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미술관을 통해 미래를

수원(시립)미술관의 건립이 가시화되고 있다. 최근 수원미술관 건립관련 전문가회의에서는 입지뿐 아니라 미술관의 형태와 성격 등 운영 일반에 관한 이야기도 오갔던 것으로 안다. 지식기반사회라고 일컬어지는 오늘날 미술관은 더 이상 미술작품의 수집과 보존, 전시 등 이전의 기능과 역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도시 정체성 확보와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의 매력적인 상품으로서 평가 받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은 사회의 빠른 변화를 수용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한 결과, 기존의 미술관이 담아내기 어려운 형식과 내용을 갖게 됐음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가변성, 비물질성이 주요 이슈가 되는 설치미술과 개념미술작품의 경우, 작품의 소장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일시적인 혹은 복제물 형태의 소장만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적 미술관의 주요 기능 가운데 하나인 작품수장 및 보존, 연구는 현대미술의 장에서 별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의 미술관은 새로운 미술을 수용할 수 있는 제3의 시스템과 제도로 탈바꿈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서구의 미술관들 사이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새로 건립되는 수원미술관 아울러 지역의 미술관은 지역 건축문화의 척도가 되고 있다. 동시에 이 건축적 이정표는 랜드마크로써 지역적 효용과 문화적 코드에 의해 투자되고 있다. 사실 미술관은 도시디자인과 도시기능에 따른 특정한 요구를 수행하기 위한 고도의 상징성과 미학적 요구에 부응하는 건축물이다. 특히 오늘날의 미술관은 공공영역에서 매우 중요하고 기념비적인 건축적 소임을 담당할 뿐 아니라 이미 예고한 예술적 내용을 비범하게 구현함을 목표로 한다. 앞으로 개관할 수원미술관은 문화 인프라의 지역적 불균형을 해소하고 지역문화 정체성 확립하는데, 특히 도시재생이나 구도심 활성화에 많은 기여를 할 것이다. 아울러 향후 건립될 미술관은 탈장르화 추세로 인한 전시문화의 다변화를 수용하는 미술관 개념의 확장이 요구된다. 특히 특정 미술을 수용하여 이용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특성화된 미술관 확충, 그리고 복합 문화 공간 개념의 미술관, 대안 공간, 공연시설, 미디어 아트센터, 아카이브 공간 등의 설립으로 국제적 수준의 미술관이 될 수 있도록 비전을 세워야 할 것이다. 또한 공공성과 전문성의 양 영역을 효율적으로 조화시키는 정책이 필요한데, 작품구입이나 보존, 그리고 연구의 측면을 강조하여 미술관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질 높은 전시나 교육을 통하여 미술관의 공공성을 확대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최근 구미의 미술관들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기업의 후원은 물론 적극적으로 마케팅개념을 도입하여 안정적인 자금 확보나 관람객 확대를 도모하고 있음을 눈여겨 봐야한다. 이에 새롭게 건립될 공공미술관은 국내외 미술관들의 시행착오를 타산지석으로 삼되 도래할 시대의 미술관 가치를 염두에 두면서 지역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고도의 경영전략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도시재생지역정체성 확립 기여 아울러 미술관은 수준 높은 경영전략을 반영한다. 경영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소장품 관리와 활용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전시회와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거나 지원할 수도 없다. 수원미술관의 건립과 관련하여 대내외적인 미술 환경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미래예술에 대한 예지와 상상력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경 모 수원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예술학박사

[문화카페] 대우받지 못해 본 자의 넋두리

인사동에 새로운 대규모 전시장이 생겼다는 반가운 소식에 길을 나섰다. 둘러보니 오랜 공사 기간을 거쳐 막 개관한 전시장이라 아직 정돈되지 않은 구석이 있었지만 현대적 감각의 전시공간과 기둥 없는 높은 천정이 인상적이었다. 반투명 유리를 통해 은은히 들어오는 햇살과 고급스런 마감재는 잘 조화되었고 동선은 무리가 없었다. 인사동의 요지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서인사 마당 주차장 옆이라는 위치 역시 미술애호가의 접근을 용이하게 해주는 요인이었다. 쾌적한 전시장, 편안한 동선, 우수한 접근성 등 여러 가지 장점이 있는 전시장이라 기분이 좋았고 조악한 싸구려 중국물건이 넘쳐 나는 인사동에 새로운 명소가 들어섰다는 생각이 들어 이 방면 종사자의 한 사람으로 반가웠다. 좋은 인상이 불쾌감으로 변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러 층의 다양한 전시를 차례로 본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니 현대 중국 목판화가 여러 점 걸려 있었다. 한참 감상을 하고 있는데 덩치 큰 한 남자가 나타나 내려가시죠. 여기는 전시장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멋진 전시장의 불친절 그의 위압적인 말투와 권위적인 태도에 잠시 멍해졌지만 건물 입구는 물론 복도, 엘리베이터 등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에 중국현대목판화전이 4~5층에서 개최되고 있다는 알림을 기억해냈다. 마침 근처에도 포스터가 붙어 있기에 그 내용을 가리키며 5층에도 전시가 있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5층에 올라가지 말라는 안내는 본 적 없습니다하니 그런 안내를 하지 않은 것은 인정합니다만 어쨌든 5층은 전시가 없으니 내려가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 정도면 참을 만한데 그 자는 몇 걸음 더 나갔다. 이런 일에 따지는 걸 보니 평소에 대우받지 못하셨나 봐요 무례하고 황당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해대는 그 인간에게 폭발하고 말았다. 1층으로 내려와 안내데스크 앞에서 옥신각신 하다보니 어떤 경우에도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 유형이 있다던데 대략 이런 사람을 두고 말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얘기했다가는 혈압만 올라갈 것 같아 잘 해보시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서는 데 부아가 치밀어서 다신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살다보면 길거리에서건 식당에서건 무례한 행동을 언제고 당할 수 있기에 그때마다 따지거나 시정을 요구한다면 얼마나 많은 승강이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따지지 않고 대강 넘어가 주는 게 인간성 좋은 사람 또는 무던한 사람으로 보이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은 단순한 친절의 문제가 아니고 시스템과 구조 등 근본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다. 문화 사업은 문화와 사람에 대한 사랑이 우선 되어야 하기 때문에 친절과 배려는 기본이다. 고객은 왕이다 식의 무지막지한 이용자 중심의 사고방식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 전시장을 찾아 준 관람객, 곧 문화를 사랑하는 이에 대한 친절과 배려는 문화 사업하는 이라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내용이자 최소한의 전제 가운데 하나라는 의미이다. 소프트웨어의 문제 우리는 건물을 번듯하게 새로 지으면 이른바 개발도 잘 되고 환경도 일신했으니 사무처리 등 운영도 잘될 것이라는 환상을 갖곤 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라는 점을 쉽게 잊어버리곤 하는 것이다. 멋진 외양과 호화스러운 대리석 마감재도 중요하지만 이를 운영하는 시스템과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 가고 싶은 공간이 될 수도 흉물이 될 수도 있다. 결국 문화는 문화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이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김상엽 건국대 연구교수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문화카페] 싸이와 영화 ‘광해’가 성공한 이유

가수 싸이가 빌보드 차트 2위에 올랐고 그의 노래 강남 스타일은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10월 들어 영화 광해가 1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올해 도둑들에 이어 두 번째 천만 관객 영화가 됐다. 김기덕의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포함, 올해 대중예술계에서 낭보가 이처럼 연이어 터지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닌가 싶다. 정권교체기에 정치권은 싱숭생숭하고 어지럽기만 하지만 한국인의 저력을 드러내는 즐거운 소식들에 그나마 국민들은 주름살을 펴면서 삶의 희망을 그려보기도 한다. 김기덕의 베니스 그랑프리를 통해 한국인이 울컥했던게 엊그제였는데 동시에 가수 싸이는 흥겨운 말춤과 장단으로 세계를 흔들고 다녀 한국인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싸이가 뉴욕의 한복판에서 외국의 쟁쟁한 스타들을 제치고 미국인들 앞에서 번역되지 않은 한국어 노래 강남스타일을 불러제낀 일은 마치 12척으로 수백 척의 일본배를 격파한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게 한다. 화면을 통해 뉴욕교포들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얼핏 보였다. 그 좋은 날에 그 흥겨운 음악앞에서 웬 눈물? 하지만 한국인들은 그 눈물의 의미를 다 안다. 모방을 통해 오리지널을 창조 이제 싸이는 한국인의 설움을 한꺼번에 날려버린 뉴욕대첩의 영웅으로 기록될 것이다. 무엇이 한국인들을 그렇게 주눅들게 했고 무엇이 그동안 한국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일까. 그건 바로 후진국으로서의 문화적 열등의식 같은 것이었다. 팝음악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 패션, 거의 모든 대중예술이 서양에서 온 것이라는 문화적 열등감은 한국이 세계의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라는 왜소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근대 100년을 보냈고 한국은 최근 수십년 사이 무서운 속도로 서구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불과 20~30년전 머리에 노랑, 하양, 빨강 물을 들인 청소년에게 손가락질 하던 중년 기성세대들이 있었다. 나라가 어찌 되려고 저러나 혀를 끌끌 차며 걱정하던 어른들이 떠오른다. 급격한 서구화와 한국의 전통은 부딪혀 심한 파열음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김기덕이 보여준 것은 한국인의 전통 아리랑이었고 싸이가 보여준 것은 기특하게도 강남스타일이지 뉴욕스타일 파리스타일이 아니다. 이들을 통해 진하게 느끼는 것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평범한 진리. 역시 한국인의 피는 노랑 머리보다 진하다. 아무리 머리 색깔을 바꾸고 영어를 써도 한국인의 심성은 어디 가지 않는다. 알고보면 싸이의 노래나 춤은 서구와 한국적인 것이 뒤범벅된 퓨전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교훈은 싸이의 성공과 관련이 없다. 오히려 한국적이지도 서구적이지도 않으므로 역설적으로 두 시장에 다 통하는 그런 퓨전으로서 성공할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창조는 모방에서 온 것이다. 문화적 열등의식, 이제 벗어나자 영화 광해도 그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인터넷 한곳에서 표절 시비가 있긴 하지만 1천만 관객이 감동한 영화를 표절이란 잣대로 쳐내기엔 무력해 보인다. 어찌 보면 그런 표절 시비도 한국인의 문화적 열등의식에서 온 것이다. 서구 것은 항상 오리지널, 한국은 다 짝퉁. 이런 식의 공식이 우리 뇌리에 있다. 우리는 한동안 짝퉁으로 삶을 유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모방을 통해 오리지널을 창조하는 시점이 왔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우린 이제 모방을 부끄러워 말고 당당히 말할수 있어야 한다. 서구가 아무리 싸이더러, 광해더러, 원조는 우리 것이야 라고 한들 그 흥겨운 리듬과 그 벅찬 감동을 어찌 마다할 수 있으랴. 그 창조가 원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늘은 평등하고 그 빛은 모두에게 비춘다. 정재형 동국대 교수영화평론가

[문화카페] 기업메세나가 대안이다

금년 문화예술에 기업이 지원하는 메세나 활동에서 예술단체와 결연해 지원한 중소기업수가 지난해에 비해 13곳 늘었다고 한다. 반면 대기업 지원금은 지난해에 비해 2억원 가량 줄어들었다. 올 기업-예술단체 결연커플은 대기업-단체 24쌍, 중소중견기업-단체 73쌍으로 총 97쌍이었는데, 이중 대기업은 지난해보다 1개사가 느는데 그쳤고 결연 지원금액은 2억원 가량 줄어 현재 약 24억7천만원 수준이다. 반면 올 중소중견기업 중 메세나 활동 기업수는 총 73곳에 달했고 예술단체에 지원한 금액 역시 18억8천만원 수준으로 소폭 상승했다. 이로써 올 기업 메세나 활동을 통해 예술단체 지원금은 총 44억원 수준으로 집계됐다. 우리의 경제규모를 고려해 볼 때 참 보잘 것 없는 실적이다. 자발적 문화지원 통해 문예발전 도모 메세나(mecenat)의 개념은 기업이 이타의 목적으로 문화, 예술을 지원하는 활동을 말한다. 즉 메세나는 후원과 비슷한 문화예술에 대한 두터운 후원과 원조를 의미하기 때문에 영어의 패트로니지(patronage)와 동의어로 사용되며, 박애정신(philanthropy)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지 증진이나 광고 등의 효과를 기대하고 금전이나 현물을 제공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협찬이나 스폰서십(sponsorship)과 다른 시혜적 성격으로 이해된다. 패트로니지든 스폰서십이던 간에 중요한 점은 기업의 입장에서 협찬이나 후원은 타율적인 접근인 것에 비해 기업메세나는 자율적인 접근이라는데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따라서 메세나의 원천적인 의의는 기업이 자발적인 문화지원을 통해 문예의 발전을 도모해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자선 관점의 사회공헌적 성격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하던 그렇지 않던 간에 기업의 메세나 운동 참여는 기업이미지를 제고시키고 브랜드의 가치를 향상시킨다. 따라서 오늘날의 기업은 메세나활동을 통해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존의 개념에 문화예술의 이미지를 이용해 기업과 그 브랜드, 나아가 국가이미지를 제고하는 전략적인 마케팅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의 기업은 이윤의 사회적 환원을 통하여 자사의 발전을 도모하는, 즉 철저한 기업정신(이윤추구)에 바탕을 두고 메세나 운동에 참여한다는 역설적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업 메세나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는 지역은 단연 유럽이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각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국가주도의 강력한 예술후원제도가 이뤄져 왔기 때문에 국민 역시 예술후원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유럽에서는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조차 기업메세나 운동에 적극적인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우리의 경우와 상당히 비교되는 부분이다. 문화와 기업 상생의 길 찾아야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해도 우리의 현실에 맞지 않으면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되 우리의 현실에 맞는 문화와 기업의 바람직한 파트너십의 형태는 무엇일까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문화인의 입장에서도 냉정하게 기업과의 상호 입장을 생각해보고 상생의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기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리의 추구이지 자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기업이 얼마의 액수로 참여했는가의 문제보다는 기업과 문화예술계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 이해하고 협력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향후 기업 메세나운동의 성패를 가늠하는 단서가 될 것이다. 따라서 기업의 입장에서는 자선이 아닌 투자의 관점에서 기업메세나 운동에 참여해야 하며, 문화예술계는 기업 경영상에 어떤 이익을 줄 것인가를 개발하고 이를 기업에 이해시켜야 할 것이다. 이런 가운데 문화와 기업이 수직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로 이루어질 때 진정한 의미의 기업메세나는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경모 수원문화재단 본부장예술학 박사

[문화카페] 우리 전통팽이로 흥겨운 가족문화를!

일본의 어린이 관련 학회에 초청된 적이 있었다. 학술대회 종료 후 일본학자에게 일본 전통문화 박물관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나고야에 있는 조그만 팽이박물관을 안내했다. 여러 나라의 팽이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일본의 팽이는 손톱만한 것에서부터 아기 머리만한 크기, 그리고 장식품으로 써야 될 것 같은 예쁜 색상과 다양한 디자인의 팽이들이 있었다. 아동학 학자로서 우리나라 어린이 전통놀이를 세계 무대에 내놓으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그 순간 졌다. 팽이에 한해서는 일본에 졌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문득 내 자신에게 팽이를 개발 안했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너는 우리 전통 팽이 한 가지라도 잘 돌릴 수는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도무지 전통팽이를 제대로 돌려본 경험 없었다. 국립박물관 마당에 으레 놓여있는 민속놀이 3종 세트인 팽이, 굴렁쇠, 투호를 한 번 씩 시도해 보곤 했었지만, 팽이란 놈 돌리기는 늘 실패였다. 초라한 듯도 하고 종류도 별반 없고 현대화되지도 못한 것이지만 우리 것이니 사랑해주어야지하는 마음으로 어느 날 팽이 돌리고 치는 것을 한참 해보았다. 아! 그런데 이 팽이 돌리는 것이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손바닥으로 잡아 일단 돌려놓고 채로 쳐야하는데 있는 힘껏 돌리면 엉뚱한 방향으로 튕겨져 나가 벽에 부딪치고, 살살 돌려야 되나 해서 살살 돌려보면 피죽도 못 먹은 듯 한 바퀴도 돌지 못하고 누워버린다. 무조건 크고 무거운 팽이가 무조건 잘 도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너무 작고 가벼워도 팽이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과학원리 느끼게 하는 창조적 놀잇감 한국인의 의무감 비슷한 마음으로 치기 시작했는데 땀이 줄줄 나는데도 팽이치기는 계속 이리저리 궁리를 하며 다양한 방법을 써보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원리가 금방 터득이 되는 것이었다. 늦둥이 아들하고 이리저리 책도 찾아보고 인터넷도 뒤져보니 팽이가 스마트폰, 잠수함, 비행기, 인공위성, 미사일 그리고 로봇 등 최첨단 과학 기계에 들어가 나침반 역할도 하고 균형을 잡는 일도 하는 것을 알았다. 팽이는 지구의 자전 공전, 원심력, 관성의 법칙 등의 물리과학 원리를 몸으로 느끼게 하는 놀잇감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팽이는 나무로 깎아 만든 일명 말팽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이 삐죽하여 양쪽으로 다 돌아가는 장구팽이, 주사위처럼 썼던 숫자팽이, 숯불을 넣어 돌리는 화로팽이, 바가지나 질그릇 깨진 조각으로 만든 바가지팽이와 사금파리 팽이, 도토리팽이, 나무껍질팽이, 학자가 될지 부자가 될지 전문기술자가 될지를 예측해보는 문자팽이 등 그 소재와 활용의 다양성은 끝이 없는 정도이다. 또한 우리 전통팽이는 나무나 바가지를 이리저리 깍고 다듬어가며 돌려보고 다시 다듬으며 과학적이고 예술적인 과정을 거쳐 완성해가는 창조적 놀잇감이었다. 낫이나 칼로 나뭇가지를 툭툭 쳐 만든 손맛이 나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팽이들을 깊이 들여다보노라면 그 질박함 속의 기막힌 조형미는 우리 선조들의 예술적 문화적 수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소재와 활용의 다양성 끝이 없을 정도 현대의 신소재인 플라스틱 팽이들은 자연친화적이지 못하다. 또한 장식성에 치중한 팽이는 예쁘긴 하지만 몸과 마음의 흥을 마음껏 발산하는 놀이 소재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어떻게 하면 힘 안들이고 자동으로 돌릴까를 고민해서 만든 자동화된 팽이는 놀면서 터득할 수 있는 많은 지혜와 지식을 가로막는다. 집 앞의 돌맹이, 공원의 나무껍질, 당근과 오이도 모두 창의와 과학적 사고를 끌어내는 돈 안드는 좋은 팽이소재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재미있고 과학성예술성창의성이 녹아 있는 놀잇감인 던지기팽이, 치기팽이 등 우리 전통팽이로 유익한 가족 놀이 문화를 누려보자. 문미옥 아해박물관장서울여대 아동학과 교수

[문화카페] 나쁜 며느리에 대한 단상

탤런트 전원주 씨의 감히 내 아들을 빼앗은 나쁜 며느리라는 용감한 발언이 인터넷을 들끓게 하고 있다. 그간 각별한 아들사랑을 곧잘 드러내 온 전씨인지라 그리 놀라울 것도 없지만 최근 TV의 여러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며느리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여과 없이 화끈하게 표출하여 네티즌의 공분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전원주씨의 경우 고부갈등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에서 결혼 후 아들을 뺏겼다는 생각이 백번 천 번 든다 아들은 내 전체의 기둥이고 내 생명이고 내 마음의 전체였다고 했고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같은 한 남자를 반씩 나눠 갖는 것이다. 며느리가 지나치게 색을 쓰면 안된다 가끔 아들 집에 전화 안하고 몰래 간다. 내 아들 집인데 뭐 어떠냐 라고 했다. 특히 아침방송에서는 둘째 며느리를 앞에 앉혀놓고 너와의 결혼은 혼전임신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허락한 거다 등의 말을 퍼부어 결국 며느리가 눈물을 흘리게 했다고 한다. 이에 전씨를 비난하는 네티즌들의 글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장성한 아들에 대한 과도한 집착 그런데 전원주씨가 자랑스러워한 잘난 아들들이 백수인데다 손자들은 초등학교부터 유학 보냈고, 이들의 생활비와 유학비 등을 그가 대고 있다는 네티즌 수사대의 글이 올라가며 양상이 바뀌었다. 시어머니 돈으로 사는 주제에 조기 유학 등 할 것 다하는(?) 며느리에 대한 비난을 제기하는 측과 한편으로는 돈 좀 대준다고 그런 모멸감을 줄 수 있느냐는 며느리 옹호론, 아직도 부모로부터 자립 못하는 아들과 낭비하는 며느리, 경제적 도움을 기화로 할 말 못 할 말 다 하는 시어머니 모두 잘한 것이 없다는 일종의 양비론 아니 삼비론이 제기된 것인데 전원주 씨를 비난하는 쪽이 수적으로 훨씬 많다.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우리에게 있어 절제를 요구받지 않는 일이기는 하다. 튀는 아들사랑과 아들자랑은 일종의 애교로 여기곤 했던 것이다. 이미 결혼한 아들과의 애정의 끈을 놓지 못하는 어머니와 이에 질색하는 며느리의 관계를 그린 영화 올가미가 우리나라에서는 히트했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내용이라 수출할 수 없었다는 후문이 떠올려진다. 그러나 장성한 아들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아들을 자신의 부속품처럼 보고 끝없이 간섭하거나 며느리를 인격적 존재로 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아들과 자신을 분리해 보지 못하기 때문에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같은 한 남자를 반씩 나눠 갖는 것(결혼 이후) 나 혼자 외톨이가 되었다 라는 황당한 말을 하는 것이고, 내 아들 집인데 왜 전화하고 가느냐는 등 무례한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이다. 며느리를 하나의 인격체로 본다면 감히 내 아들을 빼앗은 주제에 인간대접을 받으려고 하느냐는 식의 천박한 인식과 행동은 없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추석 연휴에 서울의 한 특급 호텔에서는 여고(女高) 패키지 상품을 기획했다. 여고 패키지란 추석 때 고생한 부인을 위로하기 위한 기획 상품 여보 고마워 패키지의 줄임말이란다. 1박에 조식까지 주는 특급 호텔의 숙박비치곤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되어 있다. 며느리를 인격적 존재로 대하지 않아 이번 추석에도 이 땅의 많은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의 지극한 아들사랑에 대비되는 언어폭력과 육체적 피로 속에 고행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여고 패키지야말로 부인 고생시킨 남편들에게 알량한 속죄의 기회를 주는 면죄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여고 패키지는 여성들의 희생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공감대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예라 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개선의 필요성에는 다들 공감하지만 작은 변화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현실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김상엽 건국대 연구교수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문화카페] 김기덕 정신에 대하여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거머쥔 김기덕 감독은 기인으로 알려져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보면 그는 웃통을 벗고 얼음 위에 가부좌를 튼채 참선을 하고 발을 뻗어 태권도 동작을 보여주는가 하면 팔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안고 허리엔 동아줄을 매서 맷돌을 끌고 산 정상을 오르는 괴이함을 보여준다. 이런 모습은 영화속에서만 아니라 평소 그의 삶에서 나온다. 자전적 다큐멘터리 아리랑을 보면 그는 외딴 산속에서 혼자 살고 있다. 혼자 밥 지어먹으면서 외로움에 대해 솔직하게 고민을 토로한다. 그는 열다섯살부터 공장을 다니면서 먹고 살아야했기 때문에 학력에 대한 열등의식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영화가 어쩌면 나쁜 남자인지도 모른다. 영화속 주인공은 부자집 여자를 납치해 몸을 팔게 시킨다. 학력과 계층의 열등의식은 이처럼 뒤틀린 심사로 복수하는 영화 속 인물로 기괴하게 탄생한 것이 아닐까. 김기덕은 한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한국은 지옥과도 같은 곳이다. 가난한 집안사정은 그의 탓이 아니지만 운명이었고 그는 운명과 맞서 싸우는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마음속에 한이 많이 맺혔고 주변의 자신과 같은 처지의 한많은 사람들 이야기를 유심히 관찰할 수 있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자신이거나 아니면 동병상련 버려진 인간들. 아마 김기덕은 대한민국 감독들 가운데 가장 비천한 인간들을 일관되게 그려온 유일한 감독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의 영화가 국제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도 될 것이다. 한 맺힌 질곡의 삶을 극복해온 김기덕 그는 한국의 평단, 산업계 모두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아직 스타가 되기도 전에 실제상황이란 영화 시사회때 김기덕은 언론에 대고 마음으로 영화를 봐달라고 호소했다. 참 건방진 말이라고 속으로 느끼기도 했다. 그가 국제적 스타가 된 후 그는 어느 공개석상에서 언론에 대고 앞으로 국내에서 자기 영화를 개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것 역시 들으면서 자기가 스타면 스타지 한국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나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알만한 사람들은 김기덕이 왜 그런 말을 해대는지 알고 있었고 이제는 누구도 그 사실을 분명히 안다. 그동안 김기덕의 투박한 영화를 따뜻하게 격려해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대다수 극장이 그의 영화를 많은 스크린에서 오래 상영해주지 않았다. 한국의 언론과 영화계는 김기덕을 버렸고 김기덕 입장에서 한국은 지옥이었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빈집으로 감독상을 수상했을 때 그는 눈을 그려넣은 손바닥을 펼쳐보이면서 마음의 눈으로 영화를 봐달라고 말했다. 베니스에 모인 외국사람들은 너무 감동적이라며 박수를 쳐댔다. 이 말은 이미 한국에서 했던 말이지만 이렇게 반응이 달랐다. 올해 베니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정신, 요즘 한국에 필요한건 아닌지 그는 서구인들이 잘 알지도 못할 아리랑을 불러제꼈다. 감동의 박수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한국인들은 김기덕의 모든 말과 행동, 영화를 철저히 무시하지만 서구인들은 마치 자신들의 이야기인양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런 소중한 존재 김기덕을 영웅으로 떠받든다. 체코의 칼로비바리 영화제에선 김기덕 전작을 보여주는 회고전을 한바도 있다. 김기덕에겐 어떤 정신이 있다. 그가 부르는 민족의 노래 아리랑처럼 한 맺힌 심사를 풀어헤치고 질곡의 삶을 극복해나가는 의지 같은 것 말이다. 김기덕 정신, 투박한 자기 것을 소중해하고 투지로 밀고 나가는 정신, 그게 새삼스레 요즘 한국에 필요한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정재형 동국대교수영화평론가

[문화카페] 청년미술의 딜레마

한국 현대미술은 제도권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젊은 미술가들의 반체제적 저항과 집단적 발언에 의해 기술되어 왔다. 1950년대 후반 일제잔재의 청산과 반국전이라는 기치로 출발한 앵포르멜운동과 이에 대응하여 196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모노크롬회화, 아방가르드라는 가치개념으로 60년대 말과 70년대를 장식한 실험주의적 개념미술, 그리고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각성으로 출발한 80년대의 반모더니즘적 참여미술과 8, 90년대를 뒤흔든 포스트모더니즘 열풍이 그 방증일 것이다. 이들은 작금의 문화구조 속에서 미술의 제도화 현상을 비판하고, 나아가 미술을 사회적정치적 저항에 개입시킴으로써 사회 속에서 미술의 위상을 새롭게 정초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아방가르드적 열정과 감각은 있었지만, 자신이 거처하고 있었던 구체적 사회현실의 정치문화적 의미와 자신의 작업을 연계시켜 조망하기에는 인식적 성숙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청년작가들이 서구 전위미술의 표피적 현상의 영향 하에 있었던 것과도 연관이 되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제도권 미술에 부화뇌동하면서 선배들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가는 데에서 한계를 노정하기도 한다. 예술 상업화에 매몰된 젊은 작가들 근자에 눈에 띄는 젊은 작가들은 심오한 자기반성이나 성찰의 부재 속에서 작가 스스로의 상품화 전략과 국내외 화랑의 프로모션을 통해 부상한 사람들이 많다. 전략화된 키치, 표피적 참여미술, 대상의 나열로서의 사진, 비소통적 개념주의, 전략적 지역성 혹은 국제성의 혼성과 신감각주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추진하는 전술이자 주목받기 위한 전략이다. 특히 키치적 컬트적 청년미술에서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디지털매체의 매력 강조, 사진, 조각, 회화 등의 혼성 및 전시 연출력은 지역성과 국제성의 접합을 중시하는 동시대미술의 광범위한 시스템 속에서 쉽게 어필할 수 있는 작가적 역량의 지표로 인정된다. 우리는 2000년대라는 특유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예술의 문화적사회적 콘텍스트를 문제 삼거나 가치 있는 담론을 생산해내려고 하기 보다는 예술의 상업화에 따른 평준하향화의 시스템에 영합하여 영혼을 팔아먹는 21세기형 파우스트는 아닌가 반성해 볼 때다. 오늘날 많은 수의 젊은 작가들은 현대미술에 대한, 특히 모더니즘의 언어와 제도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회의와 미술판에 대한 대안 없는 냉소, 그리고 전위미술의 생산적 가치와 텍스트성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자위적이고 비생산적인 예술놀음에 빠져있다. 속물인자의 출현으로 예술의 보편적 진리가 희망의 기대치를 가질 수 없는 미증유의 양상으로 파편화되고 있다. 사회 안 미술 역할 냉정히 조망해야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제는 사회 안에서 미술의 역할을 냉정하게 조망해야 하는 발상의 전환과 실천적 자기성찰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한다. 바야흐로 한국의 청년미술은 한국사회라고 하는 시공간적 환경과 맥락, 그리고 그 항상성 속에서 드러나는 동일성과 차이, 속도와 균형, 감동과 분열의 양상을 찾아내고 반성적 도약을 해야 할 시기다. 수원문화재단에서는 젊은 신진예술가의 작업의욕을 고취하고 수원지역 작가의 창작역량을 강화하고자 2012년 신진예술가 지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신진예술가와 아트코디네이터는 창작 작업상의 동조, 협업을 통해 예술적 역량을 강화하고, 내외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기대하면서 가시적인 결과물 위주의 창작활동에서 벗어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예술적 가치와 진정성의 패러다임을 제시하기를 기대해 본다. 이경모 수원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미술평론가

[문화카페]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그래서 진짜야? 가짜야? 우리는 이러한 물음을 쉽게 한다. 미술작품을 진짜, 가짜로 나누어 보는 데에 익숙하고 간단히 두 개로 나누어야 간결하여 이해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음과 양으로, 선과 악으로 명쾌하게 구분될 수 없듯이 진위의 문제 역시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전통시대 곧 전근대시기에는 고미술품 거래가 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화의 진위문제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감정학이 발달한 중국에서는 위작도 훌륭하면 대략 ⅓의 값을 쳐주기도 하고 일본인들은 위작임을 알면서 감상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진위에 대단히 민감하여 위작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감정학은 발달하지 않았지만 진짜와 가짜에는 민감한 기묘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진짜라면 오직 하나 만이 있어야 된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의 미술시장에서 판화가 제값을 받지 못하는 원인이 이처럼 진짜와 가짜에 민감한 특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우리 옛 그림 가운데 여러 개의 작품으로 제작되는 경우를 계회도(契會圖)와 초상화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계(契)는 요즘처럼 서민들이 치부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일종의 적금과도 같은 것이 아니고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끼리 우애를 돈독히 하기 위한 모임이거나 같은 해에 태어난 이들의 친목을 위한 모임일 경우가 많다. 결코 간단하지 않은 진위 구분 대개 매년 봄과 가을에 두 차례 정도의 모임을 갖는데 화가들도 참석해서 모임의 기록화를 제작하였다. 계회도는 계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수효대로 그려 참석한 사람들이 각기 나누어 가졌고 각 가문은 영예로이 보관하였기에, 같은 그림이 여러 개이고 그 그림들은 모두 당연히 진짜다. 계회도는 진품이 여러 장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초상화의 제작은 국가가 해당 인물의 인품과 덕망을 기리거나 국가에의 기여를 표창하기 위하여 또는 초상화 주인공의 후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후손들에 의하여 제작되는 초상화는 대개 형제의 수효만큼 제작되곤 하여, 큰집과 작은 집에 초상이 여러 점 있게 된다. 이럴 경우도 물론 모두 진짜이다. 10여년 전에 평양 ○○미술관의 진열장에 있었던 작품이라거나 인민무력부 ○○○의 보증서가 첨부된 물건 등 믿거나 말거나 식의 유래를 가진 물건들이 대량으로 들어온 적이 있었다. 사실 거창한 유래를 내세울수록 대개 가짜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대개라 한 것은 그 가운데 진품이 있을지 모르지만 필자는 아직 그런 물건들 속에서 진품을 보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북한과 중국은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이라는 원칙 아래에 작품을 만들고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그림에 반영될 경우에는 추상이나 상징을 배제한, 인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실적 그림으로 그려지곤 한다. 평양 ○○미술관의 진열장에 있었던 물건을 가져왔다고 하는 것은 대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정교한 솜씨로 진작을 똑같이 모사한 그림을 가져온 경우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냥 파는 물건인데 똑같아 보이니 이 물건을 사와서 진짜를 가져온 양 사기치며 장사하려는 사람들이 잘못이고 이에 속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제대로 된 안목 갖기 어려운 일 제대로 된 안목을 가지려면 아마도 중국 당나라 때 초서의 대가인 손과정(孫過庭)이 서보(書譜)에서 말한 인서구로(人書俱老), 즉 사람과 글씨가 모두 늙는 때에 이를 것이다. 그만큼 고미술품에 대한 안목을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김상엽 건국대 연구교수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문화카페] 과연 고흐는 ‘귀’를 잘랐을까?

1888년 12월 23일, 빈센트 반 고흐는 돌연 자해를 한다. 왼쪽 귀에 면도칼을 댄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 두 점의 자화상을 그린다. 한 점은 붉은색과 주황색 바탕에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고, 다른 한 점은 초록색 바탕에 일본 우키요에 판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두 점 모두 귀를 중심으로 머리에 흰 붕대를 친친 감았다. 귀를 자해한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화가 폴 고갱과 다투고 난 뒤 홧김에 잘랐다거나 자주 드나들었던 술집의 창녀 때문에 그랬다거나, 화가 공동체 건설의 좌절이 원인이었다는 등 설이 분분하다. 이중 세 번째 설은 일본과 관련된 것이어서 흥미롭다. 자신을 일본 수도승으로 묘사할 만큼 일본제 폐인이었던 고흐는, 이상향인 일본 같은 남프랑스의 자연 속에서 화가 공동체를 만들고자 한다. 고갱을 불러들일 정도로 이 프로젝트에 열정적이었지만, 고갱과의 불화로 일이 뜻대로 성사되지 않는다. 그로 인한 좌절감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이 귀 자해 사건의 불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흐의 팬이라면 한번쯤 의문을 가질 법하다.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고흐가 정말 귀를 잘랐을까? 화가들 기행, 극적일수록 신비감 크나 미리 얘기하자면 고흐는 귀를 자르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 고흐가 귀를 자르지 않았다니?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도 있는데, 무슨 망발이냐며 따질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는 분명 틀린 지적은 아니지만 귀를 자른 자화상 운운하는 것은 자칫 그릇된 이해를 낳을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보자. 필자가 고흐가 귀를 자르지 않았다고 한 것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바와 달리, 고흐가 왼쪽 귀 전체를 자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단지 귀의 일부, 즉 귀걸이를 하는 귓불만 잘랐을 뿐이다. 귓불을 자른 후에 그린 두 점의 자화상을 보면 붕대를 감은 머리의 귀 부분이 약간 두툼한데, 이는 비록 귓불이 없어졌을지언정 귀의 나머지 부분은 건재함을 알려준다. 고흐는 이 사건 후 자화상을 그리되 왼쪽 귀가 안 보이는 오른쪽 모습을 그렸다. 그렇다면 왜 귀를 자른 자화상이라고 할까? 먼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 작품명이 후대에 붙인 것임을 명심하고 보자. 여기서, 귓불을 잘랐다는 정보를 바탕으로 작품명을 재구성하면 귓불을 자른 자화상이 된다. 그런데 작품명이 이렇게 되면 비극적 상황이 주는 극적인 맛이 떨어진다. 미치광이 화가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심리는 그만 거품 빠진 맥주 꼴이 된다. 뭐야, 겨우 귓불만 잘랐다고,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호들갑이야?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혹시 사람들의 기대심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문제의 자화상 제목을 한사코 귀를 자른 자화상이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릇된 정보는 바른 이해 가로막아 화가들의 기행과 관련된 신화도, 결국 당사자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감상자를 위한 것이어서, 기행이 극적일수록 작품에는 신비감이 더해진다.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흐의 불행한 개인사는 끔찍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과 열정은 후세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고흐한테 귓불이 아닌, 귀를 자른 신화가 필요한 이유는 감동의 극대화 전략에서도 찾아진다. 일반인에게 화가는 특별한 존재다. 그래서 미치광이 화가니 천재화가니 하는 수식어를 붙여서, 갖가지 기행과 더불어 작품을 감상한다. 화가에 대한 편견과 그릇된 정보는 작품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로막을 수 있다. 화가는 분명 남다른 눈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때로는 부정확한 단어와 과한 이미지 메이킹이 진실을 오독하게 만든다. 정민영 출판사 아트북스 대표

[문화카페] 도시에서 마을로 간 예술가

오늘날 도시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의 의미를 넘어서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 주변의 일상이 어떠한지를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입고, 먹고, 잠자는 인간 생존의 기본 욕구는 물론 우리를 둘러싼 관계망이 도시의 원리로 짜여지고 작동되어 짐을 눈치 챌 수 있다. 도시의 원리를 한 두 마디로 규명하기란 쉽지 않겠지만, 모든 것을 산산이 쪼개고 나눠 놓고는 이를 다시 애써 이어 맞추는 일인 듯싶다. 애당초 그렇게까지 쪼개고 나누지 않았던들, 힘들게 이어 맞추려 하지 않아도 될 법한데, 굳이 그리함을 보면 무슨 깊은 속내가 있는 것 같다. 어찌됐든 그리해야 개발과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며 호기롭게 외치는 이들도 있지만, 도시의 원리는 이제 그 효용성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음도 사실이다. 도시에 사는 예술가들이 마을로 갔다. 그렇다고 우리네 마을이 새로운 신천지일 수 있다고 단박에 얘기할 순 없겠다. 그것은 지금의 우리네 마을에서도 도시의 원리가 만만치 않은 작동 기재로 움직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고, 예술가들 또한 거기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마을로 번지는 도시의 원리는 그 규모와 속도가 심상치 않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엔 아직도 도시와는 다른 기억의 흔적들이 꽤 남아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복고적 정서에 기대는 무기력증이나 곡절 있는 특이 취향 등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런 시각은 숨을 헐떡이며 어렵사리 연명하는 도시의 오래되고 낡은 습성을 벗어나지 못한 탓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마을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 곳에서 쪼개지고 나눠지지 않은 그 자체로써 온전하게 이어진 삶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비록 크고 빠르진 않지만, 자급과 순환, 공생이라는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인 삶의 역동성을 그려내고 있다. 그럴진데 이제 와서 마을이 도시의 진부함을 닮으려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문화예술로 마을 만들기 작업 이렇듯 우리가 그려낼 마을이란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일과 놀이 등이 쪼개지고 나눠지지 않은 통합의 마을이자, 진보하는 삶의 가치를 지지하는 마을이다. 거기서 문화와 예술 역시 삶과 일상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그 무엇이 아니라 한 몸으로 이어져 있음은 물론이요, 마을의 상상력의 전위가 된다. 그러나 여전히 문화예술에 대한 갇힌 시선의 장애는 도시에서 마을로 간 예술가들에겐 넘기 힘든 과제가 되고 있음도 숨길 수 없다. 그런 시선의 모습은 여러 형태로 보여진다. 우선은 흔히들 예술과 마을의 짝 맺음을 어색해 하며, 서로를 경원하고 낯설어 하곤 한다. 공동체의 삶일상 향해 열려 있어야 그런가 하면 그저 서로를 치장시켜주는 분장사인 양 하거나, 마치 문화예술이 무슨 전지전능한 마이더스의 손이라도 되듯이 단기필마로 마을의 모든 것을 안으라 한다. 문화예술로 마을 만들기란 닫힌 문화예술로는 도달할 수 없는 문화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탐색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 곳에서 문화예술은 따로 나홀로가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삶과 일상을 향해 항상 열려 있어야 하며, 마을 공동체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 스펙트럼을 담아서 들어내는 총화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그것은 형해화된 문화예술도 아니지만, 문화예술의 도구화를 부르는 것은 더욱 아니다. 어찌 보면 그 모든 것에 열리고, 그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음이 문화예술의 힘이기도 하다. 박명학 예술과마을 네트워크 상임이사

[문화카페] 삼국시대 당성의 수수께끼

우리나라의 곳곳에는 고대 산성이 많이 남아 있다. 경기도 일대의 주요한 교통요충에는 반드시 크고 작은 산성이 있다. 남양에서 서해 바다로 가다 보면 구봉산이 있고 그 산꼭대기에 산성이 길게 둘러져 있다. 바로 당성(唐城)이라고 불리는 삼국시대의 성이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경기지역에서 가장 큰 성으로 학술적으로 대단히 중요해 오래전에 국가사적 217호로 정해져 보호되고 있다. 당성은 고대의 유명한 당항성(黨項城)에 비정되기도 하는데 고대 삼국의 세력이 교차되는 지점이며 황해교역의 중요한 거점으로 생각되는 곳이다. 산성의 꼭대기에 올라서면 망해루터가 남아 있고 이 터 앞에서 내려다보는 서해안의 풍광은 장대한 파노라마를 이룬다. 이 성이 현대에 던지는 의미는 아마도 황해문화교류 복원의 거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황해는 남쪽으로 동지나해로 연결되기는 하지만 동아시아의 지중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황해가 동아시아사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 교류에 미친 영향은 지대할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당성은 고대로부터 이 황해연안 교류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황해문화교류 거점 추정 왜냐하면, 중국의 산동과 마주하여 산동에서 오는 교통의 종착이 될 뿐 아니라 중국으로 가는 출발점이기도 했던 것이다. 신라 고승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로 가기 위해 거쳐갔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산동 반도의 끝에는 진시황의 사신들이 동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떠난 자리가 있는데 이 또한 산동이 한반도로 오는 교통거점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유적인 셈이다. 안산 지역의 설화에 고려의 장수가 서해에서 풍랑에 밀려 도착한 곳이 바로 시화쪽이라고 전하는 것을 봐도 산동과 당성 지역 사이에 자연적인 해양루트가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하간에 시화호 지역에는 중국과의 정치나 군사 그리고 교역 등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어 당성은 이러한 교류의 거점으로서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대부도의 육곡고분에서는 청동제 중국인장이 나오는데 이것은 당시 교역할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고고학적인 정황이나 기록으로 볼 때 당성은 고대 실크로드의 한반도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신라 구법승들이 산동을 통해서 산서 서안지역으로 가는 것으로 보면 거꾸로 중국 내의 실크로드 문화는 산서지역에서 산동으로 이르게 되고 다시 황해를 건너게 되는데 바로 당성이 도착지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오늘날에는 평택항이 대중국 교역을 담당하고 있지만 고대에는 당성 앞의 넓은 갯펄지가 정박이 용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당성은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문화교류사적인 거점유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당성의 역사성 재인식돼야 그동안의 고고학적인 조사에서 당성의 구조나 건물, 그리고 그 변화의 역사들이 확인되기는 했지만 현재 전해지는 그리고 추정되는 많은 내용들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원효나 의상과 관련된 유적이나 교역과 관련된 유물 등이 아직도 확인된 것이 별로 없다. 중국은 과거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서 큰 영향을 미치는 나라이고 우리의 미래전략의 가장 중심에 서 있어야 할 나라인 점에서 당성 역사의 재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바로 경기만과 시화호 일대가 우리 민족사에 어느 정도 중요한 지역이었던가를 일깨워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만일 앞으로 정밀한 발굴조사를 통해서 새로운 자료가 얻어지게 된다면 당성은 중국의 산동과 산서 서안을 연결하고 한반도 내에서는 경주로 연결해 고대의 실크로드의 한반도 관문으로서 그 역사성이 확인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발굴과 함께 잘 보존해 우리 젊은이들이 황해지역의 고대 국제문화흐름을 체험할 수 있고 세계인으로서 꿈을 키울 수 있는 배움터로서 당성이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배기동 전곡선사박물관장 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위원장

[문화카페] 문화 권력

얼마 전 문화 권력 균형화 전략이라는 생경한 제목의 문건에 대한 언론 보도를 접했다. 언론 보도의 주된 관심사는 그 문건이 어느 시점에 어느 곳,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고, 누구에게 보고되어 어떻게 실행되었는지 등 현실 정치적 시시비비를 다투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시선은 그와는 조금 다른 곳에 머물렀다. 아마도 그것은 한동안 잊고 지내던 문화 권력의 의미를 다시금 떠올려 보게 됐기 때문인 듯하다. 어찌 보면 문화와 권력이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기도 하고 조금은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하겠건만, 그 모든 것이 스스럼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모습이 한편으로 의아하기도 하다. 또 우리에게 문화 권력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렇게 칭할 만한 어떤 실체가 우리에게 있기는 한 것인지 등에 대한 상념이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가 누군가 권력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모두 내포한다 할 수 있다. 긍정적으로는 어떤 행위의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면서 그에 따르는 권위와 신뢰를 묵시적으로 담보하고 있기도 하다. 반면 부정적 의미론 제도화된 지배구조를 스스로 엮어낼 수 있는 압도적 영향력으로 인식되면서 권위와 신뢰보단 종속과 억압의 수용을 전제하게 된다. 특히 우리에게 권력이란 근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부와 명예를 일거에 일궈낼 수 있는 성공신화의 척도로 선망과 쟁취의 대상이기도 한 것 또한 사실이다. 다른 나라에 그런 표현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루가 멀다않고 언론을 장식하는 권력형 비리라는 말 속에 권력에 대한 우리의 복잡한 속내가 묻어있는 듯도 싶다. 문화 권력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권력이 그러하다면, 문화 권력이란 물적 토대를 넘어 정서적 기반은 물론 신념과 가치를 아우르는 권위와 지배적 영향력을 일컫는다 할 것이다. 실로 그 파급력을 가늠키 어렵기에 두렵기도 하면서 탐하고 싶은 권력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에게 그만한 문화 권력의 실체가 있기는 한 건가? 그리고 만일 그것이 있다 한다면 균형화니 뭐니 하는 이름으로 정책적 대상화의 입방아에 오르내림이 합당한 것인가? 등등 이런 저런 의문이 꼬리를 물다보면, 혹시 우리에게 문화 권력이란 권력형 문화의 또 다른 모습으로 투영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하긴 모든 분야에 걸쳐 관치행정의 크고 작은 족쇄가 실핏줄처럼 퍼져있는 우리네 현실에서 문화예술계라 해서 그 범주를 벗어나 있다 할 수 없다면, 이는 단순한 혐의로 치부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문화예술의 자율성 따져보는게 우선 문화 권력이란 그 의미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름지기 문화예술의 자율성이 견고한 토양위에서 배태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 권력을 어찌해보려 하기 위해선 먼저 문화예술의 자율성이 어떠한지를 따져보는 것이 일의 순서다. 애초에 있지도 않은 신기루를 쫓으며 부질없는 균형 찾기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이들도 그러 커니와, 문화도 권력도 아닌 환영에 의탁하여 문화와 권력에 기생하려는 이들 또한 딱하긴 마찬가지다. 우리 문화예술계 현장의 형편이 문화 권력 운운하며 이합 집산할 처지가 아님을 그들만 모르는 것 같다. 박명학 예술과마을 네트워크 상임이사

[문화카페] 청와대와 국회 앞 뜰에 풍류산방 한 채씩을

마당에서 유치원 손주녀석이 음료수 빨대로 비누방울 놀이를 하고 있다. 작열하는 햇살을 되받으며 살포시 내려않는 형형색색의 거품방울들은 제법 곱살한 자태들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삶의 주변에는 추락하고 소진하면서 자신의 아름다운 진가를 드러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영롱한 별밤의 유성도 긴 포물선으로 하락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조락(凋落)의 계절 소슬바람을 타고 허공을 비산(飛散)하는 붉은 단풍잎들도 하강의 곡예가 일품이다. 어릴 적 시골 초가집 석양 비낀 툇마루에 앉아 띄엄띄엄 낙하하는 낙수물의 정경도 아름다운 추억 속의 그림이고, 내가 동경하는 소상팔경(瀟湘八景)의 하나인 양자강 동정호의 명사십리에 저녁 노을을 이고 날아 앉는 기러기떼들의 평사낙안(平沙落雁)도 하나 같이 자연물의 낙하에서 오는 아름다움들이다. 그러나 참 이상하게도 예외가 하나 있다. 일월영측(日月盈仄)의 자연의 철리를 거역하는 인간에 대한 조물주의 응징인지, 오직 하나 인간이 추락할 때만은 아름답지 않다. 아니 아름답기는 커녕, 추락(墜落)과 함께 더없이 추루(醜陋)해진다는 것이 우리들의 경험적 진실이다. 요즘 언론매체들이 쏟아내는 눈대목 기사들은 바로 이 같은 경험칙을 증언하는 확실한 물증들이 아닐 수 없다. 검찰청 포토 라인에 서는 추락하는 군상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추루하다. 높이 비상하며 잘 나가던 인사들의 추락일수록 더더욱 그러하다. 추루한 감정에 이어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원래 한 홉짜리 그릇에 불과해서 그런지 그 똑똑하다는 명사들이 그렇게도 간단한 사실을 한 가지 잊고 사는 바람에 그 같은 치욕을 겪다니 참으로 아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추락과 함께 추루해지는 권력자들 그들이 잊고 지낸 그 간단한 사실이란 무엇일까. 백인백색의 답이 있겠지만, 내 소견으로는 마음속에 음풍농월할 정자 하나 마련하는 여유 한 번 가져보지 못한 일이라고 하겠다. 달이 떴는지 졌는지 꽃이 피는지 지는지도 모른 채 주야장천 콱 막힌 그들만의 동굴 속에서 철부지의 선민의식만 즐기고 있었으니, 당연히 용행사장(用行舍藏)의 교훈이나 세상민심을 알 리 없고 초속 230㎞로 공전하는 지구촌 대자연의 섭리인들 알 리가 있겠는가. 자고로 권력병과 부귀병은 고황에 든 병인지라 화타의 의술로도 토끼의 간으로도 치유불능에 백약이 무효이다. 오직 하나 천기누설로 귀띰하건데 부귀공명병의 특효약은 오직 마음밭에 풍류산방 모옥(茅屋) 한 칸 세우는 일이다. 그리고 거문고 한 대 걸어 두고 좋은 고전 읽어가며 마음밭 좀 가는 일이다. 선민의식 버리고 마음의 여유 가져야 옛날 저승사자에 끌려 세 사람이 염라대왕 앞에 불려 갔다. 명부를 대조하니 아직 죽을 때가 안된 사람들을 잘못 데려왔다. 염라대왕은 이들을 다시 인간세상으로 돌려보내며 소원 하나씩 풀어주기로 했다. 한 사람은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은 부귀영화를 원해서 모두 들어주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의 소원은 달랐다. 고관대작이고 부귀영화는 모두 부질없으니 자기는 풍광 좋은 곳에 정자 하나 지어서 만권서적 쌓아두고 음풍농월하고 싶다고 했다. 염라대왕은 화를 벌컥 냈다. 그건 내가 원하는 바지만 나도 못하는 일이라고! 서울 지방에 전승되는 노래 삼설기(三說記)의 줄거리다. 아무튼 요즘 같아서는 국민의 성금으로 청와대나 국회 앞 뜰에 풍류산방 정자 하나 지어주고 싶은 심정이 솔직한 민초들의 속내일게다. 그래서 멋진 시조 한 수 편액으로 달아주고.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草廬) 한 칸 지어내니 반 칸은 청풍이요 반 칸은 명월이라/ 두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문화카페] 흠모하되 넘어서라

화가에게도 사랑하는 화가들이 있다. 물론 이때 사랑의 대상은 존경하는 선배 화가들이다. 그중에는 이미 하늘의 별이 된 화가도 있고, 살아 있는 화가도 있다. 뛰어난 선배 화가는 샘이 깊은 물이다. 쉽게 마르는 법 없이 부단히 영감을 자극한다. 후배 화가는 선배의 색다른 작품세계로 조형의 신천지를 만나고, 그 영향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또 한명의 위대한 화가로 거듭난다. 인체의 왜곡과 생략으로 인간 존재의 심연을 탐구했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 그는 빈센트 반 고흐의 열렬한 팬이었다. 고흐의 그림을 재해석하는 도상학적 테마를 빈번하게 다룰 정도로, 고흐에 대한 경외감이 대단했다. 같은 구상화가로서, 베이컨은 고흐의 그림이 포착한 삶의 리얼리티에 깊이 매혹되었다. 이런 베이컨의 영향을 받은 화가로 데이비드 호크니가 있다. 인체를 그림의 가장 아름다운 주제라고 생각했던 만큼 호크니는 젊은 시절 베이컨 그림에 표현된 벌거벗은 형상에 매료되었다. 3월 24일 이른 시간에 차차춤(1961)은 베이컨 식의 뭉개지고 일그러진 인체 표현기법과 화면구성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조형언어는 없다. 새로운 조형언어는 그림과 그림 사이에서 태어난다. 화가는 창을 통해서 자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선배나 스승의 작품을 통해서 자연을 보기(리오넬로 벤투리) 때문이다. 18세의 베이컨이 입체파의 거장 피카소의 데생을 보고 작업 충동을 느껴, 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화가들은 선배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세상 보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풋내기 시절의 그림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의 스타일이 문신처럼 흔적을 남긴다. 화가는 선배의 작품 통해 세상을 본다 고흐가 평생 흠모한 화가는 장 프랑수아 밀레였다. 밀레처럼 농민의 화가가 되고 싶었던 고흐는 생레미 요양원에서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1850)을 무려 스물한 번이나 따라 그릴 정도로 밀레의 그림과 삶에 매료되었다. 그의 씨뿌리는 사람(1888)은 밀레의 작품을 모사했으면서도 고흐 특유의 꿈틀거리는 듯한 붓질이 살아 있다. 고흐의 이 그림과 밀레의 그림을 비교해보면 한 화가가 어떻게 선배 화가의 그림과 만나서 자기 개성을 찾아가는지, 그 과정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밀레는 우리의 국민화가 박수근의 빛이기도 했다. 박수근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데는 어린 시절에 접한 밀레의 만종의 영향이 컸다.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는 사람들과 시골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낸 박수근의 작품세계는 따라서 자연을 찬미하고 신의 은총을 재발견하고자 한 밀레의 작품세계와 통한다. 또 표현주의적인 화풍으로 강렬한 필력을 구사한 이중섭은 어떤가. 유학시절 별명이 루오였을 만큼 굵고 거친 붓질이 돋보이는 초기 그림들은 야수파 화가 루오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온가족이 강강술래를 하는 듯한 춤추는 가족(1953~54)은 마티스의 춤(1910)과 상당히 닮은, 조형적인 유사성을 띠기도 한다. 비록 이 그림이 이중섭 특유의 원형적인 미의식의 연장선에 있다는 견해가 있긴 하지만 선배 화가 마티스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 영향 극복하며 예술적 독립 성취 새내기 화가는 눈으로 보는 것조차 배운다. 초기에는 선배 화가들이 보았던 것처럼 볼 수밖에 없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말투 흉내 내기를 통해 말하기를 배우는 것처럼. 화가들은 선배 화가의 작품과 세계관을 통해서 조형언어를 배우고 익히며 마침내 조형적인 독립을 성취한다. 이런 과정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보다 영향의 철저한 자기화다. 흠모하되 넘어서야 한다. 선배 화가의 열정에 힘입어 자기 세계를 구축한 화가는 다시 후배 화가들의 뜨거운 빛이 된다. 정민영 출판사 아트북스 대표

[문화카페] 고고학 통해 상상의 즐거움 느껴보길

지난 달에 모나코 국왕인 알베르 3세 대공이 전곡리 구석기유적 발굴현장과 선사박물관을 방문했다. 국가원수가 선사시대 유적을 방문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모나코 국왕이 전곡 선사유적을 방문한 것은 집안의 내력이 있다. 할아버지가 되는 알베르 2세는 실제로 구석기 학자로서 모나코에서 이태리 국경으로 가는 해안에 있는 프린스동굴유적을 발굴하기도 했다. 또한 선사고고학연구를 위해 100년 전에 프랑스 파리에 인류선사연구소를 설립하고 매년 운영비도 지원하고 있다. 이 연구소의 소장이자 세계구석기고고학의 최고 권위인 드 룸레 교수가 적극 권하여 전곡유적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알베르 3세 대공은 고고학자는 아니지만 세계고고학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안내하면서 긴장될 정도였다. 지난 20세기 초에 당시 스웨덴의 황태자인 구스타브 6세가 경주의 고분발굴에 잠깐 참여하여 금관을 수습함으로서 그 무덤의 이름이 서봉총(瑞鳳塚)이 됐다. 우리나라 국가원수로서는 70년대에 경주개발을 위해 경주의 고분인 천마총과 98호분을 발굴하던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몇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전곡리 유적에도 박정희 대통령이 지난 1979년에 발굴단을 위해 금일봉을 하사해 조사단 사무실을 지어 준 적이 있다. 유럽문화의 기초자산 된 고고학 고고학은 부유하고 시간이 많은 사람이 스스로 좋아서 사서 고생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디애나 존스 영화를 봐도 보물이 뭐길래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죽을 고생을 하면서 돌아다니는 것이 영화의 구성이다. 고고학이 원래 보물수집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본다면 돈 많은 귀족의 일이었음에는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고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톰젠이라는 사람은 덴마크 왕실의 박물관장이었지만 결국 수집된 보물을 지키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덴마크의 왕실 뿐 아니라 중세 이후에 유럽의 귀족들은 이러한 골동주의에 빠져들었고 경쟁적으로 세계 각지의 유물이나 희귀한 자연물들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사조는 서구 근대과학의 기초를 만들게 됐다고 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오늘날 유럽문화가 인기를 끄는 기초자산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의 박물관 중에는 왕립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들이 많은데 이러한 박물관에 가면 전 세계 과거의 사람들이 만든 보물들이 가득하다. 오늘날의 고고학은 과거의 골동주의와는 사뭇 다르다. 고고학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을 찾아내는 학문이지만 그 과정에서 유물을 다루게 되고 유물은 물질로 구성돼 있어서 다양한 자연과학적 분석을 필요로 하게 된다. 과거에 대한 호기심은 이러한 과학의 발전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오늘날 고고학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탄소연대측정법을 발견한 리비라는 과학자는 노벨물리학상을 타기도 했다. 창의성 육성에 가장 좋은 학문 고고학은 인문학인 것 같지만 자연과학적인 특성이 강한 학문이다. 고고학은 과거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하지만 물질의 특성을 이해하는 훈련으로서는 최적의 학문이다. 사물을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복합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할 수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고 있는 창의성을 육성하는데 가장 훌륭한 재료가 바로 고고학적인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물 속에 숨어있는 과거문화의 신비는 어린이나 학생들이 쉽게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인의 문화는 결국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고 지나간 시간을 고려하면 변화의 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 상상의 즐거움이 있다. 배기동 전곡선사박물관장 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위원회 위원장

[문화카페] 개인과 공동체

사적 이해와 공동체의 가치가 다르고 충돌하여 서로의 침해가 일어날 때, 우리는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이와 같은 딜레마는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맺음에 있어 가장 현실적이고도 첨예한 대립을 불러오는 요인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이런저런 고민을 하긴 하겠지만 사적 이해에 무게 중심을 놓게됨이 일반적이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함께 사는 가치의 실천과 행동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도 사적 이해와 공동체의 가치를 맞추며 살기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물며 제 몸 하나 챙기며 하루하루를 허겁지겁 지내는 범부들에게 공동체적 가치를 사적 이해에 앞세우길 기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우리의 일상에서 매순간 이항대립의 가치로 다가오는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맺음을 규명하는 일은 어쩌면 우리 삶의 맥락을 규명하는 것과 같다. 개인과 공동체란 동서고금의 수많은 현인과 석학들이 머리를 싸매고 궁리하던 열쇠 말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흔히들 동양은 공동체적 가치에 우선을 두는 반면 서양은 개인 자유 의지의 발현에 방점을 두고 있다고 하나, 그 사유의 진폭을 주의깊게 따라가다 보면 양자 모두 종국엔 개인과 공동체의 짝 맞춤을 위한 방편을 찾고자 함을 알게 된다. 그들의 성과를 빌어 말한다면 개인과 공동체는 서로를 규정하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규범을 엮어내는 사회적 유기체라 할 수 있다. 거기서 개인의 규범이 자유 의지의 무한 확장에 있다면 공동체의 규범은 공동선의 극대화라 할 것이다. 따라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맺음이란 자유 의지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유기적 운동성에 다름 아니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개인과 공동체 자유 의지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개인과 공동체의 유기적 운동성에 어떤 정형화된 틀이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 맥락을 풀어내기 위한 몇몇 원칙은 규명될 수 있겠다. 첫째, 어느 누가 말했듯이 개인이 정당화될 수 없는 공동체란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개인의 자유 의지는 공동선의 구현을 통해 확보, 강화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공동체는 개인의 자유 의지와 공동선의 같음과 다름을 똑같이 존중하여야 하며, 이를 통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공동체란 개인의 자유 의지와 공동선을 규율하는 공동의 규범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칸트는 우리에게 인간 행위의 윤리적 규범으로써 네 의지의 격률(格率)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 하라는 정언명령(定言命令)을 가르쳐 주었다. 정언명령은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맺음에 있어 실용적 영리함이 아닌 행위의 결과에 구애됨이 없이 행위 자체가 선(善)으로써 무조건적 수행이 요구되는 도덕적 명령에 따르도록 요구하고 있다. 조화로운 관계 맺도록 노력해야 오늘 나의 자유 의지와 우리의 공동선은 어디쯤 와 있는가? 물론 이에 답변을 할 수 없다 해서 당장의 삶이 어찌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맺음의 톱니바퀴에 물려있음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비록 당장의 삶이 바뀔 수 없을지언정 나의 자유 의지를 포기할 순 없다. 톱니바퀴 속에 갇혀 있는 삶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공동선마저 내려놓을 순 없다. 박명학 예술과마을 네트워크 상임이사

[문화카페] 어느 얼빠진 공무원

임진년 6월 보훈의 달도 끝자락만 남았다. 통상 언론들도 현충일과 625 추념일만 지나면 한국전쟁 얘기는 종적을 감추기 일쑤다. 세태도 이와 다르지 않아 환갑의 세월을 넘긴 625 비극의 문제는 이제 서서히 역사의 장으로 밀려나는 느낌이다. 하지만 아무리 바쁘고 내 코가 석자일지라도 시간을 조금만 거꾸로 돌려보면 우리는 이내 그게 아님을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 제 잘나서 잘살고 제가 똑똑해서 잘나가는 줄 아는 풍조들이지만, 조금만 역사의 뒤안길을 돌아보면 천만의 말씀이다. 명백히 우리는 꽃다운 나이에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은덕을 입고 있고, 그만큼 역사에 갚아야 할 무거운 빚을 지고 있는 터이다. 마땅히 잊지 말아야 할 시대적 책무가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아무튼 지난 현충일에는 625의 참상을 잊지 말자. 남북통일의 비원을 잊지 말자. 나라의 소중함을 잊지 말자 등 우리 동시대인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5가지 물망오계(勿忘五戒)를 선언하며 물망초 예술제라는 현충행사를 개최했다. 백두대간의 산정 을지전망대에서는 멀리 금강산 일대까지 북한 땅이 한눈에 펼쳐진다. 두고 온 고향땅을 바라보는 통일부 인솔의 연로한 이산가족들의 표정에는 남다른 감회가 뚜렷했다. 행사는 분향과 묵념과 헌다례를 거쳐서 원로 성우 유강진의 전쟁시 낭송으로 이어졌다. 이산가족 모시고 떠난 인솔자 (상략)진실로 오늘 우리는/ 그날 그대들이 흘린 피 값으로 편히 잠들고/ 그대들이 바친 목숨으로 자유로이 노래한다/ 보이느니 강바닥 진흙구덩이 높은 산 낮은 골짜기/ 지뢰 묻힌 휴전선 155마일/ 조국의 소명으로 꽃잎처럼 산화해간/ 가서 여기 한 조각 돌/ 돌 밑에 하얀 백골로 누워/ 저 강산 푸른 하늘 우러러 잠잠히 지켜 오신 영령들이여/ 무슨 말 무슨 노래로 그대들 영혼 위로할까(하략) 비통한 성조로 폐부를 찌르는 낭송의 물결에 객석은 숙연했고, 한 많은 회한의 이산가족들은 군데군데서 주름진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쳐내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이었다. 통일부의 사무관인 인솔자는 돌아갈 시간이 바쁘다며 도중에 이산가족들을 모시고 떠났다. 여름 해는 중천이었고 시간은 오후 4시 10분경이었다. 춘천까지 한 시간 남짓이면 가는 거리인데도 무슨 심술에서인지 경건하게 치러가는 현충행사에 재를 뿌린 것이다. 이런 얼빠진 공무원이 민족의 비원인 통일업무를 담당한다며 이산의 실향민들을 제 손 안의 물건 취급하듯 전횡하고 있으니 실로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경건한 현충행사에 재 뿌린 격 그러고 보니, 개인적으로 나라를 좀먹는 얼간이 공무원을 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몇몇 공무원은 도무지 정의나 양심은 고사하고 불법을 지적해도 모르쇠에 배째라는 식이다. 맹지에 사도를 개설하고도 모르쇠요, 불법건축을 내주고도 배째라 식이요, 기관장이 사실여부를 가려보라고 엄명해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또 주민의 대의기구인 시의회가 공식질의를 해도 내몰라라 천하태평이다. 도대체 최소한의 공직의식은 켜녕 조직의 영(令)도 기강도 서지 않고 행정의 기축(機軸)이 작동 않는 무중력 상태이다. 이런데도 인생을 절망하는 젊은 백수들은 처량하게 오늘도 땡볕에서 날품을 팔아 이들에게 세금으로 월급을 주고 있다. 임진년 현충의 달, 비목의 작사자가 호국영령들의 통한과 계시를 새겨 준엄히 이 글을 써 역사에 남긴다.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문화카페] 예쁜 그림과 6·25전쟁 그림

한국 미술은 왜 예쁘기만 한가? 최근 한 재일 에세이스트의 책을 읽다가 멈칫한 적이 있습니다. 현실 비판적인 그림이 드문 우리 미술의 실상에 주목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술도 인간의 영위인 이상, 인간들의 삶이 고뇌로 가득할 때에는 그 고뇌가 미술에 투영되어야 마땅하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하다. 조선 민족이 살아온 근대는 결코 예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현재도 우리의 삶은 예쁘지 않다. 뒤러, 그뤼네발트, 카라바조, 고야, 렘브란트, 피카소, 고흐. 이 거장들은 예쁜 작품을 그려서 사람들을 위로하려 하지 않았다. 진실이 아무리 추하더라도 철저하게 직시해서 그리려 했다. 그것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거기에서 추가 미로 승화하는 예술적 순간이 생긴다.(서경식,고뇌의 원근법) 저는 이 대목을 곱씹으며 625전쟁 그림을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즉각 떠오르는 그림이 없었습니다. 미술 전공자 중에도 미술사에 관심이 없으면, 우리네 전쟁 그림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625전쟁의 비극을 증언하는 그림이 있긴 합니다만,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처럼 명성이 없는 탓에 존재감이 미미합니다. 그런데 전쟁의 참상을 포착한 우리 그림이 적은 데는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현실 비판적 작품 드문 우리 미술계 우리 화가들은 대부분 사회현실과 밀착된 그림을 그리는데 익숙지 않습니다. 은연중에 그림이란 비루한 현실이 거세된 풍경이나 정물, 인물 등을 그리는 구상화나 가시적인 형상이 없는 추상화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625전쟁만 해도 그렇습니다. 전쟁으로 빚어진 실향과 이산, 파괴와 공포, 폭력과 증오의 상처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삶에 알게 모르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1950년부터 3년 1개월 동안 지속된 참상을 체험했음에도 우리에겐 이렇다 할 전쟁 그림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625 참상 직시한 작품들 가치 빛나 625전쟁 때는 국가 이념에 맞는 그림이 양산된 시기였습니다. 갑작스런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화가들은 종군화가라는 신분으로 전선의 긴박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거나 국군과 북한군 간의 격렬한 전투장면을 박진감 넘치게 그렸습니다. 예술적으로 승화되지 못한, 이 종군 기록화는 반공의식을 고취시키는 선전도구의 일종이었습니다. 그래서 화가들은 전쟁의 비극과 치열하게 대결하지 않고 단순 기록자에 머물고 맙니다. 현실의식이 결여된 탓에 다분히 소재주의적인 시각에서 전쟁에 접근하거나 전쟁과 아랑곳없이 마음의 이상향을 추구하거나 조형적인 실험에 몰두했습니다. 이런 경향은 개선의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국가 권력에 의해 미술이 통제되는 쪽으로 심화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국가 권력이 조직하고 운영한 일명 국전(대한민국미술대전)입니다. 전위적이거나 사회비판적인 그림이 발붙일 수 없었던 국전은 얌전하고 온순한 그림 천국이었습니다. 국가 권력은 미술을 사회적인 현실과는 무관한, 화가의 내면적인 표현세계로 몰아갔습니다. 관람객도 통제된 분위기에서 생산된 예쁘고 착한 그림을 보고 미의식을 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80년대에 나타난 민중미술을 제외하고는 광기의 시대와 정면 대결한 미술작품이 극미한 현실에서, 한국 미술은 왜 예쁘기만 한가?라는 지적은 가슴을 쓰리게 만듭니다. 625전쟁 발발 62주년을 앞두고, 이수억의 폐허의 서울과 구두닦이 소년, 이철의 학살, 전화황의 전쟁의 낙오자, 박성환의 한강대교, 변영원의 반공여혼 같은 전쟁의 비극을 직시한 그림들을 인터넷에 찾아봅니다. 예쁜 그림 일색인 우리 미술 현실에서 그나마 이들 그림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한국 미술은 결코 예쁘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정민영 출판사 아트북스 대표

[문화카페] ‘여백’과 ‘차마’의 문화로 돌아가는 길

돌아가신 은사께서 만년에 당신의 연구실에 당신의 유서와 함께 한자로 개구진(開口塵)이라는 말을 크게 써 붙여 두었다. 입 벌리면 먼지만 들어간다는 뜻이다. 당신 스스로의 금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에게는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널리 한번쯤 생각해야하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요즘같이 온갖 말과 글이 난무하는 시대에 말을 아끼라는 하나의 금언이라고 생각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60년 동안의 세월을 보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상당히 발전한 것 같다. 특히 매번 선거를 치루면서 말의 무서움을 깨닫게 하는 면이 있었다. 정치하는 과정에서 각 집단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정말 끝장난 것이나 끝장날 것처럼 말을 하는 경우도 많고 실제로 작은 폭력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지만 과거 독재에 항거해 투쟁하던 시절에 비하면 정말 평화스러운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촛불집회나 과격한 시가 집회가 있기는 해도 70년대나 80년대 독재의 살벌한 분위기와는 견줄 수 없고 또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다고는 하지만 과거의 억압된 언로(言路)에 견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오늘날 정치인의 과격한 말이나 인터넷 상에서 떠도는 말들 때문에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말들은 여러 가지의 가치관을 동원하여 다양한 이유로 증폭함으로서 우리 사회에 불안한 심리를 만들고 있다. 이제 말은 검증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받아들여지고 회자되기 때문에 말과 글의 무게가 더욱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말 안해도 상대배려 문화가 전통문화 이제는 말에 의한 공포를 과거보다는 훨씬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시대다. 정보화시대에 접어든 현대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체인 말과 글은 일상에서나 인터넷에서 폭증하고 있다. 그런데 정보교류의 양과 속도가 늘어갈수록 말과 글의 절제가 무너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욕설이 방송이나 공인의 공석에서 나오고 비속어가 강렬한 의미의 상징인듯 사용되고 또한 특정집단의 소외를 선동하거나 비하하는 말들이 거침없이 나오고 있다. 이제는 말과 글이 형체 없는 살인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망각하여 가는 듯한 느낌이다. 우리 문화를 압축된 단어로 표현할 때 흔히 등장하는 것이 여백과 염치 그리고 반의일 것이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너그러이 이해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문화가 바로 우리 전통문화인 것이다. 여백은 우리의 전통미술 속에서 잘 살아오고 있었고 지금도 이우환 같은 화백은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아 세계적인 화가가 됐다. 우리시대 전통문화 가치계승 필요 우리가 욕쟁이 할머니라고 부를 때 우리는 친근감이 들지 악하다는 느낌을 갖지는 않는다. 욕쟁이의 욕은 어떤 의미에서는 강한 배려와 사랑의 의미를 갖는다. 염치는 차마할 수 없어서 행동과 말의 여백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 바로 우리 전통사회였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왜 이리 말이 험해지는 사회가 됐을까? 오랫동안 재갈을 물고 있다가 보니 이제 한껏 성깔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인지? 사회적인 경쟁이 심해져서 불안한 심리를 배출하는 카타르시스로서 험한 말을 뱉어 내는 것인지? 하여간에 험한 말들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공격적으로 방어하게 만든다. 이제 행복한 우리 미래를 위해 진정 전통문화의 가치계승이 절실한 시대가 됐다. 배기동 전곡선사박물관장 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위원회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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