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사람은 무엇으로 살까?

2020년 신년을 앞두고 중국 우한에서 날아든 코로나 바이러스가 4개월여 동안 전 세계를 뒤덮으면서 세상의 풍속도가 급속히 변화되고 있다. 국가와 국가, 사람과 사람 간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불신하고 경계하며, 서로 적(敵) 대하듯이 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특히 사재기에 사재기를 하는 열풍은 사람과 그 삶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 매슬로우(Abraham H. Maslow)의 심리적 단계대로 본다면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는 분명히 여가를 선용하며 자아를 실현해야 하는 최고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맞을 텐데, 이번 사태를 당하고 보니 먹고사는 데 급급한 최저 수준의 본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서글프기 그지없다. 거기다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총기류를 구입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서글픔을 넘어 인간의 상태가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워졌다고 하겠다. 그러니 설교를 할 때나 강의를 할 때 종종 농담처럼 사람이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먹기 위해서 살지요?, 사람이 왜 먹느냐고 묻는다면 살기 위해 먹지요?라고는 했지만, 이것이 현실이 되어버린 마당에 과연 사람은 왜 사는지를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톨스토이가 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에 보면 천사 미하일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알기 위해 벌거벗은 몸으로 세상에 버려졌다. 그는 가난한 구둣방 주인 셰몬의 친절한 배려로 그의 일꾼이 되어 3년 동안 일하다가 구두를 맞추고 돌아가다가 객사한 부자와, 태어나면서 부모를 잃은 쌍둥이 자매를 자기 딸처럼 키우던 한 여인을 만난 후 그는 사람이 자기의 계획과 욕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친절과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톨스토이는 이 마음을 그의 저서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에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돕는 일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사람은 왜 살까? 톨스토이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루도록 돕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도록 돕기 위한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사랑과 친절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도 바울은 그 사랑을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정리하여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하였다(고린도전서 13:4-7). 한 마디로 사랑이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위해 친절을 베풀며 사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신의 창조 목적이고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드러난 인간의 모습이 너무 추악하다 못해 부끄러울 지경이다. 사랑과 친절로 서로 협력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이 난국을 속히 벗어나려기보다 정치적 정략적인 구실로 삼으려 하고, 경제적 이익을 위해 독점하려 하고, 종교적 신앙을 이유로 독선을 부리기까지 하려 하니 이제는 추악과 부끄러움을 넘어서 위협이 더 커지고 있다 하겠다. 그러니 더 한 지경이 되기 전에 거울 앞에서 자신을 살펴봐야겠다. 거울을 부르며 마술 부리려는 욕심꾸러기가 아니라 신의 형상을 닮은 순수한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 거울 앞에 서야 하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고통 속에서 배워야 하는 본질적 진리

요즘 전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은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19이다. 이 신종 바이러스는 모든 세계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사람과 사람의 접촉을 피해야 하는 상황에서 비즈니스든 종교든 정치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안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 죽음의 바이러스 앞에서는 이 땅의 어떤 종교계도 예외일 수 없었다. 교회를 비롯한 모든 종교모임에도 사회적 안전거리가 요구되고 있고 심지어 주일에 모이던 예배조차도 온라인 예배를 요구받고 있다. 교회와 종교계는 이제 새로운 형태의 모임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교회들은 일요일이면 모두 예배당에 모여 잘 준비된 찬양과 이벤트와 화려한 순서 속에서 주일 대(大)예배라는 이름으로 예배를 드렸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랑과 공평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사람 숫자로 대예배와 소예배를 나눌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인간적인 편의상 성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를 대형교회라 부르고 성도들이 적은 교회를 작은 소형교회로 구분한 정신은 이미 현실 속에서는 굳어져 있었다. 코로나19사태앞에서 교회는 크든 작든 이제는 예배형식에도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미디어의 시대 속에서 이미 기존교회들에 실망감을 느끼고 온라인에서 예배를 드리던 성도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교회가 다 아는 현실이다. 좋든 싫든 지금 교회들은 방송예배를 드리고 있다. 대안이 필요했던 교회들은 학교운동장을 이용하여 드라이브인(drive in)예배도 시작하고 요즘의 대세인 유튜브 방송도 예배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 이해되는 예배방법의 변화를 누가 뭐라고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시점에서 교회와 종교계는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한다. 과연 지금 교회가 예배의 방법을 바꾸고 방송장비를 사들여 교회 안에 작은 방송실을 만들어 예배형태를 바꾸는 것에 초점이 있어야 하는가?를 말이다. 성경 사도행전 8장에 있던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 모든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진 것의 의미가 예배의 형식을 바꾸라는 하나님의 의도였는가?를 말이다. 교회가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난 현실을 단순한 방법을 바꾸는 시도로 본질로 돌아가는 있을까? 교회는 큰 건물을 짓고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들여 첨단기술을 도입하고 사회보다 빠르게 문화적인 선도를 하는 기능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교회의 더 큰 강력한 본질은 올바른 믿음을 고백한 성도들이 자신의 생활터전 위에서 신앙을 기뻐하며 세상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품어가는 모습으로 본질이 드러나야 한다. 참된 영성의 경건한 예배는 는 성도들의 자발적인 종교적 기쁨이었다. 교회가 모여드는 성도들의 머리숫자로 힘의 기독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의 시민의식은 섬김이며 신앙의 기쁨을 통한 작고 어려운 사람을 섬기는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코로나19 사태는 말 그대로 재앙이다. 그러나 이 재앙 속에서 교회는 먼저 스스로를 회개하고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는 모이는 교회와 더불어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기능을 이젠 해야 할 때이다. 코로나19를 이기는 힘은 교회가 좌ㆍ우가 아닌 하늘의 기준으로 모두를 품고 사랑하는 이 능력에서 나오는 것임을 우리는 오늘의 현실 앞에서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만 한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 이슬람 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네 덕이고 내 탓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는 특정한 지역을 넘어서 지구촌 전체의 문제로 확산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결국 대유행을 선언했고 세계의 국가들은 자신에게 알맞은 대책을 마련하고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현재 상황을 바라보면 인간이 발달시킨 교통망의 비약적인 발전에 따른 편리성에 비례하여 다른 측면에서 반대급부가 발생하는 현실에 마주하게 된다. 더구나 코로나라는 이 바이러스에 인류는 의학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했고 감염 초기의 무증상 상태에서 상대방에 감염을 시키는 사례는 방역의 어려움과 인간 사이의 불신을 확대하고 있다. 이처럼 불신이 증가하면 이에 따른 상식을 벗어난 다른 대안이 성행하게 된다. 과학 시대에는 통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인식되는 주술과 광기 또는 반지성이 선동하는 집단이기주의 등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파스칼이 말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언어의 상징처럼 우리는 때로는 객관적인 현실을 제쳐놓고 주관적인 이기주의에 빠져들게 된다. 금강경에서 네 가지의 고착화된 인식인 상(相)을 말하면서 첫 번째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상이고 이것을 고집하는 것이 아집이다. 물론 중생은 사유를 자기의 중심으로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은 아집이 이성의 존재를 심하게 억압하면 정상적인 사유가 마비되고 일상생활이 비정상으로 흘러가고 결국은 혼란을 부추기게 될 것이다. 이제 자국의 안위를 보호한다는 새로운 명분이 세계에 유행하고 있다. 감염병에 대한 공포는 세계 각국에 정치ㆍ경제ㆍ의료ㆍ종교ㆍ문화ㆍ교육 등의 인간 세상의 일상을 바꿔놓고 있다. 이러한 여러 혼란이 가중되는 현실에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측면이 있으나, 근원에는 감염병에 대한 공포와 또 다른 중생들이 가진 이기심에 따른 네 탓이라는 사유가 자리 잡고 있다. 그렇지만, 감염병은 항상 우리 곁에서 같이 존재하였으나, 현실에 쫓겨서 인식하지 못하고 생활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어제까지도 그랬고 오늘에도 그러한 것이지만 치명적인 감염병의 대유행과 관련한 공포가 언론의 흐름을 타고 시시각각 전해지면서 우리들의 사유 속에 공포가 강하게 각인되었다. 여기에는 언론과 정치인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 등도 서로 지식을 내세우며 과도하게 경쟁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것도 네 탓이라는 사유의 한 종류이다. 이러한 국가의 위기 상황에 또 하나의 변수가 등장하였는데 곧 다가올 선거이다. 선거의 특성상 언론을 통한 자신들의 정책을 알리려는 노력이 중요하지만, 여기에서도 등장하는 또 하나가 상대방을 비방하는 행태인데 이것도 네 탓이라는 논리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내 탓이 아니고 남의 탓이라는 생각은 자신의 내면이 주요 성찰과 반성이 대상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재난이 발생하였을 때 그 사회의 건강성을 확인하게 되는데, 우리나라는 집단의 지성이 정상적으로 작용하고 있어서 다른 나라들처럼 생필품 사재기를 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충돌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성숙한 국민이다. 성숙한 국민답게 지금은 정부가 무능하다고 비방하는 것과 같은 여러 여론은 잠시 접어두고 대중들과 정부가 현실을 직시하고, 국가의 모습을 냉정하게 성찰하며, 여러 현상이 네 덕이고 내 탓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개인은 자신이 세계의 중심인 것을 인지하고 이러한 세계의 암울한 현상도 내 탓이라고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모두가 내면을 성찰하며 새로운 사회의 공통문제에 대처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지금까지 도덕적인 국민으로 살아왔던 신뢰가 있는 지성들이다. 우리의 발전된 시민의식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이루게 할 것이다. 세영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봄날은 온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나라가 초비상이다. 감염 확산에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국민의 감염에 대한 불안감 역시 날로 고조되고 있다. 감염 확산에 비상등이 켜지면서 정부는 감염자 치료는 물론이고 감염 예방과 확산 방지를 위한 고강도 방역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누구랄 것도 없이 격려와 동참을 통한 국민 모두의 적극적인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 보인다. 코로나19로 인한 극도의 불안감과 두려움이 사회 전반의 불신과 혐오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사람을 만나는 일도 조심스럽다. 감염의 확산이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나라 전체가 불안에 떠는 만큼 위기 극복을 위한 우리의 대응 자세는 더 차분하고 냉정할 필요가 있겠다. 불안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우리를 더욱 고립시키고 힘들게 하는 것은 바이러스보다도 어쩌면 서로에 대한 불신과 배척인지도 모른다. 감염 확진이 집중된 지역이나 집단 혹은 감염이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한 차가운 시선은 이번 사태를 극복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정부의 방역책에 대한 범국민적 협력 즉 서로를 위한 격려와 배려 그리고 응원과 지지가 필요할 때라고 본다. 감염 예방을 위한 개인위생에 철저를 기함은 물론 감염으로 치료 중인 환자의 쾌유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치료와 방역에 온 힘을 다하는 분들의 수고에 진심 어린 감사와 응원을 보내주는 일, 그런 따뜻하고 성숙한 시민의식이 현재의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데 더 큰 힘이 되리라고 본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이왕이면 하루빨리 코로나19 사태가 해결되어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되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수 리아킴의 노래 위대한 약속에는 다음과 같은 노랫말이 있다. 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벼랑 끝에 서보면 알아요. 평범했던 우리의 일상생활이 쉽지 않아진 요즘, 그 평범함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살면서 우리는 때아닌 삶의 난관을 만나고 예상치도 않은 고통과 절망의 순간에 직면하기도 한다. 놀랍게도 그런 상황이 찾아오면 그간 평범했던 모든 순간들과 일상들이 모두 그냥 그대로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뜻하지 않은 삶의 벼랑에 서게 되면 그제야 비로소 아침에 눈을 뜨는 것만으로, 편안히 숨을 쉴 수 있는 것만으로, 창문 너머에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미 너무 충분히 행복에 겨운 일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때 우리는, 소소한 일상의 축복보다 1퍼센트의 행운만을 찾으려 했음을, 평범한 일상에 고마워하기보다 특별한 무엇인가를 얻으려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았음을 또한 깨닫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도 평범해서 때로 지겨울 때가 있었던 자디잔 허드렛일들과 가족들이 함께 모여 밥 한 공기 먹는 일 등 재미도 감동도 없이 반복되는 우리의 그 모든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한 축복이었는지 그 자리에 서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들은 사실 재미있는 일도, 매번 보람이나 감동을 주거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 정성을 쏟고 열심을 다해야 하는 이유는 그 모든 평범한 일상들이 지나고 보면 알알이 축복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늦게야 깨닫는 일은 후회가 될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요즘이다. 다시 평범했던 일상을 환하게 맞이할 봄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코로나19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과, 감염 예방과 방지를 위해 온 힘을 쏟고 있을 분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김창해 천주교 수원교구 사회복음화국장

[삶과 종교] 고인돌에 새겨진 별과 삶 그리고 종교

코로나19로 온 나라가 긴장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신천지에 대해 많은 것이 알려졌다. 신천지교도 중에 청년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고 한다. 나의 20대를 돌아보건대, 이 시기에는 삶과 죽음 그리고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며 공부하게 된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절실하게 묻게 된다. 우리 인간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삶에서 의미를 찾으며 살아가는 존재자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낀다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나는 삶의 의미를 묻는 가운데, 보살핌, 돌봄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것은 아주 고대로까지 올라간다. 우리 한반도에는 5만기 이상의 고인돌, 선돌이 있다. 강화도나 순천 및 화순, 안동 그리고 평양과 황해도 등에는 집단적인 고인돌들이 있다. 그런데 이 고인돌 중 일부 덮개돌에 다채로운 별구멍들이 새겨져 있다. 이 별구멍들을 만든 이들은 어떤 목적과 어떤 의미를 가지고 하늘의 별자리들을 이 바위에 구멍으로 새긴 것일까? 몇몇 역사학자들과 과학자들과 천문학자들 그리고 철학자들이 관심을 두고 그것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앞으로 이를 더 해석해가려고 한다. 고인돌들의 별구멍들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새겨진 천문도와 유사하다. 선사시대에 하늘을 관측하고 별자리에 대한 지식이 쌓이고 전승되면서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도 전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 권근(權近, 1352-1409)에 의해 만들어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에도 전승되고 있고, 또 그것이 오늘날 쓰는 1만 원권 화폐에도 그 일부가 디자인되어 있다.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족은 하늘을 관측하면서 별자리들을 만들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해왔다.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 망각의 역사조차도 잊힌 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고인돌의 덮개돌에 새겨진 별구멍은 해와 달 그리고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이다. 이 별들은 당시 우리 고대 한국인들이 하늘과 땅을 오랫동안 관측하여 그 규칙성의 발견을 통해 그 하늘과 땅과 그 위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불멸성을 사유하고 보살피며 만들어낸 틀이다. 고인돌은 우리 한국 고대문명의 기원을 알리는 징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고 하고, 또 노자(老子)는 말할 수 있는 도는 상도(常道)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고인돌도 침묵 속에서 많은 말을 던지고 있다. 그것들의 현존이 선사시대 우리 민족이 보던 하늘과 별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우리의 망각을 넘어 빛나고 있다. 하늘에는 저 하늘과 낮에는 태양이 밤에는 달과 별이 우리를 영원히 돌보는 존재고, 땅은 하늘과 협력하여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키우는 존재다. 그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인간은 그 사실을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영원히 우리 미래에도 남을 큰 돌에 그들의 혼을 새겨 넣어 우리를 돌보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 자신의 삶을 보살피고 돌보는 종교가 되길 기원한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영화 ‘기생충’으로 보는 사회학

봉준호 감독이 제작한 영화 기생충이 4개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후 국내외에서 환호의 열기가 대단했던 반면에 사촌이 땅 산 게 배가 아프기라도 하듯이 말도 많다. 자국의 영화 표절이라고 시비하는 인도의 영화감독, 좌파 감독에게 상을 준 미국 영화예술아카데미에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고 항의하는 국내의 칼럼니스트, 영화의 메시지보다는 한국의 주거난에 초점을 맞추어 비난하는 일본과 국가 간의 불편한 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차라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봐야겠다고 조롱하는 미국 대통령 등 시비가 만만찮다. 정말 배가 아파서 그런 걸까? 심보가 못 돼서 그런 걸까? 기생충이란 다른 종(種)의 체내 외에 붙어 해당 생물의 양분을 얻어 살아가는 진핵세포로 이루어진 무척추동물인 거머리와 같은 붙어살이벌레를 말한다. 정치적으로는 극우사상과 제노포피아(외국인혐오)를 기치로 내거는 사람들의 배타적인 성향으로 외국인이나 이민자들과 그들에게 우호적인 자국민을 지칭할 때 표현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자기와는 생활환경이 다른 상대계층을 비하하거나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남에게 덧붙어서 살아가는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일제식민지 시대 룸펜 인텔리겐치아(지식인)도 그렇게 조롱당했다. 1930년대 경제공황의 여파로 식민지 조선에는 실업자들과 부랑인들이 넘쳐났다. 그들 중에는 일본이나 미국에 유학하고 온 지식인 실업자들도 꽤 있었는데, 사회는 이들을 가리켜 룸펜 인텔리겐치아라고 놀려댔다. 원래 룸펜(Lumpen)은 사회에서 낙오된 부랑자나 실업자를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누구보다 더 많이 배우고 누구보다 더 사회적으로 공헌해야 할 그들이 일거리가 없이 빈둥거리면서 근대화의 선도자라도 된 듯이 모던 껄, 모던 뽀이 역할만 해대려니 눈꼴 시렸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도움이 되지 않았던 그들을 룸펜 인텔리겐치아, 즉 사회의 기생충이라고 조롱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봉준호의 영화가 고발하려는 기생충은 무엇이었을까? 현대 사회의 지독한 양극화 현상이 아니었을까? 인권을 중시해야 하는 민주 사회에서 철저히 인권을 무시하는 신자본주의만 숭상하고, 자기와는 다른 사람을 서로 기생충처럼 여기는 현실을 고발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들은 순진하여 무시당하고 이용당하는 힘없는 국민이기 보다 극우 제노포피아일수도 있겠고, 밥값도 못하는 게 혈세만 낭비하며 겉멋만 부리는, 자기 역할도 못하면서 힘만 과시하려는 수많은 현대판 룸펜 인텔리겐치아들일 수도 있겠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가리켜 미련한 자라 지칭하고 그들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고(잠언12:23), 미련한 것을 쏟아 내고(잠언15:2), 자기 의사를 드러내기만 좋아한다(잠언18:2)고 꼬집어 말하고 있다. 또한,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무익한 종(마24:30)이라 고발하고 그들이 받아야 할 심판도 예고하였다. 한마디로 기생충이란 자기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지 못하는 나이겠다. 또한,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를 좋아하고 쉽게 얕잡아 보려는 책임감이 결여된 너이기도 하겠고, 도덕성이 결여된 채 애써 신(神)의 낯을 피해 살아가려는 우리라고도 하겠다. 코로나19로 인해 지구촌이 어수선하다. 우리 형편으로 볼 때 이 또한 기생충 같은 자들의 무책임한 행위의 무서운 결과이지만 이제 와서 누구 탓한다고 더 나아질까? 원망은 차치(且置)하고 서로 협력하여 이 사회가 하루라도 빨리 정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코로나19’의 위기

빅토르 위고(Victor Hugo)라는 작가는 장발장을 비롯한 수많은 위대한 글을 남겼다. 그의 이라는 책 내용에 나오는 내용이다. 바다에서 위험한 폭풍에 휘말린 어떤 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폭풍 속에서 선원들은 모두가 놀라고 두려워 떨며 긴장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갑판 아래에서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그 배에 화물로 선적된 대포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폭풍 속에서 대포를 묶어 둔 밧줄이 풀려 그런 소리가 났던 것이다. 배의 요동에 따라서 그 대포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배의 옆쪽 측면을 사정없이 쳐댔던 것이다. 이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배는 가라앉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용기있는 두 명의 선원이 느슨해진 대포를 다시 묶겠다고 자원하였다. 그 일은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그 대포로 인한 배의 내부에서의 난파가 폭풍의 격렬함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었다. 한 개인의 인생이던 한 국가의 역사이던지 위기라는 위험과 기회의 시간을 맞이한다. 그때에 그 위기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의 정체성이다. 그 정체성이 분명하다면 그 위기는 기회의 시간이 되기도 하고 그 정체성이 깨져 있다면 그 위기는 위험의 시간이 될 뿐이다. 교회는 언제나 사람들 속에 있고 사람들과 함께 한다. 교회라는 곳은 그 사회의 정서적 문화적 생명을 같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국가의 정체성을 영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인도해 가야 하는 책임이 교회엔 있는 것이다. 역사를 볼 때 그 세대 속에서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는 그 사회의 건강성의 잣대가 돼 왔다. 지금 한국 교회는 모든 것들이 다 정확히 좌우로 나누어져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국가적 재난으로 다가와 있다. 이 위기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일단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다면 멈추어야 한다. 다 같이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도 어떤 기적을 보여주실 때나 아니면 생명의 말씀을 주실 때 언제나 모든 것들을 멈추게 하셨다. 그리고 한 곳을 집중하게 하셨다. 그 집중은 언제나 인생의 본질을 향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 나라의 힘과 그리고 인생의 참된 의미는 지금의 분주함을 멈추고 나 자신을 돌아보며 믿음을 향해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어야 한다. 남아프리카 유목 부족 가운데 일 년 중 일정한 때가 되면 반드시 몇 달 동안 먼 길을 떠나는 부족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몇 날 며칠을 터벅터벅 걸어간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며칠이고 한 자리에 머물 때가 있다고 한다. 이 부족을 관찰하던 한 인류학자가 그들에게 왜 가던 길을 멈추고 쉬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들 중 한 리더가 그에게 대답하기를 그들의 영혼이 육체를 따라오도록 쉬면서 가야 한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번 코로나19 재난은 너무나 큰 인류의 재앙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재앙 앞에서 누구의 탓인가?를 힐문하며 서로 공격하기보다는 모두가 육체적으로 멈추고 그 바빴던 육체의 발걸음에 영혼이 뒤따라 오도록 기다림의 시간이 있기를 기도해 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 이슬람 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질병의 재난을 바라보면서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는 여러 재난의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생명을 빼앗았던 사례들은 극단적으로 혼란을 일으켰던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아닌 질병의 문제였다. 우리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 중에서도 역병, 즉 돌림병에 대한 기록을 많이 찾을 수 있는 것에서 이전의 시대나 지금의 시대에도 질병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중요한 명제인 것은 확실하다. 현대에서 과학의 발전과 생물학에 대한 많은 연구성과를 인용하여 인간의 기대 수명이 많이 증가하였고 다양한 질병의 치료도 가능해지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노력에 대한 의학의 발달과 더불어서 또한 인간의 탐욕에 의한 사람과 축생들에게 공통적으로 감염이 일어나는 사례가 증가하여 인간사회에 대혼란을 일으키는 행위는 과연 무엇에서 시작되는 것인가? 축생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염되어 변형을 일으켰던 질병으로 2002년 11월 중국 관동지역을 중심으로 발병이 시작되었던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SAS)이나, 2012년부터 중동지역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나타났으며 2015년까지 맹위를 떨쳤던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등은 인간이 축생들에게 지나치게 인간의 생활환경으로 이끌었던 것에 원인이 있었고 기 내면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많은 탐욕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인도에서 활동하시던 당시에도 이와 비슷한 역병이 사례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그러한 일의 근원은 인간의 탐욕이 내재하여 있고 여기에 귀신들의 비인(非 人)이 가세하여 더욱 확대시키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이 윤리적이고 이치에 맞게 생활을 유지한다면 이러한 비인들도 인간세상을 쉽게 넘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중국의 우한 지역에서 발생하여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어 세계의 문제로 부상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환자가 발생하여 확대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고, 조만간 대학교의 개강과 유학생의 유입은 현재의 방역체계를 더욱 강화해야 하는 필요성을 인식시킨다. 현대사회는 세계가 네트워크로 이뤄지고 있고 세계의 공장이라 일컫는 중국경제의 문제가 세계경제에 연쇄반응을 일으키고 있으며, 바다를 건너서 미국에서는 독감으로 많은 인명의 피해가 일어나고 있다는 또 다른 우울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세상의 여러 지역의 재난을 보면서 불교의 가르침의 가운데에서 오탁악세라는 말을 생각해 본다면, 번뇌가 멈추지 않아서 감정의 갈등이 끊임없이 반복하여 고뇌하는 번뇌탁(煩惱濁)과 사악한 사상과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자신을 혼란에 빠트리고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견탁(見濁)이 조화되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는가를 조심스럽게 되새겨 본다.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는 과정에서도 일정한 이치에 따른 공간과 시간의 분배가 필요한 것이고 지구라는 삶의 터전을 살아가는 다른 존재와의 조화도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만한 독선과 그것에 따른 무분별한 자연의 파괴와 에너지의 남용,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새로운 탐험은 고스란히 인간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19의 병원균이 수산물시장에서 축생의 식용문제에서 시작되었다는 설과, 인간이 실험실의 연구과정에서 유출되었다는 설이 보도를 접하면서 스스로 반문하여 본다. 인간의 탐욕은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인 소요지족(小欲知足)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앞에서 말한 부처님 당시의 재난을 일으켰던 아사세왕은 세상을 향하여 스스로 지었던 과오를 참회하였고, 고통받던 여러 사람을 위하여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이러한 재난이 점차 사라져갔던 인연사를 감명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의 재난은 인간의 지혜에 의하여 제어되고 수습될 것이다. 이러한 재난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이 조화되는 삶을 기대하여 본다. 세영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세상에 공짜 술은 없다?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하여 단 한 번도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 ... 시인 정호승은 인생의 한 변곡점에서 분노와 원망이 끓고 있을 때 시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를 썼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나는 내 인생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으나 내 인생은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다는 느낌이 불현듯 들었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그렇듯이 그도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런 고통을 주는가.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한 죄밖에 없다고 원망을 했다. 시간은 어머니처럼 사람을 다독여 깨닫게 한다. 후에 그는 분노와 원망으로 그런 시를 썼다는 사실이 몹시 부끄럽고 후회스럽다고 고백한다. 종종 우리는 원하지 않은 실패와 좌절을 만나게 되고 예상치도 않은 인생의 고통을 떠안게 된다. 어느 누구도 실패와 좌절을 바라지 않는다. 고통의 십자가는 우리 인생 중에 피하고 싶은 첫 번째 목록이다. 그렇다고 피할 길도 없다. 그리고 불쑥 찾아든 고통과 좌절을 웃으며 맞이할 사람도 없다. 왜 우리는 인생 중에 찾아드는 고통과 좌절을 분노와 원망으로 대할 수밖에 없을까? 문제는 간단하다. 행복한 삶을 위해 설정해 놓은 우리의 인생 설계도면에는 안타깝게도 실패와 좌절을 수용할 공간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오로지 소원의 성취와 성공의 기쁨만을 위해 설정된 이 도면은 밀물 썰물이 시도 때도 없이 오가는 생의 바다에서는 불행하게도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아픔 없이 살아온 인생이 있을까? 당연히 이러한 설계도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생의 질곡에 서서 쉽게 무너지고 만다.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고 원망했던 시인 정호승은 훗날 이렇게 고백한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쓴맛을 보지 않고는 결코 단맛을 맛볼 수 없다.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다른 사람한테 일어나는 불행한 일이 이제 나에게도 일어나는구나. 내 차례구나 하고 겸허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인생에는 공짜가 없다. 내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에 이르려면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고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필자의 방에는 365일 매일같이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다. 벌써 몇 년을 함께 살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매일같이 가시 끝에서 분홍색 꽃을 피우다 지다를 반복한다. 사람의 마음이야 날씨처럼 변덕이 심해서 웃다 울다 즐겁다 슬프다. 하지만 이 식물은 늘 한결같다. 어느 날엔가 꽃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이렇게 말을 걸어본 적이 있다. 꽃아, 너는 참 좋겠다. 늘 한결같아서, 늘 웃고 있어서, 늘 그렇게 꽃을 피울 수 있어서. 그러는 동안 문득 마음속에서 이런 울림이 일었다. 힘들이지 않고 저절로 피는 꽃이 있을까? 꽃은 식물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생존의 수단이라서 자신의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꽃을 피운다. 곧 자신의 감지장치를 최대한 사용해 빛의 양과 강도를 조절하고 온도를 맞추어 모든 에너지를 쏟아 꽃을 피운다. 작은 식물 하나도 이처럼 자신의 생존을 위해 온몸을 사르건만, 크고 작은 실패와 좌절에 우린 어찌 이리 매집이 약한지, 새삼 수줍은 듯 피어 있는 분홍빛 꽃들 앞에서 그저 부끄럽고 낯이 뜨겁다. 새해가 밝은지도 이제 두 달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면 주눅이 들지 않을 만큼 나름 떳떳하고 참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목차 없는 단편집 같은 기분은 왜일까? 내 일상의 목차를 다시 점검해보며 한 줄 한 줄 인내심을 가지고 살아볼 일이다. 머지않아 나만의 멋진 단편집 하나가 완성될 것이다. 김창해 천주교 수원교구 사회복음화국장 신부

[삶과 종교] 내 한마음 차분하면 풀무는 쇠를 녹인다

입춘(立春)이 지났다. 집에 있는 작은 화단에 살포시 나오는 풀잎들을 보노라면, 생명이 약동하는 모습에 마음이 밝아진다. 다른 한편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곳곳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 주변을 서성이고 있음을 느낀다. 대학가에서는 우리나라에 유학 중인 중국인 유학생들이 방학 동안 중국에 갔다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있지 않을까 염려한다. 다중 모임을 최소화하여 바이러스 확산을 막으려고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졸업식과 입학식 취소 및 축소 그리고 개강 연기까지 고려되고 있다. 이처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각종 예방 대책에 정부와 모든 국민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의학사 전문가가 아닌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인류는 이런 신종 바이러스들을 역사적으로 경험해왔다. 즉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차분히 대처하고 주의 사항들을 잘 지키면, 이를 이겨내는 데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언론의 관심을 받는 동안 윤석열 검찰총장과 추미애 법무부 장관 간의 용호상박(龍虎相搏)하는 모습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다소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외에 4월 총선 관련 정치권 뉴스들이 언론의 주요 관심인 것도 또 다른 탓일 것이다. 나는 우리 국민이 최근 언론을 장식하는 정치계와 법조계 이슈들을 통해 무엇을 느낄까 생각한다. 국가고시합격을 하거나 공부를 많이 하거나 정치계에 발을 들이거나 해서 이른바 출세를 한 분들 가운데, 우리가 존경할 만한 분들이 몇 분이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한다. 출세를 한 분들 가운데서 존경할 만한 분들을 찾기 쉽지 않은 것 같아 다소 슬픈 생각이 든다. 물론 존경할 만한 분들이 우리 주변에 없지 않다. 다만, 언론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분들 가운데 이런 분들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언론이 관심을 두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여론이 관심을 갖는 것이다. 존경할 만한 분에 대해 여론이 관심이 없으니, 언론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존경할 만한 분들을 알고 존경하고 살 수 있다면 그 또한 행복한 일이다. 나는 교육자로서 현재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존경받을 만한 지도자로 길러내는 교육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 물어본다. 어떤 길을 보여주고 어떤 길을 가라고 해야 하는지 스스로 물어본다. 나는 우리 학생들이 출세를 위한 길을 가든,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가든, 다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학생들이 어떤 길을 가든 정성을 다하며 큰 눈을 가지고 깊고 차분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되길 바란다. 지난겨울에 몇 권 읽은 책 가운데 하나가 『채근담 하룻말』(박영률 옮김)이다. 이 책은 잘 만든 책이다. 한글 번역도 인상 깊게 아름답고 좋았다. 옮긴이는 이 책을 하루에 한쪽만 읽으라고 권한다. 나는 옮긴이의 이 권유가 이 글이 곧 너의 삶이 되게 하라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우리말 번역과 내용에 이끌려 번역자의 권유대로 읽지 못하고 아침저녁으로 읽으며 사흘 만에 읽어버렸다. 오늘 이 책을 다시 꺼내 펼쳐 읽은 부분 가운데 다음 이야기가 인상 깊다. 힘 있는 자들은 서로 머리를 쳐들고, 영웅들은 호랑이처럼 다투니, 냉정하게 이들을 보면, 개미가 누린내에 모여들고, 파리가 피 냄새를 다툼이라. 맞네, 틀리네 하며 벌떼처럼 일어나고, 얻었네, 잃었네 하며 고슴도치 바늘처럼 성을 내도, 내 한마음 차분하면, 풀무는 쇠를 녹이고, 끓는 물이 눈을 녹인다. 나는 세상 걱정에 위로 올라가는 열을 내리고 더욱 차분해지자 다짐한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한 달 사이에 바쁘게 두 번의 새해를 맞이하고 보내드렸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과거를 떨쳐버리고 싶은 듯이 얼른 맞이하고 보내드렸다. 그럼에도, 지난 세월에 기웃거리며 미련을 두는 이유가 뭘까? 에드워드 카에 의하면 역사란 잃어버린 조각이 많은 대규모의 그림 퍼즐이고, 현재의 눈을 통해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봄으로 성립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무슨 말일까?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심지어 알지 못하는 미래까지도 예상하면서 퍼즐을 짜 맞출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 그런 현재가 과거에 비추어 얼마나 당당하겠으며, 미래는 얼마나 희망적이겠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역사는 한 마디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연결된 선 위에서 곡예하는 서커스와 같다 할 수 있겠다. 지난 한 해 우리 사회는 정치 경제적으로 지독한 양극화를 겪으며 절뚝거렸다. 해방정국의 좌우대립을 능가하는 극단적인 정치적 대결과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들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시급 상승은 대다수 국민의 빈정을 상하게 하고 정치의 불신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어 일 년 내내 불안이 떠나지 않았다. 또한, 국정감사 내내 존경하는 ○○○의원님이라고 추켜 놓고 존경은커녕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괴수들처럼 으르릉거리며 대결하던 비인격적인 모습들이 부끄러웠고, 최소한의 인격도 존중할 줄 모르는 정치모리배들이 극단을 주장하면서 들끓는 거리를 나다니기가 무서울 정도였었다. 그런데 염치도 없는지 그런 그들이 조직을 재구성한답시고 헤쳐 모이고, 개혁과 혁신을 부르짖으며 호들갑 떠는 게 불안한 미래를 예고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인간만사새옹지마라고 했다. 세상사 모든 일이 좋은 듯하면서도 괴롭고, 괴로운 듯하면서도 좋아질 수 있으며, 불행한 일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행복한 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세월에 기웃거리더라도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안전하기 때문이겠다. 예수께서 과거의 영화에 집착하며 살던 유대인의 기득권 세력인 바리새인들의 금식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셨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듯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포도주와 부대를 다 보전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마태복음 9:14-17). 바쁜 듯 보내드린 해가 민망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세월에 염치없이 집착하기보다 극복하는 지혜가 필요하겠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전할 수 있듯이 더 나은 한 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염치를 알고 스스로 참신한 사람이 되어 사회 구석구석에 누룩이 되고 자양분이 되어야 하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기독교가 오늘날 젠더 이데올로기에 민감한 이유

21세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라고 부른다. 현대후기사회는 모든 것을 해체하는 주의(ism)와 중심적인 사고에서 탈피하고 다원화 되는 특징성향을 강력하게 갖고 있다. 기존의 모든 것을 다시 정의하고자 하는 성향 속에서 모든 가치관들은 큰 혼란을 겪고 있기도 하다. 20세기를 전쟁의 세기로 정의하고 온 인류는 평화를 기원했지만, 그 기대가 깨지는 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데올로기의 냉전체제로 인류를 떨게 했던 마르크시즘(Marxism)과학적 사회주의는 인류와 이별을 고하는 듯하였으나 오히려 오늘날 새로운 가면을 쓰고 인류의 역사에 더 큰 위협을 가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속 인류의 삶 속에 가장 두려운 화두는 생로병사가 되었다. 무병장수 인류의 희망은 유전자 조작을 통한 최첨단 기술의 개발과 발을 맞추어 인체의 신체를 조작함으로 불로장생(不老長生)이라는 21세기 진시황제의 시도로 표출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기업이 구글(Google)이며 미래학자들임을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류의 영성은 의미 없는 하나의 정신적 사조로 버려지는 것이다. 이 시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각 종교 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는 않은 문제일 것이다. 기독교는 왜 젠더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예민한 것일까? 그것은 영적인 문제로 답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 문제에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역사학교수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사피엔스, 호모데우스라는 책을 통해 사람이 신이 되고자 하는 논리를 이미 전개했다. 문제는 이 젠더의 문제가 결국 급진적 페미니즘의 성(性)적인 문제로 연결되고 그 연결고리는 버틀러의 책 젠더 크러블에서 섹스가 젠더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젠더가 섹스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고백의 질서를 다 무너뜨리는 말과도 같다. 기독교가 동성연애를 금하는 것은 동성 간의 성교의 방법적 행위의 문제와 더불어 창조적인 하나님 신앙을 강조해온 창조신앙의 중심을 쾌락으로만 퇴보시켜서 자녀를 출산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저들의 문제는 가정의 파괴를 가져온다. 결국, 결혼의 대상이 영혼 없는 짐승과 결혼이 되고 그리고 쾌락의 문제가 가정의 개념을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동성연애자들의 비판을 위한 푸념이 아니다. 이 화두는 한 사회를 지나 인류의 문제로 등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가정은 이 땅에서 천국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모델이 되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공식적인 기관 두 곳을 만드셨는데 그것이 가정과 교회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영혼의 쉼이 있는 곳, 그리고 공감과 나눔이 있으며 헌신적 이타적 사랑이 있는 곳, 그리고 자녀가 창조적으로 만들어지는 새 창조의 공간이 있는 곳이 바로 성경적인 가정이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그 어느 기관에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하나님의 가정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독교 국가들이 가정을 소홀히 여겨온 실수가 오늘날 이런 영혼의 가치가 물질에 흡수되는 시대를 만들었으며 국가가 가정을 대체하려는 공동(共同)의 잘못된 개념이 결국 창조주의 완전한 가정에 대한 계획을 망가뜨려 버린 것이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 속에서 아름다운 가정이 만들어지고 그리고 그 가정의 울타리 속에서 자녀가 생명을 얻는 그 근본적인 가정이 우리 안에 만들어져야 한다. 그 가정이 바로 창조의 질서를 만드신 하나님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할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대한민국을 꿈꾸어 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 이슬람 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새해를 세간에 그림으로 그리면서

2020년 새해가 시작되고 10여 일의 시간이 지나갔다. 한해가 흘러갔다는 아쉬움과 내일의 희망을 꿈꾸면서 내면을 성찰하는 시간도 얼마가 흘러갔다는 의미이리라. 얼마 전의 언론의 기사에서 서울은 쉬지 않고 달려가는 역동적인 도시라는 기사 일부를 보면서 한국 국민은 여전히 부지런하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생태를 지닌 존재임을 다시 느껴보았던 순간이었다. 오늘도 사찰의 일주문을 넘어서 바라보면 승가와 재가의 경계가 존재하고 있더라도 사람들이 분주하게 활동하는 시장의 역동성을 바라보게 된다. 사찰의 위치가 도심 속에 자리 잡은 탓인지 산사의 근엄함과 고요함보다는 인간의 세상을 지금의 시선에서 바라볼 기회를 준다.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는 다양한 군상의 모습과 현상들을 체험한다는 것이 수행과 대중교화라는 영역에서 교묘하게 교차하는 느낌이다. 중생계에 존재하는 나는 현재의 위치에서 삶의 흔적을 업이라는 소재로 광대한 세계에 개략적으로 그려가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 그림의 가운데에는 착하게 그려져서 대중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고, 또한 악한 처신으로 지탄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며, 무의미한 상태로 치부되어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스스로 걸어왔던 길은 다른 존재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삶의 모습이 전체적으로 기록되고 미래의 종자가 되어 다른 모습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행위의 가운데에 자리 잡은 것으로 가장 중요한 하나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사랑이 없다면 물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을 것이나, 지나친 자기 사랑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며칠 전에도 지구촌에 국가 간의 갈등으로 인한 비행기의 피격으로 무고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표면적인 이유로 정치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있으나, 인간의 본성에서 살펴본다면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쳐서 집단적인 사회문제로 발전되고 정치공학적으로 가공되어 일어난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물질적인 문화와 정신적인 문화를 조화롭게 발전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으나, 지금까지도 두 영역에는 합일될 것 같으면서도 부조화가 나타난다. 지금도 지구촌이라는 언어의 유희 속에서도 서로 이익과 가치의 우선을 내세우며 갈등하고 있고, 화합과 양보보다는 힘의 논리가 앞서는 현실이다. 요즘에 오랜 세월을 덮어두었던 역대 조사들의 글을 다시 읽어보면서 인간미를 가장 중요시하였던 인간중심의 사상임을 다시금 확인하였다. 부처님께서 인도에 출현하신 것은 2천500년 전이었고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큰 스승들께서는 인간중심의 사유를 강조하고 계신다. 이러한 사유는 단순히 불교의 가르침만이 아니고 여러 종교에서도 인간중심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 과연 부처의 성품을 간직한 우리는 마음의 근원에서 복잡하고 역동적인 현대를 살아간다는 핑계로 현실을 얼마나 외면하고 있는가! 2020은 같은 숫자로 반복되고 있는 한 해이다. 이러한 숫자가 같다는 것에 너와 나라는 수식으로 대입하여 생각한다면 어떠할까? 너와 내가 같다는 의미로 통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올해는 다른 해보다도 더욱 화합할 수 있고 타협하고 양보할 수 있는 일 년이라는 숫자라고 인식한다면 지나친 자기도취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너와 나를 분별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라고 가르치신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은 같은 부처의 성품을 가진 존재이므로 이러한 사유를 버리지 말고 화합하라는 뜻이고, 너와 내가 다르게 존재하되 다르지 않다는 사유가 필요한 때이다. 우리는 하나의 세상에서 공존하는 공동의 업을 지닌 공동체이므로, 광대한 세계 속에 선하고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세간에 담으면서 2020년에 그려갔으면 한다. 세영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또 한 살에 감사를 품다

감사하며 살라고 말만 해왔지 살아오면서 많은 시간 저는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 고맙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답사는 예상 외로 짧았다. 40년간의 현직 사목 생활을 마무리 짓는 퇴임 미사이니만큼 신부님을 기억하는 이들이 모여 그간의 노고에 감사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한 길 사목자로 살아오면서 남기고 싶은 말도 많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을 것이므로 어록까지는 아니더라도 내심 가슴에 새길 만한 무게 있는 말씀 한마디쯤 기대하고 있었다. 그 긴 사목 생활을 해오셨으니 어쩌면 그 긴 삶 중에 있을 법한 극적인 이야기나 기적에 가까운 감동 실화들이 무딘 가슴들을 뻥뻥 뚫어줄 것을 고대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다가 그런 상상을 다 했을까. 생각해보면 인생의 끝자락을 향해 갈수록 짧아져야 할 것들이 있다. 그중에 무엇보다도 짧아져야 할 것이 있다면 단연 입의 말이다. 긴말을 한다는 것은 내가 상대에게 그만큼 말을 많이 한다는 의미일 것이고 짧게 말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의 말을 듣는다는 의미에 가까우니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짧게 말하고 잘 들어주는 사람을 더 가까이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아마도 이 말은 노파심에서 나오는 말 즉 남의 일에 지나치게 염려하는 마음을 줄이되 너그러움과 푸근함, 관조하는 마음과 넓은 포용력의 지갑을 열라는 뜻은 아닐까 싶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그만큼 누군가의 덕분으로 살아온 시간은 많았을 것이므로 나이 들수록 겸허하게 그저 감사하고 뭐라도 베풀면서 산다면 이보다 아름다운 나이 듦은 또 없을 것이다. 훗날 나의 깊은 주름살에서는 아름다운 비움과 내려놓음이, 그저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함이 묻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프랑스 여배우 시몬 시뇨레는 어느 사진작가가 사진을 찍으려 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봐요, 내 얼굴의 주름살 좀 잘 나오게 해줘요. 나 이거 만드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우. 그녀의 말에서처럼 자신의 주름살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으려면 삶에 대한 그만큼의 철저한 관리가 또한 필요할 것이다. 주름살을 통해 풍겨나는 아름다움은 결코 성형수술이나 지방 제거 수술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인생의 값진 대가이다. 지난 일 년, 나에게 허락된 그 많은 시간을 정말 바쁘게 살았는데 내 삶은 몇 뼘의 성장을 더하며 깊어졌을까? 새해를 시작하며 세운, 내 삶의 성장을 위한 다짐과 목표는 몇 년째 버킷 리스트(bucket list)에서 지워지지 않고 재활용을 당하고 있다. 사랑만 해도 모자란다는 시간에 나는 얼마나 많이 부정이 아닌 긍정을, 불평이 아닌 감사를, 미움이 아닌 용서를, 다툼이 아닌 화해를, 그리고 무관심이 아닌 사랑을 선택하며 살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성에 차지는 않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열심히 잘 살아줘서 고맙다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험한 세상살이 그래도 치열하게 살아내느라 정말 고생 많았다고 용기와 위로와 힘이 되는 말을 해주고 싶다. 또 새해를 맞았다. 사느라 어쩔 수 없이 쌓아진 내 맘속의 사금파리들은 다 내려놓고 이제 새 마음가짐과 목표로 다시금 새 출발을 해보자. 누군가의 덕분으로 살았음을 감사하며 새해 또 한 번의 파이팅을 힘차게 외쳐보자. 갈수록 늘어나는 주름살이 부끄럽지 않도록. 김창해 천주교 수원교구 사회복음화국장 신부

[삶과 종교] 경자년, 아름다운 경자자를 생각하며

경자년(庚子年) 하얀 쥐띠해의 초이틀이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저마다 올해의 다짐을 새롭게 할 것이다. 나도 매년 새해 오늘이면 올해의 새로운 다짐을 하곤 한다. 또 학교 신년하례식에 참석해 인사와 덕담을 교직원 선생님들과 교수님들께 드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 독자 여러분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경자년과 관련된 이야기를 생각하면, 나는 경자자(庚子字)라는 구리활자가 생각난다. 경자년에는 이 구리활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여러 말로,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나라였고, 고려시대나 통일신라시대는 불교의 나라였으며, 더 고대에는 하느님 아들인 환웅과 곰인 웅녀의 아들인 단군의 나라였다고 할 수 있다. 또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표기법인 이두를 집대성한 것이나, 세종의 한글 창제 덕에 문자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또 전 세계 고인돌의 3분의 2가량이 동이 문화 지역에 분포하고 있어서 고인돌의 나라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13세기경 고려시대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해 쓰기 시작했다. 경자자는 1420년(세종2년) 경자년에 만든 활자라 붙여진 이름이다. 이 구리활자는 우리나라(조선)에서 두 번째 만들어진 구리활자다. 첫 번째 만들어진 구리활자는 1403년(태종3년) 계미년에 만들어진 계미자(癸未字)다. 또 1434년(세종16년) 갑인년(甲寅年)에는 세 번째 구리활자인 갑인자(甲寅字)가 주조되었다. 계미자는 10만 자고, 계미자는 20만 자나 된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납을 사용했지만, 조선대에는 고려대의 납보다 강한 구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밀(蜜)로 활자를 고정하던 것을 식자판(植字版)을 조립하는 방법으로 개선해 고려시대보다 두 배 정도의 인쇄 효율이 올랐다고 한다. 변계량(卞季良, 1369-1430) 같은 이는 그의 갑인자발(甲寅字跋)에 인쇄되지 않은 책이 없고,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표현할 정도로 가히 혁명적 시대였다. 당시 하루에 만드는 활자 주조 수량은 당시 유럽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수량보다 약 10배 정도 더 많은 3천500자였다고 한다. 경자자는 조선 최초의 구리활자인 계미자의 단점을 보완하여 만든 두 번째 구리활자로, 계미자를 보완하여 개주(改鑄)하라는 세종의 명(命)에 따라 1420년(세종2년) 경자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경자자는 계미자보다 모양이 작고, 더 가지런하다. 계미자의 활자 모양은 끝이 송곳처럼 뾰족했는데, 경자자는 네모 반듯한 입방체로 바뀌었다. 글자는 성품의 표상이다. 태종대의 계미자가 크고 날카롭고 거칠었다면, 세종대의 경자자는 보다 작고 부드럽고 반듯했다. 주조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인쇄도중 계미자보다 활자동요를 낮추어 인쇄 능률도 높였다. 인쇄방식도 밀납을 판에 녹여서 글자를 배열하던 방식을 개량해, 글자 모양에 알맞게 인판을 만들고 죽목(竹木)으로 각 활자의 공간을 메우는 방법을 새롭게 활용했다. 비용은 절감됐고, 인쇄량과 인쇄 효과도 더욱 올라갔다. 경자년에 우리 모두 지난 일을 개선하며, 능률도 높아지되, 마음도 더욱 반듯하고 차분하고 부드러워져 행복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행복해도 될까요?

가까운 교우의 자녀가 모 대학의 의과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예정보다 하루 일찍 발표한 소식을 서둘러 전하던 그분은 너무 행복하다면서, 자기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지 조심스럽게 묻기도 하였다. 2020학년도 대학입학 수능을 치른 49만 552명의 응시생 중에서 135명인 0.026%만 뽑히는 곳이어서 더 그러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그 소식을 듣고 하루가 지나서 스카이라고 불리는 나머지 학교의 합격 소식까지 전해왔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더 클지 짐작하고 남겠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이것은 굳이 법률에 명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이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로크(John Locke)와 루소(Jean Jaques Rousseau) 같은 서양의 사상가들은 이것을 천부인권(天賦人權)이라고 표현했다.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사람에게 하늘로부터 주어진 특권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은 얼마나 될까? 그것도 조작된 행복이 아니라 자기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은 과연 얼마나 될까? 최소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물론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만약 그렇게 얻어지는 행복이라면 얼마든지 그 기쁨을 누리며 나누어도 되지 않을까? 예수님은 여덟 가지 종류의 행복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누릴 행복, 애통하는 사람이 누릴 행복, 온유한 사람이 누릴 행복, 의로운 사람이 누릴 행복,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누릴 행복,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누릴 행복, 평화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이 누릴 행복이다(마태복음 5:3-9). 사도 바울은 여기에 한 가지 행복을 더 덧붙였다.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누릴 행복이다(사도행전 20:36). 행복이라고 다 같은 행복이 아니라는 말이다. 행복을 누릴 때는 반드시 적합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그리고 이것은 사는 형편이 넉넉하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누리는 행복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1인당 국민소득 3천 달러에 불과한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부탄의 국민이 누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행복지수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인생이 성적순이 아니듯이 행복도 성적순은 아니겠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수고하고 노력했다면 거기에 어울리는 행복을 얼마든지 누려도 되지 않을까? 자선냄비 종소리와 함께 시작된 2019년의 12월이 저물어가고 있다. 일 년 내내 경제가 불황이라고 내몰아대던 성숙하지 못한 정치적 권모술수,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무조건 종북 빨갱이, 원조 빨갱이로 몰아대는 이합집산(離合集散)의 이기적인 혼란 중에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의젓이 제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한 대부분의 국민이 있었기에 다음해를 기대할 수 있게 되어서 행복하다. 그리고 2019년 남은 날들도 행복할 수 있도록 일분일초를 아끼며 최선을 다해야겠다. 바빠서 살피지 못한 가족도 살피고, 여유 없어 돌아보지 못한 이웃도 돌아보고, 시간 없어 만나지 못했던 친구도 만나서 사랑한다 고백하고, 수고했다 격려하고, 보고 싶었다 손잡아 안아주고 격려하고 다독거리며 후회하지 않을 최선의 행복을 누려야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바뀌어야 살아남는다지만

최근 경제적인 이슈들을 살펴보면 빅데이터 블록체인기술 AI로봇 욜로 있어빌리티 덕 후등의 낯선 단어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단어에 우리가 얼마나 빨리 익숙해지느냐가 사회생활에 성공하느냐를 판가름하는 것처럼 보인다. 젊은이들은 여러 방면에서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 가면서 새로운 신조어를 만들고 대한민국을 변화시켜 가고 있다. 반대로 그 단어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도태되는 현상을 낳고 있다. 국제적 정치의 불안감은 우리나라에도 별반 다르지 않고 전 세계는 좌ㆍ우의 대결이 더 치열해 지고 있다. 한국사회도 좌. 우의 갈등은 더욱 무섭게 갈라져 가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지금 극심한 갈등대결의 고통을 겪고 있다. 개신교 안에도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이슈로 광야교회가 생겼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해내고 있다. 세대의 갈등으로부터 시작하여 계급의 갈등과 지역의 갈등과 그리고 정치적 갈등까지 우리 사회는 격한 갈등의 날들로 연말을 맞이했다. 모든 고등종교는 윤리적이며 상식 위에 세워진다. 그렇다면, 그 상식이란 기준은 무엇일까? 표현의 표출된 겉모습일까? 아니면 표현의 내면의 내용이 되어야 할까? 21세기를 바꾸어 가는 새로운 혁신 중에 한 분야가 바로 로봇이 우리 인간들의 삶 속에 깊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로봇과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 을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로봇이란 기계는 인간들이 할 수 없는 대량생산과 견고한 첨단의 일들과 위험스런 일들을 훨씬 더 많이 그리고 잘해 낼 수 있다. 그렇다고 그 기능이 뛰어난 로봇이 인간보다 위대하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로봇처럼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로봇처럼 바뀌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 시대에 모든 것이 바뀌어야 살아남는다고 말하지만, 인간은 절대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사람은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의 말씀일 것이다. 고등종교의 출발이 윤리적이며 상식적이어야 한다면 모든 책임감 있는 종교지도자들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람이 마귀가 아니고 나와 종교가 다르다고 나와 다른 종교인들이 귀신이 될 수 없듯이 사회의 변화에 늦거나 그 변화를 거부한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그 사람의 존귀함을 놓쳐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주의에 빠지지 않는 것임을 신앙인들은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떼어 버릴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세상은 아무리 빨리 변해가고 모든 것을 바꾸어야 살아남는다는 요란한 구호가 세상을 덮어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이 어둠이 벗어지고 진정한 새벽이 오는 것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는 새벽 태양의 빛으로 분명히 보일 때 참 새벽은 오는 것이다. 사람들의 가슴에서 뛰는 심장박동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 우리는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해 주고 끌어안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은 사랑으로 변해가야 하고 따스해져 간다고 믿는다. 진정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신조어가 아니고 바로 뜨겁게 뛰는 심장으로 사람을 사랑하려는 내 마음이 되어야 한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 이슬람 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원칙을 넘어서는 화합의 삶

12월에 이르렀어도 온난화의 영향인지 젊었을 때에 만났던 겨울의 매서운 바람은 느낄 수 없으나, 차가운 날씨에 따스함을 찾게 되면서 바쁜 일상 속에서 묻어두었던 일상의 문제들을 하나씩 기억에서 꺼내어 되돌아보게 된다. 이 세간에서의 삶은 윤회의 연속이라고 하였던가! 매번 새롭게 다짐하며 더 발전된 사유와 처신을 되새기면서도 현실에 부딪혀서 우리들의 일상을 관찰하면 아쉬움이 남을 때도 많다.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는 하나하나의 세계가 중첩된 세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많은 부류의 중생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삶의 향기를 그려내면서 자신에 알맞은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세간의 구성은 중생계를 이루고 되고 이 가운데에 변하지 않는 진리가 존재하게 되는데 불교에서는 이것을 법이라고 이름한다. 인생에 긍정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거나, 부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문제는 태어나고 늙으며 병들고 죽는 삶의 일련의 과정이다. 불교에서는 죽음은 또 다른 한 인생의 시작이고, 지금의 삶의 터전과 자취를 떠나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고통 외에도 세 가지의 고통을 더 말하고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고, 원수와 만나는 것이며,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소유에 대한 욕망을 충족하려고 인류는 얼마나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감내하였는가? 현재에도 지구촌의 여러 지역에서는 자신과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갈등과 충돌이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고, 인간으로서는 인정받기 어려운 광기를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간과 우리를 고통스럽게 압박하는 현실은 모두 우리들의 마음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현대의 인간들은 신(神)의 범주라는 생명을 과학을 통하여 조작하는 단계까지 접근하고 있고, 물질을 바탕으로 삼는 현상계에서는 이와 같은 과학의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사람의 향기가 그리워서 산문을 나서 팔달문 앞에 펼쳐진 대로를 걷노라면 활력과 희망찬 모습으로 밝게 걷는 사람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고, 대체로 무엇인가에 쫓긴다는 느낌이 뇌리를 스치며, 인간의 향기는 사라지고 어느 순간에 멈추어진 딱딱한 현실에 마주하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강조되는 언어로 신뢰를 바탕으로 삼는 법과 원칙에 따른 사회질서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법과 원칙은 누구를 위한 것이고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가? 인간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상식을 갖춘 대중에게 기준이 맞추어져야 하고, 집행되어야 한다. 즉 대중의 지지와 화합의 바탕 위에 특정한 집단의 이기주의를 타파해야 하는 당위성을 지닌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양극화에 의한 갈등이 증폭되고 집단이기주의가 활성화가 이루어졌어도 화합과 양보라는 언어는 잊힌 것이 오래라는 씁쓸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나만의 아집인가를 되돌아본다. 올해도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을 바라보면서 내일은 우리가 화합하는 모습이 더욱 가깝게 다가올 것이라고, 내일은 서로 양보하면서 갈등보다는 타협을 먼저 생각한다고, 내일은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것에 앞서서 인간이 지닌 향기의 꽃을 피운다고, 내일은 매 순간에 서로 사랑하면서 자비의 열매를 맺어 인간세상에서 극락과 같은 세계를 이룰 것이라고 사유하면서 내일의 희망을 기대하여 본다. 세영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꼭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 무릎이 아파 찜질팩 하나를 인터넷을 통해 샀다. 기다리던 물품이 도착하면 왠지 마음이 설레고 즐겁다. 찜질팩에는 손바닥 반 정도 크기의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는데 꼭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습관처럼 주의사항을 떼어버리고 서둘러 제품을 사용하는 내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당장의 편리와 욕구를 위해 나는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얼마나 많은 주의사항을 보지도 않고 내버린 걸까. 주의사항의 사전적인 의미는 마음에 새겨 두고 조심하는 것, 일종의 경고 사항이다. 경고는 안전하고 올바른 사용을 위해 제품의 기능은 물론이고 제품의 고장이나 부작용의 원인 그리고 그에 따른 응급 조치사항도 포함한다. 그러니 제품 사용 시 사고나 위험 등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항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자신을 위해 발령되는 수만 가지 위험주의보를 얼마나 쉽게 건너뛰며 살고 있는가.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영화 클릭은 우리 삶에서 무엇을 우선순위로 여기며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인생역전을 노리며 열심히 승진의 꿈을 키우는 건축가 마이클은 일과 가정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고 애쓴다. 어느 날, 주인공은 한 번의 클릭으로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는 만능 리모컨을 사려고 마트로 향하고 마트 한구석에서 정체불명의 남자로부터 리모컨 하나를 얻게 된다. 놀랍게도 시간여행까지 가능한 이 리모컨에는 사용법이 따로 없다. 다만, 반환이 안 되고 자주 누른 버튼의 패턴은 리모컨 스스로 자동모드로 전환된다는 점이 특이했다. 쌓인 업무로 인해 귀찮아진 가족들과의 저녁식사는 빨리감기 버튼으로 건너뛰고 업무를 이유로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며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은 빨리감기로 건너뛸 수 있으니 이만한 편리가 또 있을까. 달콤한 승진의 순간도 하루빨리 만끽하고 싶은 마음에 빨리감기를 눌러 시간을 건너뛴다. 하지만, 승진의 기쁨도 잠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승진과 함께 흘러가 버린 1년이라는 시간과 멀어져 버린 가족들이었다. 이미 아내와는 이혼절차를 밟는 중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가 돼서야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다. 영화는 어떻게 보면 우리 삶에서 무엇이 중한가?에 대해 묻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의 마이클처럼 우리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아등바등 살아간다. 하지만, 그 속에도 분명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다. 끊이지 않는 일과 성공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에 어쩌면 우리는 살아있음만으로 넉넉히 복되고 감사하다는 사실을 놓치고 사는지 모를 일이다. 삶이 매 순간 우리에게 던지는 위험주의보를 꼼꼼히 살피며 살아야 할 이유이다. 모든 순간이 다시없는 순간이기에 더욱. 김창해 천주교 수원교구 사회복음화국장 신부

[삶과 종교] 이 해를 떠나보내며, ‘큰 눈’을 기다린다

한 해가 또 저물고 있다. 11월부터 12월에는 각종 송년회가 있다. 어느 해인들 그렇지 않은 해가 없었겠지만, 지난 한 해엔 참 크고 작은 많은 일이 많았다. 생각해야 할 크고 작은 일들이 많을 때, 마음이 떨리게 마련이다. 마음이 떨리고 지혜를 구해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마다 지혜를 구하는 방법이 다를 것이다. 나는 최근의 좋은 책들과 오래된 고전들을 읽으며 지혜를 구한다. 그 가운데 장자(莊子, 기원전 369?-286)와 원효(元曉, 617-686) 이야기에 나오는 지혜를 소개하고자 한다.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은 여러 현상을 가지런히 볼 수 있게 해줘서 좋다. 보통 우리는 유한한 관점, 즉 늘 자기관점에서 바라보기 마련이다. 그것들이 사회적 통념이라 하더라도 각자의 한계를 가진 관념일 수밖에 없다. 상대적인 옳고 그름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이 있는 곳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 바로 생명이 있게 마련이다. 가능한 곳에 바로 불가능이 있고, 곧 불가능한 곳에 바로 가능이 있게 마련이다. 그 무엇 때문에 옳기도 하고 또 그르기도 하며, 그 무엇 때문에 그르기도 하고 또 옳기도 한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변화하고, 변화의 과정에서 여러 국면을 가지게 마련이다. 동일한 사물이라 하더라도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고, 달라진 국면마다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장자의 해법은 좀 더 고차적인 입장에 서라는 것이다. 그래야, 무궁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한을 초월한 고차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물에 대한 여러 가지 면을 더 많이 보고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효는 부처님이 열반하신 이후 생겨난 많은 불경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하나의 소리가 중생의 인연과 상황에 따라 여러 소리로 분화되어 이해된 것으로 이해한다. 중생들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상황에 따라 부처님께서 가르침의 내용을 다양하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인데, 그 많은 불경이 생겨나고 그 많은 가르침이 생겨난 까닭을 이렇게 이해한다. 글을 모르고 농사만 짓는 사람들에게는 볏단을 가지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글을 읽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에게는 글에 나온 내용을 가지고 예를 들어 설명했기 때문에 다양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한다. 또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 수준과 인연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하고 이론들을 정립하다 보니, 많은 이론이 생겨난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것은 시절인연(時節因緣)에 따른 이해라고 볼 수 있다. 다양한 이론들과 주장들은 그 시절인연에 따른 그 나름대로 다 일리(一理)가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다양한 주장들이 그 일리만을 강조하고 고집하면 다툼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 어느 시대보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인권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도 다양한 주장들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장들이 모두 존중받으려면, 각각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고집은 한계에서 나온다. 고집을 거두기 위해서는 한계를 뛰어넘어, 큰 눈이 열려야 한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나무들은 잎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잎을 떨구고 있다. 그것은 잎에서 볼 때는 죽음이지만, 나무 자체로 볼 때는 삶이다. 봄이 오면 이 나무들은 잎을 다시 돋우고 키울 것이다. 겨울에 나무가 잎을 떨구고 있다고 해서 죽은 것이 아니다. 그것도 삶이다. 가을, 겨울, 봄, 여름에 맞는 나무의 삶이 있는 것이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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