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화성시의회 정부 지방재정제도 개편 강력 반발

수원시의회가 정부의 지방재정제도 개편에 대해 반대 결의문을 발표(본보 28일자 7면)한 데 이어 화성시와 화성시의회도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화성시는 28일 정부의 지방재정 개혁안은 겉으로 보기에는 지방 재정 형평성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것과 같은 임시방편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특히 시는 법인세로 걷은 수익을 타 지역과 나누게 되면 오히려 세금을 낸 기업과 주민들에게는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가는 역차별이 발생하게 된다고 주장했다.채인석 시장은 “정부가 당초 약속한대로 지방소비세를 16%까지 인상해야 하고 이와 별도로 국세의 19.24%를 지방교부세로 배분하고 있는 지방교부세율을 0.5%만 인상해도 지방자치단체의 재정건전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이와 함께 박종선 화성시의회 의장 등 시의원 18명 전원도 이날 오후 1시 의회 대회의실에서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이날 의원들은 성명을 통해 “(정부의 이번 방침은)공산주의적 평등에 기반을 둔 통제이며 헌법 제117조에서 규정한 지자체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결국 화성시는 재원부족으로 지역 현안 해결능력 상실과 계획사업 중단 등의 사태를 맞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따라서 이들은 “이번 개편 방안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기존에 약속한 지방소비세율 16%까지 인상해야 할 것”이라며 “경기도 역시 제도철회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한편, 시는 정부안대로 조정교부금과 법인지방소득세 배분 방식이 변경될 경우 연간 2천500억원 이상의 세입이 감소해 동탄 2신도시 등 6개 택지지구의 기반시설 건립에 차질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화성=박수철기자

화성시, 4·15 제암리 학살사건 희생자 추모제 열고 평화도시 공표

‘그날의 희생을 너머, 다시 평화를 말하다’ 화성시는 지난 15일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에서 ‘4.15 제암ㆍ고주리 학살사건 희생자 추모제’를 열었다. 또 화성시가 ‘평화의 도시’임을 만방에 공표했다. 이날 행사는 학살사건 피해 후손들과 지역 중학생, 국악인 등의 추모공연으로 시작됐다. 이어 제암ㆍ고주리 학살사건의 도화선이 됐던 횃불 시위를 재현하는 ‘평화의 봉화 봉수식’과 민중들의 독립운동 장면을 표현한 마당극 ‘해야해야’ 공연이 진행됐다. 채인석 화성시장은 “일제에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고자 그 어느 지역보다 격렬하고 역동적으로 항일운동을 펼친 화성시의 역사를 다시금 되돌아보는 시간”이라며 “화성시는 독립운동의 성지로, 역사교육의 장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채 시장은 평화 선언문을 통해 “제암리 학살과 같이 전쟁으로 인한 아픈 역사를 가진 세계 도시들과의 ‘세계 평화 연대’를 맺자”고 제안했다. 시는 그동안 3.1절 기념식과 함께 열었던 추모식을 사건당일 현장에서 열기로 하고 올해 처음으로 제암리에서 사건을 재조명하고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데 주안점을 둬 추모제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는 채 시장을 비롯해 이재명 성남시장, 박종선 화성시의회 의장, 정운찬 스코필드 기념사업회 명예회장, 안소헌 광복회 화성지회장, 남창수 경기남부보훈지청장,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 유가족, 시민 등 1천여명이 참석했다. 시 자매도시인 중국 형대시 및 캐나다 버나비시 관계자와 이기석 캐나다 토론토시 한인회장 등도 함께했다. 한편, 제암ㆍ고주리 학살사건은 지난 1919년 4월15일 일본 군경이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제암리에 찾아와 마을 주민 30여명을 교회당으로 몰아넣고 출입문을 잠근 뒤 집중사격하고 방화한 사건이다. 화성=박수철기자

영화 ‘국제시장’ 황정민 닮은 꼴, 김명씨 76세 나이로 당당히 대학입학 제2의 인생 시작

▲ 김명씨가 봄꽃이 활짝핀 교정에서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76세의 적잖은 나이로 대학공부에 뛰어든 이가 있어 화제다.지난달 한국폴리텍대학 화성캠퍼스 산업설비과에 입학한 김명씨. 그의 인생 스토리는 영화 국제시장 주인공의 삶과 흡사하다. 김씨는 일제강점기였던 1941년 일본에서 13남매 중 11번째로 태어났다. 그가 5살 되던 해 해방과 함께 귀국해 부모님과 서울, 전남 해남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교 졸업 후 먹고살일이 막막했던 그는 하사관으로 입대했다. 1960년 10월 그가 20세 되던 해다. 이때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됐다. 당시 현재의 아내와 교제를 시작했고 결혼도 약속했다. 하지만 집을 구할 형편이 못됐다. 결국 김씨는 1966년 10월 베트남 참전을 자원했다. 맹호부대 특전사 하사관으로 베트남 퀴논에 주둔했다. 당시 전우 4명과 수색을 벌이다 베트콩 200여명과 맞닥드려 교전하는 등 죽을고비를 수차례 넘기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1968년 베트남 현지에 파견된 한 국내 건설회사에서 군인을 모집한 것이다. 그는 자원했고 물류책임자로 1년여간 근무하다 1969년 귀국했다. 그러곤 베트남서 벌은 돈으로 서울 미아리에 단독주택을 구입하고 결혼도 했다. 그는 “‘반드시 살아오겠다’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 무엇보다 행복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삼남매를 낳아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10여년 후 가족 생계를 위해 다시 외국행에 나섰다. 1981년 5월 현대건설 리비아 항만공사 현장이었다. 특전사 근무 당시 배운 잠수기술을 활용해 해저케이블을 연결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1년6개월여를 죽을 힘을 다해 일했다. 그는 "리비아에서 외출 한번 안하고 한달에 100만원씩 송금했다. 콜라 하나 사먹는 것도 아까워 못했다"고 했다. 그 돈으로 서울에 한 의류대리점을 차렸다. 30여년간 대리점을 운영하며 삼남매를 공부시키고 결혼까지 시켰다. 지난 2009년 전원생활을 위해 화성시 봉담읍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는 은퇴후 직업이 없던 2년이 더 힘들었다. 화성시 직업소개소 추천으로 2011년부터 한 건물 관리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에는 5대 1 이상의 경쟁률을 뚫고 대학에 입학했다. 외국 근무시절 배운 수중용접의 이론과 실기를 마스터하기 위해서다.새벽 5시에 집에서 나와 밤 11시 넘어 들어가는 강행군이다. 체력보강을 위해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수업에 집중하기 위해 보청기도 구입했다. 자격증을 따는 것이 목표다. “지금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백팩에 모자를 눌러쓴 김씨의 당당한 대학생활을 응원한다. 화성=박수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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