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가 태어났고, 삼십대의 구스타프 말러가 시립 오페라극장에서 지휘와 작곡 활동을 했던, 독일 음악 전통의 도시 함부르크를 대표하는 북독일 방송교향악단이 처음으로 내한해 말러의 첫 번째 교향곡을 연주했다. 필자 개인의 경험을 고백하건대, 80년대 대학시절엔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던 구스타프 말러의 존재를, 빈 국립 오페라극장 로비에서 로댕의 말러 두상 조각을 보고서야 처음 알게 되었고, 90년대 중반 카네기홀에서 보스톤 심포니의 교향곡 9번 연주를 접하면서 신선한 충격과 함께 그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사실 그가 생존했던 시기에 그의 작품은 거의 연주된 적이 없었고, 1911년 사망 후에는 유럽의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기 시작했지만 1960년대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번스타인이 교향곡 전곡을 연주했을 때까지도 그의 작품들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낯설고 기괴한 음향, 충격적 화음이나 듣기에 다소 거북한 불협화음들이 자아내는 감정적 과잉과 괴팍한 주관성, 그리고 급변하는 신경증적 면모들은 정갈한 음악에 익숙한 사람들과 음악을 통해 정신적 고양을 추구했던 사람들로 하여금 엄청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동시대 빈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저열한 음악이라는 독설을 날리고,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말러의 교향곡이 지루하고 장황하다고 깎아내렸다. 『타임』지는 음울한 멜랑콜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의욕을 잃을까 두렵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말러가 세상을 떠나 100년도 더 흐른 지금, 그의 음악이 널리 강한 파급력을 행사하며 빛을 보고, 나아가 열광하는 광팬들로부터 끊임없이 각광받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말러의 음악은 다양한 메시지의 혼재, 갈등과 모순, 역설의 요소들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음악과는 다른 모더니즘적 특징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작곡한 음악의 독특한 색깔과 성격을 이루는 원천이 바로 지독한 열등감과 슬픔의 극복이라는 사실에 있다. 체코의 작은 시골에서 평범한 유태인의 집안에 태어난 말러는 삼중으로 이방인이었기에 주류층으로부터의 시달림과 인종적 차별로 고통을 받았고, 5살 어린 딸의 급작스런 죽음, 지극히 사랑했던 부인 알마의 배신, 그리고 51살에 세상을 떠나게 했던 불치병은 슬픔의 근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태생적 열등감과 삶의 슬픔이 주는 극도의 절망과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역경에서 힘을 얻어 자신의 창조력을 배양하는 에너지로 바꿨다. 격동의 세기말 빈은 그가 예술가로서의 자양분과 영감을 주기에는 최고로 적합한 도시였다. 신세기로 향하는 개혁적인 변화의 흐름과 함께 각 인문문예 분야의 거장들의 숨결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말러의 창조적 음악은 이러한 시대의 희망적 흐름과 공명하면서 그 미래를 내다보았다.
또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의 평화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귀족과 평민,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새로운 것과 낡은 것,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이기주의와 이상주의, 성적 방종과 금욕, 품격과 천박함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자신감과 나약함이 함께 맞물려 있던 세기말 빈의 사회적, 문화적 풍경은 지금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모습과 똑같이 닮아있다. 그래서 말러의 삶과 음악은 현대에서도, 아니 현대에서 더더욱, 인간과 사회의 진보 과정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임형균 톤마이스터
오피니언
임형균
2015-06-17 2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