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 청화 인천부사 이성곤 묘지(白磁 靑畵 仁川府使 李成坤 墓誌)는 조선시대 유물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78호이다. 조선시대 묘지석은 주자가례 장례문화 중 마지막 과정의 장례도구로 지상에 세우는 묘지, 묘표와 함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본 묘지석은 인천부사를 지낸 인물의 유물로 인천 지역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이성곤 묘지석은 조선시대 주자가례 문화가 토착화된 18세기(1761, 영조37) 중엽의 절대 연도를 기록한 작품으로 당시 사대부들의 삶과 직업관, 세계관 등 생활상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국가나 시도 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청화백자 묘지는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이성곤의 청화백자 묘지는 인천지역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예이며, 인천부사의 묘지로서 역사적, 미술사적으로 가치가 높다는 점에서 인천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크낙새는 딱다구리과의 일종으로 지구상에서 한반도 중부지역에만 생존하고 있다. 현재는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암수 구분 없이 몸길이는 46㎝ 정도이며, 수컷은 머리 꼭대기에 진홍색 깃털을 가지고 있다. 광릉(光陵)은 조선 제7대 왕인 세조(14551468)와 왕비 윤씨가 묻힌 곳으로 능 주변의 숲은 조선시대 460여년간 엄격히 보호돼 크낙새가 둥지를 틀고 살 수 있는 울창한 숲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지역의 자생식물은 790종 이상이 알려져 있고 나이 200년 이상의 크고 오래된 나무숲이 있어 크낙새가 이곳을 생활의 거점으로 서식한다. 크낙새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만 사는 진귀한 새로서 학술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이 대륙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살아있는 자료로서도 의의가 매우 크다. 그러므로 크낙새가 살고있는 이 지역(남양주 진접읍 부평리 산99-1번지)을 천연기념물 제11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범패와 작법무(梵唄와 作法舞(바라춤))는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1호이다. 불교의식에 사용하는 노래를 범패라 하고, 춤을 작법, 또는 작법무라 한다. 인천에서의 범패와 작법무는 조선 태조 대왕(1398)이 팔만대장경을 강화 선원사에서 지천사로 옮길 때 이운의식으로 행하면서 처음 행해졌다. 그 후 면면히 이어오다가 1928년부터 약사사, 묘향사, 해광사 등지에서 법회에 범패와 작법무인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 등이 추어지게 된다. 바라춤은 일체의 모든 마장을 끊고 부처님의 정법을 찬탄하는 무용으로 작법무라 한다. 인천 바다의 기상을 담아 힘차고 우렁차며 선이 굵은 것이 특징이며, 호국영령을 위해서도 봉행한 점이 타 지역과 다르다. 문화재청 제공
요지는 그릇이나 자기를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남종면중부면퇴촌면 등 광주시 일대에는 도자기를 굽는데 필요한 흙이 나오며, 나무와 물이 풍부하다. 제품의 공급지인 서울과 가깝고 한강을 이용한 운반의 편리성으로 인해, 조선 영조 28년(1752) 궁중음식을 담당하던 사옹원의 분원으로 지정됐다. 그 후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130여 년 동안 285개소의 가마터가 이 일대에서 번창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국가 사정이 어려워지자, 분원리 가마터는 개인에게 경영권을 주게 되었다. 이 일대는 조선 전기에서 후기까지 질 좋은 도자기를 만들어내던 중심지였기에 조선 도자사 연구에 기반이 되는 곳으로 매우 가치있는 곳이다. 현재 소재지는 광주 중부면, 광주읍, 초월면, 도척면, 실촌면, 남종면 일원에 40여만㎡ 규모로 조성돼 있다. 지난 1985년 11월7일 사적 제314호로 지정된 바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근해 도서지방 상여소리(仁川近海 島嶼地方 喪輿소리)는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6호이다.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관혼상제의 4대 의례를 가장 귀한 것으로 생각하고 실행해 왔다. 그 중 상례의 절차는 전국적으로 비슷하나 지방에 따라 변형되어 다소 다른 모양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인천근해 도서지방은 지세가 고르지 못할 뿐 아니라 경기도, 황해도와 인접해 있으며 생활수단도 어업으로 이어가고 있어 상여소리도 경기도, 황해도의 민요와 뱃노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상여소리는 초혼 및 운구, 행상, 산오름과 외나무다리 넘어가기, 가래소리와 회다지소리, 고별소리로 구성된다. 문화재청 제공
외삼미동 고인돌은 모두 2기이다. 북쪽의 것이 1호, 남쪽의 것이 2호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의 고인돌을 거북바위 또는 장수 바위라고 부른다. 덮개돌의 가운데를 거북등모양으로 손질하여 멀리서 보면 거북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고인돌은 화강암 계통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1호가 길이 260㎝, 폭 230㎝, 두께 70~90㎝고, 2호가 길이 174㎝, 폭 140㎝, 두께 30㎝다. 1호 고인돌은 탁자식, 2호 고인돌은 뚜껑돌식(개석식)이다. 특히 1호 고인돌은 변형된 탁자식 고인돌로 전형적인 탁자식 고인돌과 달리 굄돌을 세우지 않고 옆으로 눕힌 형태로 되어 있다. 외삼미동 고인돌은 탁자식과 개석식이 섞여 있어 청동기 시대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고인돌에서 남쪽으로 3.5m 떨어진 곳에 개석식 고인돌로 보이는 넓적한 돌이 놓여 있다. 고인돌은 지난 2005년 11월23일 경기도 기념물 제211호로 지정된 바 있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갑비고차농악(甲比古次農樂)은 인천 강화군에서 전래되고 있는 농악으로,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9호이다. 전통사회에서 농악은 크게 세 가지 존재방식을 갖는다. 첫째, 대보름 무렵에 하는 당산굿이나 마당 밟기와 같은 의식과 관련된 농악, 둘째, 두레꾼과 함께 김매기 등에서 치던 두레굿과 같이 노동과 관련된 농악, 셋째 판굿과 같이 놀이와 관련된 농악이 그것이다. 이런 농사굿은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 보이는데 지역적으로 먼 강화에서 비슷한 내용의 농악이 보존되고 있다는 점이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윤계선생순절비는 병자호란때 순절한 남양부사 윤계(1585~1636)의 추모비로 현재 화성 남양동 1392-1번지에 위치해 있다. 윤계는 조선 인조 5년(1627)에 문과에 급제한 후 전적, 교리의 벼슬을 거쳐 남양부사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 군비를 갖추기도 전에 청나라 군대가 기습하여 패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장렬히 싸우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항상 오랑캐와 화의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친동생 윤집은 청과의 화의를 강경하게 반대한 3학사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비는 연꽃무늬를 새긴 받침돌 위에 비문을 세운 간결한 모습이다. 현종 9년(1668)에 세운 비로, 당시 우의정이었던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민유중이 썼다. 지난 1979년 9월3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부평두레놀이(富平두레놀이)는 2015년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이다. 부평두레놀이는 인천광역시 부평구 삼산동에 전승되는 두레농악이다. 과거에 농사일을 할 때 두레를 짜서 농사일의 신명을 돋우던 두레패 농악을 계승한 것이다. 농사일 시작 전 의식 및 두레기 받기를 기원하는 당산제, 모찌기, 모심기, 김매기 등이 농사 재현, 농사일이 끝나고 호미를 씻어 걸어두는 호미걸이, 일년 농사를 모두 끝내고 당산에 가서 제사하는 당산제의 네 마당으로 구성된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며 학자인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ㆍ1342~1398)이 조선건국 초기에 국가 경영을 위한 기본적인 통치전범을 마련하기 위하고자 주례(周禮)의 육전체제(六典體制)를 바탕으로 조선의 실정에 적합하게 편찬한 법전서다. 정도전의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은 비록 개인의 사찬(私撰)이기는 하지만 그가 조선건국의 중심에 있었고 실제적으로 조선건국의 이념을 창안한 실질적 책임자였다는 점에서 그의 이 저작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이 책이 토대가 되어 이후경제육전(經濟六典), 육전등록(六典謄錄) 등 법전의 편찬단계를 거쳐서 조선의 기본법전인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모체가 되었다는 점과 조선전기의 간본으로는 이 책이 유일한 책이라는 점에서 도서출판과 법전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따라서 국가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 현재는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4호인 꽃맞이굿은 꽃피는 봄철을 맞이하여 신(神)의 음덕에 감사 하기 위해 행하는 무속 의례이다. 이 굿에는 무당이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것과 재가집(단골집)의 요청으로 하는 것이 있다. 무당이 자신이 모신 신령님과 자신을 위해 하는 신굿은 자신의 건강과 무업(巫業) 번창을 재가집을 위한 굿은 집안의 평안을 감사하는 것이 목적이다. 즉 꽃맞이굿은 신에게 감사하는 것이 목적이며, 무사태평, 무병장수, 부귀공명을 비는 기복적 내용이 담겨 있다. 문화재청 제공
시흥 거모동 산62번지에 위치한 청주한씨문익공파묘역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인조의 장인인 한준겸(15571627) 선생의 묘역을 중심으로 자손들의 묘가 함께 있다. 묘 앞에는 제물을 놓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있는 돌로 만든 등)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望柱石: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돌기둥) 등이 갖추어져 있다. 묘역 아래에는 효종 3년(1652)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가에 세우던 비)가 있는데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오준이 글씨를 쓴 것이다. 청주한씨문익공파묘역은 지난 1997년 5월16일에 도 기념물 제163호로 지정됐으며 현재는 청주한씨문익공파종중에서 관리 중이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호인 김재로 묘(金在魯 墓)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청사(淸沙) 김재로(16821759)의 묘소이다. 숙종 28년(170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숙종 36년(1710)에는 춘당대 문과에 급제해 겸설서(兼說書)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간 후 부재학, 대사간, 우의정, 좌의정 등 주요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특히 지춘추관사로 있을 때 실록도청 당상을 견직해 경종수정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판중추부사 때에는 청나라에 가서 명사(明史)를 가져오기도 했다. 현재 운연동 만의골 입구 동산 정상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묘역에는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돌을 두른 묘와 묘비ㆍ망주석ㆍ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ㆍ돌짐승 한 쌍이 있으며 주위에는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시립박물관에는 그의 51세 때의 모습과 36세 때의 모습을 그린 영정 2폭이 보관되어 있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백자 달항아리는 용인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커다란 백자 항아리다. 크기는 높이 49.0㎝, 아가리 지름 20.1㎝, 밑 지름 15.7㎝이다. 큰 항아리는 형태를 만들거나 구워내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한번에 물레로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고,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든 후, 두 부분을 접합시켜 완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짧은 아가리가 사선으로 작은 각을 이루며 맵시있게 꺾인 이 항아리는 아가리 주변 아래에서부터 목이 따로 없이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벌어지다가, 몸체 중앙의 접합부를 지나면서 다시 좁아져, 아가리 지름과 비슷한 크기의 굽에 이른다. 조선시대 백자의 특징인 온화한 백색과 유려한 곡선, 넉넉하고 꾸밈없는 형태를 고루 갖추어진 항아리로 백자호(국보 제261호)와 비교되는 대표적인 백자 항아리이다. 엷은 청색의 유약이 내외면에 고르게 씌워졌으며, 표면의 색조는 유백색이다. 지난 1991년 1월25일 국보 제262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계산동 은행나무(桂山洞 은행나무)는 인천 계양구 계산동에 있는 자연유산으로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1호이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부평초등학교 안에서 자라고 있는 계산동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5m, 둘레 10m이다. 이 나무는 본래 부평도호부 관아 건물의 주변 환경을 아름답게 하기 위한 풍치목으로 심었다고 한다. 계산동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보살핌 속에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인정되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벼루장은 문방사우 중 하나인 벼루를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문방사우인 붓과 먹, 종이, 벼루는 가장 오래된 필기도구다. 일반적으로 벼루의 원석은 경도가 낮아서 생동감 있는 조각이 불가능하다. 이 한계를 극복하게 해 준 것이 벼루장 보유자 신근식이 소유하고 있는 단양의 자석(紫石)이다. 신근식 벼루장 보유자는 지난 1998년 9월21일 3대째 벼루장으로 활동해 온 이력을 인정받아 도 무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된 바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이규보 묘(李奎報 墓)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고려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 선생의 묘소로,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5호이다. 이규보 선생은 고려의 무신정권 하에서 태어나 무신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문인의 한 사람으로 명종 19년(1191)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시문에 능하였던 선생은 중국의 모방이 많았던 당시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이야기를 서사시로 엮는 등 민족정신에 바탕을 두고 글을 썼다. 현재 묘역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무덤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망주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기조 선생 묘는 조선 중기의 문신 호암 이기조(15951653) 선생의 묘소로 군포 산본동 산 1152-11번지에 있다. 그는 광해군 7년(1615)에 병과로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고, 인조 13년(1635)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낼 때는 많은 덕을 쌓아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묘지는 부인 고령 신씨와의 합장묘이며 봉분 앞에는 향로석과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한 상석이 있다. 1990년 4월30일에 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영신군 이이묘(永新君 李怡墓)는 인천 계양구에 있는 인천시 기념물 제43호이다. 영신군 이이는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손자이자 의성군 채(采)의 여섯째 아들이다. 자는 화보(和甫)로 단종2년(1454)에 출생하여 왕족으로서 종실과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워 정의대부(正義大夫) 영신군(永新君)에 봉해졌으며 부평에 낙향하여 기거하다가 중종21년(1526) 73세로 사망했다. 영신공원(永新公園)으로 조성된 묘역은 그의 묘를 비롯한 가족묘 10여 기가 위치하고 있으며 첫째 아들인 명원군(明原君)의 묘는 양주 장흥면에 따로 있고 둘째 아들인 함원군(咸原君)의 묘가 이곳에 있다. 함원군(咸原君)은 경학에 밝고 정직 청백하고 어전에서 치평지도(治平之道)를 건의하기도 했다. 각묘의 묘갈과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왕실 묘제와 시제 그리고 미술 공예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