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실재 세계는 이중적이고 중첩적이다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선거가 끝났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슬픔이 교차하며, 우리 사회가 균열되고 있다. 양측 모두에게 지혜가 필요한 때라 생각한다. 나는 보이는 현상 너머 실재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여러분은 토끼와 오리 그림을 아는가? 이 그림은 두 가지 동물이 겹쳐 보인다. 어떻게 보면 긴 귀를 가진 토끼고, 다르게 보면 길쭉한 부리를 가진 오리다. 같은 그림인데도 토끼를 볼 땐 오리가 보이지 않고, 오리를 볼 땐 토끼가 보이지 않는다. 보는 것은 같지만 보이는 것은 때에 따라 다르다. 같은 것을 보면서 다른 인식적 결과를 얻는 것이다. 왜 그러할까?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그림에서 무엇을 보려고 하느냐다. 토끼를 보려고 하면 토끼가 보이고, 오리를 보려고 하면 오리가 보인다. 다른 하나는 어떤 인식체계를 가지고 보느냐에 달렸다. 우리는 주어진 감각자료들을 종합정리하고 해석하는 두뇌신경망을 가지고 있는데, 이 두뇌신경망이 어느 것에 대한 인식체계를 갖추고 있는지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즉 보는 이의 두뇌신경망이 토끼에 더 많이 노출된 사람은 토끼를, 오리에 더 많이 노출된 사람은 오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토끼와 오리와 마찬가지의 현상을 일으키는 그림이 루빈의 꽃병 그리고 네덜란드 화가 에셔(M.C. Escher)의 천국과 지옥 그림이다. 천국과 지옥에서 흰색의 형태에 주목하는 사람은 천사를 보게 되고, 검은색 형태에 주목하는 사람은 악마를 보게 된다. 루빈의 꽃병 에서 가운데의 검은 물체를 보는 사람은 하나의 꽃병을 보게 되고, 양옆의 흰 물체를 보는 사람은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옆얼굴을 보게 된다. 단순히 재미있는 그림이라고 넘기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우리가 그 그림들을 서로 다른 사물로 인식하기 전, 그림의 실재는 무엇인가? 토끼도 오리도 아닌, 꽃병도 사람도 아닌,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우리 의식에 규정되기 이전의 그 실재 대상,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비친 세계 너머, 일상적 상식의 틀 너머, 개념적 규정 너머, 주객분별의 의식 이전, 일체 분별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실재 세계는 무엇인가? 18세기 독일 철학자 칸트(I. Kant)에 따르면,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범주의 인식형식에 의해 규정된 현상이다. 그리고 특정 현상으로 규정되기 이전에 물 자체(Ding an sich)가 있고,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칸트가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바로 알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이라는 뜻으로 생각한다. 의식하기 전 위 그림들의 실재는 토끼도 오리도 아니고, 천사도 악마도 아니고, 사람도 꽃병도 아니다. 토끼이자 오리이며, 천사이자 악마이며, 사람이자 꽃병이기도 하다. 의식 이전의 실재 세계는 평범한 사유논리를 넘어선다. 모순율도 배중률도 통하지 않는다. 의식 이전 실재 세계는 이중성과 중첩성의 세계다. 시장 선거로 당선된 이나 탈락한 이나, 승패가 갈렸다고만 생각하며 일희일비하지 말고 더 멀리 그리고 더 깊이 통찰하고, 자숙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시민을 위해 각자 할 일을 하기 바란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천책의 사상과 현대적 함의

고려시대의 무신 집권기 시대에 불교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 중의 하나가 백련결사(白蓮結社)이다. 백련결사는 원묘국사 요세(1153~1245)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당시의 불교문화에 대해 반성하고 새로운 수행기풍을 세우고자 노력했다. 이 백련결사의 전통을 이은 사람 가운데 천책(天, 1206~?)이 있고, 그의 저술로 호산록(湖山錄)이 전한다. 이 호산록은 고려시대 천태종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천책의 사상 가운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가지이다. 우선, 사상의 유연성이다. 천책은 천태종에 속한 인물이지만, 화엄종의 사상도 수용하고 선종의 사상도 포용한다. 일반적으로 천태종의 사상을 추종하면, 나머지 불교사상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천책은 그렇지 않았다. 천태종의 사상과 화엄종의 사상을 아울러 드높였고, 선종의 장점을 받아들여서 주변 사람에게 공부하도록 권했다. 천책의 이러한 유연한 자세는 불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유교와 도교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태도를 취해서 유교, 도교, 불교가 일치한다는 삼교일치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천책의 사상에서 주목할 또 다른 점은 주체적인 관점이다. 천책은 천태종의 위대한 인물을 선정할 때 고려출신의 보운(927~988)에 주목했는데, 이는 중국 천태종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다. 보운은 중국에 건너가 천태사상을 공부하고 중국에서 천태사상을 널리 전하고 고려에 돌아오지 못했다. 보운이 어느 정도 역사적 자취를 남긴 인물이지만, 중국의 천태종에서는 보운의 활동에 대해 평가해 주는 데 인색했다. 그에 비해 천책은 중국의 평가와는 다르게, 천태종의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한 인물로 보운의 위상을 인정했다. 이런 점에서 천책의 사상에서 주체적인 안목을 읽을 수 있다. 당시 문화의 중심이 중국이었고 이 문화의 중심과 다른 관점을 갖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유하면, 요즘 서양철학을 전공하면서 미국, 서구 유럽과 다른 견해를 갖기 쉽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천책의 사상이 갖는 현대적 함의는 어떤 것일까?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부족한 부분은 자신의 문화에 대해 주체적 태도를 가지면서도 또 새로운 문화에 대해 문을 여는 유연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둘을 동시에 갖추기는 쉽지 않다. 개인의 경우에도 사고방식이 유연해서 다른 문화를 잘 수용하는 쪽이라면, 아무래도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쪽에서는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또 자신의 주장을 강력히 추진하는 데 강점이 있다면, 자신의 주장과 다른 생각을 수용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한 사회의 문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체성을 강조하다 보면 유연한 태도를 잃기 쉽고, 또 반대로 유연한 태도에 방점을 두면 주체적인 측면이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 두 가지 태도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할 때 더욱 성숙한 문화를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백신 운동과 형제애 실천

2021년 한국 천주교회는 백신 나눔 운동을 전개한다. 일부 지역(교구)과 단체에서 시작한 운동을 전국 차원에서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백신 나눔 운동에 대한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결정은 두 가지 배경에서 설명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백신 나눔 운동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해, 그리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준비하면서 애덕 실천을 통해 두 신부님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결의한 공동체적 실천 과제다. 이러한 한국주교회의의 결정에는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연대 의식이 작용했다. 교황은 지난해 10월 회칙 『모든 형제들』을 발표하면서 인간의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를 강조했다. 백신 운동으로 모은 기금은 교황청으로 전달돼 백신이 필요한 가난한 나라에 우선으로 전달될 예정이다. 백신 접종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19 대유행의 종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까지 100개 이상의 국가에서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됐고, 백신 약 3억 회분이 소요됐다. 일부 국가는 다량의 백신을 선제적으로 확보해 전 국민 대상 접종을 하고 있지만, 백신 확보 경쟁에서 밀려난 저개발 국가들은 백신이 도착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현실이다. 영국의 경제분석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2023년까지 전 국민 대상의 백신 접종이 불가능한 국가도 있을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 집단 이기주의로 코로나19 백신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백신 보급의 불균형 현상을 예견했는지 지난해 8월19일 일반 알현에서 코로나19 백신은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백신의 차별 없는 공급을 호소한 바 있다. 백신의 차별적 보급으로 파생된 국가 간 불균형 현상을 바라보며 사회 정의의 부재를 절감한다. 인류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백신이었지만, 백신 보급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자취를 감췄다. 집단 이기주의가 극단적으로 심화하고 있다. 차별 없는 행복한 세상은 요원한 것인가? 사회 정의는 행복한 세상을 함께 만들기 위한 전제(前提)이다.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무엇보다도 인간 존엄성이 존중돼야 하며, 연대성 또한 실현돼야 한다. 모든 사람은 천부적으로 존엄하므로, 이에 따라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해 모두 함께 서로 돕고 배려하며 보완해야 한다. 코로나19 시대, 어느 때보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를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인류 공동체가 처한 위기 속에서 국가와 인종, 종교를 초월하는 형제애의 실천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한국천주교회가 전개하는 백신 나눔 운동은 코로나 위기를 극복해 행복한 사회를 만들려는 하나의 실천적 노력이며 인류 공동체를 향한 간절한 호소일 것이다.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된 사람은 함께 지내는 사람에 대해 신중하다

삶에서 사람을 사귀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교류하느냐에 따라 자기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돌아볼 때 현재의 나를 있게 해준 스승님들을 생각하게 된다. 여러 스승님 가운데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선생님들이 계신다. 그 가운데 가장 고마우신 분은 나의 지도교수님이시다. 선생님께서는 학부 시절부터 내가 더 깊은 사색에 빠지게 하고, 대학원을 진학하고 계속 공부할 수 있는 동기를 주신 어른이다. 나는 학부 4학년 1학기 중반에 접어들 무렵 대학원 진학 상담 차 우리 학교 동양철학 담당이셨던 선생님을 댁으로 찾아뵀다. 요즘에는 선생님 댁으로 선생님을 찾아뵙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그리 이상한 풍경이 아니었다. 집 주변을 산책하며 이런저런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은 나는 가르칠 게 없다. (선생님은 자신이 사는 연립주택의 화단에 돋아나는 새싹을 가리키며) 저 새싹들이 더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선생님은 한 대학을 추천해주셨다. 나는 선생님의 추천을 따르지 않았다. 나는 가르칠 게 없다는 선생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알 수 없는 전율이 있었다. 그런 말씀과 가르침을 내게 주시는 선생님은 추천해주신 그 대학에 계시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오히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선생님께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이 말씀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것은 내게 하나의 울림이고 하나의 화두다. 이 이야기를 25년이 훌쩍 지나서 말씀드렸는데, 기억은 못 하시고 즐겁게 웃으셨다. 나는 선생님께 감히 따라할 수 없는 격조와 절제를 느낀다. 한 번은 나만 못한 이를 사귀지 말라는『논어』에 나오는 공자 말씀에 대해, 참 이상한 말이라고 하시면서, 그럼 아무도 사귀지 못할 거라는 것이다. 자기(a)보다 잘난 사람(b)이 자기(b)만 못한 사람을 사귀지 않으면 자기(a)는 사귈 사람이 없고, 결국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공자의 이 말씀에 대해, 누구나 각자의 장점이 있고 배울 것이 있으니, 자기만 못한 벗이란 없다로 해석하셨다. 나는 당시 이 해석이 참 그럴듯한 해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면서, 스스로 누구로부터도 배울 수 있는 낮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선생님 해석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일반 사람이 가지는 마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명심보감』에 공자의 말씀이라고 하며 전해지는 말이 있다. 착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난초가 있는 방에 있는 것과 같다. 시간이 한참 지나면 그 향기를 맡지 못하지만, 그에게 동화된다. 나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생선 가게에 들어간 것과 같다. 시간이 한참 지나면 그 냄새를 맡지 못하지만, 그에게 감염된다. 빨간 물감을 담은 것은 붉어지고 검은 물감을 담은 것은 검어진다. 그래서 된 사람은 반드시 함께 지내는 사람에 대해 신중하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조계종 ‘선원청규’의 보청과 시민의식

조계종은 한국불교의 최대종단이다. 한국불교사를 돌이켜볼 때 조선전기에 불교는 억압을 받아서 불교의 모든 종파가 사라졌다가, 일제강점기인 1941년에 이르러서 조선불교 조계종이 등장했고, 현재의 조계종은 이것을 계승한 것이다. 조계종의 특색 가운데 하나는 선(禪)수행에 있고, 여름철과 겨울철 안거(安居) 때마다 여러 곳에서 선승(禪僧)들이 수행에 몰두하고 있다. 조계종의 선승을 대표하는 모임에서 2010년에 『선원청규』라는 책을 발행했다. 원래 선원청규라는 것은 선수행을 하는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규정을 담은 책이고, 이는 중국의 송나라 시대에 저술된 것이다. 지금 말하는 『선원청규』는 과거의 내용을 계승하면서도 현재 상황에 맞게 다시 내용을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다. 여기서는 『선원청규』의 여러 내용 가운데 보청(普請)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보청은 사찰에서 수행하는 선승들이 균등하게 노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노동만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노동을 통해서 정신세계를 고양하는 수행의 측면도 고려한 것이다. 과거에 선수행을 강조하는 사찰에서는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기 어려웠어서 자급자족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사찰의 구성원들이 모두 나서서 노동을 통해서 먹거리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보청이 생긴 이유이다. 그런데 2010년에 간행된 『선원청규』에서는 현대의 상황에 맞춰서 보청의 의미를 확대하고 있다. 단순히 사찰에서 노동하는 것만을 보청이라고 하지 않고, 사찰 바깥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독거노인 돌보기, 곧 홀로 사는 노인을 돕는 것도 수행자가 실천해야 할 일이라고 보고 있다. 다른 예를 들면, 농촌봉사활동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농촌에 가서 봉사활동을 통해 일손을 돕고, 농촌에 사는 노인들을 부모님처럼 돌보는 일을 하는 것이다. 또 사찰에서 불교적 가치에 의거해서 생태운동을 하는 것도 보청에 속하는 것이고, 사찰에 있는 불교문화재를 널리 알리는 활동, 곧 문화재해설도 보청에 포함된다. 이처럼 보청의 범위를 확대한다면, 이는 시민의식과 만나게 된다. 시민의식은 국가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하는 공통된 생활태도 또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약자를 돕고 배려하며, 자연을 보호하는 활동에 참여하고, 한국의 전통을 지키고 알리는 일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권장할 만한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이러한 시민의식이 점차로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시민의식의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 『선원청규』에서 제시하는 보청은 바람직한 행위를 하라고 규정하는 것만이 아니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정신세계를 고양시키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 주장하는 형식적 내용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시민의식을 지켜가야 한다고 말할 때에 사회의 발전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의 내면세계를 풍부하게 하는 측면도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할 때 시민의식을 더욱더 고양하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시종, 시대를 따름

예수가 살았던 시기의 유다인은 코르반 규정을 준수하였다. 이에 따라 소유 재산을 코르반(qorbn),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로 서약하면, 이 재산은 하느님께 귀속돼 그 외 어떤 목적으로도 사용할 수 없었다. 코르반 규정을 둘러싼 논의는 예수 시대를 지나 기원후 2세기 무렵까지 이어졌다. 누군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헌을 위하여 코르반 서약을 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누군가는 분별없이 혹은 부정적 의도 하에 서약을 맺어 사회적 혹은 종교적 갈등을 야기하였기 때문이다. 랍비들은 계명의 준수와 코르반 서약의 준수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에게 먼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것을 가르쳤고, 서약의 엄격함에 묶여 있는 이들에게는 규정 준수의 면제를 허락하기도 했다. 2021년 코로나19가 세상의 변화를 재촉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는 오늘날의 노력도 우리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1월 화상 제사로 진행된 퇴계 이황 선생(1501~1570)의 450주년 불천위 제사는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퇴계 문중을 포함해 퇴계 선생을 존경하는 수많은 이들이 퇴계 종택(宗宅)에 모여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제사를 지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제한 속에서 소수의 제관만이 종택에 모여 제사를 바치고, 다른 사람들은 비대면으로 제사에 참여하였다. 작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이색적 풍경이다. 도산서원은 코로나 시대를 맞아 심각한 도전을 받았지만, 새로운 시험을 통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시대를 따르라는 퇴계 선생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선생은 의어금이불원어고(宜於今而不遠於古: 오늘날에 마땅하고 옛날과 멀리 벗어나서는 안 된다)를 설파하며, 전통 예법의 기본을 존중하면서도 현실의 상황에 맞출 수 있는 개방성과 유연성을 강조하였다. 코로나가 지나간 그 자리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할 수는 있지만,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른 바 새로운 시대가 찾아올 것이다. 그 시간이 찾아왔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옛것에 대한 그리움이나 집착이 아닌, 새것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이다. 시종(時從), 곧 시대를 따르라는 퇴계 선생의 가르침은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는 우리의 길잡이가 아닐까?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이치에 잘 통달한 이는 마땅함만을 따를 뿐

고려 말과 조선 초 시기 가장 중요한 불교학자는 아마도 함허당 기화(涵虛堂己和, 1376-1433)일 것이다. 그는 고려조의 왕씨에서 조선조의 이씨로 왕조가 교체되던 시기에 산 인물이다. 이때는 왕조만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이념이 불교에서 유교로 교체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에 고려조의 불교 교단은 조선조에 선종으로 강제로 통폐합되고 축소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외에도 유학자들은 강력하게 배불론을 전개하며 불교의 진리성에 대해 도전했고, 승려들은 이에 대해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응답을 한 이는 드물다. 불교적 입장에서 이에 대한 응답을 가장 충실하게 더 나아가 유일하게 한 이가 기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의 우리는 그 대 전환기 시대에 기화가 전통을 어떻게 계승하고, 새로운 전통을 어떻게 세워나갔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기화는 기본적으로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의 사상을 이어받고 있다. 기화는 불교 진리의 가르침에 근본적으로 선과 교의 차별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이는 지눌의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정신에 뿌리를 두는 것이다. 지눌은 궁극적으로 교학을 버리고 선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에, 기화는 선이나 교라는 분별적인 의식도 버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당시 유학자들의 배불론에 대해 기화는 호불론을 전개했다. 그는 승려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불교 우위 입장에 있지만, 유교와 불교가 본질적으로 동일성이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기화의 『현정론(顯正論)』에 나오는 이야기 일부를 정리해보겠다. 유교 특히 『대학(大學)』에서 명덕(明德) 즉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강령이다. 유교의 밝은 덕에 해당하는 것이 불교에서는 묘정명심(妙精明心) 즉 묘하고 깨끗하며 밝은 마음이라는 것이다. 모든 중생에게 내재돼 있는 바로 이 마음을 알아차려 일깨우게 하는 것이 중생 구제의 불교라면, 모든 사람들이 그 자신 안에 갖추는 그렇지만 아직은 숨겨져 있는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 중생 교화의 유교다. 기화는 불교와 유교가 말하는 이치가 이미 같다고 말하고 있다. 기화는 순임금은 물어보기를 좋아했고, 가까운 데에 있는 말을 살펴 악을 감추고 선을 드러내기를 좋아했으며, 우임금은 훌륭한 말을 들으면 절을 했다고 하며, 만일 순임금이나 우임금이 부처님 말씀을 만났다면 부처님 말씀을 아름답게 여길 뿐만 아니라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였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기화는 더 나아가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의 가르침이 은밀히 서로 들어맞아 마치 한 입에서 나온 듯하다고 고백한다. 현대의 우리에게 기화의 다음 말은 여전히 큰 울림을 준다. 그가 가리키는바, 훌륭한 사람이란 무엇인지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자기만이 전적으로 옳다 하고 남을 소홀히 하며, 이것을 옳다 하고 저것은 틀리다 하는 것은 사람의 보통 마음이다. 그러나 이치에 잘 통달한 이는 마땅함만을 따를 뿐이다. 이런 이가 어찌 남과 나, 이것과 저것으로써 옳고 그르다 하는 사람이겠는가?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누가 세상을 움직이는가

성경에 다니엘이라는 인물이 있다. 나라가 바벨론에게 망하여 포로로 끌려갔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이 워낙 뛰어나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측근에서 모시게 됐다. 어느 날 괴상한 꿈을 꾼 왕이 해석을 원하는데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다. 그때 다니엘이 그 꿈을 해석하여 줬다. 그런데 그 해석이 참 맹랑하다.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 칠 년 동안 들짐승과 살며 소처럼 풀을 뜯어 먹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천하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회복되고 왕의 나라가 견고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정말 꿈의 내용이 그렇더라도 사실을 바르게 말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담대하게 바른말을 왕에게 전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다니엘은 서슬 퍼런 왕에게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고 왕은 그 말을 귀담아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 꿈을 꾼 지 열두 달 후에 꿈대로 이뤄졌다. 왕은 사람들에게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뜯어 먹고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은 독수리 털 같이 손톱은 새 발톱처럼 됐다. 그리고 칠 년이 지난 후 왕의 총명이 돌아와 회복하게 된다. 그때 느부갓네살 왕이 이런 고백을 한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왕은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해졌다. 영원한 하나님의 권세와 나라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 말에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의 권세는 순식간에 지나는 바람과 같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을 때 어떻게 했는지는 기록에 남을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할 수 없는 일들을 겁 없이 한다. 특히 영향력이 있는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어떻게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다. 듣기 좋은 말만 따르면 필망(必亡)의 길로 갈 것이다. 쓴소리를 들을 줄 알면 잘못된 삶의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권세를 누릴 때, 권력에 취해 중심을 못 잡으면 바람결에 지나간 자신의 부끄러운 흔적을 고통스럽게 돌아보게 될 것이다. 앞선 사람들이 남긴 흔적에서 배우지 못하면 불행한 역사는 반복된다. 사의 교훈을 보고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혐오하던 삶을 반복하게 된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나마 감사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제부터라도 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안용호 기흥지구촌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불교개혁론의 대중불교와 민생 안정

흔히 일제강점기라고 하면 암흑시대와 같은 이미지를 갖는 것이 보통이지만, 불교의 경우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일제강점기 때에 불교문화는 상당히 진전된 모습이었다. 이때 여러 가지의 불교개혁론도 등장하였다. 여기서는 불교개혁론 가운데에 대중불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조선불교의 개혁안」(1931년)에서 대중불교의 건설을 주장했는데, 여기서 대중불교는 불교사상 등을 대중이 공부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가 인간사회를 떠나서 인적이 드문 산간벽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세간 속으로 파고들어가 세상 사람을 구제한다는 것이다. 한용운은 당시의 불교가 사찰의 종교이고 승려의 종교라고 비판하면서 산간에 있는 불교를 거리의 불교, 곧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불교로 바꾸고, 승려의 불교를 대중의 불교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한용운만이 제시한 것이 아니고 불교개혁론자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이었다. 한용운은 대중불교의 건설을 위해서 그 방법의 하나로서 불교도의 생활을 보장하자고 주장한다. 당시의 일반 대중이 바라는 것이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 곧 생활을 보장하는 데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무시하고 불교의 교리만을 전하고자 한다면 이는 사회현실을 무시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한용운은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한용운만이 제시한 것이 아니다. 3ㆍ1운동 때에 33인의 대표로 참가했던 백용성(1864~1940)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도시에서는 공장을 세워서 불교인을 취업시키고 포교사가 이들에게 불교를 가르치도록 하고, 농촌에서는 생산소비조합 등을 세워서 농민의 생활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불교를 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이들의 주장이 현실에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청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2021년 새해의 여론조사에 차기 대통령으로 경제를 살릴 사람을 가장 선호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국민의 31.9%가 경제를 살릴 사람이 차기 대통령이 되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바람은 20대와 30대의 젊은 층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20대의 절반 정도가 경제를 살릴 사람을 선호하고, 30대는 33.4%가 경제문제에 능력 있는 사람을 희망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의 안목으로 보자면 대중불교의 건설을 위해서 불교도의 생활을 보장하자고 주장한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불교개혁론에 따르면 일반 대중의 경제적 삶이 안정되고 윤택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일반 대중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추상적 구호는 그다음 순위에 있다. 불교개혁론자들이 이와 같은 입장을 추구하였다면, 오늘의 정치인에서는 더욱더 요구되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민생안정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고, 그 바탕 위에서 여러 가지 개혁의 깃발을 휘둘러야 대다수 국민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의 불교개혁론자도 생활의 보장을 우선시하였는데, 현실의 정치에서 민생의 안정을 추구하는 데 부족한 점이 나타나는 것은 안타까운 현상이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균형을 위한 나눔

인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시대를 구분한다. 예수 탄생 이전(BC: Before Christ)의 시기가 있었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시기는 예수 탄생 이후, 곧 주님의 해(AD: Anno Domini)에 속한다. 이러한 시대 구분 방식은 예수라는 인물이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을 반영하는 하나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2020년이란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인류는 커다란 역사적 전환점을 마주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코로나 19가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2020년 전 세계를 휩쓸어버렸고 여전히 그 힘을 잃지 않으며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수많은 이들이 코로나 이전의 시기를 그리워하지만, 회귀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인류가 처한 시대적 위기를 바라보며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스먼은 세계가 코로나 이전(BC: Before Corona)과 코로나 이후(AC: After Corona)로 나뉠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 12월 21일 BOK 이슈노트 코로나19 위기 이후의 성장불균형 평가를 발행하면서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심화된 성장 불균형 현상을 주목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 위기는 과거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다. 연구자들은 이번 위기가 취약부문에 영구적 충격을 미칠 수 있으므로 성장 불균형은 일시적 현상으로 끝나지 않고 장기간 지속될 수 있으며, 이럴 때 부문 간 불균형과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부유한 계층과는 달리 저소득층을 포함하는 취약 계층은 가중되는 생활고를 피할 수 없게 되었으니 실로 안타까운 심정이다. 코로나가 초래한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국가 차원에서 위중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묘수도 필요하겠지만, 취약 계층을 위하여 정책 여력을 집중해야만 한다. 이와 함께 사회 구성원 모두의 형제적 참여가 긴요하다. 위기 상황에 대한 공감대 형성, 코로나로 인하여 소외된 이들을 위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나눔이라는 적극적 실천이 요구된다. 공동체는 나눔의 실천 없이 존속할 수 없다. 함께 소유하고 나누었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사도 2,42-47 참조)은 오늘날 코로나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표본이다. 경제적 균형을 강조했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나누고 싶다.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2코린 8,14) 오스트리아 유학 시절 자주 들었던 Vergelts Gott!이란 말이 떠올랐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갚아주신다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거나 기부를 받았을 때, 감사합니다.라는 표현보다는 하느님께서 갚아주신다.라는 인사를 더 많이 한다. 이 짧은 문구는 깊은 신앙심에 뿌리를 두는 감사의 표현이다. 그들은 소유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복음적 정신과 가치를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가진 것을 나누는 일에 개인적 이익과 명예는 시선에서 멀어져 있다. 코로나가 초래한 사회경제적 불균형의 위기에서 필요한 것, 그것은 소유한 것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과 실천이 아닐까?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소의 해에 슬기로운 소를 그리며

2021년은 신축년(辛丑年) 소의 해다. 소는 불교에서 마음을 뜻하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우리 역사에는 슬기로운 소를 뜻하는 이름의 불교계 인물이 있다. 성우 경허(惺牛鏡虛, 1849~1912)다. 성우는 법명이고 경허는 법호다. 소의 해에 성우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스님의 법명 성우에서 성(惺)자는 슬기롭다는 뜻이다. 성자는 별 성(星)에다가 마음 심(?)을 왼쪽에 붙인 글자다. 이 글자는 글자 그대로 풀면 마음 안에서 별이 초롱초롱 빛나는 모양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우(牛)자는 소를 뜻하고, 마음을 은유한다. 그러니 성우는 깨어 있는 마음 깨달은 마음을 가리킨다. 즉, 성우는 자신 안에 성성하게 깨어 있는 부처님 마음을 뜻하는 것이다. 스님의 법호 경허에서 경(鏡)자는 거울이란 뜻이다. 허(虛)자는 텅 비었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거울은 마음 바탕을 은유하는 말이다. 그러니 경허는 마음 바탕이 텅 비었다는 뜻이 된다. 스님이 오도를 한 1879년 여름에 조선 전체에 호열자라는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다. 스님은 그 소식을 알지 못한 채, 청계사에 계셨던 은사 스님인 계허를 뵈러 동학사에서 서울로 향했다. 서울로 향하던 길에 폭우를 만나 하루 묵어가려고 어느 마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마을은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다 죽어가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가는 집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주지도 않아 묵을 만한 집을 찾지 못하다, 간신히 한 집에 묵게 되었다. 자신도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다 문득 자신의 공부가 헛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서울로 가지 않고 동학사로 돌아와 강원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영운(靈雲) 선사의 나귀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한다.는 법문을 화두로 삼고 두문불출하며 용맹정진했다. 스님은 칼을 갈아 턱밑에 놓고서 졸음을 쫓으며 정진했다. 한편, 경허의 수발을 들던 사미승 원규는 11월 어느 가을날 동학사 근처 사가에 갔다. 원규는 아버지이신 이처사와 이야기를 했다: 강주 스님은 무얼 하시느냐? 방안에서 옴짝달싹 안 하시고 소처럼 앉아 계시기만 합니다. 허허 중노릇 잘못하면 다음 생에 소가 된다는 것도 모르신다더냐? 공양만 받아먹으면, 다음 생에 소가 되어 죽도록 일해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절간에 가 공부한다는 사문이 겨우 그렇게밖에 말을 못하느냐? 소가 되더라도 코뚜레를 할 곳이 없는 소가 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정도는 되어야지! 코뚜레를 할 곳이 없는 소라니요, 이게 뭔 말입니까? 이 처사는 강주 스님께 이를 여쭈어보라고 했고, 절에 돌아온 원규는 경허 스님께 코뚜레를 할 곳이 없는 소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다. 경허 스님이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축복이 일어났다. 스님은 오도의 순간을 게송으로 남겼다. 콧구멍 뚫을 곳이 없다고 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문득 깨달아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나의 집이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서, 나그네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네. 경허 스님은 당시 전염병 대유행을 만나 자신의 공부를 되돌아 볼 기회를 얻게 되었고, 삼사 개월의 용맹정진 후 코뚜레 뚫을 곳 없는 소가 되었다. 그 소는 어디에도 얽매임이 없는 해탈한 소이자 깨어 있는 소다. 그 소는 중생의 마음이고 중생의 마음은 텅 비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소의 해인 금년에 우리 국민 모두 코로나19의 고통에도, 그것이 모두가 해탈할 축복의 시간으로 이용하길 바란다. 소의 해에 우리 모두 깨어 있는 마음이 되자는 뜻으로, 또 마음 바탕을 텅 비우자는 뜻으로 스님의 법호와 법명을 새겨보았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천태종의 일념삼천설과 정치인의 마음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해서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로 전해졌다. 중국에 전해진 불교 가운데 가장 먼저 중국적 색채를 제시한 것이 천태종이다. 이 천태종의 주요사상 가운데 하나가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이다. 이 일념삼천설은 사람의 한마음에 3천 가지의 가능성이 간직되어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온갖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람은 선한 마음이 생기게 할 수도 있지만, 악한 마음도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사람은 부처가 될 마음을 일으킬 수 있고, 또 동시에 지옥에 떨어질 마음을 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관점에서 자신을 이해한다면, 지금 내가 부처가 될 마음을 일으켰다고 해도 거기에 자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방심하는 순간에는 지옥에 들어갈 마음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을 바라본다면 좋은 일을 했다고 해서 거기에 안주하지 않을 것이고, 계속 꾸준히 자신을 성찰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관용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 사람이 지금은 나쁜 마음을 일으켰지만, 다음에 참회한다면 얼마든지 좋은 마음을 생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념삼천설의 의미가 정치인에게는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치인이 과거에는 정치인으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고 해도, 그것이 현재 그 정치인의 마음가짐을 잘 보여줄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인간은 지옥에 갈 마음도 일으키지만, 동시에 부처가 될 마음도 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재 정치의 상황을 보면 정치인들의 말이 무성하다. 정치인은 입으로는 온갖 좋은 말을 쏟아내지만, 과연 그들의 진정성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주저된다. 재야에 있을 때 청렴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더라도 권력의 길에 들어선 뒤에 바뀐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일념삼천설에 따르면 사람은 늘 바뀌는 존재이지만, 정치인은 그 가운데서도 그 변동의 폭이 더 심한 경우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늘 바뀔 수 있는 사람에 의지하고 기대할 것이 아니고, 제도를 잘 만들고 다듬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집권한다 해도, 잘못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제도를 만들고 섬세하게 다듬어 갈 필요가 있다. 현재의 정치상황을 판단할 때도 정치인의 말에 근거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제도를 만들어내는지 주목해보자. 그러면 정치인의 말 잔치에 휘둘리지 않고 정치의 진실을 좀 더 정확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예수님 탄생과 찬란한 생명의 빛

베들레헴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양 떼를 지키고 있을 때 일이다. 어느 순간 천사들이 곁에 서고 하나님의 영광이 목자들을 비추자 그들은 몹시 두려워했다. 그때 천사가 말한다. 무서워하지 마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온 세상이 알아야 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해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라.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 중에 평화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내용이 있다. 어두운 밤에 찬란한 빛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나타난 찬란한 빛은 죄와 사망의 어둠에 빠진 인류에게 생명의 빛을 비춘 사건이다. 죄는 사람들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는다. 어두운 곳은 자신의 죄를 가릴 수 있는 암막 커튼과 같다.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를 짓는 일에 담대하다. 그러니까 죄의 어둠에 빠진 사람일수록 빛을 싫어한다. 자신의 죄가 노출되는 것은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죄는 깊어지고 사탄은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한다. 그런데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죄의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을 구원하고 빛의 자녀로 살게 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말씀도 한다.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을 앞두고 선포된 예언이다. 그렇다면 어둠의 권세를 벗어나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신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목자들이 제일 먼저 들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도 있고 왕을 비롯한 권세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이 태어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가장 먼저 들었다. 목자들은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가장 낮고 천한 사람들까지 사랑하신다. 세상이 관심도 두지 않은 사람들,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 무가치한 존재처럼 무시당하는 사람들까지 그 이름을 불러가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갈수록 함께 살아야 할 이웃을 미워하고 정죄한다. 심지어 작은 일에 분노하며 고귀한 한 사람의 생명을 가차없이 파괴한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생명인데, 예수님이 구원하기 위해 오신 생명인데 우리는 너무 잔인하게 다룬다. 안용호 기흥지구촌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기다림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사자성어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일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던 2020년이었다. 떠나가는 2020년을 마무리하고 2021년을 준비하는 이 시점에 우리는 무엇을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고 있을까. 수많은 것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하나를 꼽아보라면 평범한 일상(日常)일 것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우리의 일상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매일 반복되는 생활이 작년 이맘때만 하더라도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이었지만, 지금은 아쉬움 속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가수 이적이 만들고 부른 당연한 것들이란 노래는 우리 삶 속에서 잊고 살았던 당연한 것들을 다시 누릴 수 있는 날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의 바람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왔던 평범한 나날들이 다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버렸죠. 당연히 끌어안고 당연히 사랑하던 날 다시 돌아올 때까지 우리 힘껏 웃어요. 잊지는 않았잖아요. 간절히 기다리잖아요. 서로 믿고 함께 나누고 마주 보며 같이 노래를 하던 우리에게 너무 당연한 것들. 며칠 전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지쳐 있는 우리를 들뜨게 하는 희소식이 보도되었다. 몇몇 제약업체에서 오랜 연구와 다단계의 임상 시험을 거쳐 코로나 19 백신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12월 8일 영국에서는 91세 할머니가 전 세계 처음으로 백신 접종을 받았다. 우리나라 정부도 4천400만 명이 접종받을 수 있는 백신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오늘부터 모두가 백신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백신의 안정성 확보를 위하여 검증할 수 있는 시간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한다. 다수의 전문가는 내년 중반기 혹은 하반기에 이르러서야 국민 모두에게 백신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깜깜한 어두운 방 안에 비추는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소식이다. 지금이 아니라서 아쉬움은 크지만, 내일을 기다릴 수 있는 희망을 주고 있기에 마음은 벌써 설렌다.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에 따라 신자들은 한 해의 마지막 25일 성탄절에 앞서 대림(待臨, 도착을 뜻하는 라틴어 아드벤투스[adventus]에서 유래) 시기를 보낸다. 약 4주의 기간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구세주 예수를 기다리며, 그분을 합당하게 맞이하고자 회개하고 보속(補贖)을 바치면서 거룩한 탄생을 준비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없는 이들이라도 이 기간에 -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함께 - 기다림의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스도교 신자들처럼 엄격한 회개와 보속 행위는 아닐지라도, 어수선하고 들뜬 마음을 잠시 가라앉히고 나 자신을 바라보고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가져 보자. 차분함 속에서 우리가 살아왔던, 하지만 소홀했던 과거의 일상을 되돌아보며 우리가 꿈꾸며 기다리는 내일의 일상을 준비해보자.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것이다.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참는 법을 배우자

사람의 성품은 물과 같다. 물이 한번 쏟아지면 다시 담을 수 없듯이 성품이 한 번 방종해지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 물을 막으려면 반드시 둑을 쌓아 막듯이 성품을 바로 잡으려면 반드시 예법으로 해야 한다. 이 말은 『명심보감』의 「성품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의 첫 구절이다. 인내를 강조하는 말이다. 오늘날 사람들 가운데 참지 못하고 말을 마구 하거나 행동을 마구 하여 자신도 아프고 슬프고 남도 아프고 슬프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사람인들 이런 일이 없었겠는가.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심란하다. 부동산 정책 입안자들이 여러 부동산 정책을 쏟아내는데 집값과 전셋값이 모두 더욱 올라버리고 말았다. 지난주에는 서울 모 지역에서 오른 전셋값에 싸우던 부부가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본인은 높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이 소식은 정말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나라가 어찌 이 지경이 됐단 말인가. 본인들도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등지고, 그 자녀는 또 어찌 살란 말인가. 그들이 결혼해서 몇 년 살다가 이렇게 끝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 일은 누구의 책임인가. 정권을 잡은 이들이 전문적인 시뮬레이션 없이 정책을 만들지는 않았겠지만, 아직 결과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 사회 전반이 예의를 지키고 참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 이어지는 말은 다음과 같다. 한순간의 분노를 꾹 눌러 참으면 백 날 동안의 근심을 면하리라. 참고 또 참아라. 조심하고 또 조심해라. 참지 않고 조심하지 않으면 사소한 일이 큰일 된다. 이 일은 어려서부터 배울 일이고 꾸준히 평생을 실천할 일이다. 내 삶을 돌이켜보아도 분노를 참아서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그리고 화를 내고 후회를 할 때도 잦았다. 결국은 내가 어리석어서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 구절은 시비라는 것이 사실상 실체가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맹자가 사단을 설명할 때,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인 시비지심을 말하고 있는데, 유가의 책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고 하니 다소 의아스럽기는 하다. 어리석은 사람이 크게 화내니 세상 이치 깨닫지 못해서라네. 마음에 화의 불길 돋우지 마오. 귓가를 스쳐가는 바람결마냥 집집마다 장점단점 모두 있고요. 곳곳마다 덥고 찬데 같다네. 옳고 그름 본래부터 실상이 없어 마침내 모두가 부질없다네.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마음이 시비를 가리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고 시비를 가리는 것이라고 이해를 해야 할 듯하다. 이 부분은 불가적인 견해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자장이란 인물이 있다. 아마도 성질이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성품이었던 듯하다. 그러니 자장이 공자께 하직인사를 드리고 떠나며 인생의 지침이 되는 가르침을 구할 때, 공자는 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자장은 이어서 참는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공자가 자장의 물음에 대해 대답해주기를, 천자가 참으면 나라에 해가 없을 것이다. 형제가 서로 참으면 그 집안이 부귀해질 것이다. 부부가 서로 참으면 일생을 해로하게 될 것이다. 친구가 서로 참으면 명예가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참으면 화가 이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공자의 이 대답에 자장은 참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또 물었다. 이 다음 말들은 소개하지 않아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만이 참을 수 있고, 참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로구나라는 자장의 말로 이 이야기는 끝난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원불교 무시선과 사회참여

원불교는 소태산 박중빈(1891~1943)에 의해 세워진 종파이다. 이 원불교가 불교인지 신종교인지에 대해 논의가 있지만, 필자는 원불교가 개혁적 불교의 성격이 강하다고 본다. 박중빈은 1924년 당시 전북 익산군에서 불법연구회라는 명칭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원불교라는 이름은 1947년 그의 제자에 의해서 제시된 것이다. 원불교의 사상에 무시선(無時禪)이라는 것이 있다. 이 무시선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되지 않고 실천할 수 있는 수행법이고 또한 원불교의 사상 가운데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 무시선의 첫 번째 특징은 불교의 계, 정, 혜를 두루 닦는다는 것이다. 계는 도덕적 사항을 지키는 것이고 정은 정신을 집중해서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고, 혜는 지식을 연마해서 지혜를 개발하는 것이다. 원불교에서는 이처럼 계, 정, 혜를 두루 닦는 것이 수행할 때에 상당한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무시선의 두 번째 특징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는 것을 수행의 차원에서 주장한다는 점이다. 원불교의 경전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의(正義)인 줄 알거든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죽기로써 실행할 것이요, 불의(不義)인 줄 알거든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죽기로써 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일을 할 때에 즉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고 계속 끊임없이 노력을 할 것이다. 이처럼 원불교의 사상에서는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도 대의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투표를 통해서 정권이 교체되는 일이 선진국처럼 이루어지고 있다. 그에 따라 사회참여를 하고자 과거 독재정권의 시절처럼 비장한 각오를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비교적 수월하게 사회참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누구나 마음먹으면 어렵지 않게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행동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엄청난 사회적 진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진전 속에 부작용도 동시에 나타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내용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그에 맞추어서 사회적 의견을 내고 행동에 나선다. 이제 우리에게 요청되는 일은 단순히 사회참여만을 미덕으로 삼는 데 안주할 것이 아니고, 더 진전된 형태의 실천이다. 사회참여를 실천할 때에 자신이 주장하는 내용이 진실로 옳은 것인지 성찰할 수 있는 내면의 힘도 동시에 요구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원불교의 무시선에서 사회정의를 실천함을 수행의 차원으로 받아들인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는 내면의 정화를 이루어서 욕심이나 편견 등에 가려진 상태를 벗어날 때 비로소 사회참여가 의미 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한 단계 진전되려면 내면의 성숙을 모색하면서 사회참여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경청(傾聽)의 미덕

올해 초 우연히 아역배우 김강훈이 출연한 공익광고를 보았다. 30초 분량의 짧은 영상이었으나, 그 내용만큼은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그 영상물을 통해 오늘날 다양한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상황은 어느 직장의 사무실에서 벌어진다. 부하 직원은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를 상급 직원에게 보여주며 말을 들어달라고 사정하지만, 그 상급자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내가 너보다 더 잘 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상황은 엄마와 딸 사이의 대화이다. 엄마는 딸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으나, 딸은 엄마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회피한다. 딸에게 엄마의 말은 잔소리였기 때문이다. 엄마의 말을 듣기 싫었던 딸은 끝내 헤드폰을 머리에 끼고 엄마를 외면한다. 공익광고 영상물 속 진행자였던 김강훈 군은 이러한 두 가지 상황을 다음과 같은 멘트로 정리한다. 세상 문제 대부분은 잘 들으면 풀 수 있는 문제. / 말이 통하는 사회, 듣기에서 시작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부와 물질을 추구하는 현대의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양쪽으로 갈라 한쪽에는 부(富)라는 표지판 아래에 다른 한쪽에는 빈(貧)이라는 표지판 아래에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은 눈앞에 마주한 생계(生計)에 대한 걱정으로 시선을 돌려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없다. 반면에 부유한 이들은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 곧 자신보다 어려운 이들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들의 눈은 물질적 부유함으로 가려졌다. 설상가상으로 자본주의 발달은 이기적 개인주의를 종용하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타인은 존중과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일 뿐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경쟁 풍토를 겪으며 홀로 강하게 살아남으려는 방법은 배웠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공동선의 가치보다 개인의 가치가 우선하는 현대 사회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고자 가장 필요한 것을 한가지 꼽는다면 경청(傾聽)일 것이다. 타인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의 말을 들을 때, 사람 사이의 관계는 시작한다. 듣지 않고서는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없고, 그와 공감할 수 없다. 타인과의 공감이 없다면 배려 또한 있을 수 없다. 종교적 절대자와의 관계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절대자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먼저 절대자에게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우리는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한다. 상대방이 말할 기회를 주기 전에 내가 먼저 말을 하기 시작한다. 아니 어쩌면 말하기를 좋아한다기보다 듣기를 싫어하는 것일까? 고대 이스라엘의 현인(賢人)은 말함을 좋아하고 들음에 미숙한 현대인에게 경청(傾聽)이라는 미덕을 가르쳐주고 있다. 인간은 하나의 입과 두 개의 귀가 있다. 말하는 것보다 두 배로 들으라.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코로나와 인류의 공존 가능성

이주일 전 딸아이를 보건소에 데리고 가서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다. 며칠 전부터 감기 증세가 있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사를 받기로 했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집안에서도 2미터 거리두기를 하고, 손을 더 자주 씻고 음식도 따로 먹는다. 양성 반응이 나오면 가족 모두 검사를 받고 격리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젠 이것이 그리 엄청난 일 같지는 않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잘 대처하고 있어 믿음이 가기도 하고, 또 사람들의 우려보다는 큰 피해가 없는 듯하다. K-방역의 성공으로 우리나라는 한때 코로나19 대유행 종식 선언을 앞뒀던 적도 있다. 하지만 몇 곳에서의 대규모 감염사태를 겪으면서 사회적 거리두기 1, 2단계를 왔다갔다하고 있다. 온 국민이 과연 이번 코로나19의 대유행은 언제 끝날 것인지 궁금해하며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있다. 인류사에서 전염병의 대유행은 이따금 있었던 일이다. 홍역, 페스트, 천연두 등은 인류 역사상 희생이 컸던 무서운 전염병이었지만, 인류는 이를 극복해왔다. 인류와 바이러스의 싸움은 늘 있었고 또 앞으로도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가 전염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에게 치명적인 전염병을 없애는 것은 필요하지만, 전염병이 없는 세상에서는 인류도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 지구는 무기물과 유기물 그리고 온갖 세균과 바이러스와 동식물이 공존하는 복합 공간이다. 몸도 온갖 바이러스들과 공존 공생하는 복합공간이다. 질병을 일으키는 각종 세균과 박테리아도 때에 맞추어 인류에게 적응하며 공존하도록 변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류가 결국 멸종하고 그래서 세균과 박테리아는 자신들의 숙주를 잃게 되어 스스로도 멸종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류의 생명과 건강을 파괴하지 않는 게 자신들의 존속에 더 유리한 것이다. 이 사실을 부지불식간에 알게 된 바이러스는 인류의 몸속에서 함께 살며 또 다른 바이러스의 침입을 막아 인류의 생명과 건강을 돌보게 된다. 유럽에서의 전염병 역사에서 결핵 환자가 증가하던 시대 이후 한센병 환자는 감소했다. 이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학자들은 교차면역을 말한다. 즉, 결핵균이 일으키는 면역반응과 한센병 병원균이 일으키는 면역반응이 서로 영향을 끼쳐, 결핵균의 병원체에 감염되면 한센병의 병원체에 대한 저항성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비말로 감염되는 호흡기 감염병은 환자가 건강하게 돌아다닐수록 감염 기회가 늘어난다. 감염 기회가 늘어난다면, 그 호흡기 감염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는 더 많은 숙주와 만나 자기 보존을 강화할 수 있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의 증세가 가벼워지는 쪽으로 바이러스 스스로 도태 압력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 무증상의 건강한 코로나19 감염자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코로나19도 이런 상황에 처해지는 것이 아닌가 기대해본다. 세계적으로 코로나19를 제거할 수 없다면, 결국 함께 사는 길을 갈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병이 다 나쁘거나 제거해야 할 것은 아니다. 현재의 우리도 전염병의 대유행을 겪으면서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마스크를 잘 쓰고, 손을 자주 씻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잘하면서 기다리자. 그리고 조금만 더 참고 이 기회에 자신과 이웃을 돌아보고 책을 읽는 시간을 갖자. 이 기회에 바이러스와 세균도 함께 공부하며 공존과 공생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과연 죄를 숨기고 살 수 있을까?

이스라엘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물 중의 하나가 다윗 왕이다. 이스라엘 국기에 다윗의 별이 가운데 있을 정도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다윗의 이야기 중에 너무도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다.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본 다윗이 그 여인을 불러 관계를 했다. 더구나 그 여인이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전쟁터에서 생명 걸고 전투 중인 여인의 남편 우리야 장군을 불러 집에 들어가게 한다. 오랜만에 부부가 만나 사랑을 나누고 임신하면 우리야의 아이로 꾸미려고 한 악한 계략이다. 그런데 강직한 장군은 자기만 혼자 집에 갈 수 없다고 거부하자 다윗은 상상도 못할 악한 꾀를 냈다. 우리야 장군을 가장 치열한 격전지에 보내 전사하게 한 것이다. 우리야 장군이 장렬하게 전사하자 다윗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장애물을 제거했다고 생각했다. 다윗은 우리야의 장례가 끝나자 그의 아내를 왕궁으로 불러들였고 그의 아내로 삼았다. 모든 것이 다윗의 뜻대로 됐다. 과연 그럴까. 하나님은 다윗의 악한 행위를 보셨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결국 선지자 나단이 다윗 왕에게 찾아와 그의 죄를 엄하게 책망했다. 그때 다윗이 보인 행동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자기의 죄를 인정했다. 다윗은 죄를 감출 수 있는 권세가 있었지만 더는 그의 죄를 가리고자 비열하고 초라한 짓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애통했다. 죄를 지었을 때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죄를 숨길 수 없다. 결국, 다 드러난다.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할수록 더 초라해진다. 자신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 더 많은 거짓을 꾸며내야 하는 과정에서 마음은 더 비참해진다. 그러면서 사람은 비열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이 위대한 것은 오랫동안 감추며 마음의 종양처럼 끌어안고 살았던 죄를 진실로 인정하고 돌이킨 거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이렇게 평가하신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다윗이 완벽했기 때문에 이런 평가를 받았을까? 아니다. 우리와 똑같이 정욕을 따라서 허둥대거나, 자기를 높이고 싶은 마음에 백성을 고통스럽게 했다. 그런데 정작 문제가 생겼을 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진실했다. 자신의 죄악과 허물을 깨달았을 때, 그 즉시 인정하고 돌이켰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죄의 유혹이 워낙 강하고 집요해서 누구도 죄를 이길 수 있다고 감히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죄가 드러나면 감당하기 어려운 대가를 치르는 것이 겁이 나서 감추려 한다. 그래서 다윗처럼 점점 죄가 더 깊어지고 악해진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죄를 벗어날 길이 없다. 어떤 사람은 누구나 짓는 죄를 왜 내게만 가혹하게 비난하는지 불평한다. 다른 사람이 죄를 짓고도 태연하게 사는 것을 부러워할 일인가. 오히려 자신의 죄가 드러나 돌이킬 기회가 된 것을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방귀 뀐 놈이 화를 내는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나라와 사회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그리고 말로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까. 죄를 겸손히 인정하고 돌이킨다면 우리 사회가 죄와 맞설 힘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어느 교과서보다 값진 교훈을 남길 것이다. 안용호 기흥지구촌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조선시대 미륵신앙과 대선후보

미륵은 다음 생(生)에 부처가 될 것이 정해져 있는 존재이고 현재에는 도솔천에 머물러 있는 존재이다. 미륵은 이 세상이 번뇌로 물들게 되면 다시 내려와서 불교의 가르침을 편다고 한다. 여기서 시야를 확장하면 미륵은 메시아 신앙에 포함된다. 메시아라는 말은 구원자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 신앙의 유래는 조로아스터교에서 시작하였고, 이것이 유대교에 영향을 미쳤고, 그것이 기독교에도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구체적 내용에서는 일반적 의미의 메시아 신앙과 미륵신앙이 완전히 부합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큰 틀에서는 같은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미륵신앙이 한반도에 전해내려오자, 여러 설화가 미륵신앙과 관련해서 등장하고 미륵에 관한 이론적 주석서도 출현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접어들면 미륵신앙은 그 이전 시대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미륵신앙이 민간신앙과 더욱더 결합한다. 고려시대의 미륵신앙에서도 미륵신앙과 민간신앙은 어느 정도 결합하고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불교가 공식적으로 탄압을 받자 미륵신앙은 더욱 민간신앙과 한 몸이 되어갔다. 그래서 서민들은 조형미를 갖추지 못한 돌을 미륵이라고 보고 자신의 소원을 비는 행위를 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미륵에게 아들 얻을 것을 빌기도 하고, 또 마을을 수호하기 위해서 미륵에게 정성을 다한 마을도 있었다. 게다가 유교의 유생들도 과거에 합격하고자 미륵에 소원을 빌기도 하였다. 이처럼 미륵은 조선시대에 불교가 쇠퇴하자, 거꾸로 민중과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러면서 민중에 널리 퍼진 미륵신앙을 이용해서 반란을 모색한 사건도 발생하였다. 자신이 미륵의 예언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사람을 모으고 군사를 일으키려는 사건이었다. 황석영의 대하소설『장길산』의 일부 내용도 이러한 종류의 미륵신앙과 관련이 있다. 많은 사람이 미륵신앙을 수용하였기에 이제 역설적으로 그 미륵신앙을 이용해서 조선조왕조를 무너뜨리려는 혁명의 이념으로까지 활용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차기 대선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여당 내의 유력한 후보가 계속 여론조사 1위를 달리더니, 최근에는 새로운 후보가 1위를 탈환하였다. 정치의 영역에서 볼 때, 미륵은 차기 대통령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제대로 된 미륵, 곧 좋은 차기 대통령을 알아보고 지지하는 일이다. 조선시대에 일어난 반란의 미륵신앙처럼 잘못된 인물을 올바른 인물로 착각해서 지지해서는 곤란하다. 사이비 미륵이 등장하면 국민의 엄정한 심판을 받기를 강력히 희망하며 아울러 제대로 된 미륵이 출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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