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잘못으로부터 배운다

공자에게는 수많은 제자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안회(顔回)가 독보적이었다. 공자는 안회의 자질과 덕을 극찬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보다 낫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회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하늘이 날 버리시는구나”라며 통곡한 공자는 그 후에도 제자를 많이 그리워한다. “제자 중에서 누가 배우는 것을 좋아합니까”라는 노나라 군주의 질문에 공자가 “안회라는 이가 있어 배우길 좋아했습니다. 그는 노여움을 옮기지 않았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단명해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 배우길 좋아한다는 자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배움을 좋아한 안회의 특징을 이야기하면서 “노여움을 옮기지 않았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부분이다. 우선 ‘노여움을 옮기지 않았다’는 것은 감정을 잘 제어했다는 뜻이다. 흔히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말을 쓴다. 욱해서 실수하거나 후회할 말을 내뱉은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기분이 나쁘다고 애먼 사람한테 짜증 내고 화풀이한 적도 있을 것이다.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저지르는 잘못이다. 그렇다고 ‘노여움’이란 감정 자체를 없앨 필요는 없다. 다만 그 감정에 휩쓸려 판단력을 잃지 말고 적절하게 표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배움을 통해 가능하다. ‘배움’ 하면 우리는 보통 지식을 쌓는 것을 생각하지만 수양 또한 배움이다. 내 감정의 상태를 살피고,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즉각 이를 바로잡으려면 평소 배움을 통해 마음의 역량을 키워 놓아야 한다. 공자는 ‘분사난(忿思難)’이라며 화가 날 때는 내가 화를 냄으로써 생겨날 어려움을 생각하라고 경계했다. 예전에 곤란했던 경험을 되새기며 마음을 가라앉히라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에서 배우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다음으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았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잘못해도 되고 실수해도 된다는 뜻이다. 그 대신 그로부터 교훈을 얻고 개선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라는 것이다. 잘못을 직시해 내게 부족한 점을 확인하고, 이를 보완하는 계기로 삼으라는 뜻이다. 이는 윤리적인 잘못이나 중대한 실책 같은 큰(?) 문제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잘못, 사소한 실수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수학 계산 문제를 풀다가 실수로 틀렸다고 하자. 어느 지점에서 잘못 풀었는지, 왜 착각했는지 그 원인을 알아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된다. 과학 실험을 하다가 실패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가설에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변수를 고려하지 못했는지, 그도 아니면 실험 과정에 오류가 있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성공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안회가 잘했다는 이 두 가지는 얼핏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실천하기 쉬운 일이었다면 공자가 안회를 평가하는 말로 사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안회처럼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성장할 수 있다.

[삶과 종교] 운명을 바꾸는 세 가지 법칙

사주팔자는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 네 자리를 계산해 여덟 글자를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예측하는 일종의 운명통계학이다. 나름 동양의 오래된 학문이다. 한창 사주학에 관심이 있을 때 손에 책이 잡히는 대로 탐독하다가 우연히 재미난 내용을 발견한 적이 있다. 오래전에 아주 유명한 도사가 있었다. 산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해 큰 성과를 얻었다. 세상에 내려와 사람들의 사주팔자를 봐주는데 적중률이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끔 사주팔자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분명히 타고난 사주에서는 부자로 살 사람인데 실제로는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가난하게 살 사람인데 실제로는 부유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타고난 사주에서는 일이 잘 풀릴 운인데 실제로는 운이 꼬인 사람이 있고, 반대로 운이 꽉 막힌 사람인데 실제로는 일이 술술 잘 풀린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의 사주팔자를 보면서 이론으로 따지면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다른 운세로 사는 사람들을 자꾸 만나게 된 도사는 스스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사람들을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치열하게 탐구했다. ‘과연 뭘까? 저 사람들의 운명의 변수가 무엇이었을까’ 끊임없이 고민했다. 관찰하면서 고민하고 사유한 끝에 말년에 도사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사람들에게 내놓는다. “내가 평생 동안 사람의 운명을 연구했는데 타고난 사주팔자와 전혀 다른 운명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더라. 오랫동안 연구한 끝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이치를 발견했으니 잘 들어보시오. 첫째, 마음이 아주 착하고 덕을 많이 쌓은 사람들은 팔자에 나쁜 운이 있었는데도 아무런 재앙 없이 무사히 넘어가는 것을 보았노라. 둘째, 마음이 아주 악하고 덕을 많이 해친 사람들은 팔자에 좋은 운이 있었는데도 곤경에 빠져 신세를 망치거나 손해 보는 것을 보았노라. 셋째, 종교에 귀의해 신앙심이 지극한 사람들이 타고난 운명을 뛰어넘은 것을 분명히 보았노라. 이 세 가지 이치는 내가 평생 동안 연구해 터득했으니 사람들이여, 타고난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마음을 잘 쓰고 복덕을 많이 쌓으시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궁금해한다. 난 어떤 삶을 살까? 난 어떤 일을 하게 될까? 과연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잘될까? 많은 사람들은 늘 자신의 운명을 알고 싶어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운명을 알고 싶어 하면서 운명을 바꾸려 하지는 않는다. 간혹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말에 비싼 부적을 사거나 이상한 비법을 실행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운명을 바꾸는 진정한 방법은 부적에 있지 않고 괴이한 비법에 있지 않다. 핵심은 바로 ‘마음’이다. 수천년 동안 인간의 운명을 연구한 선각자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운명을 만든 것도 ‘마음’이요, 운명을 바꾸는 것도 ‘마음’이다. 지금 당신의 마음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향하고 있습니까? 마음, 마음을 잘 닦아야 한다.

[삶과 종교] 생각과 인격, 마음의 근육을 키우라

묻지마 범죄와 길거리의 악마들이 기승을 부리면서 어린 학생들까지 선전포고하듯 생각 없이 범죄 예고에 동참하고 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에서 히틀러의 부하로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일을 매우 근면하고 효율적으로 해냈던 아이히만을 통해 평범한 인간이 커다란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악의 평범성’을 지적한다. 아렌트는 이 원인을 ‘생각 없음’이라고 단언하면서 아이히만의 죄가 ‘사유하지 않음’에 있다고 봤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대해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과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고 말한다.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범죄 문제의 해법은 어디에 있을까? “사형제를 부활하라”, “호신용 무기를 갖춰 각자도생하라” 등의 제도적·물리적 방법으로는 비판적 성찰의 부재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범죄를 막을 수 없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교육에 관심을 두고 구체적으로 학교와 가정을 생각해 보자. 먼저 학교다. 오랫동안 학교에서 유지된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고상한 표현은 “제발 그림자만 밟히면 다행이다”는 고충 어린 토로가 돼 버렸다. 이 문제를 선생님의 교권과 학생의 인권으로 분리하는 프레임은 옳은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소모적인 논쟁이다. 학교에서 깊이 생각하고, 탐구하며, 분별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교육을 해야 함에도 저학년은 단순한 보육에서 끝나고, 고학년이 되면 입시 경쟁과 서열화에 숨이 막혀 간다. 좋은 학교를 분류하고, 한 두 문제로 학생을 등급으로 나누며,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책임을 회피하는 학교 체제에서 학생들이 터득하는 것은 사유와 인격의 함양보다 거짓과 교만, 그리고 자기 기만이다. 학교는 교사, 학생, 배우는 것들이 유대감의 그물에 촘촘히 연결돼야 한다. 개방성과 환대와 배려를 통해 형성된 유대감의 그물에서 학생들은 자유로운 생각과 표현, 인격과 사람다움을 함양할 수 있다. 다음으로 가정이다. 묻지마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분석한 뉴스에서 이들의 가정환경과 교육의 정도를 언급한다. 어떤 이는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폭력과 학대에 노출됐고, 어떤 이는 우수한 가정환경에서 비교와 억압에 시달렸다. 대한민국의 부모들이 가진 문제는 자녀에 대한 책임의 시한이다. 과연 자녀를 언제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좋은 직장, 결혼, 재산의 증여가 자녀의 성공을 담보하지 않는다. 인생에서 적어도 열 번 이상은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며 고난의 광야를 통과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수많은 어려움, 실패와 좌절의 광야를 겪으면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을 키워 주는 것이다. 그래야만 미지의 세계를 향한 비전과 도전의 행보가 가능하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삶이냐’에서 “그대가 가진 것을 버리고 모든 속박으로부터 그대 자신을 해방하라. 그리고 존재하라”고 역설하면서 구약성서의 인물들을 예로 든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세기 12:1)는 명령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지면서 유대 부족의 역사가 시작된다. 아브라함을 필두로 그의 자손인 이삭, 야곱, 요셉도 고향과 씨족, 그리고 가진 것을 버리고 미지의 세계로 가는 길을 떠났으며, 하나님을 만나 변화되고 튼실한 마음의 근육을 키워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새로운 일들을 창출하는 모습을 창세기에서 볼 수 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세기 49장 22절) 야곱이 요셉에게 한 축복이다. 학교와 가정에서 교사와 부모의 교육을 통해 사려 깊은 인격적 존재로 성장하고, 마음의 근육이 단단한 잘 자란 나무가 돼 밖으로 무성한 가지를 뻗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교육의 해법이야말로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사회적 문제를 예방하고 인재를 키워낼 수 있는 첩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종교] 성경에도 가짜 뉴스는 있었다

오늘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급속도로 퍼지며 이를 통해 조작된 거짓 정보, 일명 가짜 뉴스를 유포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가 자주 발생하곤 한다. 과거 광우병 논란, 악성 루머, 허위 사실 유포 등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 개인의 명예 훼손뿐만 아니라 사회 공동체에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래서 많은 언론사와 정보기관에는 뉴스 검증을 위한 팩트체크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쓰나미와 같은 정보 홍수 시대에 정보를 찾는 능력보다 정보의 참과 거짓을 식별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진 세상이다. 성경의 첫 이야기인 창세기에서는 첫 번째 가짜 뉴스를 만들어낸 ‘교활한 뱀’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창세 2,17)고 하셨다. 그런데 뱀은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며 여자 하와를 혼란스럽게 한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창세 3, 1)라며 ‘하나의’ 나무가 아닌 ‘어떤’ 나무라고 살며시 그 말씀을 왜곡한다. 하와는 뱀의 말을 정정한다.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창세 3, 2) 뱀은 포기하지 않고 여자를 안심시키는 거짓말을 한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창세 3, 4)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 5) 마침내 여자는 뱀의 매혹적인 꾐에 넘어가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약속에 대해 의심한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창세 3, 6) 여자는 결국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만다. 이로써 하느님과 이웃, 사회와 피조물을 거스르는 수많은 형태의 악행으로 이어지는 비극적 역사가 시작된다. 이러한 성경 이야기는 해롭지 않은 허위 정보는 없고, 오히려 거짓에 대한 신뢰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진리의 왜곡은 아무리 경미해 보일지라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그 옛날에 기록된 성경에서도 경고한다. 하물며 아직도 기승을 부리는 이런 가짜 뉴스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세월호 사고 때 등장한 노래 가사를 기억할 것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바로 끊임없이 빛과 참, 그리고 진실을 찾는 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로 “거짓 바이러스에 대한 근본적인 해독제는 진리로써 정화되는 것”이라 표현한다. 진리는 사물을 판단해 참이나 거짓을 규명하는 것, 숨겨진 것에 빛을 비추는 것뿐만 아니라 진실로 누군가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진리 속에 거짓이 있을 수 없고, 오히려 서로를 지켜주겠다는 책임감이 앞서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책임감 있는 우리, 언론 매체, 그리고 정부가 됐으면 한다.

[삶과 종교] 자신에게 한계를 두지 마라

‘내가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 실패하든 성공하든 일단 부딪쳐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도저히 엄두가 안 난다며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공자의 제자 염구는 후자였던 모양이다. 그는 스승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라 실천하고 싶지만 힘이 부족해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논어 ‘옹야’편) 그러자 공자가 염구를 꾸짖었다. 좋아하는 일이 생겼다면 힘이 넘치든 부족하든 일단 그 길로 나아가야지, 왜 시작조차 하지 않고 ‘나는 못해’라며 한계부터 긋느냐는 것이다. 목표를 이루기에 내 자질과 능력이 정말 역부족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쏟아내 본 뒤에야, 그야말로 하얗게 불태운 후에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염구의 질문은 배움에 관한 것이다. 배우고자 노력해보지도 않고 포기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이 스승과 제자의 대화를 보고, 공자가 ‘노력 만능론’에 빠진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공자 같은 위대한 성인(聖人)이 어떻게 평범한 제자의 마음을 알겠냐는 반응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 누구보다 노력했던 사람이다. 죽간을 엮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독서에 심취해 ‘위편삼절(韋編三絶)’이란 고사성어를 만들어냈고 “배우지 않을지언정 일단 배우고자 한다면, 능하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말라”며 “다른 사람이 한 번에 잘하면 나는 백 번을 하며 다른 사람이 열 번에 잘하면 나는 천 번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공자는 이 말을 실천한 인물이다. 우리가 흔히 역사 속 위인들은 남이 따라 할 수 없는 천부적인 능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양적인 차이가 더 크게 놓여 있다. 스웨덴의 심리학자 안데르스 에릭손에 따르면 천재라 불린 사람들의 지능지수는 평균 상위 14% 정도로, 이들은 보통 사람보다 5배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좋은 환경과 남다른 노하우, 효과적인 인풋 전략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노력의 양이 어마어마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45년간 330건의 논문을 쓰고, 볼테르는 2만1천통의 편지를 썼으며, 에디슨은 1천93건의 특허권을 냈다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음악사의 최고 천재로 꼽히는 모차르트도 유명한 작곡가의 음악치고 수십번 듣고 연구하지 않은 작품은 없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였다. 무릇 한계를 넘어서려면 한계까지 자신을 내몰아야 한다. 아니, 처음부터 한계를 긋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 정도밖에 할 수 없어’라고 선을 긋는 순간 절대로 그 선 이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니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 정 힘이 부족하면 공자의 말처럼 주저앉으면 그만이다. 나에게 힘이 남아 있는 한 끈질기게 나아가야 한다. 어느새 한계선이 출발선으로 바뀌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종교] 소금을 퍼먹은 어리석은 사람

옛날에 어리석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리석은 사람은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게 됐다. 주인이 만든 음식을 먹어 보고 너무 싱거워 맛이 없다고 불평했다. 주인은 그 말을 듣고 소금을 가져와 적당히 음식에 뿌려주고는 다시 먹어보라고 권유했다. 소금을 넣은 음식을 먹고는 깜짝 놀라 생각했다. ‘아까 음식이 맛이 없었는데 소금을 넣으니까 음식이 갑자기 맛있어졌다. 소금을 조금만 뿌려도 이렇게 맛있는데 소금을 많이 먹으면 얼마나 더 맛있을까?’ 어리석은 사람은 소금을 잔뜩 구해 집으로 돌아와 마구 퍼먹었다. 도리어 입과 목에 큰 고통이 닥쳐 데굴데굴 구르다가 결국에는 병을 얻고 말았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무엇이든 균형과 조화, 그리고 지혜가 필요하다. 어떤 젊은 주부가 건강을 위해 거의 매일 몇 시간씩 등산을 했다. 처음에는 몸도 튼튼해지고 마음도 시원한 느낌이었다. 긍정적인 효과를 만끽하며 몇 년 동안 등산을 하다가 무릎이 점점 아프기에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진단 결과 무릎의 연골이 다 상했다고 한다. 등산은 정말 훌륭한 운동이다. 하지만 균형과 조화가 필요하다. 하산할 때 무릎을 보호하며 길을 잘 내려오는 지혜도 필요하다. 세상일이 다 그렇다. 아무리 좋은 일도 멈출 줄 알고 선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무엇이든 분에 넘치지 않는 적당함이 필요하다. 스스로 적당함을 아는 것을 옛사람은 ‘지족(知足)’이라고 표현했다. ‘만족할 줄을 아는 것’이다. 스스로 만족을 알고, 분에 넘치는 짓을 하지 않고, 선을 지킬 줄 알면 재앙이 저절로 피해간다는 말이 있다. 인생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넘볼 수 없는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력하고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되 끊임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지혜롭게 판단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렵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는 ‘돈’이다.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 펼쳐졌다. 참 씁쓸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이상한 내용을 봤다. 여러 나라를 상대로 사람들에게 ‘행복한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을 주제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1위가 ‘돈’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풍요로운 돈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행복한 양념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꼭 명심해야 한다. 지나친 돈에 대한 집착은 내 삶을 황폐하게 만들 수도 있다. 마치 오늘의 우화였던 ‘소금을 먹은 어리석은 사람’처럼 말이다. 우리가 돈을 대하는 자세도 이와 같다. 돈을 대하는 지혜가 중요하며, 돈을 뛰어넘어 인생의 빛나는 가치가 따로 있음을 성찰해야 한다.

[삶과 종교] 소유보다 존재, 성공보다 성실

학창시절 성적이 우수해 받는 우등상이 부러움의 대상이었으나 학교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석해야 받는 개근상도 매우 가치가 있었다. 성실함의 상징인 개근상이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개근 거지’라고 놀림감이 된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체험학습을 신청하고 여행을 떠나는데,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여행을 목적으로 체험학습 신청을 못하는 학생들은 가난한 아이로 치부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모인 놀이터에서까지 거주지에 따라 수많은 ‘거지’가 유통되고 있다. 전거지(전세거지), 월거지(월세거지), 반거(반지하거지), 빌거(빌라거지), 엘사(엘에이치 사는 거지), 휴거(휴먼시아 거지), 주거(주공아파트 거지)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이러한 현상은 돈이 많고, 자산을 더욱 축적하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천민자본주의와 싸구려 성공주의의 표출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성공과 성장, 내·외형을 크고 화려하게, 내 몸집을 더욱 확장하는 것에 혈안이 돼 성공 열망을 분출하며 성공하는 꿈을 꾸고 살아가고 있다. 새로운 사업이 잘되기를 꿈꾸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을 꿈꾼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꿈꾸고, 좋은 집을 사는 것을 꿈꾼다. 사람마다 꿈의 대상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는데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성공과 성장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너무 몰입하게 되면 성실함과 신실, 혹은 충성이 폄하되거나 상실될 위험이 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소유의 실존 양식과 존재의 실존 양식을 비교한다. 소유적 실존 양식은 경제적 부와 값에 따라 등급을 매기며 돈과 물질,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면서 타인을 지배, 억압, 착취하게 된다. 지식에 있어서도 ‘보다 많이’ 아는 것이 구심점이기에 생각과 이해 없이 내용과 줄거리를 암기한다. 또 종교에 대해서도 맹목적으로 믿고 복종하며 지도자를 우상처럼 여긴다. 소유의 실존 양식은 다분히 성공을 소유하기 위해 얽매이며 주먹을 꽉 쥔 느낌이다. 반면 존재적 실존 양식은 많은 소유가 아닌 풍요로운 존재가 목적이며, 자기 능력으로 소통하면서 타인과 공존하며, 함께 성장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긴다. 지식에 있어서도 ‘보다 깊이’ 알고자 하는 것이 구심점이며 과거 학습 내용과의 연상을 통해 생각하고 이해한다. 특히 마음가짐과 행동 변화에 관심하고 능동성과 독립과 자유, 비판적 이성을 중시하기에 내면에서 만들어진 활동적인 삶이 자연스럽게 외부로 흘러나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일조하게 된다. 마치 손을 쫙 펴고, 손가락들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스며드는 것처럼 지속적인 변화와 새로움이 흐르는 느낌이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기록된 요셉은 꿈을 꾸는 사람이었지만 적극적으로 성공을 위해 분투한다거나 총리가 되겠다고 권모술수를 쓰지도 않았다. 요셉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에 전심을 다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도 노예의 일에 성실했다.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을 때도 주어진 일에 정성을 다했고, 간수들의 신임을 얻었다. 성실함을 통해 이집트의 총리가 된 다음에도 일관되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요셉 이야기의 백미는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형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한 일이다. 요셉은 존재적 실존 양식으로 살았기에 타인을 권력으로 억압하고 지배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포용하고 사랑하며 용서할 수 있었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실존 방식으로 더 큰 성공을 위해 분투하기보다 겸손히 정성을 다해 주어진 일에 성실할 때 비로소 인생의 바른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세상으로 흘려보낼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종교] 이해하기 힘든 수도자의 길

어느 신부님의 회고록에서 본 이야기다. 딸이 봉쇄수도원에 입회한 다음, 그 아버지는 세 번이나 딸을 수도원에서 빼내 집으로 데려왔다. 믿음이 없었던 비신자 아버지에게 딸이 수녀원에 산다는 것, 그것도 봉쇄수도원에서 지내며 외출도 면회도 없이 산다는 것이 하나의 납치된 생활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수녀원에 가 난리를 쳐서 딸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문제는 딸이 2주일도 안 돼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딸을 어르고 달래며 사정했지만, 그리고 집에서 아예 감금하다시피 했지만 딸이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갔을 때는 정말로 귀한 딸을 잃어버린 것 같아 죽을 맛이었다고 한다. 딸은 아버지에게 이제 그만 좀 하라고 자식이 원하는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 아빠의 도리 아니냐며, 아버지는 딸에게 자식이 그릇된 길을 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있느냐고, 하필 왜 이 감옥 같은 생활을 하느냐며 둘 사이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또 딸은 그래도 행복하다고, 왜 내 행복을 빼앗으려고 하느냐며 울먹였고, 아버지는 이 감옥에서 행복하겠느냐고, 뭔가 네가 홀린 것이 분명하다며 딸을 만류해 본다. 그런데 행복하다고 말하는 딸의 얼굴은 너무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끌고 올 수 없었다고 한다. 그날 딸을 수녀원에 두고 돌아온 아버지, 도무지 딸의 행동을 이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 자신도 믿음을 가져봐야 뭔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성당 문을 두드렸고, 마침내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아직도 믿음이 뭔지, 왜 딸이 그 감옥과 같은 곳에서도 평화롭고 행복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뭔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믿어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이 직업을 이상하게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낮은 소득 때문일 것이다. 어느 리서치 조사에 의하면 한국에서 소득이 가장 낮은 직업 중 3위가 신부, 2위가 수녀라고 한다. 사실 수도자들은 청빈 서약을 하기에 수녀 개인이 통장을 소유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또 그들의 활동에 따라 발생하는 모든 소득을 수도회 재산으로 봉헌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국가는 그들을 저소득 계층으로 판단해 나이가 든 수녀들을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 지원비마저 개인의 소유가 아닌 수도회의 공동소유로 돌려야 한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길이다. 그래서 보통 수도자의 삶을 자신을 태워 빛을 내는 ‘초’에 비유한다. 기꺼이 자신을 태우고 녹여 주위를 밝힌다. 그래서 자신은 없어지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산다. 사랑이라는 가치가 세상의 가치보다 위대하다고 믿기에, 나로 인해 누군가가 빛날 수 있는 그 숭고함을 믿기에, 그리고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밝히는 희망을 믿기에 이 삶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삶과 종교] 부모님이 내게 준 사랑을 기억하라

지금은 삼우제가 끝나거나 49일이 지난 후 상복을 벗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마음으론 삼년상을 치르는 문화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데 왜 삼 년인지는 잘 모른다. 논어에 그 이유가 나오는데, 공자의 제자 재아가 삼년상이 너무 길다며 일 년만 해도 충분하지 않냐고 불평하자 공자는 자식이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전적으로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기간이 삼 년이라고 말한다. 삼년상을 지내는 것은 최소한 그 시간만큼이라도 부모님이 주신 사랑을 기억하라는 의미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에서 돌고 있는 글 중에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시가 있다. 버전이 워낙 다양해 내용이 제각각이지만 공통으로 나오는 대목이 있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 음식을 흘리며 먹거나 옷을 잘 입지 못하더라도 이해해다오. 우리가 너희를 먹이고 입혔던 그 시간처럼. 우리가 나이가 들어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더라도 부디 끊지 말고 들어다오. 너희가 어렸을 때 같은 질문을 하고 같은 이야길 해 달라고 졸라도 기꺼이 응했던 우리처럼.’ 흔히 나이가 들면 아이처럼 된다고 한다. 신체가 노쇠해지면서 체력이 약해지고 몸의 움직임이나 반응도 갈수록 느려진다. 기억력이 쇠퇴하고 판단력도 흐려진다. 정신을 지탱하던 힘이 예전 같지 않게 되는 거다. 그러다 보니 많은 것이 어설프고 영글지 못했던 어린아이 때처럼 행동하게 된다. 한데 우리는 부모님의 이런 모습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이해는커녕 짜증을 내고 귀찮아한다. “아니 왜 자꾸 흘리며 드세요? 옷 또 빨아야 하잖아요”, “그 얘기 지금까지 열 번 넘게 하셨어요” 등등. 그런데 우리가 어려서 비슷하게 행동했을 때 부모님은 어떠셨을까? 부모님이라고 귀찮았던 순간이 없으셨을까? 분명히 아닐 거다. 하지만 참고 이해하며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행동을 보듬어주셨다. 우리가 이런 부모님의 사랑을 그대로 보답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쉽진 않을 거다. 그래도 최소한 부모님이 내게 주신 사랑을 잊지 말고, 적어도 그만큼은 부모님을 이해하려 노력했으면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후회가 남을지도 모른다. 논어의 문장을 하나 더 보자. “부모님의 나이는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되니,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기쁘고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두렵다(‘이인’ 편).” 한 십 년 전만 해도 부모님이 내 곁을 떠나실 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앞으로 몇 번이나 벚꽃 피는 걸 볼 수 있을까?”, “내가 이제 건강에 자신이 없다”고 말씀하시면 가슴이 콱 막혀 온다. 아무리 평균 수명이 늘어났다고 해도 사람의 생은 유한한 법이다. 어느새 부모님과 함께할 날이 한참 많이 남았다고 자신할 수 없는 시점에 와 버렸다. 공자의 말처럼 부모님이 여전히 함께 계셔 주셔서 정말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상황이다. 한데 이 문장은 부모님이 연로하신 뒤가 아니라 늘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부모님이 영원히 내 곁에 계셔줄 거라 착각하면 안 된다. 언제고 떠나실 수 있다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사랑한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을 뒤로 미루지 말자. 괜히 화내고 짜증 부리지 말자. 부모님이 내게 주신 사랑을 기억하며 늘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삶과 종교] 꿈보다 해몽이다

옛날 옛적에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선비가 있었다. 지방에 살던 선비는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길을 떠났다. 서울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해가 지고 날이 컴컴해졌다. 선비는 근처 마을 주막에 가서 하룻밤 묵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생생한 꿈을 꿨다. 선비가 떡하니 앉아 밥을 먹으려는데 갑자기 밥상이 확 엎어지는 꿈이었다. 자기 꿈에 놀라 잠에서 벌떡 깬 선비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고. 밥상 엎어진 꿈을 꿨으니 이번 시험 결과도 다 엎어졌구나.” 의욕이 사라진 선비는 집으로 그냥 돌아갈까 고민에 빠졌다. 그때 멀리서 은은하게 목탁 소리가 들려왔다. 선비는 답답한 마음에 목탁 소리를 따라 절을 찾아갔다. 자그마한 절을 발견하고 슬쩍 들어가 보니 노스님이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선비는 냅다 노스님께 가서 자신의 답답함을 호소했다. 노스님은 선비의 꿈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젊은 선비 양반. 그 꿈은 아주 좋은 꿈이오.” 선비는 깜짝 놀라 말했다. “스님. 밥상이 엎어졌는데 좋은 꿈입니까?” 노스님은 웃으며 말했다. “선비 양반, 생각해 보시오. 밥을 먹으려는데 밥상이 엎어졌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을 다시 차려야지요. 그러니 시험 보기 전에 밥상이 엎어졌으니 이제는 시험에 합격해서 새 밥상을 차려 먹는다는 뜻이오. 이게 좋은 꿈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때서야 선비가 환하게 웃으며 뛸 듯이 기뻐했다. “스님. 그런 깊은 뜻이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비가 즐거운 마음으로 절에서 나간 뒤 옆에 있던 동자승이 노스님께 여쭸다. “스님. 그 꿈이 그런 뜻인가요? 정말 놀랍습니다.” 동자승의 말에 노스님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허허. 나야 모르지.” 동자승이 깜짝 놀라 다시 여쭈었다. “스님. 그런데 왜 그런 해몽을 하셨습니까?” 노스님이 동자승을 미소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꿈이란 것이 본래 마음이 만든 것이란다. 좋은 꿈도 나쁜 꿈도 마음이 만들었는데 자기 마음이 만든 꿈에 자기가 속고 있구나. 좋은 꿈이든 나쁜 꿈이든 그 선비의 마음이 편안해졌으면 그걸로 되지 않았느냐. 허허허.”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그 선비가 노스님을 찾아와 과거시험에 합격했다고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스님의 해몽이 정말 용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우리 주위를 보면 많은 사람이 스스로 만든 착각과 환상에 스스로 묶이고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 또 별일도 아닌 일에 어떠한 징조나 조짐이라고 집착하며 두려워하기도 한다. 이때 조금만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야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면, 내가 느끼는 그 모든 상황이 대부분 내가 만들어낸 집착의 그림자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어리석음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스스로 만든 조작된 믿음으로 진짜 좋은 기회를 수없이 놓치고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꿈보다 해몽이란 유명한 말이 있지 않은가. 어떤 해석이든 생각하기 나름이다. 꿈자리에 굴림을 당하지 말고 꿈을 굴리는 존재가 돼야 한다. 마음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굴리는 존재가 돼야 한다.

[삶과 종교] 용서 받지 못할 자

교양수업 독서토론 시간에 ‘피의자 신상공개’를 논제로 선정하고 긍정과 부정의 의견을 주고받았다. 찬성 측은 국민의 알 권리, 보복 범죄와 재범률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고, 반대 측은 신상 공개의 기준이 모호하고 낙인찍기에 의해 사회 복귀의 어려움을 제시했다. 결론은 사건마다 다르고 나름의 스토리가 있으니 국민의 알 권리 및 공공의 이익과 교화를 통한 사회 복귀 및 인권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아야 함에 동의했다. 학생들의 성숙한 토론문화와 함께 논쟁에서 언급된 ‘용서 받지 못할 자’가 기억에 남는다. ‘용서 받지 못할 자’가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한다. 나영이를 폭행한 조두순, N번방 사건의 조주빈, 갑질 폭행을 일삼은 양진호, 제주도 펜션에서 전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토막 낸 고유정, 부산 돌려차기 남자, 과외 교사를 구한다며 중학생으로 위장해 살인을 저지른 정유정, 수많은 학교폭력 가해자들을 향한 사회적 공분이 치솟아 신상공개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회자되고 있는 형국이다. 프랑스의 유대인 철학자 장켈레비치는 ‘우리가 그들을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유명한 글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피해자들에게 가해자들(나치 정권)을 용서하라는 요구가 고조되자 매우 분노하면서 “용서란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선언한다. 장켈레비치는 살해자들이 용서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그들이 가스실에서 죽인 어린이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사회·정치적 공간에서 하나의 ‘수단’으로 쓰이는 ‘용서의 오용’을 비판한다. 반면 철학자 데리다는 ‘용서의 정치’만을 다루는 데서 ‘용서의 윤리’로 넘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치명적 죄’를 용서할 때 비로소 진정한 ‘용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용서를 ‘밤’에 비유하면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은밀히 행하라”는 예수의 말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처럼 조건적인 용서(용서의 정치)와 무조건적인 용서(용서의 윤리), 두 축은 인간의 현실 세계에서 매우 중요하기에 이분법적 분리나 한쪽의 환원은 곤란하며 끊임없는 협상이 필요하다. 호손의 소설 ‘주홍글씨’에 등장하는 주인공 해스터 프린은 네덜란드에서 미국 보스턴으로 이주해 온다. 곧 뒤따라 오겠다던 남편은 2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고, 외로운 그녀 앞에 딤스데일이라는 젊은 목사가 나타나 둘은 사랑에 빠져 사생아를 낳게 된다. 간음한 여인이라 손가락질을 받고, 가슴에 A(Adultery·간음한 여자)를 새긴 채 살아야 하는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감옥에서 나온 그녀는 사람들의 비난을 뒤로한 채 자신처럼 죄를 짓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가서 헌신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고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그녀를 용서한다. 이제 그녀 가슴의 주홍글씨 A는 능력 있는 여자(Able), 존경받을 만한 여자(Admirable), 천사 같은 여자(Angel)로 변해 있었다. 호손은 타인을 낙인찍는 일과 더불어 낙인을 극복하는 법을 말하고 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누가복음 17:3). 도저히 용서 받지 못할 자를 교화하는 힘, 그 또한 ‘용서’에 있지 않을까?

[삶과 종교] 죽음 껴안기

2008년 신학생 생활을 마치고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신부가 됐다. 보통 서품을 받은 새내기 신부들은 경험이 풍부한 주임신부님과 함께 살며 사목적 소양을 배우고 그의 사목활동을 돕는 보좌신부 역할을 한다. 나 역시 새로 부임한 주임신부님과 함께 1년을 지냈다. 당연히 그분과 지내며 미운 정 고운 정이 많이 쌓였다. 사실 신부님은 정말 무섭고 엄한 분이셨다. 나는 당신 차를 잘못 세차했다는 이유로, 연수 때 집을 안 지켰다는 이유 등으로 나이 서른 살에 야단을 맞곤 했다. 물론 신부님은 정도 많은 분이셨다. 항상 보좌신부를 먼저 생각해 주시는 마음, 자전거를 함께 타며 느낀 진한 형제애, 신자들과 하나 되는 친교의 가족 캠프 등 좋은 추억도 많이 쌓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3년 전부터 신부님이 담낭암에 시달리셨고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호전되기보다 암세포가 간으로 전이된 상황이었다. 큰 병마와 싸우신 신부님은 결국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하셨고 며칠 뒤 편안히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한창 사목해야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삶과 죽음을 관장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어떤 인간의 힘으로도 거부할 수 없었다. 신부님은 투병 중에 이런 고백을 하신다.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 재촉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다만 두 손 벌려 기다리고 받아들이기만 할 뿐입니다.” 3년간의 고통, 그리고 예고된 죽음,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고통을 우리는 헤아릴 수 있을까? 무덤덤하게 그 죽음을 껴안는 모습, 그저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모습, 놀랍기만 했다. 죽음은 마치 이 세상에서 내가 제외되는 느낌, 씁쓸한 퇴장, 무기력한 존재가 돼 버리는 순간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어쩌면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제자들에게 당신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 주신 것처럼 죽음은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나의 자리를 내어 주는 일일 수 있다.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누군가에게 그늘이, 누군가에게는 먹음직스러운 열매로, 누군가에게는 잠깐 쉬어 갈 수 있는 의자처럼 말이다. 분명 신부님도 기꺼이 당신의 자리를 내어 주셨다고 느껴진다. 특별히 당신께서 심어 놓은 작은 씨앗들, 즉 사제로서 진정 나를 위한 삶이 아닌 하느님과 신자들을 위해 헌신한 삶이 마치 나무 줄기가 돼 누군가의 그늘이 돼 주셨고, 누군가에게는 열매가 돼 필요한 양분이, 누군가에게는 의자가 돼 하나의 쉼터가 돼 주셨다. 우리는 죽음을 기꺼이 껴안을 수 있는가? 어른들 대부분은 어린 자녀들이 임종을 앞둔 사람 곁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방어막을 치곤 한다. 죽음이라는 불확실한 세계를 두려워하고 외면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탄생과 성장’, ‘생명의 변화와 죽음’이라는 자연의 순리를 어찌 간과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뿐인 삶이고, 그 삶의 마침이 있다면 순간순간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지 않을까?

[삶과 종교] 가짜뉴스를 대하는 자세

사람들이 메신저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공유하는 글 중에 가짜뉴스가 자주 눈에 띈다. 코로나19로 불확실성이 심화하고, 사회의 갈등과 분열이 첨예화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그런데 예전에는 얼핏 봐도 말이 안 되는 황당한 내용이 주를 이뤘지만 요즘엔 진짜인 ‘척’하는 뉴스가 많아졌다. 이들 ‘가짜뉴스’는 사실과 허구를 뒤섞고, 사실을 교묘하게 짜깁기해 사람을 현혹한다. 실제 있을 법한 사례와 출처를 거론하고, 구체적인 수치와 통계를 제시하고, 유명 언론사나 전문가의 이름을 갖다 붙여 ‘정말 그런가 봐!’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인공지능(AI)이 발전하면서 정교한 거짓 사진과 거짓 영상까지 덧붙여지고 있다. 이른바 ‘딥페이크(deepfake)’라고 불리는데 ‘생성적 적대 신경망(GAN·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 기술을 활용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와 영상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GAN이란 가짜 데이터를 생성하는 Generator와 이 데이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별하는 Discriminator를 경쟁시켜 완성도를 높여 가는 방식을 말한다. 시간과 노력만 충분히 투입한다면 이제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힘든 수준까지 도달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가짜뉴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가짜뉴스도 ‘표현의 자유’에 속하니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걸러주길 기대하며 두고 봐야 할까? 정확한 정보가 왜곡된 정보에 의해 무너지고 균형 있는 정보가 편견에 싸인 정보에 밀리면 사람들은 더는 올바른 판단이 어려워진다. 최근의 일들만 봐도 그렇다. 미국 펜타곤 근처에서 폭발이 있었던 듯한 가짜 사진이 공개되자 미국 국채와 금값이 치솟았고 우크라이나에선 자국 군인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가짜 영상이 유포되면서 혼란이 발생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체포되는 가짜 영상으로 지지자들이 크게 동요한 적도 있었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공동체의 신뢰를 붕괴시키고 갈등과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민주주의에 큰 해악을 주는 사건으로 진행될 우려도 크다. 사회적 에너지가 불필요하게 소모되는 것이다. 따라서 관련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윤리적 저널리즘을 확립해 가짜뉴스를 근절해야 한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의식 전환이다. 그저 내가 원하는 뉴스라 해서, 내가 믿고 싶은 뉴스라 해서 무조건 퍼 나를 게 아니라 내용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정보의 참과 거짓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익명 뒤에 숨어 오가는 말과 뜬소문들은 본래 정제되지 않았을 뿐더러 근거도 부족하다. 곰곰이 따져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 그러지 않고 함부로 떠들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퍼뜨리면 나 또한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데 일조하는 셈이다. 일찍이 공자는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면 덕을 버리게 된다”(논어 ‘양화’편)고 했다. 이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삶과 종교] 연꽃이 된 소녀의 이야기

옛날 옛적에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사는 게 너무나 괴로웠다. 소녀는 괴로움을 피해 속세를 떠났다. 수도승이 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 산에서 한 스승을 만났다. 스승이 소녀에게 물었다. “여기에는 왜 왔니?” 소녀는 스승에게 대답했다. “괴로움을 피해 여기에 왔습니다.” 스승은 소녀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리고 물었다. “이곳이 괴로우면 다른 곳으로 또 피하겠네.”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소녀는 수도승이 됐다. 괴로움을 피해 이곳에 왔지만 이곳조차도 소녀가 상상한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결국 소녀는 환속을 결심했다. 떠나려는 소녀를 향해 스승이 물었다. “여기에서 왜 떠나려고 하니?” 소녀는 스승에게 대답했다. “제가 생각한 것과 너무 달라요.” 소녀는 다시 세상에 내려왔다.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기쁨도 있었고, 슬픔도 있었다. 수많은 일들을 겪었고, 소녀는 지쳤고, 소녀는 괴로웠다. 문득 옛 생각이 났다. 산에 올라 스승을 찾아갔다. 소녀는 여인이 됐고, 스승은 노인이 됐다. 여인은 그저 스승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울면서 외쳤다. “왜 저는 이렇게 괴로울까요.” 울음을 그치고 조용해진 여인을 데리고 스승은 연못으로 향했다. 넓은 못가에 꽉 차 있는 화려한 연꽃을 보며 스승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여기 와서 저 연꽃을 보며 모두가 감탄을 한다. 그런데 다들 연꽃에만 정신이 팔려 있단다. 너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니?” “내 눈에는 연꽃의 뿌리가 심어져 있는 저 바닥이 보이는구나. 이 연못은 꽃이 피기 전에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시궁창이었지. 그리고 때가 돼 꽃이 피면 사람들은 원래 여기가 시궁창이었음을 다들 잊어버리는구나.” 눈동자가 일렁이는 제자에게 스승은 말했다. “연꽃은 시궁창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저 시궁창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오르는구나. 자신의 주변과 환경이 시궁창 같을 때 결국 연꽃을 피우는 것은 누구의 몫일까.” 과거에 소녀였고 지금은 여인이 된 그녀는 굳게 결심했다. “나는 이제 저 연꽃같이 되리라.” 그녀는 다시 산을 내려갔고 삶이라는 길을 걸었다. 웃는 날도 있었고, 웃지 않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울지는 않았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울지 않았다. 다만 이와 같이 되뇌었다. “이 모든 것은 연꽃을 피우기 위한 과정입니다. 연꽃은 시궁창을 탓하지 않습니다. 나는 꽃을 피울 것입니다.” 훗날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기억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밝았던 사람,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사람, 괴로운 사람 앞에서 따스한 위로와 미소를 지어 주던 소중한 사람. 그녀를 알던 사람들은 그녀를 이렇게 기억한다. “이 세상에 연꽃과 같은 사람이었다.”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곳곳에 환한 연등이 불을 밝히고 있다. 이 세상이 더욱 밝아지기를. 우리 모두 연꽃 같은 사람이 돼 보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삶과 종교] 빈틈 없이 사랑하기

5월에 있는 기념일은 근로자의 날(1일),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스승의 날(15일), 성년의 날(셋째 월요일), 부부의 날(21일), 지인들의 결혼식과 각종 행사를 포함해 가정에 관련된 날이 많아 ‘가정의 달’이라고 부른다. 팍팍한 현대인의 생활 속에서 계획하고 챙겨야 할 이벤트와 선물들도 많기에 가정을 위한 기념일이 걱정과 부담으로 다가와 ‘가정의 달 증후군’이 생겨나기도 한다. 최근에는 부모와 자녀의 갈등과 충돌로 인해 ‘금쪽 같은 내 새끼’ 같은 다양한 솔루션 프로그램들이 등장한다. 신체적이고 학습적인 측면에서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시간을 측정했더니 엄마는 23분, 아빠는 6분 정도 할애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맞벌이에 투잡까지 분주하고 피곤한 탓에 이 시대 교육의 주체와 권위는 가정이 아니라 바깥에 있는 듯하다. 창세기 49장22절에 기록된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는 말씀은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축복한 표현이다. 가정에서 잘 키우고 양육해 담장 너머로 쭉쭉 뻗어 열매 맺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자녀를 키우는 곳은 가정이 아니라 바깥이다. 학교, 입시학원, 과외선생, 교육상담가, 전문가, 교수들에게 자녀 교육을 위탁하면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으며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교육의 권위를 가정 안이 아니라 가정 밖에 두고 대부분의 인생 결정을 외부에서 찾는 격이다. 그래서인지 항상 바깥으로 돌고 돌던 가족들이 만나니 함께 있으면 서먹하고 어색하다. 가족이지만 그 사이에 자연스럽지 못한 이상한 빈틈이 존재한다. 이를 ‘앵프라맹스(inframince)’라고 표현하는데 아래를 뜻하는 ‘infra’와 얇다는 뜻의 ‘mince’를 결합한 합성어다. 이것은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미세한 차이이며 냉기와 온기 사이의 아주 얇은 틈이기에 인간으로서는 깰 수도, 찢을 수도, 넘어설 수도 없는 아주 얇디 얇은 막이며 경계다. 부모와 자녀, 그리고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나타나는 앵프라맹스, 빈틈과 경계를 어떻게 메우고 극복할 수 있을까? 해답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즉 초월적인 힘이고 영성의 힘만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가족을 위해 시간을 내 기도할 것을 제안한다. 기도는 쇼핑 목록처럼 원하는 것을 나열해 신에게 요구하는 청구서가 아니다. 기도는 관계를 향해 손을 내미는 행위다. 기도를 통해 초월적인 사랑의 영이 우리의 심장부로 들어와 ‘나 중심’으로 가득한 마음의 공간에 다른 이를 위한 공간 확장이 생겨 자기 중심성에서 ‘다른 이’와 ‘공동체’로 나아가게 한다. 가정의 달 5월, ‘나의 가족’, ‘내가 속한 공동체’, ‘이웃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초박형의 얇은 틈과 경계인 앵프라맹스를 깨뜨리고 넘어서려는 기도와 시도를 해보자. 그것이 쌓이면 빈틈 없이 구석구석 사랑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13)

[삶과 종교]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한국 방문 일정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세월호 유족들에게 다가가 위로했던 행동들이 정치적으로 오해될 것이라 여기지 않느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유족들과 연대하기 위해 이것(세월호 추모 노란 리본)을 달았습니다. 이것을 달고 반나절쯤 뒤에 어떤 이가 다가와 ‘떼는 게 더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 비극적 사건에 중립적이어야만 한다고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성경 말씀(마태오 25,31-40)처럼 ‘누군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 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가 되었을 때 따뜻이 맞아들이는 일. 그리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을 때 기꺼이 찾아 주는 일’을 그저 행동으로 옮겼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그 행동에 정치적 프레임을 씌워 선한 행동을 정치적 행동으로 바꿔 버리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한다. 어쩌면 2천년 전부터 그리스도교는 이런 오해를 많이 받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이스라엘 민족 앞에 십자가 형벌을 받은 예수도 그저 세리와 창녀, 가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의 편에 있었지만 로마의 권위에 항거했다는 이유로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정치범이 됐다. 희한하게 그 오해는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나라가 뒤숭숭할 때마다 나타나는 정의구현사제단 때문에, 같은 사제라는 이유만으로 ‘신부님! 정치 좀 안 하시면 안 됩니까’는 소리를 듣곤 한다. 분명 듣기 거북한 이야기지만 어쩌면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에 사제들이 기꺼이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사제라면 당연히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 여겨진다. 지난 3월20일 전주시 풍남문 광장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이 다시 등장했다. 그들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할까? 현 시국에 대해 “불이야, 불이야”라고 다급히 외치는 호소이며, 신부가 돼 ‘오늘까지 겨레로부터 받은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이 될까’ 하는 마음뿐이며,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한 책임을 지닌(헌법 제7조)’ 대통령에게서 섬김의 본분이 아닌 그저 거짓과 변명뿐임을 묵과할 수 없는 절박함이다. 본격적으로 사제단은 4월10일 서울 광장을 시작으로 월요 시국기도회를 이어간다. 이날 사제단은 ‘삭꾼은 안 된다’라는 성명서를 통해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이 온 국민 앞에 바쳤던 맹서를 모조리 배신했다. 얼마든지 살릴 수 있었던 젊은이들이 죽게 놔두었고(이태원 참사), 농민을 무시하고(양곡관리법 거부) 노동자들을 적대시함으로써(“화물연대 파업은 북핵보다 더 위험하다”)…약자들에게 한없이 비정한 “삭꾼”(요한 10,12)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제단의 행보는 광복절까지 계속될 것이며, 대통령은 사제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길 바란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삶과 종교] 먼저 배운 뒤에야 즐길 수 있다

내가 즐기는 일은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하곤 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아버지에게서 선물 받은 나침반을 통해 과학에 흥미를 갖게 됐다. 나침반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는 것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힘에 관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술의 선구자 제니퍼 다우드나도 소설책인 줄 알고 펼친 책 ‘이중나선 The Double Helix’에서 생명에 대한 호기심을 품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모두가 우연한 만남을 꿈으로 이어가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관심이 식어버리든, 힘들어서 혹은 부모님이 야단쳐서 그만두든 한때의 호기심으로 끝나 버리는 경우도 많다. 설령 꿈으로 발전한다고 해도 끝까지 지켜내는 사람은 드물다. 그 길이 절대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력 외에도 학비, 시간 등 들여야 할 것도 많다. 한데 이런 방해물을 뚫고 앞으로 나아간 사람들, 호기심을 꿈으로 만들고 꿈을 현실로 만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 과정을 즐겼다는 것이다. 공자가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다. 어떤 대상에 대해 잘 안다고 해도 그 대상을 좋아해서 늘 가까이하는 사람에겐 미치지 못한다. 그 대상을 좋아해서 늘 가까이한다고 해도 그것에 정신없이 빠져 즐기는 사람을 당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즐길 수 있을까. 우연인 듯 찾아온 호기심과 흥미를 잘 살려야 할 것이다. 뭐든 내가 재밌어야 계속하는 법이니까. 한데 꼭 필요한 게 있다. ‘아는’ 것이다. 배우는 것이다. 흔히 공자의 말을 보고 ‘아는 것’,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을 별개로 생각한다. 하지만 알지 못하는데 좋아할 수는 없다. 독서하고 공부해서 그 내용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점점 더 빠져들게 되고, 재밌어지고, 그것을 좋아할 수 있게 된다. 야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 배트를 휘둘러 공을 맞혔다고 하자. 시원한 타격감에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고 해서 계속 무작정 배트만 휘두른다면 어떻게 될까? 금방 흥미를 잃을 것이다. 야구의 규칙과 기술을 알아야 그 재미를 이어갈 수 있다. 이처럼 우선은 알아야 좋아할 수 있다. 좋아하게 되면 거기에 더 많은 시간을 쏟으며 파고들게 되고, 응용하고 확장하며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그렇게 점점 더 나아가면 내가 이것을 완벽히 장악하고 손안에서 가지고 놀 수 있는 순간이 온다. 탁월해지는 것으로, 바로 ‘즐기는’ 경지다. 즉, 알아야 좋아할 수 있고 좋아해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한데 알아도 좋아하지 못하고 즐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앎이 나의 호기심에서 시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흥미나 관심사와는 상관없이 그저 대학에 가기 위해,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취업하기 위해 ‘안’ 것이다 보니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가 힘들다. 그러니 스치듯 생겨난 호기심이라 해서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쓸데없어 보이는 망상이라고 접어서는 안 된다. 그것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재밌다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 내가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은 꿈은 현실이 될 것이다.

[삶과 종교] 좋은 비는 때를 안다

좋은 비는 때를 알아 봄 되니 비가 내리네. 당나라의 시인 두보가 쓴 ‘호우시절(好雨時節)’의 문장이다. ‘좋은 비는 때를 안다.’ 요새 나라 소식에 번민한 일들이 많았다. 건조한 대기에 여기저기 산불이 치솟고, 지독한 황사와 미세먼지가 연일 이어졌다. 큰 피해가 있었지만 늦게라도 때맞춰 내린 빗줄기에 산불이 꺼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뿌연 황사와 갑갑한 대기가 봄날의 단비로 공기가 맑아졌다. 좋은 비는 때를 안다. 때를 알고 내린 비는 소중하다. 세상 사람들은 고민이 참 많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저 한숨만 나온다. 다들 힘들고 괴롭다. 화나는 마음은 산불과 같다. 활활 불타오른다. 답답한 마음은 황사와 같다. 갑갑할 따름이다. 온갖 고민은 미세먼지와 같다. 숨이 막힌다. 이럴 때 우리 삶에도 촉촉한 단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우리 중생들 마음에 좋은 비가 촤악 쏟아졌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들 마음이 맑은 날 공기처럼 시원하고 깨끗해졌으면 좋겠다. 인생이 쉽지가 않다. 하나를 해결하면 문제 하나가 생기고, 또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끊임없는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완전한 인생도 없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인생은 저마다 지고 가는 자신만의 숙제가 있다. 인생을 단편적으로만 보면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평생 걱정거리 없는 사람은 결코 없더라. 젊었을 때 잘나가던 사람이 나이 들어 꼬여 버린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미치도록 사랑해 결혼하고 온갖 부러움을 사다가 철천지원수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남부럽지 않게 살았는데 바닥을 치고 추락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거대한 권력을 움켜쥐고 평생 떵떵거리며 살 것 같았는데 시들어 꺾여 버린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영화를 누리며 살았지만 사실 내면은 누구보다도 외롭고 지독한 내면의 갈증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생은 결코 단편으로는 알 수 없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 동화를 보면 항상 마지막 문장은 ‘왕자님과 공주님은 평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왕자든 공주든 인생 살다 보면 사람 사는 것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래서 왕자와 공주가 결혼할 때 적당히 이야기를 끝내는 겁니다. 왜냐? 가장 아름다울 때 이야기를 맺어야 동화가 팔리거든요.” 이 말을 듣고 참 희한하다 생각하면서도 나름 일리도 있겠구나 싶기도 했다. 사람 사는 인생인데 어찌 ‘평생 행복하게’ 살았겠는가. 하다못해 자식이라도 사고 치는 게 인생인데. 좋은 일이 생기면 좋고, 나쁜 일이 생겨도 그런가 보다 뚜벅뚜벅 걷는 게 인생이다.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다. 그걸 알고 걸어가는 게 인생이다. 가다 보면 꽃길도 있고, 가시밭길도 있다. 그런데 계속 가시밭길만 나오는 경우도 있다. 가다가 지치면 결국 무너져 버리기도 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렇게까지 스스로 세상을 떠났을까. 울적하고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다. 인생은 홀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 연결돼 있다. 홀로 가는 인생은 혼자만 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는 거대한 관계의 흐름이다. 내가 살아야 남이 살고, 남이 살아야 나도 살아가는 묘한 도리가 있다. 남이 웃어야 나도 웃을 수 있다. 남이 울고 있는데 나 혼자 웃고 있으면 그것은 사이코다. 너와 내가 함께 웃으며 살아가는 세상의 위대한 섭리가 있다. 좋은 비는 때를 안다. 사람에게 가장 좋은 단비는 바로 ‘사랑’이다.

[삶과 종교] 폰을 보다, 봄을 보다

화성에서 서울 어린이대공원까지 출퇴근을 하기 위해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도권에서 서울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정류장과 플랫폼에서 간격을 유지하고, 공간을 만들며, 질서정연함을 유지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중고등학교에 재학할 때 버스와 전철을 이용해 등하교를 했다. 당시 대중교통은 콩나물시루, 지옥철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먼저 타려 했고,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들어찬 공간에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일명 ‘푸쉬맨’이라고 하는 요원까지 배치했던 기억이 있다. 시대가 변하고 발전하면서 시민의식의 향상과 인파가 몰려 발생한 각종 사고도 질서정연함을 만들어냈지만 스마트폰의 보급과 사용도 한몫하는 것 같다. 지하철에 탄 사람들은 아무리 인파가 몰려들어 복잡해도 필사적으로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서 무언가를 보고 있다. 간격이 좁아져 타의적으로 폰 화면을 힐끗 보게 될 때가 있는데 화면에는 게임, 쇼핑, 웹툰, 드라마, 영화, 예능, 카톡, 인터넷 강의 등 지금 시청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집중하면서 폰을 볼 수 있는 공간을 사수한다. 심지어 ‘걸으면서 폰을 하지 말라’는 캠페인까지 벌이는 형국이다. 심리학자들은 유물론자 포이에르바하의 ‘내가 먹는 것이 바로 나다(I am what I eats)’라는 말을 차용해 ‘내가 보는 것이 곧 나다(I am what I see)’라고 말하면서, 보는 것들과의 관계가 세상에 대한 관점과 마음가짐을 결정하는 ‘프레임’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이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 중 신문이나 책을 읽거나 차창 밖 자연을 바라보면서 깊이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요즘엔 탑승자 대부분이 폰을 본다. 봄이 왔다. 겨우내 자기를 비워낸 나무들에서 새순이 움트고 잎과 꽃이 푸르고 화사하게 피어난다. 코로나 이후 일상을 회복하고 마스크도 벗게 돼 적막했던 회색빛 도시의 풍경이 역동적인 사람들의 움직임과 화려한 꽃과 나무로 채워지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청명한 부활의 계절에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로 자신을 채우며,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고백한다(갈 2:20). 이 좋은 계절에 ‘폰을 보다, 봄을 보다’를 의도적으로 기억하면서, 폰을 보던 고개를 들어 꽃과 나무, 자연을 바라보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말을 걸어 보자. 관점과 내면이 봄의 생명력과 유의미함으로 채워질 것이다.

[삶과 종교] 부끄러움을 자랑하기?

가톨릭교회는 매년 봄이면 사순 시기를 맞이한다. 사순 시기는 40일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그분의 부활 축제를 준비하는 기간인데,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수난과 죽음의 원인이 당혹스럽게도 그를 열렬히 따르던 제자들의 배신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열 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예수를 은돈 서른닢에 팔아넘긴다(마태 26, 15). 그리고 경비병들이 예수를 체포하자 제자들은 모두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 50). 그들 중 한 명은 얼마나 겁쟁이였으면 알몸으로 달아난 사람도 있었다(마르 14, 52). 그리고 열 두 제자 중 첫 번째 제자이며 가톨릭 초대 교황인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고백했으며 급기야 자신의 말이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까지 맹세했다. 신약성경 서간의 주요 저자인 바오로 역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선봉장이었다. 성경이 집필될 당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과 목격 증인들은 분명 교회 안에서 위대한 인물들이고, 그들의 위치와 권위로 볼 때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는 적당히 숨길 법도 하지만 성경은 그들의 약점, 나약함,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이야기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이 누구냐’는 기자의 질문에 “저는 죄인입니다. 이것이 가장 정확한 정의입니다. 이것은 멋지게 꾸미기 위한 문학적 수사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저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저는 주님께서 굽어 살피시는 죄인입니다. 저는 주님의 돌봄을 받는 사람입니다”라며 부족한 인간임을 자인했다. 대한민국이 사랑한 종교 지도자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어수룩한 자화상에 ‘바보야’라는 이름을 붙이고 ‘안다고 나대고 대접만 받으려고 한 내가 바로 바보’라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 가톨릭 예식 중 가장 중요한 미사 시간에도 모든 신자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옵니다”라고 고백한다. 보잘것없는 인간을 통해 주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베드로와 바오로의 삶이 그 증거다.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스승을 배신한 사실을 안 순간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비참함에 한탄했을 것이다. 베드로가 그 눈물과 비참함 속에 방황하고 있을 때 예수는 그에게 부활해 그를 진정한 제자로 삼는다. 베드로는 순교 당시 스승님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수 없다며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박해자의 선봉장인 바오로는 갑자기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는 한평생 로마, 그리스, 터키 지역을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약함과 부끄러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정말 보이지 않는 힘이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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