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칡넝쿨의 기세는 대단하다. 두 부류의 칡넝쿨이 있다. 땅으로 기어 세를 확장한다. 눈에 익은 풍경이다. 하늘로 오르는 것들이 있다. 고개를 들기조차 버거운 여린 새순이 수직으로 하늘로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서로 다른 뿌리에서 나온 것들이 약속이나 한 듯 모월 모시에 모종의 장소에서 둘, 셋, 넷이 돼 서로를 꼬아 위로 오른다. 새순이 하늘로 오르는 것은 고개를 들지 못하는 갓난아이가 대들보 위에 오르는 것과 같다. 인간은 불가능한 일을 칡넝쿨은 해낸다.
땅의 칡넝쿨과 하늘의 칡넝쿨이 세상을 보는 관점(viewpoint)은 다르다. 평생 1층 높이의 관념에 갇힌 존재는 고개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너머에 있는 세상을 볼 수 있는 위치까지 가는 물리적 행이 수행이다. 예술 행위도 거기로 가기 위한 행이다.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거기에 가야 한다. 거기가 높은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물, 미시세계도 엄존한다. 낮은 곳을 배척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지렁이를 왜곡한 패배주의적 방어기제다. 지렁이를 실존의 시작으로 마주하면 관점은 달라진다. “지렁이는 지렁이가 지나간 길을 가지 않는다.” 같은 길을 가면 먼저 지나간 지렁이의 똥을 먹기 때문이다. 다른 지렁이가 지나간 길을 가면 남의 똥을 먹는다. 자기가 지나온 길을 가면 자기 똥을 먹는다. 이나저나 똥을 먹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난해 10월, “너 자신을 혁명하라”에서의 배설론이 자신의 정체성을 모해 은닉한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 현상이라면 지렁이의 실존 비유는 몸의 철학, 생리적 배설이기에 시작부터 오염된 모해 위작이다. 냄새는 더 고약하다. 몸과 정신이 쩐에 오염된 예술은 결국, 남의 똥(작품)을 내 똥이라 한다. 내 똥을 내 똥이 아니라 억지한다. 지경이다. 하여간 식물의 생장에 질 좋은 거름이 되는 지렁이 분변토(똥)는 지렁이가 식물이나 인간을 위해 낸 것은 아니다. 제 살기 위한 지렁이의 본능적 행위의 선순환이다. 지렁이는 내 똥, 네 똥 하지 않는다. 정직한 자연법이다.
하늘로 오르던 칡넝쿨은 기어코 대단한 높이의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아랫 동네에서는 볼 수 없는 세상을 본다. 우주에서 직송한 신선한 태양을 먹는다. 땅의 칡넝쿨이 상상하지 못하는 뷰 포인트다. 이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비슷한 유형의 MBTI를 가진 타자와 콜라보를 했다. 발 아래 넝쿨들은 감당 못 할 운명의 예초기에 난도질 당할 줄도 모른 채 난마처럼 얽혀 있다.
지렁이가 이미 난 길을 가지 않고 새 터널을 뚫는 것은 신선한 흙을 먹기 위해서다. 칡넝쿨 새순이 나 아닌 존재와 통섭해 하늘로 오른 것은 태양 에너지를 취하기 위해서다. 지렁이, 인간, 안드로메다, 혜성, 자연과 우주의 빈틈없는 구조는 살기 위한 본능적, 물리적 존재 방식이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삶은 없다. 살기 위한 본능적, 창조적 욕구가 허(虛)하거나 구조가 부실할 때 존재는 죽은 별, 유성이 된다.
인간의 예술 행위도 살기 위한 본능적 존재 방식이다. 예나 지금이나 작가로 목숨을 부지하기에 녹록지 않은 세상, 처절하게 작가로 살았다면 처절하게 본능적 행위의 유산이다. 창조는 자연이다. 나를 던져야 한다. 스스로 임상실험의 모르모트가 돼야 한다. 그래야 생명이 된 지렁이의 실존처럼, 창조적 행위가 우주처럼 빛난다. 창조는 우주다. 본능적 창조를 소외할 때,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이미 죽은 별이다.
순간도 수많은 존재가 생하고, 몰한다. 모든 존재는 유성이 된다. 우주하는 절대 법이 집행을 유예할 뿐이다. 죽음보다 삶의 가치가 더 크면 죽어서도 산다. 모든 나를 채운다. 창조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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