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가학동 고인돌은 탁자식으로 원래 10기 정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1기만 남아 있다. 덮개돌의 길이는 2.9m이며 4개의 받침돌 중 3개는 무너졌다. 주변 지역의 고인돌에서 가락바퀴ㆍ돌화살촉ㆍ반달돌칼 등과 청동기시대의 집터 1기가 조사되었다. 이곳은 고인돌 위에서 학들이 놀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이 가학동이 됐다고 하며,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마을의 번영과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문화재청 제공
광주시 직동 산27번지에 위치한 맹사성선생묘는 조선 세종 때의 재상인 고불 맹사성 선생의 묘소다. 고려 우왕 12년(1386)에 문과에 장원급제했으며 대사헌ㆍ우의정ㆍ좌의정 등의 벼슬을 거쳤다. 태종실록을 감수하고팔도지리지를 편찬했으며 향악을 정리하고 악기를 만들어 조선 초기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봉분 앞에는 조선 세종 20년(1438)에 세운 묘비가 있는데 조선 초기의 양식이 잘 드러난다. 봉분의 좌우로 문인석과 망주석, 동자상이 배치돼 있다. 지난 1974년 9월26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됐으며 현재는 문중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허유전 묘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고려시대 봉토묘로, 1995년 인천시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됐다. 고려 후기 충숙왕 때의 문신인 충목공 허유전(12431323) 선생의 묘소이다. 허유전은 1243년(고종 30년) 출생했으며,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1309년(충렬왕 34) 전라도안찰사를 거쳐, 밀직사사에 올라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여러 인물을 선발하는 일을 맡았다. 충숙왕 초에는 가락군에 봉해지고 충숙왕 8년(1321)에 수첨의찬성사를 거쳐 정승에 올랐다. 묘는 도굴된 상태로 방치됐다가 1985년 후손 허관구(許官九)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1988년 6월 묘지 발굴 당시 고려청자 잔 여러 조각, 고려 토기조각 수십 점, 얇은 청동 조각 여러 점, 나무관에 사용한 쇠못 한 점, 1112세기에 만들어진 중국 송금대의 엽전 19개가 나왔으며, 유골인 엉치뼈도 출토됐다. 이 외에도 많은 부장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도굴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문화재청 제공
소고리마애여래좌상은 이천 모가면 소고리 마옥산 기슭의 커다란 바위 면에 조각한 마애불이다. 높이는 4.7m로 불상의 형태를 얕게 돋을새김한 후 주로 선으로 새겼다. 민머리 위에는 큼직한 머리묶음이 솟아 있고 넓적하고 둥근 얼굴에는 눈꼬리가 긴 눈과 코, 굳게 다문 입 등이 묘사됐다. 양 귀는 길게 늘어졌고, 목에는 3줄의 삼도가 있다. 목 주위에는 뒤집어진 옷깃이 새겨져 있고, 가슴에는 흘러내리는 U자형의 옷주름이 조각되어 있다. 가슴 앞으로 들어올린 두 손은 손끝을 맞대어 부처가 설법할 때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좌상은 지난 1984년 9월12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9호로 지정돼 현재에 이르렀다. 문화재청 제공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조선시대 교통시설로, 1995년 인천시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됐다.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는 강화읍 갑곶리와 김포군 월곶면을 배로 연결해 주던 곳이다. 갑곶이란 지명은 고려 고종 때 몽고가 침입하자 왕이 강화도로 천도하게 됐을 때 이곳이 강 건너와의 거리도 짧고 수심이 얕아서 군사들이 갑옷을 벗어 쌓아 놓고 건널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됐다. 이곳은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건넜던 나루터로, 병자호란 때에도 봉림대군이 임금을 모셨던 곳이고,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나루터 시설 없이 이용됐다가, 조선 세종 원년 박신이라는 사람이 최초로 자신의 재산을 털어 석축로 공사를 하여 완성했고, 약 500년간 사용됐다. 문화재청 제공
한산 이씨 묘역은 성남 소재 영장산(성남 분당구 수내동 산1-2번지) 전체에 걸쳐 조성돼 있다. 이곳은 왕이 직접 내려준 땅으로 조선 후기 이래로 오랜 시간에 걸쳐 지금의 형태를 이뤘다. 남쪽 기슭에는 봉화 현감을 지낸 한원군 이장윤(14451528), 한성군 이질(14741560), 이확, 이집, 이정 등의 묘가 있다. 동남쪽 기슭에 이경류, 이정룡의 묘가 있으며, 남서쪽 기슭에는 이오, 이원, 이한, 이병건 등의 묘가 있다. 한산 이씨의 묘역으로서 뿐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조성돼 왔기 때문에 각종 묘와 석물들의 양식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지난 1989년 12월29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됐으며 현재는 한산이씨종친회가 관리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능내리 석실분은 인천시 강화군에 있는 고려시대의 왕릉급 무덤으로, 1995년 인천시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됐다. 무덤 앞 양편에는 망주석으로 추정되는 사각 석주가 남아 있으며, 사각 석주의 3면에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문양이 양각돼 있다. 고려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 고분은 과거 도굴로 인해 석실이 노출돼 있어 보존정비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됨에 따라 이를 위한 발굴을 2006년 말에서 2007년 초에 이르기까지 실시했다. 석실 내부는 화강암을 잘 다듬어 축조됐으며, 봉분구조물과 석실, 건물지가 양호하게 남아 있어 고려시대 지배계급 묘제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로 확인됐다. 출토유물로는 청자편, 각종 금은제장식 파편, 유리그릇편구슬류, 상부원보(祥符元寶) 1점, 은제못, 금박장식 관재 등 소량이지만 다양하게 출토됐다. 특히 봉황머리를 나타낸 은제장식편의 경우 문양이 있는 곳에만 도금처리해 장식적 효과가 뛰어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봉황문양은 전통적으로 왕비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대몽항쟁기 강화에서 사망했으나 능이 확인되지 않은 희종의 왕비인 성평왕후나 고종의 왕비인 안혜태후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운계서원은 조선 명종때 학자인 조욱(14981557)의 뜻을 기리고자 세운 서원이다. 조욱의 호는 용문과 보진재다.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참봉을 지냈으나, 후에 벼슬을 버리고 용문산에 들어가 후학을 가르쳐 용문선생이라 불렸으며, 글과 그림에도 능하였다. 운계서원은 효종 5년(1654)에 제자들이 세웠다. 고종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이후 여러 차례 다시 지었다고 한다. 현재 서원에는 재실(齋室) 1채와 사당만 남아 있다. 사당은 앞면 3칸ㆍ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안쪽에는 조욱 외에 5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 소재지는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로192번길 16-21 (덕촌리)이며 지난 1983년 9월19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8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학익지석묘는 인천 연수구 시립박물관에 있는 고인돌로, 1995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됐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학익지석묘는 원래 인천구치소(구 소년교도소) 안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옮겨 전시하고 있다. 탁자식에 속하는 이 고인돌은 1927년 발굴조사가 이뤄져 내부에서 빗살무늬 토기조각, 돌화살촉, 돌칼 등이 출토됐고, 출토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문화재청 제공
외삼미동 고인돌은 모두 2기이다. 북쪽의 것이 1호, 남쪽의 것이 2호이다. 고인돌이 위치한 곳은 해발 30~50m되는 기다랗게 뻗어내린 구릉의 남쪽 대지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의 고인돌을 거북바위 또는 장수 바위라고 부른다. 덮개돌의 가운데를 거북등모양으로 손질하여 멀리서 보면 거북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고인돌은 화강암 계통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1호가 길이 2m60cm, 폭 2m30cm, 두께 70~90cm이고, 2호가 길이 1m74cm, 폭 1m40cm, 두께 30cm다. 덮개돌 상부에는 1호에 10개, 2호에 3개의 구멍인 성혈이 있다. 1호 고인돌은 탁자식, 2호 고인돌은 뚜껑돌식(개석식)이다. 특히 1호 고인돌은 변형된 탁자식 고인돌로 전형적인 탁자식 고인돌과 달리 굄돌을 세우지 않고 옆으로 눕힌 형태로 되어 있다. 문화재청 제공
망양돈대는 인천 강화군 외포리에 있는 조선시대 성곽시설로, 1999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됐다.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천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천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망양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건평돈대삼암돈대석각돈대와 함께 정포보에 속했다. 방형 구조로 둘레가 130m, 석벽의 높이는 300~340㎝이다. 동쪽으로 외포리 항이 있고 바로 아래 삼별초항몽유허비가 있다. 남쪽은 급경사로 거의 절벽에 가깝다. 문화재청 제공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지평향교는 조선 영조 49년(1773)에 처음 지었으며, 그 외에 자세한 기록은 없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제사 공간인 대성전, 그리고 출입문 구실을 하는 외삼문내삼문 등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인 명륜당은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 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지평향교는 지난 1983년 9월19일에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0호로 지정됐으며 현재는 양평군 지평면 지평로 333 (지평리)에 위치했다. 문화재청 제공
북일곶 돈대는 인천시 강화군에 있는 조선시대 성곽시설로, 1999년 인천시 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됐다.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한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장곶보의 관리하에 있었던 이 돈대는 높이 2.5m, 둘레 120m의 규모를 지닌 직사각형으로, 포좌(포를 놓는 자리) 4곳과, 치첩 32개소를 두었다. 성곽 위에는 몸을 숨길 수 있도록 낮게 쌓았던 담의 흔적만 남아 있다. 조선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있을 때 설치한 것으로, 함경도황해도강원도의 승군 8천명과 경상도군위어영군사 4천300명이 동원되어 40일 만에 지었다고 한다. 문화재청 제공
대동법시행기념비는 대동법의 실시를 알리기 위해 세운 비다. 대동법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공물로 바쳐야 했던 이전의 폐단을 없애고 쌀을 대신 바치도록 한 조세제도다. 조선 선조 41년(1608)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됐고, 효종 2년(1651) 충청감사로 있던 김육이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하도록 상소해 왕의 허락을 얻어 실시하게 됐다. 이로 인해 그동안 어려움에 처했던 백성들의 수고가 덜어지는 등 좋은 성과를 이루게 되자 왕은 이를 기념하고 만인에게 널리 알리도록 했다. 비는 효종 10년(1659)에 세워졌으며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맨위에 머릿돌까지 갖춘 모습으로 각 부분의 조각은 형식에 그친 감이 있다. 비의 원래 명칭은 김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金堉大同均役萬世不亡碑) 또는 호서선혜비(湖西宣惠碑)다. 비문은 홍문관 부제학을 지내던 이민구가 짓고, 글씨는 의정부 우참찬 오준이 썼다. 원래는 현 장소인 경기 평택시 소사동 140-1번지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1970년대에 옮겨 놓았다. 문화재청 제공
이찰ㆍ이율형제정려는 인천시 계양구에 있는 유적건조물로, 2004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2호 지정됐다. 조선 세종의 아들인 임영대군의 후손인 이찰ㆍ이율 형제는 광해군 6년(1614)에 명문가에서 태어나 행실이 바르고 효성이 지극했던 형제는 어릴 때 부친이 병들어 눕자 곁을 떠나지 않고 백방으로 약을 구해 극진히 봉양했다. 부친이 위독해지자 형제는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에 흘려 넣는 등 정성을 다했으며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르고 묘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또한, 이후 모친이 위독해지자 이들 형제는 부친때와 같이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했으나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른 후 묘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를 지켜본 마을 사람들은 이들 형제의 효행을 칭찬했고 부평구 유지들은 나라에 이를 상소했다. 이에 현종은 서원공 한숙으로 하여금 그들의 효행을 기리도록 하고 1670년(현종11년) 효자 정려를 내렸다. 당초 이 정려는 갈산동 종손 집 옆에 있었으나 도시화에 밀려 현 위치로 이전했다. 문화재청 제공
관악산의 봉우리 중 죽순이 솟아오른 듯한 모양을 한 기암절벽이 있는데 그 위에 석축을 쌓고 자리잡은 암자를 연주대라 한다. 원래는 의상대사가 문무왕 17년(677)에 암자를 세우면서 의상대라 이름지었다. 고려 멸망 후 조선을 반대하며 고려에 충성을 다하던 유신들이 이곳에 모여, 멀리 개경쪽을 바라보며 고려를 그리워하여 연주대(戀主臺)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됐다고 한다. 또한 조선 태종이 셋째왕자 충녕대군을 장차 태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를 눈치챈 첫째 양녕과 둘째 효령대군이 궁을 나와 관악산에 입산 수도해 이 연주대에 올라 왕궁을 바라보며 왕좌를 그리워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연주대에 얽힌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내용인데 이는 연주대 주변 경관이 매우 뛰어난 절경인데다 한눈에 멀리까지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여겨진다. 지금의 건물은 3평 남짓한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이다. 이곳에는 석가모니와 나한들을 모시는 불당인 응진전이 있다. 문화재청 제공
오상리 고인돌군은 인천시 강화군에 있는 청동시대 지석묘로, 1999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됐다. 오상리 고인돌은 1972년에 1기가 알려져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됐으나 그 이후에 자세한 보고는 없다가 1990년대 초에 강화도 고인돌무덤(지석묘) 조사연구를 통해 이 고인돌이 있는 오상리 산125번지 일대를 자세하게 조사해 잡목과 잡초가 우거진 사이에서 10기에 가까운 고인돌을 더 찾아냈다. 이 지역의 고인돌은 덮개돌은 부분적으로 손질한 흔적이 있고, 평면 형태는 모두 판돌형(板石形)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기념물로 지정된 내가 고인돌이 길이 335㎝로 가장 크고 나머지는 길이가 130260㎝로 다양한 편이다. 돌방(石室)은 돌널형태의 모습이고, 고임돌이나 막음돌을 세울 때 튼튼하게 하기 위해 주변에 쐐기돌을 사용했다. 돌방의 바닥은 거의 대부분 맨바닥을 그대로 사용했고 149호 고인돌은 판돌이나 깬돌(할석)이 깔려 있었다. 문화재청 제공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평택시 진위면 진위로 49(봉남리)에 위치한 진위향교는 조선 전기에 처음 지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1923년과 1934년 두 차례 보수를 하였다. 현재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ㆍ서재, 외삼문, 내삼문 등이 남아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규모는 앞면 3칸ㆍ옆면 3칸이며,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ㆍ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 진위향교 대성전은 큰 건물은 아니지만 18세기 건축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난 1983년 9월19일에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됐으며 향교재단에서 꾸준히 관리 중이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정족산사고지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조선시대 사고로, 2014년 인천시 기념물 제67호로 지정됐다. 정족산사고지는 정족산성 안 전등사 서쪽 높이 150m에 위치하며, 사고지의 보호철책 안쪽에는 주춧돌들이 놓여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수호사찰인 전등사가 사고를 보호해왔으므로 1910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실록과 서적들이 옮겨질 때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사고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사고의 사진이 수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를 전후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고 건물에 걸려 있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 쓰인 현판이 전등사에 보존돼 있다. 정족산사고본 실록들은 많은 변동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에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이 묘향산사고로 피난했다가 마니산사고로 옮겨졌고, 이 마니산사고본의 잔존실록들을 옮겨서 보관해 오늘에 전해질 수 있게 됐다. 현재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이방실장군묘는 고려 후기의 무신 이방실(?1362) 장군과 그의 두 부인을 함께 모신 합장묘이다. 장군은 충목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모신 공으로 왕이 즉위하자 무관의 벼슬인 중랑장에 오르게 됐다. 공민왕 8년(1359)에 4만 여명의 홍건적이 침입해오자 관군들과 적을 무찌르는 큰 공을 세워 왕명의 출납과 군기를 맡는 추밀원 부사가 됐다. 공민왕 10년(1361)에 20여 만명의 홍건적이 다시 침입해 개경까지 오자 여러 장군들과 합심하여 적을 완전히 물리쳤다. 그러나 그의 공을 시기한 간신 김용의 모략으로 공민왕 11년(1362)에 살해됐다. 현재 묘역은 경기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산81번지에 위치해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둘러 싸여 있고 그 앞에 국한문 혼용으로 쓰여진 비문과 무인석 등이 배치돼 있다. 지난 1972년 7월10일 경기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