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연꽃처럼 물들지 않고 살아가기

예로부터 어른이 돌아가시면 천이나 종이에 애도의 글씨를 써서 만장(輓章)이라 불리는 깃발을 만들었다. 세속에서는 사라졌지만 절집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전통을 잇고 있다. 지난 7월22일 열반한 월주대종사 빈소가 마련된 김제 금산사에서 만장을 쓰는 울력에 동참했다. 큰스님을 기리는 이들이 추도의 마음을 담아 요청하면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붓을 들었다. 송하진 전북도지사 부인 오경진 여사 등 애통한 마음을 담은 이들의 요청으로 100여장 가까이 쓴 것 같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돌아보는 소중한 공부의 시간이 됐다. 역사 아닌 삶이 있겠는가. 그러나 큰스님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어른으로 존경받는 분들이 남긴 자취는 후인들에게는 교훈이며 등불이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과 대통령 훈장을 수훈한 봉선사의 운허 스님도 그런 삶을 살았다. 스님은 1972년 1월에 미리 남긴 유촉(遺囑)에서 장례를 간소하게 하고, 소장한 도서를 기증하게 하는 등 10가지 유훈을 문도들에게 당부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는 운허 스님과 더불어 동암 스님, 운경 스님 등의 유지를 이으며 전 역경원장이시며 현 조실 월운 스님과 전 월로의장 밀운 스님이 행복한 삶의 방법을 세인들에게 선물하고 있다. 어른들의 삶은 연꽃과 같다.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물들지 않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예토(穢土)라고 한다. 사바(娑婆)의 또 다른 표현으로 욕심과 갈등으로 가득 찬 인간세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세상에서 연꽃처럼 수행의 꽃을 피우고 향기를 선물한 분들이 바로 어른들이다. 광릉수목원 둘레길의 봉선사 경내에 자리한 연못에 핀 연꽃은 무엇 하나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연못에 활짝 핀 꽃들로 사람들에게 기쁜 마음을 선물하는 것은 물론 몸에 좋은 연꽃차 한잔의 여유를 느끼게 한다. 또한 연근(蓮根)은 반찬도 만들고 연잎은 밥을 지어서 사람들에게 이롭게 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흔쾌히 내놓는 연꽃과 같이 우리들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운허2022성철2022월주2022법정 스님과 인연이 깊은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신 후에도 존경을 받는 이유도 타인(他人)을 위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낮은 곳에서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했기에 지금도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아름다운 연꽃처럼 살았던 분들 덕분에 인류의 역사가 조금씩 전진했던 것이다. 명성을 남긴 위인뿐 아니라 이름을 전하지 못한 범부 가운데도 연꽃처럼 살다 간 분들이 많다. 예기치 못했던 코로나19가 지구촌을 휩쓸면서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고통을 많이 받고 있는 현실이다. 코로나19에 빠진 세상, 예토가 아니고 무엇이랴. 방역 당국에 따르면 접종 상황 등을 고려해 위드(with) 코로나를 염두에 둬야 하는 상황이다. 이럴 때일수록 앞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혜를 보여준 어른들의 삶에서 교훈을 발견해야 한다. 나보다는 우리를 우선하며 자비와 사랑을 실천한 그분들의 가르침에서 해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모든 것을 남김없이 선물하는 연꽃처럼 살다 가신 어른들이 그리워지는 때, 우리도 어른들처럼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 하루속히 정토세계(淨土世界)를 이루길 바란다. 오봉도일 봉선사 문화원장ㆍ양주석굴암 주지스님

[삶과 종교]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음두기

코로나19는 나와 우리를 넘어 인류의 삶 전반에 전례 없는 불안정을 가져 왔다.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다양한 고통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전한 붓다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해간다는 것(제행무상)과 그러한 변화유전은 그 존재 속의 개별자인 나 자신도 예외일 수는 없다는 것(제법무아)이 고통의 원인에 대한 대전제다. 모든 현상은 변해가며 동시에 어떤 현상도 다른 현상과 서로 의존하지 않고 완전히 독립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간단한 실상을 나의 욕망으로 인해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스스로 고통의 규모를 키우고 넓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붓다는 고고(苦苦), 행고(行苦), 괴고(壞苦)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고고는 본래부터 괴로운 조건에서 생겨난 것이다2044 추위나 더위, 갈증 등과 같이 괴로운 조건에서 생기는 것을 말하고, 행고는 모든 것은 흘러간다.는 뜻으로 항상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행고에 대해 필연으로 따르는 것이 괴고다. 즐거움이 파괴되는 것은 고다라는 뜻이다. 부귀를 마음껏 누리던 사람이 몰락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이가 돌고 돌아 자신이 당하게 되는 비애를 겪게 되고, 활짝 피어났던 꽃도 이윽고 지고 만다. 즐거움이 올 때는 즐거움을 누리며 때가 돼 사라지고 받아들이면 되겠지만, 나의 욕망을 투사해 탐착하게 되므로 그것이 파괴될 때 갈망과 괴로움을 느낀다. 파도가 동쪽으로 흐르는 해류를 거슬러 서쪽으로 갈 수 없듯이 나의 호불호에 따라 변해가는 현상을 거스를 수 없음에도 내 입장을 고집함으로 해서 외부세계를 적으로 만드는 게 아닌가 살펴볼 일이다. 매사추세츠 의과대학 명예교수인 존 카밧진은 불교의 명상수행법에서 착안해 만든 마음챙김 프로그램은 구글페이스북 등 기업들의 생산성 향상 도구로 활용되고 다보스포럼 프로그램의 하나로 자리를 잡으면서 서구 사회는 물론 국내에서도 학회와 일반 힐링 강좌로 한창 유행 중이다. 이 프로그램에서와 같이 우리가 겪는 고통은 결국 외부 세계에 대응하는 내 마음의 문제라는 마음챙김의 메시지는 하루하루 고난으로 얼룩진 삶을 견뎌내는데 분명 위로가 된다. 그러나 최근 로널드 퍼서는 마음챙김의 배신에서 마음챙김의 유행이 연기적으로 이루어진 개인과 사회적 외부세계에 대해서 자비와 이타행 같은 불교의 도덕적 가르침을 견지하지 못하고 단지 자기 계발의 옷을 입은 자기 훈련의 도구만 남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나 에게만 매몰돼 외부세계와의 구조적 관계를 도외시하게 되면서 모순적 상황에 놓이게 되고 또 다른 심리적 갈등과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을 받고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는 나의 자유를 말한다. 그러나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에서 말하는 자유는 나로부터의 자유였다. 나와 나의 것을 설정하면 성장은 정지하고 소통은 사라지게 된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고립감이 짙어지고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겹쳐오지만 이럴 때 나와 우리의 공동체적 유대를 생각하는 사회적 마음을 챙기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붓다는 이것을 진정한 청정함이라 했다. 최성규철학박사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삶과 종교] ‘복음’을 기다리는 우리

복음(福音)은 유앙겔리온이라는 그리스어 를 번역한 표현이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 혹은 그리스도교 문화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리스도교 저자들은 자신의 저작에서 유앙겔리온, 곧 복음이란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마르 1,14-15 참조) 혹은 사도들이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1코린 15,3-5)와 관련 있다. 예수는 2000년 전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하였음을 선포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고, 사흗날에 부활한 이후 사도들은 부활 사건의 증인이 됐다. 그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를 통해 하느님 나라가 완성됐다는 것과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했다는 것을 전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역사적 사건이자 하느님의 약속이 기록된 성경 말씀을 실현한 구원사건이라고 고백했다(1코린 15,1-8 참조). 이렇듯 유앙겔리온이란 단어는 그리스도교적 색채로 깊게 물들어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창작물이라고 볼 수 없다. 이 단어는 이미 1세기 그리스-로마 문화권 안에서 널리 알려진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사용된 복음은 황제들과 관련된 사건과 깊이 연관된다. 특별히 황제의 생애 가운데 중요한 사건들, 예를 들면 황제의 탄생이나 즉위식, 황제 추대나 성년식을 알리기 위해 복음이란 용어가 사용됐다. 또한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은 복음이었다. 이렇듯 당시 한 지역이나 도시가 번영하고 평화롭기 위해 황제의 안녕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소아시아 프리네에서 발견된 한 비문(기원전 9년)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탄생일을 복음, 곧 기쁜 소식의 시작으로 선포했다. 신약성경에서 등장하는 복음이라는 용어는 황제들에 관한 기쁜 소식을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코로나19가 흔들어 놓은 혼란의 상황 속에서 복음을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19의 위협과 공포로부터, 그리고 언제 일상을 회복할지 모르는 막연함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가까운 아시아의 국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복음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의 장악으로 여성들은 자신의 인권을 유린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다. 미얀마 국민도 복음을 원한다. 군사정부의 쿠데타로 이미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권력에 눈이 먼 이들이 빼앗아간 자유와 평화를 미얀마 국민은 되찾기를 원하고 있다. 과거 로마 황제의 복음은 국가와 도시의 번영과 안녕을 보장했고, 예수의 복음은 죄로부터의 해방, 곧 구원을 선사했다. 지금 우리는 복음을 원한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 공포와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사람답게 살아가고 싶다. 우리는 그러한 세상에서 살아갈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평화와 고요한 마음

코로나19의 세계적인 대유행으로 1년을 미루다가 가까스로 열린 2020 도쿄 하계올림픽이 10여일 전 막을 내렸다. 올림픽에서 감동을 준 많은 선수에게 감사와 격려의 마음을 전한다. 쿠베르탱에 의해 시작된 근대올림픽의 정신은 스포츠를 통해서 심신을 향상시키고 문화와 국적 등 다양한 차이를 극복하며 우정, 연대감, 페어플레이 정신을 가지고 평화롭고 더 나은 세계의 실현에 공헌하는 것이라 한다. 이번 올림픽을 통해서도 우리 인류가 평화로운 세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갔길 기대한다. 나는 붓다가 꿈꾼 평화로운 세계를 생각해 본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여의고 즐겁게 사는 세계를 꿈꾼 것 같다. 붓다가 이룬 정신 경계는 니르바나(Nirvana), 즉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마음의 평화에 다름 아니다. 붓다가 이룬 마음의 평화로부터 스스로 어떤 폭력도 없는(Ahims) 자비로운 상태가 됐다. 모든 인류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어떤 종류의 전쟁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모든 인류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지 못한다면, 전쟁을 완전히 없애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류 역사 전체를 보면 전쟁이 없는 시기가 없었다. 붓다가 살았던 시대도 인도가 16개 국가 간에 정복전쟁을 통해 마가다국에로 통일돼 가는 시기였다. 붓다가 겪은 세상도 그렇게 어둠이 짙은 시대였다. 그런데 붓다의 모습은 따라하기가 어렵고 남다르다. 증일아함 등견품에 따르면, 붓다는 자신의 고향인 카필라성을 무저항과 비폭력으로 지키려고 했다. 붓다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신통제일 목건련(目健連)은 무력으로 지킬 것을 붓다에게 건의했다. 붓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붓다가 한 일은 여러 차례 침략해온 코살라국 유리왕(流離王) 일행이 침략해오는 길목에서 크고 무성한 나무 그늘 대신 마른 나무 아래서 그저 뙤약볕을 맞으며 앉아서 명상수행을 할 뿐이었다. 붓다는 은유적이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기 뜻을 밝혔다. 유리왕도 이를 알아차렸고 성자를 무시할 수 없어 발길을 돌렸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그 길을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렸을 때 카필라성 방문에서 겪은 수모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당시 정복전쟁 시대 속에 있었던 왕으로서 전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결국 코살라국의 유리왕에 의해 카필라성은 망했다. 그리고 이 성에 살았던 붓다의 고향 사람들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불교의 초기경전에서는 붓다의 전쟁에 대한 위의 태도가 반영된 불살생과 비폭력을 제1원칙으로 삼는다. 다만, 일부 경전에서는 정법이 실현되는 불국토 수호를 위한 부득이한 방어전쟁을 허용한다. 재가 신도들에 한해 전쟁 참여를 허용하고 승려가 이들과 친구 되는 것도 가능하다. 살생을 허용하지 않는 불교계율과 부득이한 방어전쟁을 하다가 부득이하게 이뤄지는 살생 사이에는 공통의 전제가 있다. 그 전제는 내면의 평정심이다. 피할 수 없어 싸우게 되더라도 고요한 마음을 잃으면 안 된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평화와 고요한 마음

코로나19의 세계적인 대유행으로 1년을 미루다가 가까스로 열린 2020 도쿄 하계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올림픽에서 감동을 준 많은 선수에게 감사와 격려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을 대과 없이 마무리한 일본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쿠베르탱에 의해 시작된 근대올림픽의 정신은 스포츠를 통해서 심신을 향상시키고 문화와 국적 등 다양한 차이를 극복하며 우정, 연대감, 페어플레이 정신을 가지고 평화롭고 더 나은 세계의 실현에 공헌하는 것이라 한다. 이번 올림픽을 통해서도 우리 인류가 평화로운 세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갔길 기대한다. 나는 붓다가 꿈꾼 평화로운 세계를 생각해 본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여의고 즐겁게 사는 세계를 꿈꾼 것 같다. 붓다가 이룬 정신 경계는 니르바나(Nirvana), 즉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마음의 평화에 다름 아니다. 붓다가 이룬 마음의 평화로부터 스스로 어떤 폭력도 없는(Ahi?s?) 자비로운 상태가 됐다. 모든 인류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어떤 종류의 전쟁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모든 인류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지 못한다면, 전쟁을 완전히 없애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류 역사 전체를 보면 전쟁이 없는 시기가 없었다. 붓다가 살았던 시대도 인도가 16개 국가 간에 정복전쟁을 통해 마가다국에로 통일되어 가는 시기였다. 붓다가 겪은 세상도 그렇게 어둠이 짙은 시대였다. 그런데 붓다의 모습은 따라하기가 어렵고 남다르다. 증일아함 「등견품」에 따르면, 붓다는 자신의 고향인 카필라성을 무저항과 비폭력으로 지키려고 했다. 붓다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신통제일 목건련(目健連)은 무력으로 지킬 것을 붓다에게 건의했다. 붓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붓다가 한 일은 여러 차례 침략해온 코살라국 유리왕(流離王) 일행이 침략해오는 길목에서 크고 무성한 나무 그늘 대신 마른 나무 아래서 그저 뙤약볕을 맞으며 앉아서 명상수행을 할 뿐이었다. 붓다는 은유적이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기 뜻을 밝혔다. 유리왕도 이를 알아차렸고 성자를 무시할 수 없어 발길을 돌렸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그 길을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렸을 때 카필라성 방문에서 겪은 수모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당시 정복전쟁 시대의 흐름 속에 있었던 왕으로서 전쟁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결국 코살라국의 유리왕에 의해 카필라성은 망했다. 그리고 이 성에 살았던 붓다의 고향 사람들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불교의 초기경전에서는 붓다의 전쟁에 대한 위의 태도가 반영된 불살생과 비폭력을 제1원칙으로 삼는다. 다만, 일부 경전에서는 정법이 실현되는 불국토 수호를 위한 부득이한 방어전쟁을 허용한다. 다만, 재가 신도들에 한해 전쟁 참여를 허용하고 승려가 이들과 친구되는 것도 가능하다. 살생을 허용하지 않는 불교계율과 부득이한 방어전쟁을 하다가 부득이하게 이루어지는 살생의 경우 사이에는 공통의 전제가 있다. 그 전제는 내면의 평정심이다. 피할 수 없어 싸우게 되더라도 고요한 마음을 잃으면 안 된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코로나로 무너진 ‘이웃·삶’ 회복해야

어느 TV 드라마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던 남편이 아내에게 들킨 후에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내 몸 가지고 내 마음대로 했어. 이런 태도는 다른 사건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내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쓰는데 웬 말이 많아. 이런 자세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태도가 이웃에게 미치는 영향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하는 말과 내가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영향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가장 사랑하며 돌봐야 할 가족에게 너무 무례하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사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태도는 엄격히 말하면 심각한 폭력이다. 그래서 이웃을 잃어버린 사회는 서로 폭력적인 관계가 된다.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인해 우리는 일상이 무너졌다.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우리는 너무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이 시대를 살기 위한 재정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붙들어야 한다.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잃었던 것들 중에 회복할 것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이웃을 위해 자신을 절제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말씀을 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린도전서 10장 23절) 워낙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익숙해진 사람들이 비웃을 말씀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자기만 생각하고 사는 것이야말로 무모한 것이며 사회를 어지럽히는 태도다. 자유롭게 사는 것과 무질서하게 사는 것은 다른 것다. 자유롭지만 질서를 지키며 서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길이 바로 이웃을 배려하는 것이다. 내게 유익하다고 해서 남을 짓밟고 자신의 욕심만 채우는 사회는 야만적인 사회다. 약육강식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밀림의 생존방법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재다. 이것은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창조된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서로 귀하게 여겨야 한다.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회복돼야 한다. 이런 태도는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모든 인간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다. 내 자식이 귀한 줄 알면 남의 자식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내 재물이 아까운 줄 알면 남의 재물도 아껴줘야 한다. 내 생명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남의 생명도 소중한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반드시 남을 파괴하거나 짓밟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가능성 앞에서 이 결정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될 것인가 한 번만 스스로 묻는다면 그리고 남의 유익을 위해 과감하게 결단할 수 있다면 작지만 큰 변화가 하나씩 나타날 것이다. 안용호 기흥지구촌교회 목사

[삶과 종교] 술락 시바락사의 불교관

태국은 불교국가로 알려졌지만, 우리는 정작 태국의 불교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 술락 시바락사(Sulak Sivaraksa)는 태국의 저명한 참여적 지식인이자 재가불자다. 술락은 1933년에 방콕에서 태어난 중국계 태국인이다. 그는 영국에 속하는 웨일즈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영국에서 법학학위를 받았다. 술락은 1971년에 코몰킴통 재단을 창립했는데, 이 재단의 목표는 젊은 사람에게 이상주의 정신을 불어넣어 젊은 사람이 민중을 위한 사업에 헌신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정신을 되살리고자 하는 것이다. 또 술락은 달라이라마, 틱낫한 등과 함께 1989년에 국제참여불교연대를 설립했다. 국제참여불교연대의 목적은 단일한 논점만을 고집하는 편협함에서 벗어나서 세계 전체에 대한 이해를 갖도록 도와주는 것에 있다. 술락이 참여한 단체는 12개가 넘는다고 한다. 술락은 불교를 두 가지로 나눠 구분한다. 하나는 관습적이고 의례적인 불교다. 이는 광신적 민족주의와 호응하는 불교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비(非)본질적 찌꺼기를 제거한 불교의 본질적 핵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술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특별한 신앙을 고백할 필요가 없다. 부처를 숭배해야 할 필요도 없다. 어떠한 의례에 반드시 참여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 속에서 당신이 성장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기적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며 서로 착취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술락은 5계 가운데 불살생(不殺生)을 새롭게 해석한다. 불살생은 다른 생명체를 죽이지 않는 것인데, 술락은 그 의미를 확장한다. 불살생에는 대량살상무기의 생산과 사용을 포기하는 것도 포함된다. 또 술락은 사람들에게 적절한 생계수단을 빼앗는 것도 살생이라고 한다.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사용해서 토양을 망치고 미생물을 말살하는 것도 살생에 포함된다. 핵폐기물과 화학오염물은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도 살생의 범위에 들어간다. 또 다른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고 죽음에까지 이르는데도 한쪽에서는 사치와 낭비를 일삼는 것도 술락의 관점에서는 불살생의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다. 술락의 불살생에 대한 해석을 한반도에 적용한다면,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하지 말아야 하고 또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내용은 북한도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에 더 이상 집착하지 말고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핵폐기물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핵폐기물이 나오는 원자력발전소를 대체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세우기 위해서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목표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실제적 방법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역설'이 주는 진리

저는 누군가 화성에 생명체가 살고 있다고 말한다면 믿을 수 있겠지만, 이 세상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고 말한다면 믿지 못하겠어요! 유학 시절, 인연을 맺은 한 젊은 수학자의 말이다. 독일의 한 대학 부설 연구소에서 교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던 그는 아내와 함께 한인 천주교 공동체에 나왔다. 아내 홀로 신자였기에, 필자는 그에게 천주교 신앙을 가져보라고 여러 차례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신앙을 받아들이길 주저하였다.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져볼 수 없으며 들을 수 없는 대상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요? 젊은 수학자의 질문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수학이라는 논리적 학문과 싸움하며 지낸 시간이 짧지 않았으니, 실제로 검증하고 확인할 수 없는 대상을 믿는다는 것이 그에게는 무척 어려운 과제였을 것이다. 필자는 대략 3년 전부터 천주교 사제가 되길 원하는 학생들의 양성을 맡고 있다. 그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기숙사에서 함께 거주하며 그들을 동반하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한 새내기부터 연말이면 사제가 될 시간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 곧 부제들이 하나의 생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20대 젊은 나이에 그들은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세상을 위하여 살아가고자 결심하면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누가 혹은 무엇이 그들을 이곳까지 불렀을까? 무엇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면서까지 사제가 되려고 하는가?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하늘이 주는 희망에 자신의 미래를 걸고 사제의 길을 선택한 젊은이들이 대견하고 기특하다. 세상은 인간의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현상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 역시 존재한다. 세상의 사건들을 대부분 과학적 검증을 통하여 이론적 설명이 가능하지만, 반대로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구체적 사례 중 한가지로 꼽을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추문이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형수에 관한 규정 때문이다. 죽을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을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그날로 묻어야 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신명 21,22-23; 갈라 3,13). 천상 권능을 가지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시어 이스라엘의 원수를 물리치는 절대적 군주의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 저주받은 이들의 상징이었던 십자 나무에서 힘없이 최후를 맞이한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십자가 위에 매달린 예수를 바라보며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놀렸다. 하지만 하느님의 선택은 변함없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였다. 그의 방법은 역설적이었지만, 구원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어떠한 의료적 지식과 방법으로도 구명하기 어려웠던 환자가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하느님의 존재와 활동을 부정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 의사가 떠오른다. 반드시 신앙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성으로 믿을 수 없는 역설(逆說)을 순수하게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겸손한 용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유교적 삶과 죽음 그리고 제사

김원명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이 지속되는 가운데 마른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무더위 속에서 우리 자신의 유한한 삶에 대한 유가(儒家)적 사색을 해본다. 유가에서 바라보는 한 개인의 삶은 유한하고 일회적이다. 유가에서는 사람이 혼백(魂魄)의 기(氣)로 이뤄졌다고 본다. 혼백의 기는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게 됐다가 사후에 소멸된다. 기가 모이면서 한 개인이 태어나고, 그 개인이 죽게 되며 모여 있던 기가 흩어지게 된다. 사람이 죽으면 가벼운 기운인 혼(魂)이 위로 올라가며 흩어지고, 죽으면 무거운 기운인 백(魄)이 땅으로 내려가 흩어져 스며든다. 그런데 조상의 일부 정기가 자손에게 전해지며 조상의 사후에도 흩어져 사라지지 않고 후손에게 존속하게 된다. 유교에서는 조상과 후손 사이에 이어져 존속하는 이 기를 통해 일종의 연속성을 인정한다. 정기를 통해 조상의 기가 후손에게 물리적으로 이어지고, 후손의 기억을 통해 조상의 정신이 후손의 정신에 새겨지며 이어진다. 죽은 조상과 살아있는 후손 사이에는 이처럼 정기와 정신을 통해 동질성이 이어진다. 제사는 살아있는 후손이 죽은 조상을 현존하는 자신 안에 불러오는 의식이다. 죽은 조상은 살아있는 후손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가슴 속에서 심리적으로 함께한다. 그런데 현대 한국사회에서는 제사가 사라져가고 있다. 제사가 사라져가는 표면적인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나 편의를 위해서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한편으로 살아있는 후손들이 그들의 기억과 가슴 속에서 죽은 조상을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조상에게서 멀어지며, 그들 자신의 뿌리를 망각하게 된다. 그들의 정신은 더욱 외롭고 가난해지는 것이다. 제사가 사라져가는 내면적인 이유는 제사가 가족과 친족 사이에 불편함을 주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제사 안에는 조선 후기 시대의 위계질서가 남아있다. 이것을 현대에 적용하기에는 시대가 변했다. 제사는 이제 더 이상 친족을 만나 조상을 기억하며 우의를 다지는 즐겁고 행복한 의식이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조선 후기 위계질서 문화와 기억이 현재와 미래에 재현되는 전통적인 방식의 제사는 이어지기 어렵다. 제사의 내용과 형식을 변형해 즐거운 일이 되지 않는다면 제사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현대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시민의식 속에서 자라난 세대에게 편하고 즐거운 제사로 변화하는지에 따라 그것의 존속 여부도 결정될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 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자녀 또한 자연스런 일이다. 제사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부모와 조상에 대한 고마움의 기억이자 표현이다. 인간의 삶은 여전히 유한하고 일회적이다. 그렇지만 유한하고 일회적인 개인들도 수없이 돋아났다가 사라졌던 조상과 동일한 원기에서 발원한 것이다. 그것은 고대인들이나 현대인들 그리고 미래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 사회가 현대적이고 미래적인 제사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원을 묻고 기억하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라면, 근원을 그리워하며 기억하는 것은 곧 제사다. 기억이 제사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우리 이대로 살아도 될까요?

요즘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가 깊이 뿌리내린 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분노가 터질 때 조절이 안 돼 자신과 이웃을 거침없이 파괴하기도 한다. 분노조절장애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경고처럼 들어야 할 말이 됐다. 약자에게 더 포악하게 공격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야만적 사회로 전락하는 슬픈 모습이기도 하다. 미국 사회가 끌어안고 있었던 흑백갈등을 해결하고자 자신을 희생한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런 말을 했다. 용서를 통해 다시 화합하는 일이 없이는 아무도 자기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서 우리의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결정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돌려세우고 있다. 자기를 따르지 않으면 잔인한 말로 공격을 한다. 잠언 12장 18절은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고 한다. SNS의 댓글을 보면 너무 살벌해서 우리가 언제부터 이 지경이 되었는가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정치인들이 진영 논리를 따라 국민을 분열시키고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정치인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맞서는 것은 당연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목적은 동일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나라 국민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할 것인가 이런 목적을 가지고 우리가 먼저 마음을 같이한다면 통일이 돼도 세상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분열과 갈등이 더 악화할 테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고 남부 사람들이 미합중국연방으로 돌아올 때, 링컨의 참모가 남부 사람들을 어떻게 대우할지 링컨 대통령에게 물었다. 그 참모는 적대적인 남부 사람들에 대한 보복도 예상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링컨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들이 결코 떠난 적이 없었던 사람들처럼 대할 것입니다. 용서는 고통스러운 과거의 사슬에 묶이지 않는다. 가슴 아픈 기억의 어둠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용서는 새로운 관계를 이루기 위해 상대를 끌어안는 사랑의 실천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시시덕거리는 로마 병사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스데반 집사도 자신을 돌로 쳐서 죽이는 무리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나라는 장점이 많은 나라다. 가능성도 큰 나라다.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 가운데 공산당의 침략에서 건져주시고 전쟁의 폐허에서 일으켜 주신 나라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상태로 살면 안 된다. 미래를 위한 변화가 필요하다. 지난날의 모든 미움과 증오 그리고 보복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새 역사를 시작할 수 있는 새 출발이 필요한 때다. 안용호 기흥지구촌교회 목사

[삶과 종교] 암베드카르의 네오붓디즘

현대 인도의 위대한 인물로 3명이 거론되곤 하는데 이 3명은 간디, 인도 초대총리 네루, 그리고 암베드카르(Ambedkar, 1891-1956)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간디와 네루이지만 인도에서 가장 동상이 많이 제작된 인물은 오히려 암베드카르라고 한다.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 출신이다. 불가촉천민은 인도 카스트제도의 산물인데 일반적으로 인도의 카스트는 4가지 계급으로 구분된다. 브라만(성직자), 왕족, 서민, 노예계급이다. 이처럼 처음에는 카스트제도가 4가지 계급에서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노예계급보다 아래의 계급인 불가촉천민이 더 추가됐다. 이는 말 그대로 접촉해서는 안 되는 천민이다. 만약 접촉하면 브라만 계급의 신성함에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신성함을 회복하려면 다시 종교의례를 실시해야 한다. 인도에서 이처럼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던 불가촉천민은 인구의 15% 정도라고 한다.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 출신이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미국과 영국에 유학 가서 경제학 박사가 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 출신으로는 상당한 성공을 했다. 그렇지만 그가 불가촉천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같은 사무실의 부하직원들도 그와 거리를 두고서 근무했다. 심지어 사무실의 임시고용원조차도 암베드카르와 거리를 유지한 채 서류뭉치를 그의 책상으로 집어던졌다. 만약 암베드카르와 접촉을 하면 부정을 탈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암베드카르의 이러한 경험은 자연스럽게 그를 정치의 세계로 이끌었다.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암베드카르는 초대 법무부장관이 됐고, 1950년 인도헌법이 제정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당연히 이 헌법에서는 카스트제도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 암베드카르는 1935년 힌두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로 개종할 것을 선언했다. 오랜 숙고 끝에 1956년에 불교로 개종했다. 암베드카르가 주장한 불교는 네오붓디즘, 곧 신(新)불교라고 부른다. 가난한 자들이야말로 종교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인생 행로의 원천인 희망이 종교를 통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불교의 기반은 이성에 있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모순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불교의 주된 목적은 고뇌하는 인류를 구하는 것이다. 암베드카르는 이처럼 주장하면서 불교를 선택했다. 암베드카르의 신불교가 한국 사회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그의 주장은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도록 해준다. 요즘 떠도는 말 가운데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걱정한다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강한 의문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암베드카르는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정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불교이고, 그것이 이 시대의 종교적 역할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공동체의 시너지 효과

시너지(synergy)라는 말이 있다. 이 용어는 함께 일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쉰-에르고스 혹은 쉰-에르기아에서 유래한다. 둘 이상의 것이 상호 협력해 작용할 때 하나가 독립적으로 작용해 얻을 수 있는 결과 이상의 효과를 생산할 수 있다는 의미다. 어떤 현상의 긍정적 결과는 다시 상승효과를 만들어 내며, 마지막에는 배가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 형이상학에서 언급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크다는 문구는 이러한 시너지의 효과를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시너지 효과는 혼자가 아닌 함께 작용할 때 이루어질 수 있기에, 공동체가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 코로나19 시대가 장기화하면서 우리 사회 안에서 함께보다는 혼자가 친숙한 개념이 됐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오랜 시간 거리두기 운동을 시행했고, 언택트(untact) 결과로 개인화 현상은 코로나 시대의 특징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사회 공동체 안에서 개인 생활 방식이 우선한다. 직장에 출근해 동료를 만나 업무를 보지 않아도 된다. 재택근무 방식으로 일을 진행할 수도 있다. 어린 아이들은 비대면 수업을 통한 교육을 받고 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사회성을 배워야 하지만 거리두기 방침에 따라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줄었다. 컴퓨터 혹은 스마트폰이 그들과 놀아주는 친구가 됐다. 저출산 현상과 함께 코로나 시대에 가속화 되는 개인화 현상은 가정의 해체뿐 아니라 사회 공동체라는 개념까지 붕괴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섞인 전망을 하고 있는 학자들도 있다. 공동체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에 그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 이후 신자들은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고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도했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며 공동으로 소유했다(사도 2,42-47 참조).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보여준 공동체 생활은 단순히 함께 모였다는 가시적 현상만으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 신자들이 함께 모여 보여준 자기 희생적 신앙생활 방식이 긍정적 효과, 곧 이방인 선교라는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의 공동체 생활은 그리스도가 직접 자신의 내어줌을 통해 보여준 모습이었고, 이방인들은 그들의 생활상을 목격하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공동체의 가치와 중요성을 증명해왔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서 함께 일할 때 그 효과는 배가된다. 하지만 이러한 명제는 오늘날 새로운 도전을 받는다. 코로나로 인한 개인화의 가속 현상 속에서 함께 보다는 혼자가 편하게 느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우리 모두의 고민과 노력이 요구되는 때다.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일연 ‘삼국유사’를 통해 본 한국적 격의불교

고려 후기 승려 일연(一然, 1206~1289)이 찬술한 삼국유사(1281)는 고대 한국인들의 시원과 역사적 자취를 가름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 중 하나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한 의도는 민족 주체성의 회복과 자긍심 고취 또는 불교사상의 포교 및 교화에 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현재 삼국유사는 앞으로 한국적 격의불교 관점에서도 연구될 자료로도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이야기 가운데 처음과 끝 부분에 있는 두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우선, 삼국유사의 제일 처음에 나오는 기이편 고조선 왕검조선이다. 그 이야기 일부만 소개한다. 아들이 땅에 관심을 보였다. 아버지 환인 하느님은 환웅 아들의 뜻을 헤아려 삼위 태백을 내려다보니 널리 사람 사이를 이롭게 할 만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해줬다. 이후 아들은 이 세상에 내려와 이치에 따라 다스리고 교화했다. 한편 그 근처에 같은 동굴에 사는 호랑이와 곰이 있었는데, 환웅은 그들에게 신령스런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며 이것을 먹고 동굴 속에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일러줬다. 곰만 여자 사람이 됐고, 사람이 된 웅녀와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 사이에서 난 아들이 단군이다. 단군은 하늘이 땅과 소통하며 그 덕을 합한 중간적 존재자다. 이 이야기는 고대 한국인들의 시원을 다루는 이야기다. 다음, 삼국유사의 마지막 부분 효선편 이야기다. 이 중 하나만 소개하겠다. 이 이야기는 전생과 이생의 부모에 대한 대성의 깊은 효성과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 등의 불사를 이루는 이야기다. 불국사를 조성하고 석굴암을 조성하는 계기 가운데 곰 이야기도 나온다. 어느 날 대성이 곰을 사냥 후 회심하고 곰을 위해 불국사를 조성하는 불사를 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석굴암을 조성하는 불사에 천신(天神)의 도움이 등장한다. 두 이야기 속에서 고대부터 한국인들의 삶 속에 녹아있는 조상과 하늘을 공경하는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일연은 이 이야기들을 고대 한국에 전해진 불교의 종교적 심성에 투사해 전하고 있다. 특히 하느님에 대한 고대 신앙은 고대 한국인들의 공통 조상과 깊은 관련을 갖는 것이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왔고, 하늘을 공경하는 경천사상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대성의 전생과 현생의 효처럼 조상에 대한 깊은 효와 관련이 있다. 이는 본래 불교에서 승려의 출가수행이 기본적으로 속세의 부모와 인연을 끊는 것과는 대조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일연은 이를 불교 신앙심과 연결하는 내용으로 구성해 처음과 끝에 배치해 강조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 곰 토템 흔적과 하느님의 도움이 등장하는 것은 고대 한국인들의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외래 종교인 불교와 전통 신앙과 일상 삶의 효를 습합하는 과정의 이야기들이다. 이런 이야기는 불교가 유입될 당시 고대 한국인들의 생활 속에 녹아있는 신앙심과 효 이야기를 불교에 투사해 격의한 불교 이야기로 보인다. 일연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현존재의 시원과 실존적 삶에 대한 영감을 주고 있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미얀마 불교사회주의

최근 학술대회에서 미얀마 쿠데타의 부당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미얀마는 불교사회주의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어쩌다 미얀마가 저렇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얀마의 불교사회주의는 초대총리 우누(U Nu, 1907~1995)가 주장한 것이다. 우누는 인도의 초대총리 네루(1889~1964)와 정치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고 개인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우누와 네루는 서로 합심해서 제3세계의 비동맹운동이 잘 진행되도록 노력했다. 우누의 정치적 동지였던 아웅산이 1947년에 암살을 당하자, 우누는 미얀마의 초대총리가 됐다. 우누는 불교경제학으로 널리 알려진 슈마허(1911~1977)의 주장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불교사회주의를 전개한다. 이는 사회주의와 불교의 유사한 측면에 착안한 것이다. 우누는 공공복지를 확대해서 국민 생활의 수준이 향상되고 동시에 평등화되기를 추구했다. 또 다른 우누 계열의 인물은 미얀마에서 사회주의는 현세의 열반이라고도 했다. 우누는 미얀마의 발전을 위해서 향상된 농업기술이나 현대적 공장을 모색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유용한 도구로서 가치를 가질 뿐이라고 한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의 개선을 추구하고 그래서 미얀마 국민이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집에 살고 더 좋은 보건 혜택을 누리며 더 나은 치안 속에 살고 더 나은 여가를 향유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렇지만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국민이 더 나은 조건 속에서 삶을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적 가치를 추구하고 향유하는 것으로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든 우누의 불교사회주의는 미얀마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우누의 불교사회주의는 현재의 한국사회에 시사해 주는 것이 적지 않다. 우선, 단순히 경제발전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혜택이 국민에게 고르게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한국사회가 경제가 발전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혜택이 구성원 모두에게 고르게 돌아갔는지는 의문이다. 또 단순히 경제가 발전해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것을 통해 구성원 내면의 삶이 풍요로워야 한다는 점도 아울러 강조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물질적 풍요가 어느정도 이뤄졌지만 그것이 삶의 질이 나아지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경제발전인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누가 추구한 길이 미얀마에서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그 의미가 완전히 퇴색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사제

2019년 11월 유네스코 본부는 제40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김대건 신부를 2021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올해 2021년은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천주교 대전교구와 당진시는 지난 18일 김대건 신부의 출생지 솔뫼에서 김대건의 해 선포식을 갖고 김대건 신부의 생애와 업적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사제(司祭)는 누구인가? 천주교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 사제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러한 일반적 시선은 한편에선 특별함으로 비춰질 수 있다. 비신자들은 사제가 독신을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기대 혹은 환상을 가진다. 다른 한편에선 사제의 특별한 삶이 평범한 무관심 속에 묻혀 버리기도 한다.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한국의 비신자들은 사제를 여러 직업군 중 하나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는 천주교 사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돼 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 사회에서 사제는 오랜 시간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 중심에는 지난 2009년 작고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이 계셨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 사제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필자의 유학 시절, 관공서에 제출할 서류를 작성할 때 직업란에서 머뭇거렸던 적이 있다. 학생 신분으로 외국에서 머물고 있었지만 필자는 천주교 신부였고, 직업란에 천주교 사제라고 적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부는 여러 직업 중 하나일 뿐인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원로 신부님을 찾아갔을 때, 신부님은 씁쓸한 웃음으로 답변을 대신하셨다. 그 웃음에는 세속적 사고와 잣대로 사제를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사제는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다. 하지만 사제가 거행하는 제사는 과거의 시간에 머무르는 장소가 아니다. 사제는 교회 공동체와 함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면서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시간 안으로 끌어온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 속에서 보여주기 위해 사제는 존재한다. 사제가 행하는 일련의 사회적 활동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가난한 노숙자에게 한 끼의 식사를 대접하는 한 사제의 배려는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하느님의 사랑을 알리는 복음적 행위이다. 훼손돼 가는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해 사태의 위중함을 알리는 한 사제의 외침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알리는 예언자적 선포이다. 사제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개인적 이익을 포기하고 공적 선익을 구하고자 살아가는 사제들은 직업인일까?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삶의 근원

나는 어디로부터 왔고, 이 세상은 언제 어떻게 있게 된 것인가? 인간만이 근원을 묻는다. 근원에 접근하는 많은 이야기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계속 근원을 묻는 것이다. 존재하는 어떤 것도 원인 없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나의 원인은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다. 그런데 나의 엄마와 아버지도 그들 각자의 엄마와 아버지와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다. 그 원인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 위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 무한히 계속된다. 그런데 이때 무한소급의 문제가 생긴다. 둘째, 제1근원을 설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한국인들은 단군을 그들의 공통조상으로 삼고 단군의 할아버지를 하느님으로 설정하여 제1근원을 설정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또 그리스인들은 세계의 존재 근거를 설명하기 위해 제1원인을 가정한다든지 선의 이데아를 만들었다.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을 만들어 태초에 세계를 창조했다고 믿었다. 또 현대과학에서는 빅뱅이론을 만들어 우주 발생의 처음을 빅뱅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단군의 할아버지인 하느님은 어떻게 해서 있는 것인지를 설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은 우주를 창조한 그들의 신이 어떻게 해서 있는 것인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도 선의 이데아나 제1원인이 어떻게 있게 되는지 설명할 수 없다. 현대과학자들도 우주발생의 출발점인 빅뱅의 에너지는 어떻게 있게 되는 것인지 설명할 수 없다. 무한소급을 끊는 이런 제일 첫 번째를 설정하는 것도 독단적이란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셋째, 제1근원을 마지막 결과와 맞물리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으로부터 노사(老死)까지 12가지의 연기(緣起) 고리를 설정하고 그것이 순환하는 것으로 이 세계 존재의 실상을 설명한다. 이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와 같이 전체적으로 순환한다고만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순환에 빠지는 설명일 뿐으로 제대로 된 설명이 될 수 없다. 20세기 독일 철학자 알베르트는 근원이나 근거를 설명하는 이 같은 세 가지 방식에 모두 문제가 있다고 하며 트릴레마로 불렀다. 세 번째 순환에 빠지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조건들이 만나 사건이 일어나며 현상 세계가 이뤄진다고 설명한다. 현상 세계가 생겨나는 조건의 고리를 역으로 끊어나가면 결국에 모든 고리가 끊어진다. 이것이 바로 무아(無我)에로의 해탈(解脫)이자 니르바나를 이뤄 순환을 벗어나는 것이다. 두 번째 독단에 빠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제1근원에 대한 깊은 믿음으로, 세상과 자신을 그것에 전적으로 내맡겨야 한다. 그러면 스스로는 텅 비어 제1근원을 잊게 되며, 세계는 신의 섭리대로 돌아간다. 첫 번째 무한소급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른 차원의 문제로 전환하길 제안한다. 사과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사과가 무엇인지 묻는 대신 사과를 먹는 것이 사과를 아는 지름길이다. 근원 묻기를 멈추고, 그때 거기에서 할 일을 그저 하면서, 삶의 근원을 맛보며 사는 것이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가정이 회복되어야 할 때

성경은 말세 때 나타날 현상들을 상세하게 밝혀주고 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디모데후서3:2-4) 이런 현상을 셩경은 고통하는 때의 증거라고 한다. 그런데 특별히 가정과 관계된 내용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사나워진다. 이런 것이 타락한 시대의 정신이라니 끔찍하지 않은가! 부모를 거역하는 마음은 사회의 권위도 무시하고 어른에 대해 존중심도 없다. 가정이 건강하지 못하면 존중심이 없는 젊은이 배출하게 되고 사회는 강자가 어른이 되는 야만적인 정글처럼 될 것이다. 어디부터 손댈 것인가. 사회적으로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정의 회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 부모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며 희생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자녀들은 부모를 사랑하며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부모도 약점이 있으며 삶의 아픔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무정하거나 원통함을 풀지 못한 채 살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부모를 이해하려고 힘쓰고, 부모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 가정은 가족끼리 서로 용서하고 서로 이해하며 서로 품어주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자리가 돼야 한다. 그래서 가정에서 건강한 인격으로 성장한 자녀들이 우리나라를 건강한 사회로 만들어가는 차세대 주역이 돼야 한다. 가정의 회복은 부모와 자녀의 삶을 건강하게 할 뿐 아니라 자녀들이 아름다운 가정을 꿈꿀 수 있게 한다. 로마제국의 멸망을 저술한 18세기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로마 멸망의 이유 중 하나를 가정의 붕괴로 꼽고 있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관의 바른 관계, 부모의 권위에 대한 순종의 정신, 자녀를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부모의 삶 그리고 가정에서 이뤄지는 교육이 회복돼야 한다. 가정의 달인 5월에 우리 모두 가정 회복을 위해 온 가족이 마음을 모으면 좋겠다. 안용호 기흥지구촌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만해 한용운의 불교관과 독립운동

한국 근현대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만해 한용운(1879~1944)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민족주의 계열의 인물 가운데 변절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인물이 한용운이라고 한다. 앞 문장의 거의 유일한에서 거의가 붙은 이유는 혹시 새로운 인물이 발굴될 가능성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한용운은 27세에 강원도 백담사에서 출가했고, 39세(1917)에 백담사 오세암에서 좌선하다가 견성체험을 했다. 1919년(41세) 3ㆍ1운동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53세(1931)에 잡지 불교를 인수해서 사장이 됐다. 이 불교에 한용운의 좋은 글이 많이 실려 있다. 한용운의 불교관은 개벽 45호(1924)에 실린 내가 믿는 불교에 잘 소개돼 있다. 첫째, 불교는 스스로 믿는 가르침이다. 이는 믿음의 대상이 다른 것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이다. 둘째, 불교에서는 평등을 말한다. 이는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셋째, 불교에서는 마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마음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넷째,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을 널리 사랑하고 서로 구제할 것을 구체적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한용운의 불교관 가운데 넷째 내용, 곧 불교는 모든 중생을 널리 사랑하고 서로 구제하는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그의 독립운동과 다른 사회운동의 이론적 기초가 됐다. 한용운은 동아일보 1925년 1월1일 칼럼에서 당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두 가지 노선, 곧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노선의 충돌을 화해시키고자 한다. 한용운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당시 사상계를 대표하는 두 개의 흐름인데, 이 둘이 서로 반발하고 대립하고 있어서 여러 가지 혼돈이 생기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 대안으로 한용운은 이론을 버리고 실제적 관점(實地)에서 이 두 노선을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사회주의 운동에서 말하는 경제혁명이나 민족주의 운동에서 말하는 민족해방이 다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에 근거해서 서로 반발을 한다면, 사상(思想)이 우리를 망하게 하는 장본인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비유를 들면,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중인데 비를 만난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에는 이쪽이다, 저쪽이다 하면서 서로 가려는 방향은 있겠지만, 일단 폭풍우를 피하는 것이 제일이다. 그래서 한용운은 이러한 문제를 사상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지 말고, 현실을 제대로 본 실행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한용운의 주장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경청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에도 여전히 정치 이데올로기에 근거해서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한용운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상, 곧 정치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것이고, 현실을 제대로 본 실행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용운의 주장처럼, 실제적 관점에서 한국의 미래를 차분히 준비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를 기대한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거룩한 구별

최근 이스라엘은 국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코로나 방역 실패라는 오명을 받은 나라가, 이제는 방역 선진국의 대열에 서있다. 이스라엘은 현재 백신 접종률 세계 1위 국가이다. 국민 절반 이상 코로나 백신 접종을 완료했다. 지난 18일부터는 실외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 코로나 백신을 직접 제조하지 않지만, 특유의 정치 외교력을 발휘해 다른 나라에 앞서 백신 확보에 성공한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아직 집단 면역을 꿈꾸며 백신 접종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안정화는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저력은 이미 역사 안에서 입증됐다. 2세기 초 제2차 유다전쟁에서 패망한 이후 나라를 잃은 유다인들은 세계 각지에서 흩어져 살았지만, 그들은 어디에서 살든지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수세기가 지나 시오니즘을 앞세워 국가 재건 운동을 펼쳤고, 아랍인들의 거센 반발에도 그들 조상의 땅인 팔레스티나 지역에 1948년 국가를 설립했다. 인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 알았던 나라가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으니, 이 역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가 없다. 무엇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을까? 그들이 가진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여러 가지 요인 중 한 가지를 꼽는다면 선민(選民)일 것이다. 선민은 유다교의 선택 사상에 근거한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해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선민은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이자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의식에서 비롯한 유다인들의 책임감과 사명감은 남다르다. 하지만 선민의식은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분명 내부적으로 응집력을 강화하고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지만, 지나친 선민의식은 외부와의 관계 단절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확신은 우월주의라는 왜곡된 현상으로 이어졌다.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팔레스티나인을 배척하고 고립시켜 버린 것은 하나의 좋은 예가 된다. 코로나 19로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에 백신의 고른 분배보다는 국가의 우선적 이익과 자국민에 집중하는 미국은 이른바 현대판 선민주의로 물들어 있다. 수많은 국가가 백신을 구하고자 혈안이 됐고 각국의 외교라인은 이를 위해 가동되고 있다. 일부 언론을 통해서 보도된 바에 따르면 미국 내 백신 보급은 여유로운 상태이고 잉여 분량을 이용하는 관광 상품도 출시됐다. 아직 코로나의 공포와 위협에서 시련과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게 이 소식은 공분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미국은 부와 힘을 가진 나라다. 코로나 시대에 강대국의 위상은 배가 됐다. 미국의 구별된 지위가 오용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구별은 독점적 혹은 배타적이어서는 안 되고, 포용적이면서 개방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한다. 선민은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고자 구별된 존재들이지, 자신만의 집단적 이익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는 아니다. 구별은 다름이라는 결과를 만들었지만, 그 다름은 서로 도와주고 보완하며 희망을 주는 매개(媒介)가 돼야 할 것이다.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실재 세계는 이중적이고 중첩적이다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선거가 끝났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슬픔이 교차하며, 우리 사회가 균열되고 있다. 양측 모두에게 지혜가 필요한 때라 생각한다. 나는 보이는 현상 너머 실재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여러분은 토끼와 오리 그림을 아는가? 이 그림은 두 가지 동물이 겹쳐 보인다. 어떻게 보면 긴 귀를 가진 토끼고, 다르게 보면 길쭉한 부리를 가진 오리다. 같은 그림인데도 토끼를 볼 땐 오리가 보이지 않고, 오리를 볼 땐 토끼가 보이지 않는다. 보는 것은 같지만 보이는 것은 때에 따라 다르다. 같은 것을 보면서 다른 인식적 결과를 얻는 것이다. 왜 그러할까?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그림에서 무엇을 보려고 하느냐다. 토끼를 보려고 하면 토끼가 보이고, 오리를 보려고 하면 오리가 보인다. 다른 하나는 어떤 인식체계를 가지고 보느냐에 달렸다. 우리는 주어진 감각자료들을 종합정리하고 해석하는 두뇌신경망을 가지고 있는데, 이 두뇌신경망이 어느 것에 대한 인식체계를 갖추고 있는지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즉 보는 이의 두뇌신경망이 토끼에 더 많이 노출된 사람은 토끼를, 오리에 더 많이 노출된 사람은 오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토끼와 오리와 마찬가지의 현상을 일으키는 그림이 루빈의 꽃병 그리고 네덜란드 화가 에셔(M.C. Escher)의 천국과 지옥 그림이다. 천국과 지옥에서 흰색의 형태에 주목하는 사람은 천사를 보게 되고, 검은색 형태에 주목하는 사람은 악마를 보게 된다. 루빈의 꽃병 에서 가운데의 검은 물체를 보는 사람은 하나의 꽃병을 보게 되고, 양옆의 흰 물체를 보는 사람은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옆얼굴을 보게 된다. 단순히 재미있는 그림이라고 넘기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우리가 그 그림들을 서로 다른 사물로 인식하기 전, 그림의 실재는 무엇인가? 토끼도 오리도 아닌, 꽃병도 사람도 아닌,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우리 의식에 규정되기 이전의 그 실재 대상,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비친 세계 너머, 일상적 상식의 틀 너머, 개념적 규정 너머, 주객분별의 의식 이전, 일체 분별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실재 세계는 무엇인가? 18세기 독일 철학자 칸트(I. Kant)에 따르면,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범주의 인식형식에 의해 규정된 현상이다. 그리고 특정 현상으로 규정되기 이전에 물 자체(Ding an sich)가 있고,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칸트가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바로 알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이라는 뜻으로 생각한다. 의식하기 전 위 그림들의 실재는 토끼도 오리도 아니고, 천사도 악마도 아니고, 사람도 꽃병도 아니다. 토끼이자 오리이며, 천사이자 악마이며, 사람이자 꽃병이기도 하다. 의식 이전의 실재 세계는 평범한 사유논리를 넘어선다. 모순율도 배중률도 통하지 않는다. 의식 이전 실재 세계는 이중성과 중첩성의 세계다. 시장 선거로 당선된 이나 탈락한 이나, 승패가 갈렸다고만 생각하며 일희일비하지 말고 더 멀리 그리고 더 깊이 통찰하고, 자숙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시민을 위해 각자 할 일을 하기 바란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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