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청출어람

5월 어느 날 저녁 어두워질 때쯤 보강을 마치고 나오는데 낯선 제복을 입은 청년이 복도에 서성거려 누군가 보려고 다가갔다. 육군 3사관학교에 입학했다던 후배 교수 사관의 아들이었다. 짧은 기간 함께 관사 생활할 때 고등학교 막 입학하여 자전거 타고 학교 다니던 것을 본 게 엊그제였었는데 각 잡힌 의젓한 모습을 보고 내심 놀라며 너 청출어람이라는 의미를 아니?라고 물었다. 쪽이라는 푸른 일년생 식물에서 천연의 푸른색 염료를 얻는 데 그 색깔이 원래 쪽의 푸른색보다 더 푸르다는 의미로 순자(荀子)의 권학(勸學)편 첫머리에 나오는 청취지어람이청어람(靑取之於藍而靑於藍)을 축약하고 변조한 고사성어이다. 스승보다 제자가 더 낫다는 말이지만 내 질문의 의도는 아버지보다 더 준수해 보였기 때문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제자로 남으면 스승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다라고 했다. 스승을 능가하지 못한 제자는 스승을 욕되게 한다는 말이다. 청출어람과 상통하는 이 말은 경성(警醒)하지 못하고 채신머리없이 나대기만 하는 현실에 내 던져 꽂는 비수이기도 하겠다. 자기만 옳다 하고, 자기만 최고라 여기며 주변을 돌아보지도 않는 모습이 못나기 이를 데 없다. 소신도 아닌 고집으로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억지는 식상하다 못해 속상하다. 남보다 덜 배운 것도 아니고 남보다 덜 가지지도 않는 사람들이 무엇이 부족해서 갇힌 사람들처럼 막가 처신을 해대는지 한심하기 그지없다. 수신(修身)의 배움과 제가(齊家)의 가르침을 준 스승과 어버이를 욕되게 하고 치국(治國)이 아니라 파국(破國)으로 치달으려고 하니 더욱 그렇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전 6:12)고 하였다. 형제가 형제를 고발하는(고전 6:6-8) 지나친 자기중심적인 행동에 대한 절제를 요구하는 말이다. 지나침은 아니함보다 못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교훈이다. 구약성서 잠언에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잠 3:1-2)고 하였다. 배운 대로 행하면 평강이 더해진다는 말씀이다. 스승과 어버이의 기대에 부응하는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원한다면 우선 생각과 행동을 자숙(自肅)해야 하겠다. 강종권 구세군 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부활의 기쁨이 온 누리에 가득하길

전 세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부활 시기를 지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죄와 죽음을 물리치고 다시 살아나심을 경축하고, 우리 또한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전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부활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악보다 더 큰 사랑,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을 살리신 하느님의 크신 사랑,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구원의 빛이 온 인류를 비추고 있음을 기념한다. 죄와 죽음이 단절과 분리를 의미한다면 특별히 이 시기는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이 결합되고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된 시기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활 사건을 단순히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나누는 시간으로 보낸다. 우리를 통해서 다른 이가 생명을 살 수 있도록, 온 인류에게 구원의 빛이 전해지기를 기도한다. 이번 4월은 좀 더 의미있는 시간으로 보낼 수 있었다. 교구 사제들이 파견된 미국, 페루, 칠레 선교지를 20일 일정으로 방문하고 돌아왔다. 과거의 교회가 유럽과 미주 교회로부터 받는 교회였다면 이제는 나누는 교회가 되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열악한 지역에 성당과 학교를 세우고, 우물을 파고, 병원을 짓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한국에서 편안한 사목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물설고 낯선 이국 땅에서 사목하는 신부들의 열정과 기쁨, 그들만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이방인을 마을 어귀에서 북을 치고 춤을 추며 따스히 반겨주었던 가난하고 순박한 신자들의 모습, 5천500m 험한 산길을 차로 2시간 걸려 봉헌한 공소 미사, 우리에게 볼 수 없는 시장 한가운데를 행렬하며 봉헌했던 성지주일 미사!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한 체험이었다. 교구 신부들과 신자들의 공동체를 바라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참으로 소중한 존재요, 사랑안에 마음으로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목 방문 기간 중 특별히 5천m 험한 산길을 2시간 걸려 도착한 아나니아스라는 공소가 인상적이었다. 잠시 한눈을 팔다가는 낭떠러지로 굴러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이었다. 철저히 외부와 단절된 조그만 마을, 50여 명의 원주민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하늘까지 닿을 듯한 높은 빌딩과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는 한국 사회의 이방인(?)은 먼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도시화와 세속화의 흐름 속에서도 전통을 보존하며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 가난하지만 잘 웃고 먼저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동물조차도 사람들과 어울려 공동체를 이루는 듯한 길가의 양들과 강아지들, 신선한 공기와 형형색색의 야생화, 어두운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은 나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었다. 한 달 헌금을 모아도 우리 돈으로 3만 원도 채 안 되는 가난한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애타게 한국인 신부를 기다리고 있었고, 험한 산길을 달려온 그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편리한 삶과 신앙을 살던 내게 그들이 간직한 믿음과 인심은 누구보다 부자였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고, 더 자극적이고, 더 편리하고, 빠른 것을 추구하지만 왠지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마음의 여유와 미소, 작고 소박한 것에 대한 감사, 익힌 감자와 까칠한 빵이지만 함께 나누어 먹는 인심, 어린 아이가 더 어린 동생을 돌보는데 보채거나 울지 않고 평화로이 뛰어노는 모습, 자연을 잘 보존하고 경외하는 그들의 마음을 잃고 살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았다. 떠나보니 새삼 깨닫고 반성하게 된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풍요롭고, 편리한 삶을 살면서도 얼마나 감사하며 살았는지를. 낯선 이방인을 반겨주었던 소중한 벗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사랑이 참되기 위해서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면 비로소 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마더 데레사 수녀님) 유주성 천주교 수원교구 해외 선교 실장 신부

[삶과 종교] 참회를 통한 화합

삼천대천세계의 성인이시고 인류에게 지혜의 등불을 밝히셨던 석가모니라는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날이 지나갔다. 이 성인의 가르침은 자비라는 개념으로 많이 인식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화합과 평등을 강조하셨던 인간세상을 유행하셨던 삶의 궤적에서 모든 중생들에게 대한 따스한 대비심도 느낄 수 있다. 여타의 종교행사와 같이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연례행사를 맞이하면서 새롭게 지난 시간을 성찰하여 과오를 뉘우치고 건설적인 미래를 많이 구상하게 된다. 어느 종교가 편협적이고 이기적인 교리를 바탕으로 화합과 평등을 깨트리는 것을 환영하겠는가! 부처님께서 항상 설하시고 강조하셨던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청정한 마음인 불성을 유학자 맹자께서도 비슷한 관점에서 강조하고 있다. 인간다운 심리적인 기초를 이루는 성품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인(仁)과 사양지심(辭讓之心)의 예(禮)와 수오지심(羞惡之心)의 의(義)와 시비지심(是非之心)의 지(智)인 사단(四端)이 자리하고 있고, 가장 앞선 덕목으로 인자함을 손꼽고 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한국에서는 고등교육이 매우 발달하여 대부분의 국민들이 인식하고 있는 부분이고, 나아가 이땅에 전해져왔던 전통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삼가하는 처신을 중요시 생각하는 문화적 환경에서 살아오고 있다. 나보다는 우리가, 가족보다는 공동체를 앞세웠던 문화가 존중되었던 국가의 질서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을 수용한 이 땅의 종교는 얼핏보면 믿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면에서는 치열한 자기성찰과 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사람이 움직이는 곳에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라도 지금의 현실은 타협과 관용 및 화합이라는 말이 전혀 다른 시대의 산물처럼 느껴진다. 세상을 지혜롭게 살기 위한 방법으로 스스로에게 알맞은 소유와 소비의 균형을 조화시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 시대에 특히 갈등이 부각되는 것은 물질적인 빈곤이 아닌 상대적 박탈감에서 오는 재물의 불공평한 분배에서 시작된 갈등이다. 높은 교육수준에 따른 지식의 고도화는 인격을 성찰하고 연마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고 다른 존재를 해치는 흉기로 사용되면 아니된다. 지식은 나의 개인적인 치부를 위한 수단이 아니고, 사회와 공공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화합을 물과 우유가 섞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인류의 문화사의 가운데 금기시되는 역사적 사실로 식인의 문화를 손꼽고 있다. 이러한 문화가 금기시되는 이유는 인간이 지닌 선악의 중심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동안 인류라는 한 종은 지구라는 삶의 무대에서 자연의 환경부터 사유체계인 무형의 문화까지도 많은 변화를 일으켜 왔고, 그 변화 속에는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부처님오신날을 보내면서 다시 우리의 현실을 냉철하게 뒤돌아보고 참회를 통한 갈등과 분쟁보다는 타협과 화합하는 날이 다가오기를 기대해 본다. 세영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상생하는 삶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나라를 벗어나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 경험을 갖을때가 있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그 나라의 여러 상황의 분위기로 그 나라 국민의 의식을 판단하게 하는데, 소위 후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와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의 외형적인 가장 큰 차이점은 차들이 달리고 사람들이 걷는 도로 위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후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의 경우는 어떻게든 내가 먼저 앞서가야 하고 내가 먼저 살아야 한다는 극도의 이기적 태도를 보인다. 도로 위에서 들리는 차량들의 크락션 소리들과 손가락질로 삿대질을 하고 욕설을 뱉는 추한 모습들을 보인다. 전혀 여유 없고 매너도 없어 보이는 나 중심의 행동들 속에서 그 속에 있는 인생관과 세계관들을 보게된다. 그런 나라를 다닐 때라면 몸과 마음이 금방 지쳐온다. 그 나라의 좋은 것들도 다 가볍게 보이고 추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나라의 매력은 사라져버리고 다시 그곳을 찾고 싶은 마음도 메말라 버리게 된다. 그러나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에 들어서면 많이 안정된 분위기를 만나게 된다. 그들 속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는 모르나, 그 외부의 겉모습은 여유와 타인을 향한 배려가 깃든 모습을 보게 된다. 자국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있어 그 나라 사람들의 역할이 가장 크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인간이 죄를 선택하던 태초의 범죄자의 모습 속에서 가장 추하게 나타난 죄의 열매는 비교의식 속에서의 이기주의였다.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고 자신은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린 것으로 몰아가는 추한 욕망의 독이 든 열매가 바로 죄였었다. 죄의 열매가 이기주의였다면 그 죄를 이긴 신앙의 열매는 이타주의이다. 죄는 미워하되 그 죄에 무너진 사람들은 사랑할 줄을 아는 따스한 배려와 나눔이 있을 때 믿음이라는 종교의 본질은 회복되어 간다. 언젠가 한 교수님의 강의 속에서 들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사람들은 관계 중심적 사고를 하기에 죄에 대한 개념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사람들의 죄에 대한 개념은 약속을 안 지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이 설명은 참 깊은 공감을 갖게 했다. 왜 우리는 한밤중에 다른 차량들이 없을 때면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게 될까? 아마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서구 사람들은 그것이 약속이기에 지키려는 모습을 훨씬 더 많이 보이는 것이다. 모든 방면에 뛰어난 대한민국은 서양과 동양의 장점을 잘 받아들이고 발전시켜서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상생할 줄 아는 민족, 평화롭게 개인의 삶을 살다가도 나라가 어려우면 무기를 들고 나라를 지켰던 스님들, 일제의 압박 속에서 용감하게 칼 대신 태극기를 들고 독립운동에 자신을 드렸던 기독교의 지도자 분들 모두가 상생을 알며 사람을 사랑했던 종교의 삶의 열매들이었으리 생각한다. 어느 날 뉴스 속에서 만난 현대판 모세의 기적을 보았다. 응급한 환자를 태우고 복잡한 도로 위에서 응급신호를 울리며 달리는 앰뷸런스에게 도로 위에 모든 차들은 갓길로 붙어 좁은 도로 위에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었다. 그 장면은 현대판 모세의 홍해 기적 같았다. 이기주의를 버리고 서로 상생하는 삶을 선택할 때 우리는 매일 우리의 눈으로 기적을 보며 우리의 삶으로 기적을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닐까? 그 기적이 이 땅, 우리들의 삶 위에 그리고 대한민국 나라 위에 다시 세워져가는 기적의 부활을 소망하며 기도해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성북동 ‘최순우 옛집’에서 뜰에 핀 봄꽃을 보며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1916-1984)는 1974년부터 1984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분으로, 미술사학자이자 박물관 전문인이다. 선생의 유고 명저인 무량수전 배홀림 기둥에 기대서서(1994)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분이다. 오늘 이분이 말년에 사시던 집에 들렀다. 4호선 한성대입구 전철역에서 5-600미터쯤 걸어 올라가다가 왼쪽 골목길로 들어서 최순우 옛집이 그곳이다. 이 집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잠깐 이 동네 이야기를 하겠다. 4호선 한성대입구역을 나와 성북동쪽 길을 걷다 보면 아기자기한 가게들도 더러 있고, 정겨운 옛 풍경들이 눈에 띈다. 이 동네는 오래된 한옥들이 아직 군데군데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색적인 풍경이다. 성북동은 조선시대에는 한성 바로 북쪽으로 군영이 있던 곳이이라 한다. 또 한양 양반들의 별장들이 더러 있던 곳이라 한다. 산과 계곡, 그리고 바위들이 많았던 곳으로 산세와 풍광이 좋으니, 풍수적으로도 좋은 곳인 모양이다. 지금은 주택들이 들어차 있어 바위들이 잘 보이지 않지만, 산길처럼 나있는 오래된 골목길을 다니다 보면 높은 축대들이 있는 곳이 있다. 몇십 년은 되어 보이는 오래된 축대에 삐져나온 바위들이 바위가 많았던 곳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 동네는 서울에서 아파트들이 들어오지 않은 몇 안 되는 곳이 되어 오히려 이런 것들이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동네 골목이 아직 살아있는 곳이다. 골목 곳곳에는 작은 화분과 큰 화분들에 꽃들을 심고 가꾸거나 가지나 고추, 상추 등 채소를 키워먹는 모습이 정겹다. 이 집은 문화적으로 보존가치가 높아서 시민성금으로 보존되는 공간이다. 이 집은 1930년대에 건축된 한옥이다. 낮은 산구릉에 지은 집이라 대문이 약간 오르막인 평지길에서 높게 위치해 몇 개의 계단을 올라가 들어가는 집이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당시 사랑채여서 손님들이 머물렀을 것 같은 방이 왼쪽에 있는데, 작은 전시실로 꾸며져 있어 들어가 보니 눈에 띄는 문구가 있다. 남들처럼 고대광실이나 넓은 후원은 아니지만 나는 내 나름으로 좁은 뜰에 가지가지 산나물들과 조촐한 들꽃들을 가꾸면서 호젓하고도 스산한 산거의 멋을 즐겼고 남의 기름진 뜰이 부러운 줄을 모르고 살아왔으니 나에게는 이 산나무들과 들꽃들이 지닌 미덕이 그리도 컸다고 할 만하다. 이 집 평면은 ㄱ자형 본체 건물과 ㄴ자형 사랑채 건물이 마주 보고 함께 있어 ㅁ자형을 이루는 집이다. 혜곡 선생이 머물며 그의 무량수전 배홀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했을 법한 안채의 서재는 뒤뜰과 안채 마당, 대문이 보일 수 있도록 양쪽으로 문이 나 있는 방이다. 이 집을 잠깐 들러보기 보다는, 이 뒤뜰에 앉아서 두어 시간 이상 앉아서 책도 보고 나무도 보고 들꽃들도 보고 그저 앉아 있어보아야 그 멋을 느낄 것 같다. 도심 속에 있지만 산속에 있는 것 같은 맛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즐긴 산거의 멋과 산나무들과 산꽃들이 지닌 미덕을 느낄 수 있기는 어렵더라도, 더없이 훌륭한 시간이 될 것이다. 나는 이곳을 사랑하게 됐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임시정부 수립 100년

2019년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이자 지난 주 4월 11일은 그 100년을 시작했던 첫날이다. 3년 전인 2016년에 일어났던 촛불혁명의 가장 큰 키워드는 이게 나라냐?였었다. 2013년 여론조작 부정선거 의혹과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건에 대한 정부의 방기(放棄), 2016년에 드러난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왜곡한 역사로 교과서를 개작하려고 했던 파시즘적 발상이 한몫 더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나라를 수립할 때 유념할 것은 어느 한 집단이 행복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 전체가 최대한 행복해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행복한 나라란 소수의 사람들만 행복하게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온 나라를 행복하게 만드는 나라라고 했다. 그리고 막강한 힘으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민회(民會)나 법정, 극장 또는 기타 대중 집회에서 사람들 발언이나 행동을 비난하거나 칭찬하려고 늘 고함을 치거나 박수를 쳐 대는 선동을 경계하라고 하였다. 물론 플라톤이 꿈꾸었던 이상국가의 틀이기에 지나친 면이 있다 할 수도 있겠지만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보편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국가론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국가(國家)란 나라이고 집이다. 나라를 형성하는 국민이 가족으로 꾸려나가는 집이다. 군사부일체를 외치며 어버이인 왕에게 절대 충성과 효도를 요구하는 국가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으로서 성실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면서 정당한 목소리로 꾸려나가는 국가를 말한다. 100년 전 주권재민의 국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 정신 위에 세워졌었다. 그리고 빼앗긴 나라와 국민의 권리인 국권을 되찾기 위해 피 흘리며 몸부림 쳤었다, 해방 후에는 3.1운동 정신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이 오랜 독재의 굴레로 유린되어질 때, 수많은 선각들이 정의가 물같이,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같이(아모스 5:24) 흐르는 주권재민의 국가 정신을 되돌리기 위해 투쟁하고 희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여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삼일절 노래의 노랫말처럼 부끄럽지 않는 이 나라를 지키고 보전해야 할 책임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졌다. 선열의 피로 지켜진 희생이 헛되지 않게, 100년 후의 후손에게 결코 부끄럽지 않은 더 나은 주권재민의 나라를 유산으로 물려주기 위해 모두가 힘써야 할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선동 정치에 휩쓸려서는 안 되겠다. 그리고 올바른 판단으로 자신의 정당한 주권을 발휘하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드러내야 하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명심하여라

가톨릭 교회는 전례력으로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다. 재의 수요일(3월 6일)부터 주님 만찬 성목요일(4월 18일)까지 지내게 된다. 사순 시기는 본래 40일이라는 뜻의 사순(四旬)에서 유래하는 데, 성경에서 40일은 특별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재의 수요일에 신자들은 이마에 한 줌의 재를 얹으며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명심하여라. 는 말씀을 들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 타오르는 불길처럼 정열을 바치고 살다가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 같지만,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선물한다. 그래서 사순시기가 회개와 보속, 단식과 금육 등으로 힘들 수도 있지만, 구원과 은총의 시기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옛날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죄의 근원인 칠죄종(七罪宗)을 극복하는 칠극(七克)의 삶을 사셨다. 칠극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교만을 이기기 위한 겸손(謙克傲-겸극오), 질투를 이기기 위한 애덕(仁克妬-인극투), 분노를 이기기 위한 인내(忍克怒-인극로), 인색을 이기기 위한 너그러움(捨克吝-사극린), 탐식을 이기기 위한 절식(淡克-담극도), 음란을 이기기 위한 금욕(貞克淫-정극음), 게으름을 이기기 위한 근면(勤克怠-근극태)이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신자들은 기도에 좀 더 매진하고 단식과 금육, 참회와 보속의 시간을 보낸다. 우리 선조들의 칠극의 삶은 무엇을 끊고 하지 않는 것에 정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좀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사는 데 있다. 때론 우리에게 육체적인 문제가 생기면 반대로 정신적인 수련을 통해서 이겨 나가고,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면 육체적인 수련을 통해서 이겨 나가는 것이 유익이 될 때가 많이 있다. 우리가 행하는 단식과 금육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식과 금육은 육체적 고행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품고 사는 집착과 탐욕을 비워내는 것이다. 단순히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탐욕으로 허기진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로 채우는 것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을 기억하고 나누는 데에 참된 정신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행하는 사순 시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의로운 일을 하지 않고 마음을 다해 행하며, 칭찬을 받으려고 자선을 행하지 말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겸허히 행하며, 드러내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고 숨어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며, 단식을 할 때도 드러내지 말며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 보여라. (마태오 6, 1-18) 유주성 천주교 수원교구 해외 선교 실장 신부

[삶과 종교] 본질을 보는 눈

철학이란 인간이 세상에 창조되면서부터 시작된 사고(思考)의 열매로 생겼을 것이다. 철학은 종교를 만들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만들어 냈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 속에 우리는 종교인이 되고 그 종교는 여러 물주기가 되어 다양한 신앙을 만들어 냈다. 그 신앙은 분명히 인간의 행복과 사랑을 위해 시작되었을 것인데 인구의 증가 때문일까? 아니면 문명의 발달 때문일까? 오늘의 종교적인 믿음은 본질을 떠나 비 본질을 더욱 붙드는 여러 모양의 도그마(dogma)가 되어 버렸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제일 먼저 가르치신 내용은 진정한 믿음에 관함이었다. 진정한 믿음은 종교적인 모양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성도(聖徒)라 불리는 사람들의 존재적 모습이었다. 참 신앙의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하여 자신을 바라보고 애통함을 갖는 것이며 그 애통함 속에서 주님의 위로를 통하여 평안을 얻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치셨다. 그것이 믿음의 출발이며 참 행복함이고 종교가 아닌 신앙을 갖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그 신앙의 본질은 사랑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사랑은 곧 소금과 빛으로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나타나야 하는 열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소금은 녹는 것이다. 결코 자신의 자랑이나 화려함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그리고 소리없이 녹아 지는 것이 소금이다. 빛은 자신을 태우는 힘으로 세상에 존재한다. 그 빛이 우리를 비추어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며 세상과 다르게 존재하는 삶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이라는 단어를 존재케 하는 것이다. 화려한 교회의 네온사인과 주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화려한 목회자들의 삶의 모습과 오른손이 행한 착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색하게 만드는 성도들의 자기 자랑은 이미 거룩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잃어 버린 빛바랜 모습일 뿐이다. 개인국민소득 3만불이 넘었다고 외치는 이 나라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사랑에 굶주리고 있고 인간성의 상실에 안타까워하고 있으며 누군가를 사랑하고자 기다리는 목마름에 젖어 있다. 화려한 종교의 옷을 벗고 우리가 진실로 사람을 섬기며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 속에서 빛나는 참 보석이 바로 내 옆의 사람이었으며 주변의 사람들임을 보게 될 것이다. Understand. 맞다. 사랑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내 생각이 아닌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 상대를 참으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Under, 밑에 stand서서 그를 올려다볼 때 온전한 상대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고 외쳤던 예수님 제자의 목소리에 우리가 다시 귀를 기울이면 좋겠다. 아름다운 우리의 한반도강산에 아름다운 꽃들이 세상을 밝게 비취는 4월의 문을 열면서 우리 함께 가슴을 들고 깊은 들숨의 여유와 날숨의 평안함으로 다른 사람을 축복해 본다면 이미 내 안에 행복과 참 기쁨이 가득 채워져 있는 나 자신을 만나게 되고 자연스럽게 행복해 질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은 사랑할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임을 이 좋은 날에 한번 만나보면 좋겠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봄과 함께 밝은 미래를 기대하면서

인류가 집단을 이루면서 은밀하고 개인적인 관계가 등장하였고 이후에 고대 왕조에서도 특권층에 의한 권력과 기타의 재화에 독점적인 지배가 중요하게 인식되었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투명하고 객관적인 기회의 제공이 요구된다. 몇 년을 계속하여 진행되고 있는 채용비리에 대한 수사는 언론의 주요 기사로 등장하고 있고 사회와 문화의 적폐라는 용어도 정치권의 여야를 가리지 않고 회자되는 단어이다. 조선시대에는 신의에 바탕을 둔 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사회적인 시스템도 자연스럽게 인간의 심성에 바탕을 삼고 진행되어 도덕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아도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가 야기된 기록은 많지 않았었다. 우리는 이러한 선조들의 우수한 정신적인 문화를 이어받아 외세의 침략에서 해방을 맞이하여 고도의 경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그런데 요즘은 양극화에 의한 사회적인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났고 사회와 문화의 여러 부분을 금전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으며 관련한 여러 기사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씁쓸한 현실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서 중생을 교화하실 때에도 이와 같은 환락과 유흥의 문화도 발전하였던 같다. 오락(娛樂), 환락(歡樂), 희희(嬉) 등의 여러 단어가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고 피해야 하는 장소로 유흥이 이루어지는 곳을 언급하다. 또한 지금의 베이살리라는 농촌의 지역을 밤낮의 환락이 멈추지 않는 뜻으로 광엄성(廣嚴城)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당시에는 가장 번창하였고 생기가 넘쳤으나 시간이 흐른 지금에는 옛날의 영광은 사라지고 역사적 기억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뒤안길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역사는 인간의 사회활동에 따른 문화의 연속성이 뒷받침 되어야 하고 그 이면에는 서로가 믿고 의지하는 신뢰가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중국의 한시에 산이 아름다워서 명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산에 사람이 머물러서 산이 유명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므로 많은 힘과 역량을 가진 존재이다. 이러한 힘과 능력은 정직하고 합당하게 집행되어야 사회가 맑고 향기로워진다. 우리들은 이러한 능력을 역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선조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으므로 이와 같은 밝은 미래가 펼쳐지리라고 기대하여 본다. 세영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3·1운동과 용성 그리고 태극기

3월은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기운이 찾아오면서 생명이 솟아나는 느낌을 받는다.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의 걱정 속에서도 산에서 솟아나는 푸릇푸릇한 생명의 색깔들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아직은 으스스할 때가 있는데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뜨겁게 느껴지는 3월에는 생각나는 사람들이 더욱 많다. 나는 그 가운데 용성(龍城) 백상규(白相奎, 1864-1940)를 생각한다. 용성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시작시기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용성은 불경번역에 관심이 깊었다. 용성은 3.1운동 후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천도교 교전이 한글로 이루어져 있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모양이다. 출옥 후 삼장역회(三藏譯會)를 만들어 불교 한문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의 역경초조(譯經初祖)라고 불릴 만하다. 또 직접 농사를 지으며 선수행을 실천한 선농초조(禪農初祖)라고도 할 수 있다. 아마도 경초선(勁草禪)과 같은 동아시아 선의 전통과도 연관해 생각해 수도 있을 것이지만, 어찌되었든 지금 식으로 말하면 평소 자기 일 자체가 바로 선인 그런 생활불교, 실천불교를 지향하였던 것이다. 또 용성은 당시에 어린이들을 위해 현대음악 형식으로 직접 작사ㆍ작곡한 찬불가를 풍금을 연주하면서 보급했다고 한다. 또 여성 불자들이 참선 수행할 수 있도록 사찰에 부인선원을 개설해 운영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는 시대를 앞서간 분이었다. 특히 나의 이목을 끈 것은 그가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孫秉熙, 1861-1922)와 3ㆍ1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란 국가 이름과 태극기라는 국기 이름을 주창했고, 민족대표들의 동의를 얻어 3ㆍ1운동에 이것들이 쓰였다는 것이다. 용성은 스님이었다. 또 손병희는 천도교 교주였다. 민족대표 대부분은 천도교와 기독교계 인사였다. 그들은 태극기를 국기로 삼자고 주창한 스님인 용성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민족대표들은 당시 한국인들의 심상 속에서 유교와 도교적 진리를 상징하는 태극이 민족의 보편적 상징으로 작동하고 있었다고 여겼던 것일까? 이런 점들은 앞으로 더 살펴보아야 할 과제로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태극은 그렇게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자랑스럽게 만드는 대한민국의 상징이 되었다. 대한민국 국기 태극기는 욕된 20세기 시작시기에 3ㆍ1운동과 함께 우리의 상징으로 태어나서 우리의 영광된 미래의 역사를 만들며 세계사에서 우뚝 솟아오른 대한민국의 상징이 됐다. 태극은 고대 동아시아의 공통 유산인 주역에도 등장한다. 태극은 아주 오래된 기원을 갖고 있다. 태극은 세계를 해석하는 두 가지 원리인 음양이 뭉쳐져 있는 진리의 상징이다. 태극기가 국기로 사용되게 된 경위나 역사에 대해서 학교를 다니면서 배운 적이 없는 것 같다. 태극기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각인된 것은 아마도 3ㆍ1독립운동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상하이 임시정부가 태극기를 국기로 삼은 데서 유래하는 것 같다. 그가 대한민국이란 이름과 태극기란 국기의 이름을 사용하게 한 분들 중 아주 초기의 가장 중요한 분들 중 한 분인 것은 내 가슴에 새기고 싶다. 용성의 무미(無味)스럽고 무사(無事)한 오도송(悟道頌)도 함께! 용성은 용맹결사 정진 끝에 보리도를 깨치고 낙동강을 건너면서 오도송을 읊었다고 한다.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낙동강 만리의 파도로다. 고기잡이 배는 어느 곳으로 갔는고. 옛과 같이 갈대꽃에서 자도다 그는 깨달은 이후 금오산에 걸린 달이나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경치를 즐기며 강에서 고기 잡고 갈대꽃을 즐겼다. 그는 편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시대의 선각자로서 그 시대의 할 일을 하였고, 그리고 자기 길을 담담히 그렇게 갔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인격(人格)의 몫

3ㆍ1운동 100주년의 해이다. 그해 4월11일 상해에서 탄생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헌장(憲章)과 조각(組閣)으로 조직된 기억의 실체였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은 그해에 남겨진 그 기억의 터 위에 세워졌다. 그런데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 했다는 헌법 전문을 애써 부정하면서 새로운 전통을 만들려는 사람들은 어떤 인격의 소유자들일까? 심지어 을사오적이었던 이완용은 이 운동을 가리켜 삶 중에 죽음을 구하는 허설(虛說)과 망동(妄動)이라 치부하였고, 민족대표자 서명을 거부했던 윤치호는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같은 시대 같은 삶의 상황에서 살았던 각기 다른 인격의 모습들이다. 인격은 타고나지만 교육과 학습을 통해 개발된다. 사람은 저마다의 판단대로 옳은 듯이 살아가지만 나 외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수시로 평가되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을 매개로 나 자신을 인식한다고 했던 사르트르의 말처럼 사람은 제멋대로 살기에는 한계가 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살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을 당한다고 했던 옛 로마 사람들의 인식은 틀린 말은 아니겠다. 그럼에도 자기만 옳다하고, 다수의 의지와 판단과 결정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대책 없이 정제되지 못한 선동적인 발언을 하고, 가짜 뉴스를 퍼뜨리면서 공공성(公共性)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어떤 인격의 소유자들일까? 타고난 원죄의 본성 때문에 주위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앞만 바라보고 돌진하는 괴물성의 발현은 아닐까?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나는 내가 하는 일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롬 7:15)고 한 것은 이런 악행을 일삼는 인격을 두고 한 탄식이 아닐까? 사회가 공공성을 담보로 형성하고 경영되는 인격의 집합체라고 할 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하고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은 그 공적 사회에 동의하고 동참하는 개인으로서 인격의 몫이다. 그러므로 사회가 평안하기를 원한다면 지독한 비민주적 독재가 행해지지 않는 한 신뢰하며 지켜보고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인격의 역할이라 하겠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폴 투르니에는 인생이란 서로 숨은 척하는 숨바꼭질이라 하더라도 나는 인격적인 접촉을 촉구하기를 그만두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인격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나친 감정은 인격을 상하게 하고 그가 속한 사회를 멍들게 할 수 있지만, 신뢰를 동반한 감정은 인격을 성숙하게 하고 그가 속한 사회를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물론 100%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공적으로 밝혀지고 결정된 사실을 아니라 하고, 터무니없는 거짓을 조작하면서까지 사실인 것처럼 호도하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되겠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보호받아야 할 그 인격이 버려질 쓰레기처럼 취급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봄날의 따스한 여운을 생각하며

한해를 맞이하고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고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명절인 설과 정월대보름도 지나갔다. 고도화된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매우 중요시되고 설렘에 기대가 되었던 기다림의 미학의 여운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옛스러운 정취의 느낌도 낯설게 느껴진다. 희망을 안고 시작한 새해에도 이전의 몇 년처럼 희망과 활력이 넘치는 국가적인 이미지가 아닌 갈등과 대립으로 얼룩진 현실의 문제를 성토하는 기사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역사를 발전시키면서 갈등이 어찌 없었겠는가! 그렇지만 호모사피엔스인 인류의 하나의 종이 다른 종처럼 도태되지 않고 지금처럼 발전하고 번성하면서 위대한 존재로 남을 수 있었던 중요한 덕목에는 양보와 화합이라는 무언의 합의를 존중하는 인륜이 존재하고 있다. 요즘에 나타나는 난제로서 환경의 재앙인 미세먼지의 출몰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이전에도 이러한 문제가 여전히 제기되고 있는데 『고려사절요』에서는 5, 6월에도 황토비가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흙먼지에 의하여 일어난 황사는 이전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계속되는 자연 흐름의 일부이다. 이러한 반복되는 자연현상에서 문제로 심각해진 상태는 인간의 탐욕이 과도하게 작용하고 있고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기주의가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따른 국가 간의 갈등도 발생하고 있으나 국내에서도 갈등이 이어지고 있고, 계층 사이에서도 환경과 관련되어 분쟁이 일어나고 있으나 뚜렷한 대책을 세우기도 힘든 현실이다. 역사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는 국가 간에 일어났던 가장 큰 갈등은 전쟁이다. 부처님께서도 이러한 갈등을 목격하셨으며 여러 가르침을 남기셨는데 해결을 위한 선결조건으로 먼저 자신을 살펴보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세상의 이치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을 따르는 윤회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자기가 지은 업이 다시 돌아오며 이것을 스스로가 되돌려서 받는다는 것이다. 요즘 언론을 통해 현실을 살펴보면 사회의 현상을 긍정보다는 부정을, 화합보다는 갈등을, 원칙과 타협보다는 나의 이익이 우선시되어 갈등을 부추기는 형태가 많이 목격된다. 물론 언론의 자유가 확대되어 많은 정보가 자유롭게 전파되는 현실적인 영향이 크다고 생각되더라도 이기주의적인 사유와 모든 문제를 인간성에 먼저 비추어보고 해결하려는 인성이 아닌 법과 같은 편리한 제도에 의존하려는 기계적인 생활방식이 몸에 익혀진 문화의 영향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과 자연과의 상호관계에서도 인간과 인간의 상호 연관성에서도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극대화된 이기적인 사유와 행동은 예측이 가능한 현실을 혼란시켜 긍정적인 질서를 창조하는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많이 부각된다. 우리는 자연의 이치를 알아차리고 우리가 함께 화합하고 서로가 조화되어 자연에서 배운 친화적인 생활방식을 더욱 발전시키고 나와 남의 갈등을 조화롭게 풀어가는 삶의 모습을 봄의 향기에 담았으면 한다. 세영 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천천히 그리고 다 함께

세상은 속도의 시대로 접어든지 오래다. 빠른 것이 좋은 것이며 빠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바쁘게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빠르고 빈틈없는 현대 사회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소외당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 시간 없이 바쁘게 사는 것이라 믿는 것은 아닐까? 몇 해 전, 바쁜 우리들에게 마치 선지자같은 신선한 메시지를 던진 한 책이 있었다. 그 책은 바쁜 우리들에게 충고하듯이 새로운 가치를 던졌는데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라는 피에르 쌍소의 글이었다. 행복은 빠름에 있지 않고 느림에 있으며 성공은 이김에 있지 않고 함께 함에 있음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했었다. 그 느림이라는 단어를 들으며 생각나는 분들이 우리의 부모님 세대분들이시다.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힘들어 포기하신 어머님을 위로하며 2G폴더폰을 사드리던 마음에서 나는 시간이 조금 지나면 곧 내가 만나게 될 시대임을 인정해야 했다. 오늘을 바쁘게 사는 우리들도 곧 다가올 다음 세대에게 느리다고 힘들어하는 따가운 눈총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밀림의 빌딩숲속에서 소외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것은 다 같이 함께 하는 삶이 아닐까? 속도와 상관없이 느림의 미학을 존경하며 빠름의 패기를 격려하는 여러 가치관들이 만나서 서로들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삶 말이다. 예루살렘 안에는 베데스다라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주변에는 신비한 신화를 믿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그 작은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그 연못에 몸을 담그는 사람은 병이 깨끗이 낫는다는 전설이었다. 38년을 걷지 못하는 사람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리고 혼자서는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제일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가려는 절실함이 있었다. 누구도 병자로서 소외당하지 않고 온전한 몸으로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간절함에 그들은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바라며 제일 먼저 그 연못에 몸을 던질 준비를 하는 긴장속에서 살았다. 빨라야 한다. 어느 누구 보다도 빨라야 한다. 1등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살수 있다는 신념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도 이상한 사실은 연못을 바라보던 그들 뒤쪽에 거대한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성전에는 미신보다 훨씬 더 자신들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절대자를 향한 신앙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 신앙을 의지하여 성전으로 가지 않고 미신적인 신화의 베데스다 연못에 자신의 삶을 걸어야 했을까? 이유는 종교를 자신들의 도그마(Dogma)로 바꾸어 병든자들을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던 종교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러운 병자는 성전에 들어올 수 없다. 깨끗하지 못한 자들은 거룩한 성전에 들어올 수 없다는 지도자들의 편견과 오만함이 성전에 높은 울타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잘못된 종교적인 신념이 바른 믿음을 떠나 어리석은 미신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모습을 만들어 냈다. 빠르게 그리고 더 빠르게 달려서 제일 먼저 연못에 몸을 담가야 한다. 그래야 나는 인정받으며 그래야 나는 성공한 인생이 된다는 자기모순이 진리가 된 것이다. 이 베데스다의 신앙 속에서 우리는 불행한 과거의 실수를 바라보듯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념과 지역과 세대로 갈라지지 않기를 기도해 본다. 적폐라는 단어가 진리와 정의의 잣대가 되어 소수의 느린 자들을 소외시키지 않기를 바라며, 그 적폐라는 칼날이 두려워서 과거만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편 가르기 극단이 없기를 소망해 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자유와 인권에 대한 요구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자유와 평등, 정의, 인권 등의 가치는 많은 이들의 희생의 결과이고, 이러한 가치의 참된 실현은 한 국가와 국민의 성숙도를 드러낸다. 다양한 가치관, 생각, 주장, 삶의 중요한 선택과 결정, 요구들이 조화를 이루고 사회 통합에 기여 하는 면도 있지만, 현실은 갈등과 충돌을 겪기도 한다. 요즘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는 일부 정치인들의 망언은 국민적 분노와 실망감을 안겨줬다. 이제 곧 낙태죄 폐지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앞두고 있다. 교회는 낙태를 고민하고 경험한 여성들의 현실에 함께 아파하며, 우리 모두가 생명을 지키고, 생명을 살리는 길로 함께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무엇보다 남성들의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깊어지고, 여성들이 차별과 편견 없이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법과 제도, 생명존중 문화가 확산되기를 기도한다. 생명 출산에 대한 자기 결정권의 주장은 모든 권리에 우선하는 천부적 기본권인 생명권에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이 교회의 입장이다. 우리 각자 자문해 본다.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하는가? 자유가 나를 진리로 이끄는가? 생명이 우선하는가? 생명보다 행복한 삶이 우선하는가? 진리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상대적인가? 아니면 종교의 차이를 넘어 보편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진리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가?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1347-1380)는 진리에 대하여 하느님을 아는 것과 나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을 깊이 알면 나 자신을 알게 되고, 나 자신을 깊이 알면 하느님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진리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인격적인 만남과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안식일 법을 어기면서까지 38년간 앓아 온 사람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시며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율법을 폐지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마태 5, 17)임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법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명확히 하셨다. 예수님은 율법의 규정과 틀에 얽매이지 않고 진리 안에 자유로운 분이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해 줄 것(요한 8, 32)이라 말씀하셨다. 자유는 그 누구의 강제나 구속이 없는 상태에서의 선택과 결정의 행위의 측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선을 향한 자신의 원초적인 정향성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자유가 아니겠는가. 이 세상이 부러워하는 명예와 권력, 엄청난 지식과 부를 소유했다 하더라도 자유롭지 않을 수 있다. 반면 군부 독재 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위해 감옥에서도 진정 자유로웠던 분들, 경제적인 어려움과 육체적인 질병과 장애를 딛고 묵묵히 성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분들이 오히려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예수님과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의 순교자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생명을 바친 독립 유공자분들, 그분들은 고문과 협박,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자유로우셨다. 삶과 신앙도 마찬가지겠다. 어렵고 힘겨운 일들을 접하고, 하느님이 아니 계신 것 같은 절망 속에서도 작은 희망의 빛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분들! 그분들이 진정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요, 자신을 녹여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삶을 맛깔나게 하는 소금이 아니겠는가. 유주성 천주교 수원교구 해외 선교 실장 신부

[삶과 종교] 봄비를 기다리며

바쁘고 역사적인 2월이 지나가고 있다. 2월4일은 봄이 시작됐다는 입춘(立春)이었고, 2월5일은 설이었고, 2월8일은 2ㆍ8독립선언 100주년이었고, 2월19일은 봄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우수(雨水)다. 27~28일에는 2차 북미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 내가 가야할 길,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찾아다니다가 문득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 1515~1565)가 생각났다. 그는 선교회통(禪敎會通), 유불회통(儒佛會通), 원융무애(圓融無碍) 사상가로서,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상호 공존을 이야기한 분이다. 상호존중과 공존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보통 대립하는 것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共感)이 이루어지기 어려울 때가 많다. 서로 이해와 공감이 되지 않기 때문에 대립과 갈등은 해소되지 못하고 그 골이 점점 더 깊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가 정말 문제다. 나는 그럴 때, 서로 이해하라거나 공감하라거나 존중해주라고 하기보다, 마음을 비우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다시 보라고 하고 싶다. 봄비가 시작되는 우수(雨水) 앞에서 고루 내리는 비를 뜻하는 보우(普雨)의 시를 하나 소개하겠다. 참 오묘한 작용을 알고 싶다면(欲知眞妙用), 매일 일어나는 일이 그것이네(日用事天然). 물 받아 차를 달여 마시고(汲水烹茶飮), 자리에 올라 다리 뻗고 잠드네(登床展脚眠). 솔개가 푸른 은하수를 가르며 날고(鳶飛橫碧漢), 물고기가 유유히 깊은 연못에서 노니네(魚躍入深淵). 자연은 힘차게 약동하며 끊어짐이 없으니(潑潑無間斷), 푸른 구름도 먼 산줄기에 뭉게뭉게 일어나네(靑雲起遠嶺). 선(禪)은 분별과 조작, 시비(是非)를 넘어서되 그것에 몽매(蒙昧)하지 않은 평상심(平常心)을 갖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삶의 신비는 바로 자연스러운 일상생활 그 자체다. 목마르면 물 받아 차 달여 마시고, 졸리면 침상에 올라 다리 뻗고 누워 잠드는 것이다. 그것은 숲이 우거지고 들판이 널려 있던 시절, 눈에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의 솔개가 나는 것이고, 연못의 물고기가 유유히 노닐며 부단히 그렇지만 여유롭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이런 일상 속에서 일상이 곧 진리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24절기 중 봄이 시작되는 입춘(立春)이 지나가고 봄비가 시작되는 우수(雨水)를 기다리고 있다. 옛 시절에는 이 시기에 날도 풀리고 따뜻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집집마다 각 가정에서 좋은 뜻의 글귀들을 써서 집안 천장, 대들보, 기둥 등 여기저기 붙이기도 했었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분별하고 조작하고 시비를 따지지 말고 그냥 집안 어른들과 아이들이 오순도순 무슨 좋은 글귀를 써붙일 지 의논하고 각자 하나씩 써보자. 그것이 별것 아니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면 그것이 참 별것이었고, 그것들이 약동하고 있는 진리 자체였음을 알게 될 것이라 믿는다. 100년 전의 2월8일, 100년 전의 3월1일을 기점으로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그들의 소원인 독립을 위한 운동을 펼쳤고, 그것들의 고귀함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당시 그들이 독립을 간절히 원하던 이유가 바로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일상 삶과 평범한 일상 말의 자유를 얻기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괴물

새해의 첫 달이 훌쩍 지나갔다. 앞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을 만큼 바쁘게 지내다 보니 세속의 괴물이 되어져 가는 것 같아 두렵다. 10년도 더 지난 2006년에 봉준호 감독이 쏘아 올렸던 영화 괴물의 캐릭터가 남도의 친숙한 어종 짱뚱어였다고 할 때 그 두려움이 더해진다. 괴물이란 다수의 사람들이 기이하게 생겼다고 보는 생명체로서 정상이 아닌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친숙했던 짱뚱어가 괴물로 변형될 수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그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기에 당연히 두려움이 커지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최근에 방영되었던 텔레비전 드라마 SKY 캐슬은 그런 우려를 더해주고 있다. 스카이(SKY)는 대한민국의 상위 서열에 배치된 대학의 머리글자이기도 하겠지만 하늘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이기도 하다. 즉 하늘처럼 구별되어진 특별한 곳에 살면서 최고의 명성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 드라마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괴물을 사육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드라마 방영 중에 의미 있는 장면이 살짝 비치고 지나갔었다. 이 스카이 캐슬을 고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동화작가의 손에 쥐고 있었던 신자유주의 인격의 탄생이라는 부제가 붙은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라는 책이다. 저자인 파울 페르하에허(Paul Verhaeghe)는 이 책의 서문에서 현대인의 일탈을 소개하면서 그 이유를 규범과 가치의 실종, 적대적 반항장애로 지적한다. 특히 정신의학에서는 우리 안에 숨은 짐승이 그 원인이라고 본다고 말하고 그 내재된 짐승이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문화를 지배하는 동안에 인간의 정체성이 어떻게 변형돼갔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렇게 변형된 것을 신자유주의적 인격이라 지적하면서 그렇게 상속된 경제 능력을 물려받은 자는 사다리의 높은 곳에 머물지만 빚을 물려받은 자는 낮은 곳을 떠나지 못한다고 본다. 그리고 교육을 많이 받은 부모는 자식들이 태어날 때부터 호기심과 지식을 전달하여 그들의 아이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공부를 잘할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은 이 두 가지 형태의 유전이 결합되어진 돈과 학위를 중시하는 새로운 정적 사회를 가동하면서 소수의 상류층은 중산층이 자취를 감춘 사회에서 다수의 하류층을 디딤판으로 삼아 혜택을 누리게 된다고 설명하고 이로 인해 공격적으로 변하는 사회관계에서 현대 사회의 괴물이 어떻게 만들어져 가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성경이 처음 다루는 괴물은 네피림이다. 번성하는 사람이 낳은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를 삼아 낳은 아들이다. 비록 성경은 이들이 고대에 명성을 얻은 용사라고는 하지만 문제는 여호와께서 사람 지었음을 후회할 정도로 그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다고 한다(창세기 6:1-6). 심지어 그들의 괴물성(怪物性)은 하늘에 도전할 정도였다고 하니(창세기 11장) 마치 현대의 과학기술이 신의 창조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과 같은 꼴이다. 물론 신은 그들의 사악함을 홍수로 쓸어버리시거나 다시는 악을 꾸미지 못하도록 지면에서 흩어버림으로 대응하시지만 말이다. 신은 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들었지 괴물을 만들지 않았다. 그저 교만한 사람이 자기를 뽐내려고 괴물을 만들어 갈 뿐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잠언 16:18)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굳이 괴물이 되어 혼자 살 인생이 아니라면 겸손히 주변을 돌아보며 여유 있게 살아가는 법도 배워둬야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바보들의 콧노래 ‘바보 타령’

거짓인 줄 알면서도 따라가고, 속이는 줄 알면서도 속고 있는 사람들을 흔히 바보나, 천치라고도 한다. 남들이 자신을 바보라고 하면 화를 낼 텐데, 불쾌하게 여길 줄도 모르면 정말 바보가 아닐까? 몇 년 전 모 일간지의 대기자 한 분이, 비록 교육적인 좋은 뜻에서지만, 필자를 전직 모 대통령과 김추기경과 함께 바보라고 부르며 쓴 글이 있었다. 바보라는 소리에 우선 못마땅하게 느꼈지만, 유명한 분들과 같은 바보반열에 올리면서도(?) 좀 차별화하여, 과분한 영예로 여기려는 자신이 진짜 바보라는 확증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바보 신부의 말을 듣고, 성당에 다니며,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건립에 성금을 바치는 신자들도, 혹시 바보 신자들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이런 바보 신부와 바보 신자들이 있는 오늘의 한국천주교회도 바보 신자들의 천주교회가 아닐까. 특히 103위 성인들 추모 대성당 없이, 아직도 100여 년 전 프랑스신자들이 지어 준, 1천500여 명 수용하는 420여 건평의 구호물자(?) 대성당뿐이라, 우리 손으로 우리식 큰 성당 하나 짓는 일에도 무관심한 이들은, 저런 구호물자 성당조차도 과만한 바보 신자들이 아니랴! 바보의 특징 중에는 반성을 모른다는 것인데, 이 어찌 정치적 선거 마당에서만 보는 바보 현상이랴? 김추기경님이 자화상과 함께 자신은 바보라고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모 대통령 역시, 스스로 자신을 바보라고 공언한 적이 있다지만, 필자는 스스로를 바보라고 말하거나 글로 쓴 적이 없음을 되새기며 생각하는 자체가 마치 술에 만취할수록 자신은 절대로 술에 취하지 않았다고 우겨대듯, 스스로가 바보인 줄도 모르고 자신은 바보가 아닌 체하며 사는 것이 바로 자신이 진짜 바보라는 실증이 아니랴?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와서, 주책을 바가지로 떨면서 떼 지어 몰려다니는 뻔돌이들의 마당이 어찌 정치계의 선거 현장이나 돈주머니 흔드는 투전판에서 뿐이랴? 속고 속으면서도 으스대는 바보 배우들 간의 억지웃음과 악수는 바보회 종신회원으로 추대되는 것이 아니랴? 남들이 그어놓은 38선으로 고희를 넘기는 분단의 바보 나라, 바보 국민들이 이제 또, 국내외에서 영수회담 추진이다!, 남북통일 추구다!, 북한 비핵화 담판이다!, 하지만, 문명의 격차가 사상으로 격돌하는 소리가 혹시라도 전란의 포성으로 급변하지 않길 빌면서, 바보들의 가냘픈 메아리 저 너머에서 펄럭이는 깃발 사이의 야단(野壇)과 법석(法席) 가설무대만을 바라볼 뿐이지만, 무력하고 무능한, 우리 바보 나라 民草들도 이제는 죽을 힘 다하여 한마디 기도만은 바칠 수 있어야 하지 아니하랴!? 하느님이 보우하사, 이런 회담에 모이는 바보 나라 쌍방 대표들 생각대로 아무것도 되지 말고, 이들을 불러 모으시는 하느님의 뜻이 온 인류가 바라는 합당한 소원과 함께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이 시대를 아름답게 살아내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후기현대사회라고 말한다. 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우리에겐 미지의 불안감으로 다가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3가지가 없다. 첫째가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 17~18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계몽주의를 통해서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며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눈을 뜬 것은 참으로 중요했으나 그 결과로 절대적인 가치관들이 무너져 버린 것은 인간의 본연의 신분을 망각하게 된 것이다. 인간 내면 속에 있는 이 종교적인 심원은 어떻게 처리할 수 없는 본질이기에 종교적인 갈등은 심각해졌다. 절대적인 신을 거부하는 방법으로 인간이 택한 것은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이 되었고 모든 것은 다 신의 형상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모두가 옳다, 우리는 모두가 다 신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자연과 하나라는 사상을 갖게 되었다.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보아야 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둘째는 이제는 포괄적인 세계관이 없어져 간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원주의가 생겨난다. 문제는 그 중심에 나라는 것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함께라는 단어가 사라져 간다. 이 무서운 나만의 시대는 느낌과 체험의 세상이 될 것이다. 자신의 주관적 경험만이 인정되는 정신문화를 갖게 되어 진다. 이 시대에 우리는 이미 깊이 접어들고 있다. 셋째는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중요한 관심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라는 관점이다. 즉 자율적 자아관은 모든 가정과 혈연의 관계까지도 파괴해 간다는 말이 된다. 이런 시대 속에서 정답은 하나다. 의미 있는, 소중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삶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자아가 질서 속에 있어야 하며 배려 속에 존재해야 하며 상대를 아낄 수 있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극도로 불안해 질 것이다. 인간과 애완짐승들의 구분이 사라질 것이며 그 중심에는 사랑이 아닌 이기적인 나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공허하고 외로운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봉사하라, 섬기라 그리고 겸손하라 이것이 우리를 이 시대 속에서도 밝게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이다.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 그리고 함께라는 단어를 의미 있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진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값진 인생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오늘, 지금 바로 내 주변을 돌아보며 격려의 문자 한 통을 보낼 사람을 찾으라. 전화 한 통을 통하여 마음을 전달할 사람을 찾으라. 그리고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꼭 의미 있게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정하라. 세월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리고 곧 우리의 삶은 결산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날에 후회 없이 한 세상 잘 살았다 고백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참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이 될 것이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새해를 맞이하는 상념

새해를 맞이하는 감정은 일반적인 사람들은 지나쳐온 시간을 보내고 또 다른 삶이 펼쳐진다는 발전적인 사유를 지니게 된다. 인간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익혀온 습관에 의하여 펼쳐지는 삶은 다양성에 기초를 두고 있으나 모두가 지난 공통성도 우리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는 한국에 겨울의 환경이라는 특성을 지속시켜 우리들의 뇌리에 연상으로 남아있다. 신년을 맞이한 며칠간의 시간에는 지구환경이 변화된 영향으로 겨울의 이미지인 하얗게 쌓인 눈보다는 미세먼지라는 환경의 영향이 매일 뉴스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고 국가 사이에 갈등도 증폭되고 있다. 이러한 자연의 환경에 대한 역습으로 개인주의적 경향이 심화되는 사회현상은 점차 특정한 공간으로의 폐쇄성을 심화시킨다. 인간은 서로에게 공감하고 화합하는 존재인 특징을 지니고 있으나 이러한 현상은 점차 멀어져가는 신기루와 같이 인식된다. 석가모니가 인간사회에 강조한 덕목 가운데의 하나가 화합이다. 화합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환경 속에서 서로가 조화를 맞추어 각자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바라보면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단순히 인간과 축생 및 환경의 요소가 어울려져 있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삼라만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나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치는 것이다. 여러 복합적인 영향으로 작년부터 이어진 겨울에 눈이 부족한 탓인지 사람들의 정서도 메말라가는 것으로 착시되어 보이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상념이 흐트러진 것인가. 주위를 뒤돌아보아도 아름답고 화합하는 이야기보다는 갈등과 사고의 현상들이 많이 들려오고 미래의 희망보다는 우울한 현실을 염려하는 여러 전망들이 더욱 많이 생산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새해에 설계되어야 할 도덕과 인륜의 보편적인 문제보다는 탐욕과 갈등의 지엽적인 문제가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를 발전시킨 이면에는 인간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과학문명의 발전이 적었던 시대에는 인간들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강하였고 이러한 사유는 인간사회의 제도와 규범에 많은 영향을 끼쳐서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는 범주로 구체화된 화합하는 삶이 존재하였고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현상계를 살아가는 중생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변증법적인 사유가 존재하고 있고 호기심으로 실험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역사의 수레가 돌아가면 사람들도 바뀌고 발생하는 사례들도 변화지만 반드시 옳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님을 인류의 큰 사건에서 확인되지 않는가. 역사서인 고려사를 살펴보면 56월에도 흙비가 내리는 사실을 경계하고 있다. 오늘에 많은 문제로 인식되는 미세먼지라고 불리는 주성분은 흙으로서 인간이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근원적인 터전이고 우리에게 많은 자원을 제공하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었다. 이러한 의지처가 지금같이 문제아로 전락한 이유는 인간에 의하여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인 지구가 인간들의 오만과 독선에 심하게 훼손된 까닭일 것이다. 인간은 이와 같이 환경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강하고 위험한 존재들이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위험이 아닌 화합을 통한 개인과 인류의 발전을 발원해 본다. 세영 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새해 ‘손가락 하나’를 세워 올리며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는 무엇을 결심하고 계획하는지를 생각하고 또 말들을 한다. 나는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지난해에 이어 이 생에서 내게 주어진 길은 과연 무엇인지 물어본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답답했다. 왜인지는 모르는데, 답답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니면서 또 더 나이가 들면서 그 답답함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희미하게나마 알아는 것 같다. 길을 잃은 것 같으면서도 어찌어찌 길을 찾아가는 듯했다. 전등록(傳燈錄) 권11에 따르면, 9세기 무렵 무주(州) 사람인 구지(俱) 선사가 살았다. 구지가 젊은 날 좌선으로 일관하면서 용맹정진(勇猛精進)하던 시절 한 비구니가 그를 찾아와 세 바퀴를 돈 다음 한 마디를 제대로 한다면 갓을 벗겠다고 했다. 그러나 구지 선사는 그 한 마디를 하지 못했다. 말문이 막혔다. 그 한 마디가 무엇인지 구지에게는 화두가 되었다. 천룡 선사를 만나 깨닫기까지 그의 수행이나 고뇌에 찬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추측은 할 수 있다. 그는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역시 어둡고 희미한 길을 가면서 잘 가고 있는지 회의에 빠졌을 것이다. 마침내 그는 천룡(天龍) 선사를 만나 깨달았다고 한다. 구지는 입적할 때까지 천룡 선사의 손가락 하나를 세워 올리는 것을 통해 깨달았고, 그것을 평생동안 써도 다 못썼다고 하고 입적했다. 무문관(無門關) 3칙 구지수지(俱指竪指) 이야기는 구지가 자신을 따라하는 한 사미승을 깨우친 이야기다. 구지 선사는 누가 무엇을 물어도 항상 손가락 하나만을 세웠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한 방문객이 한 사미승에게 선사는 어떤 법요(法要)를 가르쳐주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사미승은 역시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나중에 선사는 이 말을 듣고 그 사미승에게 물었고, 사미승이 손가락을 세워 올렸다. 그 순간 선사는 이 사미승의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이 사미승은 너무 놀랐고 너무 아팠다. 통곡을 하며 달아났다. 그때 선사가 그 사미승을 불렀다. 이 사미승이 머리를 돌리자, 그때 선사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그 순간 그 사미승은 바로 깨쳤다. 보통 이 이야기를 들으면 구지의 행동이 괴팍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미승이 구지 선사의 손가락을 따라한 것은, 구지 선사의 손가락만 보았기 때문이다. 견지망월(見指忘月), 달을 보라 가리켰더니 달을 가리킨 손가락만 쳐다보는 꼴이다. 사미승의 손가락을 잘라낸 것은 손가락에 대한 집착을 놓고 달을 보라는 구지의 극약처방이었다. 사미승이 고개를 돌려 선사가 세운 손가락을 보았을 때, 사미승은 더 이상 없는 손가락이 아닌 손가락 너머의 달을 마주한 것이다. 깨친 후 나와 세상은 무엇이 달라질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런데 다른 한편 완전히 다른 나,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된다.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이 여전히 똑같이 일어난다. 배도 고프고, 졸리기도 하다. 그런데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는 것이 일상의 권태로운 일이 아니라, 늘 새로운 일이 된다. 일상(日常)이 곧 비상(非常)이 된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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