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중구 답동에 있는 성당으로 1981년 9월25일 사적 제287호로 지정됐다. 1890년대에 건축된 국내 성당 중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다. 벽돌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 건축면적이 약 1천15㎡이다.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소속 E.J.G.코스트(한자명 高宜善) 신부의 설계로 1897년 처음 건립, 1937년 P.시잘레(한자명 池士元) 신부의 설계로 증축되었다. 앞면에 설계된 3개의 종탑은 건물의 수직 상승감을 더해주며, 8개의 작은 돌로 된 기둥(pilaster)이 8각(角)의 종머리 돔(dome)을 떠받들고 있다. 앞면의 출입구는 화강석을 사용하여 벽감(壁龕) 모양의 아치로 하였고, 처마는 맹(盲)아치로 설계하였다. 6·25전쟁 때 훼손된 부분은 모두 복원되었고, 1979년에는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했다. 현재 천주교 인천교구 내 102개 본당의 주교좌 성당이다. 두산백과문화재청 제공
의왕시 철도박물관로에 소재한 철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객차다. 지난 2008년 10월17일 등록문화재 제420호로 지정됐다. 앞서 지난 1936년 일본에서 제작되고, 조선총독부 철도국 경성공장(현재 서울철도차량 정비창)에서 전망 2등 침대차로 조립된 객차이다. 이 객차 중 특실 침대차량 17호를 1958년 서울공작창(현재 서울철도차량 정비창)에서 주한 유엔군 및 미8군 사령관 전용 객차로 개조 후 운행하였으며, 귀빈객차 17호라 불렀다. 총 길이는 23.2m로 3.4m(높이)X3m(너비)다. 무게는 55.9t이다. 1966년 11월 방한한 미국 제36대 존슨 대통령이 이 객차를 이용하였고, 이를 계기로 기념 승차권이 발행되기도 했다. 국빈 관련 유물로, 역사적·사료적으로 그 가치가 큰 차량이다. 한국철도공사 사장이 소유 및 관리한다. 두산백과문화재청 제공
현재 인천시 서구 검암·경서동 일대에서 10∼11세기에 걸쳐 청자를 만들었던 5∼6기의 고려시대 가마터로, 사적 제211호로 지정됐다. 가마터 주위 지세는 얕은 비탈을 이루며 바다로 이어져 있다. 현재는 발굴조사시 드러난 가마의 남은 부분에 보호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지만, 나머지 일대는 골프장으로 변해있다. 발굴 당시 가마 1기를 조사하여 많은 녹청자조각과 가마도구들을 발견하였다. 가마는 자연 경사를 이용한 것으로 칸이 없는 통가마다. 3차례에 걸쳐 다시 쌓았는데, 경사도 20° 안팎의 가마바닥에 모래를 깔고 그 위에 경사진 넓적한 자기로 만든 도지미를 깔고 그릇을 구웠음을 알 수 있다. 출토유물 중 주목되는 것은 말발굽 모양의 자기로 만든 베개(도지미)와 유사한 것으로, 중국 북방 청자가마터에서 사용된 것이고, 녹청자가 녹갈색이나 암록색을 띄는 것도 중국 북방의 청자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두 지역간의 영향관계도 앞으로 연구해 볼 문제다. 문화재청 제공
유배지 영월(寧越)에 남겨진 단종(端宗)의 자취와 충신들의 절의가 깃든 장소를 8폭의 그림으로 제작한 화첩이다. 제1면은 단종의 왕릉인 장릉(莊陵)을 산도(山圖)의 형식으로 그렸다.제2면은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淸浦)를 과감한 구도로 묘사한 일종의 실경산수화이다. 제3면은 영월 객사의 관풍헌(觀風軒)을 계화(界畵) 형식으로 그렸으며, 제4면은 관풍헌 동남쪽에 위치한 자규루(子規樓)를 중앙에 그렸다. 제5면은 단종에 대해 절의를 지키며 숨진 사육신(死六臣)을 배향한 사당인 창절사(彰節社)를 가운데 배치, 제6면은 단종의 시녀와 시종들이 순절한 낙화암(落花巖)을 산수화 형식으로 그렸다. 제7면은 영월읍 치소(治所)를 개화식 구도를 취한 회화식 지도의 형식으로 그렸으며, 제8면은 영월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각 면에는 오른편 윗부분을 위주로 화면에 등장하는 장소에 대한 간략한 기록을 적어 놓았다. 전체적으로 그림의 화격이 높아서 어람용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이며 제작시기는 동궐도 등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19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선조 25년(1592) 12월 임진왜란 중에 권율 장군이 전라도로부터 병사 2만여 명을 이끌고 이곳에 주둔하여 왜병 수만 명을 무찌르고 성을 지킴으로써 적의 진로를 차단했던 곳이다. 독산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원래 백제가 쌓은 성일 것으로 추측되며,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쓰였을 것으로 본다.선조 27년(1594) 백성들이 산성을 쌓고,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5년(1602)에 당시 부사 변응성이 다시 보수하고, 그 후 정조 16년(1792)과 20년(1796)에도 다시 공사했다. 성 둘레는 3천240m이고 문도 4개이지만 성 안에 물이 부족한 것이 큰 결점이었다. 이런 결점 때문에 이곳에는 세마대(洗馬臺)의 전설이 있는데, 권율 장군이 산 위로 흰 말을 끌어다가 흰쌀로 말을 씻기는 시늉을 해 보이므로 왜군이 성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속아서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독산성의 다른 이름으로 독성산성이라고도 한다. 문화재청 제공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가 큰 글자로 쓴 칠언절구의 시(詩)다. 종이바탕에 4행으로(각행 7자) 썼으며 근대에 족자로 장황됐다. 어필 아래에는 서예가 배길기(裵吉基)의 1966년 발문이 있다. 바탕은 보존이 양호한 편이며 다만 줄(行) 사이가 좀 더 밝다.한편 어필 칠언시 28자의 점획 안에는 제월당(濟月堂)이란 스님의 발원문 29자가 작은 글자로 진하게 쓰여있다. 칠장사는 인조가 반정으로 등극한 1623년에 인목왕후가 친정아버지와 아들(영창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당(願堂)으로 삼아 중창한 사찰이다. 이곳에는 인목대비가 썼다는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사경’이 전래되었는데(현 동국대박물관 소장) 인목왕후 칠언시와 서풍이 같다. 인목왕후의 글씨는 선조 어필과 비슷하며 그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가 따라 썼다. 한자 대자(大字)로는 명성왕후의 예필을 빼면 현재로서는 인목왕후 칠언시외에 사례가 발견된 바 없어 더욱 중요한 자료다. 문화재청 제공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가 있던 자리다. 조선 전기 이색이 지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했다.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로 유명세를 떨쳤다.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 곳서 수도생활을 했다. 성종 때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을 크게 넓히는 데 13년이나 걸렸다. 유명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억불정책으로 절이 소멸됐다. 이 절이 있던 자리에서 500m 정도 올라가면 지금의 회암사가 있는데, 그 부근에는 중요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에 세운 나옹의 행적을 새긴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를 비롯, 지공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49호)·회암사지부도(보물 제388호)·나옹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50호) 등이 있다. 이 사찰은 평지가 아닌 산간지방에 위치하면서 평지에 있는 절에서 볼 수 있는 남회랑을 만든 점에서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 배치형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문화재청 제공
고려의 승려 제관(諦觀)이 천태종의 중심 사상인 ‘제법실상일념삼천(諸法實相一念三千)’의 요지를 표현하고자 저술했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2권의 책 중 상권 1책이며 크기는 세로 24.5㎝, 가로 16.5㎝이다. 책 끝에 있는 목암노인이 쓴 글에 의하면, 오래된 판본이 있었는데 글자가 크고 책이 무거워 휴대하기 불편하여 굉지대선사(宏之大禪師)가 수여(水如)에게 다시 쓰도록 하여 충숙왕 2년(1315)에 기복도감(祈福都監)에서 간행한 것이다. 제관은 960년(광종 1)에 천태종 계통의 서적을 전하기 위하여 오월(吳越)에 갔다가 중국 천태종 제15조인 의적(義寂, 919∼987)의 강의에 감명을 받고서 그의 문인이 되었다. 그 뒤 천태학을 익히고 널리 알린 지 10년 만에 입적(入寂)했다. 그후 주변 사람들이 그의 집에 있던 낡은 상자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뚜껑을 열었더니 이 책이 들어 있었다는 설(說)이다. 현재 경기도박물관에 상권 1책이 소장되어 있다. 우리나라 고승이 쓴 책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게 평가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현존하는 오리모양을 한 주전자 형태의 청자 중 장식이 매우 특이한 형태로 오리의 깃털을 음각·양각의 흑백상감기법으로 표현하였고 뚜껑의 장식과 오리의 머리, 손잡이가 잘 어울린다. 오리를 주제로 한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기형과 화려하고 정교한 문양장식의 표현, 비색(翡色)의 유약(釉藥)과 정선된 태토(胎土)로 제작된 고려시대 최절정기(12세기)의 청자로서 상형청자(像型靑磁)의 새로운 자료로 고려시대 도자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몸통이 둥글며 한 쪽 옆면에 주구의 기능을 하는 오리머리를 부착하고, 그 반대편에는 오리의 두 다리를 모아 올려붙인 듯한 손잡이가 달려 있다. 등에는 작은 연잎과 줄기를 늘어뜨렸는데, 연잎 중앙에 구멍을 뚫고 연밥의 형태를 응용한 뚜껑을 만들어 막았다. 넓적한 부리를 조금 벌려 물을 따를 수 있게 하고 다리를 모아 뒤편으로 연결하여 손잡이 기능을 부여한 점, 연밥 형상으로 뚜껑을 만들었다. 문화재청 제공
이 그림은 숙빈 최씨(1670~1718)의 무덤인 양주(楊洲)의 소령원(昭寧園)을 그린 묘산도이다. 숙빈 최씨는 영조의 생모로 1718년(숙종 44)에 사망, 양주 고령동 옹장리(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묻혔다. 이때는 영조가 즉위하기 전이라 묘(墓)라 하였다가 1753년(영조 29) 소령원(昭寧園)으로 봉해졌다. ‘묘소도형여산론’(墓所圖形與山論)은 두꺼운 종이에 먹으로 상단에 제목을 쓰고, 가운데 산도(山圖)를 그리고하단에는 산론(山論)을 적었다. 이 그림은 길지를 택하는 과정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718년에 제작된 원본일 가능성이 있다. ‘소령원도’(昭寧園圖)는 산도의 형식을 취했으며 가운데 묘소와 좌측의 제청(祭廳), 우측의 비각(碑閣)을 배열하고 아래쪽에는 전답이 그려져 있다. 산수 표현에서 가늘고 기다란 피마준(披麻)이 미점(米點)과 더불어 사용되었으며, 화면 곳곳에 밝은 담채를 가해 미술사적으로도 빼어나다. 이 그림은 잘 도침된 닥종이에 그려진 회화식 지도로써 의궤와 더불어 왕실 원묘와 관련된 중요한 시각자료로 가치가 높다. 문화재청 제공
비교적 최근(2011년)에 지정(등록)된 유물로서 궁궐도를 그린 기록화(記錄畵)다.8폭 병풍으로서 조선조 제24대 왕인 헌종(재위 1834∼1849)이 효정왕후와 가례(嘉禮)를 치른 후 진하장면을 그린 궁중 기록화이다. 경기도박물관 소장으로 제1첩에는 예문관제학조병구(1801~1845)가 지어올린 ‘가례후진하교시시반교문(嘉禮後陳賀敎是時頒敎文)’이 쓰여 있다. 제2첩에서 7첩까지 6폭에는 창덕궁 인정전을 배경을 하여 진하례가 그려져 있다. 효정왕후의 책봉, 가례, 진하는 실제로는 모두 경희궁(慶熙宮)에서 치러졌으나 19세기 진하도병에서는 실제 장소와 상관없이 창덕궁 인정전을 배경으로 진하례를 그렸다. 따라서 이 병풍에서도 창덕궁 인정전을 비롯한 크고 작은 전각이 산수, 수목, 인마들과 함께 질서정연하면서도 호화롭게 묘사된 가운데, 문무백관들이 질서정연하게 집결되어 있다. 제8첩에는 25명 관원들의 품계, 관직명, 생년, 과거급제년, 본관 등이 기록되어 있다. 문화재청 제공
사군천리 망안욕천 이표촌성 행물부정(思君千里 望眼欲穿 以表寸誠 幸勿負情)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1910년 3월26일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휘호한 유묵을 일괄·지정한 것 중의 하나이다. 일괄 지정된 이 작품들은 1910년 2월과 3월에 쓴 것으로 글씨 좌측에 “경술이(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庚戌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라고 쓴 뒤 손바닥으로 장인(掌印)을 찍었다. 글씨 내용은 ‘논어(論語)’·‘사기(史記)’ 구절 등 교훈적인 것이 많으며, 자신의 심중을 나타낸 것, 세상의 변함을 지적한 것, 일본에 경계하는 것, 이밖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특히 유묵의 대부분은 당시 검찰관,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문화재청 제공
평택시 심복사(深福寺) 능인전 안에 모셔진 이 불상은 고려말에 파주군 몽산포에 살던 천노인(千老人)이 덕목리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이라고 전한다. 불상 모실 곳을 찾아 옮기던 중 광덕산에 있는 지금의 심복사 자리에 이르자 갑자기 무거워졌으므로 여기에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는 낮게 표현되어 있다. 둥글고 원만한 얼굴에 귀가 크고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의 표현이 뚜렷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깃과 소매 깃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배 부분에는 안에 입은 옷을 묶은 띠매듭이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으며, 옷 주름은 규칙적인 계단식 선들로 나타내어 단조롭고 형식적이다.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는 16개의 연꽃무늬가 겹쳐서 새겨져 있고, 중대는 두 마리의 사자가 앞발을 들어 상대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하대는 8개의 겹잎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문화재청 제공
문종 14년(1060), 혜소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일곱 도둑이 혜소국사에 감화됐다는 일화가 숨 쉬는 칠장사(七長寺·안성시 죽산면)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 혜소국사(慧炤國師)는 고려 광종 23년(972)에 안성에서 출생, 10세에 출가하였으며 17세에 융천사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국사는 말년을 칠장사에서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현재 비 받침인 귀부(龜趺)와 비 몸돌·머릿돌이 각각 따로 놓여 있는 상태다. 흑대리석으로 만든 비몸돌의 양쪽 옆면에는 상하로 길게 두 마리의 용을 새겨 놓았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다. 비와 관련한 설화는 이렇다. 임진왜란 당시 왜 장수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 한다. 현재 이 비의 몸돌이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거대한 천연 암벽에 두 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다. 머리 위에는 돌 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화강암 천연암벽을 그대로 이용해 불상의 위용을 거친 감성 그대로 드러냈다. 이 불상과 관련된 탄생설화도 흥미롭다. 구전에 따르면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를 비로 맞았지만 여전히 왕자를 생산하지 못했다. 궁주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궁주의 꿈 이야기를 들은 왕이 장지산 아래 바위에 두 도승을 새겨 절을 짓고 불공을 드리자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조각적으로 뛰어난 기술양식을 찾을 순 없지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다. 문화재청 제공
마음의 때를 씻고 본격적으로 활동할 때다. 향완이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의미를 지닌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기구로 향로라고도 한다. 청동 은입사 향완(靑銅銀入絲香)은 높이 28.8㎝, 입지름 29.1㎝로 몸체와 받침대 전체 면에 은실을 이용해 장식(은입사)을 하였다. 몸체 표면은 4곳에 2개의 선으로 원을 만들고 그 안에 범자를 1자씩 넣었고, 원 주변에 꽃무늬를 새겼다. 몸 아래에는 연꽃을 둘렀고, 받침대 윗부분에 연꽃잎을 둘렀다. 받침대에 용을 새겼고 아래에는 덩굴무늬가 새겨 있다. 입 주변 넓은 테를 가진 전 안쪽 면에는 90여자의 글이 음각되어, 만든 시기와 절에 관한 기록을 알 수 있다. 고려 충목왕 2년(1346)에 만들었고, 원래 금강산 용공사에 전해지던 것을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가져온 것이다. 청동 은입사 향완은 은입사 향로 중 가장 아름다우나 몸에 비해 받침대가 약한 감이 있어 불균형을 이루는 묘미도 숨어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정조 18년(1794).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한 효심의 성곽 중 하나다. 정조 20년(1796)에 완성했다. 중국 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된 모습으로 한국 성곽의 미(美)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팔달문(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은 수원 성의 남쪽 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다.조선 후기의 발달된 성문 건축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다. 문화재 지정(등록)일은 1964년이다. 문화재청 제공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통일신라 시대로 추정되는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안양시 만안구에 소재한 예술공원에서 만날 수 있다. 현재 지주의 기단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지주 사이와 양쪽 지주의 바깥에 하나씩 총 3장을 깔아서 바닥돌로 삼고 있는데, 이 역시도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는 받침은 지주 사이에 돌을 마련하고 그 중심에 지름 36㎝의 둥그런 구멍을 뚫어서 마련했다. 특히 동쪽 지주의 윗부분이 깨어져 있는데, 8·15해방 후 인근의 석수(石手)들이 석재로 반출하기 위한 자취라는 설이다. 특히 각 부분에 섬세하게 조각을 해두지는 않았어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쓰여졌다. 문화재청 제공
국내 의학 드라마의 단골소재이기도 한 동의보감은 목활자본의 국보 제319-2호의 기록유산이다. 명성에 비해 지정일은 2015년 6월로 짧다. 성남시에 소재한 한국학중앙연구원서 보관하고 있는 동의보감은 허준(許浚,1539∼1615)이 1610년(광해군 2)에 조선과 중국에 유통되던 의서와 임상의학적 체험을 통한 치료법을 엮어놓은 우리나라 최고의 한의서다. 초간본은 편찬된 지 3년 후인 1613년(광해군 5) 11월에 내의원에서 목활자로 간행하였으며, 총 25권 25책이다. 내용은 목록 2권, 내경편(內景篇) 4권 26조, 외형편(外形篇)4권 26조,잡병편(雜病篇) 11권 38조, 탕액편(湯液篇 3권 17조, 침구편(鍼灸篇) 1권 1조 등 총 25권 108조목으로 구성되었다. 전개방식은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의 5대강(大綱)을 기준으로 각기 세부 분류한 다음 해당되는 병의 이론·처방·출전을 밝혀놓았다. 한편, 동의보감은 조선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에도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곧 명말청초(明末初)에 중국으로 유출되어 중국에서는 1763년(乾隆 28)이후 수차례 간행되는 등 동양의학의 필독서가 되었다. 문화재청 제공
17세기 불화회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칠장사오불회괘불탱. 안성시 죽산면에 소재한 칠장사에 모셔져 있는 괘불이다. 괘불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칠장사 괘불은 길이 6.56m, 폭 4.04m의 크기로, 구름을 이용해 상·중·하 3단으로 구분된다. 맨 윗부분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불과 노사나불이 좌우에 모셔진 삼신불을 묘사하고 있고, 중간은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여러 보살들이 있어 삼세불을 표현하였으며, 맨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그려져 수미산 정상의 도솔천궁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3단 배치는 예배자들에게 삼신불과 삼세불의 세계를 통해 진리를 깨우치게 하고,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의 구원으로 도솔천궁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괘불의 큰 특징이다. 녹색을 주(主)색으로 하고 황색과 황토색을 대비시켜 다소 어두워 보이나, 옷 처리를 붉은색으로 입혀 경쾌함을 느낄 수 있다. 이 괘불은 조선 인조 6년(1628)에 법형(法)이 그린 것으로 짜임새 있는 구도와 섬세한 필치 등은 당대를 대표한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