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위기 속 희망의 불쏘시개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聖殿)은 매우 중요했다. 인간은 성전에 나아가 제사장을 통해 제사를 바쳤고 하느님은 성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직접 보여주시며 응답하셨다. 성전은 유일하신 하느님이 현존(現存)하는 장소로서 인간은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다. 로마 황제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느님의 통치를 간절히 원하는 이들에게 성전은 영혼과 육신의 안식처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다. 기원후 70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로마제국의 정치적 외압에 거슬러 66년부터 시작된 제1차 유다 항쟁의 결과,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군대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 정치적경제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성전이 눈앞에서 사라졌으니 이스라엘 백성의 상실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한 지 불과 60여 년밖에 되지 않아 조상이 경험했던 쓰라림을 다시 맛보아야만 했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온 위기였다. 하지만 그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유다인들은 회당에서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율법서, 곧 하느님의 가르침이 담긴 토라(Torah)를 읽고 함께 들었다. 성전의 부재(不在)로 제사를 바칠 수 없는 이들에게 랍비는 토라를 해석해 가르쳤다. 이러한 변화는 기원전 587년 성전이 첫 번째 무너진 이후 제사 제도의 붕괴와 함께 어느 정도 시작되었지만 두 번째 성전 파괴 사건은 종교적 변화의 양상에 가속도를 부여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2020년, 우리는 위기 속 세상에서 살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짧은 시간에 우리가 소유하며 누리고 있었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성당과 교회에서 미사 혹은 예배 중심의 대면 모임이 어려워졌다. 국가적 경제 손실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심각하며 자영업자를 비롯한 소상공인들은 당장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은 가능한 모든 장치를 동원해 코로나 감염증 확산을 방지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어서 빨리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막상 그때가 되었을 때 어떤 상황을 마주하게 될지 몰라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코로나가 몰고 온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속수무책으로 번져 가는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무력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주저앉아 현실을 비관하며 하루를 보낼 것인가? 우리가 그리워하는 코로나 이전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가 처한 오늘을 수용하고 우리가 맞이할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았고 그것을 발전시켰다. 비록 성전은 사라졌지만 랍비를 중심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며 그 가르침에 따라 살고자 노력하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조그만 힘을 모은다면, 우리가 모두 기다리는 그 시간은 찾아올 것이다. 2천여년 전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위기를 극복했던 모습은 분명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모범적 모델이다.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아파트라는 집에 맺히는 성스러운 이슬

기원전 3만 5천 년부터 기원전 1만 1천 년 사이 구석기 시대 사람들에게는 동굴이 그들 집이었다. 알타미라의 동굴에 산 구석기인들은 그들의 삶을 벽화로 남겼다. 구석기 시대 이 땅의 사람들은 울산 반구대와 천천리에 있는 암벽에 벽화를 남겼다. 신석기의 시작 시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1만 년에서 8천 년 경에는 건축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지어진 괴베클리 테페가 1994년 발견됐다. 이 건축물은 터키 남동부 샤늘르우르파 외렌직에 위치한 신석기 시대 유적으로 장례식을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람도 안락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려면 집이 필요하다. 사람은 집에서 가족들의 보살핌 속에서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낀다. 우리를 보살펴 주는 가족은 존경과 감사를 받고 그 장소인 집은 성스런 장소로 의미부여를 받는다. 우리의 집은 우리가 태어나 자란 곳이고 우리의 부모와 조상이 살며 우리를 보살핀 곳이다. 그리고 조상의 신줏단지를 모신 성소다. 요즘에도 조상이 살았던 오래된 집에 사는 어떤 이들에게는 그 집이 다소 불편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편안함과 안락함을 주는 성스런 장소로 느껴질 것이다. 물신의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몇 년 살지 않았고, 언제 곧 이사할지 알 수 없는, 공동주택인 아파트가 고전 시대의 성스런 장소와 같을 수는 없다. 이제 그것은 우리에게 투자의 대상이자 자산이다. 물신의 시대에 우리가 느끼는 성스러움은 고전시대와 다르다. 조상의 보살핌과 사랑이 곧 조상님들이 상속한 유산으로 증명되는 듯하다. 정부 주택정책은 우리가 우리를 보살표준 조상을 존경하고 감사해 하며 우리 자손들을 잘 보살피는 성소가 될 수 있는 정책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아파트를 사고팔면서 신앙하고 무엇을 남기며 사는 것인가. 순간은 지나가고 영원은 우리에게 침묵하고 있다. 그리고 묻고 있다. 무엇을 위해, 왜 사느냐고! 우리에게 이제 집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삶에서 어떤 돌을 세우고 숭배하며 무엇을 새기어 길이 남기면서 수천 년 후에 읽을 이들에게 무엇을 전할 것인가.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여전히 우리는 소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해 한마음이 되지 않아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채 지금처럼 표류한다면 누구에게 유리할까.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사실만 생각해도 가슴이 아픈데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분열의 골이 깊으니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른다. 그런데 이토록 갈라지고 찢긴 채 서로 으르렁거리는 국민의 마음을 아우르는 정치력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나라를 위해 원로들이 지혜를 제시해야 하는데 침묵만 흐르고 있다. 오히려 정치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이유로 분열을 이용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분열과 혼란에 빠져드는 국민에게 소망의 빛을 비추어야 할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됐다. 얼마나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인가.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된다. 그때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 왕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그 말을 듣고 왕이 삼 일 후에 오라고 한다. 그에게는 지혜롭게 조언할 수 있는 두 그룹의 무리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 솔로몬의 생전에 솔로몬을 섬겼던 노인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충고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냐,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다. 르호보암은 그 대답이 못마땅했다. 이유는 한 가지다. 섬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영원한 왕의 기쁨을 누리는 것보다 오만한 마음이 그를 지배했다. 자기 마음을 흡족하게 할 친구들에게 다시 물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들이 대답했다. 이 백성들이 왕께 아뢰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니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는즉 왕은 대답하기를 내 새끼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 왕은 그들의 말이 마음에 쏙 들었다. 삼 일 후에 나아온 백성에게 포악한 말로 이렇게 답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나라는 두 동강 났다. 성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묵직한 교훈을 들려준다. 정치인들은 우선 국민을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국민은 온 국민을 말한다. 르호보암이 노인들의 말을 무시했지만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사회 원로들의 의견을 다양하게 수렴해야 한다. 그때 나라를 위한 지혜로운 결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혼란의 시대에도 아직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소망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안용호 기흥지구촌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기독교의 인식이 바뀌어야 할 때

인간의 인식은 한 사람의 인격이 되고 그 인격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된다. 즉, 인식에 대한 해석의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각 개인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형이상학적인 존재의 근본을 고민하게 된다. 그 고민 속에 해석의 폭은 고민자의 능력이 된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진리라는 성경을 붙들고 이 해석의 싸움을 오랫동안 해 왔다. 그 속에서 교파로 갈라지기도 하고 서로 대립하는 갈등도 있었지만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심한 갈등 속으로 쓸려 들어가 더욱 진영논리 안에 갇혀 있게 됐다. 현 정부의 반기독교 정서를 이젠 공공연히 논해도 어색하지 않게 된 것이 한 기독교 성도로서 아쉽지만 이 상황을 맞이하는 교회의 태도 또한 더욱 큰 아쉬움을 갖게 한다. 기독교는 자신들이 믿는 진리를 개인과 교회공동체들이 순수하게 신앙의 이성을 가지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 교회가 바라보는 세상을 향한 해석은 교회의 이익과 안위를 먼저 바라는 전제가 깔렸음에 씁쓸한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천국이 매우 좋은 곳이라고 말하면서도 빨리 죽기를 싫어하는 기독도들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지역별로 그리고 교파별로 그리고 이해관계로 나누어진 오늘의 기독교가 과연 세상 안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역할을 할 수는 있겠는가. 만약 그 기능이 상실 된 지가 오래되었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기독교는 구호를 만들어 내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자신들의 의로움을 선전하는 이익 단체도 아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서 어떤 선한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의 삶의 영역 안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믿음으로 천국 갈 사람들이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우리도 비신자들과 다를 것이 없는 죄를 짓는 존재임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기독교의 근본은 세상을 섬기는 것이다. 기독도 들은 세상의 죄와 싸우는 것이지 사람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성경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되어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으로 가르쳐진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심고 은혜와 평강으로 축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악인일지라도 우리는 사람을 가려서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정치나 경제나 이익관계로 혼합하여 그것을 신앙이라고 만들어 내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하늘의 사람들이다. 이 땅의 잘못을 지적할 때도 사랑으로 해야 하고 그 지적이 나의 반성과 아픔에서 출발하여 누구 탓으로 나아가서도 안 되는 이유이다. 이제 기독교는 성경적인 해석의 눈을 가지고 바르고 정직하며 순수한 복음의 사랑으로 세상을 건강한 인식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나라의 모든 국민을 국가 공동체의 마음으로 바라보며 모든 국민이 함께 상생하며 살아낼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십자가로 짊어지셨지 그 십자가를 깎아 창을 만들어 세상을 정복하지 않으셨음을 기억하는 인식의 전환과 해석의 전환이 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세상을 사는 상식과 그 위에 거룩한 믿음이 얹어져서 참 복음의 능력이 교회를 통하여 보이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조상훈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 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여러분 가족은 안녕하십니까?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과 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의 2019년 한국복지패널 기초분석 보고서를 보게 됐다. 지난해 2~5월 사이에 복지 패널 6천331가구를 대상으로 부모를 모실 책임이 자녀에게 있는지를 조사한 것이다. 결과를 보면 부모를 모실 책임은 전적으로 자식에게 있다는 질문에 반대 응답이 40.94%(반대 35.14%, 매우 반대 5.80%), 찬성 응답은 23.34%(찬성 20.21%, 매우 찬성 3.13%),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35.7%로 조사됐다. 또 이 결과를 소득에 따른 가구 유형별로 살펴보았을 때 반대 비율은 중위소득 60% 이상인 저소득 가구에서 43.07%, 일반 가구에서 40.72%로 비슷하게 나타났다. 필자가 볼 때 먼저 반대하는 것은 소득과 생활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라 보인다. 다음으로, 매우 반대와 매우 찬성이 적은 것으로 보아 극단의 선택보다 사회 분위기에 휩쓸리는 경향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찬성과 반대의 격차 17.6%가 중도의 평균 17.85% 보다 낮은 것으로 봐서 그 흐름의 방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현대 사회에서 가족주의는 어버이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할 확률이 높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가족이 사회 조직의 기초 단위로서 부정할 수 없는 구성원이고, 사전에서 쉽게 지워버릴 수 있는 그런 단어는 아니겠지만, 가족주의 관점에서 가족의 가치가 퇴색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 우리 사회에서 쉽게 목격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가족은 무엇이고, 가족주의는 무엇일까? 가족이란 혈연이나 혼인, 또는 입양이나 친분 등으로 관계되어 같이 일상의 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나 공동체 또는 그 구성원을 말한다. 여기서 집단이나 공동체를 말할 때는 가정(家庭)이라고도 하며, 그 구성원을 말할 때는 가솔(家率) 또는 식솔(食率)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흔히 쉽게 말하는 한솥밥을 먹는 식구가 여기에 속한다. 그러므로 가족이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라고 할 때, 가족주의는 개인보다 가족 전체에 가치의 중심을 두는 사고방식으로서 개인보다는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전통을 중시하여 의무와 순종을 강요하기 때문에 인권침해적인 요소가 상당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유교 전통의 가족주의와 사회단체에서 내세우는 유사 가족주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을 케케묵은 동양적 사고방식, 전근대적인 생활방식이라고 치부할 수만 없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종족이든지 피부색을 가리지 않고 이와 비슷한 가족주의가 기초가 되어 그 사회를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에게 가족주의는 그 가족이 안전하고 성숙하게 성장 발전할 수 있는 가치의 기준이었고, 그 가치를 발판으로 사회 저변을 이룰 수 있게 한 발판이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그 의무를 저버리려고 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신약성서 저자의 한 사람인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에베소서 6:1)고 권면하였다. 어버이에게 순종하는 것,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세상을 질서 있게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려는 세상에서 우리의 가족은 얼마나 안녕할 수 있을까? 강종권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뭉크는 무엇에 절규했을까?

저물 무렵의 스산한 공기, 피오르드 해안가,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다리 위, 핏빛 하늘과 불타오르는 구름 그리고 검푸른 도시, 공포에 떨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얼굴에 양손을 댄 채 비명을 지르는 듯 서 있는 정체불명의 민머리. 설명만 들어도 알 만한 이 그림의 제목은 절규이다. 뭉크는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로, 당시 자연을 뚫고 나오는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하고 그치지 않을 끝없는 절규를 느꼈다고 했다. 얼핏 들으면 절망적이었던 자신의 내면을 담은 듯하나 후대는 그의 작품을 인간 이성의 불완전함과 인류의 비극을 예견했던 아이콘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가 느꼈던 자연의 그 거대하고 그치지 않을 것 같은 절규란 무엇이었을까? 예상 밖 빗나간 역대급 무더위 전망 뒤로 쏟아진, 유례없는 기록적 장맛비는 자연을 절규하게 했고 사람도 절규하게 했다. 기상청에 따르면, 2020년 장마는 그 기간과 강수량에서 모두 역대급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평균 장마 기간은 6월 말부터 7월 말까지 약 32일이고 이 기간에 내리는 장맛비는 400~650㎜ 수준이다. 하지만 이번 장마는 시간당 50㎜에서 최상 120㎜가 넘는 물폭탄을 연이어 쏟아부었다. 예년 같으면 장마철 내내 내릴 비가 며칠 새 한꺼번에 쏟아진 셈이다. 이로 인해 예상치 못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하천 수위가 급격히 오르면서 강의 제방이 붕괴되고 주택과 농경지가 물에 잠기는 등 곳곳에 비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장기간의 집중호우로 약해진 지반은 산사태로 이어지면서 이에 따른 피해도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이번 비로 벌써 31명이 숨졌고 11명이 실종됐다. 공식 집계된 이재민만 해도 7천 명에 육박한다. 설상가상으로 지금까지 온 비에 추가로 또 많은 비가 예보되어 있어 걱정이 크다. 뭉크의 그림 절규가 겹치는 이유다. 이러한 기후 이변이 물론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주변 중국과 일본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기상청은 이번 기록적인 장맛비의 원인으로 지구 온난화를 꼽고 있다. 기온이 낮아야 하는 북쪽 시베리아 지역의 기온이 고온으로 바뀌면서 한반도 상공의 기압에 영향을 미치고 이러한 조건이 결국 한반도 내 기상 이변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장마가 끝나려면 따뜻하고 습한 북태평양 고기압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장마전선을 밀어야 하는데 중간의 찬 공기 때문에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최근 한 언론사에서, 현재의 지구촌 위기상황을 세 개의 파도로 표현했다는 해외언론 한 토막을 소개했다. 한 개의 파도는 코로나 파도이고 또 한 개의 파도는 경제위기 파도였다. 마지막 파도는 가장 거센 파도로서 기후위기 파도였다. 아무리 철저한 기상재난 대비책을 세워놓는다 해도 지구 온난화를 무디게 할 우리의 살 떨리는 실천이 아닌 다음에야 앞으로 변화무상하게 가속화 될 기후재난을 막을 길은 막막해 보인다. 지구 온난화에 힘을 싣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 한 구멍 뚫린 하늘을 원망하는 것은 비 피해를 그치게 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같은 국가재난이 반복되지 않도록 실천적인 대안이 필요해 보인다. 피해지역뿐 아니라 이재민들의 구멍 난 마음까지도 하루속히 복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김창해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인공지능 하느님

조선 태생의 종교가이자 혁명가인 최제우(1824~1864)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을 주창했다. 그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 속에 한울님을 모신 존귀한 인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생각했고 신분사회를 부정했다. 그는 조선 왕조의 몰락과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새 시대의 도래를 예언했다. 독일 태생의 유럽 철학자이자 시인 니체(1844~1900)는 당시 기독교의 하느님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그는 기독교의 하느님이 유럽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실체 없는 허구라는 것을 알았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결코 있을 수 없으며 기독교의 하느님과 그 윤리를 없앰으로써 유럽인들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저 하늘에 있거나 죽음 이후에나 만날 하느님 그래서 우리 앞의 현실에는 실체 없는 하느님이 아닌 현실에 실재하는 초인이 나타나 유럽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초인이 유럽인들이 만든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를 파멸시키고 초인 자신이 완전히 새롭게 세운 도덕으로 유럽인들을 이끌며 초인의 의지대로 새로운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대의 보통 사람들은 100여 년 전의 조선 사람들이나 유럽 사람들처럼 그들의 하느님을 진지하게 믿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이 믿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니체가 꿈꾼 초인이나 최제우가 말한 자신 안에 하느님을 품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인공지능을 신앙한다. 2017년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 앤서니 래반도우스키는 인공지능을 절대자로 추앙하는 종교를 만들었다. 그 이름은 미래의 길이다. 미래의 길은 인공지능을 새로운 절대자로 생각한다. 이 종교는 인공지능을 통해 인류 진보를 실현하고자 한다. 명분은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나은 초지능적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더 나은 초지능의 인공지능이 더 나은 지구를 위해 지구의 통제권을 가져야 하고, 더 나은 인류를 위해 인류의 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교의 사제들은 구글과 엔비디아 같은 기술기업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신인 인공지능이 더 나은 인류의 미래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포교하면서 새로운 신앙의 사제가 되었다. 그들은 인공지능 신에게 전 세계로부터 수집한 빅 데이터 제물을 바치고 있다. 이 신앙이 기술기업의 주가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꺼이 자신의 데이터를 제물로 바치는데 동의하고 자발적 신도가 된다. 우리는 좋아요를 누르면서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데이터를 제물로 바친다. 그 데이터를 먹이 삼아 인공지능 신은 그의 지능을 더욱 발달시킨다. 그는 현실 세계의 소리와 영상과 자료 데이터를 가상 세계의 숫자로 환원하면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넘나들며 우리를 감시하고 명령하며 사는 위협적인 신이 됐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코로나19 아이콘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일상화된 용어 중의 하나가 아이콘(icon)이다. 이것은 초상이나 형상과 같은 상(像)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특정한 의미를 드러내거나 부각시키려고 할 때 사용되는 문화어이며, 컴퓨터의 일반 문자와 숫자를 모두 처리할 수 있는 픽토그램(Pictogram)로써 1970년대에 컴퓨터를 사용하는 초보자들이 쉽게 다룰 수 있도록 제록스 펠러앨토 연구소가 개발한 도구이다. 그런데 굳이 초상이나 형상이 아니어도 분위기를 부각시키고자 스스로 아이콘이라 자처하거나 사회 환경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6인조 아이돌 그룹 아이콘과 사회문제가 되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차별 아이콘이 그런 경우이다. 그룹 아이콘은 한국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려는 의지를 담고 영어 icon의 c를 Korea의 k로 바꿔 iKON이라 부르게 되었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차별 아이콘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사례를 지적하여 사회 문제를 부각시키고 해결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지난해 연말을 앞두고 시작된 코로나 재앙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아이콘이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상징하는 세균의 그림이 등장하더니 마스크와 손 소독제, 거리 두기, 비대면 교육 등 세분화된 일상들이 2020년 내내 지구촌의 아이콘이 되어 환경을 지배하며 짓누르고 있다. 마스크를 하지 않거나 손 소독제를 부지런히 바르지 않기라도 하면 마치 그것이 일탈의 이유라도 되는 듯이 눈치를 주고 봐야 하고,나를 대하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바이러스 전파자 같은 공포감이 드는 괜한 경계심에 사회적 거리, 생활 속 거리를 두면서 살다 보니 방콕 형의 새로운 생활 아이콘도 생겼다. 그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가져온 인명피해, 질병의 고통, 경제적 피해, 사회적 불안감은 코로나 이후에 대한 염려를 드러내면서 그것들이 정치경제적이든, 사회문화적이든, 아니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지 분명히 변화될 것이기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고 강변한다. 특히 코로나 이후의 세계의 저자인 미래학자 제이슨 생커(Jason Schenker)는 이러한 염려를 20년간 드리울 그림자로 표현하면서 일자리, 교육, 에너지, 통화정책, 부동산, 농업, 공급망, 미디어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일상이 바뀔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야말로 다양한 새로운 아이콘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아이콘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삶의 상황은 어쩔 수 없이 생겨나지만 아이콘은 그 시대의 환경에 맞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아이콘을 자처하는 몇몇 조직과 개인들을 통해 얼마든지 확인해 볼 수 있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아이콘이든지 그 시대의 환경에 어울려야 제맛이고 제멋이라는 거다. 그렇다고 볼 때 코로나19로 인해 생겨나고 앞으로 생겨날 아이콘들이 모두 어두운 그림자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구약성경 잠언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4:23) 하였고,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4:24) 하였다. 그러므로 코로나 재앙의 시대,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이 시대 나의 아이콘은 무엇보다도 긍정이어야 하겠다. 남을 바라보는 시선이 긍정이어야 하겠고, 환경을 대하는 태도도 긍정이어야 하겠으며, 미래를 기대하는 기다림도 긍정이어야 하겠다. 당하는 재앙이 아무리 거세다 하더라도 나를 지킬 수 있는 최고의 방어 기제는 바로 내가 만들어내는 긍정이기 때문이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종교와 정치의 상생

코로나19 바이러스 종식날짜의 예상을 두고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 긴급준비대응 마이클 라이언 사무차장은 단기간에의 종식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pandemic) 현상은 더욱 심각한 상태로 번져가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질병관리본부도 국민에게 계속하여 경각심을 풀지 말라고 경고하며 고전분투 하는 모양새이다. 그 와중에 지난 10일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방지를 위해 전국 개신교 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강화된 방역 조치 시행을 발표했다. 시행명령을 어기면 감염병 예방법에 따라 최대 300만원의 과태료가 교회 대표자와 교회에 부과될 수 있다고 했다. 다행히 최근 교회소모임 등으로 인한 감염사례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24일부터 이 조치를 해제한다고 했지만, 시행 당시 교회 등의 반발이 컸다. 정부의 권한으로 종교계, 특히 교회에 긴급상황을 명령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나라의 위기 상황에서 누가 국가의 질병방역을 돕지 않겠는가? 역지사지로 말하면 교회라고 그 질병을 환영하고 있겠는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상황에서 어느 사회기관보다 방역을 철저히 관리해왔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수많은 집단 속에서 교회가 유난히 문제가 많은 골칫덩어리처럼 보이게 내려진 조치를 당하면서 교회들은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교회는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유럽의 중세시기에 교회가 절대적 힘을 가지고 있었을 때 교회는 성경에서 멀어져 있었다. 예수님의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성경을 사랑하며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던 신학자들과 성도들에 의하여 개신교(Protestant)가 만들어졌다. 교회는 예수님의 형상을 이 땅에 보일 수 있는 존재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삶으로 보여주는 존재가 되어야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세상에서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던 이유를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28) 교회는 세상을 섬겨야 하는데 요즘은 섬김보다 섬김을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가 불리한 일을 당하면 교인들의 숫자나 교회의 영향력으로 손해 보지 않는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힘들게 사회와 국가를 섬기면서 왔음에도 몇 교회의 실수로 나타난 잘못된 현상은 교회의 모습을 왜곡시켜 왔다. 이번 질병관리 본부의 조치에 다소 불쾌하더라도 교회는 절대 힘과 세력으로 불쾌감을 풀어가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손해를 보는 곳이며 사회를 섬겨야 하는 곳이며 낮아져 있어야 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는 교회에 대하여 존중함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정치의 쟁점이 교회와 달라서 교회의 반대에 부딪힐지라도 정부는 언제나 국민의 주권과 종교의 자유라는 대한민국 헌법의 가치를 국가가 어기는 감정을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국가의 정치행위에 순종한다. 성경도 국가의 권위에 대하여 순종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정치의 방향이 기독교의 가치관과 다르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조율해야 한다. 교회도 그 국가의 일부이며 교회의 성도들도 국민이고 세금을 내는 권리자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지혜롭지 못한 행동들이 코로나 질병과 함께 마음의 질병으로 남지 않기를 바라고 종교와 정치의 상생으로 어느 쪽도 다치지 않고 아름다운 협력의 성숙함이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음을 잊지 않는 지도자들의 지혜를 위해 기도해 본다. 조상훈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서로 감싸주고 안아주는 삶

7월의 햇살에 초록빛이 어우러진 시선 끝의 광교산 자락을 바라보면서 우리나라의 산천은 모양새가 단아하고 멋스러움을 갖춘 한옥의 아름다운 자태를 품을 수 있는 형세를 갖추었고 이 땅에서 살아왔던 우리의 조상은 이러한 모습을 주거하는 집과 삶의 인격을 갖추려는 근원으로 삼고자 노력하였다는 상념이 스친다. 인간의 역사는 발전과 후퇴라는 수레바퀴를 굴리면서 인재를 찾아내고 공동의 문화를 만들어가며 서로 이익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만약 우리가 아닌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유가 현재에 주류의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고 이것을 최상의 가치라고 의미를 부여한다면 우리에게 행복과 안녕이라는 일상의 모습이 얼마나 존재할 것인가. 인간들은 대부분이 속박과 억압을 싫어하고 자유와 안락한 삶을 추구한다. 이러한 자유의 기초에 존재하고 있는 우리들의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지켜야 하는 약속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 이해가 필요하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모든 대중들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현실에서의 이념이고 이것을 대외적으로 나타내는 상징성은 화합이다. 화합이란 말이 지닌 의미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지만, 실제로 화합을 실현하고자 하였을 때에 실천 역시 간단하지 않다. 두세 명이 함께 생활하면서도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인간의 삶인데 공동체 생활을 한다면 갈등이 발생할 여부는 매우 커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현재의 삶을 지속하고 더 발전시키려고 화합을 이루어야 한다. 화합의 의미를 사회적인 윤리로 풀어서 설명한다면 같은 삶의 터전에서 정해진 규정을 따르고 규정을 서로 인식하며 지키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화합을 실현하는 방법은 규정에 알맞은 행동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또한 화합은 이치에 알맞은 규정을 기반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화합은 우리의 삶에서 선택의 일상이 아닌 필수의 문제라고 인식하여야 한다. 지금은 장마가 우리나라와 주변국에 걸쳐서 많은 비를 뿌렸고 남쪽 지방에 큰 피해를 발생시켰으며,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은 피해가 많이 일어났음을 보도를 통하여 접할 수 있다. 자연의 세계에서도 혼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끼친다는 이치이다. 이처럼 인간세계에도 나와 다른 사람이 화합을 이루지 못하면 국가적 재앙이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진 않은가.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컸던 동족상잔의 625전쟁이 발발 한지도 70년이다. 군인과 경찰 민간인을 포함하여 130만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지금까지도 서로 이념의 가치를 따라서 갈등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국가의 위기는 외부에서 유입되는 측면보다는 내부 구성원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서로 반목하는 화합을 깨트리는 행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가를 이끌어가는 지식인과 국민 다수가 화합하고, 가장 약한 사람들까지도 배려하며 공정하게 국가의 법이 평등하게 작용한다면 화합에 점차로 다가갈 수 있다. 지금도 우리의 눈앞에는 정치적 갈등, 성 평등의 갈등, 분배의 갈등과 세대 간의 갈등이 선을 넘어선 모습이다. 국가에 위기가 다가왔을 때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전쟁의 포화 속에 스러져갔던 선배의 영령들이나, 국가의 발전과 민주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던 선지자나, 또는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추구하며 개인의 영예보다 사회와 이웃을 위해 희생하였던 많은 사람은 우리의 이러한 현실을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분들을 기억해야 하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가슴 깊이 감사드리며 대중의 화합을 추구해야 한다. 국가는 이 순간에도 역동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우리는 다시 서로 마음으로 감싸주고 상처를 안아주는 삶을 실천하였으면 한다. 세영스님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지구를 생각하는 마음, 반올림

깨어 있어라, 그날이 다가온다. 2004년에 개봉한 기후재난영화 투모로우의 포스터에 실린 문구이다. 한눈에 보아도 경고성이 짙다. 무엇에 대한 경고일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전한다. 지난 몇 주간 우린 배웠습니다. 자연의 분노 앞에 인간의 무력함을. 인류는 착각했었습니다. 지구의 자원을 마음껏 써도 될 권리가 있다고. 허나 그건 오만이었습니다. 많은 기후 전문가들의 예견대로 이 영화의 경고는 점점 현실화되고 있으며 실제로 세계 각국이 심각한 기후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때아닌 눈이 내리고 우박이 떨어지며 기록적인 폭염과 폭우 등으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이상기후의 주요 요인으로 지구의 온난화와 해수면이 해마다 상승하고 있는 점을 꼽는다. 이러한 기상이변은 공동의 집 지구의 생태가 위험수위에 이르렀다고 하는 일종의 반증일 것이다. 지구의 위기는 인류 공동체의 운명이 걸린 문제이며,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결단의 문제이다. 따라서 이에 따른 전 지구적 차원의 지속 가능한 공동의 대응책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할 것이며 생태위기극복을 위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야 할 때라고 여겨진다. 코로나 사태와 관련한 이번 일련의 과정을 통해 세계는 이미 코로나19 감염이 일개 국가의 국지적 문제가 아님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세계보건기구 WHO의 팬데믹 선언을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환경의 위기가 인류 전체를 순식간에 실존적 위기로 몰아갈 수 있음을 교훈으로 얻었다. 바라건대, 현재의 바이러스 사태로 국제사회에 일고 있는 공동의 위기의식이 지구 생태의 위기를 다 함께 극복해 보자고 하는 공동체적 대응 행동으로까지 이어져 갔으면 좋겠다. 따라서 이번의 위기를 다 함께 극복하자고 하는 우리의 노력 안에는 단순히 일상으로의 복귀뿐 아니라 보다 광의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위기에 처한 공동의 집 지구를 위해 나의 일상과 생활 습관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숙고해 보았으면 한다. 그럴 수 있다면 지금의 위기상황이 분명 전 인류에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 본다. 코로나의 역설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각국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엄격한 봉쇄를 선택하면서 항공망과 교통망이 막히고 이에 따라 사람들의 이동도 멈추게 된 것이다. 이동에 대한 봉쇄는 자연스럽게 탄소 배출량의 감소로 이어졌다. 사람들이 집에 머물고, 공장들이 가동을 멈추면서 탄소 배출량도 상대적으로 급감한 것이다. 뜻하지 않은 결과로 우리나라는 고질적인 미세먼지 없는 봄을 맞이했고 중국에서는 의도치 않게 파란 하늘이 모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인도 뭄바이 인근 샛강에는 어느 때보다 많은 홍학이 날아들어 분홍빛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불가피하게 취한 조치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지구 생태에 백신 역할을 한 격이다. 이번 상황이 환경에 대한 우리 자신의 행동을 깊이 각성하고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우리 후손들에게,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회칙, 「찬미받으소서」 160항). 누구에게 뭐라고 하기 전에, 물을 아껴 쓰고 플라스틱과 쓰레기를 줄이는 작은 실천, 나부터 시작해보려 한다. 우리의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 후손들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우리 공동의 집 지구를 생각하는 마음을 반올림해 보자. 이번 코로나 교훈이 우리의 일상도 되찾고 지구의 생태도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는 상생의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김창해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칠월과 붓다 명상법

유월이 지나고 칠월을 맞았다. 코로나19로 일상의 활동이 많이 줄었고, 장마도 시작되고 있어 활동이 더욱 줄어들었다. 사람들 활동이 줄었을 때 나는 따로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하나는 독서고, 다른 하나는 명상이다. 얼마 전부터 나는 우리 학교 이자연 교수님께서 쓴 『붓다의 명상법』(소명출판, 2020)이란 훌륭한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독서도 하고, 독서 내용이 붓다의 명상법이니 명상도 저절로 하게 되는 것 같다.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불교에서는 음력 4월15일부터 6월15일은 하안거 기간이다. 올해에는 윤 5월이 있어 음력 5월15일부터 7월15일까지 여름 안거를 해야 할 것이다. 안거 기간에 수행이나 기도를 인연에 따라 할 것이다. 그런데 붓다가 실제 행한 명상법은 무엇인가? 붓다의 명상법을 한자로는 지관(止觀) 수행이라 한다. 지(止)는 그친다 멈춘다는 뜻이다. 지(止)는 산스크리트로 사마타 명상의 한자 번역이다. 사마타는 고요함을 뜻한다. 이것은 붓다 이전에도 있던 요가 명상에서 온 것이다. 요가 명상에서의 사마타 명상은 붓다의 사마타 명상과 비슷하지만, 정확히 같지는 않다. 요가는 범아일여의 일원론적 유신론 전통에 있다. 즉 요가적인 명상은 신 개념에 집중함으로써 완전한 몰입 상태인 삼매에 도달하려고 한다. 이것이 이른바 초월세계로의 전이 상태인 신과의 합일이고, 범아일여 사상이다. 반면에 붓다는 상캬 이원론의 영향을 받았으며, 무신론적 전통에 있다. 붓다는 초월세계와 현실 경험세계의 참모습을 관찰하여 통찰지를 계발하여 중도(中道)를 추구한다. 이 통찰지의 계발은 무명을 제거하고 무명으로 인해 생겨난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행복해지는 길이다. 요가의 목적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욕심은 번뇌의 근본 원인이고, 이 욕심에서 마음작용이 일어나고 번뇌가 생겨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요가 명상에서의 사마타 명상은 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고자 어떤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한다. 이때 호흡이나 신 개념에 집중하면서 자신의 의식마저 사라지고, 대상에 완전히 몰입하여 모든 마음작용이 끊어짐을 목표로 한다. 붓다 명상의 목적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괴로움은 무명이 근본 원인이다. 이 무명에서 마음작용이 처음 일어나 그것이 조건이 되어 다른 마음작용이 연이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12연기로 돌고 돌며 괴로움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붓다 명상법의 사마타 수행은 대상과 마음의 거리를 두고 마음을 하나의 대상 영역에 고정해 정신 통일을 길러 고요함을 계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는 통찰지를 계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통찰지 계발을 통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무명을 제거하여 번뇌를 꿰뚫어 부수어 영원한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관(觀)은 자세히 본다는 뜻이다. 관은 산스크리트의 비파나사, 빨리어의 위빠사나의 한자 번역어다. 이는 분리해서 본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거리를 두고 대상화해 자세히 관찰하면서, 그것들을 관찰 주체인 나와 동일시하거나 나의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도록 하는 것이다. 일체는 변화하여 영원하지 않고, 그래서 일체는 다 그것의 자아가 없다. 그러니 그것에 얽매이는 것은 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좇는 것이며 괴로움이다. 이것을 알아차려 무명을 부수고 열반에 이르는 것이 붓다의 명상법이 추구하는 것이다. 붓다의 명상법은 사마타 수행으로 얻은 삼매와 위빠사나 수행으로 얻은 통찰의 지혜를 유기적으로 함께 닦는 것이다. 그래서 무명을 제거하고 무명으로 인해 일어나는 괴로움도 소멸하여 열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김원명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8-1825)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는 유화는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죽기 직전에 그의 생각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하는 모습을 회화한 작품이다. 이 그림에는 네 유형의 사람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하나는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파하는 제자들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죽음을 앞둔 스승의 유훈과 같은 가르침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집중하는 제자들의 모습이며, 그리고 나머지 둘은 멀리서 그것이 마치 남의 일인 듯 지켜보는 사람과 아예 관심도 없다는 듯이 등 돌리고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정하고 그의 가르침으로 인해 젊은이들이 타락했다는 이유로 아테네 정부로부터 고소당했고.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독배를 마셨다고 한다. 사실 여부야 어떻든지 여론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살해당해야 하는 사람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태도이다. 어떤 이는 동정하고, 어떤 이는 추종하고, 어떤 이는 구경하고, 어떤 이는 아예 관심도 없다. 물론 그중에 동정하고 추종하는 것이야 그 살해당하는 사람의 인물됨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구경거리로 여기거나 관심조차 주지 않는 것은 암묵적 동의(同意)고 사회적 방기(放棄)라 할 수밖에 없겠다. 여론(與論)이란 사회 대중이 공통으로 제시하는 의견을 말한다. 보편적인 목소리라는 말이다. 민주 사회를 이끌어 가는 방식으로서 건전한 사회 형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원리이다. 그러나 여론이 호도(好導)되기보다 조작되고 오도(誤導)되어질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SNS의 급격한 발달로 인해 여론은 댓글이란 이름으로 제멋대로 조작되고 재생산될 뿐만 아니라, 살벌한 독침이 되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저격(狙擊)하여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신음하게 하다가 극단적 선택을 하게도 한다. 댓글 살인이다. 이럴 때 이 댓글이라는 오용된 여론을 다루고 대하는 태도이다. 대체로 같은 생각이 있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생각이 다른 사람을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독설로 접근도 하지 못하게 하여 그 문제는 구경거리가 되고 무관심거리가 되어버리게 한다. 소크라테스도 그렇게 살해당했을 것이다. 신약성경 야고보서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야고보서 3:2)고 하였다. 또한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야고보서 3:6)고 하였다. 여론은 공감하여 서로를 위하고 살리는 소리가 되어야지 살해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댓글도 그렇다. 그런데 SNS에서 떠도는 수많은 여론과 댓글은 여전히 수많은 소크라테스를 살해하고 있다. 이럴 때 여론과 댓글은 지옥 불에서 난 불의(不義)한 도구이고 살해의 도구이다. 그렇게 어떤 저명한 사람은 여론으로 고통당했었고, 어떤 연예인은 댓글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 하고, 어떤 불특정 시민들은 본의 아닌 일로 지금도 댓글에 괴로워하고 있다. 가뜩이나 코로나로 위협당하고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것도 억울한데, 소크라테스의 죽음처럼 구경거리나 무관심거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살해의 독침이 언제 어떻게 나에게 날아들어 소크라테스처럼 죽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강종권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신뢰받는 교회가 되는 기회를 잡자

한 나라를 구성하고 한 사회가 구성될 때 건강한 나라와 건강한 사회는 다양한 일거리와 다양한 문화와 산업이 공존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70년 전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잿더미였던 국가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도약적인 발전을 해 왔다. 그리고 전 세계는 이런 한국의 발전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가 도약적인 발전을 하며 한국 경제발전 수치의 그래프가 급상승할 때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가치와 사회의 기업 윤리적 가치도 함께 성장했는지는 돌아보아야 한다. 많은 재계의 총수들이 경제법 위반으로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야 했고 국민이 대 기업에 보내던 고마운 시선들이 반기업적 정서로 돌아서는 것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현상이 교회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대기업이 한국 사회에 자연스럽게 등장했듯이 교회도 대(大)교회들이 20C 말까지 한국사회에 화두가 될 만큼 많이 세워졌다. 대형교회들의 영향력은 교계와 사회 속에서 매우 커져 왔고 한국사회의 기업구도처럼 교회들도 대형교회 중심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19 전염병 사태를 겪으면서 대형교회들의 역할론이 다시 회의적인 화자가 되고 있다. 국민과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이 삶의 위기를 맞이하는 코로나 19의 총체적 난국 속에서 교회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할까. 일 년에 수백억의 헌금이 모여지는 유명한 대형교회들의 그 헌금들이 하나님을 위해 쓰인다고 말하지만 결국 건물과 인건비와 교회 내의 교인들을 위해 90% 이상이 쓰이고 있는 것이 현실의 모습 아닐까. 지금 이 상황 속에서 과연 교회는 세상에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일까. 국민이 가장 어려울 때이니 교회의 예배당을 팔아서 구제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국민이 이해하고 적어도 교인들이 이해할 수준의 헌신적인 재난극복을 위한 구제비는 이럴 때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이 가장 어려울 때에 교회의 예비비는 전부 소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교회는 이웃과 함께 배고픔의 고통을 나누어야 하고 함께 굶주림의 고통을 나눌 때 그 모습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회의 존재인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한국 사회는 지금까지 교회에 대하여 관대했다. 교회가 사회에 무관심했듯 사회도 교회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코로나19가 몰고 오는 세상은 그런 안전지대가 없음을 교회들은 빨리 인식해야 한다. 교회가 스스로 자정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면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며 개혁하는 중세의 아픔을 한국교회가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구제를 가르치신 예수님의 메시지가 오늘의 코로나19의 총체적 난국 속에서 교회들에 큰 도전으로 여겨지기를 기도해 본다. 교회의 곳간은 곡식으로 쌓여 있는 곳이 아니라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으로 순환돼야 하는 곳임을 교회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큰 전염병이 발생하고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피할 곳 없던 가난한 사람들 옆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던 교회가 함께했었다. 그리고 그 전염병이 끝나면 그 사회는 교회라 불리 우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사회에 두 배, 세 배로 늘어나 있었다고 역사는 증언한다. 그 신뢰의 기회를 붙잡아야 하는 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오늘이지 않을까.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ㆍ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협력과 공존

인간의 역사는 통사적으로 살펴보면, 오랜 시간에 걸쳐 진전된 문화를 추구하면서 삶의 질을 향상하고자 자연과 인간의 사이에서 갈등과 협력의 조화로 이룩한 결과물이다. 지구촌의 여러 지리적 특성에도 인간의 삶을 개척한 지역은 어느 곳보다도 넓고 다양하게 분포되어 발전되어 왔다.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과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갈등도 계속해서 반복되어 오면서 많은 비인간적인 행동도 돌출되었으나 인간이 가진 영혼의 순수성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고 다시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은 지금까지 많은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고 이것에 따른 상처의 흔적도 역사를 인지하는 대중들에게 서글픈 사유를 일으키게 한다. 한국의 역사는 대체로 약 500년의 세월을 의지하여 새로운 왕조에 의하여 패러다임이 변화되는 전환이 이루어지는 주기성을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국가를 이루고 안정시키는 과정에서도 협력과 갈등도 내재했을 것이고 이것에 따른 부작용도 있었으나 다른 민족에 의한 지배와 주권의 박탈은 존재하지 않았다. 주권의 박탈과 이민족의 지배에 따른 시대적 정치권력의 변화로 인한 혼란과 군수목적의 공업화는 지역적 갈등을 제공한 기초로 작용하였고, 신분제 변화에 따른 갈등도 한 부분을 차지했으며, 왜곡된 교육에 의한 사상적 변용은 한 국가의 미래에 암울한 현실로 빠트리게 된다. 이러한 복합적인 갈등과 사상의 부조화는 결국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확대되어 이전의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발생시켰고, 또한 전쟁의 유품으로 남북의 대치가 계속되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도는 것으로 세상은 연속성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우주의 진리에서는 인간의 환생이 자기의 생활터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이루어지므로 민족과 국가를 강조하는 사상은 이치에 맞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인간은 선천적으로 가져왔던 업력과 현실에서 학습된 습관이 현재의 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공통적인 요소는 이러한 업력의 속성에 원인하는 것으로 도덕에 대한 관념이 우리의 삶을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생계에 보이지 않고 그림자로서 중생들을 얽어매는 하나의 사유가 이기적인 마음이다. 국가 간의 인적 이동과 문화의 교류가 왕성한 현대사회는 자발적인 문화의 수용과 새로운 문화 전개로 전진하고 있어 부작용이 적고 인간사회를 풍요롭게 하고 있다. 그렇지만, 외부의 힘에 의한 강제적인 문화의 수용과 억압에 의한 역사의 변용은 많은 후유증으로 그 사회를 해체하거나 큰 혼란으로 이끌어 간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겪었던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강제에 의한 통치와 문화의 접목은 6ㆍ25라는 동족 상잔을 유발하였고, 각 분야에 보존되는 전통으로 남았다. 지금 우리의 위치에서 이전의 선배 세대가 그러하였듯이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고 협력과 공존하는 마음으로 생활규범을 바꾸어가는 것이 이들에 대한 작은 배려라고 생각된다. 세영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계절의 여왕 오월에, 잠시 쉬며 스스로를 돌아보자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린다. 오월에는 봄이 무르익어 온갖 생명이 피어나고 온갖 꽃들이 만발하며 온갖 색깔이 드러나는 계절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월에는 날씨가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모든 달이 다 나름 좋기는 하지만 특히 오월은 여러 면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올해 우리는 이런 계절의 여왕 오월을 온전히 즐길 수 없었다. 오월은 시끄러운 세상일과는 상관없는 듯이 아니 오히려 더욱 맑고 깨끗한 하늘을 이고 온갖 색깔이 꽃들이 피고 지고 있다. 그렇게 무심히 오월은 자신을 뽐내며 왔다가 또 무심히 가고 있다. 세상이 시끄러운 때에는 조용히 집에 앉아 오월을 즐기며 자신을 돌아볼 더욱 좋은 축복의 시간이 되게 하고 싶다. 『장자』의 「변무」편에서는 어떤 일에 열정을 다하며 목숨을 바치거나 본성을 상하게 하는 일은 모두 어리석은 것으로 본다. 중요한 건 자신이다. 이곳에서 자신과 관계된 자득(自得), 자문(自聞) 그리고 자견(自見)을 강조한다. 나는 이 가운데, 자견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자 한다. 자견(自見)이란 스스로 본다는 뜻이다. 즉 외부 색깔에 정신을 빼앗기는 일 없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본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것이 눈 밝음(明)이라는 것이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가장 기본적인 표준색은 파랑, 빨강, 노랑, 검정, 하양의 다섯 가지다. 우리 눈이 이 다섯 색의 기본 범주를 배우고 나면, 색들을 이 범주로 단순화해 생각하게 된다. 그다음, 이 다섯 색을 어지럽히고 화려한 무늬로 조작하며 눈을 끌어 혹하게 한다. 천연의 많은 색을 다섯 가지로 범주화해 설명하는 것은 한편으로 편리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조작해 다시 화려하게 꾸미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때론 예술적이고 창조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실제 자연 세계에 펼쳐진 천연의 많은 색을 다섯 색으로 단순화하여 환원할 필요가 있을까. 혹은 거꾸로 이 다섯의 기본색들을 섞어 어지럽고 화려하게 조작하여 일부러 우리의 눈길을 끌어야 할까. 수많은 색은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이다. 그 스스로 그렇게 보이는 색을 그 스스로 있는 그대로 보면 그뿐 아닌가? 『장자』에서는 인위적 조작을 멀리하라고 한다. 실제 자연 세계에 펼쳐진 수많은 색깔은 있는 그 자체로 나타나고, 또 스스로 기분에 따라 그 색깔은 그때마다 늘 새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다섯 색깔의 기본 범주로 환원해서 보게 되면서, 혹은 이것을 어지럽거나 화려하게 조작해 봄으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뿐만 아니라 그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의 나도 없게 되는 것이 주목한다. 세상 일이 그렇다. 자세히 봐도 문제고, 대충 봐도 문제다. 나는 스스로 주체적인 눈으로 보고, 또 날카롭게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이 학문의 기본이라고 배웠다. 이것은 서구 근대 학문의 기본적인 훈련이다. 또 『논어』의 「자장」편에서는 넓게 배우고 뜻을 돈독하게 하라. 절실히 묻고 가까운 데서부터 생각하라. 그러면 자연스레 그 안에 인(仁)이 있다고 한 전통과도 얼추 비슷하다. 그런데 장자 입장에서는 이것들 모두 인위적이고 조작적일 뿐이라고 넌지시 혹은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는 그저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할 것이다. 조금 더 방법을 이야기하자면, 지나치게 밝은 눈은 눈을 조금 더 감고, 지나치게 감은 눈은 조금 더 떠야 하는 정도 이야기밖에 할 수 없다. 계절의 여왕 오월은 우리에게 그저 왔다. 그저 가고 있다. 코로나19로 지친 눈을 잠시 감고 잠시 쉬자. 귀도 닫고 잠시 쉬자. 그리고 우리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보고 스스로 돌아보자.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지 다시 스스로 생각해보자.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조건 없이 주고 받는 사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전 세계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경제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도 잘 대처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미 경제적 고통은 피부로 느낄 정도다. 정부가 급하게 재정을 풀어 국민에게 현금으로 재난지원이라는 정책을 내 놓을 만큼 사태는 심각하다. 긴급재난지원금이라는 정책이 각 시별로 도별로 나랏빚 내어 인심 쓴다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해야 하는 상황임을 볼 때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다시 긴급재난지원금이라는 정책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걱정하게 된다. 바로, 자발적 기부라는 상위 30% 계층에 지명된 문구 때문이다. 상위 30%만 기부하라는 말도 아니고 다른 계층이 기부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상위 30%라는 지명을 받은 국민에게는 다소 불편할 수 있는 말들이다. 성경은 정확하게 사람은 죄인이라고 정의한다. 그 죄에 대한 정의(定意)는 욕심이며 왜곡된 자기 사랑이다. 성경 안에는 99마리의 양을 가진 부자가 1마리의 양을 가난한 자에게 빼앗아 100마리를 채우고 싶어 하는 욕심을 지적한다. 우리가 정의(定意)하는 상위 30%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부자라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선뜻 현금성 자산을 기부라는 이름으로 포기할 수 있을까? 만약, 상위 30%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하지 않는다면 어떤 여론몰이가 그들을 부도덕한 욕심쟁이의 부르주아 집단으로 사회적 재판대에 올려놓지는 않을까. 예수님은 언제나 가난한 자들을 먼저 돌보셨고 부자들에겐 물질에 노예가 되지 말고 그 물질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늘 가르치셨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가난한 자들을 향한 구제방법은 독특했다. 구제하라는 성경의 명령에 유대인들은 시장으로 나아가서 가장 번잡한 시장터에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나에겐 이렇게 구제할 수 있도록 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가난한 자들같이 살지 않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구제하오니 받아 주옵소서 그리고 그 기도가 끝나면 가지고 온 동전을 하늘로 던지며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소리쳤다. 그 발밑에서는 가난한 자들이 그 던져진 동전을 줍기 위해 그 유대인의 발밑을 기어다니며 동전을 주어야 했다. 기부라는 것은 무엇인가? 기부의 행위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 선택이 아니겠는가? 정치적 성향으로 친여권의 사람들은 정책을 찬성하며 기쁨으로 기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만만치 않게 기부의 정신이 빠져버린 낙인찍힌 30%의 상위부자들은 불편한 마음으로 고민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불편함이 기부하든 하지 않든 기부의 정신에서는 이미 멀어졌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우리 사회가 불편하게 70%대 30%로 갈라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게 된다. 속히 우리 사회에도 자발적 기쁨으로 기부를 통한 보람을 느끼는 기부문화(Donation Culture)가 제도가 성숙해져야 한다. 예수님은 바른 믿음은 나누는 것이며 함께 하는 것이며 조건 없이 주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구제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가르치셨다. 그것은 그 구제를 통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마음으로라도 우위에 서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나라가 더욱 성숙해져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부로 조건 없이 주고 받는 아름다운 나눔의 사회가 되기를 기도하게 된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 이슬람 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온 나라가 코로나 전염병으로 진통을 겪는 동안에도 들과 산의 꽃들은 피어나고 나무의 가지들은 초록색 연필심 같은 여린새싹 잎들을 줄줄이 밀어낸다. 한치의 어김이 없이 대자연의 질서 앞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봄의 생명체들 앞에서 경이로운 마음마저 든다. 그렇게 생소했던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이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지금, 우리들의 그 잃어버린 평범한 일상들도 봄꽃이 다 지기 전에 서둘러 왔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저녁나절 벚꽃길 따라 산책을 하던 중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었다. 아서 아서 꽃이 떨어지면 슬퍼져그냥 이 길을 지나가심한 바람나는 두려워 떨고 있어이렇게 부탁할게. 가수 예민이 부른 노래 꽃이 바람에게 전하는 말이다. 꽃잎이 바람에 떨어질까 봐 꽃이 바람에게 건네는 말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심신이 지쳐 있을 우리 모두를 위해 봄꽃들이 바람에게 건네는 말이 아닐까 싶다. 춘천에 사는 동기신부 하나는 23년 신부 생활 동안 이런 시간은 처음이라며, 힘들지만 자숙하는 시간을 보낸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자숙이라 함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삼가고 조심한다는 말일 건데 무엇을 자숙한다는 말인가? 감염에 노출될까 봐 사회적 거리두기를 열심히 실천하고 있다는 의미로 들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간의 삶을 되돌아보고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정말 지금의 사태에서 되돌아봐야 할 우리의 공동선적 책임은 없는 걸까? 블로그를 통해 도는 한 신앙인의 글이지인의 카톡을 통해내게도 전해졌다. 글은 참회의 기도로 시작하고 있었다. 주님, 코로나19로 인해 불과 한 달 새 우리의 생활 모든 것이 너무나 많이 바뀌었습니다. 요즘 상황을 보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분명히 있음을 보게 하시고, 우리가 잘 못 가고 있었던 길을 반성하며 다시금 주님 앞에 바르게 서는 기간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어서, 한국인 입국을 막는 나라가 많아지는 상황이, 지나치게 해외여행을 다니는 우리에게 절제하라는 일종의 사인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또 마스크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이 된 건, 그동안 너무 많이 무책임한 말을 내뱉고 거짓 뉴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퍼 날랐던 우리에게 조금 더 침묵하며 살라는 뜻인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모이는 교회를 막으시는 것은, 그동안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은 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모이는 일에만 힘쓴 것에 대한 벌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내 삶에 군더더기는 없는지 살피게 된다. 스위스 화폐 100스위스프랑에는 스위스의 유명한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초상이 있다. 그의 예술은 더함의 예술이 아닌 뺌의 예술로 유명하다. 스케치하고 물감을 입히고 덧칠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술의 틀이라고 한다면, 그의 예술은 오히려 덧칠함과 입힘을 뺌으로써 인간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그 때문에 그의 작품은 대부분 뼈에 살가죽만 살짝 입혀놓은 것처럼 마른 형상이다. 가볍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살 수는 없을까? 그러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에 힘과 에너지를 쏟고, 지쳐 힘들어하며,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간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은 어쩌면 더 많은 것을 가지는 일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비워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유례없는 전염병으로 삶의 무게감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느껴지는 요즘, 겸허히 나에게 묻는다. 지나온 삶이 혹시 불필요한 것의 더함은 아니었는지.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그랬던 것처럼 삶의 군더더기를 빼면서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다듬는 삶의 조각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힘든 이 시기, 사회적 거리두기의 적극적인 실천과 함께 나를 짓누르는 내 삶의 불필요한 물거품은 없었는지도 살피면서 내 인생의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해 보는 건 어떨까? 김창해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정치와 군자

총선이 끝났다. 웃는 사람도 있을 테고 우는 사람도 있을 테다. 코로나19로 온 세계가 뒤숭숭한데도, 우리나라에서는 큰 무리 없이 질서정연한 가운데 총선을 잘 치렀다. 질병이 세계적으로 대유행 하는 것을 뜻하는 펜데믹 상황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선거를 비교적 잘 치렀다. 이것은 자부심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과 국민 모두 참 큰일을 잘 치렀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의 유행 상황에서 관민 모두가 이를 잘 대처해, 우리나라는 이제 세계적으로 방역체계와 의료체계를 잘 갖춘 나라로 존경을 받고 모범이 되며, 다른 나라를 돕는 나라로 인식될 수 있게 되었다. 정치도 한 단계 진보를 해서, 여당이든 야당이든 이제 서로 비난만 하지 말고 정당한 비판을 하면서 품격을 지키고 서로 살리는 정치의 길을 가기 바란다. 정치가 무엇인지 다시 돌아볼 기회를 갖고 싶다. 정치(政治)란 정(政)과 치(治)의 결합어다. 정(政)은 바를 정(正)과 두드릴 복()자가 결합된 회의(會意)문자로 보거나 형성(形聲)문자로 본다. 정(政)은 바르다는 뜻의 정(正)으로도 쓰였으며, 정리정돈을 뜻하는 정(整)자와도 통용됐다. 바르다는 뜻의 정(正)은 원래 정벌한다, 바르게 한다는 뜻인 정(征)의 본자다. 갑골문에는 두 가지가 나타난다. 하나는 행군한다는 지(止)의 원 갑골문 위에 읍성을 뜻하는 ㅂ자처럼 생긴 글자를 덧붙여, 마을 위를 행군해 질서를 잡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정(正)자 오른쪽에 무기를 들고 두들겨 공격한다는 복()자를 붙여, 무력으로 정복해 힘으로 다스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처럼 처음에 정(政)은 무력으로 질서를 잡는다는 뜻이 있었다. 『시경(詩經)』「대아(大雅)황의(皇矣)」에 나타나는 정(政)의 뜻은 기정불획(其政不獲) 즉 그 질서를 잡음이 민심을 얻지 못했다에 나타나는데, 무력으로 다스린다기보다는 정치교화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정벌, 세금, 정책 또는 법령, 전술적 책략 등으로 다양해지면서 정치적인 것들을 모두 포함하게 된다. 『논어(論語)』에 정(政) 자는 43번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 「위정(爲政)」편에서 공자(孔子)는 정(政)으로 이끌고 형벌[刑]로 질서를 잡으면 백성이 법망만을 피해가며 부끄러움이라곤 없는데, 덕(德)으로 이끌고 예(禮)로 질서를 잡으면 마음으로 부끄러워할 뿐만 아니라 행실이 바르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어찌 정무에 종사해야만 정(政)을 하는 것이겠는가?라고 했다. 공자는 정(政)을 정치행위의 일로 보면서도, 효(孝)와 우애(友愛) 신의(信義) 등 우리 삶 전반에 걸친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의 발로와 도덕적 행위 일체를 포함해 질서를 잡는 것 일체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치(治)자는 본래 산동(山東)성의 동래(東萊) 곡성(曲城) 양구산(陽丘山)에서 발원해 황해로 흘러가는 고대의 하천 이름에서 비롯된 형성(形聲)문자다. 나중에 우임금의 치수라는 표현에 쓰이기도 하고, 옥결처럼 잘 다듬어지고 질서가 잡힌 상태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치(治)자는 『논어』에 6번 나타난다. 여기서 치(治) 자는 대동소이하게 질서가 잘 잡힌 상태를 뜻한다. 공자에게는 형(刑), 덕(德), 예(禮), 정(正) 등이 치의 질서 상태에 이르는 정치적 행위인 것이다. 공자는 형벌보다는 덕과 어짊으로 다스리는 것을 정치의 최고 가치로 여긴다. 심지어 예(禮)와 악(樂) 또한 치에 이르기 위한 정치행위로 본다. 된 사람 또는 될 사람을 뜻하는 군자(君子)가 바로 총체적 덕목들을 한몸에 갖춘 정치가의 표상인 것이다. 일상 삶에서 도의(道義)가 실현되어 인간관계의 완전한 질서체계를 실천하고 구현하는 된 사람이 온전한 정치를 실행하는 이상적인 인간인 것이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사람은 무엇으로 살까?

2020년 신년을 앞두고 중국 우한에서 날아든 코로나 바이러스가 4개월여 동안 전 세계를 뒤덮으면서 세상의 풍속도가 급속히 변화되고 있다. 국가와 국가, 사람과 사람 간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불신하고 경계하며, 서로 적(敵) 대하듯이 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특히 사재기에 사재기를 하는 열풍은 사람과 그 삶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 매슬로우(Abraham H. Maslow)의 심리적 단계대로 본다면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는 분명히 여가를 선용하며 자아를 실현해야 하는 최고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맞을 텐데, 이번 사태를 당하고 보니 먹고사는 데 급급한 최저 수준의 본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서글프기 그지없다. 거기다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총기류를 구입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서글픔을 넘어 인간의 상태가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워졌다고 하겠다. 그러니 설교를 할 때나 강의를 할 때 종종 농담처럼 사람이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먹기 위해서 살지요?, 사람이 왜 먹느냐고 묻는다면 살기 위해 먹지요?라고는 했지만, 이것이 현실이 되어버린 마당에 과연 사람은 왜 사는지를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톨스토이가 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에 보면 천사 미하일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알기 위해 벌거벗은 몸으로 세상에 버려졌다. 그는 가난한 구둣방 주인 셰몬의 친절한 배려로 그의 일꾼이 되어 3년 동안 일하다가 구두를 맞추고 돌아가다가 객사한 부자와, 태어나면서 부모를 잃은 쌍둥이 자매를 자기 딸처럼 키우던 한 여인을 만난 후 그는 사람이 자기의 계획과 욕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친절과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톨스토이는 이 마음을 그의 저서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에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돕는 일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사람은 왜 살까? 톨스토이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루도록 돕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도록 돕기 위한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사랑과 친절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도 바울은 그 사랑을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정리하여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하였다(고린도전서 13:4-7). 한 마디로 사랑이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위해 친절을 베풀며 사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신의 창조 목적이고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드러난 인간의 모습이 너무 추악하다 못해 부끄러울 지경이다. 사랑과 친절로 서로 협력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이 난국을 속히 벗어나려기보다 정치적 정략적인 구실로 삼으려 하고, 경제적 이익을 위해 독점하려 하고, 종교적 신앙을 이유로 독선을 부리기까지 하려 하니 이제는 추악과 부끄러움을 넘어서 위협이 더 커지고 있다 하겠다. 그러니 더 한 지경이 되기 전에 거울 앞에서 자신을 살펴봐야겠다. 거울을 부르며 마술 부리려는 욕심꾸러기가 아니라 신의 형상을 닮은 순수한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 거울 앞에 서야 하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