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시 장단면 도라산리 894번지에 있는 '죽음의 다리'는 대한제국 시대, 장단에서 연천의 고랑포로 나가는 유일한 국도 교량으로 경의선이 개통되면서 건립됐다. 철로 위쪽 8m 높이에 설치한 길이 7.2m, 폭 5.5m의 작은 다리로, 옛 장단역에서 남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있다. '죽음의 다리'라는 이름은 한국전쟁 당시 많은 미군이 이곳에서 전사해 붙여진 것으로 한국전쟁의 비극을 간직하고 있다. 한국철도공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2004년 2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탱자나무는 주로 영호남지방에 분포하며 일본중국에서도 자란다. 우리나라 나무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하며 줄기에 가시가 나 있어 과수원 울타리용으로 적합하다. 강화도 역사박물관 옆에 서 있는 갑곶리의 탱자나무는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부분 둘레 2.12m이다. 강화도는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몽고의 침입을 해 있었던 곳이며, 조선 인조(재위 16231649)가 정묘호란(1627) 때 난을 피했던 장소이다. 이 때 외적을 막는 수단으로 강화도에 성을 쌓고, 성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어서 외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탱자나무는 그 때 심은 것이 살아남은 것으로 추측된다.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는 국토방위의 유물로서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 한계선인 강화도에 자리하고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석남사는 통일신라 문무왕 20년(680) 고승 석선(奭善)이 세웠고 고려 초기 혜거국사가 넓혀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나중에 화덕(華德)이 다시 지은 절이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불상과 그 생애를 여덟 가지로 나눠 그린 그림을 모신 곳으로 지은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려고 장식해 만든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쳐 나온 재료의 끝이 짧고 약간 밑으로 처진 곡선을 이루고 있다. 이는 조선 초기 건물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한백륜(韓伯倫, 14271474)의 자는 자후(子厚), 호는 의암(毅菴)이며 본관은 청주(淸州)로 시는 양혜(襄惠)이며 청주한씨(淸州韓씨) 양혜공파(襄惠公派) 중시조(中始祖)이다. 1446년 음서로 관직에 나아간 후 장사랑, 소격전직장, 경복궁사연 등의 관직을 거쳤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급제, 내시별감(內侍別監)에 속했다. 1462년 그의 딸이 동궁에 들어가면서 의흥위부사, 의빈부도사를 거쳐 공조정랑에 제수했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딸이 왕후(안순왕후)가 되자 국구로서 보국숭록대부 청천군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에 봉해졌으며 남이의 역모를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추충익대공신을 했다. 묘 진입로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고 묘역에는 일반 문묘보다 규모가 큰 봉분과 묘비, 장명등, 문인석이 배치해 있고, 특히 1981년 묘역 정비시 상석 밑에 백지로 된 5매의 묘지가 발굴됐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중기의 무신인 황진(黃縉)은 1627년(인조 6)에 유효립의 반란 모의를 고발한 공으로 아버지 황성원과 함께 영사공신(寧社功臣) 2등에 봉해졌다. 높이가 낮은 사모, 관복의 오른쪽 옆구리로 삐쳐 나온 삼각형 자락, 단령의 양쪽 옆트임을 묘사한 것은 17세기의 공신도상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이다. 얼굴의 윤곽과 이목구비는 가는 갈색 선으로 윤곽을 그렸고, 돌출한 코와 관골 부위는 갈색을 덧칠해 골상의 특징을 강조했다. 도상의 특징으로 볼 때, 인조대 정사공신상의 특징과 비슷한 면이 많다. 족자의 상하회장(上下回裝)에는 국화를 비롯한 꽃문양이 직조돼 있는데, 당시의 장황 형식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문화재청 제공
우리나라에 성공회가 처음으로 전파하기 시작할 때, 초대 선교사 고요한 주교와 함께 영국으로부터 내한한 조마가 신부가 1896년 강화에 부임해 선교하면서 2년 후인 1898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이 사제관은 영국 성공회가 선교를 시작하면서 영국인 신부가 한국전통 주거문화 속에 어떻게 적응하고 왔는가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주거공간이다. 또 건축수법이나 치목형식에서 영국인들의 주문을 소화해 기술적인 적용을 했는가를 드러내는 건축이다. 건물 형식은 ㄷ자형 연와구조로 된 5량 4간의 홑집이다. 문화재청 제공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은 정무공 오정방(15221625), 천파공 오상(1614~1672), 충정공 오두인(16241689) 등 해주 오씨의 이름난 학자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이 있는 덕봉마을은 사액서원인 덕봉서원과 오정방 고택, 종친의 무덤이 모여 있어 해주 오씨의 역사를 보여준다. 덕봉리 입향조 오현경에 의해 1510년에 처음 지었으며, 1650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가옥은 문간채가 전면에, 그 안쪽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한 건물로 이어져 있으며 사랑채 뒤쪽으로 사당이 별도의 담장을 두고 자리한 구성이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세관 구 창고는 좌우 측 벽체의 디자인 요소가 뛰어나다. 구 선거계 사무실과 구 화물계 사무실은 붉은 벽돌 건물로 좌우 대칭의 균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100년 전 인천개항과 근대 세관관세행정 역사를 증명하는 항만유산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문화재청은 2013년 인천세관 구 창고와 부속동을 등록문화재 569호로 지정했다. 인천세관 구 창고와 부속동은 건축사적 가치를 넘어 개항장 인천과 한국 근대의 초기 모습을 되짚어보게 하는 의미 있는 장소다. 문화재청 제공
현수제승법수는 여러 법문(法文)에서 부처의 깨달음을 명수(名數)로 정형화해 설명한 것을 수집 수(數)를 차례로 벌려 쉽게 검색할 수 있게 엮어 놓은 일종의 사전이다. 이 법수는 당나라 스님 현수가 엮은 구집(舊集)이 전래되지 않아 명나라 스님 행심(行深)이 다시 엮어 선덕(宣德) 2년(1427)에 간행한 명판본을 성화년간(14651487)에 입수 도인 경민이 중연을 모집해 처음으로 연산군 6년(1500) 경상도 합천 가야산 봉서사에서 개판한 것이다. 엮음의 체재는 권 제1권부터 권 제10가지에 각 숫자에 해당하는 명수를 함께 모아 배열 설명하고 권 제11에는 그 이상의 숫자에 해당하는 것을 일괄 수록했으며 그 끝에 팔식심왕제문요간을 붙이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단소장이란 단소를 만드는 사람 또는 기술을 말한다. 단소를 만드는 재료로는 황죽이나 오죽을 사용한다. 제작방법은 대나무를 소금물에 10시간 정도 삶아 기름을 제거하고 절인 다음 열을 가해 구부러진 부분을 바로 잡는다. 이어 찬물에 10분 정도 담가둔 후 통풍이 잘되는 그늘에서 3개월 이상 건조시킨다. 건조시킨 대나무는 길이 500㎜로 잘라서 안을 뚫고 다시 420㎜로 자른 다음 반달 모양의 취구를 만들고 지공을 뚫는다. 취구는 입김을 불어넣는 곳이며, 지공은 손가락으로 음정을 조절하는 부분이다. 단소장은 전통공예기술로서 보호하고 전승하기 위해 무형문화재로 지정했으며, 김황중 선생은 단소장이었던 부친 故 김용신 선생에게서 단소제작 기능을 이어받았다. 문화재청 제공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인 신재 한상경(韓尙敬, 13601425)의 영정(影幀)이다. 한상경 영정에는 조선 초기의 초상화 양식을 잘 반영돼 있다. 관모의 양각이 아래로 내려온 모양, 흉배가 없는 담홍색 단령, 등받이가 없는 접이식 의자인 승상(繩牀) 등이 단서다. 이 초상은 여러 가지 단서로 볼 때 17세기 베껴 그린 이모본(移模本)이지만, 표현상의 요소는 15세기를 대표할 단서를 갖고 있다. 화폭의 왼편 상단에는 표제가 있다.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는 이경석(李景奭)이 화상찬(畵像贊)을 남겨 이 초상의 원본인 개국공신도상을 17세기에 이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초상 인물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약간 돌리고 공수자세를 취하고 의자에 앉았다. 안면의 표현은 채색을 담담하게 썼으며 묘사가 간결한 원본의 모습을 충실히 따라 그렸다. 복식에서 고려 말 조선 초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주대소리는 노동요로서 어부들이 바다에서 사용하는 닻줄을 만들 때 불리던 노래로, 인천시 무형문화재이다. 내용은 나무타령자우소리줄 놓는 소리꼼새소리순레소리채짓는 소리여사소리사리소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무타령은 나무를 벨 때 부르는 소리, 자우소리는 줄을 단단하게 꼴 때 부르는 소리이다. 줄 놓는 소리는 굵지 않은 세 가닥의 줄을 꼬아나갈 때, 꼼새소리는 줄이 단단하고 수평을 유지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부른다. 순레소리, 채짓는 소리는 가는 3개의 줄을 하나의 굵은 줄로 만들 때 부르며 굵게 꼬여진 줄을 둘둘말 때 여사소리, 사리소리 등을 부른다. 문화재청 제공
전의 비암사 영산회 괘불탱화는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가르치는 장면을 그린 거대한 그림(일명 영산회도)으로 탱화의 길이는 863cm, 폭은 486cm 규모다. 1657(효종8) 화원 신겸이 그렸으며 17세기 이후의 불화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군도 형식을 띠고 있다. 해학적인 표현과 하단에서 위로 갈수록 인물의 크기를 점점 작게 그리는 원근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신겸의 다른 작품으로는 안심사 괘불 등이 있다. 지금도 일 년에 한 번 이 그림을 법당 앞 뜰에 있는 괘불대에 걸어 놓고 재를 드리는데 이때 그림을 볼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목조각은 조각의 소재인 나무가 가진 양감과 질감을 표현하는 전통조각이다. 주로 사용하는 재료로는 결이 아름답고 견실한 오동나무, 소나무, 전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등을 많이 사용한다. 목조각은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해지면서 사찰 건축과 불상 등 불교 의식과 관련된 조각들을 제작하면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인해 대부분 소실분실, 전하는 것은 많지 않다. 기능보유자 이방호 선생은 목조각 가운데서도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불상을 주로 제작하고 있다. 조각의 특징은 불상제작을 마무리할 때 표면을 매끄럽게 하는 과정에서 사포를 사용하지 않고 조각칼만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문화재청 제공
삼막사사적비는 삼막사의 사적을 기록한 비로 안양 석수동 대웅전 동쪽 약 30m 위치에 건립돼 있다. 비문에는 신라 원효(元曉) 스님이 창건하고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고 개칭했고, 고려 태조(太祖)가 중수하여 삼막사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말선초(麗末鮮初)에는 나옹(懶翁)ㆍ무학(無學) 등의 고승이 오래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드날렸다. 조선 태조(太祖) 때 왕명으로 비가 중수된 사실이 기록돼 있다. 비문(碑文)은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나 사적비가 경기 관악산맥 삼성산 밑 삼막사에 있고 왼쪽에는 향로봉이 있으며, 조선 숙종 33년(1707)에 건립되었음을 밝힌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시대 중기의 문신인 윤두수(尹斗壽, 15331601)가 1571년(선조 4)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던 당시 해주읍성의 풍경과 행렬을 10년 뒤인 1581년(선조 14)에 그린 그림이다. 그림 맨 위쪽에 류영수양관연명지도(留營首陽館延命之圖)라는 표제를 썼고, 그 아래에 해주읍성의 수양관과 관아의 전경, 관찰사의 행렬 등을 수묵담채로 그렸다.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는 7언시를 썼다. 그림은 후대에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16세기 후반기의 화풍의 단서가 남아 있다. 멀리 배경에 그린 원산(遠山)에는 짤막한 선과 점으로 표현한 조선전기 안견파(安堅派) 화풍의 요소를 볼 수 있다. 이 그림과 문자로 남긴 기록은 지방관의 부임 장면을 그린 기록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근해 갯가노래 뱃노래는 1988년 지정된 무형문화재다. 갯가노래는 어렵고 고된 생활을 하소연하는 여인들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고, 뱃노래는 어부들이 흔히 부르는 노래를 일컫는다. 갯가노래에는 물장구 장단의 나나니타령과 조개를 캘 때 부르는 군음이 있다. 뱃노래는 노동의 양상에 따라 다른 노래가 불러진다. 항해를 위해 닻을 감아 올릴 때 부르는 닻감는 소리, 어획기를 맞아 시선배가 어선으로부터 고기를 매입해 육지로 운반하면서 부르는 시선뱃노래, 풍어를 기원하거나 만선 귀향을 축하하는 뜻으로 부르는 배치기 등이 있다.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노동요 중에서 대표적인 노래다. 문화재청 제공
삼현육각(三絃六角)은 1985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인천의 문화유산이다. 삼현육각은 조선시대 궁중무용과 행악, 지방관아의 연회, 높은 관리나 귀인의 행차, 향교의 제향 및 각 지방에서 신에게 제사 지낼 때 두루 쓰이던 악기편성을 뜻한다. 향피리 2명과 대금해금장구북 각 1명의 6인조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 악기의 종류나 편성인원에 다소의 차이가 있으며 지역(경기호남해서영남 등)에 따라 음악적 특징, 악곡구성에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연주형태는 가로 1줄로 앉아서 연주하거나, 세로 2줄로 서서 연주하거나, 세로 2줄로 걸어가면서 연주하거나, 말 위에서 연주하는 것이 보통이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세조 때 문신인 한확(韓確, 1400~1456)의 행적을 기록한 비다. 1455년(세조1) 좌의정이 되고 좌익공신 1등에 올라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묘역 아래의 비각 안에 방부이수((方趺螭首) 양식을 갖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왕명으로 1494년(성종25)부터 1495년(연산군1)까지 2년에 걸쳐 만들었다. 당대 최고 수준의 장인들이 참여해 이수(螭首)의 쌍룡쟁주(雙龍爭珠)와 받침돌의 복련(覆蓮) 및 안상(眼象)을 매우 정교하게 조각했다. 장방형의 대리석을 다듬어 이수와 비신(碑身)을 만들었고 비신을 꽂은 사각형 받침돌은 화강암으로 제작했다. 받침돌 밑에는 2단의 기단석을 마련하였다.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신도비의 하나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제공
장수동 은행나무는 인천 남동구 장수동에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인천시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됐다가 올해 2월 국가천연기념물 제562호로 승격됐다. 수령 8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장수동 은행나무는 높이 30m, 둘레 8.6m 규모로 5개의 가지가 균형을 이루며 뻗어 있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예로부터 집안에 액운이 있거나 마을에 돌림병이 돌 때면 이 나무에 제물을 차려놓고 치성을 올렸다고 전해져오고 있으며, 매년 음력 7월1일 주민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지역 전통문화 도당제 행사가 열리는 등 자연학술적민속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동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