때를 만난듯 예산을 펑펑 써가며 열을 올리면서 내년 선거를 의식한 각종 행사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의 ‘선심행정’에 대해 높아지고 있는 비판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같은 행태는 이제 위험수위를 넘어선 느낌이다. 도내 각 시군이 하나같이 대보름 축제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푸짐하게 잔치판을 벌이고 연날리기대회를 갖는 등 단체장이 자리지킬 틈이 없을 정도로 행사도 많고 씀씀이도 전보다 커지고 있다. 동별로 개최되고 있는 윷놀이 대회에 1천만원의 예산을 지원하는 자치단체가 있는가 하면 고위공직자들이 세미나를 한다며 스키강습을 다녀와 말썽을 빚은 어떤 기초단체는 700만원을 들여 공직자 결속을 다지는 대규모 윷놀이 대회를 계획하고 있다. 물론 민선 자치단체장들이 민속잔치인 대보름 축제에 주민과 공직자들을 위로하는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같은 행사가 민속축제를 기화로 한 사실상 사전선거운동의 성격이 짙다는 데 문제가 있다. 더욱이 지방선거 조기 실시론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벌어지고 있는 이같은 무더기 선심행사는 단체장들이 ‘기득권’을 통해 선거운동을 한다는 점에서 예사롭게 보아넘길 일이 아니다. 선거운동을 겨냥한 선심행정의 폐해에 대해선 낱낱이 밝힐 필요도 없을 정도로 국민들이 잘 알고 있는 사항이다. 이미 본란이 최근 다양한 형태로 벌어지고 있는 자치단체의 선심행정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한 것도 단체장들의 사전선거운동심리가 행정공백은 물론 주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등 폐단이 적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행정자치부가 교부세를 빌미로 민선단체장과 지자체의 목을 쥐려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단체의 무책임하고 방만한 재정운영을 막기 위해 교부금을 삭감 또는 증액해주는 ‘재정 페널티제’와 ‘재정 인센티브제’ 도입을 추진하겠는가. 이제 민선단체장들은 차기 선거를 겨냥해 인기에 집착한 나머지 지방정부 예산을 마치 쌈짓돈처럼 여기고 제멋대로 쓰는 일은 없어야 한다. 더군다나 지방경제가 신음하고 있는 터에 일선 행정을 맡은 단체장들이 1년 5개월이상 남은 선거를 위해 선심쓰기나 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지금은 민생챙기기가 무엇보다도 더 화급한 일이다. 자치단체장들의 각성을 거듭 촉구해둔다.

인문과학

학문은 생활법칙의 체계화다. 정치 종교등 기타의 여러 권력지배로부터 학문의 해방과 독립을 주장한 것이 학문의 자유다. 유럽은 르네상스 이후 중세기 제권력의 속박으로부터 이탈, 학문연구의 자유와 수학의 자유를 구가하였다. 그 이전, 학문의 속박은 인문과학은 물론이고 자연과학에까지 자행됐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는 종교재판에서 자신의 주장을 부인하는 진술을 강요받았다.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와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것은 교회와의 마찰을 피하여 죽음 직전에 남긴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역사 학예등 인류문화에 관련하는 정신과학의 총칭이 인문과학이며, 물리 화학 생물 천체 지학등 자연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의 총칭이 자연과학이다. 인문 및 자연과학은 학문의 쌍벽으로 인간생활의 두 수레바퀴와 같다. 인문과학은 정신생활의 풍요, 자연과학은 기술생활의 풍요를 가져온다. 그 어느것도 소홀히 할수 없는 인간생활의 두 견인차인 것이다. 만약 인문과학에만 치중하면 생활의 빈곤, 반대로 자연과학에만 치중하면 정신의 빈곤을 유발한다. 학문의 두 분야가 균형있게 성장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나 꼭 그렇지만은 않는 것이 또한 시대상이다. 1945년 해방이후 70년대까지는 인문과학이 왕성했던 것이 70년대 후반 테크노크라시가 고개를 들면서 자연과학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인문과학 출신위주의 관료에 이젠 테크노크라트가 당당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IMF이후 요즘 경제가 더 어려워지면서 대학의 진학 성향이 자연과학쪽으로 두드러지게 편중하는 것 같다. 4년제 대학도 비슷한 경향이지만 특히 전문대학은 자연과학 학과 일색이어서 수십대의 경쟁률을 나타내고 있다. 인문계 졸업으로는 취업난을 뚫기가 어려워 기술을 배워두고자 하는 세태의 반영으로 보여진다. ‘기술입국’이란 말이 있다.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자연과학 선호경향도 좋지만 인문과학 선호의 쇠퇴경향은 심히 우려스런 현상이다.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이 고루 선호되고 발전하는 세상이 빨리 오면 좋겠다. /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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