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동서화합이 통일의 원동력

인간은 누구나 일상에서 이해관계에 따라 갈등과 대립이 생겨난다. 이로 인해 격한 감정이 분출되면 물리적 충돌도 가능해진다. 한때 우리사회도 지역갈등으로 커다란 아픔을 겪은 바 있다. 그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다. 누구나 화해를 풀지 못하면, 스트레스와 증오가 잉태된다. 하지만 서로가 화해하고 상대를 진정으로 포용하면, 감정의 응어리는 봄눈 녹듯 풀리게 된다. 타인에 대한 증오심은 내 자신의 정신건강에도 해롭다. 반면, 이해와 배려심이 많은 사람은 행복의 지수도 높고, 좋은 인간관계도 지녔다. 지난해 12월 초, 영호남의 화합을 위해 새누리당 경북지역 의원들과 민주당 전남지역 의원들이 지역갈등을 해소하고자 동서화합포럼을 결성했다. 올 1월 15일 故 김대중 대통령 생가를 방문했고, 이어서 3월 3일에는 故 박정희 대통령 생가를 방문했다는 신문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돌이켜보면, 정치사적 관점에서 두 전직 대통령 때 지역감정이 생겨나 설상가상으로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망국적인 동서분열의 골이 깊어졌다. 이제야 두 지역 정치인들이 결자해지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나선 것은 만시지탄의 감은 있지만 천만다행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생가방문 그 자체로 마음의 상처가 치유될까. 입으로는 화합을 쉽게 말하지만 문제해결엔 그다지 녹록치 않을 것이다. 최근 통일대박이란 화두가 등장해 느낌은 좋다. 그렇지만 진정한 동서화해 없이 관습처럼 표출된 증오감이 하루아침에 말끔히 지워질지, 아무도 모른다. 일회성 행사로 그치지 않고 미래를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길 간절히 바란다. 여전히 지역감정과 흑백논리, 색깔론이 득세하고 있다. 국정원 대공수사국 현직직원이 2년가량 인터넷 게시판에 전*디언 씨족을 멸해야 된다, 홍어*등 3천400개의 비방 글을 올렸다고 검찰이 뒤늦게 밝혔다. 참으로 서글프고 통탄스럽다. 하지만 이런 저급한 분열행위에 대해 강력한 법적조처가 없다면, 동서화합은 구두선에 그칠 공산이 크다. 또한 여태껏 역대의 대통령도 일체의 분열행위를 엄단하겠다고 의지를 표명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실제로 동서분열 행위에는 어떤 야심이 숨겨있는 걸까. 특히 선거 때만 다가오면 관행처럼 지역갈등을 부추긴 발언으로 정치인들은 반사이익을 얻는다, 하지만 결국 망국으로 가는 길이다. 중국 춘추시대 한비자는 세상에는 멸망에 이르는 세 가지 길이 있다고 했는데, 그 중 하나는 도리에 어긋난 자가 도리에 따르는 자를 공격하면 망한다고 했다. 박정필 시인ㆍ수필가

[천자춘추] 음악과 나의 삶

음악과 나의 삶을 정의 한다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과 같다. 손에 잡힐 듯 그렇지만 결국 잡히지 않는 음악이 가진 이미지. 이 추상성의 모습에서 흔히들 우리는 음악을 아름다움과 연관을 시킨다. 그렇다면 정말 내 삶속에 있어서, 음악은 아름답기만 했을까? 고대부터 많은 음악가철학가수학가들이 정의내리고 싶어 했던 음악, 그들도 한마디로 이야기 하지 못하였던 그 음악을 내 삶에 비추어 볼 때 과연 나는 어떠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1994년 버나드 로즈 감독의 영화 불멸의 연인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베토벤:음악은 무서운 걸세 왜 인줄 아나?.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어, 음악의 역할이 뭐지. 쉰들러: 영혼을 맑게 합니다. 베토벤: 말도 안 돼 행진곡을 듣는다고 영혼이 맑아지나? 왈츠를 들으면 춤을 춘다네, 미사곡을 들으면 기도를 하지, 음악은 작곡자의 정신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청중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 음악은 최면과 같아, 이 곡을 썼을 때 내 마음의 상태를 느낄 수 있겠나? 남자가 연인에게 가고 있는 중일세, 그런데 빗속에서 마차는 진흙탕에 빠지고 말지, 그녀는 영원히 기다리지 않아, 바로 그 남자의 초조한 심정을 표현한 거라네. 음악이란 그런 거야 작곡가의 감정이지 듣는 사람의 환경 및 입장은 중요하지 않아, 작곡가의 감정을 느껴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어 그 점이 중요하지. 수많은 음악들은 우리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때로 무의식적으로 듣게 되는 그 어떤 음악은 당시의 나의 상태를 더 극대화 시키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바로 음악이 갖고 있는 마력이다.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작곡자의 의도를 읽어내는 것도 어렵지만 작곡자의 감정을 그대로 느낀다 해도 반드시 그 의도대로 이해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관점을 이해하지만 작곡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의 느낌에 따라 그 음악이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은 또한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 음악이나 인생은 참으로 복잡하고 어렵다. 사춘기 방황하고 고민에 찼던 아픔들이 인생의 열매를 거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나는 누구인가?로 다시 시작되는지 . 그 해답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내 인생의 음악은 조물주가 세상을 만드셨을 때처럼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거짓 없는 선율을 노래하고 싶을 뿐이다. 내 음악 속엔 나와 그리고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 또한 그 책임감은 다시 나를 찾기 위한 시작으로 내 삶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 되지 않을까? 김재영 경기도립국악단 예술단장

[아침을 열면서] 산에 오르는 길과 문학의 길

산에 오르는 방법, 즉 산꼭대기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이다. 힘들더라도 곧장 일직선으로 올라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힘이 덜 드는 지름길을 찾아 돌고 돌아 오르는 이, 남이 가는 길보다는 남이 가지 않는 샛길을 좋아하는 이 등 저마다 제가끔 산꼭대기에 이르는 방법이 다 다르다. 산꼭대기에 먼저 다다른 이가 내려다보면 각자가 취한 방법에 대해 훈수를 해주고 싶은 마음도 들 것이다. 산꼭대기에 이르는 방법은 곧 문학의 방법과도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른바 순수문학을 한다고 하는 문학 지상주의자들은, 말로는 목숨 걸고 문학을 한다지만 이 나이 먹도록 그들이 문학에 목숨 거는 걸 보지 못했다. 술에 목숨 거는 이들을 가끔 보긴 했지만 말이다. 그들은 산이 높네, 물이 시원하네, 자연은 역시 아름답네 어쩌네만 들먹이며, 끝내 산꼭대기엔 가지 않고 산이 지닌 것에 대해 품평만 한다. 그들은 산 자체에 대해선 쓰지 않는다. 그들이 있는 산 아래에서 보는 정경과 자신들이 품평한 것에 대해서만 쓴다. 그러면서 산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한다. 이에 비해 민중문학자들, 즉 참여문학자들은 산에 가긴 간다. 그들은 여간해선 산 아래에서 고기나 구워먹으며 음풍농월하지 않는다. 근데 산길을 걷는 동안 계속 투덜댄다. 배낭에 수건을 넣었네 안 넣었네, 신발이 맞네 맞지 않네, 갈증이 나네 어쩌네 하며 계속 투덜댄다. 그러는 사이에 산꼭대기에 이르긴 이른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이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이 온 길로만 다른 사람도 올라오길 바란다. 다른 길로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온 이가 있으면, 산꼭대기에 오르는 방법의 다양성을 인정하기보단 아주 잘못된 것으로 재단하며 다음번에는 그 길로 오지 말라고 훈계한다. 문학 지상주의자들이여! 정경 묘사만 하지 말고, 품평만 하지 말고 산꼭대기에 한번 직접 올라가보시라. 그러면 자신의 말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 것이로다. 참여문학자들이여! 그만 투덜대고 묵묵히 산에만 그냥 올라갔다가 내려오시오. 그러면 훨씬 더 있어 보일 텐데, 왜 그렇게 자신의 방법만을 고집하며 가르치려 드는가? 성급한 결론인지 모르지만, 문학을 하는 사람 모두들 품평만 하지 마시고, 투덜대지도 마시고, 일단 산꼭대기에 올라가보시기를! 작가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삶에 공감을 하는 데서 글쓰기 출발을 한다. 타인의 삶을 잘 들여다보면 나의 삶은 물론 내 속에 있는 타인도 잘 들여다보인다. 그래서 현장이 매우 중요하다. 현장은 자신의 시각을 교정할 중요한 공간이다. 현장을 자주 보아야 순수문학파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관념에 빠지지 않고 더불어 민중문학파의 등산 길라잡이 같은 독선을 부리지 않게 된다. 순수하다는 게 뭘까? 포도주의 풍미는 잡것에서 난다는데, 순수하게 끓인 증류주엔 생명이 못 살고 무균상태에서도 생명체가 못 사는데. 근데도 사회 현실을 외면한 문학인들은 순수를 주장한다. 이들은 이른바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며 순수문학을 주창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관념에 빠져서 난해 시 등을 남발한다. 어쩌면 그런 난해한 글은 많은 사람들이 안 읽기에 독자대중은 피해를 덜 받는 역설도 가능하다. 이에 비해 참여문학 내지는 민중문학자들은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 고집이 대단하다. 그러기에 계몽 시 등을 쓰기도 한다. 높은 산을 오를 때 마치 산 아래 기지에 있는 등산 대장처럼 굴며 대원들만 산에 갔다 오게 하는데 그것도 자신이 갔다 온 길로만 다녀오라고 하는 짝이다. 문제는 그 고집이 독자 대중에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 하여튼 순수문학이 있을까? 사람은 기본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살이와 관계를 맺기에 애초에 삶은 참여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문학도 삶을 쉽게 떠나지 못하리. 박상률 작가

[천자춘추] 심각한 구도심 지역의 문화예술

2014년도는 경기도가 탄생 600주년을 맞은 해이다. 우리나라 최대 광역단체로 성장한 경기도는 현재 28개 시와 3개 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구는 1천250만명으로 이미 서울을 훌쩍 넘어섰다. 이에 필자는 서울과 문화예술분야의 비교분석을 시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이 나타났는데, 바로 신도심지역과 구도심지역 간의 문화적 간극과 갈등이었다. 이 땅의 경제발전과 함께 경기도 곳곳에는 최고의 시설과 환경을 갖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속속 들어섰다. 신도심지역이라 불리는 이곳은 경기도내의 고양, 성남, 안양, 용인, 화성 등 거의 모든 시군에 형성되어 있다. 더불어 이곳의 문화예술 하드웨어는 서울의 어느 곳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으며, 소프트 웨어 역시 경기도민이 서울시민보다 먼저 수준 높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제공되고 있다. 문제는 구도심지역이다. 그곳은 그 지역에서 태어나 그 지역의 정서를 이끌며 살아온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오랜 삶의 터전으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역으로 자리 잡아왔다. 그러던 곳이 시나브로 신도심지역에 밀려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문화예술의 경우, 구도심지역 어디나 신도심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미 노후해서 더 이상 예술적 의미를 상실한 문예회관과 여기저기 눈에 띄는 쓸모없는 유휴 공간들. 그곳에서 어떻게 수준 높은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겠는가. 그러다 보니 정부는 찾아가는 예술사업을 통해 유휴 공간 활용 및 문화예술향유 기회를 제공하고 있지만, 과연 구도심지역민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그것일까? 필자는 찾아가는 예술 사업 공연 분야에 관한 지역민들의 의견을 수렴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신도심지역 주민들처럼 좋은 시설의 문화공간에서 수준 높은 문화예술을 접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분개하고 있었다. 사실 전국 어디보다 경기도내의 구도심지역과 신도심지역의 문화적 간극의 차이는 더욱 심각하다. 이는 북쪽의 동두천이냐 남쪽의 용인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지자체에 공존하고 있는 신도심지역과 구도심지역 간의 문제이기에 더욱 난감하기만 하다. 얼마 전, 정부가 발표한 유휴 공간 활성화 및 지역 생활 문화 정책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도심지역과 신도심지역 간의 심각한 문화적 간극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 정책이 시급하다. 김혁수 용인문화재단 대표이사

[천자춘추] 우리는 언제?

엊그제 지방지에 교육부 국정과제인 자유학기제를 경기도의 많은 학교로 확대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중학교 1학년 2학기에 실시하며 이 기간에는 시험이 없되 오전에는 기본교과를 배우고, 오후엔 진로 탐색과 예술활동 등 다양한 체험을 한다. 2016년에는 전면 실시예정이다. 작년에 자유학기제의 모태인 아일랜드의 전환학년제(Transition Year, 이하 TY)를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그 나라는 1998년 교육법이 제정되면서 학교진로교육이 보편화되었고, 학생 500명당 1명의 진로지도교사를 두고 있다. TY는 10학년(고1) 1년간 실시되며, 진로지도교사의 책임 하에 폭넓은 교과목 선택, 직장체험을 통한 직업기술과 역량을 획득한다. 그 기간 해외연수나 여행, 기업체 파견이 가능하고, 학교에 자율성을 두어 모듈수업 등 단기간의 프로그램개설이 가능한 학생 안식년제이다. TY는 학교마다 참여를 결정하는데, 한국인 부모 대부분 TY를 실시하지 않는 학교에 자녀들을 진학시킨다. 이유는 의대나 법대를 보내기 위해 낭비할 시간이 없단다. 사실상 TY를 경험한 학생들은 자신이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목적의식을 갖게 되어 더 열심히 공부한다는데. 한국의 자유학기제가 중1 사춘기 혼돈의 시기, 자아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와 일치해 진로탐색과 거리가 있다면, TY는 미래의 삶이나 직업선택을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고1 시기이다. 때가 언제든 100세 시대에 1년 정도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탐색하는 것은 필요하다. 더 나은 대학을 위해 재수도 마다치 않는 한국이 아닌가? 그러나 1년씩이나 학교에서 시험도 안 치르고 진로탐색을 한다면 우리 애 당신네들이 평생 책임 질거냐?는 민원에 시달릴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자아정체감도 어느 정도 형성되어 미래 직업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중3, 1학기에 실시하면 어떨까? 혹자는 고입은 어떻게 하란 말이냐며 따지겠지만, 이제는 대학만 가기위한 공부보다는 미래의 꿈을 위해서, 필요할 때 대학에 가야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내 자식만은 예외지만 말이다. 아일랜드에서 TY에 참여하고 있는 한 국인을 만났다. 그의 딸은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직접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고, 면접 후 2개월간 직업체험을 하고 있었다. 세계적인 IT업체가 학생에게 진로탐색 기회를 제공하는 풍토가 부러웠다. 그곳에는 세계의 다양한 기업들이 진출해 TY에 협조한단다. 이는 기업들의 사회적 공헌에 가치를 두고 있고, 사회적으로도 그것을 당연시 하는 문화가 정착돼 있다. 우리는 언제? 이현숙 경기도교육연수원 원장

[천자춘추] 토론식 교육이 시급하다

학문의 본질은 배우고 묻기이다. 배움은 모르는 것에 대한 탐구이고 따라서 배움은 왜라는 물음이 있을 때 이루어진다. 우리는 처음 학교에 갔을 때 질문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것이 창피하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ㆍ고등학교에 가면 입시암기위주 교육으로 정답찾기 교육에 몰입한다. 시험에 나온다는 말을 듣고 무조건 외워서 답을 한다. 이래서는 창의적인 인간의 육성은커녕 천편일률적인 인간을 양성할 수밖에 없다. 어느 중학교 1학년 도덕과목 문제를 예로 들어 보자. 대체로 사람의 꿈은 언제 결정되는가?이다. 주어진 선택 항목은 ㉠ 10대 ㉡ 20대 ㉢ 30대 ㉣ 40대 ㉤ 50대 교육이다. 여러분은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정답은 ㉠이란다. 왜 ㉠이 정답이냐는 물음에 학생들은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 있고 그렇게 암기했단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가? 사람의 꿈이 어떻게 10대에만 결정될 수 있는가? 우리의 교육방법도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창의적인 인간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틀에 박힌 정답찾기에서 벗어나 토론식으로 교육방법을 혁신해야 할 시점이다. 유태인의 전통적인 교육방법인 예시바(Yeshivah)를 적용해 보는 것은 어떠한가? 예시바는 유태인의 전통적인 교육기관으로 일종의 도서관이다. 이곳은 탈무드를 공부하고, 유태인의 가치를 연구하는 곳이다. 예시바가 다른 도서관과 달리 특별한 점은 조용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떠들고 토론을 한다는 것이다. 예시바의 책상은 둘 이상이 마주보고 앉도록 놓여 있다. 바로 토론과 논쟁을 위한 좌석배치다. 유태인들에게 공부는 그냥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의견을 나누고 소통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의견을 발전시키고 책의 의미를 더 깊이 파악하게 된다. 토론이 잘 이루어진다는 것은 남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토론을 잘 하는 유태인들에게는 남보다 뛰어난 것이 아닌 남과의 다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유태인의 격언 중에 100명이 있으면 100개의 서로 다른 생각이 존재한다는 말이 있다. 질문과 토론을 통한 공부, 비판적 사고를 통해 도달하는 창의성의 발견, 이것이야말로 유태인 교육의 본질이자 이들의 저력이라 할 수 있다. 우리도 질문하는 것을 책망하는 대신에 확실히 알 때까지 질문하는 것을 권장해야 한다. 토론을 통해 개성을 발견하고 진정한 앎과 지식을 추구하도록 예시바와 같은 시끄럽게 떠드는 도서관이 활성화되기를 꿈꿔본다. 김해겸 청덕고 교장ㆍ용인대 외래교수

[천자춘추] 아파트와 층간 소음

고대국가에서 도시국가로 변모하면서 공공주택 또한 끊임없이 발달했다.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기 이전에는 개인주택 형식의 집들이 많았으나 도시화로 인구가 늘어나면서 토지의 효율적 이용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다층형 공동주택인 인슐라(Insula)가 탄생해 중세까지 이어졌다. 요즘의 상가주택이나 주상복합 건물과 비슷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 12차 경제개발 이후 아파트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수도권 인구집중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주택난이 극심해져 1990년대 초 분당, 평촌, 일산 등 5개 신도시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도시는 서울 인구의 분산이 당초 목적이었으나 오히려 수도권 인구집중을 부채질했고 부동산 가격상승으로 이어졌다. 아파트가 지어진 지 80년 정도가 지난 현재 우리는 아파트 공화국이라 할 정도다. 지난해 말 전국 1천730만 가구 중 아파트가 820만 가구로 48%에 이른다. 전국민의 91%가 도시지역에 거주하고 있다는 통계를 볼 때 도시지역의 아파트는 70%를 훌쩍 넘는다. 따라서 전체 국민의 70%가 공동으로 사용되는 구조물에서 공간을 나누고 벽을 나누는 이웃이 됐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이웃과 철저히 격리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층간 소음으로 인한 분쟁이 심각한 수준이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올해 관련 법령을 개정하여 층간 스라브 두께는 210㎜로 하고, 층간소음의 주ㆍ야간 데시벨(db)을 강화하는 한편 설비배관의 상층배관 등 구조체에 따른 소음을 최소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방안도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과거 기둥식 구조방식에서는 기둥으로 인한 공간구성이 자유롭지 못했으며 구조체에 따른 층고에 대한 부담으로 층수제한으 로 이어져 경제적 부가가치가 제한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 보완한 벽식구조 역시 공간배치와 층고의 효율성, 공기단축 등 경제적 이점이 있지만 구조체에 따른 층간소음이 기둥식 구조에 비해 열악하다는 단점이 있다. 주택건설공법의 지속적인 연구와 개발이 요구되는 이유다. 아울러 공동주택에서의 생활방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고립된 구조와 생활방식에서 탈피하여 이웃과 소통하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통해 공동생활에 적응하는 입주자들의 노력이 중요한 것이다. 공동주택의 설계와 건축도 이제 일률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아닌 각 세대 구성원의 개성과 생활방식에 따라 잘 계획된 새로운 형태의 주거공간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신계철 경기도건축사회 부회장

[천자춘추] 신규 법조인 양성제도에 관하여

이전에는 사법시험에 학력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법조인이 되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하여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장벽이 없었다. 그런데 로스쿨 제도가 생기면서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비싼 등록금을 내고 3년간 로스쿨을 다녀야만 법조인이 될 수 있다.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은 옛말이 된 것이다. 물론 2017년 폐지될 사법시험이 아직 존치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법조인이 되는 길은 로스쿨을 수료하는 길밖에는 없다. 더구나 사법시험 고졸 응시자 수는 매년 줄고 있다. 사법시험 고졸 응시자는 2003년까지는 한동안 500명 안팎을 유지했다. 그러던 것이 2004년부터 급속히 줄었다. 그해 치러진 46회 시험 때 고졸 응시자는 달랑 45명에 그쳤고 이후에도 매년 100명을 넘기지 못했다. 고졸 응시자 수가 이처럼 줄어든 것은 우선 어학시험 과목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사법시험 정원이 줄어든 것과도 연관된 듯하다. 당시 필자는 왜 법조인 양성제도에 학력제한을 둘 수밖에 없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유념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사회계층 이동의 자유로움이라고 생각한다. 즉 아무리 노력하고 능력이 있어도 경제적 문제나 계층이라는 벽에 막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면 그건 좋은 사회가 아니다. 그리고 현 제도에 대한 추진과 법안 통과 당시 사회적 약자 편에 서 있다는 각종 진보정당과 진보단체는 의아하게도 이런 문제에 대해 별 언급이나 주장이 없었다. 법조인을 특권계층이라 여기는 생각에만 얽매여 여러 가지 문제를 깊고 넓게 생각지 못한 채 법조인 숫자 늘리기에만 급급했던 것이 아닐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지난 20일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노철래 국회의원과 대한변호사협회의 주최로 신규법조인 양성제도 개선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고, 필자만 문제의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 자리에서 2017년 사법시험이 폐지되면 법조인 양성 통로가 로스쿨로 일원화 되는 것은 서민에게 큰 장벽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현행 법조인 양성제도에 일고 있는 불신에 대해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누구든지 현재의 위치가 어떻다 하더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고 무슨 직업이든 가질 수 있는 그러한 기회의 평등이 있는 사회가 되길 소망해 본다. 이병길 법무법인 평정대표 변호사

[천자춘추] 지방선거 과열을 막는 방법

지난 9일 북한에서 김정은 집권 후 첫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북한 중앙선거위원회는 전국적으로 선거자명부에 등록된 전체 선거자의 99.97%가 선거에 참가해 해당 선거구에 등록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후보자에게 100% 찬성 투표했다고 발표했다. 투표율과 찬성률이 높다고 민주화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1972년 헌법, 이른바 유신헌법의 경우도 92.9%의 투표율에 찬성률은 91.5%였다. 현재도 우리나라는 유럽이나 미주국가들에 비하여 대체로 투표율이 높은 편이다. 이번 64지방선거에 대하여 아직 국민들은 그렇게 높은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정치권은 이미 격앙되어 있는 분위기다. 지방선거 출마를 위해 중앙공무원 17명, 지방공무원 139명 등 모두 156명이 사직했다고 한다. 행정공백이 우려된다. 앞으로 사퇴할 지방의원이나 국회의원들도 많다. 이러한 과열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은 여당과 야당의 지도자들이다. 이른바 거물 차출론을 통해서 인지도가 높은 사람들을 지방선거에 내몰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애당초 지방선거와 지방자치에 관심이 적은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 상당수가 당선 후 더 큰 정치적 무대로 가기 위하여 노력하고 급기야 임기를 안 채울 사람들이다. 지방자치가 제대로 되려면 이번 선거에서 진심으로 지방자치에 관심 있는 사람, 중앙정치에 눈길 주지 않고 지방을 위해 봉사할 사람들을 가려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정치가 이처럼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지방 선거지만 전국 단위로 동시에 모든 지방선거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정치에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고, 또 국민들의 관심도 과열될 수밖에 없다. 한 번에 모든 선거를 해야 하니까 광역기초자치단체장, 광역기초의원, 광역기초비례대표, 교육감 등 7번 투표를 해야 한다. 각 선거마다 4~5명씩 후보와 정당이 있다면 30명 이상의 후보가 있는 셈이다. 후보자를 다 알기도 어렵다. 그런 실정에서 정당의 개입은 필연적이며, 기초선거에서의 정당공천 폐지는 비현실적이다. 공천을 포기한다 해도 실제로 선거와 그 이후의 지방자치에 아무 역할을 안 할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지방선거의 전국 동시선거를 포기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지방자치라면 그 지역의 선거방식이나 선거시기도 그 지역에서 정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지방선거를 자치답게 하는 길이다. 오호택 국립한경대 법학과 교수ㆍ경기도 선관위원

[천자춘추] 예술교육의 쓰라린 추억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정부의 정책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특히 문화예술교육 중장기 발전계획은 가장 반가운 소식이었다. 구체적 방안 중에서 지역에 흉물로 남아 있는 폐교 및 폐산업시설을 문화예술교육의 산실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것과 문화예술교육사 자격제도 안정화를 위한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는 것은 일회성 성과에서 벗어나 문화융성을 위한 근간부터 접근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필자 역시 용인문화재단의 경영자로서 예술교육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에 정부의 이러한 발표가 성공적인 결실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사실 필자가 예술교육에 관심을 갖게된 가장 큰 이유는 어린 시절의 쓰라린 추억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음악 공개수업 시간이었다. 필자는 대부분의 친구들과 함께 캐스터네츠를 치고 있었다. 하지만 시선은 멜로디언이나 실로폰을 연주하는 몇 명에게 향하고 있었다. 도대체 캐스터네츠를 통해 무엇을 느끼라는 것인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공개수업을 위한 엑스트라일 뿐이라는 사실을. 중학교 시절의 미술 수업 시간은 황당하기만 했다. 그저 교탁 위의 꽃병을 그대로 옮겨 그리던 반복된 붓질과 종료시간까지 마르지 못한 물감 때문에 도화지 두 장이 붙어버린 스케치북을 보며 무슨 예술교육을 찾을수 있었겠는가. 고등학교 때는 연극이 좋아서 국어 교과서의 희곡 단원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때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 설렘은, 희곡이 대학입시와 전혀 관계없다는 담당교사의 냉정한 한마디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우리는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문화예술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쓰라린 추억은 그후로도 오랜 시간 현실에서 지속되었고, 그 결과는 외적 풍요로움과 내적 빈곤의 갈등으로 나타났다. 갈등해소는 새로운 예술교육만이 가능하다. 물론 드러나는 외적 성과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조건 하에. 성과에 대한 조급함 때문에 탈바꿈된 문화공간이 기존의 주민센터 역할과 별 차이를 보이지 못하게 되거나, 예술교육이 지금처럼 교육현장과 거리가 먼 커리큘럼으로 현장 예술가의 생활 보조 사업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부디 진정 사명감을 가진 예술교육가의 창의적이고 신명나는 예술교육이 새로이 탄생한 문화공간에서 맘껏 꿈을 펼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김혁수 용인문화재단 대표이사

[천자춘추] 평생학습, 시민참여로 이루어진다

평생학습은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운영해도 시민의 참여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이제 자신의 삶을 품위 있게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참여의식이 필요한 때이다. 안양시는 시민 주도적 평생학습을 이끌어 가기 위해 두드림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자신의 빛깔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맞춤형 설계 학습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의 학습 욕구를 충족하고 학습 소외계층을 최소화한다는 방침이다. 안양시민 중 성인 7명 이상이 자발적으로 팀을 만들고 원하는 강좌와 시간, 장소를 제안하여 신청하면 적격성 심사 후 강사 또는 강사비를 지원하는 시스템이다. 지원 분야는 평생교육 전 분야의 기초 혹은 입문 교육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총 70개 강좌를 운영하였으며, 설문조사 결과 98% 이상이 만족한다고 답변하였다. 이처럼 두드림 강좌사업이 해를 거듭할수록 시민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인기 있는 프로그램으로 정착되고 있다. 이와 유사한 배달강좌는 일본 야시오 시의 대표적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야시오 시는 주민을 대상으로 행정을 알리고 시정을 홍보하는 강좌 운영에 서비스 정신을 추가하였다. 시민이 듣고 싶은 내용을 메뉴화하여 제공한 후, 시민이 원하는 강좌를 선택하면, 시 직원이 강사가 되어 지정된 장소에 나가 강의하는 것이다. 기본 틀은 시민에게 자발적인 학습장소를 제공하는 것, 시민에게 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행동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 행정과 시민이 상호 신뢰를 쌓는 것이다. 안양시도 2011년부터 교육시설이 아닌, 사무실, 아파트, 주민편의시설 등을 학습장소로 선정하여 두드림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올해에도 4월부터 운영할 계획으로 시민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안양시 평생학습 통합홈페이지 (http://learning.anyang.go.kr) 두드림 강좌 공지사항을 참조하면 된다. 두드림 강좌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이 함께 만나고 어울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공동체 의식이 생긴다. 그뿐만 아니라, 세대 간 위화감도 해소된다. 각자의 강좌를 듣는 모임과 모임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어 마을 공동체 의식 형성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 자기 계발은 물론이고 지역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서로 배우고 협력하는 도시, 소통하고 실현되는 평생학습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있어야 한다. 강의를 받기 위해 들어가는 시민과, 교육을 받고 나오는 시민의 힘찬 발걸음이 분주히 교차할 때 활기찬 안양의 미래도 열릴 것이다. 정문택 안양시 평생학습원장

[천자춘추] 빅데이터 활용, 사이버보안 피해막자

사이버보안 피해가 우리 사회의 중요 이슈가 되고 있다. 한 매체에 의하면 지난 5년간 금융기관서 유출된 개인정보는 1억 9백만 건, 거래액만 최소 54억 원(건당 50원 기준)에 달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 같은 피해에도 우리의 보안의식은 여전히 낮다는데 있다. 특히 인터넷을 떠도는 개인정보가 거대한 하나의 데이터를 이루는 빅데이터 사회에서는 더욱 심화될 수 밖에 없다. 사실 빅데이터는 새로운 가치창출 엔진으로 인식되면서 산업계 전반과 공공분야, 더 나아가 일상생활에까지 활용분야가 넓어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빅데이터 기반 사회 안전이나 공익 신장의 비즈니스 세계가 새롭게 창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개인정보유출 사고 등으로 이러한 빅데이터의 활용의 긍정적 가치 창출 및 그 확대 여세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빅데이터를 활용한 무한의 가치 창출만큼 수집 빅데이터의 보호와 빅데이터 저장 인프라를 보호하는 보안투자와 보안의식 제고가 필요하다. 이는 한마디로 빅데이터에 보안을 입히는 일로서 빅데이터 보호를 위해 통합보안관리와 데이터 가치사슬관리를 하는 것을 말한다. 보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로 아예 빅데이터를 활용해 사이버보안을 강화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는 기존 IT 보안산업 시장에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 시장을 더하게 되며, 빅데이터 산업과 정보보안 산업을 동시에 키우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방법인 것이다. 물론 빅데이터 시장과 사이버보안 시장 모두 외국계 글로벌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어 국내 빅데이터 사이버보안 시장의 확대가 소수의 글로벌 대형 외국기업들에 대한 종속을 강화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 염려만이 능사는 아니다. 빅데이터 사이버보안 영역에서 해외기술 의존을 탈피한 국내 기업생태계를 조성하고 글로벌 수준의 국내 기업을 육성하는데서 해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차제에 정부는 빅데이터에 보안을 입히고 더 나아가 사이버보안을 빅데이터로 향상시키는 빅데이터와 사이버보안의 통합운용 정책기조를 설정하였으면 한다. 이런 기조에서 정부 및 공공기관의 빅데이터 통합보안관리 플랫폼 구축사업을 시범적으로 실시하고 점차 확대해 가야 할 것이다. 유영성 경기개발연구원 연구위원

[천자춘추] 봄이 오는 길목에서

바야흐로 봄의 문턱이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우듬지를 살포시 자극하면 초록맥박이 거세게 뛴다. 아직도 깊은 계곡엔 동장군의 하얀 입김이 군데군데 서러있는데도 봄의 전령사인 귀엽고 앙증맞은 복수초, 바람꽃, 노루귀 등 야생화가 찬 기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꽃망울을 터뜨렸단다. 하순쯤 남녘에서 시작하여 개나리, 벚나무가 시샘이라도 하듯 앞 다퉈 피어내어 온 누리를 환히 밝혀줄 것이다. 그중 양지바른 산자락의 개나리가 제일 먼저 꽃등을 들고 봄 마중을 나간다. 네 갈래 노란꽃잎에 코끝을 갖다 대보면, 물씬 풍기나온 향긋한 냄새가 온 몸에 배어든다. 그 순간, 어릴 적 불렀던 봄나들이 노래가 절로 흘러나와 흥얼거리게 된다.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 떼 종종종/ 봄나들이 갑니다. 이처럼 동요가 나이에 상관없이 기억에 남은 것은 부르기 쉽고 가사가 간단하며 국민정서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또 뒷동산에 올라가 진달래 꽃잎 따먹고 입안이 온통 붉게 물들었던 시절도 잊지 못할 것이다. 머지않아 흐드러지게 핀 꽃들의 축제가 열리면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것이다. 실제로 이런 아름다운 꽃축제는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기도 하고, 지역 주민의 끈끈한 공감대가 형성되며, 아울러 홍보효과도 크다. 그뿐만 아니다. 아낙네들은 취나물, 두릅나무새순, 씀바귀 등 산나물을 뜯어다가 요리솜씨로 입맛을 돋우기도 한다. 또한 길거리의 여인들 옷차림과 표정도 한층 밝게 만들고, 제주도 유채꽃도 활짝 피어주며, 강남 간 제비도 불러 들려서, 처마 밑에 둥지를 틀면 한 가족처럼 된다. 풀냄새 물씬 풍기는 산야에 누워서 아내와의 정다웠던 시절로 돌려보면서 이야기꽃을 피어내면, 사랑의 기운도 충만해지고, 막혔던 가슴도 뻥 뚫린다. 한편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돈과 명예만 집착하게 됐다. 도에 넘친 탐욕은 나도 해치고 이웃도 해치며 더나가 사회도 불행하게 만든다. 인간의 행복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한다, 사실상 손에 쥔 게 적어도 낭만과 휴식을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봄의 정취 속에서 만끽하게 되면 애틋한 감정도 새록새록 생겨나 기쁨이 배가 된다. 잠시 일상을 접고 봄 여행을 다녀 오면 에너지도 충전되어 일의 능률도 오르고, 자신을 괴롭힌 정신적인 고질병도 치유될 것이다. 찬란한 새봄이 가기 전 가정에 웃음꽃 활짝 피어보면 활기가 더욱 넘칠 것이다. 박정필 시인ㆍ수필가

[천자춘추] 경제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1953년, 한국의 GNP는 67달러였고 도시화율은 약 20% 정도였다. 2013년 한국의 GNP는 2천200달러를 넘었고 도시화율은 91.04%였다. 그 동안 우리 국민들의 노력의 결과이고, 한편으로는 인구와 부동산의 성장이 이를 뒷받침해줬다. 1955년부터 1963년까지 한국 경제성장의 주역인 베이비 붐 세대가 탄생했다. 이들은 약 700만 명으로 현재 한국인구의 약 13%를 차지한다. 또 한국노동연구원과 한국감정원에 의하면, 1970~1980년대에 실질임금은 2배 올랐으나, 전국의 땅값은 15배 올랐고, 강남의 땅값은 200배나 올랐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2007년 이후 부동산 시장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2010년 기준으로 한국의 출산율은 1.2명이다. 한 자녀 갖기 정책을 추진하는 중국의 1.6명보다도 낮다. 더구나 베이비 붐 세대가 2010년부터 본격적인 은퇴를 시작했으며, 2010년부터 2015년까지 5년 이내에 약311만 명이 은퇴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구는 정체되고, 노령화 사회가 진행되고, 부동산 시장은 침체되고, 이로 인하여 정부의 재정수입은 감소하는 반면 재정지출은 늘어나고 있다. 기존의 양적 성장 시대의 산출(output)로는 감당이 안 된다. 한국경제가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정책은 과거의 양적 성장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 서울시의 예산이 10조원이 조금 넘는 상황에서, 토지보상비로만 130조원 이상이 투입됐다. 이명박정부 시절 서울시의 예산이 약 22조원이었는데, 4대강 정비에만 22조원 이상이 투입되었다. 박근혜정부의 창조경제예산의 47.7%는 이명박정부의 녹색성장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사업이다. 이번에 박근혜정부가 발표한 지역경제 활성화 대책도 양적 성장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 출범당시 약 88조원이었던 국가부채는 이제는 약 1천조원에 이른다. 대부분의 자치단체의 재정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앞으로 64 지방선거도 다가온다. 이전 정책의 답습이나 포퓰리즘이 아닌, 참신한 경제성장 정책이 필요하다. 임형백 성결대학교 지역사회 과학부 교수

[천자춘추] 세계화와 한국의 전통 예술문화

우리는 민족적 단일성이 통용되는 국가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일상생활 안에 다양한 국가의 브랜드를 접하고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그들의 문화를 익히고 있다. 이렇듯 이제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세계의 문화와 민족 속에 어우러져 있으며, 우리 주변의 생활부터 세계적 보편화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제는 한류문화가 아닌 동양의 한국적 문화로서 서양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은 바로 우리의 전통문화가 새로운 국가적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 발전 진화함에 따라 우리의 생활양식은 변화하였고 이제 국가가 아닌 하나의 브랜드가 정체성을 대변해 주는 시대가 왔다. 글로벌리제이션은 언어 그대로 국가적 개념에서 세계화를 중심으로 하나의 집합체계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민족적 문화를 보았을 때 이젠 우리의 전통문화도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재조명됨은 물론이요, 서양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관심을 과거로부터의 잘못된 식민지적 사상에서 벗어나, 블루오션의 연구가치적 문화로서 자리매김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는 우리가 정확한 역사의식과 주체성을 확립하여야 할 것임은 물론이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전통문화의 가치와 그 중요성에 관하여서 구체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1세기는 문화가 경쟁력인 시대이다. 중국에 古爲今用洋爲中用(고위금용양위중용)이라는 말이 있다. 옛것은 지금을 위하여 사용하고 서양의 것은 중국의 것으로 변화시켜 사용한다.라는 뜻이다. 전통의 계승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여 그것을 다시 자국의 새로운 문화로 흡수해야 한다는 것. 보수성과 개방성의 극단을 보여주는 중국에 놀랄 뿐이다. 프랑스 역시 자국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하다. 유럽 및 세계 문화의 중심지라는 생각과 함께 전통을 매우 존중한다. 프랑스가 전통문화유산을 가지고 관광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브랜드의 국가 수입을 올리는 것에 있어서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문화예술분야에 전문가적 수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전통을 알리고 브랜드화 하는 일. 그것의 첫걸음은 바로 우리가 먼저 관심을 갖고 우리 문화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김재영 경기도립국악단 예술단장

[천자춘추] 의사들이 파업한 이유는?

1차 의사파업이 끝났다. 60군데 이상의 병원과 30%가 넘는 전공의, 50% 이상의 동네의원이 동참해 전면파업의 예고로는 성공적이었다. 의사 면허박탈까지 천명하던 정부도, 이를 각오하겠다던 대한의사협회도 일단 한숨 돌리며 다음 대응을 고민하고 있다. 이번 파업은 우리나라에서 지난 2000년 의약분업반대사태에 이어 두 번째다. 왜 의사들은 파업을 선택했는가? 여러 가지 요구가 있지만 이번 파업의 가장 근본적 이유는 의사들의 대접이 점점 못해지고 앞으로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낮은 수준의 금전적 보상은 물론이고 의사로서 필수적인 사회적 존경받음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자존심에 대한 상처가 더 크다. 이는 우리 사회문제의 핵심인 양극화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그간 의사 파업에 반대했던 보건의료노조와 시민단체, 보건의료단체의 지지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양극화의 출발은 효율성 경쟁을 통한 재화의 무한축적과 승자독식의 구조를 용인하는 시장중심정책에서 비롯한다. 대표적인 것이 영리병원설립을 포함한 법인병원의 영리 사업 합법화와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의료서비스의 독점이 가능하도록 한 원격진료의 허용이다. 전문지식과 의료자본의 축적이 미약하던 1980년대 이전에는 의료인의 양심이나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만으로도 의사집단의 품위유지가 가능했고 의사들의 자율적 규제와 서로 간 신뢰와 관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세계적 모범사례인 전국민의료보험이 시행되고 낮은 수가에 기초한 박리다매식 의료행위가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의사들 간 환자유치를 위한 무한경쟁이 촉발되게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형성된 거대의료자본은 고도로 집약된 인적자원과 초고가의 시설장비를 무소불위로 휘두르며 환자를 독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의료계의 양극화가 고착되기에 이르렀다. 보통의 의사들은 이제 이 거대의료자본의 임금노동자가 되거나 소규모개원의로서 정상적 경영으로는 품위유지조차 힘들게 되고 또한 건강보험관리기관의 눈치를 보며 잠재적 죄인처럼 진료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러한 불만의 개혁을 위한 외침이 이번 파업으로 표현된 것이다. 의료계 내 양극화가 가져온 평범한 의사들의 위기의식과 민간의료중심 의료정책의 홍수에 떠밀려 OECD국가 최하위 수준까지 밀려난 공공의료의 현실과 결국 궤를 같이하는 것이며 의사파업의 진정한 끝은 진정한 의료복지를 향한 공공의료의 정상화와 그 끝이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조승연 인천시의료원장

[천자춘추] 더불어 잘 사는 나라를 꿈꾸며

문자 메시지와 카톡의 홍수다. 다가오는 지방선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친분 없는 정치인이나 최근 정계 입문한 사람으로부터도 온다. 소위 말하는 단체문자. 국가와 지역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겠다는 진심어린 뜻이 담긴 말과 행동이라면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무관심해지고 심지어 왜 내게 이런 연락을 하는지 불쾌하기까지 하다. 자신들의 말처럼 진심으로 국가나 지역사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봉사를 하려는 사람은 적은 것 같다. 필자의 인지능력이 부족하여 그리 느껴질 수도 있고 필자가 정치에 대해 너무 삐딱하게 보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필자 한 사람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필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국가와 사회를 꿈꾸고 있다. 다만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기에 목표나 방향치가 다르고 방법론이 상이할 수 있다. 설령 생각이 다르더라도 목표가 같다고 한다면 여러 가지 방법의 노력으로 목표를 수렴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겉으로 국가와 민족, 그리고 사회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욕망 충족과 영달에만 목표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것이 우리 현실 정치의 문제인 것이다. 누군가 전에 얘기한 것처럼 사람이 살면서 더 나은 국가와 사회를 꿈꾼다 하더라도 모두 현실 정치인이 될 수는 없다. 군대로 비유하자면 최전방에서 적과 맞닿아 싸우는 보병이 있고 후방에서 포격으로 지원하는 포병이 있으며 공중에서 폭격을 지원하는 부대도 있다. 즉, 현실정치인으로서 현재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부조리와 불합리를 일선에서 타파해야 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필자와 같이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박수치며 그런 사람들을 응원해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러나 적과 싸울 의지가 없는 사람, 훈장만 필요한 사람, 싸우는 척하다가 오히려 아군에 피해만 줄 사람들은 아예 전장에 나가지 말길 바란다. 휘황찬란한 언변과 위선적인 행동으로 인해 후방의 지원군들은 너무 헷갈린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치는 정말 중요한 것이다. 자기 이외의 타인의 삶에 대해 진정으로 관심 있는 사람, 소외되고 아파하며 힘든 사람들에 대해 진정으로 공감하며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병길 법무법인 평정대표 변호사

[천자춘추] 저 남자 누구냐

엄마와 나의 대화는 언제나 4칙연산으로 시작한다. 엄마! 5+7은? 12 잘했어. 그럼 7+3은? 10 아~ 잘한다 난 선생님, 엄마는 초등 1학년생이다. 12+13은? 그건 1학년 문제잖아. 갖잖다. 그까짓 것 당신을 무시한다는 투로 눈을 흘기시는 엄마의 눈동자는 예전의 우리엄마다. 한자로 써 있는 글도 곧잘 읽으신다. 뜻만 잊었을 뿐이다. 하지만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엄마, 곱하기. 89는? 63. 아냐? 그럼 70? 엄마 72잖아 내 퉁생이에 엄마는 멋쩍은 듯 해 맑게 웃으신다. 평생 쌓였던 미움도 억울함도 소심함도 다 잊었으니 그녀의 웃음은 아기와 닮아있고, 우리의 대화는 단순하며 솔직하다. 뜰의 꽃을 반기며 다가가 냄새를 맡는 엄마를 볼 때면 흰머리 천사를 보는 듯하다. 수년전 스턴트시술 후유증으로 치매증세가 생긴 엄마의 모습이다. 내 딴엔 효도랍시고 엄마가 싫다던 시술을 해드렸다. 가끔씩 찾아뵙는 엄마가 나를 잊었을까봐 엄마, 내가 누구야? 라고 물을 때면 대답은 한결같다. 현숙이지! 바쁜데 어떻게 왔냐? 바쁜 척 하며 자주 찾아뵙지 못한 죄송함으로 금새 내 눈에는 눈물이 잡힌다. 날 기억해준 엄마가 고마워 울먹이며 다시 묻는다. 그럼 엄마, 이 사람은 누구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서방이라며 남편을 알아보더니, 이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치 젊은 여자가 낯선 남자 대하듯 내외하신다. 돌아갈 때야 저 남자 누구냐?며 귓속말로 내 남편이라 말하면 그러냐? 자세히 볼 걸 그랬다 하신다. 요양원측에서는 엄마의 성품이 좋으셔서 다른 성가신 일은 없는데, 자꾸 당신 집에 가신다며 나가신단다. 20년 이상 사시던 아들집에서도 우리 집에 가야겠다며 가방을 챙겨 나가신다. 엄마의 기억은 아버지와의 신혼집으로 가 있다. 그녀도 한 때 남편사랑 받으며 다섯 애들 낳아 기른 예쁜 아낙네였으리라. 살아오는 동안 왜 난 한 번도 젊었을 적 엄마를 상상도 해 보지 않았을까? 늘 일만하고 앓으면서도 애들 학비, 먹을 것 걱정만 했다. 엄만 당신이 살아왔듯이 남에게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며 나의 배려없음과 용렬(庸劣)함을 나무라셨다. 이런 우리엄마 10년만 더 사셔서 100세 채우길 원한다면 욕심일까? 언제든 손잡고 엄마, 내가 누구야? 물으면 바쁜데 어떻게 왔냐?며, 저 남자 누구 냐?는 귓속말을 듣고 싶다. 그것이 효도인양 다음 주말에는 우리 젊은 엄마 만나러 간다. 이현숙 경기도교육연수원 원장

[천자춘추] 마우나오션 리조트 참사를 보며

지난 1994년 성수대교 교각 상판이 무너져 출근과 등교를 하던 직장인과 학생 30여 명이 귀중한 생명을 잃었다. 당연히 이 소식은 전 세계로 타전돼 해외토픽이 됐다. 정부는 즉각 시설물 안전관리에 관한 법을 제정하는 등 빨리빨리 문화가 만든 안전 불감증에 대한 경계심은 사회 안팎으로 거세게 일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20년이 지난 현재 변한 게 없다.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로 갓 대학에 입학한 20대 초반의 젊은이 10명이 목숨을 잃고 100여 명이 부상당하는 참사를 빚었다. 건축물의 붕괴사고는 인명피해가 크다는 점에서 심각한 재난이다. 왜 이러한 사고가 끊이질 않는 것일까. 이번에도 어김없이 언론 및 각계 전문가들은 알맹이 없는 단편적인 원인분석과 논평을 내는데 그친다. 설계 및 시공공법 문제, 건축자재의 문제, 관리의 문제 등 많은 문제점을 제기하고 동시에 지구 곳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이상기온 현상으로 인한 설(雪)하중 문제까지 반복해서 보도하는 게 전부다. 좀 더 건축적인 문제로 접근해보자. 이번 참사를 보면서 건축인으로서 느끼는 점은 우리나라의 건축문화가 정립된 사회였다면 이러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도입된 건축은 서양식 건축의 건설기술이란 성격이 강했으며 서양 건축의 구조와 재료, 시공법을 배우는 것이 건축의 주된 과제였다. 6.25 전쟁과 5.16 군사정변을 거치면서 경제개발의 추진으로 건설의 수요가 급증했다. 건축과 건설의 구분조차 명확치 않은 상태에서 건설의 비중이 커졌으며, 급속한 도시화 과정을 거치며 건축을 건설로 보는 사회적 인식이 뿌리내렸다. 건설이 건축을 실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건축설계가 건설의 수단이 되었다. 건설기술이 건축을 지배하고, 건설기술이 곧 건축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현실이 큰 과오이며 대형사고의 핵심이라 생각한다. 건축물의 용도 기능 규모에 부합하는 건설공법 및 부재 등을 채택하고 종합해서 쾌적한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이 건축설계의 기본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는 개인 자본으로 만든 개인 건축이라 할지라도 건축이 가지는 공공적 가치를 외면할 수 없기에 건축주들의 공공의식을 높이는 것은 시급한 과제다. 또한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건축물의 유지관리 제도를 통해 모든 건축물로 확대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계철 경기도건축사회 부회장

[천자춘추] 먼저 정신의 힘을 키워라

자연의 섭리는 한 치도 어김이 없어 어느덧 춥고 지리했던 겨울이 저만큼 물러가고 생명력이 약동하는 새봄이 성큼 다가왔다. 유치환 시인의 「생명의 서(書)」가 생각나는 계절이다. 그 열열한 고독(孤獨) 가운데/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하게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그렇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으며 생명만큼 더 지키고 싶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온갖 삶의 간난신고(艱難辛苦)를 이기고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떠한 어려운 환경과 불리한 조건을 만나더라도 이를 극복하고 새로이 도전할 수 있는 정신의 힘(精神力)을 지녀야 한다. 일찍이 헤밍웨이는 말하였다. 인간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패배시킬 수는 없다고. 얼마 전에 초임 시절 제자가 찾아와 환담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칠판 한 편에 써놓았던 검이 짧으면 일보 전진하고, 조건이 불리하면 노력을 배가하라!라는 글이라며 그간 불굴의 의지로 이를 실천해 여기까지 왔다고 대답하였다. 학생들에게 정신의 힘(精神力)을 강조한 것이었는데,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고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기 그지 없다. 사실상, 요즘 우리 주변에는 힐링이라는 말이 너무 흔하게 회자되고 있다. 힐링 멘토링이 그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는 사회가 과연 정상적인 사회인가? 차라리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어려운 환경과 불리한 조건을 뛰어넘어 불굴의 정신력으로 세계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일구었던 영웅 징기스칸의 말을 명심하고 용기를 내었으면 한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마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나를 극복하는 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것은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다. 김해겸 청덕고 교장ㆍ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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