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새해 ‘손가락 하나’를 세워 올리며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는 무엇을 결심하고 계획하는지를 생각하고 또 말들을 한다. 나는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지난해에 이어 이 생에서 내게 주어진 길은 과연 무엇인지 물어본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답답했다. 왜인지는 모르는데, 답답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니면서 또 더 나이가 들면서 그 답답함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희미하게나마 알아는 것 같다. 길을 잃은 것 같으면서도 어찌어찌 길을 찾아가는 듯했다. 전등록(傳燈錄) 권11에 따르면, 9세기 무렵 무주(州) 사람인 구지(俱) 선사가 살았다. 구지가 젊은 날 좌선으로 일관하면서 용맹정진(勇猛精進)하던 시절 한 비구니가 그를 찾아와 세 바퀴를 돈 다음 한 마디를 제대로 한다면 갓을 벗겠다고 했다. 그러나 구지 선사는 그 한 마디를 하지 못했다. 말문이 막혔다. 그 한 마디가 무엇인지 구지에게는 화두가 되었다. 천룡 선사를 만나 깨닫기까지 그의 수행이나 고뇌에 찬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추측은 할 수 있다. 그는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역시 어둡고 희미한 길을 가면서 잘 가고 있는지 회의에 빠졌을 것이다. 마침내 그는 천룡(天龍) 선사를 만나 깨달았다고 한다. 구지는 입적할 때까지 천룡 선사의 손가락 하나를 세워 올리는 것을 통해 깨달았고, 그것을 평생동안 써도 다 못썼다고 하고 입적했다. 무문관(無門關) 3칙 구지수지(俱指竪指) 이야기는 구지가 자신을 따라하는 한 사미승을 깨우친 이야기다. 구지 선사는 누가 무엇을 물어도 항상 손가락 하나만을 세웠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한 방문객이 한 사미승에게 선사는 어떤 법요(法要)를 가르쳐주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사미승은 역시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나중에 선사는 이 말을 듣고 그 사미승에게 물었고, 사미승이 손가락을 세워 올렸다. 그 순간 선사는 이 사미승의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이 사미승은 너무 놀랐고 너무 아팠다. 통곡을 하며 달아났다. 그때 선사가 그 사미승을 불렀다. 이 사미승이 머리를 돌리자, 그때 선사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그 순간 그 사미승은 바로 깨쳤다. 보통 이 이야기를 들으면 구지의 행동이 괴팍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미승이 구지 선사의 손가락을 따라한 것은, 구지 선사의 손가락만 보았기 때문이다. 견지망월(見指忘月), 달을 보라 가리켰더니 달을 가리킨 손가락만 쳐다보는 꼴이다. 사미승의 손가락을 잘라낸 것은 손가락에 대한 집착을 놓고 달을 보라는 구지의 극약처방이었다. 사미승이 고개를 돌려 선사가 세운 손가락을 보았을 때, 사미승은 더 이상 없는 손가락이 아닌 손가락 너머의 달을 마주한 것이다. 깨친 후 나와 세상은 무엇이 달라질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런데 다른 한편 완전히 다른 나,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된다.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이 여전히 똑같이 일어난다. 배도 고프고, 졸리기도 하다. 그런데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는 것이 일상의 권태로운 일이 아니라, 늘 새로운 일이 된다. 일상(日常)이 곧 비상(非常)이 된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난 학기를 시작하며 작정하고 윤치호의 일기와 그에 관한 연구 논문들을 읽었었다. 유교 조선의 암흑기에 태어나 열강의 탐욕에 노출되어 있던 개화기를 거쳐 일제 식민지와 우울한 해방 초기에 살았던 그의 일생은 한마디로 파란만장한 풍운아의 삶이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에 동의하여 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어쩔 수 없이 대세에 동화되어 간 듯한 그의 일생을 두고 연구자마다 시각의 차이가 있어서 논란과 비판이 분분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그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던 한 인간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세계와 국가와 사회와 주변을 관찰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끝없이 고민하던 사람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고민하는 존재이다. 그 대상의 여부에 따라 성찰의 범위와 고민의 한계가 결정될 수는 있겠지만, 매사에 자신의 삶에 대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깊이 고민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성이라 하겠다. 특히 한해의 마지막을 보내고 시작할 때는 마치 철학자의 심정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의 대표적 작품인 지옥의 문에는 절규하는 온갖 영혼과 군상들의 고통스러운 형상이 부조되어 있다. 로댕은 스스로 이 작품을 자신만의 방주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할 때 그의 이 작품은 어떻게 살아야 지옥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지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그의 몸부림의 표현이라고도 하겠다. 그것을 결정적으로 확인시켜준 것이 그 문 상단 아래 고통스러운 태도로 고뇌하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멀쩡한 사람도 취하기 어려운 불편한 자세로 구부린 채 고민하며 생각하는 그 사람은 어쩌면 로댕 자신이었을 것이고 시대의 풍운아 윤치호였을 것이며 화살같이 빠른 일생을 수고하다가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는 평범한 우리 자신을 형상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난해는 그렇게 살았다 하더라도 올해만큼은 더 잘 살고 싶은 것이 보편적 인간의 생각이라고 할 때 이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숙제이겠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한 부자 청년의 고민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어떤 청년이 예수께 나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 19:16)고 질문하였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럴 때 예수의 대답은 먼저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다. 계명은 약속이다. 그것은 먼저 신과 인간의 약속이고 인간과 인간의 약속이다. 또한 그것은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의무사항이기도 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질문하는 인간의 삶의 지침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그게 사회 관습적 의무 이행으로 끝나는 무감각적이고 무감동적인 계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자기희생이고 헌신이다. 의무적인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헤아림이 절대 필요하겠다. 그렇게 되지 못하면 가진 재물이 많아 고민하며 쓸쓸히 돌아가 버렸던 청년처럼 애써 고민하고 계획한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면 좋을까? 하나 더 가지려고 계획하기 전에 자신을 한 번 더 살펴보면 좋겠다. 그리고 세계와 국가와 사회와 가까운 이웃을 돌아보면서 유익을 주는 빛이 되고 필요한 소금이 되었으면 더 좋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태풍에 아수라장 된 유럽의 성탄 대목장들

2000년 성년 맞이는 프랑스 파리에서라는 홍보물이 거의 1년 전부터 세계 주요 매스컴에 광고를 거듭하면서, 프랑스 파리 시의 중심가 대로변 양쪽의 가로수 마로니에 나무들도 온통 황금색 반짝이로 장식하여, 그 황홀 찬란한 풍경이 지상 천국으로 착각할 정도라고 하였으며, 시내 유명 호텔들은 예약 만원 사례 라는 소리가 오히려 새 경쟁 선전 광고가 될 정도였다니! 그도 그럴 것이 천주교회가 2천년 역사를 마치면서 제3천년대로 접어드는 해가 마침 성 바오로 사도 탄생 2000주년이 되므로, 로마 교황은 그 해를 대성년(大聖年)으로 선포했고, 유럽 각국에서는 대목장을 보려고, 앞다투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 중에도 프랑스 파리 시내는 우리 돈 수백억 이상의 예산으로 예술적인 실력을 발휘해, 대성년에 전 세계에서 오는 유명인사들 손님맞이에 최상의 정성을 다하였다는 말이 나돌고 있었다. 그러나 1년 후, 백과사전에까지 기록된 통계를 보니, 천주교회 대성년 2천년에 로마의 사도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바오로 대성당 참배 차 로마를 찾은 외국 순례객들은 3천500여만 명이 넘었다고 하였으나, 파리는 태풍피해 복구사업으로, 아예 대성년 맞이 흥행은 통계조차 없었다. 그 이유는 2000년 대성년 맞이 직전, 1999년도 성탄절, 즉 12월 22일(?) 경, 뜻밖에도 최악의 태풍급 회오리바람이 파리 지역에 약 3일간 불어 닥쳐 휩쓸고 가는 바람에, 노트르담 대성당 지붕의 오른쪽 첨단 십자가 받침 돌축대까지 한쪽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파리의 성탄절은 전무후무한 성탄 아닌, 성난 아수라장이 되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던 때이었다. 심지어 파리에서 100㎞ 이상 떨어진 베르사유 고궁 마당에 서 있던 오래된 큰 참나무와 미루나무들도 부러지거나 뿌리째 뽑혀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성년 사순절에 로마를 가다가 파리에 들러, 일부러 베르사유를 둘러본 필자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잘 알던 노인 신부님은 저녁을 함께하시면서, 돈벌이 위한 손님맞이에만 정신이 팔려서, 성탄 하시는 아기 예수님 맞이는 아주 잊어버렸어! 하느님이 노하셨지! 하고 말씀하셨다. 성탄의 의미와 가치와 정신과 교훈을 망각하고, 환락의 돈벌이에만 환장한 세대가 성탄절을 악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오늘의 인류가 전쟁을 버리고, 특히 핵전쟁을 피하려면 성탄 순례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주의나 경제제일주의에만 집중하지 말고, 아기 예수를 본받아 온 인류가 성탄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약소국들과 동맹이니, 혈맹이니, 하는 강대국들은 자기네 나라 경제발전만이 약소국들이 존립해야 하는 유일한 목적으로 삼도록 강요하지 말고, 약소민족들과의 약속을 한 신짝처럼 내버리지도 말며, 광란의 칼춤으로 대국 황제로 뽐내는, 이 시대 골목대장 뻔돌이 행세를 그쳐야만, 다가오는 핵전쟁을 인류가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도 아기 예수를 본받아 모두 성탄 하러 가자! 주막집 마구간 말구유는 가정마다 직장마다 마을마다 우리의 성탄을 기다리고 있다. 성탄 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 마을이 곧 베들레헴이고, 성탄 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 가정이 곧 주막집 마구간이며, 성탄 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 곳에 바로 아기 예수가 성탄 하여 계시며, 전란이 사라지게 하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깃들게 될 것이다. 높은 지위보다도 필요한 역할이 더 중요하다. 크고 넓은 집, 좋은 안방은 쳐다보지도 말자. 누구나 즐기는 그런 곳은 아무나 가서 앉을 수 있지만, 마구간 말구유에는 아무나 와서 눕지 못한다. 마음이 아기 예수를 닮은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들만이 차지하는 자리다. 온 인류와 특히 신앙인들의 성탄하는 생활만이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민족 속에 성탄의 평화를 깃들게 함으로써, 핵전운(劾戰雲)도 영구히 사라지게 하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이 될 것이다.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소통과 화합의 자기애를 바라보며

어느덧 한해의 끝자락에 이르렀고 바쁜 현대 생활에 쫓기던 일상을 반짝이는 추위에 다시 느끼게 된다. 연말이라는 시간은 우리라는 공동체를 생각하고 주위의 힘들었던 이웃을 살펴보게 하는 시간이고 일 년의 숨 가빴던 나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며 우리들의 문화가 얼마나 변화되었는가를 살펴보는 시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문화적으로 변화가 많이 일어났는데 세계에 한류라는 문화가 확산되는 점은 긍정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내면에는 특유한 정서가 있는데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미움이다. 어찌 보면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겠으나 사랑이 없는 미움도 없다는 뜻이다.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는 고통을 여덟 가지의 범주로 나누고 있는데 생로병사를 제외하고 그다음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과 싫은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이 있다. 이러한 만남과 헤어짐은 일상에서 일어나게 된다. 눈을 뜨고 활동을 시작하며 남과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즐거움과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과 갈등은 과거의 어디에서와 어느 시간에서나 존재하였고 미래에도 존재하겠으나 인간은 특유의 활동적인 방법으로 이것을 극복하여 왔다. 종교와 문학 및 예술이 대표적인 장르인데 모두가 인간의 성숙된 문화로 이끌었던 방편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세련되고 고도화된 문화가 때로는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 크게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 현대사회는 아주 가깝고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세계의 어느 지역이라도 하루 안에 접근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발전하였고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정보는 인터넷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지구촌의 일상을 눈앞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빠른 현실에서도 인간의 사유 방식은 어찌 빠르게 발전하지 않는가? 이것의 이면에는 자기애라는 이기적인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자기애가 없다면 남을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인간은 부모가 교육을 시작하면서 남과의 관계인 소통을 가르치고 또한 뒤에 성장하면서 양보와 절제를 요구받게 된다. 배려와 헌신이 없었다면 인간이 만물의 주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또한 과학의 힘으로 신의 영역까지 접근할 수 있었을까? 이와 같은 여러 과정에는 자기애를 발전시켜 남까지도 포용하는 확대된 자기애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우리나라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여러 부분에서 자신이 너무 강하게 작용하여 남을 경시하는 문화가 많이 눈에 띈다. 정치적인 갈등과 경제적인 갈등은 사회의 여러 부분을 혼란으로 몰아가고 있고 대중들은 각자의 이익을 찾아서 갈등을 부채질하고 있다. 그러면서 양보와 타협이라는 단어는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다. 이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나는 자유로울 수 있는가? 우리의 선조들이 물려주었던 공동체의 삶의 모습은 어느 때인가부터 찾기 어렵고 학창시절부터 갈등과 무질서가 눈에 많이 목격되는 우리들의 현실은 언제나 성숙되는 것인가. 연말이 다가오면서 이전의 모습보다는 많이 성숙되었으리라고 기대하였던 정치와 경제는 많이 개선되지 않았다. 이 땅에 살아왔던 조상들이 오천 년의 역사를 이어왔던 것은 강인한 생명력도 있었겠으나 근원적으로 소통을 통한 배려와 화합이 자기애를 넘어서 사회로 승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땅에 살아왔던 조상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와 소통과 화합을 일상에서 실천하였던 행동가였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이때는 추위와 외로움을 더욱 느끼는 때이다. 나를 우선시하는 것이 이기적인 삶이 아닌 남과 조화로운 삶을 통하여 사랑과 미움을 잘 조화시키는 삶의 방식을 되돌아 볼 때이다. 세영 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힘들 때 쉬어가는 용기와 지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자신보다 강해 보이는 힘을 의지하고 싶어 한다. 그 대상이 유형(有形)이던 무형(無刑)이던 말이다. 그래서 자연(自然) 앞에 제사를 드리고 짐승에게도 의지함을 보이고 고등종교에 깊게 심취해 가는 것이다. 그 종교성이 없었다면 인간들은 지금보다 더 위험한 욕망의 결과를 스스로 초래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종교적 쉼마저도 종교의 비본질적 분주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신앙 안에서 조차 진정한 쉼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면 치열하게 뛰어야만 하는 세상살이 삶 속에서 우리는 인생을 즐거워하기 보다는 그 인생을 살아내기마저 바쁘다. 잠시라도 그 모든 것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고 주위를 살펴볼 여유도 없이 우리는 많은 사람이 뛰어가는 방향으로 다 함께 뛰고 있는 것을 본다. 나는 왜 뛰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여유도 없다. 나는 어디로 뛰고 있는가?의 방향성을 잡을 시간도 없다. 일단 뛰면서 우리는 생각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우리는 지친다. 견디다 지친 삶들이 하나 둘 제자리에 주저앉아서 이미 망가진 나의 마음과 몸을 보게 될 때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지만 마음과 육체로부터 돌려받는 것은 병든 고통 일 때도 있다. 그때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열심히 살아온 자신의 삶을 잘못 살아온 낙오자로 부정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때 우리는 인생의 가치를 잃어 버린다. 그리고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극단의 선택도 하게 된다. 모든 종교는 진리를 찾고 고상한 삶을 살아가는 데 목적이 있다. 인생의 답을 찾고 싶은 욕망이 절대자를 향한 구도적인 자세를 갖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절대자는 우리에게 나침판을 내어주지 지도를 선물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 우리의 인생은 그 나침판을 가지고 방향을 잡으며 내 자신을 돌아봄으로 믿음의 감격과 기쁨을 얻는다. 겸손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연약함을 고백할 때 유한자의 자세를 갖게 되고 자신의 옳음이 아닌 절대자의 옳음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 절대자는 우리의 인생을 급하게 설계하지 않으셨다. 인생을 빠르게, 빠르게로 외친 것은 유한한 우리의 어리석은 경쟁의 심리였을 뿐이었다. 힘들면 쉬어가자.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실수를 줄이고 내 인생의 의미를 맛보면서 살아가 보자. 인생 살아내기가 고달플 땐 나를 먼저 사랑하고 자신의 인생 타임라인에 쉼표를 찍고 잠시 들숨과 날숨을 들이키며 멈추어서 쉬어보자. 한 해도 열심히 뛴 내 자신에게 수고의 감사와 애씀의 칭찬을 해 준다면 우리 인생은 자신으로부터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깊은 호흡하고 고개를 들어 멀리 내다보는 눈이 열릴 때 우리는 주변을 원망하지도 않고 그리고 괜스레 주변에 분노를 쏟아 내지도 않는 절제된 자신의 인생속도를 얻게 될 수 있다. 신플라톤주의의 철학이 깊게 물들어지는 21C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서 인생의 진정한 승부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내 자신과의 싸움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보다 앞서서 만족하는 인생의 삶을 살아오신 좋은 선배들의 인생은 먼저 열심히 뛰기 시작한 삶이 아니라 천천히 자신이 뛰어야 할 방향과 목적의 이유를 결정하고 자신만의 길을 뛰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준비된 인생의 삶은 자신을 돌아보고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그들의 기쁨과 아픔도 함께 나누어 가는 다 함께 잘사는 삶이 되어져야 한다. 지쳤다면 쉬어가자. 힘들다면 모든 것을 멈추고 잠시 멈춤의 쉼을 가져보자. 그 쉼의 여유가 참 내 인생의 중요함을 알게 해줄 스승이 될 것이며 지친 나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위로자가 될 것이다. 잘 사는 인생은 경쟁자를 앞지를 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인생을 동행할 때 얻어지는 상급이다. 그래서 인생의 쉼표는 인생에 용기와 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다 힘들 때 쉬어가는 용기와 지혜를 만나보길 기도해 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대학입시와 첫눈, 그리고 깨달음

지난 11월 24일과 25일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등 여러 대학의 수시 논술전형이 치러지는 날이었다. 그중 24일은 첫눈이 내렸다. 이날의 첫눈은 전에 없는 폭설이었다. 많은 학부모들과 수험생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여러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나도 30여 년 전에는 수험생이었고, 4년 전과 7년 전에 아들과 딸이 수험생인 학부모였다. 수험생으로서 또 수험생을 둔 부모로서 비슷한 일을 겪었으니까 그 심정을 잘 이해한다. 온 세상이 새하얀 아름다운 첫눈이었다. 그런데 대학 수시 논술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그 아름답고 풍성하게 내리는 새하얀 첫눈이 아름다울 리가 없다. 그것은 수험장으로 가는 길에 장애물일 뿐일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생의 80퍼센트 이상이 대학에 들어가는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대학입시는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대학을 왜 이렇게 많이 들어가려고 하고, 또 들어가는가? 또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출세를 하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대학에 가지 않은 많은 사람 가운데도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많다. 대학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어른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또 대학에 들어간다고 출세가 보장되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세속적인 바람과 뜻 외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바라고 뜻하는 것은 대학의 본래 뜻과 연관되는 것은 아닐까? 대학(大學)의 본래 뜻은 큰 배움이다. 무엇이 큰 배움인가? 그것은 유가 전통에서는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을 제일강령으로 한다. 그런데 밝은 덕이란 무엇인가? 여러 이야기가 있겠지만, 종교적으로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이다. 큰 배움이란 자신의 신성과 존엄을 밝히는 것이다. 결국 내 안의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불교적으로는 내 안의 불성을 밝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은 1905년 인제 백담사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었고, 1907년 4월 건봉사(乾鳳寺)에서 수선안거(首先安居)를 성취한 후 10년 하고도 8월이 지나 추운 겨울 12월 3일 눈발이 유난히도 흩날리는 강원도 설악산 산골의 오세암에서 오도를 하여 사나이가 된 것이다. 만해는 오도한 자기 면목을 눈 속의 복숭아꽃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38세가 되던 1917년 12월 3일 설악산 오세암에서 좌선 중 깨달음을 얻고 다음과 같이 깨달음의 시(悟道頌)를 지었다. 사나이 가는 곳은 어디나 고향인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나그네의 시름 속에 있었나? 한 마디 소리에 삼천 세계가 부서지니, 눈 속의 복숭아꽃 산산이 흩날리네. 한용운의 오도송은 한문으로 지어졌다.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是故鄕)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客愁中) 일성갈파삼천계(一聲喝破三天界) 설리도화편편비(雪裡桃花片片飛) 그리고 끝의 세 글자를 만공(滿空, 1871-1946)이 편편홍(片片紅)으로 고쳐주었다. 즉, 눈 속의 복숭아 꽃 조각조각 붉더라. 만공은 만해에게 날으는 조각은 어느 곳에 떨어졌는고?라고 물었다. 만해는 거북털과 토끼 뿔이로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만공이 크게 웃었다고 한다. 복숭아꽃은 4월에 일주일가량 만개하는 봄꽃이다. 만해는 12월 3일 추운 겨울 오세암에서 수행 중 바람에 한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에 그의 의심덩어리가 떨어졌다. 그리고 흩날리는 눈발 속에 봄에 만개하는 복숭아꽃이 그대로 있음을 알았다. 진리는 어디에나 곳곳에 있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폭설이고, 누군가에게는 아름답고 풍성한 첫눈이다.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린 것이 아니다. 올 대학 입시 수험생들이 첫눈 속에서 그들 안의 고귀함과 신성을 발견하는 첫걸음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대학에서 그것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배우미가 되길 바란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감사

11월은 감사의 달이다. 한 해를 살아오면서 겪었던 신의 은총이나 이웃의 후의에 감사하는 절기이다. 특히 한해의 마지막 한 달을 앞두고 지나간 열한 달의 삶을 성찰하면서 감사를 다질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이 행할 수 있는 특권이다. 미국에서는 11월 네 번째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킨다. 1621년 가을 영국의 급진개혁파였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정착했던 메사추세츠의 플리머스 식민지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가지고 인디언 부족과 함께 나누어 먹은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공식적인 교회의 절기가 된 것은 1623년 그곳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이다. 어쨌든 추수감사절의 정신은 나눔에 두고 있다. 특히 그것은 단순한 나눔이 아니라 낯선 대륙에 도착한 사람들이 질병과 추위로 인해 죽어갈 때 도움을 주었던 원주민 인디언 왐파노아그 부족에 대한 보은의 나눔이었다.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말이 있다. 남에게 받았던 은혜를 저버린 행위를 말한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어서는 안 된다는 속언이 있다. 보은하기보다 상황을 이용하고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아냥이겠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사람과 함께 살아가게 창조되었다. 이것은 창조주의 의도이다. 그래서 사람을 의미하는 한자의 人은 서로 의지하는 작대기로 형상화된 글씨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창조주와의 관계에서도 하나 된 존재이다. 아다마인 흙을 재료로 만들어진 아담인 사람은 그 자체로는 토기 인형에 불과하지만 창조주가 그 코에 창조주의 숨인 생기(生氣)를 불어 넣음으로 비로소 살아 있는 생령(生靈)이 되게 했다는 것은 사람을 생령 되게 하신 창조주의 은혜를 망각하지 말고 살아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자기중심으로 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창조주에게도 불성실하고 사람에게도 불성실하다. 신뢰를 주고 얻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인지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속설이 별로 낯설지 않다. 왜 그럴까? 배신을 생활화하고 체질화 시켰기 때문이다. 철새란 계절에 따라 서식지를 이동하는 새를 말한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기 때문에 다양한 철새를 볼 수 있다. 그것들 중에는 여름에 우리나라로 날아오는 여름 철새도 있고, 여름에는 시베리아나 만주 등에서 번식하다가 겨울에 중위도 지방에서 월동하는 새와 저위도의 따뜻한 지방에서 월동하는 새도 있다. 일반적으로 철새는 정해진 코스와 장소를 찾는 귀소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간 철새는 새만도 못한 것 같다. 이익이 된다면 이것저것 구분하지도 않고 아무것이나 덥석 물고, 아무 자리나 덥석 주저 않으려 하기에 원성과 질타가 끊이지 않는다. 창조주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의미가 무색할 만한 배은의 역사를 새롭게 더할 뿐이다. 감사의 달 마지막 주간이다. 며칠 남지 않은 오늘 창조주와 이웃을 중심으로 자신을 한 번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후회하지 않게 받은 은혜 감사하고, 덕분에 누린 은혜 보은하면서 원래 사람의 모습을 회복해갔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친할수록 도울 땐 거리를 둬야 한다

좀 잘 사는 형이 집도 없이 고생하는 동생과 그 가족들이 불쌍해서, 동생과 그 식구들을 모두 형네 자기 집으로 오게 하려 한 집에서, 더욱이 안방에까지 들어와서 함께 지내도록 내주며 함께 살기 시작하면, 그러한 두 가족 통합의 기쁨은 오래가기 어렵다. 동생과 그 가족들의 사고방식과 생활 패턴과 취미와 보람과 희망과 포부가 형네 집 기존 식구들과는 전혀 다를 수도 없지 않기 때문에, 두 집 가족들을 통합하여 동거시키는 과단성이 비록 용감한 결정일지는 모르나 현명한 처사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형네 집안의 풍요로움과 행복이 동생네 가정의 궁핍과 불행으로 서로 상쇄되고 융합하여, 기대했던 평준화는 예상과 달리, 두 가정이 모두가 불만과 불행이 전보다 더 심각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함께 사는 것도, 또 도와주는 것도, 거리를 두고 살면서 도와주어야 한다. 통합 살림의 기쁨이 불만과 불화와 불행으로 발전하면 마침내 다시 두 집 가족들은 이별이 불가피하게 된다. 결국 두 형제 가족들은 좀 거리를 두고(不可近 不可遠), 서로 도와주며 함께 살아가노라면 차차 자력, 자립, 자치 정신으로 두 집의 생활도 점진적으로 모두 나아지게 마련이다. 아무리 급하게 할 일이라도 오히려 천천히 하고, 천천히 해도 될 일일수록 급히 서둘러 해야 한다(急之緩, 緩之急 -孔子). 빠른 통일을 원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랴? 아마, 우리와 국경이 인접한 일본이나 중국이나 소련의 일부 정치인들 외에는 전 세계 인류가 자유와 정의가 살아 숨쉬는 오늘의 대한민국과 같은 한민족의 자유민주주의 통일국가를 모두 바라고 원하며 기원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70여 년간, 우리 남북한은 너무나 이질적인 사상적 적대 관계뿐 아니라, 찬물에 기름처럼, 도저히 쉽게 융합될 수 없는 관계가 고착, 강화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산주의 사회로의 점령통일을 위하여 대륙세력의 중ㆍ소 강대국들의 북한군 지원과 실전 참여로 3년간이나 계속된 민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에, 해양세력의 미국을 위시한 자유세계의 16개국이 실전에 파병하는 참전으로 과거의 분단 38도 분단선은 오늘의 휴전선으로 겨우 이동되어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공산주의 사상과 자유민주주의 사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계속하여 충돌하고 있다. 특히 휴전조약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최근 서해 포격이나 종종 일어나는 휴전선의 총성과 유혈사태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전 세계 인류의 생존과 평화를 위하여 국제연합이 만장일치로 강력제재하고 축소하며 완전폐기에 전력을 다하는 핵무기와 대륙간탄도 미사일을 북한이 제조하고 보유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어, 마침내 한반도에는 휴전 이전보다 더 무서운 핵 전운이 가시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핵무기 사용 확전의 필연성이 강화되는 우려를 전 세계가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최근 남북한 지도자들은 목이 쉬도록 평화와 통일을 외치면서, 황홀하게 내걸린 깃발들과 더불어, 국내외에서 회담과 협상을 계속하고 있으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할 1950년 625 사변을 완전히 망각하게 하는, 태평성대의 평화무드 조성에는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시국에,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다는 갖가지 경제협력 프로젝트는 끊임없이 제시되고 있으나, 북한의 핵무장 포기와 제거에 보다도, U.N.의 북한 제재 철회를 거듭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편이다. 기차 철로 같은 양편 주장이 칼자루 잡은 손과 합류하는 연착륙에 성공하기를 두 손 모아 하느님께 기도하자.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어머니께 보낸 어느 학도병의 편지

이세봉 생전 처음 경험해 보는 불볕더위가 지속되고 있는 8월이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여기 무덥고 무서운 여름을 보낸 가슴 아픈 사연이 있어 함께 나누려고 한다. 1950년 8월11일 학도병 71명은 포항전투에 투입되어 포항여중 앞에서 북한군과 접전 중 48명이 전사했다. 그들 가운데 당시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우근 학도병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가 우리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 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제 옆에는 수많은 학우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디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엎디어 이 글을 씁니다. 괴뢰군은 지금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저희들 앞에 도사리고 있는 괴뢰군 수는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저희들은 겨우 71명 뿐입니다. 어머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조금은 마음이 진정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이!하고 부르며 어머님 품에 덜썩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제 손으로 빨아 입었습니다. 비눗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한가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제가 빨아 입은 그다지 청결하지 못한 내복의 의미를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님, 저는 그 내복을 갈아입으면서, 왜 수의를 문득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어머님,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웬일인지 문득 상추쌈을 재검스럽게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옹달샘의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벌컥벌컥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어머님! 놈들이 다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뿔싸 안녕히 아닙니다. 다시 쓸테니까요. 그럼 이따가 또. 다소 긴 내용의 편지를 중략하면서 인용했다. 포항시 용흥동 전몰학도 충혼탑 광장에 이우근 학도병의 이 편지가 검은 오석에 음각으로 새겨져 건립되었다. 광복절이 있는 8월에 다시 한 번 지금의 대한민국이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과 6.25 동란의 아픔을 극복하고 열방 가운데 우뚝 서게 된 이면에는 이렇게 조국을 지키고 세우기 위해 피 흘려 산화한 어린 학도병에서부터 수많은 참전용사들과 16개국에서 참전한 고마운 손길들이 있었음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구약성서 시편 127편 1절 이세봉한국소년보호협회 사무총장목사

[삶과 종교] 흩날리는 낙엽을 바라보며

가을이라는 계절은 황금 물결이 넘치는 들녘과 여러 빛깔로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낙엽이 떠오른다. 낙엽이 떨어져서 도량에 흩날리는 것을 보면서 일 년이라는 시간이 바쁘게 나의 곁을 스쳐갔다는 상념이 일어나고 세상이 또한 과거의 흐름을 반복하는 주기에 묵묵히 앉아서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본다. 이 시간은 수확을 준비하였던 농부에게는 소중한 결실의 시간이었고,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분들께는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었으며, 사춘기의 청소년에게는 성장의 시간이었고, 학자들에게는 학문의 성취를 쌓아가는 시간이었으며,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자인 나에게는 내면을 관조하는 시간이었다. 낙엽으로 자연의 주기를 가르치는 나무들은 다음 세대를 키우고 독립시킨 시간이었고 스스로가 휴식에 들어갔으며 내년의 새싹을 피울 준비하는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인간들이 낙엽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낭만을 즐기는 것과는 오묘한 대조가 일어난다. 이러한 부조화는 또 하나의 커다란 자연의 울타리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있고, 인간은 그 질서 속에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를 부여하고 우리의 주관에 따른 문화를 이루어가고 있다. 이러한 문화의 다양성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특유의 문화를 연출시켜 화합을 이끌기도 하고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인간의 역사는 종교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동서양의 교류를 통한 문화의 혁신이 일어났으나 전쟁과 갈등에 의한 많은 희생도 발생하였다. 부처님 가르침의 중요한 내용으로 연기와 윤회가 자리 잡고 있다. 연기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는 언어적 표현이고, 윤회는 계속 반복한다는 상징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불교적 의미를 인간세계에 비유하여 적용시켜본다면 인간은 인간이 설정하여 놓은 경계 안에서 살아가면서 부딪히고 갈등하면서 내면의 관조와 보편적인 이성을 증가시켜 다른 존재들과의 차별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불교의 우주관에서는 여섯의 범주로 분류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꿈꾸는 극락이라는 천상계에서는 환락이 많아서 오히려 중생들이 열망하는 깨달음이라는 대전제가 천상계에서는 크게 중시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화엄경』에서는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찾아서 구법여행을 이어가고 있는데 깨달음을 인도하는 스승으로 뱃사공과 일반인의 거사 및 여인들도 등장하고 있다. 즉 인간세계에 존재하는 중생들은 모두 부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요즈음은 가정에서 애완견이나 반려동물과 많이 생활하는 추세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동물들이 인간의 말을 잘 이해하고 인간의 역할을 실천하기 때문에 증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것에는 일반의 사람들이 가진 사유의 범주에서와 다른 개념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이라는 수직에 의한 상하 관계와 나의 중심으로 생각을 펼치려는 이기적인 생각이 합쳐진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이기적인 생각을 극복하는 방법은 대중을 중심으로 사유의 폭을 확장해야 한다. 이 세상은 인간의 것만도 아니고 신에게 속한 것도 아니며, 결국 육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의 삶의 무대이다. 가을에 곡식이 익고 나무가 단풍으로 치장하는 것은 시간의 주기에서 치열하게 생존을 위하여 몸부림쳤던 삶의 생생한 장면들이다. 인간들이 우리 것이라는 오만과 편견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에도 다른 존재들은 스스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이제는 치열한 삶을 잠시 멈추고 자신을 관조하는 나무처럼 나의 내면의 부처를 찾아서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에 이르렀음을 낙엽은 날리면서 나를 일깨우고 있다. 세영 수원사 주지 스님

[삶과 종교] 지구는 중생이 공생하는 공동체

가이아(Gaia) 이론의 창시자인 영국의 대기 화학자 러브록(James Lovelock)은 지구가 일정 대기비율을 유지하는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라고 주장하였다. 지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고,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들의 생존에 최적조건을 유지해 주기 위해 지구는 언제나 스스로 조정ㆍ변화한다는 것이다.미국의 생물학자 마굴리스(Lynn Margulis)는 이를 적극 지지하였다. 마굴리스는 진핵생물 기원 가설로 생물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가설은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의 기원을 진핵 세포(eukryotic cell)로 들어간 외부조직에 에너지를 생산해주고 영양소를 얻는 공생적 관계를 이루다 정착했다고 보는 이론이다. 세포공생설(endosymbiosis) 이 가설은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진핵세포 내의 두 조직은 처음에는 적대적인 관계였다. 그렇지만 서로가 자신과 상대를 동시에 살리는 방법이 있었고, 공생하다가 마침내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둘이었다가 하나가 된 것일까? 불교적으로 볼 때, 애초에 그들은 별개 존재가 아니라 지구라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 장에서 활동하는 여러 생명인 중생(衆生)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작은 단위의 생명 장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이다. 우리는 배가 고프면 주변에 인연이 있는 것을 먹게 된다. 그것은 그 존재자들의 생명의 장 안에서 타자를 자기화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자기가 타자화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가을이 깊어가고, 은행잎들과 단풍잎들이 깊게 물들고, 곡물들과 과일들이 다 익었다. 가을에 낙엽과 과일과 곡물들은 미생물과 동식물 그리고 인간에게 좋은 먹잇감이 된다. 그리고 그 미생물과 동식물의 배출물은 역으로 그 나무에게 좋은 영양소가 된다. 나무의 광합성과 동물과 인간의 음식 섭취 및 소화 과정에서, 각각 산소를 생산하고 이산화탄소를 소모한다든가, 거꾸로 산소를 소모하고 이산화탄소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순환과 균형이 유지된다. 이런 순환 속에서 산소 21퍼센트, 질소 78퍼센트 그리고 이런저런 나머지 기체들이 일정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이 순환의 연쇄 속에서는 이타적인 것이 이기적인 것이고, 이기적인 것이 다시 이타적인 것이 된다. 내가 이롭고 남에게도 이로운 자리이타(自利利他)가 두 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 된다. 나와 남이 구분되지 않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인 것처럼 보이는 공생(共生) 즉 ‘함께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구에서의 생존 최적조건이 되는 비율이 깨질 때, 자연생태계는 물론이고 중생들의 ‘함께 삶’이 깨지는 것이다. 우리는 입이 좋아하는 대로만 먹거나 과하게 먹으면 안 된다. 일정한 대기비율이 유지되어야 하듯이, 생태계에서의 생명들 간의 균형과 조화가 중요하듯이, 내 몸의 세포들 간 균형과 조화를 위해 절제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 내 몸의 면역계가 몸을 보호하기 위해 과민반응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내 신체 일부조차도 내 신체 일부가 아닌 것으로 착각하며 공격을 하게 된다. 이것이 면역성 질환으로, 몸의 균형이 깨지면서 몸 생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심을 신호 보내는 것이다. 근대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주체와 개인이 강조되면서 인간이 함께 사는 공동체 존재자이며 지구가 공동체 존재자들의 하나의 생명의 장임을 망각하게 하였다. 그리고 급속한 산업화와 자연생태계의 파괴는 인간과 동물 그리고 지구 전체가 점차 공멸(共滅)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신호들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우리는 그것에 지금보다 더 귀 기울이고 더 눈을 떠서, 인간 자신과 자연생태계 전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의 장으로서 지구를 더 가꾸어야 한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분별력

사람의 습관 중에는 ‘후회’(後悔)라는 것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 “이전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침”이라고 하지만 대체로 저지르고 난 후나 지난 간 후에 “이렇게 할걸!” “잘할걸!” 하고 푸념하는 단순한 과정이다. 그러면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통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후회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후회하고 난 후의 변화이다. 이것을 ‘반성’(反省)이라고 한다. 후회가 지난 일을 뉘우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반성은 자기성찰이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는 날마다 세 번씩 자기성찰을 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면서 정성을 다했는가?”(爲人謀而不忠乎) “친구와 사귀면서 믿음을 잃지 않았는가?”(與朋友交而不信乎) “스승에게 배운 것을 익히지 못했는가?”(傳不習乎) 섬김과 신의와 실천에 관한 삶의 전반적인 반성을 하며 살았다는 말이다. 자기중심이 아니라 이웃중심으로 살면서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옳게 살았는지 되돌아보며 자신을 성찰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른 성찰을 제공하는 단초를 ‘분별력’(分別力)이라고 할 수 있다. 분별력이란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능력이다. 이것은 또한 정확한 ‘판단력’(判斷力)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현상을 인식한 후 사회적 또는 도덕적인 합의에 따른 논리적 판정인 판단력이 뒷받침될 때 올바른 분별력을 발휘할 수 있고, 자기 성찰이 가능하며 비로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능력인 분별력의 기준은 무엇일까? 어디에 그 기준을 두어야 할까? 사도 바울은 신약성서 로마서 12장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그 기준을 제시했다. ‘하나님의 뜻’이 분별력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전제하고 있다. 무슨 말일까? 바르지 못한 세대를 답습하려 하기보다 마음을 새롭게 다 잡아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선한 행위의 결정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선한 행위, 하나님이 기뻐하실 선한 결정이 분별력을 위한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할 때, 이것은 지구 상에 존재하는 대부분 정상적인 종교의 신들이 바라는 바이기도 할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지구상 인구의 80% 이상, 우리나라 인구의 50% 이상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신의 뜻에 따라 바른 판단력의 기준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살아야 할 사람이 최소한 반은 넘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 사람들은 예외라는 말은 아니다. 사람은 기본적인 종교의 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심성의 소유자라면 선한 행위의 결정을 신의 뜻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별력 없이 거짓 뉴스를 퍼뜨리며 사실을 오도하려는 사람들은 무슨 배짱일까? 가끔 카톡이나 편지로 거짓 뉴스가 배달될 때마다 불쾌한 것은 물론이지만 판단 결정의 결여로 분별하지 못하는 맹신적이고 무조건적인 그들의 행위가 자칫 그들이 믿는 신을 욕되게나 하지 않는지 심히 염려스럽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교황의 평양 방문과 자유통일 행진곡

평화통일은 평화적인 수단과 방법을 전제로 하는 통일이다. 종교계가 늘 외치는 소리다. 중국이나 일본의 영토확장이나, 중동의 종교분파통합, 또는, 유럽연합의 화폐통일이나, 모택동의 문화혁명 같은 명분상의 국민정신통일도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자유와 정의와 진실이 통일의 본질과 내용이 되는, ‘자유통일’을 역설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가 없고, 정의가 죽어서 진실도 없는 사회의 통일은 분단만도 못한, 사이비 통일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보유량은 지구를 40번 파괴하고도 남는다고 했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주도에 소련이 공감하여, 인류는 핵무기 축소와 생산 통제에 U.N.의 이름으로 착수하였으니, 북한 비핵화는 남북통일과 무관한 차원의 온 人類와 神의 절대 명령권역이다. 겨레의 소원 남북통일과, 종교계가 외치는 평화통일 행진곡에, 최근에는 남북한이 대국들과 직간접으로라도 북핵 타령을 합창하지는 말아야 한다. 1세기 전부터 온 겨레가 함께 부르던 현 애국가나, 나라꽃 노래를 부른다면 차라리 좋으련만! ‘불바다’나 ‘잿더미’ 거론으로 대재앙의 전주곡 같은 북핵 타령은 저승사자들이나 뻐기며 부르는 인류의 장송곡이나 다름이 없다. 남북통일에는 백해무익하며, 주변국들의 핵 무장화의 핑계가 될뿐더러 국제 전쟁 전문가들만 결집시키는 핵보유를 남북은 아직도 아쉬워하거나 흥겨워하며, 제정신을 잃지 말자. 평화의 사도 로마 교황의 평양 방문을 방해하며, 통일을 훼방하는 북핵 타령으로는 한반도에 신무기 대목장 개업이나, 신무기 종합시험장 개장의 전주곡이 될 뿐이다. 양쪽이 모두 지니고 있는 핵무기 사용의 전쟁으로는 남북통일이 더욱 멀어지고, 중동전처럼, 또다시 휴전선의 이동으로 끝나는, 종전 전주곡만 반복할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이미 10여 차례나 U.N.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속이고, 속았으니, 또 속이고, 또 속아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이제, 이번만은 북한도 핵 타령 가설무대를 거두어치고, 로마 교황과 함께 평화통일 행진곡을 불러야 할 것이다. 서독은 남한처럼 핵무기가 없었기에 경제발전이 가능하였고, 동독과 통일하였다. 핵무기는 고비용의 경제파괴 무기며, 더 큰 핵무장 갈증의 증폭제가 될 뿐이다. 미ㆍ소가 핵무장 하던 노력으로, 비핵화에 주력했다면, 지금쯤 국민소득이 10만불을 넘어, 세계 빈민국들 지원으로 인류평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대만, 남한, 이태리, 서독, 등, 미국과 U.N.이 점령하여 민주화시킨 나라들은 지금 모두 선진국 대열에 올라 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이 무력과 공산주의 사상으로 점령했던 북한, 티벳, 위그루, 내몽고,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알바니아, 동독, 폴란드, 등을 살펴보면, 공산주의 종주국답지 않게 가난을 겪고 있다. 이제는 북한도, 또, 남한의 이른바, 좌경인사들도, 아닌 척하며 겉 꾸미느라 불안해 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 각국의 진솔한 손익계산서를 따라, 용감히 공산주의 사상 포기는 물론이고, 종주국 소련이나 중국도 과감히 멀리해야 한다. 또한 몽골이나 폴란드처럼, 북한도 미국과 국교 정상화에 힘쓰게 도와야 한다. 북한이 몽고의 징기스칸이나 당나라의 이세민처럼, 점령지마다 종교의 자유만이라도 보장하였다면, 지금쯤 북한은, 중국이나 남한보다 훨씬 더 잘 사는 아시아 대국이 되었을 것이다. 신앙의 자유는 인권신장의 척도다. 로마 교황의 내년 평양 방문 예정 손익계산 개관을 보면, 남한 국민들과 전 세계에서 모이는 관광객들로부터, 평양시는 내년에 적어도 2천억 불(한화 2백억 원) 이상의 관광수입이 예상된다.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새로워지는 대한민국을 기대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아주 신비하고 경이로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 세계 많은 곳을 가 보아도 이렇게 아기 자기하게 아름다운 나라가 있을 수 있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지구촌 어느 나라를 가도 한국의 주요 브랜드 회사들이 유명하게 자리를 잡았고 한국 젊은이 들의 한류열풍과 세계를 들썩이는 K-POP 열풍이 젊은이 들을 춤추게 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국인이라고 소개를 하면 엄지 척을 보인다. 전 세계의 수 많은 유명 예언가들이 한반도의 21세기 미래를 세계의 최고 나라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지난날의 우리나라 발전 상황을 돌이켜 보면 그 예언들이 그대로 이루어 질듯보이기도 하다. 요즘의 한반도에 흐르는 정세를 보더라도 정말 남북 통일이 곧 될 것 같은 기대의 분위기들이 피어오르고 있다. 한 나라가 선진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부분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문화의식 수준일 것이다. 한 개인이 살을 빼기 위해 다이어트(diet)를 잘 하려면 우선적으로 무엇을 안 먹어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보다 먼저 삶의 시간표를 조절해야 한다. 야식을 피하기 위해서는 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고 과식을 피해야 하듯이 다이어트에 성공하려면 삶의 바른 목적을 가지고 바른 생활방식을 먼저 계획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에게도 이 계획이 중요하듯이 한 나라가 선진국가로서 다른 나라에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국민들의 국민적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우리 나라가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 우선 모든 국민마음속에 ‘비움’의 마음이 시작되어야 한다. 개인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 비움으로부터 시작되듯이 한 나라의 새로운 시작도 비움으로 시작된다. 그렇다면 한 나라의 비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나라의 뿌리깊은 학연, 지연, 혈연, 폐쇄성, 경직성들이 아닐까? 아직도 선거때를 보면 뿌리 깊은 이 모든 옛 구습들이 벗어져 버려지지 않았음을 보게 된다. 비움이 없이는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없다. 한 개인의 신앙이라는 것도 비움은 새것을 받아 드리는 가장 기초적 단계이다. 후회나 자기부정은 비움이 될 수 없다. 비움은 현실을 똑 바로 보고 내가 변하기 위하여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을 내려놓는 결단에서 시작된다. 그 비움이 가능해지면 그곳에 ‘채움’이 일어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반도에 전쟁폐허만 남았을때 우리 부모 세대는 가난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 이를 악물로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허리띠를 졸라맸다. 시골농가의 전 재산인 소를 팔아 대학비를 내었고 노후대책도 없이 자녀 뒷바라지의 교육열의 결과로 대한민국은 세계사에 유래 없는 단시간의 경제부흥을 이루었다. 그 혜택으로 오늘을 누리는 우리는 무엇으로 이 땅을 채워야 할까? 이젠 정신문화를 채워야 한다. 무너진 교육의 결과는 어린아이들이 무례함과 무개념과 무목적성을 만들어 미래를 답답하게 한다. 동방예의지국을 자랑하던 이 나라는 이제 어린아이들을 무서워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 정신적 채움이 없이는 우리를 향한 어떤 찬란한 미래의 예언적 찬사도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그 채움이 일어나면 그 때는 ‘나눔’으로 번성하게 되어야 한다. 나눔은 강자의 미덕이며 앞선자의 배려다. 우리가 그렇게 나눔을 받아서 살아 봤듯이 우리도 이제는 나누어 줄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개인의 삶에 주변과의 나눔이 일어날 때 존경을 받듯이 한 국가 또한 나눔이 일어날 때 세계속에서 부끄럽지 않은 나라가 될 것이다. 전 세계속에 어려움이 나라들을 신속하게 도와주고 국내의 약자를 돌아보며 동시에 열심히 살아온 분들에게 감사의 박수를 올리며 상생하는 민족, 그 민족이 바로 동방의 현자의 나라 대한민국이 되어지기를 가을 하늘을 우러러 보며 이 땅을 위해 기도해 본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대한민국이여 이제는 일어나 지구촌을 보듬고 가꾸고 보존하는 새로운 글로벌 리더가 되라.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며

시간의 주기적인 흐름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고 올해에도 한가위가 다시 한번 우리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과거에도 존재하였고 미래에도 지속할 우리의 정체성을 인식시키는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러한 예법들은 시대를 따라서 변천되었어도 내면에 간직한 사상적 근원은 번잡한 현대인에게도 잠시 일상을 내려놓고 부모와 조상의 공덕을 기억하고 회상하며 뿌리에 대한 성찰을 하는 시간이다. 윤리적으로 동서양을 관통하는 질서라는 개념에서 강조되었던 요소는 가정에서의 교육이 중심이고 이것을 통하여 개인과 여러 사회조직의 가치관과 관계를 정립하는 기초가 성립된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나무에 비유한다면 조상은 뿌리이고 부모는 줄기이며 자식은 열매라고 말할 수 있다. 나무의 일상적인 생의 주기에서 가을에 이르면 몇 년에 걸친 결과물을 열매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휴식에 들어가며, 열매를 통하여 더욱 발전된 미래를 준비하게 된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인간은 우주의 진리를 합리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소중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물론 다른 존재들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나 여러 제약으로 인하여 인간과 비슷한 뛰어난 결과물을 얻을 수 없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에서 부모에 의한 역할은 영향이 매우 크다. 체계적인 교육과 지속적인 학습을 통한 지식과 지혜가 끊임없이 전달되었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진보적인 존재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음을 지향하고 있으나 윤리의 토대에서 성장하고 발전한다. 이러한 윤리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부모의 은혜이다. 증일아함경에서는 “어느 사람이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얹고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얹고 다니면서, 천만 년을 의복과 음식 및 의약품 등으로 봉양하는 때에 그 부모가 설령 어깨 위에서 오물을 쏟아도 오히려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으시다. 이와 같은 크신 부모의 은혜를 우리들은 일상 속에서 얼마나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고 나아가 보답하고자 노력하고 있는가를 스스로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현대사회는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으나 다른 인격체인 상대방을 얼마나 배려하고 살아왔던가. 불교의 가르침은 연기의 법칙에 있다고 설해지고 있다. 연기의 실체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따라서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라고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는 진리의 가르침을 먼 곳에 또는 더 깊은 곳에 있다고 스스로가 가상의 현실 속에 살아가는 측면도 있다. 요즈음은 사회에서 명상이 유행하고 있는데, 이러한 명상을 통하여 부모에 대한 은혜를 자세히 관찰하는 기회가 있다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불교에서는 사람들이 꿈꾸는 천상의 세계에도 인류와 같은 사회가 존재하고 그 시대에 알맞은 문화를 꽃피운다고 말한다. 이 세계에서 특이한 점의 하나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 육아의 문제에 있어서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이 공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후에 예닐곱 살에 이르면 가정집으로 데려가게 되는데 인간세계의 가정과 같이 생활로 돌아가는 점이다. 이제 다시 번잡한 일상으로 돌아왔고 각자에게 부여된 역할에 충실할 시간이다. 그렇지만 오천년의 역사를 지탱할 수 있었던 내면에는 효와 예라는 뿌리깊은 문화가 있었다. 효를 존중하는 전통적인 예법을 통해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우리는 부처를 이룬다는 진리에 한걸음 더욱 다가갈 것이다. 세영 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추석 제사와 가족 간의 사랑

가을이 점점 익어간다. 누런 황금 들판의 저녁과 붉은 노을이 얼마나 인상 깊었으면 가을 저녁을 조상님들께 감사드리는 날로 삼고, 음력 8월 보름을 추석(秋夕)이라 했을까?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결실의 계절이다. 현재의 이 풍성한 가을을 감사하면서, 집집마다 가족들이 모여서 나와 우리 형제·자매들을 낳고 기르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그 어머니와 아버지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그리워하며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곧 다가올 겨울에는 무서운 추위가 찾아오고, 온갖 작물들은 스스로 생명의 기운을 감추고 깊게 잠들어 쉬기를 요청받는다. 그래서 가을에서 가을만을 느끼는 것은 가을을 온전히 다 느끼는 것이 아니다. 가을에서 지난 여름과 다가올 겨울과 봄 그리고 새로운 여름을 함께 느끼는 것이 이 가을을 온전히 느끼는 것이다. 곡물 하나하나에서 지난 여름의 뙤약볕과 불타는 땅의 목마름과 또 그 속에서 이따금씩 내리는 하늘의 빗줄기와 농부의 땀방울이 아로 새겨진 것을 모두 볼 수 있는가? 우리가 보는 그 곡물 안에 이와 같이 우주적 연기법(緣起法)에 따른 전체 우주가 수렴되어 있는 것이다. 수많은 그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이 각각 각자의 인생을 살아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아들들과 딸들이 또 각자 살아갈 것이다. 그 각자들은 각자들이면서 과거의 조상과 미래의 후손들이 모두 함께 수렴되어 있는 것이다. 제사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을 기리고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동시에 자신과 자녀들을 그리워하고 기리고 살리는 것이다. 내 안에는 조상님들의 흔적과 유전자들을 담고 있고, 또 후손들에게 그것들이 전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는 조상에게 지내는 것으로만 이해될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자신과 후손들을 함께 돌보는 것이다. 나의 흔적과 유전자들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어머니들과 아버지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의 공통 유산이다. 제사를 그만두자거나 생략하자거나 하는 어떤 가족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얼마나 외로운지를 드러내는 외침이다. 그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한다. 가족들 사이에 있는 어색함과 불편함 그래서 점점 멀어져가는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때 더욱 필요한 것은 가족 간의 관심과 사랑 그리고 배려다. 풍요로운 가을이 메마른 가을로 변해가는 것은 가을이 풍요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가족의 사랑과 존경 그리고 배려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뜻이다. 제사지내기를 꺼리는 것은 거기 행복과 감사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소리다. 가을에는 주위의 가족들을 더욱 사랑하고 배려하며 감사하자. 그것이 조상을 기리는 제사다. 그것이 자녀를 잘 기르는 교육이다.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자기 사랑이다. 자기 사랑이, 가족 사랑이고, 조상 사랑이고, 자녀 사랑이다. 가을 한계절에 사계절을 모두 보고 온전히 느끼는 것처럼, 주변의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 속에서 곧 조상을 기리며 자신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것을 다 보아야 할 것이다. 가족의 행복이 곧 조상을 기리는 제사와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비싼 수업료

무척 지루한 8월을 보냈었다. 하루하루 역대급 폭염으로 지쳐 허덕이는 중에 “제발 비 좀 오게 해 달라!” “제발 이 뜨거운 열기를 식혀 달라!”고 하늘의 자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늘어났었다. 그런 와중에 애태우듯 피해 달아나는 태풍의 뒤를 보며 “제발 태풍 하나만 지나가게 해 달라!”는 울부짖음을 하나 더하게 하였었다.그러다가 반갑게 하나 지나가던 태풍이 삶의 터전을 할퀴듯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하늘이 진노한 듯 이내 비구름이 날개 달고 여기저기 물 폭탄을 쏟아붓는 탓에 원망할 여유도 없이 인간의 나약함을 다시 한 번 배워 깨닫게 하였다. 비싼 수업료를 치른 셈이다. 수업료는 수업에 어울리는 가치가 있다. 어울리지 않게 터무니없이 비싼 수업료는 외면받을 수도 있다. 대학의 수업료가 학교에 따라 다른 것이 그런 것 같다. 그래서 가끔 학교 등록금을 비교하면서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도 그런 의미이겠다.음악도들이 수준 높은 연주가에게 높은 수업료를 내면서 짧은 시간의 현장 레슨이나 정기적 레슨을 받으며 스스로 만족하는 것도 그렇고, 특별한 자격증을 취득하려거나 또는 필요에 의한 외국어를 배우려고 평균 이상의 수업료를 드리면서 만족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처럼 예측한다면서 태풍이 지나가는 길조차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대비한다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심한 피해를 겪을 수밖에 없을 때, 그제야 인간 문명의 오만함과 인간 존재의 무능함을 깨달아 하늘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이게 하니 그 수업료가 보통 비싼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올해 초에 일본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리메이크하여 만든 한국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내용 중에 추수를 앞둔 들판의 벼가 비바람에 쓰러진 것을 바라보던 주인공 혜원(김태리)의 고모(전국향)가 “하늘도 참 무심타!”고 하다가도 “하늘이 하는 일을 우리가 뭔 수로 어떻게 하겠어!” 내뱉듯이 한마디 하는 말도 그런 의미이겠다. 더구나 영화의 전개 내용을 볼 때 뭘 해도 되는 것이 없어 고향으로 내려와 사나흘만 머물다 가겠다는 것이 겨울로부터 봄, 여름, 가을을 거쳐 다시 겨울로 들어서면서 자연에 순화(純化)되어 가는 이야기를 통해 하늘 아래 사는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원래 인간은 존재 자체가 그렇다. 흙 속의 티끌인 ‘아다마’로 만들어진 ‘아담’이 사람이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신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었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생령이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신의 간섭이나 도움, 하늘의 섭리를 거슬러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 잠언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하였다. 그러니 하늘에 닿아 자기 이름을 내려고 돌 대신 벽돌로 진흙 대신 역청을 사용하면서까지 문화와 과학의 업적을 과시하는 성과 탑을 쌓으려다 신의 진노로 무너지고 흩어져 버렸다는 바벨탑 사건은 어리석은 인간의 표본이라 하겠다. 이왕 비싼 수업료를 치렀으니 배우고 깨달은 대로 살아야겠다. 매 맞고 후회하는 인생이 아니라 신을 경외하듯 나 외에 다른 사람을 돌아보며 살아야겠다. 더 겸손히 하늘의 뜻을 행하는 마음으로 신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살피고 나라를 걱정하고 인류를 위해 마음을 순화하며 살아야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나가사키 수녀원 지붕 위에 떨어진 원자탄

1945년 8월 11일 오전 11시 30분, 미군 B-29 폭격기가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탄은 수녀원 지붕 바로 위의 300여 m 상공에서 터졌는데, 일본인들은 그 지점을 ‘폭심지(爆心地)’라고 부른다. 그러나 폭발순간 지상에서는 시속 1천 km 이상의 강력한 화풍(火風)과, 2천도 이상의 고열로 건축물들이, 심지어, 탱크나 대포를 제작하던 대규모 군사시설의 대들보를 받치고 있던 직경 1m 내외 굵기의 철골 기둥들도 엿처럼 녹아서 구불구불하게 휘어져 쓰러져 있는 것을, 1985년 1월 초, 필자와 김남수 주교의 방문 시에도 보게 하고 있었다. 원자탄이 폭발하던 순간 10만여 명에 가까운 나가사키 시민들이 원자 화염으로 불에 타서 재가 되었다. 폭심지에 있던 수련원에는 16세 전후의 수련 수녀들 10여 명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과 세계 인류가 범하는 죄악을 보상하기 위하여 거룩한 번제물(燔祭物)로 하느님께 봉헌되었으니, 마치 베들레헴에 예수 아기 탄생 후, 헤로데 왕의 근위병들이 예수 아기 대신으로, 무죄한 3살 아래 아기들 약 20여 명이 제물로 참살되었듯이! 천주교회는 이 순결한 어린 아기들을 지난 2천 년 동안, [어린 순교자들]로 공경하고 있다. 하느님께 바치는 번제물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처럼, 천주 성자께서 바치던 어린양같이 무죄하고 순결한 제물이어야 할 것이다.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폭발하는 동안, 나이 어린 지원 수녀들 7명은 선배 수녀 2명과 함께 점심 도시락 벤또를 받아 가지고, 정부에서 시키는 소나무 죽은 가지 꺾으러, 일찍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내륙으로 약 12km 떨어진 미쯔야마(三峰山)에 가서 나무하는 바람에 원폭을 면하였다. 그러나 폭심지 본원에서 선배 수녀들과 함께 원자탄 화염에 싸여 하느님께 바치는 인류의 번제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음을 한하였다. 불행히도 지금 핵전쟁이 나면, 우리 신부 수녀들은 성당과 수도원 지붕에만은 핵폭탄이 떨어지지 않게 해주시도록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을 것이며, 국민들이 사는 주택과 학교와 병원과 시장거리와 장병들의 군부대에는 핵폭탄이 떨어지지 말고, 그 대신 성당과 수도원 지붕에 떨어지도록, 진심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고 자청하며 대기해야 할 것이다. 1945년 4월부터 7월까지 3개월 동안 아시아에서 최악의 최대 규모 전투는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작전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일본 육·해·공군에서 선발된 특전사는 물론, 가미가제 자살특공 전투기도 2천여 대를 동원하여, 밀고, 밀리기를 거듭하였다. 양국 군의 전사자가 섬 민간인들을 포함하여 30여만 명이나 되었다. 마침내 일본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고, 일부 생존자들은 포로가 되었으며, 미군이 승리함으로써, 임시 군용비행장을 해변에 마련하였다. 비핵화는 정치, 경제, 외교, 무기, 등의 문제 이전에, 핵보유 집단의 사상 문제며, 국제외교 간 신뢰 문제다. 남한에 설치했던 전략 핵무기는 1975도에 이미 260여기(?) 모두 철거하여, 비핵화 약속을 지키고, 핵을 버렸으나, 아프리카와 북한을 포함한 아시아의 일부 국가들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다’, ‘천체 위성 제작, 실험이다’, 하는 발표로, 지난 25년간 10여 차례 이상 U.N.과 미국은 거짓에 속고 있는 줄을 알면서도, 설마 전쟁까지야 하랴? 하며, 군사적 대응을 피하고 미루는 동안 일부 국가의 핵무기 증강은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세계를 속이며, 약속을 어기고, 승리할 수는 없다. 무엇을, 얼마큼,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를 서로가 다 잘 알고 있다. 다만 여기에 고의적인 약속 이행 미달이나, 의도적인 이탈은, 현대화한 나가사키 비극의 처참한 현상이 우리들 앞에 전개되는 것을 어느 편도 피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게 될 것이다.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8월25일 백중을 생각하며

일면 스님 음력 7월 보름인 오는 양력 8월25일은 아주 중요한 우리나라 전통 명절이다. 보통 백중(百衆)이라고 하는데 많은 대중에게 공양하는 날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불교에서 나왔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 명인 목련존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나 깨달음을 얻은 뒤 자신을 길러준 부모를 제도하려 신통을 발휘해서 온 세상을 구석구석 살폈다. 그런데 죽은 어머니가 아귀가 돼 음식은 먹지도 못하고 피골이 상접해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아귀는 살아있을 때 욕심을 부리거나 남을 돕는데 인색했던 사람이 죽어서 굶주리는 과보를 받은 결과다. 목련존자가 슬피 울며 어머니에게 발우에 밥을 담아 건넸으나, 입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밥이 불덩이로 변해 먹을 수가 없었다. 목련존자는 슬피 울며 부처님께 어찌해야 하는지를 여쭸다. 부처님은 “너의 어머니는 죄가 깊어서 혼자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 신들도 어찌하지 못하니, 여러 스님의 힘을 얻어야 해탈할 수 있을 것”이라며 “7월15일에 스님들이 자자(自恣,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고 대중 앞에 참회하는 불교 의식) 할 때 세상에서 제일 맛난 음식을 여러 대덕 스님에게 공양하라”고 일러주었다. 이 내용이 실린 경전이 ‘우란분경’인데 ‘우란’은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극심한 고통이라는 뜻의 옛 인도 말이다. 이 이야기가 전하는 바는 두 가지다. 하나는 스님들을 극진히 대접하면 지옥에 떨어진 부모도 구제할 수 있을 정도의 좋은 일이 생긴다는 승보공경 정신이며 다른 하나는 자식의 지극한 효심은 지옥에 빠진 부모도 구제하는 감동을 준다는 교훈이다. 음력 7월15일은 또 스님들이 선방에서 결제를 풀고 해제하는 날이다. 스님들은 여름 3개월, 겨울 3개월을 선원에서 참선 정진한다. 이를 안거(安居)라고 하는데 시작하는 음력 4월15일을 결제(結制), 끝나는 음력 7월15일을 해제(解制)라고 한다. 그래서 해제하는 스님들에게 3개월간 고생했다며 음식을 베풀고 극진히 대접한다. 안거를 마친 스님을 대접하면 지옥에 빠진 중생도 구제하는 큰 힘이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유래한 우란분절은 농사와 결합한 백중이 되어 국가적 명절로 자리 잡았다.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소를 치는 목동들은 백중날이 다가오면 산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돋우고 당일에는 농사일을 쉬고 장만한 음식을 먹으면서 하루를 즐겼다. 이 날은 한여름 쟁기 가느라 수고한 소도 쉬게 하고 배불리 먹였다. 이처럼 백중은 봄부터 모종, 보리타작, 모심기, 김매기 등 쉴 틈 없이 바빴던 농사일을 하루 쉬면서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고 곧 시작할 추수를 준비하는 농경사회의 중요한 명절이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수행자는 물론 머슴 소까지 두루 음식을 나누고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웠던, 한여름의 명절은 이제 절에서나 볼 수 있다. 농경 사회가 사라지면서 그 시절 풍속도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백중이 갖는 소중한 의미마저 잊어서는 안 된다.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는 효, 죽은 목숨도 살리고자 하는 생명의 고귀함, 살아서 악업을 저지르면 죽어서 그 과보를 받는다는 인과의 엄중함, 소와 일꾼도 두루 챙기는 나누고 베푸는 마음은 더 새기고 퍼뜨려야 할 소중한 가치다. 올해 8월25일에도 돌아가신 부모를 생각하는 자식들의 기도소리가 전국 사찰에 가득할 것이다. 비록 절에 가지 않는다 해도 이 날 하루 부모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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