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회담으로 非核化와 無償 평화통일이?

인류 역사상 나라와 민족들 간의 무역충돌이나 영토분쟁, 전쟁예방 등 때로는 강대국들의 생트집이나 작전수단으로도 종종 상대국 기만 회담이나 강요된 합의도 없지 않았다. 지난 1,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개전(開戰)의 전주곡처럼 명분 쌓기 회담도 없지 않았다. 더구나 일당독재의 권력으로도 종교와 외교와 경제는 힘으로 되지 않으므로, 각종 회의와 합의 형식으로 국민 기만이나 상대국 무력화의 선전이 요란한 회담일수록 합의서는 일찍 破棄되어 휴짓조각이 되기도 하였다. 1970년대 초, 미국 키싱저 국무장관이 주도한 동남아 10년 전쟁 종전의 [파리 평화회담]이, 미소중영불 세계 5대 강국들 공동참여로 기대 속에 내놓은 [평화선언]은 3년도 안 가서 사이공 함락으로 휴짓조각이 됐다. 그래서 회담 내용에 현실을 도외시한 논리적 합리성이나 윤리적 정당성이 결여되면 강국들도 합의사항 이행을 소홀히 해 의도적으로 파기되고 만다. 약소국들도 당면한 어려움만을 우선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반복하며 명분 쌓기 회담의 합의사항 이행회피는 물론 끝내는 새로운 전쟁의 씨앗을 싹 틔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논리가 없고 윤리도 없는 회의나 합의가 무의미하고 무효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어떤 문학가는 문학 이상의 정치회담 각론이 될 교훈을 담아 다음과 같은 우화(寓話)를 쓰기도 하였다(이솦 우화 참조). 굶은 사자가 어린양을 만나자 “네 이놈, 너는 작년에 내게 욕을 하였지?” 하자 어린양은 “저는 작년에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었는데요!”하고 답하였다. 말문이 막힌 사자는 생트집하려고 궁리 끝에 다른 핑계를 내놨다. “너는 지난달 내 굴 앞의 풀을 내 허락도 없이 뜯어 먹었지?” 어린양은 답하였다. “저는 태어난 지 겨우 2주일도 채 안 되어, 아직 이빨이 나지 않아 엄마 젖만 빨아먹고 살아요. 풀은 아직 뜯어 먹지 못하는데요!” 이에 사자는 억지로 ‘에헴!’ 큰기침을 하며 최후통첩을 하였다. “사실은 내가 지금 시장하여 너를 잡아먹어야 하겠다” 하며 불합리한 非論理와 부당한 非倫理의 포식자는 마침내 어린양을 잡아먹었다. 양심과 理性을 무시한 회의나 진실과 정의를 포기한 합의서의 法理를 떠난 비핵화나 [평화통일] 거론은 그 자체가 무의미하고 무효이므로 전쟁 방지력은 고사하고 오늘의 경우 核大戰으로 전쟁확대 위험 제거력도 없으며 인류를 기만하는 선전 깃발 아래 숨어서 아침이 다 가도록 늦잠에서 덜 깬 잠꾸러기의 잠꼬대 같은 헛소리에 불과할 수도 있다. 1945년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조선 신탁통치 연장을 거론하자 온 겨레가 찬반양론으로 분열하여 갈등과 폭력까지 불사할 때 누군가가 서울 남대문과 동대문에 써 붙였다는 요사이 표현의 ‘大字報’ 내용은 오늘도 우리에게 큰 경각심을 갖게 한다.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한테 속지 말고, 日本은 일어난다. 조선아 조심해라!” 이 대자보 필자가 중국 거론을 피한 것은 당시 중국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모택동 공산당의 대장정 게릴라 내전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대만으로 천도 중일뿐더러(?) 옛 明, 淸, 제국처럼 조선에 기웃거릴 여유도 없었겠지만 항일 공동투쟁의 대한독립군 지원국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도 500여년 간 기대던 明과 淸이 사라져서 大國없는 孤兒 小國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깥 “中原의 모랫바람 突風”에 눈도 뜨기 힘든 터에 집안의 野壇法席에 앉은 소경들은 狂風이 휩쓸고 있으니 洪水로 범람한 국내외 정치회담의 暴雨 속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듯 무죄한 약소민족들만이 집단 溺死의 위기를 피할 수가 없게 될까 걱정이다. 思想家 부재사회의 이 광란(狂亂)의 시국에 오늘도 모두가 하느님께 眞率한 기도의 노래를 부르자. “하느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만세!”, “大韓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날마다 휴가 가는 방법

불볕 더위가 기승이다. 우리나라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더웠다는 1994년 여름 폭염을 갱신할지 모른다고 한다. 더위를 피해 바다로 산으로 해외로 떠난다. 익숙한 집을 떠나 낯선 곳을 찾아가니 여행이고, 번잡한 일상에서 탈피해서 몸과 마음을 쉬니 ‘휴식’이며, 더위를 피해 떠나는 것이니 피서(避暑)다. 명칭이 무엇이든 즐거운 시간이다. 휴식을 갈망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힘들고 괴롭기 때문이다. 그런데 괴로운 원인을 두고 잠시 잊거나 피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 온갖 짜증이 밀려오고 화가 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야단치는 직장 상사, 깐죽거리는 동료,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 집이라고 해서 편하지 않다.늘 돈이 부족하다며 짜증내는 아내, 같이 돈 버는데 집안 일은 손도 되지 않는 남편. 불만은 끝이 없다. 휴식은 괴롭고 힘든 일상에서 탈피이지만 잠시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끝없이 꿈꾼다. 로또가 당첨되거나 얼굴도 모르는 먼 친척이 남긴 유산이 굴러들어와 벼락부자가 되어 호기롭게 떠나는 날을… 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설령 온다 해도 또 다른 괴로움이 기다린다. 절대 변하지 않을 현실을 늘 불평하고 괴로워하며 살 것인가? 현실을 받아들이되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은 정녕 없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있다” 그것도 아주 쉽다. 매일 평안하고 휴가 같은 날을 보내는 길이 있다. 중국의 무문 선사가 그 길을 시(詩)로 읊었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달이 뜨고 (春有百花秋有月)/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 불고 겨울에는 눈 내리네.(夏有凉風冬有雪)/ 쓸데없는 생각만 마음에 두지 않으면(若無閑事掛心頭)/이것이 바로 좋은 시절이라네(便是人間好時節)” 봄에는 꽃피고 새 울며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 절대 변하지 않는 법칙이다.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 부대끼며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며 죽을 듯이 좋아하다가 죽일 듯이 싸우는 등 희노애락 속에 살다 간다. 어느 인간도 이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인간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위에 몸을 실었다. 다음 항구 까지가 나에게 주어진 인생이다. 배에서 뛰어 내릴 수 없다면 그 속에서 잘사는 법을 익히는 수 밖에 없다. 무문선사가 말한 것처럼 ‘쓸 데 없는 생각만 마음에 두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좋은 시절’ 즉 ‘날마다 좋은 날’이다.‘쓸 데 없는 생각’이 무엇인가? 계율을 잘 지키는 어느 율사가 ‘대주선사’를 찾아와 “선사님도 도를 닦을 때 공력을 드리십니까?” 하고 묻자 대주선사는 그렇다며 나는 “배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잠 잔다”고 했다. 율사가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재차 묻자 대주선사가 이렇게 일갈했다. “그들은 밥 먹을 때 밥만 먹지 않고 온갖 삿된 것을 따지며 잠 잘 때도 잠만 자지 않고 꿈속에서 온갖 삿된 생각을 일으킨다.” 일할 때 오직 일만 생각하고 즐겁게 임하면 그것이 즐거움이다. 밥 먹을 때는 밥 열심히 먹고, 일할 때 딴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그 것이 잘사는 방법이다. 따로 별 다른 방법이 없다. 다른 좋은 특효약이 있는 줄 알고 찾는데 헛 수고다. 자신이 살아가는 괴롭다는 그 일상에 즐거움과 희망이 있지 달리 없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오직 있는 것은 현재다. 지금 이 순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즐겁게 임하면 날마다 좋은 날이요, 날마다 좋은 날이니 어디를 떠나 쉴 것도, 피할 것도 없다. 이 쉬운 이치를 어린 아이들은 저절로 한다. 나이가 들어가며 생각이 많아지는 어른들이 가장 못한다. 그래도 날마다 휴식 같은 날을 보낼 좋은 방법 하나 알고 싶다면 특별히 일러준다. ‘먹고 마시는 일에 절제하라.’ 인류의 보배 법구경에 적힌 말이다.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삶과 종교] 미국 독립기념일과 국가

지난 2주간 나의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북 버지니아를 다녀왔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숲 보존을 위해 예산을 많이 사용하는 훼어팩스 카운티의 숲 속을 운전하며 다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것 같아서 좋았다. 미국은 애초 세계 각지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건설한 나라다. 천재 스노보더 클로이 킴, 고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 대사 모두 이민자 가정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1620년 첫 이민자들이 도착한 이래 18세기 초에는 동부에 영국령 13주가 성립되었다. 그 후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이 계기가 되어 미국의 독립혁명 투쟁이 시작됐다. 1783년 파리조약에서 미국의 독립이 승인되는데 미국은 이미 1776년 7월4일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여 7월8일 필라델피아에서 최초로 공표했다. 지금 미국은 국가로 ‘별이 빛나는 깃발(The Star-Spangled Banner)’를 부르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법률가요 시인인 프랜시스 스콧키가 작사하고 ‘천국의 아나크레온에게(To Anacreon of Heaven)’라는 노래의 곡을 사용했다. 영국과 미국이 전쟁을 하던 1814년에 9월13일 영국 함대는 볼티모어 항구에 있는 맥헨리 요새에 밤새도록 포격을 퍼부었다. 당시 34세의 변호사 프랜시스 스콧키는 협상을 위해 영국 함정에 올랐다가 일시적으로 구금되었는데 달도 등불도 필요 없이 영국군이 퍼붓는 포격으로 요새가 낮과 같이 밝았다. 새벽이 되어 스콧키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맥헨리 요새를 바라보았는데 뜻밖에도 그곳에 성조기가 아직도 펄럭이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한 편의 시를 쓰는데 그것이 바로 미국의 국가가 됐다. “오, 나는 외치리라. 이른 새벽의 빛이 전하는 이 감격의 광경을… 우리의 긍지를 보라! 밤새 쏟아진 포탄의 섬광 속에서 펄럭였다. 줄무늬와 반짝이는 별들의 휘날림은 처참한 전투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이제 나는 외치노라! 반짝이는 별을 품고 휘날리는 이 깃발은 자유의 땅이며 용맹의 고향 위에서 여전히 물결치고 있다고…” 이번 8월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되는 아시안게임에 남한과 북한은 동시입장과 일부 종목은 단일팀을 만든다고 한다. 입장식에서 깃발은 푸른색 한반도기를, 그리고 국가는 아리랑을 연주한다고 들었다. 당장은 아리랑을 연주한다고 하지만 언제일지 모를 통일 한국을 위한 바라만 봐도 가슴 뜨겁게 하는 깃발을 세우며, 온누리에 흩어져 있는 코리아 디아스포라들과 한민족이 함께 목청 높여 부를 노래를 지어주는 시인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주님께서, 뭇 나라가 볼 수 있도록 깃발을 세우시고, 쫓겨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깃발을 보고 찾아오게 하시며, 흩어진 유다 사람들이 땅의 사방에서 그 깃발을 찾아오도록 하실 것이다. 이사야서 11장 12절 이세봉 목사·한국소년보호협회 사무총장

[삶과 종교] 쉼

어스름 저녁노을이 내려앉던 어느 봄날 퇴근길에 “저녁은 하루를 수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FM 음악방송 진행자의 오프닝 멘트가 들려왔다. 오전 오후의 강의로 피곤한데다 밀려드는 퇴근 차량으로 짜증나던 도로를 막 빠져나올 찰나에 도심의 노을에 어울린 이 멘트가 얼마나 감동이었던지 이후로도 혹시 그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지 기대하며 귀 기울이게 하는 매력이 되었다. ‘쉼’이란 휴식(休息)이다. 숨 고르는 시간이고, 재충전의 기회다. 그래서 모든 일에는 쉼이 필요하다. 세상에 쉼이 필요하지 않은 일은 없다. 심지어 노래 부르는 사람도 더 나은 음악의 효과를 위해 악보에 표시된 쉼표를 잘 활용해 짧은 숨을 쉬어야 할 정도다. 그래서 쉼은 삶을 보다 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하는 필수 요건이라 하겠다. 성경은 창조주 신이 엿새 동안 세상을 만들고 이레째 되는 날 안식(安息)하셨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 날은 신의 날이기 때문에 사람들도 반드시 쉬라고 하셨다. 일주일의 묘미가 바로 신이 특별히 정하신 그 날의 쉼에 있다. 그래서 쉼은 신처럼 열심히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고 특권이다. 또한 성경은 일주일만의 쉼뿐만 아니라 칠년의 안식년과 그 칠년이 일곱 번 반복된 후의 해를 희년(禧年)이라고 정해 놓았다. 사람만 쉴 것이 아니라 사람(아담)의 근원인 땅(아다마)도 쉬게 하고, 사람에 의해 구속되었던 모든 것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쉼은 경사(慶事)이며. 수고하지 않은 자는 결코 누릴 수 없는 희열(喜悅)의 기쁨이며 신의 선물이다. 예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복음 11:29-30) 하셨다.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고 수고한 사람에게 쉽고 가벼운 쉼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전문직 목수였던 예수가 보장하시는 평안의 선물이다. 게으름으로 허송세월하는 자는 누릴 수 없고 미련하게 일만 하는 사람은 결코 맛볼 수 없는 선물이다. 그러니 “노동은 매일을 풍부하게 하며, 쉼은 피곤한 날을 더욱 값있게 할 뿐만 아니라 노동 뒤의 쉼은 높은 환희 속에 감사를 불러일으킨다”고 했던 프랑스 시인 샤를 보를레르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쉼이 없는 인생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다고 했다. 쉼을 모르는 위험한 인생에 대한 경고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하고 적절히 쉬는 것은 위험 인자(因子)를 최소화하고 신이 보장한 더 나은 축복의 미래를 누릴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7, 8월 휴가철이 시작되었다. 여느 해보다 일찍 시작된 무더위로 삶의 현장에서 지쳐 있을 모든 분들에게 FM 음악 진행자의 오프닝 멘트처럼 “휴가는 일 년 동안 수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라는 소리가 메아리 되어 전해졌으면 좋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나를 찾아서

관음전 맞은편으로 펼쳐진 산등성이 짙은 녹음에서 평화와 안락의 기운이 느껴진다. 불볕더위에 잎새들이 더 새파랗게 보이는 색채의 대비가 선명한 것처럼 바야흐로 한반도가 평화의 계절을 맞고 있는 분위기다. 순간, 한 마디 말실수로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역사적 사건이 연상된다고 하면 너무 나간 걸까. 산사도 계절이 바뀌느라 스산하다. 계절의 바뀜을 이 곳에서는 곤충이나 새들의 지저귐으로 알 수 있고, 도심의 빌딩숲 속에서는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식별할 수가 있다. 회색빛 고층 빌딩 사이 대로변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획일화된 건물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30층, 40층짜리 건물은 흔하게 볼 수 있다. 대도시에는 100층을 훌쩍 넘는 초고층 빌딩도 그리 어색하지 않게 자리하고 있다. 환경만 그런 게 아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현대인들은 업무에 대해 피로해 하며 정서적인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적인 여유마저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 공공장소 어느 곳을 가든 시끄러운 음악 소리나 자동차 소리, 밤새 눈부신 빛 조명에 미세먼지까지 더해져 생활 속 공해의 심각성은 이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최근 들어 사찰 경내에서도 무엇에 쫓기듯 안절부절 불안해하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가 있다. 그들은 내면의 고요함을 찾아 산에 올랐으면서도 혼잡스러움과 소음에 노출되어 자연 그대로의 고요를 감내하지 못하고 연신 스마트폰을 통해 눈과 귀를 현혹시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우리 청소년들은 틀에 박힌 교육에서 탈피하여 스스로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공부를 잘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삶의 목표라고 가르치는 교육, 어떤 틀을 만들어 놓고 무한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획일화된 인간으로 만드는 교육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육이 해야 할 일은 우리 모든 사람들은 개성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게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을 바보로 만드는 교육은 멈춰야 한다. 몇 주 뒤면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맞이하고 직장인들은 휴가를 떠나게 될 것이다. 방학이나 휴가를 그저 휴식을 취하는 시기나 환경의 변화로만 받아들여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규제 속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의 생활을 돌아보고,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한 이정표가 되어야만 한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어느 곳으로 가고 있는가,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로 변해가고 있는데 변하지 않는 주제는 과연 무엇인가 등 이런 물음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고, ‘나’를 찾아나서는 방학을 맞았으면 한다. 몇 해 전 유난히 무덥던 여름 방학 무렵, 20대 젊은이를 설악산 봉정암 가는 길에서 만났다. 그들은 이직을 앞두고 인생 경로를 새롭게 다지기 위해 봉정암으로 간다고 했다. 젊은 친구들이 구상하는 미래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나 인생의 중대기로에 서서 산을 오르는 것 하나만으로도 밝은 인생이 열릴 것이라고 덕담을 건넸다. 여름휴가가 끝날 무렵 우리는 또,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실개천을 따라 들어선 허름한 집들의 작고 조용한 마을 풍경은 마음의 여유와 편안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다시 이러한 자연에 안겨서도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세대가 안타까워진다. 나를 찾아 흔들림 없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때 도심의 소음이나 일상의 스트레스에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중심을 지킬 수 있어야 ‘참 나’를 찾는 우리가 될 수 있다. 모든 생명체에 대한 진정한 사랑, 이것이 ‘참 나’를 찾는 길이다. 그래서 사홍서원(四弘誓願, 보살행의 목표)의 첫 번째가 바로 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중생이 끝없지만 기어이 건지오리다. 번뇌가 다함없지만 기어이 끊으오리다. 법문이 한량없지만 기어이 배우오리다. 불도가 위없지만 기어이 이루오리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삶과 종교] 현미경

나의 판단은 현미경인가 망원경인가. 우리는 13일 지자체장과 국회의원 몇을 뽑는 선거를 치렀다. 온 국민이 뭔가를 판단하고 결정해야 했다. 올바른 눈을 가져야 바른 판단을 하고 바른 세계관을 갖게 된다. 성서에는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마태복음 6장 22~23절에 판단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사람의 평균 시력은 1.5 정도다. 이 시력으로 아주 작은 것이나 아주 큰 것을 볼 수 없다. 이것은 창조주의 피조물에 대한 세밀한 배려의 결과다. 우리는 육안으로 안 보이면 명왕성 너머에 뭔가가 있는지 모른다가 아니고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만일 사람의 눈이 현미경이라면 세균공포증으로, 망원경이라면 바로 앞을 보지 못해서 항상 넘어질 것이다. 광학혁명 덕분에 망원경과 현미경이 발명되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태양계 바깥까지 볼 수 있게 되었고 세포와 바이러스, 백신 영구까지 앞당기게 되었다. 인류는 렌즈를 이용해 우주를 보았고 분자를 보았고 우주의 극대점과 인체의 극소점을 모두 확인했다. 현미경은 네덜란드의 안경사 얀센이 1590년 어느 날 렌즈 두 개가 겹쳐진 상태에서 밑에 있던 글자가 커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두 개의 볼록렌즈로 만든 최초의 현미경은 사물을 10배까지 확대해 보였고, 물 한 방울 속에도 무수한 미생물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망원경도 네덜란드의 안경사가 현미경보다 18년 뒤에 발명했고 2년 뒤 갈릴레이가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조합한 망원경으로 달과 목성을 관찰했다. 1990년에 지구 밖에서 별을 관측하는 허블망원경이 우주로 떠났고 2009년 태양계 외부의 생명체를 찾기 위해 케플러, 테스, 제임스 웹 망원경이 장도에 오른다. 볼록렌즈만을 활용한 케플러식 망원경과 렌즈 대신 거울을 사용한 뉴턴식 반사망원경이 잇달아 등장했다.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인 렌즈를 생각하며 ‘곤충의 눈’으로 발밑을 보고 ‘새의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라는 말이 생각난다. 세상을 현미경으로 보면 다 힘들게 사는 것 같고 망원경으로 보면 다 잘 사는 것 같아 보인다. 존 맥스웰은 “남을 판단할 때는 그의 ‘행동’을 기준으로 삼으며, 그 기준이 가혹하기 이를 데 없다. 반면에 자신을 판단할 때는 ‘의도’를 기준으로 삼는다. 우리가 잘못을 범하더라도 우리 의도가 훌륭했다면 쉽게 용서한다. 따라서 우리는 변화를 요구받을 때까지 실수와 용서를 반복한다”고 말했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7장 4~5절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는 말씀이 있다. 자신에 대하여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타인에게는 관용의 잣대를 적용하는 사람이 진정한 인격자다. 이세봉 목사·한국소년보호협회 사무총장

[삶과 종교] 미안하고 죄송해서

6월의 첫 주간을 살면서 나라를 생각하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또 6월의 마지막 한 주간을 살아갈 때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 더 죄송스런 마음 떨쳐버릴 수가 없을 것도 같다. 왜냐하면 이 나라가 수많은 분의 피와 희생과 헌신의 터 위에 세워졌는데 그분들의 피와 희생과 헌신이 무색할 정도의 정치적 횡포를 자행하는 무뢰한들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분노한 국민에게 한 대 맞았다고 깁스하며 떼 지어 농성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 있어서 호출하면 누구라 할 것 없이 휠체어를 탄 중환자가 되어 엄살 부리는 것이 일상이다. 그러면서도 이때만 되면 호국의 영령들을 볼모로 마치 자신들만이 이 나라의 수호자가 된 것처럼 으스대는 꼴을 볼라 치면 주권을 가진 국민 노릇 못한 게 미안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다. 한마디로 단국의 개국 이래 최고의 호황을 누린다는 이 나라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이 무색하다고 할 뿐이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해야 할 민주주의 정치의 근본이 사라지고 당파와 계파의 이익에 몰두하는 것이 마치 유교 조선의 망조를 보는 듯하다. ‘백성’(民)을 위해 세워졌다던 그 조선이 사대부(士大夫)만 위하고,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몰두하면서 인의예지염치(仁義禮智廉恥)의 근간을 잃어버렸을 때 나라를 통째로 늑탈당하는 국치를 당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국민의 분노를 애써 기만할 뿐만 아니라, 당리당략을 위해서 억지 부리고, 겨레의 소원인 통일 모색마저 부정하려는 졸렬함을 목격하면서 어짊과 의로움과 예의와 슬기로움과 청렴함에 더하여 부끄러움마저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금방이라도 닥쳐올 망조를 보는 것 같아 호국영령들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요즘 유행어로 ‘뭐가 중한지!’도 모르고 까불어대는 게 물가에 노는 어린 아이를 보는 것 같아 앞선 선각의 선열들 보기에 민망하기 그지없다. 구약성서 잠언에 보면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잠언 6:16-19)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데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잠언 6:27-28)라고도 하였다. 한마디로 부끄럼 당할 나쁜 짓 하지 말라는 말이다. 신(神)이 극도로 미워하고 싫어할 정도의 교만, 거짓, 음해, 모략, 음모는 사람도 반발하고 거부하고 싫어하는 것이 분명할진대, 그것을 살피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안하무인(眼下無人), 인면수심(人面獸心), 자고(自顧)하며 까불대기만 하니 불을 품은 옷이 타 버리고, 숯불을 밟은 발이 데어 버리듯 자중지란(自中之亂)하다가 부끄럼 당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염치가 없다. 기꺼이 목숨 버려 이 나라를 지켰던 분들의 희생과 헌신 앞에 미안하고 죄송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다. 이 부끄러움을 어떻게 해소할 수는 없을까? 지방선거가 코앞에 다가왔다. 바른 표심으로 정의도 수호하고 양심을 회복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씻어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국제외교와 남북관계도 正道 위에서

세계 도처의 지진과 화산 폭발로 인류는 불안과 공포를 잊을 날이 없다. 북한핵은 차원 다른 위험을 전 인류에게 확대시키고 있다. 남북 당국자 대화나 회담이 통일의 희망도 키우지만, 일부 국민들 마음을 들뜨게도 하며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72년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종종 파도처럼 분단벽이 내는 파열음이다. 북한핵은 인류자멸의 핵대전으로 확대될 수도 없지 않으나, 남북통일이나 체제유지에 백해무익한 핵보유 주장은 오히려 더 큰 핵의 결집을 강요하는 전쟁의 위험만 부를 뿐이니, 구 소련 공산당 정권이 핵무기가 없어서 무너지지 않았고, 구 동서독에 핵무기가 있어서 통일이 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북핵문제 앞에서는 南北이나 與野나, 中日이나 美蘇 역시 어떤 논리로라도 다른 소리를 낼 수가 없으니 세계 인류의 공동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진보니 자주니 종북이니 보수니 하는 이름으로 찢어진 깃발들을 올리고 내리며, 특히 義理에 얽혀서 道理를 망각하고 國民 道義를 사장(死藏)시키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정계도 걸핏하면 창당이니 탈당이니 하는 분파로 국민을 실망시킨다. 진보든 보수든 中道든 그 과정에서 義理도 지켜야 하지만, 道理에 어긋나지는 말아야 한다. 공산주의 사상과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美中의 영향으로 격돌하는 현장, 한반도가 保守와 進步와 中道 같은 말로 위장되고 포장된 큰 마당처럼 망나니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정치계나 사법계, 특히 언론계나 종교계도 아니, 노동계와 기업계도 正道를 지키며 정도를 걸어야 국가사회가 바르게 되고 국제관계가 정당하게 된다. “일찍이 대국 진나라 사람들은 늘 명분이나 논리로, 난세정화를 외쳤으나 덕조, 그대는 늘 상하 좌우 선후와 두루 상의하며 正道를 걸었는데도, 어찌 이렇듯 일찍 이승을 떠난단 말인가? 소리 없이 통곡하는 백성들과 上께서도 함께하시니, 하늘과 땅도 한쌍이 되어 속으로 눈물지며 한없이 울고 있네!” -박제가의 이벽 만사- 진보가 正道를 버리면 모험과 위험에 빠지고, 보수가 正道를 어기면 퇴보와 부패로 망국을 부른다. 양심과 상식이 알려주는 만인의 正道는 國民 良識이다. 애국심과 신앙심과 함께 국가와 민족과 가정의 생존바탕이 되는 힘이다. 국력이란 무력이나 경제력에 앞서, 正道를 걷는 국민들의 역량과 의식수준이 전제된 저력이다. 그 수위가 장개석 군대나 월남 공무원들 세계처럼 바닥까지 내려가면 나라도 망할 수밖에 없다. 흔히 中道는 타협과 거래의 산물로서 책임을 모면하려는 자들의 술수이며 지도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결코 아니다. 中道를 버리고, 正道의 외롭고 괴로운 길을 걷다가 생을 마친 우리 聖賢 義人들 중에 일찍이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의 말년의 詩文을 보자. 1827년 늦봄, 65세의 노구를 이끌고, 어려서 형들과 10여 년 간이나 종종 찾아가 天學과 서양학문을 듣던 母校, 天眞菴을 최후로 방문하여, 자신이 걸어온 고달픈 일생을 회고하며 남긴 서글픈 추억의 시에서 “그때나 이때나 한평생 나는 항상 괴로운 바다에 외롭게 떠있는 조각 배 한척의 신세로다(猶然苦海一孤舟 - 정약용의 遊天眞菴記)”하고 있다. 힘들어도 다같이 正道를 걸어야 한다. 특히 自由가 없는 사회와의 통일을 외치며, 正義가 죽은 세상과의 평화를 선전하는 소리는 正道로 들리지 않는다. 自由가 숨쉬지 않는 사회와의 통일은 민족의 집단 감금(監禁)이고, 正義가 살지 못하는 세상의 평화로 간다는 길은 국민들의 단체연금(軟禁)을 위한 自由不在 사회주의자들의 新作路일 따름이다.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지혜와 자비에 관하여

올해 부처님오신날 봉축 표어가 ‘지혜와 자비로 세상을 아름답게’ 였다. 불교가 추구하는 가르침을 한 구절로 요약하면 지혜와 자비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는 불교 가르침의 핵심인 연기(緣起)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연기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없어지므로 저것이 없어진다’는 말로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보통 쓰는 쉬운 말로 하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로 설명 가능하다. 팥을 생산하려면 팥이라는 씨앗을 뿌려야 한다. 콩을 심어서는 팥이 나지 않는다. 씨앗을 심고 가만두면 자라지 않는다.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으려면 흙과 물 공기 바람 햇볕 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거름을 주고 잘 가꿔야 한다. 그래서 팥 씨앗을 심어서 열심히 가꾸면 팥이 난다는 것이 연기다. 이처럼 세상은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기고 그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는 이치를 배워 아는 것이 지혜다. 사람의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다거나 사람이 아닌 절대적인 힘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등은 불교의 지혜와 거리가 멀다. 그런데 이 지혜는 불교 책 몇 권 읽고 경전을 연마한다고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참선해서 ‘깨우쳐’ 아는 것도 아니다. 수행을 해야 한다. 수행은 지혜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마음의 다짐을 굳게 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 실천이 자비다. 발고여락(拔苦與樂), 번뇌에서 벗어나 행복을 누리는 것을 자비라고 한다. 자비를 행하려면 우선 마음속으로 몇 가지 원칙을 세워야 한다. 이를 사무량심(四無量心), 네 가지 한랑 없는 마음이라고 하는데, 배려하는 마음인 자(慈), 고통과 아픔을 덜어주려는 비(悲), 다른 사람에게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는 희(喜),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여기는 사(捨)가 그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 마음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을 사섭법(四攝法)이라고 한다. 돈 음식 같은 물질이나 좋은 가르침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보시, 상대방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 애어(愛語), 상대를 이롭게 하는 이행(利行), 사람들과 함께 행복을 누리려는 동사(同事)를 말한다. 그런데 자비는 쉽게 마음에서 생기지도 실천에 옮기지도 못한다. 하나하나 살펴보더라도 실천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내 자식은 좋은 대학을 못 가서 속이 상한데 제 자식 좋은 대학 보낸 친구의 기쁨을 내 일처럼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비를 행하라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라고 함부로 권할 수 없다. 그런데 자비를 행하면 다름 아닌 내가 행복해진다. 남의 자식 잘된 꼴을 시샘하고 그렇지 못한 내 자식 원망한들 내 마음만 무겁고 불편할 뿐이다. 상황은 바뀌지 않는데 나 혼자 화나고 짜증 내봐야 내 몸과 마음만 상할 뿐이다. 그럴 바에야 나도 ‘쿨 하게’ 박수치고 좋아하는 것이 내 정신 건강과 몸에도 좋다. 그래서 자비는 상대방이 아니라 나를 위한, 나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는 가장 좋은 보약인 셈이다. 그렇다 해도 쉽게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복지관 등에 가서 봉사하거나, 구호단체 등에 월정액을 기부하거나, 장기기증을 실천하는 등 자꾸 몸을 움직여 실천해야 한다. 이러한 행동이 쌓이다 보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지혜와 자비, 불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금과옥조로 여기고 실천해야 할 삶의 목표다.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삶과 종교] 아이들에게 최고의 꿈을 꾸게 하자

어떤 소녀가 부모와 함께 미국 전역을 여행하던 중 백악관을 구경하게 됐다. 그 소녀는 건물 외관을 찬찬히 응시하다 이렇게 말했다. “아빠 제가 백악관을 밖에서 구경해야 하는 건 피부색 때문이에요. 두고 보세요, 저는 반드시 저 안에 들어갈 거예요” 25년 후 그녀는 부시 전 대통령의 외교정책 자문관으로 당당히 백악관에 입성한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2002년 그녀는 아들 부시 대통령의 최고위 참모인 국가안보 보좌관으로 백악관에 재입성한 후 2004년 마침내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의 국무장관이 되어 세계무대에서 미국을 대표로 많은 활약을 했다. 그의 이름은 ‘철의 목련(Steel Magnolia)’ 콘돌리자 라이스다. 어린 시절 라이스의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그러나 덴버대학 2학년 여름, 그녀는 아스펜 음악제에 갔다가 그녀의 오랜 꿈을 접게 되는 사건이 생기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11세 소녀가 그동안 라이스가 배운 모든 곡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그 아이를 보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카네기 홀에 가보지도 못하고 피아노 바에서 인생을 마칠 수도 있겠구나” 그 후 라이스의 방황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느 날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의 아버지인 코펠 교수의 국제정치학 강의를 듣던 중 마법에 걸린 듯 ‘러시아’에 빠져들게 된다. 졸업 후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스탠퍼드 대학에 자리 잡은 그녀는 스타 교수이자 최연소 부총장, 최고의 러시아 전문가로 발돋움한다. 자기 분야에서 늘 최고가 되기를 갈망했던 흑인 소녀는 백악관 입성과 함께 그 꿈을 이룬다. 인생은 꿈꾸는 자의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우리는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며, 어떤 꿈을 꾸게 하고 있는가를 묻고 싶다. 한국의 미래인 청소년들의 현주소는 유감스럽게도 OECD 국가 중 74점(2014년)으로 행복지수 최하위다. 16년에도 여전히 꼴찌이며, 학년이 올라갈수록 행복지수는 떨어지고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하루 공부시간은 7시간 50분으로 세계에서 제일 길고, 학업 스트레스를 받는 비율은 50.5%로 세계에서 제일 높다. ‘아이는 국가의 미래다’라는 말과는 달리 공부를 잘하라고 강요받은 다수의 아이들이 불행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탄력회복성의 저자는 “성적만을 강조하는 학부모와 학교가 아이들을 망가뜨리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집단적인 불행감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약하고 불행해 하며 병적인 수준의 불행감을 느끼며 집단적 우울증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시 위주의 학교교육과 조바심치는 학부모들의 맹신적 사교육 강요에 대해 어느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은 “학교라는 교도소에서 교실이라는 감옥에 갇혀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실내화라는 죄수 신발을 신고 공부란 벌을 받고 졸업이라는 석방을 기다린다” 필자는 이 글을 옮기며 눈물이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학부모 여러분! 각양각색의 재능과 창의력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우리 아이들이 생기발랄하게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를 노래하며, 바닥에 떨어지면 산산조각나는 유리공이 아니라 찰고무공 같은 회복 탄력성을 갖은 사람들이 되어 행복한 청소년기를 보내는 날이 오게 해달라. 멋진 경치를 보여주고 훌륭한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오케스트라 공연장에도 데려가고 어느 날 부모님들이 제공한 한 번의 잊을 수 없는 경험이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고 그 꿈을 이루어 놀라운 인물들이 되게 하는 일이 여러분 손에 달렸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잠언 22장 6절 이세봉 목사·한국소년보호협회 사무총장

[삶과 종교] 갈등

‘갈등’(葛藤)이라는 한자는 칡과 등나무가 얽혀 있는 형상으로 집단과 집단 사이의 지나친 대립이나 적대심 또는 불화를 가리키는 단어다. 태생적으로 반대방향으로 감아 올라가는 등나무와 칡의 넝쿨이 한 나무를 타다 보면 결국에는 서로 엉켜 푸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의미다. 마르크스(Karl Max)와 베버(Max Wener), 그리고 짐멜(Georg Simmel)은 사회의 구조를 갈등에 기초하여 설명하였다. 인간의 역사를 계급 간의 갈등의 역사로 본 마르크스는 모든 사회변화가 소유집단과 비소유집단 간의 갈등과 투쟁의 결과라고 보았고, 권력분배의 불평등에 기인하는 권력 갈등을 설명한 베버의 이론에 기초한 다렌도르프(Ralf Dahrendorf)는 권위의 차별적 분배로 인한 갈등이론(Conflict Theory)을 성립하였다. 그리고 심리적 전제 위에서 갈등의 사회적 기능을 설명한 짐멜은 교육이 사회계층, 계급 간 이동을 활성화시키기보다 기존의 불평등한 계층 및 계급 구조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여 갈등을 유발한다고 보았다. 6월 선거를 앞둔 우리 사회가 갈등의 골을 깊게 파고 있다. 새삼스런 일들은 아니지만 전략적 이유로 ‘건수’를 잡아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물론 변할 수밖에 없는 사회 현상에 대한 적응의 과정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이 심히 불편할 뿐이다. 거기다 잊을 만하면 불쑥불쑥 드러내는 대기업의 ‘귀족’(?) 갑질로 인한 갈등은 마치 국민과의 대결 국면을 형성할 정도다. 마르크스의 소유집단과 비소유집단의 갈등과 투쟁도 옳고, 막스의 권력 갈등도 옳고, 짐멜이 주장하는 불평등한 교육으로 인해 재편성되고 재생산된 갈등도 옳다고 한다면 이러한 불미스런 사회 현상은 배운 내용을 건전하게 적용하거나 응용하지도 못하는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라 하겠다. 예수는 사회의 갈등을 유발하고 조장하는 유대의 지도층을 향해 ‘독사의 새끼!’라고 욕하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질책했다. 그 행위가 자기를 낳아준 어미를 잡아먹는 패륜이고, 겉만 번지르르한 썩어빠진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행위들에 대하여 ‘회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고,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영위할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고 했다. 사람은 갈등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권이 있다. 즉 사람으로서 정당하게 누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갈등을 조장하는 도구로서 사람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서 사람을 무시하고 이용하기보다 존중하는 마음이 기본적으로 필요하겠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이 살만한 정당한 사회가 될 것이다. 5월이다. 갑질 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근로자의 날을 시작으로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들이 한꺼번에 몰려 있는 달이다. 다른 달 다른 날들도 많은데 왜 이렇게 몰아두었을까? 5월이 신록의 계절이고 희망의 계절이어서가 아닐까? 그리고 이 희망의 계절에 사람으로서 그 권리를 인정받고 희망을 보장해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갈등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받을 대상으로서 존중하고 존중받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정말 이 마음이라면, 이 믿음대로 서로를 배려한다면 골 깊은 우리 사회의 무분별한 갈등이 조금은 해소되지 않을까? 60년 이상 묵은 남북의 갈등도 풀어내려는 시점에 어려운 게 뭐가 있을까?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자유와 정의가 없는 평화나 통일만은?

기름과 물은 같은 한 그릇에 쏟아도 하나로 융합되지 않는다. 남북통일의 근본적인 장애물은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하며 적대시하는 유물론 공산주의 사상이다. 우리는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국가나 조직체들과의 허구 많은 정치적 대화나 국제적 평화회담의 가치와 의미와 교훈을 되돌아볼 때, 대부분이 약속 불이행으로 무효화 결과를 지난 1세기 동안 비일비재하게 보아왔다. 남북 지도자들의 이번 판문점 회담 선언으로 많은 국민들의 마음이 들떠 있는 지금 온 국민은 냉엄하고 진솔하게 오늘의 우리 인류가 나아가는 길을 이탈하지 말아야 하겠다. 만일 북한이 남한처럼 자유와 정의와 진실이 살아있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였다면, 지금 남한보다 훨씬 더 잘 살 것이며, 패전국 일본 수준을 넘는 경제발전을 쉽게 이룩하여, 대만이나 싱가포르와 어깨를 나란히 할 뿐 아니라, 1950년 10월에서야 정부수립을 선포한 오늘의 중국이 아직 약체를 면치 못하던 시절, 동명고강(東明故疆)의 동북 3성 회복, 관리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마치, 승전국에 들어있는 남한이 패전국 일본이 자위대 3만여 명의 비무장 호기에 대마도 회복 관리를 소홀히 한 것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만시지탄이 있으나, 지금의 몽골처럼, 자유부재 사회제도를 신속히 탈피하는 철저한 탈공산주의화(脫共産主義化) 정책 실천만이 시급한 경제발전은 물론, 북한 현대화의 연착륙이 가능할 것이다. 북한이 지금이라도 인민들의 경제활동 자유를 보장한다면, 2~3년 안에 국민소득과 국가 경제 지수가 200~300% 발전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을 것이며, 살벌한 사회 분위기도 사라지고, 훈훈한 인간 대동체(大洞)의 본 모습이 살아나, 남한과의 통일이나 세계와의 대화나 회담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서울 불바다니, 평양 잿더미니, 핵실험이니, 대륙 간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니, 북폭이니, 하는 무력 폭언의 홍수가 일시 겨우 멈춘 지금, 우리뿐 아니라 미국과 전 세계가 이번 판문점 회담 선언의 비핵화나 평화통일 거론을 불신하는 것은 당연하며, 의심을 못 버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니, 이 불신을 불식시켜야 하는 지금의 북한 지도자들의 고충과 노력에 우리는 이해와 동정의 협력까지 포기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1953년 3월 초, 소련 스탈린이 죽자, 소련의 16개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에는 민주화의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지만, 프라하에서는 포성과 화염 속에서, 겨우 너더댓 살밖에 안 되는 어린 아이들이, 부모님들의 손에 등이 떠밀려서, 울면서 서로서로 고사리 같은 어린 손들을 맞잡고 집을 나서고 있었다. 이 어린 아이들 앞가슴 옷자락에 붙인 헝겊 조각에 적힌 글들이 어렵게도 바깥세상, 로마에까지 전해지자, 자유 세계인들은 슬픔과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당시, 한국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갓 졸업한 14세 전후의 가난한 우리들에게까지도 알려지던 그 헝겊 조각 통신이 전하는 눈물겨운 소식은 다음과 같았다.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들을 만나거든, 우선 눈물을 닦아주시고, 너무 울지 않도록 울음을 그치게 달래주십시오! 허기진 배를 채우게 먹을 것을 주십시오! 제발, 부탁합니다! 이 아이들의 부모는 지금 우리 국민들의 자유와 정의와 진리를 위해서 소련 공산당원들과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총에 맞아 피 흘리며 죽어가는 부모들이 싸움터에서 알리는 유일한 최후의 부탁입니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바람은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소련의 무자비한 바르샤바 조약 공산군 20여만 명에 의하여, 피바다를 이루며 끝을 맺었으나, 1978년 10월 폴란드 공산권 출신의 보이티야(Karol Wojtyła) 추기경이, ‘로마 교황 요한바오로 2세’로 즉위하면서, 폴란드를 시작으로 무신론 공산주의 소련이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전 유럽이 민주화의 물결로 경제번영의 길에 매진하고 있다. 1970년대 초, 월남과 월맹의 동남아 10년 전쟁 말기에, 거듭 반복되던 대화와 회담에 모두가 지쳐 있을 때, ‘파리 평화 협정’ 발표는 전 세계를 환영과 기쁨으로 열광케 하였었으나, 美蘇英中佛, 5개 강대국의 입회보증도 아무 소용이 없이, 월남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나라가 되었다. 우리가 반드시 참고할 역사적 교훈을 주고 있다.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우리도 연등처럼

올해부터 정부는 ‘석가탄신일’을 ‘부처님 오신 날’로 변경하기로 의결하였는데, 부처님 오신 날은 불교의 연중행사 중 가장 큰 명절이라 봉축법요식, 제등행렬, 탑돌이 등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리지만, 하이라이트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 위와 땅 위에 오직 내가 가장 존귀하다(天上天下 唯我獨尊). 나는 일체 중생의 모든 고통을 없애 편안케 하리라”하여 중생들에게 광명을 준 날이라는 의미를 정성을 담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무엇보다 부처님께서는 무명(無明)에 사로잡혀 있는 중생들에게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진리의 등불을 밝혀 주시고, 그 진리의 등불을 밝혀주심으로써 중생 모두가 본래 청정하다는 것, 즉 누구나 부처님이라는 진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이 땅에 진리가 머물고 삶의 보람을 열어 보이기 위해서라고 우리 곁에 오심을 설하셨다. 더불어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행해지는 ‘연등회’는 1천200여 년 전, 신라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통축제로 이제는 불교계를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계문화축제로 자리매김하였다. 등 공양은 향 공양, 차 공양, 꽃 공양, 과일 공양, 쌀 공양 등과 더불어 여섯 가지(육법) 공양 중의 하나다. 즉, 등불은 지혜를 상징한다. 지혜가 있어야 우리의 삶도 바르게 보며 참되게 살게 된다는 이치다. 하여 등불을 밝히는 것은 반야지혜로 어두운 무명을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화경(燃火經) 등의 경전에는 등불 신앙에 대해 “일체 해탈을 구하는 사람은 항상 그 몸으로 등의 대(臺)를 삼고, 마음으로 심지를 삼고, 계와 향으로 기름을 삼으라. 깨달음의 등불은 능히 일체 무명의 어둠을 퇴치한다”하였고, 보살장경에는 “만 개의 등불을 켜서 뭇 죄업을 참회한다”고 하는 만등법회(萬燈法會)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견삭경에서도 “진언(眞言)을 외면서 등불을 켜 함께 공양하면 모든 장애가 제거된다”는 가르침이 있다. 무릇, 우리가 밝혀야 할 등은 지나간 삶 속에서 지었던 자기의 허물에 대한 참회의 등불, 생명의 길을 밝게 열어 주는 등불이어야 한다. 메마른 생명들이 자비와 광명 속에 포근히 젖을 수 있는 생명수가 되어야 하고, 나아가 가난한 마음과 인색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나누어 주는 보시의 등불이 되어야 하고, 명예와 권력에 눈먼 사람에게는 무상(無常)의 등불이 되어야 하며, 시기와 투쟁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자비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보다는 남을 위해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거리에, 전국의 사찰에서 연등을 밝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전하고, 아기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식을 봉축하며 이날을 기린다. 5월22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우리 사부대중은 모두 하나 된 마음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등불을 켰으면 한다.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삶과 종교] 봄이 오는 길목을 지나며

봄이 오는 길목을 지나며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내 마음에 조금씩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꽃을 피우고 싶어 온몸이 가려운 매화 가지에도 아침부터 우리 집 뜰 안을 서성이는 까치의 가벼운 발걸음과 긴 꼬리에도 봄이 움직이고 있구나. 유난히 추었던 긴 겨울도 지나가고 천지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위의 시는 이혜인님의 ‘봄이 오는 길목에서’의 일부이다. 봄이 되면 꽃이 피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했는데 식물이 봄이 오는 것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온도를 감지하는 능력인데 개화를 담당하는 유전자가 히스톤 단백질과 결합되어 겨울 동안에는 유전자와 엉겨 붙어서 개화 기능을 막고 있다가 기온이 어느 정도 올라가면 단백질이 풀어지면서 개화 유전자가 자기 기능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봄에 피는 꽃들은 기온이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가면서 동시에 낮의 길이도 길어져야 꽃을 피우는데, 이 말은 낮이 12시간 이하인 계절이 지나는 경험을 한 후 즉 일정한 시간 이상 ‘암흑’이 지속된 후에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꽃을 피우려면 오랜 기간 추위를 제대로 견뎌야 한다. 겨울에 방 안에 들여 놓은 화분은 봄이 되어도 꽃피울 생각을 하지 않으나 발코니에 방치해 놓은 화분이 봄에 꽃을 피우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로 춥고 어두운 겨울 같은 시간을 보낸 인생이 아름다운 꽃과 같은 모습으로 피어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 같은 이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봄에 일찍 피는 개나리, 진달래, 벚꽃들은 공통점이 있다. 꽃들이 자잘하다는 것이다. 함께 펴야 멀리서도 잘 보이고 크고 화려한 꽃들이 피기 전에 수정해야 하기 때문에 무리지어 핀다. 그래야 벌들이 찾아와 종의 보전을 도와준다. 어떤 인생은 장미요, 다알리아요 글라디올러스다. 그 하나하나로 가치가 있고 빛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는 무리지어 피는 개나리나 진달래 같은 삶도 있다. 평범하고 뛰어나 보이지 않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무리지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돋보이는 사람들이 박수를 받고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인생의 겨울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 봄에 자연에서 배우자. 꽃이 피는 것을 보면서 잊지 말자. 꽃이 피기 위해 긴 어둠의 시간이 필요하고 적절한 온도와 일정한 양의 햇빛이 필요한 것을 개화 유전자가 아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개화 호르몬이 있어 인생의 겨울이 지나고 개화의 환경이 되었을 때 찬란하게 꽃을 피우는 날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구약성경 전도서 3장 1절, 11절 이세봉 목사·한국소년보호협회 사무총장

[삶과 종교] 과유불급

미투운동으로 온 나라가 요란하다. 과거에는 무시되었던 여성 인권에 대한 눈뜸의 새로운 풍속도다. 눈뜨고 나면 ‘나도 그랬소!’, ‘나도 그랬다!’, ‘나도 그랬어!’의 연속이다. 그런데 두말할 필요 없는 긍정적인 사회변동의 신호임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것은 왜 그럴까? 괜히 강의나 설교하다가, 아니면 지금처럼 글을 쓰다가도 조심스러운 것은 마녀 사냥하듯이 내몰려 사회변동의 역행자, 사회정의 실현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매도되어 버릴까 걱정이 앞선다. 이에 더하여 좋은 의도로 시작된 이 사회운동이 극단 세력의 반대급부로 역풍 맞을 것 같아 염려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그의 동문이었던 사(師: 子張)와 상(商: 子夏) 둘 중에 누가 더 어진 사람인지를 스승에게 물었을 때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자 자공이 “그러면 사가 낫다는 말입니까?” 라고 되묻자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子貢問師與商也孰賢. 子曰, 師也過, 商也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라고 하였다 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아무리 어질고, 아무리 좋은 것이고, 아무리 현명한 일이라도 지나치면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다. 적당주의의 찬사가 아니라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적절히 행해야 그 행하는 것이 빛을 발할 수 있다는 말일게다. 꼭 미투운동만 그렇다는 게 아니다. 심사숙고 끝에 내려진 선의의 결정이나 중요한 정책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뇌(無腦)한 사람처럼 책임지지 못할 선동적 구호만 외쳐대다가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발뺌하는 것도 그렇다. 또한 밝혀진 명명백백한 사실에 대하여 조작, 모함 운운하며 신성한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에 사대적 성조기와 불문곡절 이스라엘 국기까지 볼모로 흔들어대는 것도 지나칠 정도다. ‘토라’라고 부르는 구약성서 처음의 다섯 책인 모세오경 안에는 613개 율법이 들어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켜야 할 법이다. 이 법은 248개의 계명과 365개의 금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왜 계명에 비해 금령이 더 많은 걸까? 원죄를 안고 태어난 사람의 부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그것도 1년 365일을 쉬지 않고 자신을 살피며 살아야 할 것같이 의도적으로 주어진 이 숫자는 주목하는 이로 하여금 지금의 삶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하는 것 같다. 여기에 더하여 예수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고 했고,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오히려 비판받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마태복음 7:1-3). 남을 비난하고 고발하기에 앞서 반드시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찔러대면 아픔이 더 커지고 아물 수 없는 상처만 남게 되지만, 배려하고 격려하는 돌봄은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낫게 할 뿐만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희망을 갖게 하는 마력이 있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적절히 행하는 것이 낫겠다. 비록 고발과 대결의 미세먼지로 뒤덮인 세상을 살고 있지만 마음이라도 쾌청했으면 좋겠다.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서로에게 찌르는 가시가 아니라 배려함으로 믿어주고, 격려함으로 힘이 되어주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비핵화와 평화통일 위한 세계적 성지, 포르투갈 파티마

최근 우리는 ‘남북 평화통일’이라는 말을 매우 자주 즐겨 쓰고 있다. 특히, 종교계에서는 통일을 위해서라도 전쟁만은 피해야 한다는 정신이 매우 지배적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더욱이 정치적으로, ‘평화’를 위해서는 武力과 재력이 우선 충분히 있어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침략군들을 막는 국가 안보나 강도로부터 개인의 생명을 보호하는 신변안전과 최근 우리가 흔히 쉽게 즐겨 쓰는 ‘平和’라는 말의 뜻은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아니한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다. 남북한이 자신들에게 없는 평화를 상대방에게 줄 수는 없다. 우선 양쪽 모두가 자기들끼리나 먼저 칼을 버리고, 오순도순 평화롭게 살고 있는 평화로운 동족 국가들이라야만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칼을 갈면서 평화를 외치던 소리들은 모두가 거짓이었음을 현대 인류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 사회에서 평화의 뿌리와 기초는 善이다. 그래서 善은 平和의 어머니며, 평화는 善의 딸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평화는 칼과 돈으로 탄생되지 않고, 善에서 태어나게 마련이다. 참된 平和는 善을 기초와 원천으로 삼아, 자유와 정의와 진실의 터전에서 태어나 사랑을 먹고 마시며 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평화는 한마디로, 터 없는 집이 세워질 수 없듯이, 또 어머니 없는 딸이 태어날 수 없듯이, 善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선한 사람과 함께 말하며 일하면서, 우리는 평화를 느끼고 배운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사람과 함께 살면 한 집안에서도 불화가 그칠 날이 없다. 사회 단체나 국가 간에도 善한 사람들이 없으면 논쟁과 전쟁이 그칠 날이 없다. 善하지 못한 사람들과 善이 없는 국가와 사회에는, 아무리 돈과 칼을 많이 주어도 그들과의 평화는 존재할 수가 없다. 군국주의 강대국 일본과, 부국강병을 이룬 히틀러의 독일에 평화가 있었는가? 종교인들은 설교와 기도 중에,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외치는 노력 그 이상으로, 남북 양쪽 사회와 국민 개개인들이 먼저 선한 사람들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다. 자신들이 아직은 善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상대방의 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업의 受容性조차 전무하다면, 어떻게 평화통일이 가능하랴? 수천만명 많은 젊은이들이 서로 죽이고 죽어 가던 세계 제2차 대전 말 1945년 끝까지 參戰하지 않고, 自國의 軍人 1名도 2차대전에 참가하지 않았던 유일한 나라는 포르투갈뿐이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오면서, 포르투갈은 중남미와 아프리카와 인도와 특히 마카오 점령에서 보듯이 극동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해양 군사 대국으로서 무수한 전쟁을 감행하며 위세를 떨치던 싸움꾼의 정복자 나라였다. 그러나 1917년 포르투갈의 빈민 지역 파티마(Fatima)에 살던 10세 미만의 시골 어린이들 3명에게 천상 그리스도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 6개월 동안 매월 한 차례씩 발현, 10월 중 마지막 발현 때는 전 세계에서 걸어서 모인 7만5천여 명의 풀밭 군중들에게 “인류가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또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이 회개하도록 열심히 기도하라”고 강조하셨다. 포르투갈의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일어난 이 초자연적 천상 인물의 발현은 로마 교황청과 전세계, 특히 유럽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포르투갈 국민들은 1차 세계 대전이 속히 끝나도록, 모두가 회개하여 善良한 국민들이 되도록, 또 세계평화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며, 포르투갈은 전쟁불가 국가로서뿐 아니라 끔찍한 강력범죄가 거의 없는 나라로도 유명하게 되었다. 현재 파티마는 매년 600여만 명의 순례자들이 찾아와 세계 평화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성지로, 가난하던 포르투갈에 매년 30억불 이상의 순수 관광수입원이 되고 있다.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더불어 같이 살라

봄은 우리 중생들에게 새로운 시작이요, 희망이다. 더욱이 인생에 있어 신록의 시기에 해당하는 우리 청소년들의 새 봄은 졸업과 입학의 관문을 맞이하게 되므로 한층 각별한 의미가 있다.졸업은 말 그대로 하나의 업(業)에 해당하는 시기를 마치고(卒), 또 다른 업을 향한 출발이라고 할 수 있고, 졸업은 성취해야 할 업을 마치고 새로운 업을 향하는 출발이며, 아울러 입학은 새로운 과업에 도전함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렇게 우리들이 졸업과 입학의 의미를 반복하여 되새기고 준비할 때, 학계와 언론에서는 분주하게 우리 인간들의 업을 정리 평가하고, 네트워크 사회를 향한 우리들의 업의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전망하는 지표들을 쏟아낸다. 그래서 향후 우리가 열어나가야 할 네트워크 사회는 ‘지구화’라는 명제를 던져준 바 있다. 그런 맥락에서 세상의 모든 존재가 둘이 아니며 서로 그물처럼 상대방과 얽혀서 서로 의존하고 존재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 삶의 가장 중추적인 방식이 될 것임을 시사한다. 부처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은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무명에 의해 비롯된다고 간곡히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의 행복은 모든 존재의 상호 의존성, 다시 말하면 연기법의 진리를 깨달아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더불어 잘 살도록 선업을 닦는 불교적인 삶의 실천 여하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서구에서는 새로운 지구화 시대를 준비하며, 지난날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강대국들이 이제 약소국들의 발전에 눈을 돌리고 있는데, 물론 이는 약소국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빈곤과 굶주림이 자국의 풍요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는 강대국만이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사실과, 약소국들의 희생 위에 그들이 풍요를 누려 왔으며, 약소국들의 발전이 없는 그들만의 풍요가 결코 오래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데 있다. 강대국들의 생산품을 소비하고, 재생산을 위한 재화를 공급하는 약소국들의 역할이 비로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연기법에 잘 설명되어 있다. 연기법은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며 존재하고, 서로 의존하여 발전하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지구화 시대를 이끌어 갈 방향이 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이미 전파하셨던 가르침이라는 사실은 감탄스러운 것인 동시에 놀라운 일이다. 연기법은 이제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평화를 구현하는 가르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우리나라를 동방의 빛이라고 찬탄했듯이, 새 봄에 졸업과 입학을 맞이하는 우리 청소년들이 연기법을 가슴에 새기고 몸소 실천하여 사회의 진정한 ‘동녘의 찬란한 빛’으로 거듭 성장해 나가길 기원해 본다.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삶과 종교]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보내며

2018년 부활주일은 4월1일입니다. 왜 부활주일은 해마다 바뀌는지 궁금한 분들이 계실 겁니다. 부활주일은 매해 춘분 후 첫 보름 발생 후의 주일로 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하기 전에 사순절(Lent)은 대속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그리스도가 겪으신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기 위한 것으로, 부활절 전 주일을 뺀 40일을 경건하게 지내는 기간을 말합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첫날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처음 결정됐습니다. 사순절 기간은 개인적으로 주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 은혜를 체험하는 축복된 시간입니다. 사순절의 마지막 한 주에 해당하는 고난주간(Holy Passion Week)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종려주일부터 부활주일 전 토요일까지를 말하는데 대속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으심을 기리는 사순절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서 대적들에게 잡혀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장사 되신 것을 묵상하는 주간입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절정기인 고난주간에 교회에서는 새벽기도와 금식이 시행되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사순절 기간에 경건의 유익을 위해 금식하며, 마태의 수난곡 같은 경건한 음악을 들으며 각자가 좋아하는 커피나 초콜릿을 먹지 않는다든지 오락을 자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순절 동안 특별히 금요일에 붉은색 육류 섭취를 피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서양에서는 이 기간에 생선과 감자튀김(Fish & Chips) 가게들이 호황을 누리기도 합니다. 이 기간 동안에 무엇을 안 먹거나 무엇을 안 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과 낮아지심과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이 되신 헌신을 기억하며 그 분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2018년 부활주일을 맞이하면서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통해 어떤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인지 올해도 기대가 됩니다. 제 막내아들이 어렸을 때 시키지도 않았는데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일 저녁에 TV 화면에 ‘NO TV, NO GAME’이라고 써 붙여놓고는 일주일 동안 보고싶은 만화영화와 닌텐도 게임을 하지 않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요즘 우리는 핸드폰과 인터넷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일 미디어가 공급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언젠가부터 고난주간이 되면 교회 청년들 사이에서 미디어 금식을 선포하는 친구들을 보게 됩니다. 눈 뜨면서 핸드폰 켜고 E-메일 체크하고 인터넷 신문 검색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에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 위해 단 며칠이라도 미디어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놀라운 은혜가 이번 사순절과 고난주간 중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태복음 28장 6절) 이세봉 목사·한국소년보호협회 사무총장

[삶과 종교] 소음(騷音)

3월이 시작되기 전 어느 날 아침에 요란한 드릴 소리에 잠을 깼다. 늘 자동차 소리, 오토바이의 굉음, 술 먹고 질러대는 주정들에 익숙한 터라 별스럽지 않은 소리였겠지만 습관적으로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러워!” 중얼거리다가 몇 달 전 교회 내부 공사한다고 민폐 끼친 것이 생각이 나 얼른 꼬리 내려 버렸다. 하필이면 그날이 새 학기 개강하기 전에 척추 디스크 시술하겠다고 예약한 터여서 MRI 검사를 하는데 그 소리는 또한 얼마나 요란했던지 아예 귀마개를 끼워 들이더라. 세상은 온갖 소리로 뒤덮여 있다. 들을만한 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듣기에 불편하고 심히 민망한 소리도 있다. 아름다워 감탄하는 소리가 있고, 괴상망측하여 괴로움을 주는 소리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람의 귀는 적당한 한계까지만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더 이상 허용했다간 감당하지 못해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창조의 신비이고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특별한 배려이며 은혜라고 하겠다. 그러니 세상에는 듣지 못할 소리는 없다. 듣기 좋은 소리만 듣고 살 수 없기에 불편해도 조금만 참으면 넘어갈 수 있고, 과거 행적을 돌이켜 보면 부끄러워서라도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 소리들이다. 아파트 문화로 인해 생겨난 층간소음이 심각하다.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목회를 하다 보니 가끔 불편을 하소연하는 교우들이 있다. 그런데 아랫집이 불편해서 호소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윗집에서 아랫집을 향해 항의하는 사례를 들을 때는 괜히 시비하기 위해 시비하는 것 같아 실소(失笑)하기도 하지만 참으라 하고, 그래도 억울함이 들면 교회에 나와서 마음껏 소리 질러보라고 권면한다. 우리 사회는 마치 아파트 생활과 같아서 층간소음 시비처럼 시비가 끊일 새가 없다. 자기는 아닌 것처럼 타인의 소리와 행동에 극도로 민감하다. 돌아보면 윗집에 살 때도 있었고 아랫집에 살 때도 있었는데 말이다. 자기들은 뒤꿈치도 들지 않고 쿵쿵거리면서, 심지어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까지도 요란하면서 자비라고는 조금도 베풀 수 없듯이 살벌하다. 예수는 종종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경고하였다. 2000년 전 유대 사회에서 기득권 세력이었던 바리새인(Pharises)들은 ‘분리주의자’라는 뜻에 어울리게 율법의 규칙을 내세우면서 세속과 차별하며 주위를 돌아보지도 않고 자신들의 의(義)를 내세웠다. 이로 인해 예수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20)고 경고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원하는 ‘의’는 배려하지 않고 분리하는 것이 아니며, 세상과 불통(不通)하고 자신의 목소리만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평화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세상은 온갖 소리로 뒤덮여있다. 화음(和音)이 아니라 불협화음(不協和音)이어서 소음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면 극복하는 것도 지혜가 아닐까. 내 소리에 집중하기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의 소리에 한 번 더 귀 기울여 행동할 때 더불어 평화하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신축 모스크바 주교좌대성당 낙성식과 한국의 헌법개정 방향

1931년 스탈린은 소련의 종교말살 정책으로 모스크바 주교좌대성당을 폭파하고 그 자리에 450m 높이 탑을 신축, 레닌의 초대형 동상 건립 장기계획을 착수시켰으나, 당시는 인력도 재력도 여의치 않았다.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고르바초프, 옐친, 푸틴 등 새 대통령들의 개혁정책으로 모스크바 대성당 복원 운동이 구체화되어 새 대성당 건축은 매우 신속하게 진척되었고, 폭파 전에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유럽 교회들의 지원으로 약 5억 달러의 큰 예산을 들여 완공하였고, 마침내 지난 2000년 연말에 전 유럽 교계의 감탄과 경탄을 받으며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모스크바의 신축 대성당은 첨탑 높이 103.5m, 내부 평면 2만7천㎡, 천정높이 79m, 벽 두께 평균 3.5m, 천정 중앙 돔 직경 30m, 천정과 벽 내면과 외부 돔 지붕은 1㎜ 두께의 합금으로 입혀졌다. 모스크바의 루즈코푸 시장은 새 대성당 축성식 기념사에서 “과거 스탈린 공산주의 집단(regime)이 파괴한 새 대성당 복원은 우리 소련 인민의 정교회 정신 부흥운동의 출발이요, 표상”임을 강조했고, 소련 제2의 도시 레닌그라드(Leningrade) 역시, 거의 1세기 만에 페테르스부룩(Petersburg)이라는 옛 이름을 회복하였다(현재 사용 중). 신권(神權)이 무시되는 무신론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인권(人權)도 존중될 수 없었다. 고려말 이성계와 정도전 등이 고민하던 왕권(王權) 수호 통치와 신권(臣權)의 개혁 정치 시도, 나아가 민권(民權) 신장이 공산주의 체제하의 자유부재 사회에서는 경제발전의 기적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신앙인, 지성인, 부자를 모두 숙청하고 나면 노동자농민들이 기업가와 부자가 될 줄로 알았으나, 기업가들과 부자들만 없어지고, 노동자농민들은 가난한 채 그대로 남아서 1세기를 두고 대를 이어가며 변함이 없었다. 유럽 다른 나라 국민들의 삶에 비하여 소련 인민의 상대적 가난은 절대적 가난으로까지 심화되어 가는 듯하였다. 더군다나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에 대항하려는 소련의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대량 생산 노력은, 마치 오늘의 북한처럼 인민들의 복지에 정신 쓸 겨를이 없게 하여, 복지는 고사하고 국가 유지 자체도 어려워져서 1980년대 말, 결국 국방과 체제유지에 무용지물이 된 핵무기와 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대량으로 제조보유한 상태에서 구 소련의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 붕괴는 속수무책이었다. 최근 우리나라에 헌법 개정이 거론되고 있다. 민주(民主)니, 민족(民族)이니, 통일(統一)이니 하며 현행 헌법 개정 방향을 1세기 전 소련이 실패한 무신론 사회주의를 추종하려는 목소리도 들려오고 있다. 공산주의 망령들이 복장만 바꾸어 입고, 명찰만 새로 만들어 가슴에 붙이고 출현하여, 광란의 괴성으로 진실을 파괴하고, 일부 사이비 언론들은 괴변으로 정의를 거부하고 조작된 다수의 폭력으로 문화와 역사의 개조를 시도하지만, 진리와 정의를 부정하는 허위와 불의로 무신론 공산주의로 가는 헌법 개정만은 없어야 할 것이다. ‘안반이 글러서 떡이 안 된다’는 말이 있다. 떡메질이 서투른 새 일꾼이 떡 찧는 판이 잘못 생겨서 떡이 잘 안 된다고 탓한다는 말인데, 기름 한 방울도 안 나오고 지하자원도 별로 신통치 않은 우리가 분단의 상처와 전란의 잿더미에서 단기간에 ‘세계 10대 경제대국’ ‘7대 무역 대국’ 하는 소리를 들으며, 중국에 앞서는 서울올림픽을 비롯한 국제 문화행사를 계속 거뜬히 흑자 거행하며, 세계 여러 나라에 적지 않은 원조를 보내주고 있다. 이 한강 기적의 토대가 된 현행 헌법도 잘 안 지키고 제대로 못 지키는 마당에, 헌법개정은 불안하기 그지없다. 기존 헌법의 일부 조항에 대한 추가 보완 정도라면 몰라도, 대한민국의 국권(國體)까지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모험은 개헌이 아니라, 미지의 불안한 공산주의 혁명같은 개악(改惡)이 될까 걱정이다. 더구나 국가 100년 대계의 개헌작업에는 반드시 헌법학 전문 원로학자들이 참여하는 분명한 몫이 보장되어야 하겠다. 결국 현행 헌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과 남한 사회에까지 전염된 공산주의 무신론 사상과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유혈참극을 피하며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북한도 일본영국태국벨지움 등 나라들처럼 먼저 입헌군주제로 가는 것이 합당한 차선책이 아닐까 한다.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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