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의 강물이 휘도는 아름다운 지형에 있는 바위로 강물과 자연 식생이 함께 어우러져 비경을 이루고 있다. 하천이 휘돌아 가며 생겨난 깊은 연못과 수면 위로 거대한 화강암 바위가 13m나 솟아올라 있으며 짙은 색의 현무암 절벽과 밝은 색의 기둥바위, 짙푸른 물빛이 어우러져 있다. 화적연은 지형적 가치도 높은데 대보화강암(중생대 백악기 화강암)을 뒤덮은 현무암층, 현무암 주상절리, 화강암 암반, 상류에서 공급된 풍부한 모래와 자갈 등 다양한 지형 요소를 관찰할 수 있다. 이들 지형 요소는 서로 어우러져 하천을 굽히고 있으며 여름철 많은 물이 흐르며 거대한 바위를 갈아 아름다운 화적연을 만들어 온 것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독산성(독성산성)’은 선조 25년(1592년)12월 임진왜란 중에 권율 장군이 전라도에서 병사 2만여명을 이끌고 와 주둔하며 왜병 수만명을 무찌르고 성을 지킴으로써 적의 진로를 차단했던 곳이다. 원래 백제가 쌓은 성일 것으로 추측되며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쓰였을 것으로 본다. 선조 27년(1594년) 백성들이 산성을 쌓았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5년(1602년) 당시 부사 변응성이 다시 보수하고 그후 정조 16년(1792년)과 20년(1796년)에도 다시 공사했다. 성 둘레는 1천100m이고 문도 4개이지만 성 안에 물이 부족한 것이 큰 결점이었다. 이런 결점으로 이곳에는 세마대(洗馬臺)의 전설이 전해진다. 권율 장군이 산 위로 흰 말을 끌어다가 흰 쌀로 말을 씻기는 시늉을 해 보이므로 왜군이 성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속아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물거미는 전 세계에 오직 1종만이 존재하며 한국, 일본, 중국, 유럽의 온대지방과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 등지에 분포한다. 몸의 크기는 일반적인 거미류가 암컷이 수컷에 비해 월등히 큰 데 반해 물거미는 수컷이 암컷보다 더 크다. 몸에 많은 털이 있는데 이 털은 은백색 공기방울을 만들어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게 하며 방수 역할도 한다. 물거미는 독특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어 학술적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며 연천 은대리의 물거미 서식지는 세계적 희귀종인 물거미의 국내 서식지로는 현재까지 유일한 곳이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한탄강 연안에는 현무암 평원이 발달해 있으며 현무암 평원을 관류하는 한탄강 유로에는 경관이 특이한 현무암 협곡이 형성돼 있다. 철원 대교천 현무암 협곡은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신생대 제4기의 지질과 지형 발달을 이해하는 데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협곡은 하천 바닥의 경사가 급해 직류 하천에 형성되고 좌우 방향의 침식보다는 아래쪽 방향의 침식이 더 활발하다. 협곡 곡벽 곳곳에 현무암의 주상절리가 아름답게 분포한다. 주상절리는 지표로 분출한 용암이 냉각 응고함에 따라 수축되면서 형성된 육각기둥이다. 이 현무암 협곡의 총 길이는 약 1.5㎞이고 깊이는 20∼30m로 경관이 빼어나며 주변에는 고석정, 순담계곡 등의 유명한 관광지가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느티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대만,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줄기가 굵고 수명이 길어 쉼터 역할을 하는 정자나무로 이용되거나 마을을 지켜 주는 당산나무로 보호받아 왔다. 마을 입구의 시냇가 공터에서 자라고 있는 양주 남면의 느티나무는 수령이 85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4.5m, 가슴높이 둘레 7.75m다. 태풍 피해로 한쪽 큰 가지가 쪼개져 잘라냈으며 나무의 밑부분 중심은 썩어 3m 정도까지 속이 텅 비어 있었는데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시멘트로 채웠다. 하지만 겉모습은 튼튼하고 온전해 보인다. 이 마을에서 살던 밀양 박씨의 조상이 심은 나무로 전해진다. 오랜 세월 조상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화성 고정리 공룡알 화석산지는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퇴적층(8천300만~8천500만년 전)으로 시화호 간석지가 조성되기 이전에는 섬이었던 6∼7개 지점에서 공룡알 화석 및 알 둥지가 발견됐다. 세계적으로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곳은 대부분 중국과 몽골 지역이었으나 시화호처럼 많은 공룡알 화석이 한꺼번에 발견된 것은 매우 드물다. 공룡의 서식 근거지라는 것뿐 아니라 환경 및 생태계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국가유산청 제공
백송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다. 이천 백송의 수령은 230년 정도이며 높이는 16.5m, 가슴높이의 둘레는 1.92m, 1.98m다. 마을에서 약 1㎞ 떨어진 야산에 위치해 있다. 줄기는 아래에서부터 두 개로 갈라져 고르게 발달했으며 나무의 모습이 좋은 편이다. 200여년 전인 조선시대에 전라감사를 지낸 민정식의 할아버지 민달용의 묘소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백송은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한 소나무로 중국과의 교류관계를 알려주는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크낙새는 딱따구릿과의 일종으로 지구상에서 한반도 중부지역에만 생존해 있으며 현재는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암수 구분 없이 몸 길이는 46㎝ 정도이며 수컷은 머리 꼭대기에 진홍색 깃털을 가지고 있다. 광릉의 크낙새 서식지는 포천시 소홀면·내촌면, 남양주시 진접읍·별내면·자둔면 등 5개 면에 걸쳐 있다. 광릉(光陵)은 세조와 왕비 윤씨가 묻힌 곳으로 능 주변의 숲은 조선시대 460여년간 엄격히 보호돼 크낙새가 둥지를 틀고 살 수 있는 울창한 숲을 유지할 수 있었다. 크낙새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만 사는 진귀한 새로 학술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이 대륙으로 연결됐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살아 있는 자료다. 그러므로 크낙새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한탄강변에 있는 구석기시대 유적이다. 1978년 처음 발견돼 1979년부터 현재까지 여러 차례 발굴조사를 했다. 그 결과 주먹도끼, 사냥돌, 주먹찌르개, 긁개, 홍날, 찌르개 등 다양한 종류의 석기를 발굴했다. 그중 유럽과 아프리카 지방의 아슐리안 석기 형태를 갖춘 주먹도끼와 박편도끼가 동북아시아에서 처음 발견됐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밝혀 줄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한국과 동북아시아 지역의 구석기 문화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흙을 이용해 쌓은 토축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험한 절벽을 이용하면서 펼쳐지는 넓은 평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전기의 산성 형식과 같다. 산꼭대기를 둘러싼 작은 규모의 내성과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에워싸고 돌아, 자연적으로 성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선조 26년(1593년) 왜병과의 전투에서 성안의 부녀자들이 치마로 돌을 날라 병사들에게 공급해 큰 승리를 거뒀다. 당시 부녀자들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행주라는 지명을 따 ‘행주치마’라고 했다고도 한다. 국가유산청 제공
조선시대 성천도호부 부사였던 김명리(1368~1438)의 묘지다. 종 모양의 묘지석은 제작 사례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희귀한 경우다. 전체 모양은 상부에서 저부로 내려오면서 직경이 약간 좁아지는 비대칭의 원통형이고 상면 중앙에 높이 4.0㎝의 연봉형 꼭지가 부착됐다. 지문(誌文)은 김명리의 가계, 부모, 이력 등을 적은 행장(行狀)으로 지은이는 유의손(1398~1450)이다. 이 묘지는 비록 개인사를 적고 있으나 조선 초기의 사료를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으로 자료적 가치가 높고 깔끔한 해서체 각서는 조선 초기 서예사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출토지가 분명하고 1439년이라는 명확한 제작 시기, 희소한 종 모양을 취하고 있는 점 등 도자사적, 서예사적 측면에서 가치가 높다. 국가유산청 제공
김포 문수산성(金浦 文殊山城)은 갑곶진과 함께 강화의 입구를 지키던 조선시대 성이다. 조선 숙종 20년(1694년) 돌을 이용해 쌓은 석축산성으로 순조 12년(1812년) 고쳐 쌓았다. 잘 다듬어진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그 위에 몸을 숨기기 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둘렀다. 당시의 성문은 취예류, 공해루 등 3개의 문루와 비밀 통로인 암문 3개가 있었다. 이 중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 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육지로 나오는 관문 역할을 했다. 현재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는 없어지고 마을이 됐으며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벽만 남아 있다.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곳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비롯해 울릉도와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상나무, 노송나무로도 불린다. 이 나무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도 쓰이며 정원수·공원수로 많이 심는다. 남양주 양지리의 향나무는 나이가 5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2.2m, 가슴높이 둘레 3.65m다. 나무의 모습은 원줄기가 2m 정도 올라가 7개로 갈라져 사방으로 퍼졌다. 이 향나무는 거창 신씨의 선조를 모신 묘소 옆에 심은 나무가 자란 것이라 하며 신씨의 내력에 관한 비석이 있다. 남양주 양지리의 향나무는 우리 민족이 조상을 섬기는 민속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향나무로서는 오래되고 큰 나무로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대통력은 명나라의 역법(曆法)으로 고려 말인 공민왕 19년(1370년) 수입돼 조선 효종 4년(1653년) 시헌력을 채용할 때까지 근 300년간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역법이다. 이 경진년 대통력은 모두 15장으로 구성돼 있다. 그중 첫 장은 정월에서 12월까지 윤4월을 포함한 13개월의 24절기에 관한 내용과 연신방위지도이고 제2∼14장은 책력의 본체인 1월에서 12월까지의 월력이다. 달력에는 날짜별로 일상생활에서 그날그날 하기에 좋은 일과 하면 좋지 않은 일을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 제15장은 부록격으로 간지별로 피해야 할 일들을 열거한 부분과 이 책력의 편찬, 인쇄에 관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목록이다. 경진년 대통력은 관상감에서 활자로 찍은 임진왜란 이전의 역서로는 유일한 것이다. 또 관상감 인력자(印曆字)로 찍어낸 책 중 가장 앞선 것으로 조선시대 활자 및 서지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국가유산청 제공
조선 후기 함경도와 경기도, 강원도를 그린 지도다. 원래 팔도도별도가 함께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이들 지도와 경상도 지도만 전해온다. 영조의 명을 받은 신경준은 1770년 군현도, 도별도, 전도를 모두 만들었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열읍도 계통은 많이 발견됐지만 팔도도와 전도는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1770년 신경준의 주도로 만든 팔도도 계통의 원본이거나 최소한 원본에 아주 가깝게 필사한 지도라고 판단된다. 신경준의 지도는 정확성 위주의 조선 지도 변천사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정상기로부터 촉발된 정확한 지도 제작의 흐름이 정철조로 이어지고, 이들 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 신경준의 지도다. 하지만 신경준의 지도는 앞의 2개 지도 계통보다 훨씬 큰 초대형 지도이며 김정호의 청구도가 나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러한 지도학적 의의와 화려하고 선명한 색상, 양호한 보관 상태, 현재까지 동일 계통의 지도가 발견되지 않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매우 가치가 높다. 국가유산청 제공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이하 사리탑)은 조선 전기 왕실에서 발원해 건립한 진신사리탑으로 규모가 장대할 뿐만 아니라 보존 상태도 양호하며 사리탑의 형식과 불교미술의 도상 및 장식문양 등 왕실 불교미술의 여러 요소를 알 수 있는 귀중한 탑이다. 사적 ‘양주 회암사지’ 내에 위치한 사리탑은 발굴조사와 탑의 입지, 기록 등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됐던 불탑(佛塔)임을 알 수 있다. 또 탑에 새겨진 다양한 조각은 조선시대 왕실 발원 석조물과 양식적인 부분이 비슷하며 회암사 구역에 위치한 삼화상탑과의 영향 관계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전체적인 양식과 조영기법, 세부 문양들이 조선 전기의 왕릉을 비롯한 왕실 관련 석조물과 비슷하며 사리탑의 규모, 치석 상태, 결구 수법 등을 고려할 때 당대 최고의 석공이 설계, 시공했을 것으로 보인다. 해당 문화유산은 조선 전기 석조미술의 정수이자 대표작으로 역사·학술·조형적 가치가 크다고 판단된다. 국가유산청 제공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천100살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 부분 둘레 15.2m다. 우리나라 은행나무 가운데 나이와 높이에 있어 최고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줄기 아래에 혹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나무는 통일신라 경순왕(재위 927∼935년)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됐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년) 때 당상관(정3품)이란 품계를 받을 만큼 중히 여겨져 오랜 세월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무예제보(武藝諸譜)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무예서 중 가장 먼저 편찬돼 후대의 무예서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한교(1556∼1627)가 왕명을 받고 중국 명나라 장군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참고해 조선의 무인이나 대중들의 이해를 돕고자 ‘대봉(大棒·곤봉)’, ‘등패(藤牌·방패)’ 등 무기 6종의 제작법과 도해(圖解)를 수록해 편찬하고 그 내용을 한글로 언해(諺解)해 1598년(선조 31년) 10월 목판으로 간행한 무예서다. 지금까지 국내에 알려진 유일본이라는 점에서 학술·문화유산적 가치가 높다. 이와 관련해 1610년(광해군 2년) 간행된 무예제보번역속집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무예제보는 기 지정본보다 앞서 간행된 책으로 조선의 국가 방위를 위한 노력의 과정 속에서 증보 간행된 역사적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화사적 가치가 높다. 이러한 사유로 무예제보는 우리나라 무예사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다. 국가유산청 제공
병자호란을 당해 임금이 남한산성에 머물면서 백제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에게 제사를 지낸 일을 계기로 1638년 사묘가 세워졌다. 1661년 현 위치로 옮겨진 이후 정조 때 ‘숭렬전’이란 전호(殿號)가 내려졌으며 다른 역대 시조묘에 올리는 격식을 따라 제사를 거행하며 현재까지 그 위치를 지키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역대 시조묘 가운데 숭의전(崇義殿·고려 태조)은 6·25 전쟁 후 1970년대에 복구됐고 숭덕전(崇德殿·신라 박혁거세)과 숭선전(崇善殿·가락국 수로왕)은 19세기 고종 연간에 고쳐졌거나 신축됐다. 반면 남한산성 숭렬전은 17세기 이건한 뒤 지은 건물이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창건 사실이 역사 문헌을 통해 증빙되며 현재까지 원위치를 지키고 제향이 계승되고 있어 역사적·문화사적 가치가 높다. 간결하고 절제된 건축 형식과 구조는 17세기에 건립된 조선시대 사묘의 전형을 따르고 있어 국가지정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국가유산청 제공
헌종이 1827년 태어난 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에 태실을 만들어 태를 안치한 태실과 주변 경관을 그린 작품이다. 헌종이 1834년 즉위한 후 13년이 지난 1847년에야 태실가봉(胎室加封)이 이뤄졌으며 이 그림은 당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태봉도와 달리 지도식 표현이 거의 없고 산수화풍이 많이 가미된 것이 특징이다. 능숙한 필치로 괴량감 넘치는 산봉우리를 표현했고 부드러운 색채로 입체감을 나타냈다. 옅은 청색과 연두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잘 표현했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지던 장태(藏胎) 문화를 의례화해 새로 태어나는 왕자녀의 태를 길지(吉地)에 묻는 독특한 안태의례(安胎儀禮)를 정착시킨 조선 왕실의 전통을 보여주는 작품이자 장조의 태실을 그린 유일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역사성·희소성이 돋보인다. 국가유산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