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베토벤과 노래방 팡파르

얼마전 필자의 출신고교 개교 40주년 음악회를 위한 합창음악 작곡을 부탁받은 일이 있다. 어려운 일이다. 비전문 합창단이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를 지니면서도 예술적 호소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랜동안 교회 성가대를 지휘해 왔기 때문인지 가장 먼저 개신교회 성가 음악 같은 난해하지 않지만 진지함이 베어있는 멜로디가 떠올랐다.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한 감이 느껴졌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해야 하니 뭔가 씩씩한 구석도 있어야 하고 시종일관 종교적일 수도 없으니 보편적 공감을 이끌 수 있는 한 방이 필요했다. 일단 합창단의 노래가 시작되기 전 전주는 모교의 교가에서 땄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씩씩한 구석은 대학시절부터 무척 좋아하던 베토벤의 발트슈타인 소나타 첫 머리 부분을 선택했다. 자 이제는 한 방, 이것을 어찌할 것인가? 필자의 머리를 오랫동안 맴도는 것은 다름아닌 노래방에서 노래한 뒤 점수와 함께 울리는 빵빠레 빰빠라밤빠 빰빠라바~ 였다. 조금 코믹할 수도 있지만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가? 화음을 조금 클래시컬하게 변형시키고 화성변화의 속도를 늦추니 위엄도 있고 비장함도 느껴지는 괜찮은 한 방의 재료가 됐다. 완성하고 보니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방에서 노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면 노래방 기계의 빵빠레가 머리속에 새겨져 있을까 하는 약간은 씁쓸한 반성을 하게 된다. 필자같이 그리 신통치 않은 음악가는 물론이거니와 대가 작곡가들도 그들의 음악에 자신의 인생관과 정체성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베토벤의 소위 운명교향곡(교향곡 제 5번 c 단조, 작품 67, 1808년 초연)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베토벤을 따르던 안톤 쉰들러라는 이가 곡의 첫 머리 빰빰빰 빠 모티브를 작곡가 자신이 운명이 이와 같이 문을 두드린다라고 말했다고 전해 생겨난 이름이다. 귀머거리가 되어가는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고 결국 예술로 이겨낸다는 자서전적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사실은 베토벤 자신의 정치적 메세지가 담겨진 것일 가능성이 더 많다. 음악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베토벤과 동시대에 파리에서 활동하던 케루비니(Luigi Cherubini)의 프랑스대혁명기인 1894년에 발표된 판테옹에 부치는 찬가(Lhymne du Pantheon)다. 이 곡은 관악합주와 합창을 위한 작품으로 프랑스의 혁명정부가 장려하던 프로파간다 음악이다. 가사의 내용은 혁명을 위해 싸우다 죽은 영웅의 무덤앞에서 동지들이 모여 칼을 들고 맹세하리, 우리도 공화국을 위해 기꺼이 죽겠노라라는 섬뜩한 정치선동이다. 놀라운 것은 교향곡의 그 유명한 도입부 스물 한 마디 정도가 케루비니의 작품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케루비니를 당대 최고의 작곡가라고 칭송하던 베토벤이 이 작품을 몰랐을 리 없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왜 비엔나에서 살던 베토벤이 파리의 케루비니의 이 작품을 인용했는가 하는 것이다. 베토벤은 계몽주의에 심취했으며 공화주의자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한 제정사회였던 비엔나가 웬지 그에게는 심기가 불편한 곳이었을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을 동경하고 자유 평등 형제애의 가치를 신봉하던 베토벤은 숨막히는 신분질서를 고수하던 비엔나에 돌을 던지고 싶었을 것이다. 파리에서 활동하던 케루비니의 작품을 알 리 없는 비엔나의 귀족들은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으면서 이 음악이 자신들에 대한 경고와 조소의 메세지였음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 검열을 피해가면서도 자신의 신념어린 메세지로 한 방을 날린 그의 명석함과 대담함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는 이제 이 작품을 더이상 운명교향곡이라고 부르지 말자. /양승렬 수원오페라단 지휘자

[문화카페] 끝까지 가는 것

지독한 올 여름을 보내고 맞이하는 9월이다. 이 좋은 가을은 또한 전시의 계절이기도 하다. 미술평론을 업으로 하다 보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전시를 알리는 우편물이 아파트 편지함에 가득 쌓이는 편이다. 9월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하루 중 어느 시간을 정해서 매일같이 그 하루치의 우편물들을 찬찬히 살피고 있다. 대개는 전시도록들이다. 그렇게 도록이 쌓이면 순간 납작한 책상은 세상과 만나는 곳이자 세상에 말을 건네는 장소가 된다. 그렇게 쌓인 도록 중에서 가보아야 할 전시를 챙기고 보관해야 할 자료를 분류하고 그 외의 것들은 아쉽지만 버린다. 많은 시간을 이렇게 도록을 보고 봐야할 전시를 결정하고 그런 다음 특정한 날을 정해서 전시장을 순례하면서 보낸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무수한 작가를 만났고 만나고 있다. 그것도 깊은 인연이라 나는 그 소중한 만남을 망막과 기억에 깊숙이 안고 있다. 얼굴은 흐릿해져도, 이름은 가물 해도 한 번 본 그 작품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그 작품들을 보러 다니면서 그들이 지닌 미술에의 욕망을 만나고 미술에 대한 생각의 편린을 접했으며 그것과 함께 살고 있는 그들의 육신을 보았다. 그런 삶을 경험했다. 작가들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다. 다만 그들은 타고난 미술에의 재능이나 열정을 가능한 한 지속해서 자기 생애의 명분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이다. 우리들 대부분이 외부의 목소리에 끌려 산다면 예술가들은 자기 내부의 목소리와 요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이들이다. 작가들은 좋은 작품 혹은 예술이란 화두 하나를 붙들고 그것을 통해 인정받고자, 삶의 보상을 받고자 노력하는 이들이다. 대부분 그 길에 가닿지 못하고 죽거나 재능이 미치지 못함에 절망하거나 혹은 위선적인 작업으로 덮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일지언정 그 욕망만큼은 참으로 질기고 강하다. 도대체 왜 그들은 그렇게 작업을 하고자 할까? 예술 역시 삶처럼 모호하고 난감한 대상이다. 작업을 한다는 것 또한 난해한 일에 다름 아니다. 좋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 전정한 작가로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운이 좋게도 나는 좋은 작가들을 비교적 많이 만난 편이다. 좋은 작가에 대한 내 개인적인 기준에 입각해서 말이다. 그들은 나이를 떠나 내게 스승이 된 존재들이다.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놀라운 눈을 일러주었는가 하면 미술에 대한 확장된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었고 자기 삶의 시간들을 온전히 투여해서 일에 몰두하는 집요함, 그리고 가난과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홀로 가는 무서운 마음들을 심어주었다. 세상의 변방에서, 경계에서 외롭게 작업에만 몰두하는 그들의 시린 몸을 새삼 떠올려 본다. 언젠가 한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갔었다. 아파트 지하에 마련된 좁고 긴 방이었는데 주변은 온통 깜깜했다. 내부에는 작은 책상 하나. 이젤, 캔버스 몇 개와 흩어진 그림도구, 시집 몇 권, 조그만 카세트라디오가 전부였다. 작업실치고는 지나치게 깨끗하고 적조하며 소박했다. 이토록 단출한 살림과 햇빛 한 뼘 들지 않는 곳에서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는 그 작가의 이젤에는 작은 포스트 잇 하나가 반창고처럼 붙어있었다. 나는 우연히 그 작은 종이에 적힌 문구를 보고 잠시 동안 망연했다. 지상으로 나와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자꾸만 그 문구들이 떠올랐다. 십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삶은 단순하고 명료해야 한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 역시 그렇게 단순한 삶에서 가능할 것이다. 어떠한 보상도, 과도한 욕망도 지우고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매진하며 끝까지 가겠다는 것이 좋은 작가들의 공통된 태도였다. 그것을 선연하게 보여주었던 그 포스트 잇에 작은 글자로 쓰여진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림을 사랑할 것. 그림 앞에 오래 앉아 있을 것 그 말 이 외에 다른 어떤 말이 필요할까? 이 계절에 나 또한 그렇게 내가 사랑하는 일에 몰입해 끝까지 가고 싶다. 저물고 싶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교수 미술평론가

[문화카페] 심은하를 아시나요

이번 봄 학기 수업 때의 일이다. 우리나라 여자 스타들의 사진이미지를 학생들에게 보여줬다. 미, 곧 아름다움에 대한 평가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우리나라 여자 연예인들을 예로 든 것이다. 인기 여배우의 변천을 통해 본 미감의 변화라고 하면 적절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다. 50~60년대 최은희김지미, 60년대 말 문희윤정희남정임, 70~80년대의 안인숙정윤희장미희유지인, 90년대 심은하, 2000년대의 이효리 등으로 이어지는 여자 스타의 이미지를 나열했지만 어쩐지 반응이 잘 오지 않는 느낌이었다. 학생들의 눈빛은 이효리를 제외하면 삼국시대 불상이나 조선시대 산수화를 볼 때의 반응과 비슷하게 시큰둥했다. 내가 다른 배우들은 차치하고 심은하를 모르냐?고 물었더니 학생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구동성으로 심은하가 누구냐고 반문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깜짝 놀랐다. 심은하를 모르다니!하는 것은 내 생각이었고 학생들은 심은하가 누구?였다. 심은하를 모른다면 마지막 승부 청순미의 대명사 다슬이는 물론, 8월의 크리스마스의 순수하고 생기 넘친 다림, 청춘의 덫에서 불꽃같은 눈빛으로 뿜어낸 명대사 당신, 부숴버릴 거야!를 모른다는 말이다. 심은하를 모른다는 것은 심은하의 전성기 80년대 말과 90년대의 분위기를 모른다는 말과 같다. 젊은 친구들과의 소통은 이래서 쉽지 않나 보다. 젊을 때에는 중년남자들이 자신들과 비슷한 나이의 여인들과 바람피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젊고 예쁜 여성들이 많은데 왜 늙은 여인들과 스캔들을 만드는지를 알 수 없었는데, 이젠 충분히 이해하게 됐다고나 할까. 사람의 관계는 자신과 상대방의 삶의 공감대가 클수록 소통이 잘 된다. 공감대는 함께 한 세월만큼 또는 함께 반추할 지난 세월의 양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겪은 세월과 시간이 중요하다. 심은하야말로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요 그 시절의 아이콘이었는데 이젠 그 사람이 누구냐고 되묻는 지경이니 무정한건 세월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동안 수업 중간마다 딴에는 재미있으라고 얘기했던 80년대의 대학문화, 피맛길 소줏집, 청진동 해장국집에서의 일화 등등은 얼마나 지겨운 회고담이었을까 하고 생각하니 민망했다. 내가 젊었을 때, 월남에서 말이야 등등 자기 말에 스스로 도취해 침 튀기며 떠드는 어른들의 장광설에 몸을 배배 꼬며 지겨워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이 먹으면 옛날 얘기 좋아한다더니 남 말이 아니었다. 별 수 없이 꼰대가 되었음을 확인하니 서글프다. 나훈아가 좋아지거나 아침마다 국물이 있는 식사를 찾는 등 나이 듦의 증세는 여러 가지이지만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과 사물을 대하는 관점이 여유로워지고 깊어진다는 점에서 긍정적 일면도 있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의 대학자 추사 김정희는 일독 이호색 삼음주(一讀 二好色 三飮酒)라는 현판글씨를 남겼다. 어떤 연구자는 이 뜻을 글자대로 첫째는 독서(공부), 둘째는 여자(섹스), 셋째는 술이라고 풀었다. 섹스와 술을 좋아하는 와중에 공부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공부하는 중의 술과 섹스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며, 추사가 고지식한 선비가 아니고 솔직한 인간적 쾌락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라는 부연설명을 추가했다. 예전에 이 대목을 읽으며 추사의 인간적인 면의 발견이라 생각했으나 이젠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색을 좋아한다는 말은 남녀의 조화가 잘되어야 집안은 물론이고 여러 세상사가 잘된다는 의미로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것도 물론 나이 먹은 후의 깨달음이다. 김상엽 건국대학교 인문학 연구원학술연구교수

[문화카페] 극장의 영업권만 있고 관객의 볼권리는 없나

요즘 영화관에 가면 특정 영화 한두편이 그 많은 스크린의 상영횟수를 거의 점유해서 다양하게 영화를 볼수가 없다. 소위 스크린 독과점이라는 새로운 풍속도가 영화가를 휩쓸고 있다. 스크린 독과점의 불공정은 크게 세가지다. 첫째, 특정 영화가 하루 동안 상영하는 횟수를 너무 많이 한다. 둘째, 일부 영화들은 온전하게 한 스크린의 하루 상영횟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겨우 몇회하고 그것도 관객이 보기 불편한 시간대인 이른 아침, 심야에 하는 경우도 있다. 셋째, 특정 영화는 예매 사이트를 다른 영화보다 먼저 오픈하고 다른 영화들은 늦게 오픈해서 예매조차 하지 못하게 한다. 이 세 가지가 다 불공정한 사례로 의심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조사해서 소비자인 관객들이 다양한 영화를 볼수 있도록 해야 하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다수 중소영화사들의 물적 피해를 줄여야 산업의 상생환경이 조성된다. 위의 문제를 하나씩 점검해보자. 특정영화의 상영횟수 점유율은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안은 아니다. 비유컨대 특정 상품이 매장에 너무 많이 진열되어 있다는 문제인데, 그렇다고 법적으로 특정 상품이 몇퍼센트 이상 진열되면 안된다고 제한하긴 어렵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 판단은 오로지 소비자에게 달려있다. 특정 상품이 독과점진열되는 것은 소비자가 선호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소비자의 선택이지 특정 회사의 강요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시장질서이다. 소비자만 좋다면 특점 상품의 독과점도 허용된다는 말이다. 그만큼 시장에서는 소비자의 권리가 회사의 영업권보다도 더 중요하다. 소비자가 물건을 사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영화상품도 마찬가지다. 특정영화가 스크린의 상영횟수를 너무 많이 점유하는 것을 몇퍼센트로 제한하자는 법은 그런 점에서 시장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현재 영화시장엔 다른 상품처럼 소비자 위주의 자율적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극장에서 주장하는대로 소비자관객이 선호하는 영화를 많이 상영하는 것인지 면밀하게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의심스러운 것은 예매 사이트 운용에 있어서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최근 모영화는 열흘전에 단독으로 예매사이트를 오픈해서 많은 예매관객을 모았고 그 결과 50퍼센트 이상의 예매율을 자랑하며 개봉했고, 하루 한 극장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의 상영횟수를 단독으로 상영하면서 관객몰이를 했다. 과연 이게 공정거래를 위반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 아직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런 문제를 직접 건드리지 않고 있다. 그런 전례도 없고 영화가 상품임에도 불구하고 소비자의 권리를 과연 침해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법은 최소한의 양심이다. 법개정은 그런 점에서 모든 문제의 해결은 아니다. 미래의 영화인력을 배출하는 영화과 교수들 62명이 특정영화의 스크린독과점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어달달라고 국회와 정치권에 호소하며 성명서를 발표했다. 영화평론가협회에서도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쪽에선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잘나간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생계조차 해결되지 않으며 특정 기업, 특정 영화만 지배하는 적신호가 켜졌다고 경고하고 있다. 정부가 바뀌었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 경제민주화, 청년실업해소, 그리고 무엇보다도 창조경제다. 이 모든 정책이 구호가 되지 않으려면 문화산업의 첨병이고 꽃인 영화산업이 튼튼해야 한다. 그리고 소비자 관객도 권리를 주장할 때가 되었다.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특정 권력에 의해 소비자의 권리가 짓밟힌단 말인가. 대기업극장의 영업권만 있고 소비자관객의 볼 권리는 없는가. 정재형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

[문화카페] 깜냥껏 살다 간다

생계형 글쟁이이다 보니 다른 작가들이 글쓰기 전이나 글이 안 풀릴 때 어떤 버릇이 있는지 늘 새겨 본다. 직업상 자연스레 이는 호기심이다. 다음은 글쓰기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다른 업계에서도 마찬가지이리라 생각되어 공개(?)한다. 먼저 초조 불안형. 이는 글이 안 풀릴 때 이 방 저 방 방문을 열고 다니는 형이다. 의외로 이런 작가들이 많다. 또 어떤 작가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기도 한다. 압박을 먹는 것으로 푸는 형이다. 그런가하면 무작정 배낭을 짊어지고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로 가는 가출형이 있다. 익숙한 곳을 벗어나야 새로운 생각이 찾아오는 형일 것이다. 또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상관없이 글이 안 풀리면 이 작가 저 작가에게 전화해서 두서없는 말을 퍼붓는 수다형도 있다. 이에 반해 조용히 혼자서 일단 술부터 마시는 두주불사형도 있다. 많은 작가들은 글 한 줄 쓰고 담배 한 대를 피우기도 하는데, 보는 이도 짠하다. 그럼 나는 어찌하고 있을까? 술도 못 먹고 담배도 못 피우는 나이지만 남이 나를 관찰해보면, 나도 모르는 이상한 버릇을 발견하고서 배꼽을 잡으며 웃을지 모르겠다. 나는 글이 안 풀리면 책상 앞을 절대 안 떠난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일단 어떤 생각이, 이야기가 나를 찾아오면 그걸 어떻게든 수습해 두어야하기에 나는 책상 앞을 못 떠난다. 또 글이 안 찾아오면 찾아올 때까지 내 익숙한 자리인 앉은뱅이책상 앞에서 기다린다. 그렇지 않으면 글 친구가 찾아온 줄도 모르고 정작 내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짓을 하며 지내고 있을지 몰라서다. 이런 점에서 글은 엉덩이로 쓴다고 늘 되뇌는 어느 소설가의 말이 맞다. 또 만년필을 꽉 잡고 잘 쓸 때까지 소설을 쓴다는 소설가의 말도 맞다. 내 경험상 이야기는 책상 앞에 붙어 있어야 하고, 노려보며 기다려야 찾아오더라. 어떤 일의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회피하거나 도피하거니 외면해선 어려움을 결코 해결할 수 없으리라. 세상만사 다 그렇겠지! 나는, 작가가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우며 여행도 잘 안 가고서 무슨 글을 쓰느냐는 힐난 아닌 힐난을 가끔 받는다. 그러면 나는 볼멘소리를 한다. 내가 술까지 마실 수 있다면, 담배를 잘 피운다면, 집 밖을 잘 돌아다닐 수 있다면, 내 체력으론 오히려 글을 쓸 수 없을지 모른다고.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자기 깜냥껏 살다가 가는 것 같다. 나는 글쟁이로서 내 깜냥껏 살고 있다. 그렇게 살다 가면 되리라. 그나마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글을 쓰는 일이기에. 노인과 바다를 쓴 헤밍웨이는 글을 쓰기 전에 연필을 스무 자루 깎아 놓고 시작하는 버릇이 있었고, 톰 소여의 모험을 쓴 마크 트웨인은 글을 쓰기 전에 당구 한 게임을 치고, 통닭과 감자를 곁들여 아침을 거나하게 먹고 점심 때 다 되어서야(11시 쯤) 책상 앞에 앉았단다. 모비딕(백경)의 작가 허먼 멜빌은 8시쯤 일어나 말에게 아침 인사를 하며 먹이를 주고, 암소한테는 호박 한두 개를 썰어주고, 정작 자신은 아침을 먹지 않고 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 한다. 요즘 시대는 선배 작가들이 살다 간 시대랑 많이 다르기에 나의 일상도 다르다. 나는 글쓰기 전에 연필을 깎는 대신 전자 우편과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을 보려고 컴퓨터를 켠다. 이어 연락 사항을 확인하고 내가 끼적여두었던 글 가운데에 소재가 될 만하면 가져오기도 한다. 당구나 잡기에 능하지 않아(취미가 없어) 그런 것도 못하고, 도시에 살다 보니 말이나 소 같은 덩치 큰 짐승도 못 키우니 그들 먹이도 주지 않고(그 대신 햄스터라는 몸집 작은 서양 쥐에게 인사를 하고), 창문 밖(베란다) 풀들에게 물을 주며 인사를 하는 정도이다. 아침은 꼭 먹어야 하기에 절대로 건너뛰지 않는다. 이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시오리 산길을 걸어 등하교를 했는데, 그때 아침은 반드시 든든하게 먹는 버릇이 생겨서 그렇다. 어쨌든, 이러한 것 모두 내 깜냥이다! 박상률 작가

[문화카페] 동양화의 제작방식을 통한 이해

흔히 동양화라 하면 대개 산, 나무, 개울 등이 나열된 비슷비슷한 그림이라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렇지만 비슷한 그림을 계속 그린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술에 있어 반복이란 작가의 노동력을 낭비하고 창의력을 고갈시키며 관람자에게는 피로를 증가시킬 뿐 만 아니라 종이와 물감 등 값비싼 재료값을 날려버리니 말이다. 그렇지만 동양화는 결코 반복을 추구하는 그림이 아니다. 동양화가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는 듯한 경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림 제작관습 곧 그림을 제작하는 사회적ㆍ개인적 습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전근대시기 동양에서 그림은 대체로 모(摹)임(臨)방(倣)이라는 세 가지 방식에 따라 제작되었다. 모는 진적 위에 종이나 비단을 겹쳐가며 비춰진 형상을 따라 그리는 것이고, 임은 진적 옆에 종이나 비단을 놓고 진적을 똑같이 모사해 그리는 방법이다. 방은 어떤 서화가의 예술 풍격을 본받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모는 요즘의 개념으로 하면 똑같이 복제한다는 의미이고 방은 원작의 뜻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원작과는 다른 느낌의 그림이 나올 수 있다. 임은 모와 방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대개 모는 초상화ㆍ종교화 등과 같이 대상을 똑같이 그려야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사용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조상의 초상화가 낡아 새것으로 교체하려할 때 그려진 형상이 똑같아야지 달라지면 문제이기 때문이다. 방은 과거의 명작을 자신의 방식으로 소화하여 그려내는 방식이다. 임은 원작 위에 종이나 비단을 올려놓고 그릴 수 없는 경우이거나 그림을 연습할 때 주로 사용되는 방식이다. 원작과 같은 크기의 그림이 재생산되는 모에 반하여 임은 옮겨 그릴 화폭의 크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방은 작품 크기의 제약에서 자유롭다. 세로로 긴 그림에서 뜻을 취해 가로로 긴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반대로 가로로 긴 그림을 세로로 긴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으며 작은 그림을 크게 하거나 큰 그림을 작게 하는 등 방은 크기의 제약에서 자유롭다는 의미이다. 모ㆍ임ㆍ방이라는 회화 제작방식은 전통을 중시하는 회화 제작방식으로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회화제작 관습의 중요한 내용이 되었다. 동양의 옛 그림이 모ㆍ임ㆍ방이라는 방식에 의해 제작된 것은 동아시아의 서화 제작 관념 때문이다. 동양의 서화 제작 관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서술하되 짓지 않는다(述而不作)와 선인의 그림을 본떠서 그리면서 그 기법을 체득하는 것(傳移模寫)을 꼽을 수 있다. 술이부작은 논어에 나오는 내용으로서 성인의 말을 그대로 전하고 자기의 설(說)을 지어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논어를 보면 공자의 말씀은 큰 글씨로 되어있고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시대를 달리한 해설과 주가 달려 있다. 성인의 말씀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생각이 계속 더해지는 구조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서, 시대에 따라 의미에 의미가 더해지고 논의에 깊이가 더해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전근대시기 동양 지식인들의 어법도 이런 식이었다.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옛 고전에서 자신의 생각에 연결되는 구절을 찾아 언급하며 자신의 생각을 더하여 개진했던 것이다. 전근대시기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학술은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모임방의 그림 제작방식 또한 이러한 구조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의 문화를 흔히 깊이의 문화라 하는 것은 이처럼 의미에 의미가 더해지는 과정을 겪기 때문인데 그림 역시 다르지 않다. 그래서 동양화는 비슷한 아니 비슷해 보이는 그림이 계속 제작되는 것이다. 김상엽 건국대학교 연구교수

[문화카페] 원작을 밝히는 건 관객에 대한 예의

최근 외국영화 리메이크한 한국영화에 문제는 없는가? 외국의 원작을 사다가 한국영화로 만든 경우를 리메이크라고 한다. 흥행하는 것은 좋은데 원작을 밝히지 않아 단지 공동제공, 혹은 판권기획이라는 이름으로 엔딩타이틀에만 표기하는 경우다. 그런 표시로는 원작을 전혀 알수가 없다. 원작은 흔히 오프닝 타이틀에 적시해야 한다. 참고로 한국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리메이크한 미국영화를 보자. Based upon the Shincine Films Motion Picture My Sassy Girl(원작 신씨네 영화 엽기적인 그녀). 이와 같이 해야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획자는 계약서를 들어 계약서대로 했다고 말한다. 계약서를 봤지만 어디에도 원작을 달지 말라는 말은 없다. 공동제공으로 해달라는 요구만을 한 것이다. 그건 원작표시와는 별개의 문제이지 원작표시를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특별히 하지 말라는 말이 없는 한 타이틀에 원작을 표시하는 건 관객에 대한 예의인 것이다. 요구대로 공동제공을 표기하고도 원작표시는 별도로 했어야 한다. 왜 그런가? 원작표기는 공동협약과는 상관없이 관객에 대한 예의표시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제작진이 열심히 노력하는 건 확실히 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보면 2% 부족한 점이 나타난다. 관객에 대한 문화적 의식결여이다. 관객들은 그 영화가 어떤 원작을 리메이크 했는지 알고 싶어하고 영화제작진은 당연히 관객에게 알려줘야 한다. 언론 인터뷰를 통해 알렸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부족하다.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에 넣는 것이 정상적인 관례이지 언론 인터뷰는 간접적인 방식이다. 특별히 숨기고자 한 의도가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언론에라도 알렸으니까. 하지만 더 명확히 밝히는 것이 미래의 한국영화가 관객들로부터 환영받을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유독 영화의 리메이크 원작 밝히는 것만 인색한 것이 특색이다. 원작소설이나 만화를 영화화하는 경우는 거의 그런 일이 없다. 일본소설원작인 용의자 X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은밀하게 위대하게 등은 정확히 원작을 밝히고 있다. 단지 지나간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데에 있어서 최근 들어 두편의 경우 다 외국 영화 원작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영화가 아닌 원작의 경우 밝히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한데 영화의 경우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원인은 알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런 식으로 나타났다. 제안컨대 영화가 되었든 문학이 되었든 원작을 밝히는 문제는 오로지 관객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관객이 알고자하는 것에 충실히 서비스하는 정신 그게 관객을 위하는 문화의식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영화가 이런 점에 있어서 분명해진다면 국제적인 문화의식을 겸비한 최고의 영화선진국이 될 날도 멀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들어 리메이크나 짜깁기 영화들이 성행하고 있다. 리메이크는 괜찮지만 짜깁기는 조심해야 한다. 표절의혹의 대상이 될수 있다. 그러나 잘만하면 좋은 기획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나온 짜깁기 영화들에서 그리 큰 문제는 없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유행이 미래에 형편없는 영화를 나오게 할수도 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문제는 관객이다. 관객은 표절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관객을 기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분명하게 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게 현단계 한국영화를 한걸음 더 업그레이드 시키는 방책이란 생각이다. 정재형 동국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레지던시 프로그램

오늘날 미술관은 미술품의 수집과 보존이라는 전통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시민을 위한 공공 문화기관으로서 새롭게 변화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서구의 미술관들은 지난 30여 년 동안 이러한 변화에 대응해 왔으나 한국의 경우 미술관의 역사가 일천하고 전통적인 미술관의 정체성 자체가 아직 덜 확립된 상황이라는 특수성이 있다. 따라서 변화에 대한 요구와 미술관의 전문성 확보라는 요구가 시차 없이 제기되고 있는 형편이며 이 과정에서 시행착오와 오류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미술관들이 관객유치를 통한 운영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울러 미술관의 전통적인 기능뿐 아니라 4대 구성요소에 이르기까지 발상의 전환을 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미술작품의 소비는 물론 생산으로까지 미술관의 역할이 확대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에 각국의 미술관들은 이러한 변화요구에 부응하고 이의 원천인 작가들에게 안정적인 창작여건의 제공이라는 모토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은 물론 미국의 뉴욕근대미술관, 일본의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그리고 영국 게이츠헤드의 발틱 현대미술관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문화교류와 이를 통한 상호이해, 그리고 창작의욕의 고취와 작품의 생산이라는 측면이 미술관의 주요 기능 중 하나로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국의 작가들과 초빙된 외국 작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보다 예술성 높고 독창적인 작품제작 환경을 제공하고자 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운영으로 귀결된다. 그 결과 오늘날 예술 활동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은 예술가의 유목성과 병렬적으로 여러 나라에서 운영되는 다양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국제적으로 일반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진취적인 예술가들은 하나의 국가나 문화권에 머무르지 않고 이국을 떠돌며 다양한 문화체험 속에서 창작 작업을 지속해 나간다. 구미에서는 레지던시개념이 생소한 것이 전혀 아니며, 역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지금까지도 예술가들의 주요한 창작기반으로 기능하고 있다. 사실, 예술가들에게 있어 레지던시 프로그램 혹은 창작스튜디오는 예술가 자신의 존재 조건과 분리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공간이자 창작의 산실이다. 오늘날 미술환경은 단순히 작품 생산에 따른 결과(작품) 뿐 아니라 창작에서부터 소비에 이르는 시공간적 서사과정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특히 영상설치미술이 주류를 이루는 현재의 창작풍토에서 완결된 작품보다는 그 작품이 이루어지는 생산의 과정에서의 연구, 토론, 협업, 분배 등 창작환경이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 내에서, 매체의 다양한 수용과 장르의 혼성이나 통합이 빈번한 현금의 작업환경 하에서 각 장르별, 지역별 예술가들이 협업하고 토론하는 장이 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필수 요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내외적으로 슬럼화 되거나 재개발 상태에 놓인 역사적 명소들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구입하여 문화예술 기반시설로 전환하려는 장소마케팅의 사례가 증가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건축가 피터 랭(Peter Lang)은 우리는 도시의 죽음을 두려워하다가 이제 죽음의 도시를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지적하며 유토피아적 환상과 획일화되고 일괄적인 질서와 권위를 추구하는 모더니즘 예술의 접근방식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문화적 현상을 단순히 기술적 산물로 환원할 수는 없는 바, 예술을 통한 도시마케팅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사회적, 경제적으로 논의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전통적 문화인프라와 첨단산업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수원의 문화환경에서 구도심활성화를 모토로 하는 국제적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경모 수원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

[문화카페] 기억에 대한 단상

파리특파원으로 활동하던 우리나라 기자는 어느 날 파티에서 만난 기품 있는 중년 프랑스 여인의 정중한 초청을 받았다. 제 딸아이는 한국에서 입양된 아이인데 어릴 적에 입양돼 고국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것 같아 그러니 부디 오셔서 한국 이야기를 해주시면 고맙겠다는 말을 들은 기자는 밝은 표정으로 꼭 가겠다는 약속을 했다. 며칠 후 약간의 설렘 속에 초대받은 파리의 전형적인 중산층 저택에 도착한 기자는 중년 여인의 안내를 받으며 응접실에 들어섰다. 여인은 차와 함께 그 동안 살펴보라는 의미에서 딸아이의 사진, 스케치북 등을 꺼내 왔다. 입양 전 한국에서 찍은 어린 아이 적의 사진, 프랑스로 막 입양됐을 때의 사진, 학교 다니며 밝게 웃는 사진 등등 사진 속의 소녀는 어릴 적이나 서양 옷을 입고 있을 때나 전형적인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하며 복잡한 상념 속에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은 기자는 스케치북에 그려진 소녀의 그림을 본 순간 눈시울이 뜨끈해지고 말았다. 파리는 대평원에 자리 잡은 도시이기에 산이 보이지 않아 파리의 어린이들이 풍경화를 그릴 때면 으레 도화지의 중앙에 수평선을 죽 그은 후 위는 하늘색을 칠하고 아래는 건물과 사람 등을 그리곤 하는데, 이 소녀의 그림에는 구불구불한 우리나라 산의 윤곽선이 그려져 있었다. 학교 입학하기도 전인 5살 전후에 프랑스로 입양 온 소녀의 눈에 우리 산하의 실루엣이 똑똑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얼마 보지도 못했지만 우리 산의 모습은 소녀의 뇌리에 깊이 담겨져 무의식중에도 구불구불한 모양의 선이 그려졌다는 거짓말 같은 사실이다. 이 내용은 나의 고등학교 시절 집에서 구독하던 시사주간지에서 읽은 것이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기억이란 우리의 뇌리 속에 이토록 강하고 깊게 아로새겨지는 것인가 보다. 별것 아닌 듯 무심하게 주변을 스쳐가는 이미지들이 자신도 모르게 머리 속 깊이 또렷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고 한편으로는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특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백지에 물감 붓을 대는 것 같이 그대로 그려지나 보다. 어린 시절의 기억뿐이랴. 중고등학교 다닐 적에 읽은 시, 소설의 구절은 머리 한 구석에 남아 있다가 센티멘털해질 때면 어디선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걸 보면 기억이라는 것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런가 하면 성인이 된 이후에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많고 메모를 하지 않으면 책 제목마저 가물가물하다. 이런 경우를 쉽게 나이 탓이라고 치부할 수 있으나 그보다는 기억이라는 바탕에 너무 많은 덧칠이 가해져서 원형의 잔상이 잘 남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뜬금없이 기억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다름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기억만 유념하면 많은 부분이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식언을 밥 먹듯이 하는 정치인들, 지역감정을 넘어 지역차별을 조장하는 자들, 역사를 오도하고 왜곡하는 일베충들, 말도 안되는 논리로 진실을 호도하는 학자의 탈을 쓴 사기꾼들, 진실을 알리기는커녕 오보의 책임조차 지지 않는 사이비 언론인들, 탈세에 불법을 밥 먹듯이 하는 기업들 등등에 대한 기억만 똑바로 해도 이런 자들이 설 자리는 없어지고 세상은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비정상적이고 황당한 사건들이 줄지어 발생하는 우리 같은 사회에서 모두 기억했다간 단박에 정서불안이나 조울증에 걸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김상엽 건국대학교 연구교수

[문화카페] 영화 제작가협회는 심의위원회를 속히 구성하라

김기덕 감독의 영화 뫼비우스가 영등위에서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고 김 감독은 영화를 수정할 의사가 없어 현실적으로 국내상영이 불가한 상태다. 국내에는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영화를 상영하는 등급외 전용관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부 영화인들은 등급외 전용관도 없으면서 제한상영가 판정을 내리는 것은 상영하지 말라는 소리와 같다는 식의 불만을 토로하며 감독 자신도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의 잣대가 구시대적이라는 이유로 판정이유에 불복하고 있다. 영등위의 판정이유는 모자근친상간의 묘사와 일부 잔혹한 묘사 등이다. 과거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에서부터 현재 민간자율기구인 영등위의 심의까지 영화등급의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영화를 과연 어떤 기준에서 볼 것인가이다. 과거 검열시절에는 국가 공기관의 기준으로 영화를 보았다. 풍속, 보안이 가장 큰 금기였다. 현재 영등위 기준은 각 직능을 대표하는 시민들의 기준이다. 청소년보호기준, 학부모기준, 여성차별기준 등 당대에 시민사회를 대변한다는 위원들이 그 기준을 임의로 적용한다. 미국은 어떻게 하는가. 미국은 1968년 이래로 미국영화제작자협회에서 등급심의위원회를 운영한다. 그 이유는 많은 사회단체들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영화들에 대해 항의를 해오기 때문에 사회적 물의가 심해졌고, 영화계 스스로 자정하는 기구를 설립한 것이다. 만약 뫼비우스같은 경우 미국은 영화인들 상호간에 논란을 갖지 사회에서 물의가 일어나진 않는다. 그러나 만약 제작자가 등급거부를 강행한다면 등급없음이란 명칭으로 개봉하고 등급을 거부했다는 벌칙으로 극장상영을 권고하지 않는 지침을 회원극장사에 통고한다. 제작자, 극장협회 회원사간의 이해관계가 가장 큰 기준이다. 한국은 등급외전용관 유무를 갖고 논란하는데 제한상영가로 일반상영관에서 상영하면 되지 그걸 반드시 등급외전용관에서 상영하라고 강제할 이유는 없다. 제한상영가 영화를 일반상영관에서 상영해도 된다고 규정, 수정해야 한다. 보든 안보든 그건 관객의 선택이다. 한국은 등급외 영화들에 대해 지나치게 시민을 보호하려는 입장을 보이며 시민을 계몽하고 계도하려 한다. 그건 시민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처사다. 미국의 자율심의가 엄격히 제한되는 것이 청소년보호취지이다. 폭력이나 성행위라 할지라도 청소년에 대한 것을 더 문제 삼는 편이다. 대신 성인들에겐 관대하다. 뫼비우스가 미국에서도 등급외판정이 나올 확률이 높다. 그리고 일반극장에서 상영되지만 청소년은 전혀 입장할수 없다. 한국도 그렇게 운영하면 된다. CGV나 롯데, 메가박스에서 상영한다손 치더라도 청소년이 볼수 없는데 뭘 우려하는지 모르겠다. 성인들은 이 영화를 왜 볼수 없단 말인가. 현재 영등위심의는 청소년을 빙자하지만 일반 성인들에게까지도 이런 영화를 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느껴진다. 심의기준은 시민의 기준에서 모든 걸 규제하려 하면 안된다. 청소년보호와 인권의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것이다. 예술은 시대의 기준을 종종 앞서가기도 하므로 특별히 등급외 영화가 존재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제언을 하나 하겠다. 제협은 심의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러한 사회적 논란을 막아야 할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한국영화계가 청소년과 인권을 위해 무관심하지 않고 스스로 자정하는 자세를 보인다고 많은 시민단체나 정부가 영화계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재형 동국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수명 다한 대한민국미술대전 이제 폐기할 때

대한민국미술대전(이하 미술대전)은 1949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전신이지만 그 모태는 일제의 소위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1922년부터 시작된 조선미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제는 조선은 물론 대만에도 1927년 대만미술전람회(대전/부전)를, 그리고 1937년 만주에 만주국미술전람회(만전)를 개최함으로써 식민지 미술문화정책을 일단락 짓는다. 물론 이들 전람회는 1907년 일본 문부성 주최로 열린 문부성전람회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이는 이후 제전(帝展/1917)과 신문전(新文展/1937)으로 명칭을 바꿔가며 일제 패망 1년 전인 1944년까지 이어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이 제도는 1664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미술가전(Salon des Artistes Franais)이라는 의미의 관전으로 보통 르 살롱(le Salon)이라고 일컫는 프랑스 관전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공모전의 시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르 살롱(Le Salon)조차 19세기 이후 미술전이 보수적인 경향을 고집하던 이 미전에 반발하는 경향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미술사에서 공모전이라는 시스템이 얼마나 반예술적인지 방증하는 대목이다. 이 전람회에서 명성을 얻은 화가들도 오히려 낙선자 미술전시회 살롱 데 자르티스트 쟁데팡당(앵데팡당전) 인상파 미술전 등을 무대로 활약하였던 것이다. 미술대전이 반예술적이라는 점은 우선 마치 운동경기와 같이 등위와 서열을 중시하는 시상제도와 권력적 속성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속성은 심사위원의 기호에 맞추는 비창의적 예술을 양산하게 되고, 거시적으로는 미술지망생들을 제도의 틀에 규격화시키는 장치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조선미전에서 일본인 심사위원들이 조선향토색 운운한 것은 예술의 아방가르드적이고 현실비판적인 요소를 잠재워 그들의 식민정책에 동화되는 도구로 이끌고자 한 것은 단적인 예라 할 것이다. 즉 주최측이 의도하는 방향에 따라 전람회가 전개되고 응모자들은 상을 받기 위하여 이 의도에 철저히 순응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전 30년간 이러한 일제의 음모가 비판 없이 답습되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공모전의 이러한 속성 때문에 그것이 신인발굴이라는 시대적 선별장치로서의 임무가 수명을 다 할 경우 해체가 불가피하게 되는 것이다. 관전이든 민전이든 우리의 공모전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우리의 국호를 사용하면서도 이미 권위를 상실한 미술대전의 경우 가장 서둘러 환골탈태(換骨奪胎)해야 할 구태적 공모전의 대명사라고 볼 수 있다. 매년 수많은 예산을 사용하면서도 제대로 된 신인하나 발굴하지 못하는 과오를 매년 반복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안이하고 타성화된 공모전 방식을 답습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니 이 공모전에 권위가 생길 리 만무하고 기성작가들의 밥그릇 싸움의 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신의 문하생을 이 공모전에 얼마만큼 입선시켰는가는 그 강습소의 존폐문제와 더불어 그 작가의 생존여부가 걸린 문제가 되고 있다. 그 결과, 이 공모전에서 만들어진 미술은 대외적으로 전혀 통용이 되지 않는 미술이 되고, 작가 지망생들 역시 이의 경향과 요구에 맞추다 보니 시대에 뒤쳐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 공모전을 본래 취지대로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재론의 여지없이 골격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형식과 내용을 담보하고, 국제적 보편성과 지역적 특수성이 고려될 수 있도록 이 전시에 전방위적인 메스가 가해져야 할 것이다. 이제 미술대전은 해체냐 재편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이경모 미술평론가ㆍ수원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

[문화카페] 생각의 속도와 손의 속도

글을 쓰는 필기구의 변천사는 곧 글쓰기의 변천사이다라는 게 나의 오랜 생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붓으로 글씨를 쓰거나, 펜이나 연필로 글을 끼적일 때, 컴퓨터로 글자를 찍을 때 느낌이 다르다. 생각의 속도와 손의 속도에 있어서. 대하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 선생은 살아생전 만년필로 원고지에 글을 썼다. 만년필에서 잉크가 흘러나와 원고지를 적시는 걸 손가락 끝에 피를 묻혀가며 바위에 한 자 한 자 새기는 것 같다고 하였다. 단단한 바위를 쪼아 글자를 새길 날카로운 정 같은 쇠붙이를 갖지 못해 그렇다면서. 아직도 펜으로 글을 쓰는 걸 고집하는 작가가 많다. 이른바 수제품을 내놓는 것이다. 특히 유명한 이는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선생. 그는 모든 글을 원고지에 만년필로 한 자 한 자 한 자 적어 나간다. 그렇게 쓴 원고지가 자신의 키를 넘는다. 사실 수제품에 명품이 많다. 악기나 가방 같은 것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영화가 나왔어도 연극이 볼 만하듯이, 오토바이가 나왔어도 자전거가 탈 만하고 텔레비전이 나왔어도 라디오가 없어지지 않듯이, 컴퓨터가 나왔어도 여전히 원고지에 펜으로 글쓰기를 고집하는 작가가 많다. 한편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컴퓨터로 글을 찍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세상을 뜨기 얼마 전까지 글을 쓸 수 있었을 거라고들 추측한다. 대학의 문예창작과에서 훈장 노릇을 한 초기엔 학생들의 과제 대부분이 손 글씨 원고였다. 그래서 내용을 칭찬할 수 없을 때엔 글씨를 참 잘 쓰는구나라는 칭찬이라도 할 수 있었다. 물론 악필인 경우는 이런 말도 할 수 없어 난감했지만 말이다. 1990년 대 후반을 지나고 2000년을 넘어서며 본격적인 컴퓨터 시대가 되자 과제는 점차 컴퓨터 작업을 해서 내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다. 물론 컴퓨터로 찍어 매끈하게 인쇄한 게 나도 읽기엔 편했다. 그러나 학생들 개성은 점점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편집 잘 했구나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습작을 하고 문예지에 투고를 할 때엔 나도 원고지에 글을 썼다. 그러다가 타자기는 건너뛰고 워드프로세서라는 것으로 글을 찍다가 컴퓨터로 넘어왔다. 지금은 거의 모든 글을 컴퓨터로 찍는다. 컴퓨터로 글을 찍던 초기에도 초고는 공책이나 연습장에 마구 쓴 뒤 정서할 때에만 컴퓨터를 사용하였다. 이때만 해도 컴퓨터가 내 생각의 속도를 못 따라 갔다. 이제는 컴퓨터로 찍어야 생각의 속도가 같아진다. 그런데 비밀스럽게 살짝 말하자면, 지금은 컴퓨터로 글을 찍는 게 너무 빠르다! 그래서 가끔은 두렵다. 사실 컴퓨터로 글을 찍을 초창기에도 시만큼은 신문에 끼어오는 광고지의 뒷면 같은 데에 볼펜으로 끼적거려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산문은 물론 시도 컴퓨터로 찍는다. 볼펜으로 쓴 시와 산문은 컴퓨터로 찍은 것과 분명 다를 것이다. 그래서 그 무렵에 쓴 초고지를 아직도 못 버리고 있다. 남미에 간 어떤 고고학자가 일행과 함께 한참 차로 길을 달린 뒤 길가에서 잠시 쉬었다. 다시 출발하려고 하자 현지에서 고용한 사람들이 자리에 그냥 앉아 있으며 따라 일어나지 않았다. 고고학자는 조바심이 나서 다시 재촉했다. 그러자 현지인 가운데 한 사람이 앞에 나서며 우리가 너무 빨리 달려와 시간이 우리를 쫓아오지 못해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단다. 붓방아를 찧으며 생각을 기다리던 때가 그립다. 박상률 작가

[문화카페] 구별짓기, 취향, 기억

오래전 기억이다. 일요일 아침 8시에 늘어져 자고 있는 내게 퉁명스럽고 짜증난 목소리의 전화가 왔다. 예비군 중대에 근무하는 방위병인데 예비군 훈련통지서를 내게 전달하려 해도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며 왜 그렇게 통지서를 전달할 수 없느냐?며 불평을 쏟아냈다. 통지서는커녕 아무런 메모조차 전달받지 못했던 나는 어떻게 이 시간에 무례한 전화를 할 수 있느냐며 화를 냈고 결국 말싸움으로 이어졌다. 혈기를 주체 못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인데, 그 대가는 가혹했다. 얼마 뒤 날아 온 동원예비군 통지서에는 훈련지가 서부전선 최전방 어느 부대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꼼짝없이 3박 4일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애당초 그곳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전의 동원예비군 훈련은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서 편하게 받았었는데 낯선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고생하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방위병의 보복(?)으로 여길 여지가 많았다. 버스가 몇 시간 달려 도착한 그곳은 내가 제대한 동부전선 전방부대에 비해서도 나은 구석을 찾기 힘든 곳이었다. 닳아빠진 텐트 속에서 먹고 자며 낮에는 뙤약볕, 밤에는 추위와 싸우다보니 현대식 막사에서 생활하던 예전 훈련이 천국 같았다. 사격, 전술훈련 등은 별 일 아닌데 식사가 번거로웠다. 총 메고 철모 쓰고 밥과 국을 타서 나무 그늘 밑에 쪼그려 앉아 홀로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신세가 처량했는데, 식사 때마다 둘러 앉아 왁자지껄하게 밥을 먹는 예비군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제김치는 물론 제육볶음, 장조림, 닭발, 멸치볶음, 무말랭이, 삶은 계란, 튀김, 쌈장과 상추, 마늘 등등 얼핏 보아도 10여 가지가 넘는 온갖 반찬을 늘어놓고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어떻게 제대로 된 반찬 없이 밥을 먹을 수 있느냐며 주변에 합류하기를 큰 목소리로 강권하는 그들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식사 때마다 벌어지는 일이라 본의 아니게 그들을 관찰하게 되었는데, 대체로 그들은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들로서 자신들이 자란 지역에 계속 사는 토박이들이었다. 산해진미는 아니더라도 산속 군부대에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다양한 먹거리로 식사를 즐기는 이들을 보니 예전 우리 집에 세 살던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할아버지는 일생을 막노동으로 살아온 분으로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 집의 건넌방에서 홀로 사셨다. 사실 홀로 사셨다는 표현이 적절하지는 않다. 미니 2층이던 우리 집의 반 지하 방에는 할아버지의 딸과 사위 내외가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건넌방에서 홀로 지내시던 할아버지는 언제나 단정한 넥타이 차림이었다. 어쩌다 일이 생겨 날품팔이를 하실 때를 제외하면 집 앞 구멍가게의 기다란 의자에 앉아 쥐포에 소주를 비우실 때도 그랬고 한 여름 동네 놀이터에 손녀를 데리고 가실 때에도 늘 넥타이를 하고 계셨다. 어른이 되고 나서 넥타이가 얼마나 귀찮은 것인지를 알게 된 후 언제나 넥타이를 하고 계시던 할아버지는 얼마나 불편했을까 종종 생각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할아버지는 평생 대우받지 못한 막일꾼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떨쳐버리고 싶으셨기에 노년에나마 넥타이로 옛날의 자신과 구별 지으려 하셨나 보다 짐작할 뿐이다. 예비군 훈련장에 온갖 반찬을 가져와 왁자지껄하게 먹어대던 동네 친구들의 모습, 집안에 혼자 있을 때도 넥타이를 항상 매고 계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전혀 달라 보이지만 결국 남과 자신을 구별 짓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닐까 싶다. 두 에피소드는 남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비교하는, 그래서 일상의 행복이나 만족마저도 다른 이의 평가를 통해 검증받으려는 우리의 의식구조가 적나라하게 반영된 경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김상엽 건국대 연구 교수

[문화카페] 숲속의 영화감독 신지승을 아시나요

영화감독 신지승은 숲속에 산다. 과거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 숲속에 통나무를 짓고 자급자족하며 살았듯이 신지승 감독도 양평에 집을 짓고 산다. 그는 10년전에 김기덕 감독과 더불어 서울 충무로에서 화려한 상업오락영화의 꿈을 안고 살아가던 젊은이였다. 그는 영화로 성공하지 못하자 실망감을 안고 쓸쓸히 낙향했다. 요즘처럼 거창하게 환경운동가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다. 그저 실패한 영화인의 귀향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모습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80군데 시골을 돌면서 60여 편의 영화를 만들며 마을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그는 현재 유명인사가 되었다. 최근에는 모기업이 주는 환경대상도 받았다. 그가 영화를 통해 마을 공동체의식을 진작시켰고 결과적으로 환경운동에 기여했다는 취지일 것이다. 내가 운영하는 영화제 조직위원장으로서 나는 그를 초대했고 영화를 상영하고 세미나에서 토론도 했다. 그 책자에서 난 이렇게 썼다. 지금 이 시기 신지승은 가장 중요하다. 신지승은 이미 유명해졌지만 여전히 그는 새로운 발견이다. 한국영화가 앞으로 지향해야할 중요한 미덕을 신지승은 제시한다. 그는 분명 문화예술의 대안을 개발한 사람이다. 그 대안의 요지는 적게 갖고 많이 나누는 생명사상이다. 적게 갖는다. 법정스님을 떠올림직하다. 신지승은 귀향을 했고 서울에서의 온갖 화려함을 버렸다. 그건 아마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내와 시골로 가서 아이를 키우고 자연속에서 더불어 산다. 자연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치유해주고 온전히 자리매김해주는 신비한 물질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그랬고 스콧 니어링이 그랬고 법정이 그랬다. 신지승은 그 뒤를 이어 자연으로 돌아갔다. 많이 나눈다. 법정스님도 서울을 떠나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일로 글을 썼노라 고백한 적이 있다. 신지승은 영화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일을 시작했다. 영화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한 소통의 도구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걸 예술이라 했던가. 진정한 예술은 자기가 만든 영화가 깐느영화제 같은 유수 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는 명예가 아니라 관객 스스로 깨닫는 계기를 주는 영화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신지승이 만든 마을 영화는 마을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연출도, 출연도, 기술자들도 다 마을사람들 스스로 배워서 한다. 영화가 끝나면 밤에 천막을 치고 상영하며 자축한다. 신지승의 영화는 나눔의 철학이 깃들어있다. 깨달음이다. 영화를 만드는 내내 그들은 갈등하고 힘들어한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그들은 협동심도 배우고 공동체의식을 자연스레 자각한다. 자연과 예술의 위대함속에서 그들은 인간의 길을 터득한다. 신지승은 감독이라는 예술가 개인의 자의식을 갖지 않는다. 그는 자기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들이 영화를 만드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이다. 올바름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가 물질적으로 자신을 비움으로써 얼마나 정신적으로 풍성해졌고 그 결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돕고 있는지 알게 하는 대목이다. 그게 바로 지금 시대의 학문이 할 일이다. 그게 바로 예술이 할 일이다. 그게 바로 공동체가 살고 사람이 생명의 주인인 이유이다. 그래서 신지승은 내가 생각하기에 이 시대 그 누구보다도 가장 중요하다. 정재형 동국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미술교육 이대로는 안 된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 했던가? 그러나 무색하게도 우리의 교육정책은 백년은커녕 한치 앞도 보기 어려운 오리무중의 양상이다. 조령모개(朝令暮改)식의 정책개정과 개악(改惡)으로 인하여 학생들은 임상실험(?)의 대상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최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박성호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20092012년 교권침해 현황을 보면 이미 교사들의 권위와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고, 이로 인해 경륜 있는 교사들이 학교를 떠났는가 하면, 교실이 붕괴되고 학원(學園)이 학원(學院)화 되어가고 있다. 한편 미술교육의 현실은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중고교에 미술실이 없는 학교가 태반이고 교구설비도 모든 실습실 중 맨 뒷전이다. 교과서는 50년 전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교육당국에서는 체계적인 미술교육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미술은 단순히 인간의 정서를 순화하고 삶의 질을 윤택하게 하는 점을 넘어서 인간과 이에 결부된 모든 환경적 조건과 맞물려져 있는 분야다. 그래서 구미 각국의 경우 모든 학습에 미술활동을 결부시킨다. 말하자면 자연인간미술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맥락 안에서 이해하고 교육과정을 전개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미술은 일상 속 깊이 침투해 있으며, 조형교육 역시 일상 안에서 시각적인 문제뿐 아니라 촉각, 후각, 청각, 미각 등 오감을 조화시킨 조형교육을 전개하는 중이다. 미국의 미술교육 기초 골격안 (Basic Art Skills, USA)을 보게 되면 대상의 주제, 상황, 위치 등 여러 관계를 관찰한다.(유치원), 일반적인 감각과 미학적 감각의 차이를 비교해 본다.(초등학교 3~5), 환경에서 시각과 촉각에 대한 작업이 어떻게 조화되어 가는지 알아본다.(중학교), 일상적인 삶에서 미학적인 특징을 찾아보고 그에 대해 심도 있게 조사관찰한다.(고등학교) 등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은 미술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연(환경), 인간, 철학, 미술을 하나의 시공간적 상황 안에서 전개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미술교육에서는 미술은 각 분야에 겹쳐 모두 활용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조형교육에서도 다양한 매체를 사용한 각기 다른 예술을 발견하고 매체와 문화와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을 미술교육의 주된 테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미국의 경우 한국처럼 구체적 지시나 획일적 전달체계가 아니라는 점과, 미술교과목이 일시적 성과보다는 좋은 인간육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 그리고 모든 교과목 중에서 미술이 한 단계 위에 서서 다른 교과를 통합처리한다는 점이 우리의 현실과 비교되는 대목일 것이다. 물론 한국의 미술교육과정도 비교적 잘 만들어져 있다. 아마 여러 나라의 모델들을 참조하여 좋은 점만을 추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모두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대적 가치와 형식을 도외시한 채 구태의연한 방식의 미술교육이 교육현장에 만연하고 있음이 문제다. 이는 일제에 의해 전염된 획일화 된 교육방식이 여전히 우리의 미술교육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여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형태로 가려는 노력이 보이기도 하지만, 관계당국의 정책 부재와 연구 투자 빈곤 등으로 선진미술교육체제의 반열에 오르기에는 요원한 것이 현실이다. 이제 미술교육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최소 10년간 배우고도 미술은 어렵고 귀찮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양산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경모 미술평론가수원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

[문화카페] 쌀 퍼주기 경쟁

얼마 전 고향집에 들렀다. 고향집을 홀로 지키고 사는 노모가 무척 심란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사연인즉, 큰애기(처녀) 적 한 마을 동무였던 엄마가 읍내 병원에 입원하고 있어서 그렇단다. 팔십 노인들이 입원하는 거야 으레 늘 있는 일이지만, 엄마가 입원하자 어머니는 더욱 마음이 편치 않으신 모양이었다. 병문안 갔다 온 넘들(남들) 말 들은께 배에 물이 찼는지 맹꽁이 배맨치로(배처럼) 부풀어 올랐다는디, 얼마나 더 살란가 모르제. 어머니는 옛 동무의 말년이 안타까워서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불쌍해서 으짠디야. 워낙 는 집으로 시집와서 자식들 갈치도 못허고 지구나다(가까스로) 국민핵교에 못 보냈는디, 그려도 그 자석들이 매달 생활비 보내줘 후불(노년) 치레는 했는디. 지난 겨울에 집에 갔을 때 엄마 가 집에 오셨다. 거동이 불편하신 노모를 보러 날마다 우리 집에 들르신단다. 나도 여그저그 안 아픈 디가 제만 느그 엄매가 더 걱정이여. 모실(마실)도 못 댕기니. 그러면서 엄마는 내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치사를 아끼지 않았다. 바쁜디 일부러 어무니 보러 와 주어서 고맙다잉. 부모가 늙은께 인자다 자식들 짐이네. 엄마는 어머니보다 우리 동네에 시집을 조금 늦게 왔다. 그런데 할머니 친정이랑 먼 일가가 되는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엄마의 시댁 사정을 잘 아는지라 무척 안타까워하셨다. 우리 마을로 시집 올 거믄 나헌티 시댁 사정 먼저 물어보고 오제. 거그다가 우리 메느리가 지 큰애기 때 동무였담시롱. 우리 부모 세대는 얼굴도 보지 않고 결혼했다. 고등학교 졸업반 때 선친은 625를 만나 그 이듬해인가 입대를 했다. 나중에 휴전은 되었지만 아직 군문에 있을때 고향에서 약혼할 이의 사진이 왔는데, 어머니는 사진이 없어 친구 사진을 보냈다고 한다. 아마 엄마도 시댁 사정을 잘 알아보지 않고 시집을 왔나보다. 어쩌면 농촌 살림살이가 다 거기서 거기겠지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혼 풍속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집안 사정도 잘 살피지 않고 결혼한 세대가 있는가 하면 죽기 살기로 사랑하다가 결혼하는 세대도 있다. 할머니는 엄마가 마을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집에 시집 온 게 마음에 걸리셨다. 그래서 며느리 몰래 늘 부엌의 좀두리쌀을 퍼다 주셨단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뒤주에서 박 바가지에 쌀을 담아 시어머니 몰래 퍼다 주셨단다. 그 당시 농촌 사정은 거기서 거기였다. 하지만 우리 집은 상대적으로 그 집보다 나아서 오랫동안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쌀 퍼주기 경쟁이 이어졌다. 서로 알고도 모른 체하면서. 본디 5월 8일은 어머니날이었다. 어머니날이 어버이날로 바뀐 지 제법 오래 되었다. 이렇게 바뀐 건 아마 5월 8일 하루가 어머니날이라면 1년 가운데 나머지 364일은 아버지날이라고 큰소리 치던 아버지들 때문인 듯싶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이게 뭘까? 부모도 누구의 부모가 되고 싶어 된 건 아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이다. 누구의 자식이 되고 싶어 된 이는 없다. 심지어는 세상에 태어난 것도 자식 탓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갈수록 부모 자식 간의 사이가 수상쩍어지고 있다. 5월을 흔히 가정의 달이라고 일컫는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 날이 다 5월에 들어 있다. 한 달에 그런 날이 다 들어 있는 건 어쩌면 이 달 만이라도 가정, 나아가 가족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박상률 작가

[문화카페] 나이 먹는 즐거움

형!하며 걸려온 전화가 있었다. 형이라는 단어를 정말 오랜 만에 들었기에 가슴이 뛸 지경이었다. 내가 대학을 다닌 80년대에는 남녀불문하고 손 위 사람이면 모두 형이라고 했기에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얼굴본지 20년이 넘는 여자 후배의 전화였는데, 전화한 후배는 마치 엊그제 헤어진 것처럼 해맑게 말을 이어갔다. 대수롭지 않은 부탁과 소소한 신변잡기를 풀어놓는데 나는 이미 그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회상된 과거는 연록색의 따뜻한 공기에 휩싸인 기분 좋은 곳이었다. 아아, 그렇게 아름다운 시절이었구나.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렇게 좋았던 시절이었는데, 남들 눈에는 시시했을지 몰라도 딴에는 심각하게 고민하며 허둥대던 청춘이었는데 하는 생각에 가슴이 짠했다. 그때가 그렇게 아름다웠던 시절이었음을 안 것도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벨기에의 연구팀이 흥미로운 조사를 진행하였다. 20대에서 80대에 이르는 사람의 나이에 따른 행복의 정도를 그래프로 나타낸 것인데 그 결과가 놀라웠다. 30대부터 행복의 정도가 점차 낮아지다가 40대가 되면 최저점을 찍은 후, 서서히 올라가서 80대에 최고점에 달한 것이다. 연구자들은 40대는 부모와 자식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심하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감정을 갖지 못하다가 80대가 되면서 모든 책임을 내려놓고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만족도가 가장 큰 것이라고 분석을 했다. 나이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줄여주는 연구 결과이다. 내가 참여하는 모임 가운데 벽오사(癖五社)라는 모임이 있다. 시서화음주친구의 5가지를 좋아하는 벽(癖: 고질)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인데, 벽오사 모임에서 언제나처럼 술 마시고 떠들고 하다가 좋았던 옛 시절을 회상한 적이 있다. 정확히는 어느 나이대가 가장 좋았던가라는 표현이 보다 적절할지 모르겠다. 하여간 그날의 결론은 30대 중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0대 젊은이들은 그 나이가? 하고 놀라겠지만, 그 정도의 나이라야 필요 없는 데에 정열을 낭비하고 마음을 소모하곤 하는 젊음의 치기를 털어낼 수 있다는 것이 그날의 결론이었다. 이후로 벽오사 사람들과 이런 얘기를 또 다시 하지 않았기에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다시 얘기를 하게 된다면 같은 결론이 나올지는 모르겠다. 몇 살 더 먹었으니 나이가 좀 더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젊었을 때에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지금의 안온한 일상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가족과의 따뜻한 대화와 웃음이 얼마나 행복감을 주는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주변을 배려하고 남의 감정을 헤아리기 힘든 시절이 젊음이다. 그래서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했나 보다. 동양의 선비나 학자라고 해서 모두 늙음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대만의 유명한 철학자 방동미가 1977년에 78세로 돌아갈 때 삶에 보인 집착은 유명하다. 그의 삶에의 집착이 너무나 속물스러운 양태를 보이게 되자 제자들은 두 패로 나뉘었다고 전한다. 연로하신 선생님의 인간적인 모습이니 이해하자는 쪽과 너무도 좀스러워 보이는 스승의 행보에 실망을 느껴 제자이길 포기하다시피한 쪽으로 나뉘었다는 삼류소설 같은 이야기가 그것이다. 인간이 약한 존재임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일인데, 방동미의 생애의 집착은 역설적으로 인생이 아름답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다. 이젠 방동미를 이해할 듯도 하니 역시 나이를 먹게 되었나 보다. 김 상 엽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문화카페] 젠틀맨의 시대정신

싸이의 젠틀맨은 지금 한국의 시대정신을 정확히 반영한다. 최근 모신문에서 젠틀맨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이 화제가 되었고 공영방송국에서 심의불가 판정을 내렸다가 다시 복원한 사례가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시대적인 흐름에 대해 여전히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미숙한 일면을 보여준다 하겠다. 비난의 내용 중 하나인 음란성 문제를 보자. 내 아이들에게 이 뮤직 비디오를 보여주지 못하겠다는 취지는 자기 중심으로만 문제를 바라본 것이다. 아이에게 보이건 말건 그건 이 노래의 취지가 아니다. 젠틀맨을 풍자하는 과정에서 여자들과 노닥거리는 한심한 작태를 그저 보여준 것 뿐이다. 아이들도 포르노와 풍자의 차이 정도는 다 구별한다. 요즘 성적인 유모어는 대세다. 그건 시대적 흐름이고 그런 식의 스트레스 해소용 성농담이 얼마나 많이 책으로 나와있나. 가벼운 성적인 개그는 생활의 활력을 주기까지 한다. 성을 음성적으로 취급하는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 대중오락적으로 유희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이건 어차피 노래고 뮤직비디오일 뿐이다. 여성을 성적으로 유린하는 모습이 나온다면 그건 문제다. 하지만 여자를 골탕먹이는 장면이 곧 여성비하고 유린이라고 볼만한 여지는 전혀 없다. 싸이도 여자에 의해 엉덩방아를 찧고 골탕먹는 사람은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있으며 가인만 음란한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싸이도 음란하기는 매한가지다. 이 노래의 목적이 음란하게 만들기 위한 것인지 신사연하는 위선자들을 비꼰 것인지는 다 안다. 이 노래가 갖고 있는 상류층 비판이 삐닥하다고 흠을 잡는다면 차라리 이해는 하겠다. 그게 이 노래의 핵심을 잘 이해한 것이긴 하니까. 그런 점에서 공영방송심의에서 벌어진 일은 시대착오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주차금지 광고판을 발로 걷어차는 모습이 반사회적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일부 지도층들은 표면적인 잣대로만 심의를 한다. 아니면 그들이 이 노래에서 조롱하는 바로 그 대상들이라서 그런가? 적어도 30년전에 백투더 퓨처라는 영화가 우리 나라에 수입될 당시 웃지 못할 희극이 있었다. 당시 심의위원회에서는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이 근친상간이라고 해서 불가가 나오자 대사를 다르게 해서 통과된 적이 있었다.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처녀인 어머니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인데 영화에서는 그 여자가 어머니인지 아닌지 애매모호하게 처리했다. 이게 한국의 과잉반응의 실체다. 웃자고 하는 농담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친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대통령도 풍자하는 영화를 찍어냈다. 영화 광해의 원조격인 데이브를 보면 대통령이 백악관의 여직원과 외도를 즐기다 복상사 직전까지 가는 장면이 나온다. 미국 사람들은 이것을 대통령 모독이라 보지 않는다. 한국 지도자들만 심각하게 보고 영화를 규제하려고 한다. 물론 현직 대통령을 모독한다면 그건 안되겠지만 불특정한 가상의 인물을 갖고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나라가 시대에 한참 뒤쳐져 있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그런 의식으로 어떻게 국제무대에서 무역하고 외교할 수 있겠는가. 싸이의 젠틀맨은 한국이 시대의식에 국제적으로 보조를 맞추고 있다는 의미를 준다. 영어 몰입교육을 하면 국제화된다는 식의 무지한 의식과는 정반대다. 오히려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해야 국제시민이 될수 있다는 의식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싸이가 한국어로 노래하고 영어로 인터뷰에 응하는 모습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그게 바로 국제화의 참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정 재 형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

[문화카페] 문화산업으로 도시의 미래를

현대인의 중요한 삶의 터전인 도시는 질적 성장이 간과된 급속한 개발로 인하여 미증유의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양적 성장의 이면에는 낙후된 도시 제반시설과 환경오염, 교통난 및 계층 간의 갈등이 잠재되어 있다. 아울러 도시 소비자라고 할 수 있는 시민, 관광객, 기업 및 투자자들은 한정돼 있는 반면 이들의 도시 선택 폭은 계속 넓어지고 있다. 도시간의 경쟁이 심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1980년대 미국의 뉴 어버니즘(New Urbanism)과 같은 도시환경개선운동의 추진을 통하여 정부 및 지자체에서 경쟁적으로 문화산업의 관점에서 도시의 환경문제를 부각시킨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각성한 결과일 것이다. 바야흐로 오늘날의 도시는 구성원들 간의 단절에서 벗어나 도시 구성원들의 보다 윤택한 삶을 위한 관점에서 도시문제를 대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에 구미 각국에서는 지역문화산업을 도시의 미래전략사업으로 선정하고 이를 선점하기 위하여 다각도의 정책을 펼쳐나가고 있다. 이에 부응하여 각 나라의 지방정부들 역시 지역발전을 위한 방법적 수단으로 문화산업에 대한 발전과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에 가장 기민하게 대응한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의 셰필드시가 될 것이다. 셰필드는 원래 제조업으로 발전하던 도시인데 철강 등 주산업의 쇠퇴로 도시자체가 퇴락해가는 긴박한 상황에서 문화산업클러스터로 변신하여 경쟁력을 갖게 된 경우이다. 셰필드시가 1980년 설립된 리드밀 예술센터와 요크셔예술협회의 제안으로 예술ㆍ문화에 관심을 갖고 1986년 시정부주관으로 본격적인 문화산업정책을 추진하게 되는 것은 지역문화산업 발전의 중요한 체크포인트다. 그후 셰필드시는 1998년 문화 및 미디어, 첨단산업이라는 신경제전략을 수립하여 문화산업지구(CIQ)를 지정하고 민간개발회사인 패터노스터(Pater-noster)를 끌어들여 문화산업작업센터를 공동으로 설립하는 등 산업도시에서 문화도시로 이행하는데 주력하였다. 영국의 버밍험, 리버풀, 맨처스터 등의 도심에 설립되어 있는 미디어 지역이나 뉴욕 맨하탄의 실리콘 앨리(Silicon Alley), 일본 도쿄의 이케부크로 일대와 시부야의 비트밸리 구역도 도시 재개발 및 거주공간의 질적 개선을 통해 성공한 사례들이다. 결국 후기산업사회의 도시들은 생존을 위해 다양한 차원에서 도시재생 및 활성화전략에 돌입했고, 그 주된 방향은 도시이미지를 새롭게 하고 다양한 문화 인프라와 이벤트를 도입하는 문화산업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제 지역문화산업 육성정책은 단순한 지역경제정책이나 지방 문화예술진흥정책을 넘어 문예진흥과 지역발전을 동시에 추진하는 전략으로 나아가야 한다. 도시가 생겨나고 발전, 쇠락하는 과정에서 아트홀이나 미술관 등 공공공간을 통한 마케팅의 개념을 접목하고 생태환경 등 자연조건 하에서 인간의 물리적 삶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정책적으로 반영될 때 더욱 효과적인 도시경쟁력 강화가 가능하다는 각성도 도시발전의 중요한 요인이다. 도시발전은 소득 및 고용증가로 대표되는 경제적 번영과 지역민들이 향유하는 문화수준의 향상, 지역사회의 적절하고 건전한 통합, 그리고 지역 내 기업들의 이윤확대 등의 네 가지 측면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문화산업은 오늘날 지역발전에 직접적이고도 중요한 시금석이다. IT기술, 방송통신의 융합 및 초고속 정보통신망의 세계적 실현과 함께 문화산업이 최고의 성장산업으로써 국가 및 지역경쟁력의 중추가 될 날이 머지 않았다. 이 경 모 수원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

[문화카페] 학번이 어떻게 되시나요?

어떤 모임에서 다들 대학 입학년도를 대며 내 학번을 물어왔다. 나는 쌍칠 년도에 대학에 입학했다. 다시 말해 77학번. 그러나 평소엔 내가 대학을 다녔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우리 또래 가운데 대학을 다닌 이가 많지 않아서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국민학교(초등학교)는 거의 다녔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내 학번은 65학번이라 한다. 그러면 그렇게 나이가 많으냐며 놀라는 표정들이다. 그 당시 대학은 안 간 사람이 많지만 의무교육인 국민학교는 거개가 다 갔다. 게다가 최소한 국민학교는 나와야 된다고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학번을 묻는 의도를 알면서도 굳이 국민학교 입학 년도인 1965년도를 떠올리며 65학번이라고 말한다. 내 국민학교 동창들 가운데엔 나이가 나보다 한 살에서 두세 살까지 더 먹은 이들이 많다. 그래도 지금까지 벗으로 지내는데 어려움이 없다. 학번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은 집요했다. 그 자리 사람들은 이름이 많이 알려진 만화가에게도 학번을 물었다. 그는 대학을 안 다녀서 학번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이 또 물었다. 그는 처음엔 웃는 낯으로 자신은 대학을 안 다녔다고 정중하게 말했지만, 다른 사람이 또 묻자 중학교까지밖에 안 다녀서 그때 기억이 가장 강하다며 중학교 다닐 때 날마다 걸었던 바닷길이며 들녘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그런 얘기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왜 학번에 집착을 할까? 그건 아마도 대학 다닌 것만이 자기 인생을 나타내주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런 건 관심도 없다. 오로지 대학을 다녔는가 아닌가를 따진다. 학벌지상주의, 망국병이다. 사실 대학은 이미 학문의 전당이 아니다. 대학은 더 이상 조용히 들어앉아 연구나 하던 상아탑이 아니고, 오로지 직업학교일 뿐이다. 전태일은 자신에게 대학생 친구가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시절엔 그 정도로 대학생이 귀했다. 그런데 지금은 너나나나 다 대학에 간다. 그래서 당연히 대학 입학년도가 학번이다. 그러나 나는 오래된 사람이라 국민학교 입학년도가 더 좋다! 어쨌든 65학번! 지금은 고등학교 졸업생의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한다. 대학의 대중화가 실현되었다. 그런데 누구나 다 가는 대학, 오히려 안 가면 안 될까? 개나 소나 다 가니까 다녀 두어야 한다고? 그러면 스스로 개나 소가 되는 격이다. 내 생각엔 중고등학교 때 일찌감치 재능이 발견되거나, 하고 싶은 일을 발견했으면 굳이 대학을 안 가도 무방할 것 같다. 대학을 가는 목적이 직업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런데 대한민국 사회에선 학번 때문에 대학을 다녀야 할 성싶다. 나이 차를 잊고,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 어린 사람을 벗으로 사귀는 것을 망년지우(忘年之友), 혹은 망년우라 한다. 대표적인 망년우는 조선 시대 사람으로 스스로 간서치(看書痴ㆍ책만 보는 바보)라 칭하며 책과 벗을 두루 사귄 이덕무이다. 이덕무는 일곱 살 아래인 유득공과 허물없이 지냈으며, 열세 살이나 어린 이서구와도 거리낌 없이 어울리었다. 이덕무가 늘 애틋하게 여기며 가까이 지낸 망년우 가운데 한 사람인 박제가와는 아홉 살이나 나이 차가 졌다. 흔히 하는 말로 객지에서 열 살 정도 차이는 묻지도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벗으로 대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나이가 대학과 결부되고 보니, 학번을 물어봄으로써 넌지시 나이를 알아내려고 한다. 새로운 장유유서 정립 차원일까? 어쨌든 맘에 안 드는 세상! 박 상 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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