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계신리마애여래입상 홍천면 계신리 부처울 마을의 남한강변의 암벽에 새겨진 고려 전기의 마애불이다. 불상은 두광을 갖췄는데 3겹의 동심원이 계단식으로 중첩되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섬세하게 새겨놓았다. 신체 표현과 자세, 얼굴의 온화한 인상 등에서 이 지역에서 지방화된 고려 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먼머리 정상에는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으며, 방형의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세밀하게 조각되었다. 미소띤 얼굴에 양 볼의 볼륨감으로 인해 귀엽고 후덕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귀는 길어 어깨까지 내려오며, 짧고 굵은 목에는 삼도가 표현됐다. 당당한 자세에 유려한 윤곽선, 양감 있는 얼굴에 부드럽고 귀여운 표정에 옷주름에서 부분적으로 보이는 형식적인 표현 등 통일 신라 시대 불상 양식을 계승한 고려 시대 전기 여주의 대표적인 불상이다. 문화재청 제공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61(大方廣佛華嚴經 周本 卷六十一)은 인천 연수구 동춘동 흥륜사에 있는 불경으로, 2015년 12월2일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됐다. 대방광불화엄경은 화엄종의 소의경전으로서 대승불교의 역사 속에서 널리 읽는 경전이다. 이 경은 실차난다(實叉難陀)가 번역한 것으로 당경화엄경, 당본화엄경, 신역화엄경, 팔십화엄이라고도 한다. 1244년에 대장도감에서 간행한 재조 본 고려대장경 판본의 전 80권 가운데 권61의 한 축인 두루마리 형태의 닥종이에 인쇄된 것이다. 문화재청 제공
인평대군 치제문비는 인평대군(16221658) 제사 때 쓰인 치제문을 새긴 비다. 치제문이란 공적이 뚜렷한 인물의 제사때 왕이 신하를 보내 제사를 지내주면서 내려준 제문이다. 묘역에는 효종ㆍ숙종과 영조ㆍ정조순조의 어제어필 치제문을 각각 새긴 2기의 치제문비가 있다. 건립의 전후 과정을 인평대군 손자인 양원군 이환이 별도의 글을 지어 밝혔으며 전액 영조와 정조의 치제문은 치제문비 건립 당시에 새겼고 순조 치제문은 나중에 새긴 것이다. 인평대군 치제문비는 조선시대 다섯 임금의 글과 글씨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비이다. 문화재청 제공
증주당현절구삼체시법 권1은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 가천박물관에 있는 인천시 유형문화재다. 증주당현절구삼체시법은 송(宋)나라 주필(周弼)이 칠언절구, 칠언율시 그리고 오언율시 등 삼체시(三體詩)만을 모아 편찬한 시선집(詩選集)이다. 주필은 작시(作詩)의 모범으로 여겨졌던 당시(唐詩)를 편리하게 감상하고 한시의 표현기법과 구성형식을 체계적으로 습득하고자 이 책을 편찬했다. 거기에 석원지(釋圓至)가 주를 달고 배유(裵庾)가 증주(增註)했으며, 조선 초기에 원나라에서 유입된 판본을 저본으로 삼아 번각(飜刻)한 것이다. 이후 조선시대 중기 무렵까지 간행이 이뤄졌는데 경상도를 비롯해 전라도, 충청도 등을 중심으로 널리 유통됐으며 당시를 학습할 때 사용했다. 이 책은 한시를 학습하려는 사람들이 참고한 일종의 시학 교제로서 한문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서지학 연구에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문화재청 제공
북한산성 금위영 이건기비는 1715년(숙종 41) 북한산성 동소문 안에 있던 금위영 유영(留營)을 보국사(輔國寺) 아래로 옮긴 후 그 전말을 기록한 비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중앙 군영(軍營)인 삼군문(三軍門) 즉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을 설치해 한양 도성을 직접 방어하게 했다. 그래서 1711년(숙종 37)에 이들 군영을 동원해 북한산성을 개축하고 현지 주둔 부대인 유영(留營)을 두어 산성의 수비를 구간별로 나누어 분담하게 했다. 이중 금위영 유영의 지대가 높고 무너질 위험이 있어 1715년 이건한 것이다. 북한산성 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반의 한쪽 면을 잘 다듬어 비문을 새겼다. 비문의 보호를 위해 얹은 지붕돌은 용마루, 내림마루, 처마만 간략히 표현하였다. 비문은 이이명(李9824命)이 지었으며 1715년(숙종 41)에 건립했다. 문화재청 제공
옹진 백령도 진촌리 맨틀포획암 분포지는 인천 옹진군 백령면 진촌리 154의2 일대 6천307㎡ 부지에 펼쳐진 자연유산으로, 천연기념물이다. 우리나라에서 감람암 포획현무암이 분포하는 곳은 경기도 연천 전곡, 평택 강원도 철원 일대, 울릉도 및 제주도에 국한돼 있다. 백령도 진촌리의 감람암 포획현무암 분포지는 백령면 진촌리에서 동쪽으로 1.3㎞ 정도 떨어진 해안에 있으며 해안선을 따라 지름 510㎝ 크기의 노란 감람암 덩어리가 들어 있는 용암층이 만들어져 있다. 용암층은 두께가 10m 이상이며, 검은 현무암으로 이뤄져 있다. 백령도 진촌리의 감람암 포획현무암 분포지는 지구 속 수십㎞ 아래에서 만들어진 감람암이 용암이 분출할 때 함께 올라와 만들어진 것으로 지하 깊은 곳의 상태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문화재청 제공
사나사 원증국사탑은 태고화상 보우(太古和尙普愚, 1330~1382)의 사리탑이다. 보우의 본관은 홍주(洪州), 속성은 홍씨(洪氏), 첫 법명은 보허(普虛), 호는 태고(太古)로 홍주(현재 홍성) 출신이다. 이 탑은 보우 스님의 입적 다음 해인 우왕 9년(1383) 건립됐다. 방형 기단과 종형 탑신으로 구성된 부도로, 기단 상면에는 복련(覆蓮) 연판문양을 표현해 탑신 받침 역할을 하고 있다. 석종형 탑신 표면은 문양 없이 간결하게 치석했고, 정상부에는 주변을 평평하게 한 후 중앙에 높은 연봉형 보주를 갖췄다. 주변에 세워진 탑비에는 스님 입적 이듬해 문인 달심(門人達心)이 주도한 부도와 탑비 건립내용이 있다. 문화재청 제공
경은(耕隱) 조서강은 조선개국 공신 조반의 아들로 태종14년(1415)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을 지내고 세종13년(1431)에 춘추관 기주관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 뒤 우관원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 형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441년에 도승지를 지냈으며, 1443년 이조참판이 됐다. 세종 26년 3월 10일에 그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쌀과 콩 각 30석, 종이 10련, 그리고 관곽을 부의로 내려 후하게 장사지내게 했다. 그의 묘는 직사각형 기대석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둘레돌을 두른 봉분이 있는데 봉분은 전방후원묘로 돼 있고 앞에는 묘비와 상석, 한 쌍의 문인석이 배치돼 있다. 묘비에는 가선대부 이조참판조공지묘라고 새겨져 있으며 한 송이의 연꽃을 엎어 놓은 것 같이 조각한 옥개석이 있다. 조서강 묘와 묘역에 설치된 석물들은 조선 초기의 것으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청성사는 통일 신라 말기의 학자인 최치원(崔致遠, 857년-?)을 모신 사당이다. 최치원은 869년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과거 시험에 합격했다. 879년 중국 당나라 말기의 농민반란 주모자인 황소에 의해 황소의 난(黃巢-亂)이 일어나자, 이를 정벌하기 위한 토황소격문을 지어 적을 물리쳤던 명문장가였다. 청성사는 크게 사당과 삼문으로 구성돼 있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를 가진 초익공(初翼工;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 짜 맞춰 댄 새 날개 모양의 목재) 형식의 건물로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사당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우물 정(井)자 형태로 만들어진 마루 형태)로 그 중앙에 최치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당 입구에는 솟을삼문(솟을三門; 문이 세 칸인 대문에서, 가운데 문의 지붕을 한 단 높게 세운 대문)이 있다. 문화재청 제공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인 문숙공 류사눌(13751440)의 묘소다. 류사눌(1375~1440)의 자는 이행(而行), 본관은 문화(文化),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류사눌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숙부 밑에서 학문에 힘써 경전에 밝고 문장에도 능했다. 특히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예문관 대제학 재직시에는 악학제조를 겸하여 아악보 서문을 찬하기도 했으며, 세종 16년(1434)에는 진작가사를 찬하여 제악부에 싣는 등 박연과 더불어 아악을 정리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조선조 초기 16세 때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18세 때인 태조 2년(1393년)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합격해 좌정언, 이조병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태종 7년(1407)에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해 사헌부 장령이 됐다.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경상도 도관찰사가 된 후 함경도 도순문사, 강원도 도관찰사 등을 거쳐 세종 5년(1423)에는 한성부윤이 됐다. 그 후 세종 10년(1428)에는 예문관대제학으로서 진하사가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세종 14년(1432)에 동지중추원사가 됐다. 문화재청 제공
김중만장군사패교지는 조선 영조 4년(1728)에 무신 김중만에게 이인좌와 정인량의 반란을 평정한 공로로 분무공신 2등에 봉한다는 공신록 1점과 교지 2점으로 구성됐다.1728년 7월에 작성됐고 1등 공신 1인, 2등 공신 7인, 3등 공신 7 인 등 총 15인의 공신명단과 포상 내용이 기록돼 있다.각 공신의 명단 위에는 흰색 부전지를 붙여서 이름을 가렸다. 뒷 면 마지막 부분에는 황색 부전지에 李善行製 崔重大書라고 기록해 글을 짓고 쓴 사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로 1907년에 세워졌으며, 당시 이름은 인천공립보통학교였다. 1933년 인천제일공립보통학교, 1938년 인천창영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창영공립국민학교, 광복 후 창영국민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31운동 당시 인천지역 만세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한 전통 깊은 곳이기도 하다. 옛 학교 건물은 1924년에 세운 것으로, 一자형의 구성이다. 벽체 윗부분은 화강석으로 아치형을 이루고 있고, 현관은 근세풍 양식을 띤 무지개 모양으로 꾸몄다. 좌우 대칭면에 넓은 창을 규칙적으로 배열해 직선을 강조했으며, 지붕에는 그 아래쪽 방을 밝게 하기 위한 지붕창을 만들어 놓았다. 문화재청 제공
청련사 큰 법당에 봉안된 삼장탱(三臧幀)이다. 제작연대는 고종 18년(1881)이다. 상하 2단으로 크게 구분하고 상단에는 천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을 배치하고 그 사이에 권속들로 가득 메우고 있다. 하단에는 이들 보살의 협시와 권속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 삼장보살은 하나의 방형 수미단 위에 중앙 천장보살의 신광만 바탕을 금니로 처리하였을 뿐 나머지는 모두 이중륜광의 두 신광을 갖추고 결가부좌했다. 채색은 주로 적색과 청색, 백색, 황색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부분적으로 금니를 사용했는데, 천장 지지지장보살상의 몸색은 황색을 사용했고 나머지 인물들은 백색으로 처리했다. 문화재청 제공
신창리삼층석탑은 봉국사(奉國寺)로 추정되는 절터에 흩어져있던 석탑 부재를 모아 1991년에 복원한 고려 후기의 석탑이다. 약 2.18m 높이의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올린 형식으로, 면석 모서리와 중앙부에 측면 기둥인 우주와 가운데 기둥인 탱주를 모각했다. 상층기단은 넓은 판석으로 면석을 구성하고 탱주 없이 모서리에 우주를 조각했다. 갑석은 네 모서리에 합각선을 표현했고, 완만하게 낙수면을 형성했다. 처마선을 따라 전각(轉角) 부에는 매우 낮게 반전(反轉)을 표현했다.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다. 문화재청 제공
평산 신씨 묘역은 대곡동 황곡에서 두밀로 향하는 소로의 좌측 야산에 있다. 묘역 맨 위에는 빙부, 빙모의 묘가 설치돼 있으며, 아래로는 이간공의 둘째 승서, 넷째 광서의 묘가 있으며, 그 아래로는 모두 이간공의 자손묘가 있다. 신영(申瑛)은 연산군 5년(1499년)~명종 14년(1559년) 조선문신이며, 자는 윤보(潤甫), 본관은 평산(平山) 사직서령 세경(世卿)의 아들로 김식(金湜)의 문인이다. 중종 11년(1516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중종 18년(1523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해 홍문관(弘文館)에 발탁됐으며, 수찬(修撰)으로 있을때 화를 입은 스승(김식, 조광조)을 변호하다가 탄핵을 받았다. 뒤에 형조좌랑 함경도 도사를 거쳐 공조, 형조, 병조정랑 지평(地平)을 역임했다. 권신에 아부하지 않아 한때 수원부사로 좌천돼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문화재청 제공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는 1728년에 이인좌가 일으킨 반란을 토벌한 오명항의 공적을 칭송한 비다. 오명항은 안성과 죽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인좌의 난을 진압해 분무공신 1등에 봉해졌으며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됐다. 송공비는 안성 군민들이 재물을 모으고 돌을 다듬어 1744년에 건립했다. 함께 종군(從軍)했던 조현명(趙顯命)이 비문을 짓고 박문수(朴文秀)가 글씨를 썼다. 그리고 이광덕(李匡德)이 전액(篆額 ; 전서체로 비석의 이름을 새긴 부분)을 썼다. 문화재청 제공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한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해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이 돈대는 높이 2.2m, 둘레 128m의 규모로, 성곽은 돌을 이용해 직사각형으로 쌓고, 해안 쪽을 향해 4개소의 포좌(포놓는 자리)를 설치해 놓았다. 출입구는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을 이루고 있어 다른 돈대와는 다른 독특한 모습이다. 조선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있을 때 설치한 것으로, 장곶보의 관리하에 있었다 한다. 문화재청 제공
신륵사극락보전은 불교의 여러 보살과 부처 중에서 서쪽의 극락세계의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불전으로 신륵사의 중심 불전이다. 건물의 모습을 보면 평지에 길게 다듬은 화강암을 3단으로 쌓아 기단을 만들었고, 주춧돌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그대로 사용했다. 규모는 작지만, 공포를 높고 화려하게 두면서 여기에 비례해 지붕도 크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왕실의 보호를 받고 왕릉을 지키는 역할에 따라 건물의 격식도 높이는 조선 시대 불교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철종외가는 조선 철종(재위 18491863)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던 집으로, 인천 강화군 선원면에 있으며 1995년 문화재로 지정됐다. 철종 4년(1853)에 지은 이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두고 H자형 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행랑채 일부가 헐려 지금은 ㄷ자 모양의 몸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一자형으로 연결돼 있고 안(안채)과 밖(사랑채)의 공간을 작은 담장으로 간단히 분리했다. 규모는 작으나 예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건물이다. 문화재청 제공
광주유정리석불좌상은 화강암의 석불상이었으나 여러 차례 보수로 얼굴과 신체의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다.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고 어깨는 좁으며, 간략하게 처리한 옷주름 표현 등에서 기술이 세련되지 못한 지방 장인에 의해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광배(光背 ; 붓다의 몸에서 나오는 성스러운 빛을 형상화한 것)는 남아 있지 않다. 목에는 삼도(三道 ; 붓다의 지혜를 상징하는 세 줄의 주름)가 표현됐다. 양 손은 배에 모아 왼손 바닥위에 오른손을 올리고 양손의 엄지를 맞댄 선정인(禪定印 ; 명상에 들어 있는 붓다의 고요한 상태를 상징)의 손 모양을 취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