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용인경전철에 문화의 힘을 싣다

전국 각 지역에 있는 문화재단들의 상황이 어렵다. 문화융성의 시대에 무슨 어울리지 않는 말인가 하겠지만, 필자가 전국지역문화재단연합회 회장으로 직접 만나서 들어본 그들의 부정적 상황은 내년이라고 나아질 것 같지가 않다. 솔직히 각 지자체의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문화를 내세우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용인의 경우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오래 전에 용인 경제에 적신호가 켜진 후, 상대적으로 시민이 체감하는 문화 욕구는 커져만 갔다. 하지만 용인 경전철 건설로 인해 발생한 부채가 경제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다보니, 자연스레 경전철이 경제난의 화두가 되었고 문화는 관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얼마 전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용인시가 8년 동안 갚아야 할 부채를 단 3년 만에 조기 상환하게 된 것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부채가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게 되었고, 경전철 이용객 수도 빠르게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이용객 숫자가 아니라 이용객을 위한 부가 가치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해결방안의 실마리를 문화예술에서 찾고자 한다. 경전철이 문화예술을 싣고 달리는 문화 공간으로 바뀐다면 어떨까. 경전철을 교통수단이라는 1차원적인 의미를 넘어 모노레일이 갖는 특성을 십분 발휘해 남녀노소 누구나 한번쯤 타 보고 싶은 재밌는 경험의 산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문화예술을 함께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면 그 가치는 더욱 상승할 것이다. 용인시민이라면 누구나 함께 즐기며 탈 수 있는 것, 용인에 오면 꼭 타보고 싶은 것으로 이미지화 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물론 혹자는 문화예술 역시 돈 없이 될 수 없다며 반감을 표할 수도 있다. 고비용이 허락된다면 고품격의 문화예술 콘텐츠를 발현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꼭 돈이 있어야만 문화예술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리고 싶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필자가 몸담고 있는 용인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용인거리아티스트’라는 문화 브랜드의 성공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재단 출범과 함께 탄생한 용인거리아티스트는 문화예술에 애정을 품은 아티스트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지난해 거리에서 500회가 넘는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다. 거리 공연에 낯설어하던 시민들이 적극적인 호응과 격려를 보내며 즐거움을 함께 나눴다. 이는 거리라는 삭막한 공간에 문화예술이 자연스레 스며든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번에는 거리가 아닌 경전철로 공간을 옮겨보고자 한다. 거리에서 시민들이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용인거리아티스트가 전하는 문화예술을 접하는 이용객은 경전철을 다시 찾고 싶은 공간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용인거리아티스트는 시민의 삶에 새로운 문화적 충전의 기쁨을 안겨줌과 동시에 어려울 때일수록 문화예술이 또 다른 혜안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용인 경제난의 골칫거리였던 경전철의 이미지 전환에 문화예술이 일조하리라 기대한다. 어쨌든 작금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야 하는 과제를 전국의 재단 모두 안고 있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을 갖는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용인시민을 위해 ‘문화를 싣고 달리는 용인경전철’이 시민을 위한 문화적 가치 상승의 길이라면, 이렇게 문화예술과는 조금은 다른 하드웨어를 적극 활용하는 방안이 오늘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해본다. 김혁수 전국지역문화재단연합회 회장

[문화카페] 박물관은 항구적, 비영리 기관

박물관, 미술관 이란 문화예술학문의 발전과 일반 공중의 문화향유 증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설립된 기관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환경의 유형적무형적 증거물로서 학문적예술적 가치가 있는 자료를 수집관리보존조사연구전시교육하는 시설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최근 박물관에서는 창의 체험 학습의 새로운 장이 열려 활발하게 체험 교육의 중심 기관으로 박물관의 역할이 증대되고 있는 현상이다. 국제박물관협의회 아이콤(ICOM)은 박물관을 발전시키고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박물관 간의 교류와 국제협력을 촉진하기 위하여 1946년 11월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유네스코(UNESCO)의 협력기관으로 창립되었다. 국제박물관협의회의 박물관 정의를 살펴보면 두 가지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다. 1. 항구적 기관이어야 한다. 2. 비영리 기구여야 한다. 는 점이다. 첫 번째 개념인 항구적 기관이어야 한다는 점은 한시적이거나 일시적인 기관이 아니고 지속가능한 기관이란 뜻이다. 박물관들이 소장한 문화유산은 국가를 넘어 인류의 문화유산이기에 영구히 보존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박물관 그것이 항구적인 기관이 되려면 도민의 사랑이 절대적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도민의 애정과 참여로 함께 만들어 가는 문화운동이 박물관 문화에 지속적으로 일어날 때 박물관은 한층 발전적인 모습으로 변모될 것이다. 그러므로 박물관은 단수 문화가 아니라 복수의 문화 즉 공동체의 문화라는 의미가 강조될 때 항구적이란 의미에 답이 될 것이다. 선진국의 박물관 문화란 그 지역민들의 적극적 참여로 가꾸고 발전되어 가는 모습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제 우리도 이러한 문화를 일구어 내는데 적극적인 동참이 요구된다. 박물관은 하루아침에 만들어 지지도 않으며 문을 닫아도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에 항구적이란 용어는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된다. 두 번째 개념인 비영리 기구여야 한다는 점은 영리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의도된 내용은 그 많고 중요한 유물을 돈으로 다 헤아릴 수 없다는 이야기다.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과 경영에 도민의 지혜가 모아 지고, 기증되고 기부하는 사회의 아름다운 미덕이 있을 때 온전히 박물관의 역할을 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경기도박물관 20년을 맞이하면서 자랑스러운 점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많은 유물 기증(1만1천851점, 48.9%)이 이루어진 박물관이란 점이다. 도내의 뜻있는 가문과 개인들이 소장유물 기증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준 아름다운 박물관이다. 그리고 매우 가치 있는 문화유산을 훼손, 도난. 멸실의 위험에서 건져 내어 유물들을 훼손 부분을 복원, 보존처리 후 다양한 전시로서 도민들에게 되돌리는 작업을 하였다. 공공성을 답보한 비영리 박물관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전보삼 경기도박물관장

[문화카페] 꺼벙이 억수

내가 사는 지동은 수원에서 낙후마을로 꼽히는 동네다. 게다가 몇 해 전에는 끔찍한 사건까지 발생하여 지동의 이미지를 잔뜩 흐려놓기도 했다. 이런 지동이 얼마 전부터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고은 선생을 비롯해 수원 지역에 사는 시인들이 찾아와서 자신의 시를 골목마다 적어놓았는가 하면, 이에 질세라 화가들도 어려운 걸음을 해 벽마다 그림을 그려놓았다. 이래서 소위 수원의 명소(?)인, ‘시골목’과 ‘벽화마을’이 탄생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동에서만 40년을 살아온 우리 집에도 경사가 찾아왔다. 내가 동화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 주민센터에서 우리 집 담에 동화 속에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되살려 준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 집은 갑자기 유명세(?)를 타게 됐다. 말끔해진 담장에 난데없이 개구쟁이들이 뛰어나와 웃고 떠들어대니 오고가는 이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촌티 나는 꺼벙한 모습의 억수를 보고는 미소를 띠거나 아는 체를 한다. 웬만한 학교 도서관에 억수의 책이 보관돼 있어 책을 읽은 아이들이 많고, 설혹 읽지 않은 아이라 할지라도 입소문으로 대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내에 나갈 때나 집에 들어올 때 우리 집 담의 억수를 보면 기분이 좋다. 꺼벙한 모습에 쑥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억수를 볼 적마다 억수 같은 어린이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헌 옷을 입고도 기죽지 않는 억수,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억수, 혼자 사는 외로운 할머니의 말벗이 되어준 억수, 친구가 팔을 다쳤을 땐 가방을 대신 들어준 억수, 친구들에게 욕이나 상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 억수, 친구들 앞에서 으스대거나 잘난 체 하지 않는 억수… 동화 속에서 억수는 친구들의 투표를 통해 학급을 위해 가장 착한 일을 한 아이로 뽑혀 ‘학급별’이 된다. 선생님은 억수의 가슴에 별을 달아주며 묻는다. 친구들이 왜 억수를 학급별로 뽑았는지 아냐고. 억수는 부끄러워 대답을 못하고 얼굴만 붉힌다. 대신 친구들이 억수의 좋은 점을 하나하나 말해 준다, 나는 어른들에게도 바람이 있다. 우리 집 억수를 본 사람들이 오랜 동안 잊고 지낸 저 어린 날들을 기억해 주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다.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누군가를 그리워하던 소년, 인생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던 소년… 바라건대, 착한 모습의 우리 집 억수가 그들의 가슴 속에서 잠자고 있는 저 꽃잎 같은 추억들을 하나하나 일깨워 주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문화카페] 당성, 다시 한 번 생각해야할 문화유산

한려수도를 자랑하는 다도해와는 다르지만, 경기만도 서녘으로 기울어가는 햇살을 반사하는 은빛의 갯벌과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작은 섬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정말 세계 어디서도 잘 볼 수 없는 절경의 하나일 것이다. 특히 화성의 바닷가에 있는 당성의 꼭대기, 그 유명한 망해루터에서 내려다보는 서해는 정말 일품이다. 그 옛날에 신라시대의 대문장 고운 최치원도 눈물을 흘리며 적은 감동의 시를 남겼고 고려말의 목은 이색 선생도 망해루에 서서 서해를 내려다보며 떠오르는 당성의 역사에 감동하여 글을 남겼다. 시대의 대문호들이 그런 글을 쓴 것을 보면 분명 당성은 우리가 모르는 그 무엇이 있는 곳이다. 아마도 통일을 고민하는 이 시대에 새로운 면으로 다가오는 유적이기도 하다. 당성은 당항성이라는 이름으로 삼국사기에도 보이고 숱한 역사서에 그 이름이 출현하고 있는 저명한 성이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일찍이 이 성을 국가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망해루에 오르면 북한산을 비롯하여 서울 근교 경기도 서부의 모든 산들이 사방으로 보인다. 어쩌면 과학박물관의 우주관에 들어서서 비치는 세상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럴 정도이니 전략적인 요충은 틀림없을 것이고 바로 밑에 수로가 있어서 황해를 누비는 배가 들어왔을 당항포, 은수포, 화랑포, 마산포 등등 항구가 연이어 있었으니 전략적 요충은 누구가 보아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한반도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서 출발한 신라가 이 성을 차지하고는 절대로 내놓지 않았던 그 이유를 알만하다. 바로 당나라와의 교역로를 지키는 성이었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실크로드의 중간관문격인 중국 서안의 법문사를 방문하였을 때 지하수장고에서 보았던 금으로 만든 잔과 그릇들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는데 바로 경주 고분에서 출토된 것들을 연상케 하는 점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그릇들도 이 곳 당성을 지나지 않았을까? 당성이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은 바로 우리나라 불교의 거목인 원효와 의상의 전설 때문일 것이다. 의상은 당나라로 공부하러 갈 때 이 당성에서 출발하였고 원효는 이곳으로 오다가 해골의 물을 마시고 깨닫는 바가 있어서 의상과 헤어져서 경주로 돌아가 해동종이라는 우리나라의 특별한 불교종파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설화는 바로 황해 속에서 고대사에 있어서 당성은 바로 중국과의 교역만이 아니라 문화교류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관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백제의 의자왕이 이곳을 탈환하려고 할 때 신라의 선덕여왕이 황급히 당에게 구조요청을 하여 막아내는 것을 보면 땅이나 신라 쌍방에 큰 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 통일의 시대에 당성이 의미가 있을까? 당성이 있는 경기만 일대는 삼국의 세력이 교차하던 곳이었지만 결국 신라의 진흥왕에 의해서 점령된 이후에 삼국통일을 할 때까지 한 번도 빼앗기지 않은 곳이다. 신라의 선덕여왕의 원교근공의 전략으로 백제를 포위하고 압박하여 결국 무너뜨리는 과정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통일이라는 과제를 생각하는데 역사적인 모델을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통일을 위하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력들 속에서 장기적인 국제 전략으로 정말 끈기 있으면서 유연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면 통일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명하게 대처 얼마 전 중국 전승절에 참석하여 천안문루에 시진핑과 같이 선 박대통령의 모습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속의 당성의 이미지와 교차되는 것은 바로 그런 점 때문일 것이다. 배기동 한양대 교수국제박물관협회 국가위원회 의장

[문화카페] 문화 공장

굴뚝산업으로 대변되는 공장의 건설은 산업혁명 이후 발전과 성장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 역시 노동자의 피땀으로 피어 올린 굴뚝의 연기가 풍요로운 미래를 꿈꾸는 활기찬 밑그림이 되어 기적처럼 전후의 폐허를 극복하고 산업화에 성공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구 온난화에 의한 기후변화와 화석에너지 위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굴뚝산업은 더 이상 희망과 발전의 상징이 아니라 기피산업이 되었고, 사는 게 나아지다 보니 몸이 힘든 일을 하려는 사람마저 급감해 공장의 일자리는 외국인 근로자들로 겨우 채워지고 있다. 산업구조의 변화라는 물결 속에 굴뚝은 경제를 살리지도, 일자리를 만들지도 못하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게 되었다. 또, 도시 속의 공장 건물과 굴뚝은 효용가치가 낮아지자 급기야는 낡고 스산한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공해, 악취, 환경파괴 등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이제는 그렇게 낙후된 공간에 새로운 기능을 도입하여 쾌적하고 살기 좋은 공간으로 바꾸는 일이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도시 재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용도를 다한 기존의 산업 폐공간에 문화와 예술의 옷을 입히는 작업이 전국 도처에서 한창 진행 중이다. 문화공장, 예술공장, 창작센터라는 이름을 걸고 도시 이미지와 환경개선은 물론 지역민들의 문화예술 향유 증대와 예술가들의 창작 활성화에 기여하면서 녹색산업과 창조경제와의 융합을 꾀하고 있다.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은 공장발전소 등 버려진 산업기반시설에 문화와 예술의 옷을 입히는 중요한 사례들을 보여준다. 2000년, 템스 강변의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를 현대미술관으로 변신시킨 테이트 모던은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건축물이라는 평판까지 얻었고 연간 방문객이 50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뉴욕 브루클린에서도 조선제약설탕공장 등이 신예 예술가들의 산실로 다시 태어났다. 캐나다 토론토의 디스틸러리 디스트릭트는 양조장이 문을 닫은 후 2003년부터 문화예술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붉은 벽돌로 지은 40여 개의 빅토리안 시대 건축물들이 현대식 갤러리, 극장, 레스토랑,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변신하여 토론토의 명소가 되었다. 중국 베이징 다산쯔(大山子)지역의 군수공장 지대도 예술타운으로 탈바꿈했다. 798 예술특구라고 불리는 이곳은 300여 개에 달하는 창작실을 비롯해 갤러리, 패션숍, 스튜디오, 레스토랑, 출판디자인 회사 등이 밀집해 있다. 문화창의산업기지로 세계적 유명세를 얻고 있다. 우리의 경우 서울 한강변에 위치한 당인리 화력발전소를 창작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2000년 폐쇄된 마포석유비축기지도 내년 말 상설 공연장으로 새롭게 문을 연다. 최근 부천시는 생활쓰레기를 소각 처리하다가 15년의 사용 연한을 끝내고 2010년 가동을 멈췄던 폐소각장을 문화예술공간 부천 미래문화 플랫폼으로 바꾸는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문제는 이 문화예술공장들이 과거의 공장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노동력과 자본만 투입해서 기계를 가동하면 제품이 뚝딱 나오는 그런 곳이 아니고 단기간에 큰 이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헤아려야 한다. 어쩌면 손해 보는 장사일 수도 있다는 점을 알고 시작해야 한다. 씨 뿌리고 물 주고 거름 주며 한낮의 뙤약볕을 견뎌내는 수고가 필요한 곳이 문화공장이다. 그래야 공장은 문화예술의 영예로운 훈장을 달고 다시 우리에게 꿈과 위안을 주는 문화공장으로 새롭게 돌아올 것이다. 김동언 경희대학교 아트퓨전디자인대학원 교수

[문화카페] 전국지역문화재단, 용인에서 소통의 축제

문화융성의 비전을 제시한 정부는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융성위원회를 통해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용인문화재단도 이러한 정부의 정책 방향에 적극 공감하고,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문화융성을 위한 정책 진행과정에서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과거와 같은 형식, 즉 갑의 입장에서 을이라는 문화를 무료 혹은 할인 혜택을 통해 제공했으니 가서 즐기라는 단순한 지원 방식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통을 통한 문화융성, 그것만이 정답이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소통을 위한 길은 어디에 있으며 누가 함께 갈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문화재단에서 찾을 수 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문화는 예술은 어려운 시기마다 경제적 논리를 떠나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안겨주었다. 그 현상에 대한 성공적인 결실과 비전이 문화융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문화재단과 문화융성으로 가는 길 간의 관계를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문화융성을 지향하는 문화재단이 현재 전국에 70여개가 있다. 그중에서 특히 사람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기초자치단체에서 설립된 42개의 문화재단은 전국지역문화재단연합회라는 이름으로 소통하고 있다. 혹자는 지역 문화 소통의 중심이 지역 예술인이나 지역 문화원이 되어야 한다는 시각으로 문화재단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보기도하지만, 기본적으로 예술인은 예술창작 활동이, 문화원은 향토문화 연구 개발이, 존재의 이유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러한 예술창작과 향토문화를 아우르고 사람들을 위한 문화예술로 사업화시키는 것이 문화재단의 역할이다. 용인문화재단의 경우, 2012년 출범 때부터 지역 문화예술인들과 이러한 의미를 공유하고 소통함으로서 모범적인 성과를 창출해내고 있다. 매년 용인예총과 민예총 그리고 용인문화원은 용인문화재단과 함께 문화로 소통하고 예술로 하나가 되는 축제를 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국지역 재단을 위한 소통의 자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침 지난 9월 1일과 2일, 양일간 용인포은아트홀 및 용인시 일원에서 지역문화 전성시대, 지역문화재단 사용설명서라는 주제로 지식공유포럼이 열렸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전국지역문화재단연합회와 (재)용인문화재단이 공동주관한 이 자리는 소통을 위한 열린 축제의 형식으로 펼쳐졌다. 재단 간의 공유 프로그램이지만 그 소통의 중심에 시민들을 참여시킴으로서 정부와 재단과 시민들이 함께 즐기는 시간으로 승화되면서 큰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포럼은 배우 조재현이 내 삶의 원동력, 콤플렉스라는 주제의 강연으로 시작되었는데 이 자리에는 전국지역문화재단연합회 소속 재단 임직원 및 예술인 200여명과 용인시민 300여명이 함께 했다. 한마디로 공공기관과 예술인 그리고 시민이 함께 문화를 나누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아울러 문화융성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실질적인 성과로 도출된 지역문화진흥법의 성공적인 시행을 위한 조광호 연구원의 지역문화 정책 환경의 변화로 인해 지역문화진흥 체계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에 대처하는 자세에 대한 제언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참가한 재단들은 지금까지의 보이지 않는 경쟁의 시각에서 벗어나, 우수 사례 발표를 통한 정보 공유 및 발전방향 논의의 시간을 이끌어 냈다. 결론적으로 전국지역문화재단연합회가 용인에서 만나 함께 소통하면서 즐긴 이번 포럼을 통해 문화재단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문화융성을 위한 역할과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혁수 전국지역문화재단연합회 회장

[문화카페] 음악 예찬

며칠 전 장례식장에 갔다가, 부친을 떠나보내고 슬픔에 젖어있는 처남댁으로부터 들었던 얘기가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처남댁은 임종을 앞둔 병상의 부친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부친이 몹시도 좋아해서 딸에게도 자주 불러주었던 가곡 비목과 기다리는 마음을 귀에 대고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승에서 부모 자식 간의 특별했던 사랑과 인연을, 두 사람만의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영원하게 이어주는 것이 바로 음악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렇듯 음악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영원불멸한 관계로 맺어주는 마법과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사람은 음악과 더불어 살면서 누구에게나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좋아하는 노래와 음악이 있다. 일제시대, 한국전쟁을 거쳐 산업화 시대를 힘겹게 살아오신 아버지는 살아생전 옛 노래 황성옛터와 두만강을 좋아하셔서 가끔씩 노래를 불렀는데 시대적 애환과 슬픔이 짙게 묻어났다. 보다 도시적이었던 어머니가 밥상을 차리거나 빨래를 널면서 불렀던 패티김과 홍민, 김추자의 노래들은 희망찬 미래를 위한 찬가이자 고단한 삶을 위로해 주는 연가였다. 음악이란 무엇일까? 음악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든 인간의 삶에서 떨어질 수 없는 일상이었고 또한 다양하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노래는 인류와 영원한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으며, 오늘날까지 우리는 노래가 없는 문화권을 알지 못한다. 학자들에 의하면 인류는 6만여 년 전부터 동물의 뼈로 파이프나 피리를 만들었으며 점토나 청동으로 딸랑이를 만들고 북과 종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초의 악기가 출현하기 이전에, 인간이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때부터 음악은 이미 존재해 왔다. 인간은 그 음악의 신비한 위력과 영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살아가면서 필자가 접했던 음악들은 학창시절 라디오를 통해 알게 됐던 비틀즈와 아바(ABBA)의 팝송, 동시대를 살아가며 친구들과 감성을 공유하게 했던 해바라기나 들국화의 국내 가요, 소위 레코드 빽판을 통해 젊음의 열정과 세상에 대한 반항기를 불태웠던 하드락과 헤비메탈, 미국 유학시절 접하게 된 묘한 매력의 재즈, 평생 직업으로 이끌어준 클래식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와 같은 노래와 음악들은 알고 보면 음계나 조성, 화성과 같은 서양음악의 기본 원리를 바탕으로 작곡된 것이다. 유럽 문명의 음악 원리가 오늘날 세상의 모든 음악 속에 알게 모르게 깊숙이 깃들어서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 음악 원리가 바흐와 헨델을 통해 정립되고 하이든과 모차르트에 의해 발전되어 베토벤이 집대성한 사실은 교과서에서 배워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이들의 영향력이 우리의 옛 노래 황성옛터나 트로트, 힙합 같은 대중가요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게 되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서양 음악은 악기가 발달하면서 18세기 말 감정미학으로 대표되는 대중의 노래로부터 독립하여, 감정이나 가사를 묘사하는 도구가 아닌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면서 순수기악음악으로 상징되는 절대음악으로 진화했고, 이로써 인간은 음악을 통한 지적 활동을 통해 보다 더 정신적인 것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니체는 말했다. 음악이 없는 삶은, 잘못된 삶이다. 음악이 고단하고 지친 인간의 삶에 위로가 되고 나아가 보다 더 숭고한 정신적 안정을 제공하고 있음을, 인류의 대철학자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임형균 톤마이스터

[문화카페] 예술영화

예술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인간사에서 싫든 좋든 맺게 되는 경쟁과 대립의 관계들은 우리네 삶을 황폐화시킬 소지를 안고 있다. 와중에 예술이 인본 유지의 자양분이 됨으로써 사회의 건강성이 지탱되는 것이다. 세계대전이든 국지전이든 전쟁 이후 나타났던 수많은 예술사조의 흐름과 역할이 상흔치유에서 이뤘던 결과의 역사가 이를 설명해준다. 음악, 미술, 연극, 무용, 문학, 건축, 영화 등 예술은 대부분 인류의 삶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태생되고 진화한 것들이다. 다만 영화는 태동기가 정확하게 짚어지는 유일한 예술이다. 하여 제7예술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어지기도 한다. 1895년, 20세기를 눈앞에 둔 격동의 시기에 홀연 등장한 영화는 인류의 지형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최초로 공개된 영화중 <기차의 도착>은 시사점이 큰 영화다. 건물 안의 깜깜한 어둠 속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기차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공포에 떨었던 사람들이 최초의 영화관객이 되었다. 영화의 대중 파급력은 발명기 영화에서부터 위력을 보였던 것이다. 영화에 관한 예술논쟁이 있다. 어떤 이는 예술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상품이라고 주장하는, 영화의 산업적 성격 때문에 생긴 논쟁이다. 담론의 결과가 어찌됐든 요즘은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다. 경계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보편화된 구분이다. 한편 모든 영화인들은 예술가를 자처한다. 상업영화에 기운 활동을 한다 해서 스스로 예술인 아닌 상업인이라고 고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예술영화든 상업영화든 광의의 영화가 예술이라는 불변의 믿음에 토대한 것이다. 예술영화를 재미없는 영화로 치부하는 이들이 있다. 통속성에 경도된 이들의 왜곡된 평가라 하겠다. 예술영화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생명력으로 하는데, 진지한 성찰은 때로 불편한 진실을 포함한다. 그렇기에 외면하고 싶은 의지가 작동되어 그런 편견을 갖게 되는 것이리라. 재미는 통속성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진실성에 대한 탐구가 세계인의 관심과 지지를 받았던 사례들이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제1차 세계대전은 아방가르드를 남겼고, 제2차 세계대전은 레오리얼리즘, 누벨바그 영화운동을 남겼다. 이러한 사조의 영화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기조로 하면서 인본주의에 대한 환기는 물론, 예술로서의 영화의 지평을 넓혔던 것이다. 예술영화들은 시장 유통에 앞서 국제영화제를 거치는 경우가 많다. 공인된 영화제에서 얻어낸 평가와 관심을 관객들의 관심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유통의 동력을 얻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우리 영화, 특히 예술영화의 행로는 걱정스러운 바가 있다. 몇 년 동안 칸, 베를린, 베니스 등에서 열리는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이렇다 할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어 드는 걱정이다. 국제영화제 수상이 전가의 보도는 아닐지라도 그 나라 영화의 위상과 전망을 읽는 척도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예술영화의 부흥을 위해 두 영역의 분발이 요구된다. 한국영화계의 큰 손인 4대 메이저 배급사들의 행보와 관객들의 선택이 그것이다. 자본과 관객이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두 축이기 때문이다. 영화인들은 자본과 관객이 있는 곳에서 행복하기에 인력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다. 한국 영화가 예술로서의 부흥기를 구가하는 품격 높은 영화의 시대에 살고 싶다. 김영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인하대 교수

[문화카페] 신 연극 100년에 치료비 없어 죽는 배우들

광복70년을 맞이하는 대한민국에 수많은 행사가 기획되고 전국 주요도시에서 열리고 있다. 당연히 경축하고 기뻐하며 그날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고 반성하며 미래를 열어야 한다. 당분간은 수많은 매체와 기관들이 다투어 다룰 테니 필자는 이 기쁜 날에 다소 우울한 젊은 예술가들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려 한다. 지난 6월에 우리 예술계는 두 명의 젊은 예술가들을 속절없이 저세상으로 보냈다. 무명의 연극배우 김운하가 고시원에서 가난에 시달리다 지병을 치료하지 못한 체 쓸쓸히 죽어갔고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독립영화계의 주목받던 배우 판영진이 힘들다는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2011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이 생활고로 세상을 등지며 젊은 예술가들의 삶이 조명되는 듯했으나 문화사각지대의 젊은 예술인들은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필자 또한 연극인으로 평생을 살아가고 있으니 그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 또한 젊은 연출가 시절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잡일로 생활비를 벌었고 정작 연극으로는 언감생심 수입은커녕 지출이 훨씬 많은 처절한 연극 인생을 겪어왔다. 하지만 이미 연극을 선택한 순간부터 수 없이 들어왔던 말들 연극하면 배고프다 라는 고유명사화 돼버린 언어를 접하고도 내가 선택한 일이니 힘들어도 버틸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것은 필자의 선배들이 겪고 필자가 겪은 그 고생들을 후배들이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 땅에 신 연극이 들어온지 100여 년이 되지만 모든 것이 변함에도 배고픈 연극인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유를 얻기가 그리 간단치는 않겠지만 오랫동안의 예술에 관한 나라의 무관심과 무지 거기에 더해 예술인들의 목적만 있지 생활은 없는 어쩌면 무관심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전통극이라 할 수 있는 탈극 인형극 그림자극 창극 등이 자료도 부족하고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이유는 배우의 직급이 너무나도 낮았고 천하게 여겼으며 나라에서 연극을 관장한 기관도 조선시대 산대도감 정도 그것도 잠깐일 정도로 관심을 얻지 못하였음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배우라는 직업이 천대받고 가난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만들고 당연함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신연극도 유학생 몇몇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것도 주로 초창기에는 민초들의 눈을 어둡게 만드는 최루성 신파극에서 친일 국민극 까지 일제정책의 수단으로 많이 이용되어 진정한 예술과 복지 환경 등을 같이 생각하며 오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해방 후에도 연극은 좌우로 나뉘어 갈리게 되었고 삶의 질보다는 이념논쟁을 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 625전쟁과 더불어 국립극장과 국립극단이 탄생하고 60년대 이후에는 여러 극단과 예술가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 즈음은 배고픔에 대한 예술가들의 성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가난했고 먹고살기 바빴으니 예술가들이 물질적으로 풍족함을 생각하기에는 사치였을 것이다. 광복70년을 맞는 지금 위정자들은 문화융성을 얘기하고 한류를 숭배하며 문화강국을 외쳐대고 있지만 정작 젊은 대부분의 예술가의 삶이 어떠한지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것 같다. 중요예술의 창작인들 70% 이상이 달에 백만 원 미만의 수입을 얻고 문화복지에는 희귀한 규정들로 인해 거의 대부분이 혜택을 못 받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회당 수천만 원을 버는 한류스타 또는 대형스타들의 주머니를 채우느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희생당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위정자들은 문화 복지의 낮은 곳을 봐야한다. 청년실업 해결의 첫 걸음은 평등한 기회부터 시작해야 한다. 장용휘 수원여대교수연출가

[문화카페] 공연예술 단상

공연예술계에 투신(投身)한 지도 벌써 25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 일을 처음 시작했던 당시에는 공연기획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펼쳤던 곳이 몇 개의 주요 신문사나 방송사, 그리고 손에 꼽을 정도의 기획사 몇 곳이었다. 전국적으로 공연장의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았고, 공연장의 사업영역은 대관에 치우쳐있었으며 공연기획이라는 업무영역 자체가 거의 없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도 지방의 상당수의 공공극장은 기획업무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최근 10여 년 동안 우리나라 공연예술계의 제반 환경은 괄목할 만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984개 공연시설 중 681개 시설(69.2%)의 개관과 공연기획사의 60% 이상의 설립이 2000년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만큼 공연기획의 역사가 일천(日淺)하다고 할 수 있겠다. 공연예술이라는 기호가 국민들의 삶에 자리하게 되기 시작한 때가 2000년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공연예술과 관련한 통계의 필요성도 이때쯤 대두되기 시작했다. 2001~2002년 엘지아트센터에서 공연되었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흥행성공 이후 공연예술이 우리나라에서도 산업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100억 원대의 제작비와 7개월간의 장기 공연 등으로 화제를 모았고, 94%의 유료 객석점유율을 기록했다. 또한 총 244회 공연에 약 24만 명의 관객이 들었으며, 최종 매출액 192억 원, 20억 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2003년 장예모 감독 연출의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펼쳐졌던 야외오페라 <투란도트>에 제작감독으로 참여했던 필자의 기억에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성공은 <투란도트> 공연 투자 유치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으며, 그 이전까지 영화에 몰렸던 문화예술관련 투자가 공연으로 이동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뮤지컬시장의 성장은 공연예술계에 본격적인 관객개발과 마케팅 기법 도입을 이루게 했으며, 이는 문화예술시장 전반에 파급되었다. 또한 문화예술의 산업화에 대한 인식과 문화예술경영의 필요성을 대두시켰으며 한국 대중들의 문화적 욕구 증대와 맞물려서 그 시장은 급격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적인 팽창에 비하여 질적으로는 그 발전의 속도가 이에 따르지 못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4 공연예술실태조사에 따르면 공연시설 수는 총 984개, 공연장 수는 1천227개, 종사자 수는 1만1천738명, 매출액은 4천142억원 규모라고 한다. 공연예술계 환경의 변화를 최근 5년 전과 비교해 살펴보면, 매출액으로만 대비하더라도 2008년 2천303억원에서 2013년 4천142억원으로 5년 만에 무려 80%, 매년 12% 이상의 성장률을 보여주고 있다. 관객 수는 2008년 2천380만여 명에서 2013년 3천965만여 명으로 매년 10% 이상의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다. 양적인 성장의 속도가 가파르다. 그러나 전국 문예회관 평균 재정자립도는 18.6%에 불과하며 공간가동률은 50%내외를 기록하고 있다. 국민들의 혈세 수백억원을 들여 건립한 시설들의 현주소이다. 공연장, 특히 공공공연장은 한국 공연예술계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그만큼의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일들이 수시로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공공공연장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공연장의 경영을 아무한테나(?) 맡긴다면 성장하고 성숙되어가는 문화예술 환경에 역행하는 퇴행적인 결과들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공연장이나 문화예술단체의 운영 및 경영책임자는 오랜 경험과 전문성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그 자리들을 선거 승리의 전리품처럼 자치단체장의 보은인사나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활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중앙정부 또한 마찬가지다. 참으로 개탄할 일들이다. 수요자 중심, 즉 다시 말하면 시민들의 행복을 위한 판단이 아닌 정치인들의 그릇된 결정으로 인한 낭비들이 판치고 있다. 문화예술회관은 전국적으로 약 207개에 달한다. 이제 문화예술이 국민들의 삶 속에 깊이 자리하는 시대가 되었다.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들이 자주 찾는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고객이 원하고, 관객을 개발해낼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사업의 연속성을 가지고 공연장을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져야 할 것이다. 공연예술은 문화의 핵심으로 국민들이 행복한 대한민국, 문화가 융성하는 우리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극장에 전문성을 지니고 책임감 있는 예술경영인들이 오랜 시간 동안 일할 수 있어야 한다. 박평준 삼육대 음악학과 교수

[문화카페] 미술관 키드

어려서 입맛이 평생 간다.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말이다. 지금의 어린이들에게 파스타나 피자가 입맛이라면, 적어도 나이 오십 이상의 평범한 사람은 자장면 맛이 평생 입맛이다. 요즘 먹을거리 방송이 인기이고 입맛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예전에는 맛보다는 끼니였다. 끼니에서 맛으로 변한 것은 양에서 질적인 사회 변화로 해석할 수 있다. 지금 유행하는 입맛 방송은 곧 다른 유행으로 대치하게 될 것이다. 방송은 유행이지만 어려서 입맛은 변함이 없다. 어려서의 입맛처럼 평생 가는 것은 없을까? 예술을 예로 들 수 있다. 예술 또한 어려서 경험이 평생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문화정책은 이러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에 소홀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술기관의 활동과 학교 교육은 별개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학교는 학교고 미술관은 미술관이었다. 어려서 미술관을 가고 전시를 본다는 것은 특별하고 드믄 경험이었다. 더욱이 학교의 단체관람을 제외하면 가족이 전시를 관람한다는 것은 생소한 일이기까지 하다. 부득이 학교 숙제를 하기 위해 엄마 손에 이끌려 미술관을 찾는 경우는 있어도, 미술관 전시 관람을 가족 나들이로 삼는 경우는 생소하다. 그런 일상에서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미술관 관람객이 애호가 단위 보다 가족이 관람하는 문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어려서 가족과 함께 미술관을 찾는 경험을 가진 어린이를 미술관 키드라고 한다면 미술관 키드와 이전 세대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런 가정도 가능하다. 규칙세대와 창조세대. 그런데 우리는 창조를 쉽게 생각하고 어려서부터 경험하고 몸에 체득된 자산으로 축적될 기회도 주지 않으면서 창조를 기대한다. 그리고 조급하다. 창조의 열매를 보려면 적어도 미술관 키드가 자라는 십년, 이십년의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는 급한 나머지 창조에다가 더하여 경제까지 욕심을 낸다. 그것도 이삼년 내에 성과를 기대하며. 창조성은 미술관을 예로 들었지만, 체험하는 모든 것들이 자산이 될 때이다. 창조를 키우는 예술적 체험은 자연스럽고 즐기는 가운데 체득된다. 그럼에도 체험이 또 다른 교과목이 되어 체험에 내모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강요받은 체험이 살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험의 내용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 원로 박물관장의 체험 교육이 어디를 가나 점토로 만들기부터 다 똑 같다. 라는 지적은 뼈아프다. 예술체험 교육이 살아 있는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미술관, 박물관이 고유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특색 있는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학교와 미술관이 벽을 허물어 미술관이 제2의 학교가 되고, 학교가 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학교도 미술관의 전문 교육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단지 미술관의 교육 강사가 교수 급이어서 학교와의 교육 협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미술관의 교육은 전시와 연계하는 생동감이 있고 다양한 변화를 특성으로 할 뿐 아니라 미술관의 분위기를 낯익게 느끼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한 교육이다. 미술관 키드에게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지속적인 성장이다. 어려서의 경험에 그치지 않고 어른이 될 때까지 생활화하는 성장 과정이 중요하다. 그리고 어른의 예술의 생활화는 준거 동료가 있을 때 가능성이 높으므로 같은 또래의 동반 성장이 도움이 된다. 예술교육은 인적자원 형성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다. 양평은 향후 십년 뒤, 이런 인적자본 축적이란 측면에서 미술관 이전 세대와 미술관 키드 세대로 구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해 본다. 이철순 양평군립미술관장

[문화카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변화와 혁신

세상에! 130년 넘게 서양 예술음악의 전통을 이어온 오케스트라가, 전에는 한 번도 시도한 적이 없었고 연주하지도 않았던 영화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지난 6월 말, 베를린에 위치한 발트뷔네 원형 야외극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2만 2천여 명의 베를린 시민들이 모인 앞에서 어린이 만화영화 톰과 제리나 벤허, 인디아나 존스, 스타워즈, ET와 같은 미국 할리우드 영화음악을 연주한 것은 파격과 외도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카라얀이 무덤에서 뛰쳐나와 대성통곡할 일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베토벤이나 브람스 같은 엄격한 절대음악만을 연주해온 전통을 깨버리고 파격적으로 대중을 위한 영화음악을 연주한다고 해서, 영화 속의 상업음악을 가벼운 음악으로 평가 절하한다거나 무시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130년 넘는 기간 동안 대중음악을 단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던 고집스러운 오케스트라의 보수적 배타성에 돌을 던지려고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1882년 창단 이후, 가장 탁월하고 창조적인 작곡가들의 음악들을 연주하여 전파하고 또 지켜왔던 이 오케스트라의 위대한 전통과 영역의 존재 가치는 오늘날까지도 자연스럽게 인정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베를린 필하모닉은 작품의 해석과 연주에 대해서는 훌륭한 수준과 실력을 변함없이 유지해오고 있다. 실제로 이번 발트뷔네 콘서트 프로그램 중의 하나로, 중국의 신동 피아니스트 랑랑이 함께 협연한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은 필자가 연주회에서나 음반을 통해 이제껏 들어왔던 그 어떤 연주보다도 뛰어난 최고의 연주였다. 이어 연신 즐거운 표정을 짓는 사이먼 래틀 경의 지휘로 연주되는 곡들은 콘서트홀이 아니라 언젠가 우리들이 영화극장에서 혹은 TV나 라디오를 통해 들은 적이 있는 친숙한 음악들이다. 잊지 못할 명화 벤허의 음악을 베를린 필하모닉의 세련된 연주로 감상하며 느끼는 이 낯섦과 신선함은 예전에는 아무도 겪어본 일이 없었다. 이번 발트뷔네 콘서트의 스케치는 베를린의 초여름 밤하늘을 가득 채우는 추억의 영화음악들과 오케스트라에서 양념처럼 준비한 익살스러운 퍼포먼스들이 소풍 온 듯한 가벼운 옷차림으로 모여든 베를린 시민들을 마냥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정겨운 광경이다. 마지막 곡 연주에서, 위치를 바꾸어 래틀 경이 타악기 연주를 하고 단원 중 한 사람이 포디엄에 올라 지휘하는 모습의 연출은, 단순한 쇼맨십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모두 기존의 틀과 권위, 자존심을 던져버리고, 대중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자신들을 개방하고 소통하겠다는 기호와 의지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중세 수도원처럼 폐쇄적이고 엄격하기만 했던 베를린 필하모닉의 미래를 향한 변화와 혁신은 독일음악과 독일인 순혈주의를 타파하고 2002년 영국 지휘자 사이먼 래틀을 음악감독으로 선택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파멜라 로젠베르크 단장과 함께 래틀은 다양한 청중을 끌어들이고 미래청중을 개발하기 위해, 개방과 소통을 바탕으로 한 개혁 작업에 속도를 가했다. 도이치뱅크와의 업무제휴, 다양한 후원금 확보를 통해 기획한 교육프로젝트 Zukunft@BPhil는 대단히 성공적인 혁신적 프로젝트였다. 변화를 위한 다양하고 폭넓은 시도를 해왔던 래틀은 2006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빈 필하모닉은 19세기 오케스트라지만, 베를린 필하모닉은 21세기 오케스트라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바티칸에서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 방식을 통해 최근에 선출한 차기 상임지휘자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43세 유태계 러시아 출신의 무명 오페라 지휘자였다. 또 한 번의 파격적인 선택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베를린 필하모닉의 미래를 향한 다음 행보와 변화가 어떤 것인지 벌써부터 궁금해지고 기대가 된다. 임형균 톤마이스터

[문화카페] 자화상

모든 사람들이 그림 능력이 있어 각자 자화상을 그려낸다면 어떻게 될까? 입사원서에 붙인 사진과 면접장의 인물 사이의 크고 작은 차이를 상기하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왜곡과 변형이 판치고, 자화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헛갈리는 사태가 만연하여 닮은 꼴 자화상 찾기 대회가 열리는 웃지 못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리라. 이 같은 상상은 비상시에 대처하는 우리네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비롯된다. 필자를 포함한 모든 우리들의 위기 앞의 처세 말이다. 오늘(7월 16일) 개막하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준비해 오면서 영화제 조직은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해야 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예기치 않은 상황 전개의 와중에 영화제의 일정이 놓여진 때문이다. 쟁점들을 정리하고, 쟁점마다 최우선의 가치를 찾아내면 답은 분명해지는데, 이게 또 말처럼 쉽지 않다. 영화제와 연관을 갖는 복잡다단한 관계들 속에서의 입장정리에 난해한 방정식이 숨어 있는 것이다. 중동호흡기 증후군. 이름도 그렇거니와 중동 지역에서 선행의 사태가 발생했었다는 뉴스가 있긴 했었지? 그 때가 언제였던가? 기억도 가물가물한 먼 나라의 신종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의 존재감을 시험하면서 한탄 섞인 숱한 성찰의 시간을 남겼다. 우리 국민들에게 익숙한 가치 척도나 상식들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너나 할 것 없이 제 몸 지키는 데 혈안이 되어 문을 걸어 잠궜다. 각 급 학교는 휴업사태로 어수선했고, 거리는 한 때 유령도시의 그것처럼 텅 비었다. 외출하지 않으니 쌈짓돈 굳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돈이 돌지 않으니 그날 벌어 사는 소시민들의 고통은 말해 뭣하랴. 메르스가 남긴 상흔이 공포의 실체감으로 드러나자 사태로부터의 탈출이 절박하다는 사회적 요구가 증폭됐다. 국민들은 점점 피로해졌고, 법석을 떨었던 언론매체들도 자중의 분위기로 돌아섰다. 7월 3일에 개막된 광주유니버시아드대회도 예정대로 열려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러저러한 과정을 거치다보면 세상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이 사태 역시 기억 속에 묻힐 것이다. 숱한 역사들이 증명한다. 서해 페리호, 성수대교, 삼풍, 대구 지하철, 세월호 등의 사례들이 보여준 것처럼. 이쯤에서 불쾌하고 아픈 기억은 그만 접는 게 좋겠다. 그보다 소 잃었지만 외양간을 잘 고치기 위해 고민하고 실행하는 일이 필요하리라. 사태 발전에서 야기된 문제점들은 누누이 지적되었으므로 해결점도 명확해졌을 터다. 사회 성원인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제 할 일을 다하며 공동체 의식을 실천하는 일이 더해진다면 이후엔 다시 소 잃는 손해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다. 메르스 사태의 타파에 우리 영화제가 의미 있는 기폭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 500여 스태프와 자원활동가들이 땀 흘리고 있다. 부천시의 관계 공무원들도 열성을 보태고 있으며, 출품 관계 영화인들, 세계 각지의 게스트들, 행사 관계자들이 제 할 일에 열심이다. 7월 16일 부천체육관 개막식부터 11일간 열리는 영화축제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밝은 얼굴을 자화상으로 남기고 싶어 할 정도로 말이다. 김영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문화카페] 봉숭아학당을 바라보는 국민이 불쌍하다

자고 나면 일어나는 대형사건 사고들 때문에 피곤한 국민들에게 작금의 정치권은 국민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다. 신뢰는커녕 먹고살기 바빠서 보지도 못하는 개그프로를 대신해서 재현해 국민들을 실소하게 하고 있다. 봉숭아 학당을 정치권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국민의 민생은 뒷전이고 자기들 권력싸움에만 몰입하고 있으니 나라꼴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봉숭아학당은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야당은 비노 친노로 나뉘어 최고위원회의에서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선거패배를 이유로 나가라 당신이 나가라 거친 언사를 주고받으며 정치판 느와르를 보는 듯 재미를 선사했다. 곧이어 2탄으로 사무총장을 누구를 뽑느냐로 싸우다 건배로 화해를 하고 상대 당 집안싸움에 잠시 휴전을 하고 속개를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부터는 참으로 야당다운 야당을 찾아보기 힘든 정치판이 되었다. 여당 또한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는 재미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자기들 손으로 뽑은 원내대표를 친박이니 비박이니 편을 갈라서 그만둬라 그만두면 안 된다로 연일 싸우고 있다. 역시 최고위원회의에서 빨리 나가라느니 그만하라느니 심지어 장면의 임팩트를 살리기 위해 욕을 써가며 제제로 된 학당을 연출하기도 했다. 도무지 때를 가리지 못하는 정치판이다. 작년 세월호 참사에 이어서 올해는 메르스 사태까지 국민들은 끝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중동여행자 한 사람이 뿌려놓은 남의 나라 역병을 후진국보다 못한 수준으로 대처해 제때에 막지 못하고 온 국민이 공포에 떨었으며 그 여파가 참으로 크고 넓어서 그 피해가 어디까지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과연 정치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을 불안감으로부터 먼저 안심시켜야 하는 것이 제일 우선과제이고 대부업체로부터 연 11조를 빚진다는 이 나라 서민들을 위해 어떤 경제적인 해법을 내놓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국민이 있어야 정부도 있고 국가도 있는 것 이 기초상식을 다시 인식해야 한다. 잠시 유럽으로 눈을 돌리면 그리스 국가부도위기 사태를 우리는 두 눈 바로 뜨고 직시해야 한다. 그야말로 남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IMF 사태를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우리는 다행히 슬기롭게 국가위기를 벗어났다. 하지만 지금처럼 세계적인 경제 불황에 유럽은 흔들리고 우리경제마저 너무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데 정치권이 정신 바짝 차리고 국민만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국민들은 누구를 의지하고 이 힘든 시기를 극복해야 하는가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밉든 곱든 그래도 정치가 살아나야 국민들이 안심하고 자기 일에 몰두할 것이고 주머니를 열 것이며 경제가 조금씩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다 아는데 정치인들만 모르는 것 같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엄청난 기세로 막강한 후보들을 제치고 최초로 흑인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연이은 외교적 실패와 실수로 지지율이 폭락하다가 임기 막바지에 이른 지금 최고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주가를 올리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바로 국민만을 바라보며 다양한 정책보다는 민생을 위한 한 가지만 바로보고 임기를 맺겠다고 선언하고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 최근의 가파른 지지율 상승이유라고 한다. 우리 정부도 정치권도 지금은 민생만 바라봐야 할 때이다. 계파가 아니라 하나가 되어 장기침체와 피로에 젖어있는 국민들을 깨워야 한다. 제 때에 맞는 추경을 적재적소에 써서 경제적 시너지 효과를 최대로 내고 미국 중국 일본과의 현실적 실리적 외교에 더욱 신경 써야 할 것이며 점점 호전적이 되어가는 북한과의 관계도 잘 설정하여 공포정치로 우리는 물론 세계를 불안하게 하는 김정은 정권이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정치권은 이제 봉숭아 학당을 폐지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국민들에게 진정으로 다가가 시청률을 올려야 한다. 장용휘 수원여대교수연출가

[문화카페] 클래식 성악시장

클래식 성악음악의 특징은 접근이 수월하고 깊은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대중음악(가요 혹은 팝)과 달리 감상자가 되기 위해 문학적이고 철학적이며 때로는 종교적인 깊은 사유를 필요로 한다. 클래식음악의 특성 중 하나인 경험재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유아청소년기 시절에 클래식음악을 많이 듣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70, 8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가곡들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학교 음악시간에도 학생들이 자주 불러 성악음악이라는 기호형성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또한 몇몇 성악가는 한 두곡의 가곡을 통하여 스타 성악가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러나 시 등의 문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곡은 치열한 경쟁과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감각적이고 단순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생활주변에서 늘 쏟아져 나오는 대중음악과 달리 일부러 찾지 않는 한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 헨델의 <울게 하소서>, 까치니의 <아베마리아>,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보리수>, 멘델스존의 <노래의 날개 위에> 등은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나 드라마, CF 등을 통해서 들려지게 되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곡이 되었듯이 기호란 자주 접함으로써 형성된다. 한국가곡 중 한 곡도 여기에 속해있지 않다는 것이 조금 안타깝긴 하다. 오페라는 16세기 말에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8세기 후반~20세기 초반까지 세계 무대공연예술의 꽃으로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근현대적 의미의 극장은 오페라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오페라는 뮤지컬 탄생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오페라는 이미 오래전 공연예술의 주도권을 뮤지컬에 내주었으며, 뮤지컬은 오늘날 전 세계 공연시장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장을 이루고 있다. 현대인의 기호에 딱 맞아떨어지는 쉽고 편안한 음악, 화려한 무대장치와 변화, 현실감 있는 스토리, 신나는 춤, 빠른 전개 등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뮤지컬 덕에 오페라는 고리타분한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시장의 큰 흐름을 주도했던 명성악가들의 퇴조와 대체 성악가 부족, 인건비 및 재료비 상승, 뮤지컬 등과의 경쟁으로 성악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오페라 제작여건은 더욱 악화되었다. 간간이 보이는 몇몇 주목할 만한 성악가들에 의해서 세계오페라시장이 움직이고 있지만 성악가는 오랜 기간(10년 이상)의 어려운 훈련과 교육을 통하여 배출될 수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스타일의 좋은 성악가들을 적기(適期)에 배출해내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한국의 오페라 시장은 이전과 비교하면 작품의 편수가 늘었고 품질도 향상되긴 했지만 이미 해외의 세계 정상급 성악가, 오케스트라, 연출자의 작품들을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경험한 음악애호가들의 높아진 기대수준을 만족시키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음악팬들은 음악을 들으러 가기 보다는 스타 음악가를 만나기 위해 공연장을 찾는다. 스타는 공연을 통하여, 대중매체를 통하여 만들어진다. 한국 성악계의 유일한 스타는 20여 년 동안 오직 조수미 한 사람이다. 성악시장의 활력을 위해서는 더 많은 스타 탄생이 필요하다. 긴 시간을 끌고 갈 수 있는 될성부른 젊은 성악가들에게 우리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고 언론도 또한 자주 조명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 10여 년간 우리나라에 많은 공연장이 지어졌으며, 세계 시장에서도 통하는 좋은 성악가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다. 이제 이들을 잘 담아내는 우리들의 지혜와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몇 해 전 이태리의 유명 성악선생이 미래의 세계 성악시장의 중심은 한국이 될 것이다라고 했던 그 예측의 말이 떠오른다. 박평준 삼육대 음악학과 교수

[문화카페] 명품 미술관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피카소 청색시대를 잊을 수 없다. 파리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의 작품보다 필자에게 인상이 깊었던 작품은 에르미타주의 청색시대였다. 명품 미술관에는 명작이 있다. 한국의 미술관 중에는 박생광의 작품을 모아 전시한 이영미술관, 환기미술관, 이응로 미술관 등 개인 작품을 전시한 미술관이 돋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리움이 종합 미술관이라면 이러한 단품 미술관은 작지만 특색이 있는 명품 미술관이다. 피카소의 청색시대가 어떻게 에르미타주에 소장되게 되었을까? 이영미술관은 왜 유독 박생광 작품을 주로 모았을까? 호림 박물관은 왜 도자기를 전문으로 수집한 박물관일까? 마티스의 작품은 어떻게 러시아에도 뉴욕에도 같은 작품이 있을까? 모나리자는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이 아니라 루브르박물관에 있을까? 왜 이중섭미술관, 박수근미술관에는 원작이 거의 없을까? 이러한 질문은 미술관의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자연히 생기는 질문이다. 일반적으로 관람객은 미술관에서 작품을 판매하는가, 어떤 기준으로 작가를 초대하는가, 전시에 초대된 작가들은 양평작가들인가, 그리고 좀 더 관심을 갖는 분은 작품의 선정 과정과 절차에 관해 궁금해한다. 반면에 전문가는 작품의 형식과 상징, 미술사적 의의와 가치, 사회경제적 배경 등을 생각한다. 명품미술관의 조건은 무엇일까? 전시, 교육, 보존, 연구, 서비스 등 여러 기능들이 온전히 수행될 때에 비로소 좋은 미술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비전과 능력을 가진 관장, 연구 성과가 높은 학예사,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원 등 인력과 시설 또한 중요한 요건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좋은 작품을 소장하는 것이 기본이다. 대부분 공공미술관의 소장품 수집은 1년 단위로 일정기간 동안 공지를 통해 공개모집하고 이를 심사하여 작품을 선별하게 된다. 미술작품에 대한 심사는 작품성과 심미적 판단, 해당 미술관의 수집 방향 등을 고려해야 하는 전문 영역이다. 비전문가가 미술작품을 평가하고 선정 심사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주무과장이라는 이유로 작품 선정 심사에 참여한다. 이렇게 작품 심사 결과에 대한 확인에 그치지 않고 심사를 한다면, 이는 예술분야의 전문성에 대한 몰이해뿐 아니라 예술에 대한 관리의 번문욕례(red-tape)이다. 일반 관리는 규칙과 기준을 원칙으로 삼는다. 그러나 예술작품에 대한 판단은 규칙과 기준이 아니라 예술성이라는 매우 다른 잣대로 평가하는 것일 뿐 아니라 미적 판단 능력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공공미술관이 명품을 소장하는 것은 예산 등 여러 제약 조건으로 인하여 쉬운 일이 아니다. 사립미술관과 달리 관장의 취향이나 선호에 따라서 작품 수집이 편중되어서도 안 된다. 공공미술관에 부여된 미션과 앞으로의 비전에 따라서 그에 맞는 작품이 소장되어야 한다. 전문가는 비전문가가 알 수 없는 작품별 차이와 특성을 구별해 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중섭, 박수근 위작 사건이나 천경자 작품 진위사건 등은 미술작품에 대한 미적 판단이 얼마나 어렵고 전문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반증이다. 이제 공공미술관도 관리 행정에서 전문가에 의한 전문 운영 시대가 되어야 한다. 이철순 양평군립미술관장

[문화카페] 말러의 초상, 세기말의 음악

브람스가 태어났고, 삼십대의 구스타프 말러가 시립 오페라극장에서 지휘와 작곡 활동을 했던, 독일 음악 전통의 도시 함부르크를 대표하는 북독일 방송교향악단이 처음으로 내한해 말러의 첫 번째 교향곡을 연주했다. 필자 개인의 경험을 고백하건대, 80년대 대학시절엔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던 구스타프 말러의 존재를, 빈 국립 오페라극장 로비에서 로댕의 말러 두상 조각을 보고서야 처음 알게 되었고, 90년대 중반 카네기홀에서 보스톤 심포니의 교향곡 9번 연주를 접하면서 신선한 충격과 함께 그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사실 그가 생존했던 시기에 그의 작품은 거의 연주된 적이 없었고, 1911년 사망 후에는 유럽의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기 시작했지만 1960년대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번스타인이 교향곡 전곡을 연주했을 때까지도 그의 작품들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낯설고 기괴한 음향, 충격적 화음이나 듣기에 다소 거북한 불협화음들이 자아내는 감정적 과잉과 괴팍한 주관성, 그리고 급변하는 신경증적 면모들은 정갈한 음악에 익숙한 사람들과 음악을 통해 정신적 고양을 추구했던 사람들로 하여금 엄청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동시대 빈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저열한 음악이라는 독설을 날리고,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말러의 교향곡이 지루하고 장황하다고 깎아내렸다. 『타임』지는 음울한 멜랑콜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의욕을 잃을까 두렵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말러가 세상을 떠나 100년도 더 흐른 지금, 그의 음악이 널리 강한 파급력을 행사하며 빛을 보고, 나아가 열광하는 광팬들로부터 끊임없이 각광받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말러의 음악은 다양한 메시지의 혼재, 갈등과 모순, 역설의 요소들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음악과는 다른 모더니즘적 특징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작곡한 음악의 독특한 색깔과 성격을 이루는 원천이 바로 지독한 열등감과 슬픔의 극복이라는 사실에 있다. 체코의 작은 시골에서 평범한 유태인의 집안에 태어난 말러는 삼중으로 이방인이었기에 주류층으로부터의 시달림과 인종적 차별로 고통을 받았고, 5살 어린 딸의 급작스런 죽음, 지극히 사랑했던 부인 알마의 배신, 그리고 51살에 세상을 떠나게 했던 불치병은 슬픔의 근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태생적 열등감과 삶의 슬픔이 주는 극도의 절망과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역경에서 힘을 얻어 자신의 창조력을 배양하는 에너지로 바꿨다. 격동의 세기말 빈은 그가 예술가로서의 자양분과 영감을 주기에는 최고로 적합한 도시였다. 신세기로 향하는 개혁적인 변화의 흐름과 함께 각 인문문예 분야의 거장들의 숨결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말러의 창조적 음악은 이러한 시대의 희망적 흐름과 공명하면서 그 미래를 내다보았다. 또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의 평화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귀족과 평민,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새로운 것과 낡은 것,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이기주의와 이상주의, 성적 방종과 금욕, 품격과 천박함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자신감과 나약함이 함께 맞물려 있던 세기말 빈의 사회적, 문화적 풍경은 지금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모습과 똑같이 닮아있다. 그래서 말러의 삶과 음악은 현대에서도, 아니 현대에서 더더욱, 인간과 사회의 진보 과정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임형균 톤마이스터

[문화카페] 깐느, 영화에 묻힌 도시

깐느의 5월은 뜨겁다. 남프랑스의 해변마을에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살 때문만은 아니다. 인구 7만의 작은 휴양도시에 수천 편의 영화와 수만의 영화 관계자와 수십만의 관광객이 모여드는 국제영화제가 매년 5월에 열리기 때문이다. 올해 68회인 깐느영화제다. 5월의 깐느에서는 영화에 관한 수많은 단상 앞에 서게 된다. 단상의 소재는 곳곳에 있다. 영화제의 본부인 팔레 극장으로 가는 오밀조밀한 골목의 화상디스플레이어 화면에서는 세계적인 명배우들의 미소가 길손을 맞는다. 지중해변을 따라 밀집한 호텔의 차양과 명품점들의 쇼윈도 안에도 모델이 된 스타들의 사진과 영화 포스터들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올해 팔레의 본관 외벽에는 잉그릿 버그만의 아름다운 말년의 얼굴이 커다랗게 자리했다. 생전은 물론 현재도 영화팬들을 설레게 하는 마력의 눈빛 그대로다. 그 아래 엄청난 인파 속에는 손 쪽지를 든 씨네필들이 여기저기 서 있다. 미처 구하지 못한 초청작의 티켓을 얻기 위해 인식표를 단 출입 게스트들의 표정을 열심히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레드카펫이 시작되는 보도에는 이름표를 단 수 백 개의 포터블 사다리가 쌓여 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진기자들의 것이다. 레드카펫이 시작되면 기자들은 사다리를 들고 단거리 주자들처럼 뜀박질을 한다. 좋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난리북새통을 벌이는 것이다. 그들이 터뜨리는 스트로보 라이트가 그렇잖아도 번쩍거리는 거리를 불꽃축제의 섬광처럼 환하게 밝힌다. 한순간도 영화 아닌 다른 생각에 빠질 수 없는 깐느의 5월이다. 국제영화제는 시민들에게 영화를 소개하고, 예술로서의 영화, 산업으로서의 영화의 방향성을 찾기 위한 다양한 회합을 갖는다. 새로운 영화인들을 발굴, 지원하며 새 기획의 개발비를 조달하여 영화제작의 동력을 만든다. 그리고 제작 중이거나 완성된 영화를 팔고 산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영화인들 사이의 관계가 두터워지는 일도 중요하다. 어떻든 영화제는 영화를 중심으로 한 축제이다. 그러나 파급효과를 따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깐느영화제는 매년 300여 억 원의 예산으로 열리지만 이 영화제의 경제유발액은 조 단위를 넘는다. 영화마켓을 통한 거래뿐만 아니라 항공, 숙박, 관광, 유통 등 부가생산이 엄청나다. 영화를 매개로 한 세계이해의 효과나 프랑스가 얻게 되는 유무형의 이득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는 수준이다. 베니스영화제에 자극받아 시작한 깐느지만 이 영화제의 리더였던 질 자콥(Gilles Jacob)이 프랑스인들의 존경을 넘어 국제영화제의 상징인물로 인정되는 이유이다. 영화의 파급력에 대한 진단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20세기 초에 러시아 전체주의자들은 영화의 대중 교화력을 인정하여 국가기관으로 영화연구소를 운영했고, 그 결과로 몽타주 이론을 발전시켜 현대 영화의 기틀을 마련한 바 있다.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 역시 베니스영화제를 지원하고 활용했던 역사를 남겼다. 최근 부산영화제의 상황이 어렵다. 영화제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 가타부타 하는 일이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것은 이 상황이 매우 안타깝다는 점이다. 부산영화제는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국격의 신장에도 기여를 했다. 갈등의 확대생산보다는 정상화를 위한 노력이 시급해 보인다. 정상화의 필요성이 분명한 이상 이를 대원칙으로 삼아 관계자 모두가 편향된 이해득실의 셈법을 버리는 일이 절실한 시점이다. 김영빈 인하대 교수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문화카페] 어린이가 행복하지 않은 나라, 미래는 없다

오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있고 성년의 날, 스승의 날까지 있다. 가정과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며 오월을 보내고 있지만 얼마 전 발표된 한국 어린이들의 행복지수를 보면 미안함과 함께 한숨이 나온다. 아마도 그 책임이 고스란히 우리 어른들의 몫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8일 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15개국을 대상으로 어린이 행복지수를 조사했는데 한국 어린이들의 행복지수는 12위로 아주 낮은 편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연구논문에 따르면 영국 이스라엘 네팔 등 15개국의 어린이 중 만 8세, 10세, 12세 5만여 명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주관적인 행복감과 삶의 만족도를 조사했다고 한다. 그 결과 한국 어린이들은 물질적 풍요로움은 2위였지만 삶의 만족도는 네팔 어린이들보다 낮았고 주관적인 행복감은 전 연령대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 조사결과로 연구진은 한국 어린이들은 어릴 때부터 경쟁을 해야 하는 탓에 행복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기막힌 타이밍에 정부는 제1차 아동정책기본계획을 발표하고 10년 안에 어린이와 청소년의 행복지수를 OECD 평균으로 끌어올리겠다고 자신하고 향후 5년간 4조 5천억이라는 예산을 투입하기로 했다. 항상 들어오던 행복지수 꼴찌가 지겨웠는지. 어쨌든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인식을 했다니 다행이고 야심찬 계획들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정부의 계획을 보면 미래를 준비하는 삶, 건강한 삶, 안전한 삶, 함께 하는 삶, 기본계획 실행기반 조성 등 5가지 주제를 설정하고 이것들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방안들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누리과정 운영시간확대와 자유학기제 도입, 체육교사의 확대와 전담배치, 아동폭력학교폭력 대처방안 등 다양한 방안들을 추진하기로 했다 한다. 하지만 이제껏 정부정책이란 것이 졸속으로 정해진 경우가 많아 국민들이 눈 크게 뜨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필자도 자녀가 둘이 있다. 큰아이는 이미 대학에 진학해 아동청소년 시기를 거쳤고 작은 아이는 중학교 2학년이다. 다들 경험하듯 필자의 아이들 역시 눈 뜨면 밥 한술 뜨기 무섭게 무거운 책가방 들고 등교하고,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학원을 돌며 학원이 끝나면 집에 와서 밥 먹기 무섭게 엄마에게 잔소리 들어가며 새벽까지 공부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 원인이 무엇인가! 실은 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무슨 정책을 쓰던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입하던 과연 이들의 행복지수가 높아질 수 있을까 심히 우려가 된다. 필자가 생각하는 아이들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방법은 교육의 혁신이다 틈만 나면 얘기했던 교육의 혁신이 없이는 아이들의 행복지수도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체육음악미술 등이 입시 때문에 홀대를 받거나 사라지고, 역사는 선택과목으로 버림받고 외면 당하는 슬픈 교육의 나라가 되었다. 국어영어수학이 교육의 전부가 되어버렸고 학교의 존재이유가 되어버렸다. 아이들의 인성과 창의성, 역사의식 등이 도저히 생겨날 수 없는 교육과정이다. 이런 잘못된 교육과정을 바로잡아야 한다. 초등학교에 음악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려야 하며 중학교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많은 시간을 뛰어놀게 해야 한다. 고등학교에서도 야외로 나가 환경을 배우고 숨 쉬게 해야 한다. 물론 그들이 경쟁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의 진출 길은 영어수학이 아닌 창의성과 감성, 인성 등을 위주로 뽑아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어려워 보일 수도 있지만 사회구성원 전부가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어른들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어른들은 그저 놀이터를 만들어 주면 될 것이다. 장용휘 수원여대교수연출가

[문화카페] 현대 문화예술시장 예찬

대체로 문화예술이란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고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오락보다는 상위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문화예술 시장은 다양한 예술적 시각이 공존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새롭고 훌륭한 창작품이 지속적으로 생산되도록 도와주며, 소비자와 예술가의 취향을 더욱 세련시키고 잊혀져가는 과거의 유산을 보존하고 복원하여 널리 알리는 등의 뚜렷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기술혁신을 비롯한 다양한 경제적 요인과 시장(市場)은 문화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르네상스 이후로 예술가들 역시 사업가와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요인에 종속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경제적 환경은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며, 그러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노력한다. 하지만 그 노력은 부와 명성을 위한 노력이라고 하기 보다는 미학적 야심을 잘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데에 있다고 보겠다. 현대에 있어서 예술 활동은 점차 장르 상호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추세이며 중간적인 예술분야가 새롭게 생겨나기도 한다. 또한 시장의 부(富)는 다양한 취향에 호소하는 다양한 종류의 예술 작품의 생산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예술소비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하고 폭넓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시장 환경의 변화, 특히 온라인의 발달은 예술가들의 내적 창조성이 외부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여 그들의 감정과 스타일의 표현 영역을 더욱 확대시켰다. 예술시장이 무한대로 커지면서 각 예술가들에게 알맞은 특정시장을 찾기가 쉬워진 것이다. 시장의 파이(pie)가 커지면서 예술가들은 시장을 주도하는 취향의 잠재적 압박에서도 해방되었다. 인디음악 뮤지션들처럼 그들은 자신의 취향을 마음껏 즐기며 유행을 선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예술시장에서 주류의 취향을 거부하는 것도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쉬워졌다. 온라인의 확산은 예술가들이 비평가나 예술소비자들을 가르칠 수 있는 입지를 강화할 수 있게 했으며, 시장의 감식안을 바꾸기도 했다. 이는 예술소비자의 취향을 다양화 했고 향상시켰다. 일례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규모 있는 공연축제에서 인디음악인들이 빠진 축제는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들 음악은 거대한 새로운 취향을 형성하였다. 한편으로 이러한 현상들이 문화를 타락시키고, 끊임없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현대시장이 문화생산의 질을 떨어뜨린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문화의 상품화는 비판능력을 질식시키고, 소외를 야기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온라인 환경으로의 시장 변화는 예술이 번성하는 데 유리한 토양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예술창조활동이 더욱 더 다양하고 왕성하게 벌어지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자료에 따르면 공연티켓 판매액 기준으로 최근 10년간 약 300%의 증가세를 보여주고 있다. 온라인은 저비용의 열린 시장을 만들어냈으며, 이로 인하여 문화예술의 다양성은 증대되었다. 이 시장을 통해 얻게 된 부는 예술가의 내적 창조성에 걸림돌이 될 수 있었던 외적 제약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고, 새로운 예술적 양식과 스타일의 다양성을 부추겼다. 온라인의 진화와 확산, 그리고 이에 따른 시장의 팽창은 승자독식의 틀이 유난히 견고한 문화예술시장의 구도를 깨는 혁명적인 변화를 이루어낼 것이다. 박평준 삼육대 음악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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