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형님

이 경 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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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형제가 많은 집이 부러웠다. 6·25 전쟁으로 월남하신 아버지는 나를 얻으시곤 자식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고 한다. 북한에 아들이 다섯 명이나 있기 때문이다. 친구나 주변 사람들을 보면 형제·자매가 흥부네 박처럼 몽글몽글하여 부러울 때가 많다. 결혼 할 때 남편의 형제가 6남매라 사람 사는 집 같아 정말 좋았다. 당연히 행사도 많아 힘들기도 했지만 앞장 서서 두 팔 걷어 붙인 바로 위 셋째 형님만 졸졸 따라다녔다.

명절에는 사촌만 모여도 수십 명이다. 여섯 명의 형제들이 각자 짝을 찾아 2세들이 생기다보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큰댁에서 차례 모시는 날은 현관 앞까지 늘어 서 있다. 조카들이 장성하여 가정을 이뤄 어엿한 가장이 되고 아기엄마가 되었다. 유치원, 초등학생 아이들이 모두 서른 살이 훌쩍 넘어 버렸으니 요술방망이의 마술 같은 느낌도 든다. 내 눈엔 아직 어린 모습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말이다.

어제는 셋째 형님을 만났다. 조실부모한 남편에겐 어머니 같은 존재다. 형님도 그 당시 고만고만한 조카들이 세 명이었는데 막내인 남편의 교육과 결혼까지 책임져 주셨다. 사실 그때는 형님이니까 당연히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나도 가정을 이루고 살다보니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첫 딸을 낳았을 때도 아주버님은 병실 앞에서 제수씨라 어려워 들어오시지도 못하고 필요한 것 없냐고 물으셨다. 꼭 내 아이를 얻은 들뜬 목소리를 지금도 기억한다. 곗돈을 무리하게 들어 의료보험이 안 되는 병원비를 염치없이 형님신세를 져야했다. 친정어머니도 편찮으셔서 바로 오시질 못하였다.

병실로 옮겨진 나는 출산 후 하혈로 패드의 질퍽함을 참고 있는데 선뜻 형님이 해결해주셨다. 더 이상 못 견딜 한계인지라 부끄러움은 뒤로하고 형님 손에 의해 산뜻해 질 수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을 미리 알고 처리해주시던 형님이 두고두고 고맙다. 심약하여 병원에 입원을 하였을 때에도 형님신세를 졌다. 그 당시 조카들이 중·고등학생이었는데 남편을 편히 자라고 떠밀어 집으로 보내고 병실 보조침대에서 함께 밤을 새워주셨다. 지금은 학교마다 급식을 하지만 그 시절은 도시락을 준비해 가야 했는데 어찌 세 명의 조카들이 아침을 챙겨먹고 갔는지 지금 생각하니 물어보지도 못했다. 힘내서 얼른 일어나라고 곰국과 찰밥을 찬합에 들고 오신 것도 당연하게 받았다. 나 살기 급급한 마음뿐이었는데 이렇게 지내다보니 무려 25년이 흘렀다.

지난 주가 형님의 결혼기념일인지라 전화를 드렸는데 그리 좋아하실 수가 없다. 함께 밥이나 먹자고 한 것이 바로 어제인 것이다. 고우시던 형님도 이젠 외손자를 둔 할머니가 되었고 나도 지천명의 중년이다. 모든 것이 서투른 새 색시로 만나 엇비슷한 초로의 여인들이 마주하고 있었다. 짧지 않은 긴 세월 모든 집안 대소사를 함께 한 형님 얼굴에 내 모습도 보였다.

한솥밥을 먹으며 산전수전 다 겪은 두 여인이 가슴을 내 보인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표현 하지 않아도 거울 같은 편안한 회상의 시간이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들이 서로의 가슴에 촉촉이 젖어들어 순간 ‘언니’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남편으로 인해 엮어진 가족이란 둘레 속 인연에 형님을 만난 것이 행운이다.

선천적으로 고운 성격과 지혜를 겸비한 형님이시다. 작은 체구에 야무진 형님은 겹겹이 포개져 있는 장미꽃처럼 여일하다. 절대 꺾이지 않는 갈대의 강함도 소유하고 있다. 함께 개봉작 영화도 보고 작은 선물을 드렸다. 형님의 헌신적인 마음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일 뿐인데 감동해 하신다.

지는 태양이 아름답다고 느낄 즈음 그때서야 가족들 저녁준비가 생각난 우린 현실에 무사 귀환했다. ‘에구, 내 팔자야~’서로 가시 없는 한담을 나누며 서둘러 차에 오르는 형님과 다음을 약속했다. 인간의 뒷모습은 외로워 보인다고 했던가. 액셀러레이터 밟는 소리와 함께 자동차 바퀴가 굴러가는 모습이 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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