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도피성의 정신이 있는 나라를 꿈꾸며

20대 대통령선거를 얼마 남기지 않고 있다. 각 정당의 진영들은 모든 사활을 걸고 선거운동에 총력을 쏟고 있다. 수많은 공약을 발표하고 전국을 돌며 민심의 한 표라도 더 받기 위해 싸우고 있다. 각 진영의 공방 속에 오가는 모든 흉한 이슈들이 거침없이 국민에게 전달되고 있다. 저래서야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이 나라의 품격이나 지도자를 향한 존경의 태도는 이미 물 건너간 것 같다. 대통령 후보자가 태어나면서부터 대통령이 되겠다고 인생의 초점을 정치에 맞춰 살아온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살아오면서 정직한 일만 하고 거짓되지 않은 일에는 근처도 가지 않은 사람이 과연 이 땅에 있겠는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국민은 그런 무결점의 사람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실수와 오점이 있을지라도 그 부분을 어떻게 반성하고 어떤 대안을 가지고 국민의 정서에 맞게 지도자의 넓은 포용의 모습을 보이는가를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인생의 실수도 자신의 삶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렇기에 낮은 겸손의 자세로 묵묵히 자신의 정책을 내 놓으면 된다. 우리나라 국민은 그 정도의 포용력을 갖춘 수준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의 직업을 돌아보면 땅콩을 재배하던 농부, 연예인이었던 대통령, 여러 추문에 휩싸여 있던 사업가도 미국은 자신들의 대통령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나라 국민도 미국보다 더 높은 포용력이 있기에 과거에 매이지 않고 내일을 노래하는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성경 속에는 도피성(逃避城)이라는 제도가 있다. B.C1400년대에 그들은 인간의 실수를 인정하고 법은 공정하게 집행하되 고의성이 없는 실수의 살인죄에 대한 용납의 공간을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사람이 인생을 살다 보면 실수할 수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이해를 법에도 적용해 두었던 것이다. 요단강을 기준으로 동편에 3개의 성읍에 도피성을 두었고 강 서편에 3개의 성읍에 도피성을 누구든지 고의적 살인이 아닌 실수로 인한 범죄함에 최소한이라도 인권을 보호하는 제도였다. 20번째 대통령 후보들의 모습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보게 되고 상상해 보게 된다. 소통이 되는 대통령, 민족을 분열시켜 좌, 우를 나누어 놓지 않는 대통령, 미래를 꿈꾸어 볼 수 있도록 희망을 주는 대통령을 기대하고 기도하는 것이 이번에도 사치스러운 상상이 되지 않기를 꼼꼼히 후보들과 공약들을 살펴보게 된다. 아름다운 이 나라 대한민국에 이 도피성의 정신이 싹 틔워 지고 국민 모두에게 최소한의 서로 용납하는 마음이 자라가기를 기도하게 된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정치, 공동선을 찾는 사랑

제20대 대선이 2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과거 천주교 신부가 정치 이야기를 꺼내면 많은 비판과 뭇매가 뒤따랐지만, 사실 교회의 수장이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치 이야기를 참 많이 꺼낸다. 오히려 교황은 정치가 고귀하고 숭고한 것이라며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호소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일부 정치인들의 실수, 부패, 무능 때문에 흔히 정치를 불쾌한 표현으로 여긴다. 그리고 정치를 불신하게 하고 경제로 대체하려 하거나, 하나의 이념이나 다른 이념으로 왜곡하려는 시도들이 존재한다. 암울하지만 정치 없이 우리 세상이 돌아갈 수 있는가? 올바른 정치 없이 보편적 형제애와 사회 평화를 향한 효과적 발전 과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라고 교황은 반문한다. (〈모든 형제들〉 176항) 교황은 이미 정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참여를 강조했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의 의무입니다. 왜냐하면 정치란 공동선(common Good)을 찾기 위한 사랑의 최고 표현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일각에서는 종교가 왜 정치에 개입하려 하느냐?라며 정교분리(政敎分離) 원칙에 반하는 일이라 비판하지만, 교황은 오로지 이웃사랑이라는 계명을 바탕으로 정치를 이해하고 있다. 이는 그의 행보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가난한 자의 벗, 거리의 교황이라 불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 이름부터가 파격적이었다. 가난과 청빈의 삶을 살며, 평생을 병든 자와 가난한 자를 위해 헌신한 성 프란치스코를 교황의 이름으로 채택한다. 또한 교황궁이 아닌 게스트룸에 거주하고 있으며, 방탄 안 되는 소형차를 이용하며 민중과 성직자 사이의 담을 허물었다. 불법 이민자 수용소에서 이민자들의 발을 닦고 입을 맞추며, 이민자들에 대한 국제적 무관심을 비판했고,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에 대해 새로운 독재라며 질타했다. 언제나 세상의 불평등과 억압에 목소리를 높였고, 자국민들도 건들기 어려운 마피아를 파문하기도 했다. 청소부와 노숙자를 교황청에 초대해 함께 식사를 나누고 난민들의 섬을 먼저 찾아가 고통받은 이들을 위로했다. 내부 부패의 사슬을 먼저 끊자는 의지로 부패한 정치인뿐만 아니라 마피아와 결탁한 바티칸 은행을 개혁했고, 사제의 성추문에 대해 통곡하며 교회의 형벌 제도를 더욱더 엄격하게 개정했다. 분명 다른 색깔의 정치 참여다. 비리와 음모가 가득한 사회 속 비호감 정치인들의 모습에서도 누군가 뿌린 선의 씨앗 때문에 숨겨진 희망이 자라나고, 나보다는 다른 이들이 맺게 될 열매들을 기대하는 일은 참으로 숭고한 일이다. 이는 모든 사람과 모든 세대와 모든 지역에 숨겨진 선의 보고(寶庫)에 대한 확신과 희망에서 비롯된다. 정치 지도자들이 단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지지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에게 투표했는가?에 매몰되기보다 나는 국민들에게 더 잘 봉사할 수 있도록 그들을 사랑하는가?, 나는 최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겸손하게 모든 이들의 다양한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가?라고 물어보아야 할 때이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정월대보름

어느새 설과 입춘이 지났다. 여전히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얼마 있지 않으면 봄이 찾아올 것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은 순리다. 세월은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도 막지 못했다. 그러니 지난 시간을 한탄하기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중요하다. 이맘때가 되면 절집 역시 분주하다. 설날에 조상님께 차례를 올린 뒤에는 며칠간 운 맞이 정초기도를 한다. 사흘 또는 일주일 정도 하는데, 한 해 동안 건강하게 아무런 장애 없이 뜻한바 소원성취하기를 염원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불교에서는 1년에 두 번 석 달간 바깥출입을 금하고 참선에 집중하는 안거(安居) 수행의 전통이 있는데, 요즘은 동안거가 막바지에 이르는 시기이다.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는 하안거, 음력 11월 15일부터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라고 한다. 안거를 회향하기 전 7일간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는 용맹정진을 한다. 동안거 해제일인 음력 1월 15일은 설날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正月)대보름이다. 예로부터 옛 어른들은 중요한 세시풍속으로 여겨졌는데, 음력 14일과 당일에는 여러 풍습이 행해졌다. 오곡밥을 먹고, 아침 일찍 껍질이 단단한 호두와 땅콩 과실을 깨무는 부럼과 귀밝이 술을 마시는 전통을 이어왔다. 지역마다 볏가릿대 세우기, 지신밟기, 쥐불놀이, 사자놀이, 차전놀이 등 다양한 민속행사를 해왔다. 우리 사회가 빠르게 현대화되면서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산사(山寺)에서는 몇 가지 풍습이 남아 있다. 쌀, 보리, 조, 수수, 팥 등 다섯 가지 이상 곡물을 넣어 지은 오곡밥을 스님들과 먹는 것이 대표적이다. 세상일에 초연하여 사는 것이 스님들이지만, 그래도 명절이 되면 조금은 마음이 설렌다. 오곡밥을 지어 먹고 법당 위에 뜬 보름달을 바라보며 무탈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석 달 동안의 안거를 마치는 날도 이즈음이기에 마음가짐 또한 더욱 새롭다. 새해가 되어 설과 입춘을 지나 정월대보름이 되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것 같다. 한 달도 남지 않은 대통령 선거로 후보와 지지자들 간의 치열한 경쟁이 선을 넘어서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가 확산 일로에 있어, 방역 모범국으로 불리던 우리나라도 확진자가 3만여 명을 넘어섰다. 이달 말이나 다음 달에는 20만 명까지 이를 수 있다고 우려하는 상황이다. 방역조치의 장기화로 벼랑 끝에 몰린 영세상인들의 절박한 호소가 들려올 때면 마음이 무겁다. 설, 입춘, 정월대보름으로 이어지는 요즘, 그동안의 어려움과 나쁜 기운을 물리치기를 바라는 염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사찰에서도 국민, 아니 인류가 겪고 있는 난관을 물리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서 힘을 보태고 있다. 중국 당나라의 황벽선사(黃蘗禪師, ?~850)는 不時一番寒徹骨(불시일번한철골) 爭得梅花撲鼻香(쟁득매화박비향)이라고 했다.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았다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라는 뜻이다. 비록 1천200여 년 전의 말씀이지만 우리가 겪는 고통을 잘 이겨내자는 희망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인류와 국가는 물론 개인과 가정에 닥친 어려움이 있다면,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다.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겨울은 반드시 지나가고 봄은 기필코 온다는 사실을 알기에 지금의 고난에 너무 절망하지 말고 봄을 맞이하여 희망의 꽃을 마음에 피었으면 한다. 오봉도일 스님 25교구 봉선사 부주지양주 석굴암 주지

[삶과 종교] 이런 지도자를 이 땅에 허락해 주소서

역사를 공부하면서 강대국으로 이 세상의 흐름을 지배했던 나라들을 볼 때면 부러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 나라에 그 시대에 맞는 좋은 지도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탁월한 인물이 왕으로 등장한 나라는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자국의 문화를 전파하게 되는데 그 인물들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나라의 국민의 전반적인 수준은 다른 나라와 달랐음을 보게 된다. 우리나라는 제20대 대통령을 선출하고자 오는 3월9일 본 선거를 하게 된다. 요즘 우리나라의 모든 관심은 이제 대통령선거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5년 동안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이 나라를 이끌어 가기도 하고 섬기기도 해야 하는 인물을 선출해야 하는 과정이니 많은 검증과 그리고 준비된 실력을 확인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 성경 속에는 수많은 왕이 등장한다. 이스라엘 땅의 작은 나라에서 근동 지중해 일대를 호령하던 다윗이라는 왕과 그의 아들 솔로몬왕은 역사 속에서도 유명하며 큰 지혜를 남기는 왕이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국기에 다윗의 육각별이 새겨져 있음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다윗 왕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한다. 나는 다윗 왕과 아들이던 솔로몬 왕을 비교해 보았다. 솔로몬이 더 큰 나라를 건설했고 더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성경에서는 왜 다윗 왕을 솔로몬 왕보다 더 중요한 왕으로 이 시대에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 그 결론을 나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다윗 왕은 백성을 향한 애절한 긍휼의 눈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백성을 향해 진정한 민족적인 아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천하의 지혜를 가지고 군사와 경제와 외교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췄던 솔로몬 왕보다 가난하고 무식하고 배고픔을 참지 못했던 백성과도 함께 울고 함께 웃던 다윗 왕은 그들에겐 어떤 왕보다도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었다고 정의하게 된다. 왕은 그 나라의 모든 백성에게 아비의 마음이 있어야 참 좋은 왕이 된다. 왕 그 자신을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그 땅의 왕이 된 자는 국민의 모든 소리에 귀를 열고 들어야 하고 대화해야 하고 민초의 아픔을 공감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벌써 20번째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 땅의 모든 종교들은 그 종교의 세계관의 방식으로 새로 세워질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각 개인의 국민도 자신의 판단에 따라 이 나라의 새 대통령을 기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아야 한다. 지금의 감정이나 느낌이나 단기적인 충동이 아니라 그동안의 19번의 대통령들을 돌아보며 이 시대에 필요한 우리나라의 대표는 어떠한 사람이 돼야 하는지를 돌아보고 미래를 향해 한 표의 결단을 투표로 내어놓아야 한다. 한 개인의 마음으로 나는 이렇게 기도하고 싶다. 주님, 이러한 대통령을 이번 20번째 지도자로 허락해 주소서. 국민들이 답답한 마음으로 국사에 반대해 광화문 광장으로 나와 당신을 비난할 때라도 여야를 막론하고 그 국민들과 함께 안고 울어 줄 수 있는 대통령을 말입니다. 지역적으로 이익 목적으로 국론이 분열할 때 약하고 작은 지역을 용감하게 편들어 줄 수 있는 참 용기를 가진 지도자를 말입니다. 큰 위대한 업적이 만들어지면 저 맨 밑에 있는 가장 고생한 분들에게 제일 큰 박수와 감사를 돌려주는 그런 대통령 말입니다. 역사가 솔로몬 왕보다 왜 다윗 왕을 왜 더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아는 지도자가 선출될 뿐만이 아니라 그런 지도자를 구별할 줄 아는 우리 모두의 대한민국이 되기를 갈망하는 이유다. 주님, 이런 지도자를 허락해 주소서.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거리두기 ≠ 멀리하기

팬데믹 상황에서 천주교가 정부의 방역지침을 적극적으로 준수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얻고 있지만, 사실 천주교 안에서는 적지 않은 타격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되면서 성당을 찾는 신자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대면 문화에 뿌리를 둔 종교 생활이 비대면 생활로 치환되면서 대부분 무엇을 해야 할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급기야 왜 종교 생활을 해야 하는지까지 자문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실질적으로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감염병 위험에 노출된 신자들의 신앙 감각은 변하고 있다. 사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기존의 인격적 관계를 포기하라는 메시지가 아님에도 어쩌면 종교가 자연스럽게 사회적 멀리하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목회데이터의 종교(인) 및 종교인 과세 관련 인식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종교가 다양한 봉사 활동의 주체, 사회적 약자 보호, 시민들의 심리적 불안감 해소의 역할을 담당해주길 요구하고 있다. 평소 자비와 사랑을 가르치는 종교가 위기 속에서는 숨거나 머뭇거리는 모습처럼 여겨진 듯하다. 역설적으로 코로나19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교황은 우리만의 교회에서 세상과 함께하는 교회를 해법으로 내놓으신다. 바로 야전 병원과 같은 교회(전투가 끝난 뒤에 상처투성인 이들을 돌보고 치료해야 하는 병원의 역할) 말이다. 바로 팬데믹으로 극명하게 드러난 무관심, 버림과 대립의 문화에 맞서 싸우기 위해 돌봄의 문화(a culture of care)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한국 천주교회는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사회적 거리두기에 적극적이었지만 그 이상의 연대와 나눔은 다소 소극적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런 와중에도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묵묵히 돕고 있는 교회 구성원들이 곳곳에 존재했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교회 구성원들이 운영하는 무료 급식소 성남 안나의 집과 인천 민들레 국수집을 찾는 자원봉사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민주화의 성지인 명동성당 내 무료 급식소 명동밥집에서는 아직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비신자를 포함한 수백 명의 봉사자뿐만 아니라 1천200명의 후원자가 성금과 물품을 지원해줬다. 또한 교황의 의지대로 백신 수급이 어려운 나라를 도와주는 백신 나눔 운동도 병행하고 있다. 부족하지만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대한민국은 이제 일상으로의 회복을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2년 가까이 시행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마치 사회적 멀리하기로 여긴 우리들의 민낯을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무기력한 체념에 빠진 우리 민낯을 인정했으면 한다. 나아가 종교가 일상 회복에 힘을 불어넣고 동시에 인격적 관계 회복에도 큰 노력을 기울여주길 희망해 본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검은 호랑이 해 설날

임인(壬寅). 2022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복(福)을 가져다주는 검은 호랑이 해라고 한다. 코로나19가 수그러들지도 않고 모든 어려움 속에 국민이 고통 받는 상황에서 검은호랑이의 기운으로 난관을 극복하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얼마 안 있으면 설날이다. 일제가 양력을 앞세워 구정(舊正)이라 폄하해,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계승해온 설날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하지만 1985년 음력 1월1일을 민속의 날로 지정해 국가 공휴일이 되고, 1989년부터는 설날이라는 이름을 되찾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새해를 맞아 첫 번째 명절인 설날에 즈음해 건강과 발복(發福)을 기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설날 풍습도 많이 바뀌었다. 물론 지금도 가족이 모여 세배를 드리고 덕담을 나누지만, 예전만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예로부터 설에는 차례와 성묘를 지내고 친지뿐 아니라 동네 어른들을 찾아 인사를 드리고, 음식을 나눠 먹는 아름다운 고유의 풍속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마음만은 넉넉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대부분 가정에서는 설날을 맞아 조상의 공덕을 기리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차례를 지낸다. 가장 좋은 음식을 차려 차(茶)나 술을 올리고 선조를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비록 코로나19로 가족들이 함께 모여 설날을 보내는 것이 어렵게 됐지만, 방역수칙을 준수한 가운데 정성껏 차례를 지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설날 즈음에 산사(山寺) 마다 거행하는 설날합동차례에 가족과 함께 참여해 조상을 추념(追念)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방법이다. 조상을 기리는 것은 효도(孝道)를 실천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전통을 소홀히 여기는 세태(世態)가 됐지만, 어버이를 공경하는 효도는 인류의 기본 덕목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보릿고개를 겪는 어려운 시절에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부모의 은혜를 그리워하며 자손으로서 당연히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는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때 큰 숙부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49재와 100재를 절에 가서 지낸 뒤에 탈상(脫喪)을 하거나, 아니면 대청마루에 상청을 차려놓고 3년간 끼니마다 상식(上食)을 올리는 것을 봤다. 어린 마음에 돌아가신 분이 드시지도 못하는 음식을 왜 올리나라고 의아하게 여겼던 기억이 떠오른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뜻을 알았다. 부모님과 선조의 은혜는 태산과 같고 바다와 같다는 말씀이 있다. 불가(佛家)에서는 양 어깨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업고 우주의 중심이라는 수미산(須彌山)을 한 없이 돌고 돌아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없다고 한다. 그만큼 부모님의 은혜가 지중하며 효도가 중요하다는 가르침이다. 이번 설날은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이 부모님 없이 지금의 우리가 없다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진리는 바뀌지 않은 거와 같이 우리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는 자손이 됐으면 한다. 그리하여 임인년 검은호랑이 해가 모든 벽사(辟邪))를 물리치고 희망의 등불을 밝힐 수 있기를 염원하며, 새해에도 더욱 건강하고 복 많이 받으시기를 기원한다. 오봉도일 스님

[삶과 종교]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

역사의 연구를 저작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시아 드로아에서 사도 바울을 태우고 유럽의 마게도냐로 가고 있었던 그 배 한 척이 유럽의 역사를 바꾸었다. 역사는 분명한 삶의 방향에 대한 확신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바뀐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구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분명한 자신의 가야 할 인생의 길이 있었고 그 길을 걸어냈다. 사도바울은 기독교가 바울의 종교라는 오해로 타 종교로부터 비난받을 정도로 예수님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지도자로 세워졌기에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지도자다운 분명한 역사의 방향과 삶의 태도를 보이고 소신(所信)으로 살아가는 삶 속에 역사는 그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 변하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올 한해를 어떻게,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냈는지를 돌아볼 시간이 됐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영향력을 타인들에게 끼치는 삶을 살았을까? 한 해의 끝마무리 시점에서 중요한 숙고가 필요한 것은 역사에 긍정적인 영향을 통해 세상이 변해가도록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사도 바울이 목숨을 내어놓고 선교와 전도를 땅끝까지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예수라는 한 분을 인격적이며 사실적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세상은 부정적인 잘못을 들추어내기만 하는 지도자에게 결코 변화를 가져오는 축복의 권위를 허락하지 않는다.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는 지도자에게 결코 권력이라는 위험한 무기를 손에 쥐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낸다. 오래전에 접했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변화시키는 이야기가 있다. 남아프리카 잠비아 북부 고산지대에 사는 바벰바족 마을은 범죄가 없는 곳으로 유명하다. 서구의 학자들이 그 이유를 연구했다고 한다. 학자들이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은 동네에서 죄를 지은 사람의 처벌 방법이었다. 부족원 중 누군가 죄를 짓게 되면 마을 사람들은 그 죄인을 마을 공터 한복판에 세워둔다. 그리고는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큰 원으로 둘러선다. 이후 죄를 지은 사람에게 한 사람씩 그가 지금까지 잘했던 일들을 칭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과장되거나 농담은 절대 할 수 없으며 사실을 진지하게 칭찬하고 감사한다. 마을에는 검사나 판사는 없고 오직 그 잘못한 사람을 돕는 변호사들만 있을 뿐이다.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끝날 때 마을에는 잘못한 이 사람이 새로운 사람이 됐다고 인정하며 잔치를 시작한다. 실제로 이 놀라운 칭찬의 폭탄은 죄를 짓고 위축됐던 한 사람을 다시 살리는 자존심과 한 부족의 일원이라는 긍지를 갖게 한다. 마을 사람들이 진심을 담아서 하는 칭찬을 들으며 그 사람은 흐느껴 울며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게 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바꿔줄 슈퍼맨을 기다리기보다는 우리가 한 사람을 긍정적으로 사랑하고 용납할 때 이 나라는, 이 세상은 변하게 될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바로 사랑하며 용납하며 긍정적으로 상대를 안아줄 수 있는 바로 우리가 돼야 한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한국인에게 종교란

최근 넷플릭스에서 지옥이라는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종교의 틀 안에서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종교의 잣대로 해석하고, 그 해석으로 인해 세상은 혼란과 광기로 뒤덮여 서로를 의심하고 견제하는 불완전한 사회를 그린 드라마다. 드라마 속 종교 집단은 이러한 현상을 심각한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는 교리로 연결 짓고 그 현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그들의 집단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시켜 인간의 두려움을 더욱 자극하고 인간의 지성과 자유를 옥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나라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한국리서치에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종교가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46%, 종교가 없다는 응답은 54%로 나타났다. 인구의 대다수가 종교를 갖지 않고 있음에도 성탄절과 석가탄신일 모두를 공휴일로 지키고 있는 나라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순간에 종교를 마주하기도 한다. 단지 추첨을 통해 진학한 고등학교가 특정 종교 재단에 속한 학교라는 이유로 종교행사에 참여하기도 한다. 수학여행 때 산을 가면 꼭 사찰을 방문해야 하고, 명절만 되면 제사상을 차리고 조상께 절을 하는 나라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명 종교백화점인 우리나라에서 종교란 떼려야 뗄 수 없는 차원이 돼버렸다. 즉 인간 사회 속에 종교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기에 한국인에게 종교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라는 인문학적 성찰은 당연하다. 종교는 인문학적으로 문화, 역사, 철학, 예술처럼 인간 사회 속에 등장하는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 역시 우리 자신을, 우리 사회를, 인간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성찰의 대상이 돼야 한다. 인간에게 종교란 어떤 이로움을 주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느 종교가 옳고 그름을 초월한다. 그리고 종교가 지닌 본질과 목적에 집중하게 된다. 바로 종교가 믿어야 할 신, 혹은 대상에 집중한다. 그러나 혹여 어느 종교가 그들의 본질보다 그 본질을 위한다는 배후의 힘과 논리를 지니고 있다면, 그래서 어떠한 욕망과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면 그 종교는 비판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드라마 지옥에 묘사되는 종교 집단처럼 만약 신의 존재 여부와 신앙의 목적, 그리고 인간의 유익보다 죄에 대한 심판에 집중한 그 교리 때문에 인간 내면에 있는 자유를 억압하고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과연 그 종교는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질문은 종교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차원에서도 적용될 것이다. 인간이 만든 법, 사회, 그리고 문화 등 그것은 분명 인간을 이롭게 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의 해석학이 필요하지 않을까? 김의태 수원가톨릭대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작은 설 ‘동지’

2021년이 시작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달력은 12월 한 장 밖에 남지 않았다. 옛 어른들의 세월은 화살처럼 지나가니 한순간도 헛되이 살지 마라는 말씀이 새삼 떠오른다. 안타까운 마음에 달력을 가만히 살펴보니, 22일, 동짓(冬至)날은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24절기 가운데 하나로 대설(大雪)과 소한(小寒) 사이에 있는 동지는 1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다. 예로부터 작은 설 또는 아세(亞歲)라 부르며 옛 선조들은 동지를 전통 명절로 여겨왔다. 이 날이 돼야 한 살을 더 먹는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동지에는 재앙을 물리치고 없앤다는 의미에서 집집마다 정성스럽게 팥죽을 쑤어 가족 또는 이웃과 나눠 먹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서양문명이 빠르게 들어와 서구화가 확산되고, 과거 조상의 세시풍습은 고루한 것으로 여겨 소홀히 대하면서 사실상 소멸 단계에 있다고 해도 과한 표현이 아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동지 즈음에 일부 농촌 마을이나 사찰에서 팥죽을 쑤거나 민속놀이를 하는 등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가정에서 팥죽을 만들어 먹기 어려운 현실을 감안하여 가족끼리 사찰에 와서 동짓날 팥죽을 받아 가족끼리 나눠 먹는 것도 좋을듯하다. 동지의 또 다른 의미는 새로운 출발을 나타낸다. 왜냐면 이날을 기점으로 점차 낮이 길어지고 밤이 짧아지기에 음(陰)의 기운이 사라지고 양(陽)의 기운이 증진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팥죽의 색깔이 붉은 것도 양의 기운을 상징한다. 2년 전 시작된 전대미문의 감염병 코로나19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연일 확진자 수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으며 특히 수도권을 중심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친지나 친구도 쉽게 만나자고 하기 어려운 암흑의 코로나 터널을 언제 벗어날지 예상조차 어렵다. 코로나19의 장기화로 몸과 마음도 지쳐가고 우울증까지 호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를 하루속히 물리치는 벽사(8F9F邪)의 의미가 담긴 동지를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대전환의 계기로 삼았으면 참 좋겠다. 동지가 지나면 곧 보신각을 비롯해 전국의 사찰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서른세 번의 종이 울려 퍼질 것이다. 2022년은 임인년(壬寅年) 호랑이 해다. 다사다난했던 2021년을 보내는 길목에서 모든 어려움과 나쁜 것은 동지에 맞춰 훨훨 떠나보내고 호랑이해를 맞이했으면 한다. 그리하여 새해에는 코로나와 작별을 고해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 다정한 이웃들과 편안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하며 사람들이 더욱 건강하고 복 많이 받기를 발원해본다. 오봉도일 스님 봉선사 부주지ㆍ양주석굴암 주지

[삶과 종교] 요가의 본질과 전용

일전에, 요가와 피트니스 강의를 통하여 대중들에게 심신의 건강과 균형을 찾도록 지도해온 지인이 대화하다가 난감한 고민을 토로하였다. 고민인즉, 그분의 수강생들이 수업의 심화를 위해 유튜브 영상을 검색해 보았더니 거의 모두라고 할 정도로 상업적 의도의 선정적인 영상뿐이어서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영상은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만들어진 영상까지 가세해서 요가의 본지를 흐리고 초심자에게는 적지 않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어서 우려가 크다는 게 요지였다. 즉 이미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인 요가라는 이름으로 선정적인 눈요기 영상을 올려 조회수 높이고 광고 수익이나 노리는 영상이 대체적인 경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요가의 전통에 따르는 입문과 학습은 독학이나 자습이 아닌 스승을 통하여 정신원리와 물질원리의 이치를 밝히고 조화로 나가는 긴 수행의 여정이다. 그래서 요가(Yoga)라는 말 자체가 산스크리트어의 어근인 유즈(yuj, 영어의 yoke에 해당)에서 나온 말로 결합 또는 통합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인간의 다양한 감각의식을 근본적인 의식인 마음과 통합시키는 것으로 궁극적인 근원이 드러날 수 있도록 일체의 감각 기능을 통제하고 억제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요가 수행은 외계의 사물에 집착을 일으키는 개별의식을 근본적인 마음과 결합시키는 것으로, 일체의 마음 작용을 정지시킴으로써 해탈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요가는 아리야인이 인도 대륙에 들어오기 전부터 행한 오랜 역사를 갖는 수행법이었다. 이러한 실천법이 파탄잘리(Pata0148jali)의 요가 수트라(Yoga-s016Btra)를 통해 체계화되고 그 체계화된 전통이 요가학파로 전승되었다. 오늘날 요가란 말은 요가학파의 전유물이 아니라 종교를 초월하여 해탈을 위한 실천 수행법 일반을 가리키는 폭넓고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요가 수트라에 의하면 요가 수행의 목적은 마음 작용의 정지에 있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8실수법이라 불리는 8가지의 실천체계이다. 즉 해서는 안 되는 것,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것, 심신을 편안하고 안정되게 하기 위한 좌법, 호흡의 조절, 외계로 향하는 감각기관의 의식을 제어,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것, 선정, 삼매 등의 체계를 지닌다. 요가는 인도의 정신수행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로, 또한 요가학파의 전통을 통해 오늘날 풍부한 정신문화를 간직한 나라로 인정받고 있다. 이와 함께 인도의 윤회사상 가운데 아귀계라고 하는 세계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아귀의 생태는, 어떤 상황에서도 타자의 불행이나 행복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부류를 말한다. 무슨 일에 종사하든 한 번쯤 자신도 돌이켜 볼 일이다. 최성규 철학박사ㆍ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삶과종교] 건강한 꿈을 갖는 나라 만들어 가기

그녀는 미국 처음의 시각, 청각 시청각 장애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미국의 작가였고 교육자이며 인문계 학사를 받았다. 그녀의 이름은 헬런 애덤스 켈러(Helen Adams Keller)다. 헬런 켈러는 태어날 때부터 시각, 청각에 문제가 있는 장애인으로 태어나지는 않았다. 그녀는 생후 19개월이 됐을 때 성홍열과 뇌막염에 걸려 시청각 장애인이 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신체적 약점을 통해서 오히려 앞을 보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정치적 활동을 통해 인권운동을 할 수가 있었다. 그녀가 남긴 유명한 어록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눈먼 상태보다 눈은 보이지만 아무런 삶의 비전(vision)을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나쁘다라는 의미 있는 말이 있다. 인간의 소중함은 각자의 인생에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꿈이라고도 말하고 존재목적이라고도 말한다. 이것은 인간만이 하나님께 받은 하나님 형상의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자녀교육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며 사회활동을 통해 목적을 만드는 것도 꿈이 있기 때문이다. 산업부흥이 일어나던 시절 시골 사는 우리 부모님의 꿈은 소를 팔아 장남을 서울로 보내 공부시켜서 출세하게 하는 것이었다. 전쟁 폐허 가난 속에 살던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 만큼은 기름진 땅을 물려주고자 하루에 12시간 넘는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고통 속에서도 우리 내 부모님들에게는 이런 꿈들이 있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4장에는 예수께서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해 40일 금식 기도를 하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모습이 나온다. 마귀는 40일 동안 아무 음식도 먹지 않으셨던 예수님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명령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시험을 한다. 이 시험은 본질과 비본질을 바꾸는 시험이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단순하게 먹고 마시는 것으로 무너뜨리려는 아주 음흉한 시험을 보여 준 것이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라고 본질적인 당신의 꿈을 선포하시면서 마귀를 꾸짖으신다. 예수님은 결코 인간의 본질적 존엄성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조정 당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꿈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을 본래의 인간답게 회복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의 꿈은 너무 가시적이며 육체적, 충족적이다. 인간의 인간다움이 아닌 온종일 자신의 배설물에 뒹굴며 편하게 먹고 자는 짐승과 같은 안일함의 꿈이다. 이제는 우리 자손들이 우리를 위해서만 살지 않고 우리나라보다 가난하고 힘들어하는 나라들을 도우며 함께 살아가는 선진국의 품격이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 몇몇 세계적인 스타들이 한국을 대표하지 아니하고 한국의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여유로우며 정의로우며 자애가 있으며 주변을 배려할 줄 아는 그런 일등시민의 수준 있는 삶의 자태를 보고 싶은 꿈이 이뤄지길 바라고 있다. 보수적인 삶 속에는 조금 더 모든 사람들을 품고 함께 가는 넉넉함을, 진보적인 삶 속에는 예와 기품을 가진 뜨거운 사람 사랑하는 품격 있는 그런 국민이 사는 나라 동방의 예의지국 대한민국이 되는 꿈이 실현되는 그날을 보고 싶다. 그런 건강한 꿈을 갖는 나라 만들어 가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성경은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서로서로 선한 것을 심고 양보를 심고, 기다려 줌을 심은 후에 이 열매들을 볼 때쯤엔 이 동방의 작은 나라는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에 있으리라 한낮의 꿈을 꿔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AI가 넘볼 수 없는 인간의 능력

지난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AlphaGo) 간의 바둑 대결은 세간을 뜨겁게 했다. 최고 중 최고 인간 실력자와 최고의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과의 대결, 이세돌의 신의 한수로 알파고가 버그를 일으킨 장면은 인간이 인공지능에 결코 질 수 없다는 통쾌함을 선사했지만 최종적으로 4대 1로 진 대결이었다. 혹자는 AI가 인간을 뛰어넘어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신기하게도 인간에게는 AI가 넘볼 수 없는 능력이 있다. 바로 메타인지(Metacognition)라는 자기 성찰 능력이다. 이는 자신의 인지적 활동에 대한 지식과 조절을 뜻한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 아는 것에서부터 모르는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는 전 과정을 말한다. 다시 말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모르는 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이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이 메타인지 능력이라는 것이다. 즉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도 같은 능력이다.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생들은 거의 10년 가까이 가톨릭 대학교에 머물며 철학과 신학 수업을 배운다. 세상 사람들은 바보같이 시대에 뒤처진 학문을 왜 공부하고 있냐?라고 물을 수 있다. 과연 어리석은 일일까? 신학생들은 여러 철학자의 사상과 역사를 배우는데 특히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워주고자 문답의 방법으로 사상을 전파했다.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반복해서 표현하고 그 표현을 구사하기 위해 더 많이 사고한다. 이 문답을 통해 자신이 모르거나 착각한 부분을 발견해 스스로 부족한 점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바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어록은 메타인지 향상과 닮아있다. 그뿐만 아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정말 후회할 만한 순간이 넘쳐난다. 교회 분열, 중세 종교재판, 십자군 원정, 유대인과 타종교인들에 대한 박해, 여성에 대한 억압, 원주민들에 대한 폭력,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에 대한 파문, 2차 대전 중 나치에 대한 묵인 등 교회의 여러 가지 과오들이 많다. 하느님 앞에 부끄럽고 스스로 교만했기에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교회 역사 2천년을 돌아보며 하느님과 인류에게 용서를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끄럽게도 저지른 일들이 무엇인지 몰랐고 그러다 보니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슬프지만, 교회는 이런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당당히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반성하고 또 반성하려 노력한다. 바로 메타인지, 자기 성찰 능력을 끊임없이 발휘하기 위해서다. 인공지능 시대라는 새로운 도전으로 인해 인간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마주할 것이다. 또 실수하고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후회하고 일어날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후회하지 않을 일이 무엇인지 인식하는 삶이 뒷받침될 때 말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인정한다는 것, 힘들지만 분명히 멋진 일이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2021년 첫눈과 김장운력

새벽예불을 마치고 법당문을 열고 나서니 눈 손님이(11월11일) 찾아와 손짓을 하는 듯했다. 가을이 미련을 두고 떠나지 않은 끝자락에 겨울을 재촉하는 첫눈이 산사(山寺)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오봉산 석굴암이 해발 500여m에 자리하다 보니 첫눈은 채 녹지 않고 절 마당을 얇게 덮었다. 어둠이 가시니 마치 하얀 도화지를 펼쳐 놓은 듯했다. 해가 뜨면 눈이 사라질까 한참을 바라봤다. 혼자서 첫눈을 감상하는 것이 미안해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을 지인들과 함께 공유했더니 곧 답장이 이어졌다. 도시에는 눈이 오지 않았어요, 우리 동네는 눈 대신 비만 살짝 왔어요라는 아쉬움과 더불어 기분 좋은 선물을 받았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첫눈은 누구나 동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초겨울이 준 선물이었다. 사실 산사의 겨울은 도시보다 빠르게 찾아온다. 사찰도 현대화돼 예전처럼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거나 눈 때문에 길이 막히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겨울을 준비하는 것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마을보다 앞서 김장을 미리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지난 6일 봉선사는 배추 2천 포기로 김장을 했는데, 사찰에서는 김장 운력(雲力)이라고 한다.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서 일하는 것을 절에서 운력이라고 하는데 오래전부터 전통을 이어오는 울력이라고도 한다. 운(雲)이란 한자를 사용하는 것은 구름처럼 모여 함께 힘을 모아 일을 하는 까닭이다. 일종의 공동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봉선사에서 김장할 때 주지 초격 스님은 물론 여러 대중스님과 신도, 자원봉사자 등 100여명이 참여한 것도 운력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봉선사와 비롯하여 전국에 사찰에서도 바쁘게 김장울력을 하고 있다. 김장은 절에 있는 연못에서 직접 길러 수확한 연잎 가루를 넣어 별미다. 남양주 봉선사는 여러 사람의 정성이 깃든 김장을 지역의 여러 가지로 어려운 독거노인이나 소년소녀 가장에게 해마다 자비의 손길로 나눠 전하고 있다. 운력에는 화합(和合)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려면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각자의 입장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고 상대를 배려하면서 공동작업을 해야 효율성이 크다. 현대사회에서는 많이 사라졌지만 우리는 품앗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 크고 작은 일이 생기면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나서 힘을 보탰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심화되고 아파트 생활이 주를 이루면서 이웃에 누가 사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도시에서 품앗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을 사라졌다. 이웃이 함께 김장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김장을 사다 먹으라는 TV 홈쇼핑 광고를 들을 때면 마음이 쓸쓸하고 허전하다. 그래도 중소도시나 시골에서는 품앗이가 실낱처럼 이어지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예전처럼 이웃까지는 아니라도 가족이라도 모여 김장을 하면 어떨까. 어머니나 부인만 김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온 가족이 함께하는 김장은 우리 시대의 품앗이이며 운력이다. 어려울수록 김장을 이웃과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는 문화가 이어지면 참 좋겠다. 지난 7일 입동(立冬)이 지나고 나니 겨울은 더욱 속도를 내면서 깊어가고 있다. 마을에도 첫눈이 올 것이고, 때로는 폭설도 올 것이다. 시대는 바뀌고 인심도 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겠지만 눈 손님을 맞이하면서 조금은 더 따뜻한 마음, 함께하는 마음, 나누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오봉도일 스님

[삶과 종교] 악의로 농담하지 마라

요즘 우리 사회의 언어는 자기모순에 빠진 듯한 극심한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나와 주위의 언어 표현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수용을 넘어 찬양의 수준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상대방의 언어가 주는 선의나 비전에 대해서는 폄훼는 물론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티샤는 말한다. 악의로 농담하지 말라고. 11세기에 활동한 아티샤가 이미 그와 같은 경구를 남겼다는 것은 이것 또한 오래된 인간의 습속인가도 싶다. 아티샤는 동인도 사호르 국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왕위를 계승하지 않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나란타의 대논사가 되었다. 그는 티벳으로 가서 가르침을 전하였는데 그의 ??수심요결??에 이 말이 중요한 가르침으로 나온다. 아티샤는 붓다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고 또한 선(禪) 쪽의 사람들도 같은 맥을 잇고 있다. 악의로 농담하지 말라는 이 경구는 농담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농담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농담의 이면 심리를 깊이 파고들어가 농담 뒤에 숨겨져 있는 근본 이유를 살피라는 것이 그가 뜻하는 바이다. 아티샤로부터 천 년이나 지난 후에 프로이트가 나타나서 아티샤의 그 일을 다시 했다. 프로이트가 생각하기에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소재로 농담할 때는 농담의 대상이 되는 그 사람을 향한 분노가 있고 그 사람을 공격하고 싶어하는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는 것이다. 농담 형식을 빌려 우회적으로 익살스러운체하기는 하지만 진짜 동기는 공격하는 데에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실제로 아티샤가 의미하는바 역시, 말로라도 폭력적이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농담으로라도 폭력적이지 말라는 의미이다. 폭력은 폭력을 부르고, 분노를 부르면서 끝없는 악순환에 빠져들어 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에 대해서 외견상으로는 진짜 동기를 타자는 정확히 알 도리가 없지만 그러한 의도의 농담을 하는 자신은 알고 있다. 만약 마음에 누군가를 해치고 싶고 공격하고 싶은 고의적인 의도가 있을 때는 그것을 농담으로 표현하지 마라, 그러나 그렇지 않고 순수한 익살 감각에서 그저 재미로 하는 농담이라면 그리고 이 인생을 너무 무겁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감각에서 우러나오는 농담이라면 전혀 문제 될 게 없으며 주위를 유쾌하게 한다. 순수한 익살은 전혀 난폭하지 않게 농담으로 표현할 수 있다. 가끔은 표현상으로 난폭하게 보이더라도 듣는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농담하는 사람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헤치기 위하여 웃을 수도 있는데, 그런 웃음은 잘못이 된다. 폭력적 의도를 숨기는 비열한 전략은 결국 폭력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속 깊이에 인생에 대해서 더 많은 즐거움과 더 많은 웃음을 자아내고 싶은 바람이 전제되어 있다면 무엇이든지 덕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아티샤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는, 고의로 사람을 해치기 위하여 남의 잡담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잡담은 농담도 아니고 재미도 아니고 익살도 아닌 폭력이기 때문이다. 최성규 철학박사ㆍ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삶과 종교] 길 만드는 사람들

모든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만들어 가는 개개인의 추억의 앨범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인생이라는 시간의 앨범은 각자의 삶 속에서 자신이 걷는 삶의 방향을 가늠하게 한다. 인생의 길을 걸으며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내 삶의 나침판이며 때로는 지도가 되어 주는 길 안내를 추억의 앨범이 인도해 줄 때가 있다. 어릴 적 기억 속에 시골에 살던 집에 갈 때면 잘 닦여진 새 길은 멀리 돌아가기에 짧은 논두렁을 밟고 길을 만들어 학교에 다녔던 추억이 있다. 어릴 적 그때의 바람은 누가 이 먼 길 돌아 걷지 않도록 짧은 지름길 만들어 주기를 기도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지형적으로 국토의 전체 면적의 4분의 3이 산지로 이루어져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지게 문화가 신라시대 이전부터 사용됐다고 학계는 보고 있다. 지게는 어깨에 짐을 메고 다니는 운송수단이다. 손쉽게 만들 수 있고 특별한 장치가 없어서 모든 서민들이 이 지게로 모든 것을 운송하며 농업과 상업에 만능으로 쓰인 없어서는 안 되는 삶의 절대적 필수품이었다. 지게는 어느 산이든 어깨에 메고 오를 수 있으며 사람이 갈 수 있는 정도의 길은 문제없이 다니는 수단이었다. 지게 문화는 넓은 길이 필요하지 않다. 세상을 지배했던 강대국들이 전쟁과 물자 수송과 여러 통치에 필요한 부분들을 위해서 만들어 낸 것은 곧으며 넓은 길이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만들어졌듯이 길을 만들고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됐다는 것이 역사의 증명이 아닌가. 그 길을 만들고자 가장 필요했던 것은 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지도자이지 않았을까? 국력이 약한 나라는 길을 넓히지 않는다. 넓은 길은 오히려 침략자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지게를 지고 유연하게 자연의 지형에 익숙해지는 것이 편리하고 쉬운 운송수단이 될 수 있었겠지만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진취적인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고속도로는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명품 길이 됐다. 동남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일부 유럽의 도로까지 한국 고속도로공사의 실력은 공사실적을 가지고 인정을 받고 있다. 이제 자연의 환경을 바꾸고 터널을 뚫어 길을 만드는 대한민국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물질적인 길을 만드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나라가 가야 할 길을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바른 삶을 위해 길을 선택하라고 요구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해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장 13-14절) 이제는 우리가 바른 가치관을 가진 길을 만들어 가야 한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정직하고 진취적인 길을 가야 한다. 새로운 길을 이 시대에 만들 수 있는 사람에겐 분별력이 필요하다. 세상을 분별하고 시대를 분별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가 부러워하는 경제의 기적을 맛본 나라가 됐다. 여러 나라 들이 경제발전의 모델로 뒤따르고 싶어하는 모범의 나라가 됐다. 대한민국이 다시 한 번 이 시대에 새로운 가치의 길을 만들어 세상의 리더의 나라가 돼주길 기대한다. 좋은 가치관의 지도자들이 나오고 미래의 좋은 사회의 대안을 가지는 새 길을 만드는 지도자들이 있을 때 이 나라는 다시 한번 동방예의지국으로서 칭송을 받던 아름다운 나라로 일어서게 될 것이다. 시대를 선도해 가는 길 만드는 사람들이 일어서기를 기도해 본다. 조상훈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요!”

유네스코는 지난 2012년에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2013년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을 기념해로 지정한데 이어, 올해에는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세계 기념해로 지정하였다. 국법을 거슬러 참수(斬首)된 죄 없는 사형수의 역설에 전 세계가 공감한 이유는, 조선이라는 계급 사회 안에서 기득권적 삶을 포기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평등사상과 인간의 존엄, 생명, 진리, 정의 등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생애 때문이다. 김대건(金大建, 1821-1846년) 신부는 19세기 중반의 인물이다. 당시 조선은 혼란의 시기였다. 대외적으로 서구 열강들이 중국을 넘어 조선에까지 통상을 요구하며 위협해 왔고, 대내적으로 세도 정치의 등장으로 정치 기강이 흔들리고 국가 운영의 기준인 삼정(三政)이 문란해져서 가혹한 수탈과 지역 차별로 인한 각종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경제력을 쥔 상인 계급의 등장으로 양반 제도가 점점 힘을 잃어 가면서 사회 구조의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정부는 서학의 유입이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지배 질서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고 판단,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탄압하였다. 1836년 1월 조선 천주교회에 가장 시급한 일이 하루빨리 사제를 육성하는 일이라고 여겨 소년 김대건과 두 소년을 뽑아 마카오로 보내 사제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조선 천주교회는 세 명의 선교사와 100여명의 신자들이 목숨을 잃는 어려운 시기를 맞이한다. 타국에서 조선의 천주교 박해 소식을 접한 김대건은 하루빨리 신부가 되어 조선 땅을 밟는 꿈을 꾼다. 1845년, 한양을 떠난 지 10년여 만에 신부가 되었지만 선교사 영입과 더불어 선교활동에 힘쓰다가 조선 입국 7개월 만인 1846년 6월 5일 백령도 해역 순위도에서 체포, 한강 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형(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에 매어 달던 형벌)을 언도받고 25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당신은 천주교인이오? 김대건 신부가 옥중 취조 때 받은 질문이다. 당시 아니오라는 말만으로도 풀려날 수 있었지만, 김대건 신부는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답한다. 그리고 차별이 엄격하던 신분 사회에 하느님으로 인해 만민이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천주교 교리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박애 정신을 가르친다. 상놈이 양반에게 형제 혹은 자매라고 부를 수 있고 모두가 공생하는 사회를 꿈꾸면서 말이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 생태계 파괴와 기후 위기, 경제적 양극화 등의 위기 속에서, 이기심과 분열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들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2021년 유네스코의 기념인물에 김대건 신부가 선정된 이유 역시 그의 생애와 정신이 현 인류에 가장 필요한 가치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연꽃처럼 살아야

주말에 갑자기 기온이 내려갔다. 비까지 쏟아져 가을은 건너뛰고 겨울이 앞당겨 온 것 같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온이 따뜻해 반소매 입은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고 몇십 년 만에 찾아온 추위에 모두 두꺼운 옷을 껴입고 종종걸음을 한다. 자연 앞에 무기력한 것이 사람임을 실감케 한다. 산사에는 추위가 조금 더 빨리 찾아온다. 대부분 절이 산에 있는 까닭이다. 광릉 숲 곁에 자리한 25교구 본사 봉선사에도 가을과 겨울이 함께 물들어가고 있다. 기온이 뚝 떨어졌지만, 가족끼리 손을 잡고 나들이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부터 이어지는 코로나19로 지구촌 인류가 큰 고통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 역시 이로 인해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2차 백신 접종률이 70%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묵묵히 참고 인내하면서 방역수칙을 지켜온 결과다. 집단면역이 형성되면 예전의 일상으로 조금 더 빨리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사찰이나 성당, 교회도 이 변화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상과 단절돼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연결된 것이 종교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마거사도 말씀하기를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고 했고 부처님도 중생들이 괴로우면 당신도 괴롭다고 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종교는 사람들이 그동안 소홀하게 여겨온 내면을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현대문명이 짧은 기간에 극도로 발달하고, 물질을 우선하는 풍토가 확산돼 왔기에 코로나19같은 무시무시한 감염병이 창궐한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우리와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탐욕과 이익을 앞세운 결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내 안의 마음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현대사회와 물질을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지만, 내 마음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선 삶의 균형을 찾아갈 수 없다. 나 자신이 중요하듯 남도 중요하다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마음이 중요해진 오늘날이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맑은 마음과 행동이 모일 때, 모두가 상생하고 화합하는 길이 열리고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봉선사에는 연못이 있다.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살지만 오염되지 않는 연꽃을 보면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세상을 오탁(五濁) 또는 예토(穢土)라고 한다. 다섯 가지 번뇌가 세상을 더럽히는 진흙 같은 세상이란 의미다. 그런데 연꽃은 오탁과 예토에 있지만, 거기에 물들거나 휩쓸리지 않고, 여여하게 꽃잎을 피워낸다. 그렇다고 저 혼자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꽃들, 생물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렇기에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 한다. 요즘 날씨를 보면 금세 겨울이 올 것만 같다. 무상한 세월의 흐름을 바라보면 우리를 지금 힘들게 하고 있는 코로나도 언젠가는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물들지 않은 채 공존하는 연꽃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이 어려운 난관을 우리 모두 이겨냈으면 한다. 그리하여 언젠가, 저마다의 마음에서 연꽃을 피워낼 수 있는 뜻 깊은 삶이 됐으면 좋겠다. 오봉도일 스님

[삶과 종교] 감로도와 현실인식

지금까지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불화(佛畵) 형식으로 감로도(甘露圖)라는 것이 있다. 일반적으로 돌아가신 분을 위한 재의식 불화여서 영단화라고도 한다. 그 구성을 살펴보면 상단은 일곱 여래와 함께 자비의 화신인 관음과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든 이를 빠짐없이 구원하고자 하는 구원의 화신인 지장, 그리고 구원된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해 가는 인로보살 등이 표현돼 있다. 중단은 망자를 위한 시식단(施食壇)과 작법승중(作法僧衆)에 의한 의례(儀禮)의 모습이 나타나 있으며 그 아래의 하단은 감로도의 구성에서 가장 흥미롭고 독특한 곳으로, 중앙의 큰 아귀를 중심으로 육도 윤회상이 그려져 있다. 즉 지옥계를 상징하는 지옥의 여러 장면과 아귀계를 상징하는 아귀의 무리, 축생계를 상징하는 개나 소의 묘사와 아수라계를 상징하는 격렬한 전쟁의 장면, 또 인간세상의 현실적인 장면이 묘사된 인간계, 그리고 천인과 선인들을 묘사한 천계 등이 하단에 묘사돼 있다. 이러한 정황을 극명하게 잘 보여주는 경우로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구원을 위해 당대의 화승인 상겸에게 그리게 한 수원 용주사의 감로도를 들 수 있겠다. 하단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인간 행위의 갖가지 장면을 수식이나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보이고 있다. 술 취해 싸우는 사람, 짐을 잔뜩 실은 수레에 깔려 죽는 사람, 굶어 죽는 사람, 우물에 빠진 어린아이, 의지할 곳 없는 노인, 죽어 가는 자식을 바라만 보고 있는 비정한 부모, 간통한 것을 들켜 곤욕을 치르는 사람, 전쟁 장면, 남사당의 한바탕 공연, 어린아이가 병든 아버지를 간호하는 모습 등 인간의 삶 속에서 겪는 온갖 삶의 모습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온갖 고난은 당연한 줄 알았던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은 수많은 생명을 위로하고 천도하려는 목적이다 보니 있는 그대로 모두 드러내놓아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에는 상단에 있던 지장이 다시 하단에 내려와 석장을 짚고 목련 존자와 함께 있다.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한 장한 아들, 효성의 상징인 목련 존자는 재를 올리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여러 장면을 구름으로 적절하게 나눠 배치하면서 어색함 없이 화면을 통일시키는 놀라운 구성력도 보여준다. 불화는 종교회화이고 종교회화는 이상 세계를 시각화시킨다는 점에서 상징주의적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런데 감로도는 상징주의적 성격과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는 사실주의적 성격이 공존하는 독특한 불화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감로도의 성격으로 인해 끊임없이 변해가는 각 시대의 풍속을 반영할 수 있었고 또한 화승(畵僧)들에게는 의궤에 따라 그대로 그리는 제한적 작업에서 벗어나 예술가로서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도 제공해 줬다. 감로도를 보면서 끈질기게 지녀온 우리 민족의 창의적인 현실 극복의 힘을 느낄 수 있으며, 나아가 현재 우리가 겪는 각 분야의 난관을 우리의 삶, 우리의 현실 안에서 극복할 수 있는 귀중한 교훈을 선조들이 이미 마련해 놓았음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최성규 철학박사ㆍ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삶과 종교] 선진국 만들어 가기

오늘날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대한민국을 2021년 올해에 선진국 그룹에 포함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국민은 아직은 선진국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OECD 37개 국가 중 35등이다. 왜 우리나라 국민은 자신을 선진국의 국민으로 자랑스러워 하지 못하는 것일까? 일찍이 서유럽 중에서도 민주주의를 싹 틔운 선진국은 프랑스이다. 프랑스는 민중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최초의 혁명으로 근대의 여명을 연 시민혁명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프랑스가 일찍이 선진국의 그룹에 우뚝 서게 된 것은 단지 경제적인 측면이 아니다. 프랑스는 국민이 저녁을 오래 먹는 이유는 토론하기 위해서다라고 한다. 프랑스는 이 토론을 교육의 주체로 사용해왔다. 프랑스의 정치철학가이며 역사학자였던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1805년에 태어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가 남긴 민주주의 사상은 프랑스라는 국가를 민주주의 국가로 세우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가 가르친 자유와 평등을 통한 민주주의의 흐름은 프랑스라는 나라의 중요한 영양소가 되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사람을 존중하고 상대방을 인정해 주는 관계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바로 창조자이시며 만물의 왕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의 발아래서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기신 섬김의 모본이 아니겠는가? 기독교 신앙에 기초를 두고 태어난 미국이라는 나라가 전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리더의 국가가 되어 있는 현실에서 토론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다시 한번 되새겨 봐야 한다. 선진국이란 단지 돈 많은 강대국을 뜻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민주주의 꽃을 일찍이 피웠던 프랑스의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이 선거 유세 중에 한 젊은 남성이 던진 삶은 계란에 투척 당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남성에게 이 말을 남겼다.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 달라고. 진정한 선진국은 상대방과 서로 대화할 줄 아는 국민이 있는 나라이다. 서로 존중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토론하는 문화를 만드는 지도자들이 바로 정치가들이다.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에게 귀를 내어주는 지도자가 있는 나라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상대방을 향하여 험한 인상과 흥분된 논조로 비난과 조롱을 일삼는 삼류지도자들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 우리나라 20대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오고 있다. 이번 대선의 후보들에게서는 거칠고 유치하게 자신의 귀를 막고 자기 목청만 높이는 후진국 대통령 후보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불안의 시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전 세계에서 코로나19 방역을 잘하는 나라로 꼽히는 대한민국이지만 사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불안한 요소들은 너무나 많다. 부끄럽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자살률 1위 국가다. 현재 코로나19 사태로 희생된 분들에게 국가적 관심이 높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어서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낮은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출산율은 거의 세계 최저 수준이기에 학교들이 점차 문을 닫고 있다. 그뿐인가? 1998년 외환 위기부터 우리나라는 구조 조정의 시대, 대량 해고의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위기에서 벗어나는 해법이 항상 해고였다. 그리고 OECD 국가 중 남녀 임금 격차가 큰 나라가 우리나라다. 항상 노심초사해야 하는 사회, 일명 불안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자. 천주교에서는 20~30대를 찾아보기 어렵다. 왜 그럴까? 이 불안한 세상에서 기성세대들 중심 사목에 집중한 천주교회는 젊은이들에게 큰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무한 경쟁에 내몰려 생존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에 지치고 힘들 수밖에 없다. 그것에 대한 실질적인 대안은 없고 교회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이상주의로 인해 지치고 힘든 젊은이들에게 오히려 문제의 화살을 돌리곤 한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천주교를 기쁨과 매력을 주지 못하는 교회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천주교의 성직자 중심 사목으로 인해 교회 구성원들은 더 이상 대화도 기대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환경에 살아간다. 아마 20년만 지나도 천주교에 봉사할 신자들은 거의 없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불안의 시대, 종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차적으로 모든 사람이 기본권을 누리고, 아플 때 돈 걱정 안 하고 병원에 갈 수 있고 배고플 염려하지 않고 어느 수준까지 교육받을 수 있는 국가적 정책을 위해 가톨릭은 물론 종교 단체들이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많은 이들이 돈 있는 사람들한테 거둬서 가난한 사람들한테 주는 것을 복지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북유럽식 복지는 사회보험을 공동구매하는 방식이다. 의료보험, 교육보험, 연금보험 등을 국민 모두 공동 구매한다면 가격을 낮추는 효과로 국민 전체가 큰 혜택을 보는 시스템이다. 즉 우리 모두에게 정책적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또한 종교가 할 수 있는 큰 능력 중 하나는 위로(consolatio)가 아닌가 생각한다. 라틴어로 함께라는 의미의 con과 달램이라는 solatio의 합성어다. 즉 함께 달래주고 안심시키는 일이 위로하는 일이다. 사실 천주교에서 젊은이들은 많지 않지만, 독특하게 누군가 돌아가시면 신자들이 장례식장에 벌떼처럼 찾아와 기도하는 문화가 있다. 돌아가신 분의 영혼을 위해, 그리고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신자들은 처음 보는 망자와 유가족을 위로한다. 망연자실한 유가족들에게 특히 지인이 많지 않은 유가족들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된다. 불안의 시대, 우리 모두 위로하며 함께 살아가는 상생의 삶이 필요하다. 김의태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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