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젊은 영화인들 살 길이 막막하다

영화연출 전공 제자 하나가 2천만원 예산의 장편 영화로 돌업했다. 화려한 출발이다. 영화감독 전공자가 장편영화를 만들었으니, 정상궤도로 간 셈이다. 지방자치단체에서 보조해준 기금에다 자기 돈까지 얹어서 만든 것으로, 청소년 문제를 다룬 것이다. 상업적인 투자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정식 개봉해서 관객들에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게 영화가 살아가는 길이다. 자기도 먹고 살아야 하고. 시사회 때 보니 제법 잘 만들었다. 제자라서 그런 게 아니다. 얼마 전 충무로에서 제작된 수억 원 들인 영화과 동일 소재인데도 잘 만든 것 같았다. 솔직히 돈이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니다. 열정과 지혜와 실력이 만드는 것이다. 나의 지론은 돈보다는 아이디어와 실력이 우선이라는 것. 작년에 나온 영화중 초저예산영화 가시꽃은 불과 300만원으로 만들어져서 부산영화제에 초청되었고, 개봉해서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제자의 영화도 국내외 영화제에 한번 내보려고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우울한 것은 이런 영화들이 과연 국내외에서 상을 받든, 평론가의 평가를 좋게 받든, 시사회의 관객들이 좋아하든 극장에 걸리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대기업 극장들은 이런 영화들을 거의 걸지 않는다. 수백개의 스크린을 운영하면서도 이런 영화들은 보나마나 찬밥신세다. 관객들은 극장의 협소한 전략 때문에 다양한 영화를 감상하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는 좋은 작품과 감독들을 배출하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 그저 오락적인 소수 영화들만을 극장이 선호하니까, 이런 무명의 저예산 영화들은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사장되는 게 현실이다. 극장은 문화적 의식이 약하다. 문화의식이 있다면 다양성의 가치를 존중할 것이다. 한국 영화산업이 갈수록 위태로워지는 이유는 콘텐츠가 획일적이고 협소하여 관객들이 싫증을 내기 때문이다. 영화는 상상력과 다양성의 산물이다. 영화는 오락이고 여가활동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교과서가 아니고, 극장은 학교가 아니다. 따라서 영화는 파격적일수록 좋고, 상상력이 많을수록 좋다. 새로운 목소리, 다른 모습을 기대하는 관객들을 충족시켜야 그 산업이 발전한다. 이론이 그런데도 극장의 현실은 정반대로 간다. 대체로 한국영화의 특색은 몇 가지로 획일화된다. 첫째, 돈 많이 들어간, 스타가 나오는 영화. 둘째, 액션, 코미디, 멜로를 적당히 짜깁기한 뻔한 오락영화. 셋째, 외국 영화를 짜깁기해서 한국현실로 번안한 영화. 작년에 나온 가시꽃, 사이비 같은 영화는 위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으며, 투박하고, 저예산이고, 스타도 없고, 짜깁기도 없다. 독창적이고, 끈질기고, 영혼을 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다른 영화는 설 땅이 없다. 해마다 야심찬 젊은 감독들과 신선한 영화들이 등장하지만, 곧 죽어버린다. 스크린을 확보하지 못하거나, 한다고 해도 상영일수를 얻지 못한다. 극장은 문화의 창조 따위엔 아무 관심이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영화라는 상품을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콘텐츠는 다양해야 하고, 개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관객들이 식상하지 않고 계속 관람을 할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원칙조차 무시하면서 장사를 하려하니 산업은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다. 산업은 더 큰 한방을 원하니까 스타가 나오는 대작 블록버스터를 염원하게 된다. 대작의 매출을 성사시키려니, 독과점을 할 수밖에 없고, 다양한 저예산 영화들은 치이고 마는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 제자들의 무운을 빈다. 이 살벌한 스크린의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자 과연 누구인가? 정재형 동국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색소폰은 금관악기인가?

얼마 전 어린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참관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지도하는 선생님이 악기들을 설명하다가 플루트를 금관악기라고 가르치고 있는 게 아닌가? 이후에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어보니 심지어 음악 전공자들 중에서도 플루트를 금관악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을 알게 됐다. 아니, 플루트가 그럼 목관악기란 말인가? 금속으로 만들어졌는데?라고 반문할 독자들이 계실 것 같다. 하지만 플루트는 금속으로 만들어졌어도 목관악기로 분류된다. 금관악기는 트럼펫, 트럼본, 호른, 투바 등 금색의 번쩍이는 금속으로 돼 있는 악기라고 어느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면 색소폰은 어떠할까? 색소폰도 번쩍이는 금속으로 돼 있으니 금관악기가 아닐까? 그러나 색소폰도 금속으로 돼 있어도 플루트처럼 목관악기로 구분된다. 너무 불합리한 구분법인 것 같다. 도대체 기준이 무엇일까? 과거에는 플루트를 나무로 제작했다. 지금도 흑단 같은 목재로 제조된 플루트가 가끔 있다. 20세기에 들어서야 금속으로 된 플루트가 등장했고 오늘날엔 거의 금속이 사용된다. 원래 나무였으니 지금 금속이어도 목관악기로 구분하는 것이 어느 정도 수긍이 갈 일이다. 문제는 색소폰이다. 19세기에 창안된 색소폰은 처음부터 금속의 몸통을 갖고 있었다. 목재로 색소폰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 금관악기와 목관악기의 구분은 재료에 따른 것이 아니란 말인가? 쉽게 말하자면 그 구분법은 소리를 내기 위한 진동방식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목관악기는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처럼 리드(reed혀)가 최초 진동체가 되어 관 속에 가두어 놓은 공기를 진동시켜 소리를 내거나 플루트처럼 취구에 바람을 불어넣어 마찰을 일르켜 관의 공기를 진동시키는 악기를 일컫는다. 리드를 사용하는 색소폰은 몸체가 금속으로 돼 있다 해도 목관악기인 것이다. 금관악기는 모두 연주자의 입술을 떠는 것이 최초 진동체가 되어 관 속에 가두어 놓은 공기를 진동시켜 소리내는 악기들을 뜻한다. 오늘날 사용되는 모든 금관악기가 금속으로 돼 있으니 헷갈릴 일이 없지만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입술 진동을 사용하지만 나무로 만들어진 악기들이 있었다. 주로 교회에서 사용되던 코르네토(cornetto 또는 cornett)와 서펜트(serpent)이다. 오늘날에는 생소하지만 코르네토는 바흐의 교회음악에도 사용되었고 서펜트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에서도 등장했던 악기다. 이들은 나무로 돼 있어도 이론적으로 금관악기에 속한다. 오케스트라 음악을 들으면 현악기와 함께 여러가지 금관과 목관악기 앙상블을 들을 수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작곡가들은 지금까지 여러가지 다른 종류의 악기들을 상징이나 회화적 묘사를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각 악기들이 원래 사용되던 기능과 관련된 것이다. 트럼펫은 원래 군대나 의장대의 악기였으니 전쟁을 상징하거나 왕의 권위 등을 묘사하기 위해 팀파니나 스내어드럼 같은 타악기와 어우러져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호른은 원래 사냥의 시그널 악기였으니 숲이나 들판의 풍경을 그려주기도 한다. 트럼본은 오래 전부터 교회 성가대와 함께 사용된 악기였으니 때때로 종교적이고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비현실 세계를 묘사하기도 한다. 플루트와 오보에는 목가적 정경을 잘 나타내주며, 코믹한 장면에서는 중저음에서 코맹맹이 소리를 내주는 바순이야말로 약방의 감초다. 독자들께서 어린 자녀들에게 이러한 악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시면 참 멋진 아빠, 엄마가 될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이런 얘기를 들려주고 아이들을 공연장에 데려가시면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시는 더욱 멋진 부모님이 될 것 같다. 양승열 지휘자ㆍ미주리주립대 박사

[문화카페] 청년세대의 삶과 미술

현재 한국에서 가장 삶이 어려운 세대는 단연 노년 세대이다. 75세 이상의 노인 자살률이 10만 명당 160명 꼴이란다. 물론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청년 세대도 힘든 세대이다. 문제는 이 세대가 한국의 사회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표층(한윤형)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바야흐로 후기자본주의의 문제가 불가피하게 파생시킨 인간형이 이들 젊은 세대에 고스란히 낙인 찍혀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무한경쟁의 정글로 이루어졌고 이 한국적 특수성은 단 한 가지 룰에 입각한 기이한 경쟁을 독려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기실 경쟁이 아니라 사회 독점 계급을 생산해내고 정당화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IMF 이후 대학생들은 이전과는 달리 더욱 치열한 경쟁의 공간에 노출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일자리의 숫자는 줄어드는 현실에서 산다. 따라서 학벌 사회의 승자이면서도 잉여 인간이 되고 있다. 이들의 열패감은 대단하다. 그러나 이 낭패감을 공론화하지 못하고 자기학대로 이어지거나 현실을 비참하게 바라보는 것이 하나의 문화, 루저 문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냉소가 되고 보수화되고 정치나 사회현실의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미술계를 예로 든다면 이전에는 유명 미술대학을 나오면 조교를 거쳐 대개 스승이 심사위원으로 포진되어 있는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고 자연스레 시간강사를 거쳐 지방대에 취업하거나 머지않아 서울에 있는 대학이나 운이 좋으면 모교의 교수가 되는 것이 순리라고 여겼던 때가 있다. 유학만 갔다 오면 더 말할 나위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유학은 필수고 심지어 실기박사학위까지 반드시 요구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외국유학의 매력은 줄어드는 대신 죄다 박사과정에 들어가고 있다. 유학을 마친 이들도 다시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형편이다. 지방대 출신들은 한결같이 서울에 있는 대학원을 거쳐 학벌세탁을 한다. 그렇다고 대학에 쉽게 전임이 되거나 좋은 작업을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과도한 학벌경쟁, 그로 인한 경제적 지출을 무릅쓰고 그들은 이 한국 사회 못지않은, 더하면 더한 무한경쟁의 미술계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직업, 지위를 갖으려고 올인을 한다. 문제는 그러한 열정과 욕망이 작업으로 귀결되지 못하고 경력 쌓기나 스펙만들기라는 차원에서만 작동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오늘날 젊은 작가들의 미술적 활동이란 결국 작업을 한다기보다는 그것을 수단으로 삼아 화려하고 그럴듯한 경력을 만드는 알리바이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부모의 희생을 담보로 해서 말이다. 혹은 자신의 청춘을 죄다 소진시키면서 행해진다. 내 주변에는 40대 이상의 미혼 작가들이 넘쳐난다. 결정적인 이유는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결혼을 꿈꾸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잔인한 무한 경쟁을 촉발시키는 한국 사회와 경력을 요구하는 미술계 제도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세대의 특성은 사회가 만든 것이다. 따라서 청년 세대를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탐구하려면 한국 자본주의의 현재에 대해 말해야 한다. 오늘날 청년 세대의 특징, 즉 인터넷, 대중문화, 민족주의의 정치성, 취업난, 그리고 파편화된 취향은 모두 한국의 사회적인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의 미술계 구조나 현실 역시 이 사회로부터 강하게 견인되어 있다. 아울러 그것이 작업의 경향과 내용을 채우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오늘날의 젊은 작가들은 미술, 미술계가 현실과 무관하다고 봐서는 결코 안 된다. 작업이 안 풀리는 것은 삶이 풀리지 않아서다. 사회를, 미래를 총체적으로, 전망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년작가들에게 사회를 바라보는 총체적인 시각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납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작업을 고민하고 미술계를, 자신의 작가로서의 삶을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링컨’과 ‘변호인’

2013년 미국과 한국에서 전직 대통령을 소재로 각각 영화가 만들어졌다. 미국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링컨과 한국 양우석 감독의 변호인이다. 영화는 대중예술이기 때문에 영화와 정치가 연관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국에서 링컨이 제작된 것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와 관계된다. 흑인의 인권과 자존심 하면 흑인노예해방을 떠올리게 되고, 자연 링컨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옹졸한 민주당원들이 조롱당하므로 민주당이 싫어할 만한 영화 링컨은 정치색을 훨씬 초월한다. 스필버그는 민주당 지지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런 그가 공화당을 대표하는 대통령 링컨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 사실부터 놀랍다. 우리 수준과 비교하면 우리는 역대 대통령에 대해서 여당에서는 우상화, 야당에서는 독재자, 상대방에 대해 두 획일적인 역사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필버그의 링컨은 마키아벨리적인 권모술수의 간악함도 있으나, 당과 상관없이 국민을 위해 일하는 링컨을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스필버그는 과거 민주당 대통령후보 엘 고어를 지지하면서도, 공화당원인 아놀드 슈왈즈네거의 정책에 지지를 한 적도 있었다. 공화당 지지자 중에는 총기소지를 지지하는 극우보수적인 찰톤 헤스톤도 있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영화속에서 민주당의 정책보다도 더 건강한 휴머니즘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 링컨은 노예해방이 담긴 수정헌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반대 당인 민주당의원들을 어떻게 구워삶아 찬성을 이끌어냈는가에 대한 지난한 노력을 강조한다. 민주주의란 단지 정의를 외치는 순수한 정열로만은 안 된다. 당론과 당파의 색깔보다도 국민의 입장에 서서 일해야 함을 보여준다. 얼마 전 안철수 의원이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것을 민주당에서 비난한 적이 있었다. 미국적 정치행태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고, 안철수를 비난하는 민주당은 옹졸해 보인다. 옹졸하기로는 새누리당도 마찬가지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당파의 색을 분명히 해야 보수든, 진보든 자기 당 지지자들이 빠져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다. 국민을 위하는 게 아니라, 국민을 이용해 정권창출만을 신경쓸 뿐이다. 결국 다수 국민들을 위해 큰 포용의 정치를 하지 못한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권을 잡기만 하면 기존 기관장들을 줄줄히 사퇴시키고, 자기 지지자들의 낙하산 인사로 채운다든가 하는 행태는 민주주의라고 보기 어렵다. 정적을 포용하여 자기 정책의 수호자로 만들어, 더 큰 정치를 보여준 만델라를 기억해야 한다. 이런 협소한 분위기 속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이 좋아할만한 변호인이 개봉되었고, 역사상 한국영화로는 아홉 번째 천만 관객을 모았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을 우상화하는 듯한 이 영화는 민주주의가 유린되던 시절 한 순수한 변호사의 외로운 분투를 그렸다. 이 영화가 천만관객을 불러모은 것은 정치적 색깔 때문이 아니다. 한국인 누구나 어려운 시절을 겪어왔다. 고문당한 대학생과 무시당한 변호사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현재의 민주화를 위해 존재해왔던 것이다. 일부 정치가들은 간혹 이 대목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데, 진보적 인사들에 의해 이 나라가 민주화되었다고 착각한다. 천만관객이 눈물을 흘리면서 가장 큰 공감을 한 사람은 송강호 역할이 아니라, 오히려 김영애가 연기한 국밥집 주인일 것이다. 자신은 운동권이 아니지만 억울하게 누명쓴 자식을 둔 아무 힘없는 서민들이 바로 그 시대의 주인공들이었다. 변호인을 통해 관객이 공감한 것은 표면상의 영웅이 아니라, 그 시대를 말없이 몸으로 받아낸 무능력한 엑스트라들의 찢어진 심장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변호인이 이쪽, 저쪽의 영화가 되지 않아야 하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정재형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문화카페] 카덴차

독주자 또는 독창자가 화려하고 기교적인 즉흥적 연주를 들려줘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부분을 카덴차(cadenza)라 일컫는다. 이때 흔히 반주를 담당하는 오케스트라는 연주를 멈춰 모든 관심이 독주자에게 쏠리도록 한다. 카덴차의 끝 부분에서는 연주자가 딸림화음 상에서 힘있는 트릴(trill: 근접한 두 음을 재빠르게 여러번 반복하는 기법)을 연주하며, 이에 뒤따르는 으뜸화음에서 긴 휴식을 끝낸 오케스트라가 비교적 짧고 단호한 성격의 종결부를 연주해 한 악장을 마치게 된다. 카덴차란 협주곡이나 아리아에서 가장 크고 중심적인 종지인 셈이다. 클래식음악 애호가들은 유명한 솔리스트들이 어떻게 카덴차를 연주하는지 관심이 많다. 어떤 곡은 작곡가가 카덴차를 악보로 적어놓기도 하지만, 그저 솔리스트가 즉흥으로 연주하도록 악보로 적어놓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때 얼마나 독창적이고 개성 넘치는 카덴차를 솔리스트가 연주할지 기대해 보는 것이 음악회의 쏠쏠한 재미이기도 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원래 이 카덴차라는 말이 이탈리아어에서는 그저 종지(악구나 악절, 또는 악곡 전체의 끝맺음)를 뜻한다는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종지를 케이던스(cadence)라는 프랑스어 까당스(cadence)에서 유래된 단어로 명명한다. 영어권에서만 위에 소개한 독주자의 즉흥적 연주를 카덴차라고 구분해 명칭하고 있다. 미국의 영향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도 영어권과 마찬가지로 종지와 카덴차를 구분하고 있다. 복잡하게 여겨질 수 있으니 정리하자면 이렇다. 카덴차(cadenza)란 원래 이탈리아어에서 모든 종지(기교적 즉흥연주를 포함하든 포함하지 않든)를 뜻한다. 이 단어와 이것의 프랑스식 용어인 까당스(cadence)가 영어권에 들어가 전자는 기교적 즉흥연주를 포함하는 커다란 종지의 뜻을 갖게 됐고, 후자는 그저 모든 크고 작은 종지를 지칭하게 됐다는 것이다. 외국어에 능숙한 독자들은 눈치를 챘을 수도 있다. 왠지 이 단어들의 어감이 쇠망, 쇠퇴 또는 타락을 뜻하는 데카당스(decadence)와 비슷하지 않은가? 소멸과 부패 등을 의미하는 영어의 디케이(decay)라는 말도 문득 떠오른다. 그렇다. 이 모든 단어들이 떨어지다, 추락하다, 소멸하다의 뜻을 지닌 라틴어와 이탈리아어의 동사 카데레(cadere)에서 비롯됐다. 중세의 시편창법(psalm tone system)이나 흔히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알려진 평성가(plain chant)에서 악구나 악절 같은 어떤 한 단위의 끝맺음은 대개 말할 때의 음보다 높은 낭송음(tenor 또는 reciting tone)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형태를 띄었다. 바로 이러한 형태 때문에 크고 작은 음악적 단위가 끝나는 부분을 떨어짐 즉 카당스(cadence) 또는 카덴차(cadenza)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협주곡이나 아리아에서 독주(독창)자의 기교적이고 화려한 카덴차는 그러니까 한 악장 또는 한 악곡 전체를 대단원하는 커다란 떨어짐인 셈이다. 그 떨어짐의 순간에 가장 화려하고 정렬적인 독주자의 몸부림을 위치시키는 형식적 안배가 경이롭다. 마치 산란과 죽음을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가 가장 생동감 넘치는 반-엔트로피의 몸부림을 치는 것과 같이 악곡을 끝맺음 하는 떨어짐의 자리에서 가장 생명력 있는 음악이 피어나는 것이다. 양승렬 수원오페라단 지휘자

[문화카페] 이웃을 위한 미술

애초에 이미지는 인간의 삶의 욕구, 그리고 그 욕구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따라서 모든 이미지(미술)란 공동체의 삶과 생존을 위한 필요성에 의해 파생된 것이고 집단적인 기원과 주술의 의미 아래 이루어진 표상체계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모든 이미지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집단적인 믿음과 소망, 이들의 간절한 기원의 뜻을 지니고 있는 기호이자 상징들이다. 그것들은 일상적 삶에서 쓰이던 신화적이고 종교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도상들이다. 일상에서 사용되던 다양한 물건들, 도상들은 근대 이후 미술(ART)이란 개념에 의해 위상이 바뀌었고 근대 이전의 사람들이 생산한 뛰어난 건물이나 물품들은 우리의 문화에 의해 차용되어 미술로 변형되었다. 우리가 지금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과거에는 모두 일상생활의 맥락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들이다. 일상생활의 맥락이란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서 파생된 그 무엇으로서의 예술을 말한다. 그러나 20세기 이 땅에 수용된 서구모더니즘은 세계가 그다지 개입되지 않은 채 예술과 인간의 투명하고 자율적인 관계만을 이야기하는 면이 강했다. 이에 따라 한 문화권 안에서 기능하던 도상들이 지닌 삶의 욕망과 믿음의 체계는 망실되고 세계를 대하는 태도 역시 달라졌다. 전통사회의 공동체 역시 급격한 와해의 길을 걸었다. 당연히 공동체의 와해는 그것에 기반했던 이미지의 몰락을 예고한다. 이웃과 공동체의 꿈과 희망, 소망을 약속해주던 전통사회의 이미지와는 달리 현대미술은 미술 자체를 사유하는 특정한 게임의 논리이자 미술계라는 한정된 제도 안에서 소통되는 언어를 만들어온 측면이 크다. 그런데 1950년대 중반, 박수근에 와서야 비로소 미술은 이웃의 삶에 주목하고 이를 형상화하는 사례를 남겼다. 물론 일상을 소재로 한다는 것은 인상주의를 수영한 일제식민지시기에서부터 주로 그려진 풍경이지만 그것은 단지 그림의 소재에 국한했었지 일상을 사는 이웃, 그들의 삶에 주목하는 경우는 박수근이 최초라고 본다. 이웃이란 내 옆집에 사는 사람, 공간적 인접성에 있는 이를 지칭한다. 공간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타인이 바로 이웃이다. 박수근에게 있어 미술적 가치는 이웃의 고통이 무엇인가에 대한 심안과 내가 상처받은 그들의 이웃이라는 각성으로부터 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이웃의 고통을 생각하라는 전언을 던져주고 있다. 그는 단지 이웃집 사람이 아니라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거친 이후에 살아남은 이들의 피폐하고 헐벗은 이들 모두를 자신의 이웃으로 생각하고 이들을 화폭에 담았다. 공간적 인접성을 떠나 사랑과 연민의 시선으로 전후 한국사회의 빈한한 일상과 그 풍경 속 인물에 주목한 이가 박수근이다. 그들의 외양은 다를지 모르지만 동일한 삶의 조건 속에서 같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 동일자라는 인식이 그런 그림을 가능하게 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지닌 박수근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에 반응한 이며 그 반응의 형상화를 추구한 이다. 이것은 그의 그림의 키워드이자 연대(solidarity)의 방식이기도 하다. 1965년 작고하기까지 박수근은 변함없이 자신의 삶의 반경에 놓인 이웃을 관찰했고 나아가 당시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양식화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당시 화단에서 박수근의 존재와 그의 그림은 철저히 소외되었다. 그가 죽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의 작품이 지닌 중요성이 인정되고 평가되고 있다. 새삼 박수근을 생각해본다. 오늘 우리 미술계는 고통 받는 이웃과 암울한 현실의 삶에 대해 거의 방관하고 있다. 그것을 형상화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미술시장에만 관심을 쏟거나 자본의 힘에 휘둘리고 있다. 2014년 미술계는 부디 불우한 이 현실과 가난한 이웃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대기업극장이 바로 서면 영화계, 관객 모두가 편안해진다

한국인이 영화 많이 본다는 통계 그대로 믿어선 안돼 대기업 극장, 상영횟수 독과점 등 영화 만드는 젊은이들 자리 좁아 저예산으로 영화 만들어가는 현상 기특하다 못해 눈물겨워 통계의 영향력은 정말 대단하다. 통계는 사람을 웃게도 울게도 만든다. 하지만 통계를 맹신해선 안 된다. 1등이라고 무조건 좋아해선 안 된다. 3명 중 1등 한 것하고, 30명 중 1등 한 것은 다르다. 더 큰 문제는 동일한 사람이 3명에서 1등 한 것만 보도하고, 30명 중 20등 한 것을 숨기는 일이다. 통계가 거짓은 아니지만, 무엇을 알리고 무엇을 숨기냐에 따라 그 반응은 달라진다.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알리고, 불리한 통계를 숨기는 태도는 그대로 믿어선 안 된다. 얼마 전 CJ에서 외국의 잡지를 인용하여 전세계에서 한국인이 일년 중 가장 많은 영화를 본다는 통계를 알려주었다. KBS 9시 뉴스와 조선일보 등 주요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소개된 이 기사를 접하고, 난 우선 왜 CJ 가 이 정보를 알렸는 지에 어리둥절해 했다. 외국잡지에 이미 나왔으니 기자들이 취재하면 될 것을 왜 하필 CJ가 개입했을까? 곧바로 CJ의 홍보전략이란 걸 추정하게 되었다. 결국 영화불공정으로 질타를 받는 CJ나 CGV 입장을 언론들이 감싸주는 기사가 되고 말았다. 혹시 사람들도 그 통계를 CJ가 해석하듯, 한국 관객이 많이 늘어나고 영화를 많이 본 것이 오로지 CGV의 덕이라고 잘못 생각할까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올해 한국영화의 최대 수확은 관객이 증가하여 2억명을 돌파한 것도, 한국인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봤다는 사실도 아니다. 올해 유독 50명에 가까운 신인감독들이 등장했다는 것과 그 영화들의 색깔이 정말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11월 중순까지의 통계를 보면 올해 등장한 신인감독들은 대략 45명이다. 전체 118편의 상영작 중에서 38%를 차지하고 있다. 3편 중 1편이 신인감독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1분기 기준 영화산업 매출액은 1조1천45억원 규모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6% 증가했다. 그러나 2012년 기준으로 스태프 팀장(퍼스트)급 이하의 연평균 소득은 916만원, 팀장 아래 직급인 세컨드급 이하는 631만원이다. 한국 영화 시장은 계속 커지고 있지만, 영화 스태프들은 평균 76만원, 53만원 수준의 월급을 받는다. 영화현장이 그런 곳인데도 젊은 제작자와 영화감독들, 스태프들이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들어가는 현상은 기특하다 못해 눈물겹다. <물고기>, <가시꽃>, <연애의 온도>, <공범>, <남자사용설명서>. <숨바꼭질>, <잉투기>, <잉여들의 히치하이커> 등 신인감독들의 수작이 나온 것은 한국영화의 희망을 보는 것 같다. 이들 가운데는 CJ나 CGV가 관계한 영화도 있다. 하지만 흥행한 영화는 한두 편이고 대다수 도산했다. 관객들의 선택이 아니라 순전히 극장의 판단이다. 이런 젊은이들을 좌절시키는 가장 큰 요인이 CGV, 롯데 등 대기업 극장들의 상영횟수 독과점과 교차상영, 예매불공정이다. 올 한해 대략 130여 편의 영화가 상영되었다. 그 중 관객들이 많이 봤다는 영화는 <설국열차>, <관상> 등 겨우 10여편이다. 오죽하면 송강호가 2천만 관객몰이의 주인공이 됐겠는가. 불공정을 계속 하는 한 그런 통계는 지속될 것이다. 특정 영화에만 몰리고 그 영화의 주인공이 뻔한데, 그중 송강호 같이 많이 하는 사람이 행운을 차지할 것은 당연. 만약 흥행영화들이 다양하다면 더 이상 그런 현상은 발생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이나 프랑스가 CGV처럼 불공정을 한다면, 한국이 더 이상 1등은 못할 게 뻔하다. 그러나 그들은 1위를 하기 위해 절대 불공정을 행하지 않는다. 영화업계는 대기업이 싹쓸이 하는 판이 아니라 상생하는 판이고, 관객들에게 다양한 영화를 보여주기 위한 판이라는 최소한의 원칙을 지키면서 장사하기 때문이다. 한국대기업극장이 이 원시상태의 불공정에서 벗어나야 선진국이 될 것이다. 상위 10%를 제외한 90% 내외의 120여편 영화들이 사장되었다. 한국영화산업은 누구를 위한 영화산업인가? 관객인가? 대다수 영화인들인가? 아니면 일부 대기업 극장인가? 자기들에게 유리한 통계를 갖고 한국영화산업의 실체를 은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당하고 공정하게 다수의 이익을 위해 극장이 서야하지 않겠나. 정재형 동국대 교수

[문화카페] 광주 마재와 홍현주, 숙원옹주의 부마

경기도 광주 출신인 정약용(1762~1836)이 광주 마재에서 노년을 보낼 무렵에는 홍인모(1755~1812)의 아들 삼형제가 자주 그를 찾았다. 1830년 다산의 장남 정학연(1783~1859)보다 9세 연하인 부마 홍현주(1793~1865)가 다산을 방문했다. 이에 다산은 그 지역에 나는 농어를 잡아 대접하려 했으나 아쉽게도 한 마리밖에 잡지 못한 사실 등 이때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다산이 지은 시가 전한다. 한편 이와 관련된 그림으로 사료되는 화면 상단에 다산이 7언 제시가 있는 <물고기> 그림도 전한다. 개인소장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이 그림은 다산의 탄신 300주년을 맞은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연 다산 정약용-하늘을 받들어 백성을 보듬다(2012.10.30~12.16)를 통해 일반에게 최초로 공개되었다. 홍현주는 문장으로 이름을 얻은 명문가의 자제로 12세 때 정조의 부마도위가 되어 영명위에 봉해졌다. 그의 배필은 다름 아닌 정조와 수빈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 숙선옹주로, 순조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홍현주의 가계를 살피면 조부 홍낙성(1718~1798)은 이조병조형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고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친 홍인모는 우부승지를 역임했으며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으니 현주가 막내이다. 이조판서와 좌의정을 역임한 큰 형 홍석주(1774~1842)는 조선 제24대 왕 헌종의 사부였다. 가문이 너무 성하면 과하다 여긴 모친의 권유를 따라 작은 형 홍길주(1786~1841)는 출사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고 문장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이들 삼형제들이 서화에 대해 남다른 큰 관심을 알려주는 자료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단원유묵첩』이 있다. 이 서첩은 조선의 그림신선으로 지칭되는 김홍도(1745~1806 이후)가 타계하자 그의 외아들 김양기가 부친이 남긴 서간이며 타인의 시를 쓴 부친의 유묵을 모아 서첩을 엮은 것이다. 이 서첩 내에는 6쪽으로 된 명말 청초에 활동한 왕탁(1592~1652)의 글 등을 옮겨 쓴 것인데 그 말미에 김홍도 자신의 태어난 해가 1745년임을 밝히고 있다. 이 유물이 덕수궁미술관에서 국립박물관으로 이관되면서 비로소 조명되었다. 이 서첩에는 홍씨 3형제 글이 모두 실려 있으니 서문은 홍석주와 신위가, 뒷부분엔 홍길주와 홍현주 등 5인의 발문이 있다. 간송미술관에 1983년 봄에 개최한 기획전인 추사묵연을 통해 홍현주의 산수화 2폭이 최초로 공개되었다. 이어 2001년 봄 연 추사와 그 학파 전시엔 달밤의 맑은 정취(月夜淸興)가 출품됐다. 오른쪽은 장취원도의 뜻을 따라 방한 것으로 묵화 삼수는 해거재 부마도위 홍현주가 그린 것이다. 원래 책상에 간직하고 싶었으나 초당 정미원이 간절히 원해 그에게 준다. 1829년 늦은 겨울이란 제사가 화면 좌측에 있다. 2011년 봄에 동처에서 개최한 사군자 전시에는 <묵난>이 출품됐다. 아울러『다산시문집』6권 송파수작에는 영명위의 화첩에 절구 네 수를 쓰다라는 제목의 시가 있어 기존의 다산 그림으로 알려진 산수 4점은 홍현주가 그린 것으로 재확인된다. 경기도박물관으로 옮겨와 홍현주 내외와 관련된 유물을 새롭게 접하게 되니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으며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수년 전 남양 홍씨 문중에서 홍현주숙선옹주 묘를 이장하던 중 이들 부부의 묘지명과 목관 등이 확인되었다. 묘지명은 새로 옮긴 무덤에 다시 묻었고, 표면에 붉은 색을 칠한 뒤 놀랍게도 그 위에 금칠을 한 목관 중 옹주 관에선 당의와 원삼에 부착된 흉배 2점을 수습하게 되었다. 목관 상판과 상태가 좋지 않은 두 흉배는 경기도박물관에 옮겨져 보존처리를 거쳐 유물창고에 안착됐다. 차인이기도 한 홍현주 유작들은 내년 봄 경기도박물관에서 개최할 차 문화 기획전을 통해 경기도민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문화카페] 지휘자란 무엇인가?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가면 청중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사람이 지휘자이다. 실제로 소리를 내지 않는데도 그의 열정적인 몸동작과 다양한 얼굴 표정이 음악 소리와 어우러져 깊은 감동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지휘자는 성공하게 되면 큰 존경과 경제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으며, 다른 직업과는 달리 고령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경력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의문도 따른다. 연주자들은 모두 정규음악 교육을 받은 프로 음악가들이며 악보를 잘 읽을 수 있는데 왜 지휘자의 동작을 보고 따라 연주해야 하는가? 지휘자는 모든 악기들을 다 연주할 수 있는가? 지휘자에 대한 관심 만큼이나 그 직업에 대한 의문이 늘 따라다닌다. 지휘자란 도대체 오케스트라에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떤 사람이 지휘자가 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해보려 한다. 첫째, 지휘자가 하는 일은 손과 팔을 이용해 오케스트라에 신호를 주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지휘자가 하는 일의 더 중요한 부분은 듣는 일이다. 지휘자는 연주자들이 악보를 읽어 연주하는 음악을 명민하게 듣고 예술적인 판단을 해줘야 한다. 반드시 틀린 음이나 잘못된 리듬을 지적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연주자들이 최선을 다해 가장 훌륭한 앙상블을 만들 수 있도록 예술적 귀로 듣고 예술적 판단을 해야 한다. 둘째,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지휘자는 사실 드물다. 유명한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독일 출신의 파울힌데미트는 오케스트라의 악기 대부분을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그런 지휘자는 극히 드물다. 지휘자는 대개 한두개 정도 악기의 숙련된 연주자이며, 피아니스트 출신들이 상당히 많다. 정명훈씨도 지휘자 이전에 피아니스트로 성공한 분이다. 세계적인 지휘자 중 번스타인, 무티, 카라얀, 바렌보임 등은 상당한 피아노 실력을 갖춘 지휘자들이다. 로린 마젤은 바이올리니스트 출신이며 존 바비리올리 경은 첼리스트, 콜린 데이비스경은 클라리넷 주자 출신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지휘자 본인의 악기 실력이 반드시 지휘자로서의 능력과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축구감독과도 비슷하다. 우리에게 친숙한 축구명장 히딩크 감독도 선수 시절에는 그리 신통하지 못했다고 한다. 유명한 지휘자들도 그런 경우가 상당히 있다. 세계적인 지휘자 로저 노링턴은 성악가와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한 적이 있지만 그리 성공적인 연주자 경력을 갖고 있지 않다. 셋째, 어떠한 과정을 거쳐 지휘자가 되는가? 지휘자들은 대개 성인이 된 이후, 또는 음악가로서 어느 정도 경력을 갖춘 이후 어떤 시점에 지휘자가 되겠노라고 결심하게 된다. 독일어권이나 이탈리아에서는 최근까지 주로 오페라 극장의 피아노 반주자로 근무하는 것이 지휘자의 시작이었다. 지휘자란 오페라를 지휘하는 사람이었으며, 유명한 지휘자 밑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지휘 기술을 보고 익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스템이었던 셈이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나 미국에서는 최근까지 대개 오케스트라의 연주자 출신들이 지휘봉을 잡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활동하는 지휘자들도 대부분 독일, 오스트리아, 미국 등지의 음악학교에서 지휘과를 졸업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지휘과를 나오지 않고서도 지휘자로 성공하는 경우도 있다. 의료인이나 법조인이 되는 것처럼 전문 대학원이나 국가고시 같은 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가 보시라. 지휘자의 동작과 표정이 무엇을 말해주고 있으며 그것이 어떠한 소리의 결과물로 청중에게 다가오는가? 이런 것을 관심있게 지켜보는 것도 음악회의 재미 중 하나다. 연말연시에는 공연도 많으니 이런 저런 술자리에서 겨울밤들을 부질없이 날려버리기보다 가족들과 함께 가까운 음악공연장을 찾아보는 것이 괜찮은 생각일 것이다. 양승렬 수원오페라단 지휘자

[문화카페]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대화

미술은 어디에나 있다. 미술이란 것은 도처에 살고 있고 수시로 출몰하며 유령처럼 배회하고 사람들의 삶에, 감각에 너무 깊이 관여하고 있다. 그런데도 잘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한다. 우리는 늘 너무 많은 이미지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또한 사람들은 직접 미술 작품을 만들지 않더라도 미술적 행위라고 부를 만한 일을 날마다 한다. 자신의 집안 인테리어에서부터 시작해 소소한 물건을 하나 고르더라도 디자인과 색상을 따져보는가 하면 무엇보다도 그날그날의 옷차림에 신경을 쓰고 남의 옷차림과 치장에 관심을 기울이며 은밀히 관찰하는 일, 카페나 음식점의 실내장식과 분위기 등에 대한 품평을 비롯해 자신의 수첩을 장식하고 블로그를 꾸미거나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받을 때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모두가 이미지 감상이자 미술체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미술과 충분히 낯을 익히고 있으며 실생활에서 이미지 제작행위를 하고 있다. 다만 그러한 일련의 행위를 미술이라고 생각지 않는 것이 문제다. 미술이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만 존재한다고 여기거나 미술을 전공한 전문가들만의 것이라고 믿어버린다. 덧붙여 미술이란 것이 특정한 소재를 특정한 방식으로 구현한 것이라는 막연한 상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반드시 아름다운 것이라고 확신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미술은 정해진 소재를 동일한 방식으로 재현하거나 아름다움이란 것을 강박적으로 구현하는 그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사실 오늘날 미술이란 개념을 단일한 의미로 정의할 수는 없다. 이미 20세기 들어와 현대미술 자체가 19세기 중반에 형성된 미술ART란 개념을 뛰어넘어 숨 가쁘게 진행돼왔으며, 온갖 별의 별 일들이 미술이란 이름으로 전시되고 논의되고 있음은 새삼스럽지 않다. 아울러 미술은 특정 전시 장소에만 걸려있거나 놓여있지 않다. 오히려 전시장 밖에 너무 많은 이미지들이 바글거린다. 그것들을 날카롭고 정치하게 들여다보고 생각하고 그 이미지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이 진정한 미술인이다. 따라서 미술을 전공했느냐가 아니라 그런 시각으로 미술적 행위를 하고 있느냐를 질문해야 한다. 그러니 일반인 모두가 미술적 행위를 하는 이들이자 이미지에 대해 생각하고 논의하는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전문적으로 사고하고 글을 쓰고 시각적 오브제를 만드는 일을 직업적으로 하는 이들이 미술평론가나 작가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 못지않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수한 시각이미지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 시각이미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 함께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삶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것이 결국 문화이고 예술이다. 또한 문화나 예술은 인간과 관계된 것이고 각자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를 필요로 한다. 이 문화적, 예술적 대화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으로서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 남과 다른 자신만의 삶과 견해가 필요하다. 그것은 취미일 수도, 정치이거나 예술일 수 있다.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대화하는 방식의 하나인 예술의 목표를 인간개성의 실현으로 보았을 때 남과 다른 삶의 힘이 소통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의 경우 일반인이 여가시간에 이름난 먹을거리와 텔레비전만을 찾는 시기를 벗어나 자신의 삶을 즐기는 방식으로 다양한 취미와 레저 또는 예술을 찾아 나설 때 비로소 일정한 문화적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에서 남과 다른 애착으로 즐길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노력이 절실하다. 자신의 일상 속으로 미술을 끌어들이고 이를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여러 방안에 대한 논의와 모색은 그런 노력에 일정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한국의 문화예술교육, 아직 멀었다

지난 23일 오후 2시 동국대학교에서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 주최의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토론 주제는 문화예술교육사제도 초석이 중요하다였고, 문제와 대안을 토론하였습니다. 현재 초중학교에는 음악, 미술 외에 국악, 무용, 연극, 영화, 사진, 만화-애니메이션, 디자인, 공예 등을 가르치는 과목과 선생님이 배정되어 있습니다. 수능을 대비하는 수업이 아니므로 선택이거나 재량, 방과 후 수업 등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2004년 국악을 필두로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입시에 찌들어 있는 현재 초중등교육에 청량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시작한 이 사업은 현재 교육부와 같이 진행하고 있으며, 예술강사 사업으로 시작되었다가, 문화예술교육사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시점에 있습니다. 전국 225개 대학과 13개 교육원에서 교육받고 나오는 문화예술교육전공자는 매해 8천명 내외가 될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들이 다문화예술교육사의 대상이기도 하지요. 이번 세미나에서 집중 토의한 것은 10년 이상의 전통을 갖고 있는 예술강사 사업이 문화예술교육사로 이름이 바뀌면서 어떤 점이 더 좋아졌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토론에서 핵심적인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해마다 배출되는 수많은 자격증 소지자들이 과연 다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느냐 하는 의구심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견해가 갈립니다. 거의 불가능하다는 견해와 노력만 하면 가능하다는 견해입니다. 현재 시점에서 불가능하다는 견해에 있어서는 의견이 일치합니다. 8천명을 수용하기에 현재의 조건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전국 초중고는 1만1천개 정도입니다. 전국의 유치원은 약 8천개입니다. 어린이집도 4만2천개 정도가 됩니다. 이들 기관에 강사들이 파견되어 문화예술교육을 행한다면 매해 8천명이 배출되는 것도 큰 문제는 안됩니다. 예산과 수요만 있다면 해결되는 문제죠. 계산을 해보니 일년에 4조원 정도 투자하면 된다고 합니다. 유치원에서 초중고까지 문화예술교육을 시행하기 위해 4조원를 투자해야 하는 일입니다. 정부가 창조경제 예산을 5년간 40조원으로 잡았습니다. 대신 65만개 일자리를 창출하는 게 목표지요. 투자 대비 계산으로 따지면 일년에 최소 6만개 일자리는 잡아야 하는데, 만명도 안 되는 인력에게 일자리를 주기위해 4조원를 투자하는 것은 무리한 투자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이것을 일자리 개념으로만 보면 안 된다는 게 문화예술계의 입장일 것입니다. 어린이, 학생들에게 문화예술교육을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미래의 창조적 국가원동력을 개발하는 투자라고 생각해야 하겠죠. 하지만 그러한 합의가 국민들과 얼마나 되어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전국의 학부모들이 문화예술교육에 그만한 투자를 하는 게 옳다고 찬성할 지 알 수 없습니다. 10여년 전에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구로 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발족하고, 문화예술교육이 정착되고 있지만, 예산부족으로 해마다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문제도 만만치 않습니다. 소위 국가 자격증인데 그 체계나 기준이 잘 갖춰져 있는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10년 이상이나 교육이 진행되어 왔지만, 여전히 예술과 교육이 결합된 시스템이 부실합니다. 문화예술교육사 교과목이 배정되었지만, 교재개발도 되어있지 않고, 가르칠 사람도 변변히 없는 과목이 많습니다. 체계적으로 보면 순서가 맞지 않고, 예산배정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입니다. 문화예술교육은 예술가를 배출하는 교육이 아니기 때문에, 기존 예술가들의 전통적인 교육방식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융합교육이어야 합니다. 국악과 무용과 연극, 영화가 서로 어우러지는 교육을 배워야 하고,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해야 합니다. 대학과 교수는 예술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많은 방법을 고안해야 하며, 정부와 소통해서 정책이 좌초되지 않도록 도와줄 책임이 있습니다. 정책은 항상 정치적인 배경 하에 만들어지므로, 정부가 바뀌면서 무책임해지는게 일상입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국민을 생각해야 하고, 부단히 노력해야 할 책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재형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문화카페] 장단과 강희안, 조선 초 최고의 문인화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37년 2개월의 공직을 마치자 곧이어 5월23일자로 10대 경기도박물관에 몸담게 되었다. 후반생을 새롭게 펼치게 된 경기도와의 인연을 잠시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2001년 77세로 유명을 달리한 어머니와 아까운 나이에 타계한 진정한 미술사학도인 외우 오주석(1956~2005)이 수원 출신인 점이 먼저 떠올랐다. 그밖에도 내 전공인 미술사와 관련한 크고 작은 일들이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지면이 주어지자 내 자신과 경기도 지역의 역사상 빛난 선인들과의 인연을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에 따라 안산과 강세황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 초 최고의 문인화가인 강희안(1417~1464)을 소개하려 한다. 강희안은 조선 초 최고의 문인화가로 화원 안견과 더불어 예단의 쌍벽(雙璧)으로 그 시대를 화사하게 빛낸 서화가였다. 문화의 번영기인 세종대에 활동한 그는 서예에 능해 글자로 활자가 주조되었고 꽃 가꾸기를 즐겨 조선 초 최초의 원예서적인 『양화소록』을 저술했다. 비록 대작은 전해지지 않고 소품들이 주류이나 전칭작인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명상에 잠긴 선비)>가 잘 알려져 있다. 18세기 대수장가인 김광국(1727~1797)의 수집품으로 현재 간송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나뉘어 간직된 격조와 기량이 돋보이는 <청산모우>나 <교두연수> 같은 산수화가 전한다. 도화서 소속 화원으로 작업화가인 안견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듯 보이나 회화사적 업적은 결코 그에 뒤지지 않으며 동가로 자리매김된다. 흔히들 조선시대에는 그림을 홀대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 다르니 중국에서도 서화의 공은 6경(經)에 비유되었다. 세종숙종영조정조 등 성군은 모두 서화에 능했고 그림을 즐긴 문인화가들이 적지 않았다. 다만 성리학이 주체이념인 전통사회에선 기술직을 얕게 보아 외국어에 능통한 역관, 문서의 기록을 담당한 글씨에 능한 사자관, 병을 잘 고치는 의관을 비롯해 화원 등은 이들의 신분이 양반 아닌 중인들로 말단관직이었다. 그러나 이는 신분에 따른 폄훼일 뿐이지 그림 자체를 천시한 것이 아님을 간과해선 안 된다. 서울에서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사이에 낀 1987년 봄에 있던 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는 그 해 5월22일부터 25일까지 4일에 걸쳐 장단군 장단면 금곡동 소재 야산에서 강희안과 그의 부인 김씨 묘소를 발굴했다. 나 또한 발굴 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임진강 다리 건너 민통선 내 위치한 이 묘역은 일반인의 접근이 차단되었다. 강희안은 아들 없이 네 딸을 두었으니 외손봉사로 사위가 제사를 모셨다. 둘째 사위인 송윤종 집안의 묘역에 강희안 부부가 함께 묻혔다. 송씨문중에서 1978년에 4월 한식 때 성묘 차 들렸을 때 묘비의 명문에 의해 강희안 부부와 송종윤의 묘를 찾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강씨문중에선 강희안의 묘를 시흥군 수암면에 있는 강희안의 동생 강희맹(1424~1483)의 묘역으로 옮기려 했다. 이런 와중에 강희안의 묘에 손을 대 도굴을 시도한 흔적이 보이자 황급히 국립박물관에 발굴을 의뢰한 것이다. 군부대의 도움으로 지뢰탐지를 거쳐 이장(移葬)을 전제로 했기에 단 4일 만에 발굴을 마무리했다. 묘비에 의해 강희안은 1464년에, 부인은 이보다 20년 뒤인 1484년 안장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결한 선비의 모습을 말해주듯 부장품은 매우 소략했으니 수저 한 벌과 갓 장식으로 쓰인 유리와 호박으로 된 구슬 13점이 전부였고 관에 사용된 쇠못뿐이었다. 그러나 묘비(墓碑)를 통해 조선왕조실록과 족보에서 차이를 보인 강희안의 생몰년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곳 경기도 땅에서 회화사를 전공자가 조선 초 최고의 문인화가인 강희안 묘소 발굴에 참여한 것은 뿌듯함으로 다가오며 26년이 지난 일이나 바로 조금 전 일같이 생생하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문화카페] 나는 누구인가

필자의 미국 유학시절 아시아 음악(Music of Asia)이라는 과목이 대학원 과정에 개설돼있는 것을 보고는 놀랍고 반가웠다. 동양인이니까 점수 따기 유리하겠지라는 얄팍한 계산으로 이 과목을 신청했다. 수업은 한국, 중국, 일본의 전통음악을 다뤘는데, 중국과 일본의 음악에 보다 많은 시간이 할애됐고 한국 음악은 가장 적은 수업시간이 배정됐다. 중국의 전통악기들을 비롯해서 경극과 곤극, 일본의 노드라마와 샤쿠하치, 샤미센 등의 악기들과 한국의 가야금, 거문고, 대금 그리고 시나위, 판소리 등의 장르들이 다뤄졌다. 수업 내용보다도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세 나라의 음악에 대한 미국학생들의 반응이었다. 학생들은 패왕별희로 유명한 중국 경극의 화려한 의상과 마스크, 현란한 아크로바틱 등을 매우 흥미로워했고, 표정은 마치 서커스를 관람하는 어린이들의 그것과 같았다. 절제된, 때로는 다소 통제된 동작을 사용하고 목을 쥐어짜듯 해 독특한 소리를 내는 일본의 노드라마를 감상할 때는 이곳저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학기 말 한국 전통음악과 판소리를 공부할 때에는 학생들의 태도가 사뭇 달라졌다. 산조나 시나위 등을 들을 때 이곳저곳에서 Its cool!(멋지다), Its really neat!(정말 굉장하다)라는 미국 젊은이 식의 감탄이 연발했다. 영화 서편제에서 주인공 세 사람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5분 고정카메라에 담은 장면에서는 Beautiful!(아름답다)이란 탄성이 터져나왔다. 심청전의 심봉사가 눈을 뜨는 대목을 감상한 후 한 미국 여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웬지 모를 감동을 느꼈어요. 지금까지 들었던 중국이나 일본음악과는 달리 제 마음 속에 무언가 직접 와 닿는 호소력이 있는 음악이에요. 다른 미국 학생들 몇명도 같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중국과 일본의 음악에는 흥미롭다, 재밌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면 한국 전통음악을 듣고는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교수는 한국 음악과 판소리에 가장 적은 시간을 할애한 데에 다소 멋쩍은 기색을 보였다. 우리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국수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게 아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틀린 말이라 할 수 없지만 남의 것이 좋은 것도 알아야 우리 것의 좋음도 더 잘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필자가 아시아 음악이라는 수업시간에 경험했던 것을 한마디로 한다면 판소리를 비롯한 우리의 전통음악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호소력이다. 즉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를 즉시에 감동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이 한국의 전통음악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힘이다. 이런 강력한 보편적 호소력을 지닌 전통음악은 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즉 어떤 비서구 전통음악이 그 문화의 외부인에게 흥미롭기는 쉬워도 감동을 느끼게 해주기는 어렵다. 아마도한국 전통음악에서 그 힘은 민중의 삶 속에서 진한 국물처럼 우러나왔기 때문이며, 한과 흥 그리고 신명 등의 정서가 잘 버무려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는 물론 서양음악을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음악이 늘 고맙고 자랑스럽다. 자랑스러운 전통음악이 있기에 서양음악을 보는 관점도 서양인들보다 폭넓을 수 있다. 필자는 오는 12월1일에 프랑스의 칸(Cannes)에서 프랑스의 한 오케스트라를 객원지휘한다. 프로그램은 대부분 프랑스 작곡가들의 음악으로 돼 있으니 뼈 속까지 한국인인 필자에게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다. 동양인 지휘자에게 듣는 프랑스 음악이 프랑스인에게는 어떻게 다가올까? 어설프게 프랑스인 흉내를 내서는 안될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 한국인으로서 한과 흥 그리고 신명을 버무려 보편적 호소력이 있는 지휘를 해야겠다. 연주복으로는 두루마기나 개량한복을 입어볼까. 양승렬 수원오페라단 지휘자

[문화카페] 사물과 세계를 다시 보게 해주는 일

현대미술은 미술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일을 말한다. 미술가란 존재는 그런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자신의 궁리를 물질화시켜내는 일을 하는 이들을 지칭한다. 더불어 사물과 세계를 응시하고, 그 의미를 되묻고, 그 존재에 대해 늘상 궁금증을 던지는 이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술작품이란 결국 그들이 보는 사물과 세계에 대한 그들만의 관점이자, 해석이고, 다시 보기이며, 새롭게 보기의 결과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술작품을 통해 비로소 관습적이고 상투화된 사물과 세계를 보는 안목에서 벗어나게 되고 작가만의 다른 눈과 감각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을 통해서 다시 사물과 세계를 보게 된다. 이처럼 좋은 작가는 우리에게 미술에 대한 그들의 새로운 관점과 해석을 안겨준다. 따라서 작가란 존재는 단지 손재주나 장식적인 차원의 기술적 재능을 지닌 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는 모든 것에 대해 날카롭고 놀라운 해석, 기발한 상상력을 더해 그것을 다시 보여주는 이들이다. 하여 우리는 그들의 작품을 통해 사물과 세계를 다시 보게 된다. 새롭게 보게 된다. 눈을 뜨게 되고 인습적인 틀에서 벗어나게 되고 존재 그 자체를 응시하게 된다.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는 미술가 다시 말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가 된다는 얘기다. 따라서 작가는 오로지 자기 자신과만 싸우고 경쟁한다. 좋은 미술가는 지속해서 사물과 세계를 제대로, 그 존재의 본질과 핵심을 보기 위해 노력하고 그런 눈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이들이다. 진정한 자기가 되기 위해 애쓴다. 그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갱신과 변모를 통해 매번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고자 한다. 모든 이데올로기나 거짓, 위선과 왜곡, 상투형과 관습에 저항한다. 결국 미술의 문제는 정확히 보는 눈, 놀라운 눈이다. 그러니 미술은 우리에게 그런 눈의 문제를 알려주는 한편 그런 눈을 가진 이들의 작품을 경험하게 해서 우리 역시 그러한 눈을 갖도록 독력하는 일이다. 그와 같은 눈을 갖기 위해 공부하게 해주는 일이 미술이다. 미술작품은 결국 작가들의 세계를 보는 프레임, 표현하는 방법론, 미술을 이해하고 구현하는 매너의 차이에 따라 구별된다. 반복하지만 작가는 우리에게 새롭고 낯선 존재를 보여주는 이들이다. 그 낯설음은 기존의 사물과 세계를 보는 관습화된 안목에 회의를 갖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또한 좋은 작가들은 특정한 형태로 굳어진 가치에 안주하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는 시선과 감각으로 매번 미술을 새롭게 사고하며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보여주는 이들이다. 그들의 작업은 결국 자신의 삶의 리얼리티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이 얽힌 것들이다. 작품은 작가의 세계를 보는 프레임 반복되는 자신의 일상에서 깨닫고 느끼고 겪어낸 모든 것들을 무리 없이, 마치 나무줄기가 수액을 빨아올리듯이 인생에서 겪어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길어 올리는 자들이 좋은 작업을 선보인다. 그러니 좋은 미술과 좋은 미술가들은 이 사회에서 소중한 빛들에 다름아니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창조경제의 핵심은 발칙한 발상

얼마 전 뉴스에 00약국이라는 이름의 술집이 구청에 의해 영업정지가 된다는 것이 보도됐습니다. 그 술집의 간판은 약국을 모방해 이름은 물론이고, 적십자 마크까지 그려져 있습니다. 카운터 종업원은 약사 가운을 입었고, 기본 안주는 알약처럼 조제해줍니다. 실내는 약국의 내부와 똑같이 인테리어돼 있어, 마치 약국에 앉아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이 술집은 젊은이들이 자주 드나드는 거리에 있고, 상당히 인기가 올라가는 중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발상이 독특하고 재미있어 이 술집을 많이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약사회에서는 민원을 제기했습니다. 약국이 술집과 혼동되고 있으며, 약국의 이미지를 흐려놓는다는 것이지요. 결국 구청에서는 13일간 영업정지 처분을 내렸는데, 이런 경우가 자꾸 파급될 우려가 있어 미연에 차단하는 조치였다는 것입니다. 술집주인은 약을 판 것이 아니므로 법에 저촉될 게 없고, 새로운 발상을 규제하는 건 시대에 역행하는 처사라고 소송을 했습니다. 이제 이 사건은 법정에서 시비가 가려지게 됐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 우리 사회에 흐르는 두 가지 기류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술집주인의 기발한 발상과 서민경제, 한편으로는 기존의 질서를 대변하는 어떤 세력들과 그들의 실리 및 명분. 이 두 가지의 이해관계는 대립하고 있습니다. 술집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술이 스트레스 해소, 즉 치유의 측면에서 약에 비유된 것입니다. 그건 대단한 인문학적 상상력이고, 평범한 술집의 이미지를 한 단계 예술적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약사회 입장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재미있는 건 좋은데, 약과 술의 이미지를 동일시한 것은 약의 신성함을 너무 무장해제시켜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유는 어디까지나 예술 안에서만 존재해야지, 현실이 되는 것은 불행입니다. 아픈 사람들이 정말로 약을 안 먹고, 술로만 치유하려 한다면 그 후유증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법이 이 사건의 본질을 완벽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법정에서는 법적인 측면에서만 판정을 내릴 것입니다. 대신 이 사건은 현재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창조경제의 움직임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의 시금석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창조경제의 원동력은 발칙한 발상입니다. 일상적이며 관습적인 사고에서 창조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술집주인의 발상은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발칙한 발상과 돈벌이, 즉 창조를 이용한 경제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창조경제적 과정을 닮아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두텁다 못해 억압적입니다. 조금이라도 창조적 사고를 하는 순간 거대한 관습의 벽과 부딪치는 것을 피할 순 없습니다. 창조경제,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약국-술집 사건을 보면서 창조경제가 무사히 정착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약국을 모방한 술집이 영업하는게 맞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발상의 전환을 하자는 건데 얼마나 바람직한 생각입니까? 하지만 한국사회의 관행을 하루 아침에 깨기는 쉽지 않습니다. 약과 술을 혼동하는 현상을 죽어도 싫어하는 사람에게 영업논리만을 불도저처럼 밀어 강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창조경제도 다른 제도처럼 주변의 이해와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정책이란 걸 새삼 느끼게 합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나 정책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창조경제가 현재 구호로만 존재하는 건 아닌지 반성하게 합니다. 정부는 창조경제를 급히 실행하기 보다는, 그 밑거름이 되는 국민홍보에 더욱 더 신경써서 이해를 시키는 일부터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정재형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문화카페] 결실의 계절, 철부지와 애송이의 변

학문의 본령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이지만, 시비(是非)로 말다툼에서 머무는 경우도 왕왕 있다. 마찬가지로 엄정을 요하는 미술품 감정(鑑定) 또한 진부 여부나 예술성 및 가격에 대한 잡음으로 학계와 고미술상 그리고 소장가 상호간에 상처를 남기며 감정(感情)을 사게 되기도 한다. 자연과학과 달리 인문과학은 개연성(蓋然性)에 대한 느슨함 내지 너그러움으로 한 가지 답만을 주장하기 어려운 면이 내재적으로 존재한다. 나아가 학자적인 양심이나 성실성과는 별개로 언어나 문자 자체가 안고 있는 한계성에서 오해와 곡해는 늘 있게 마련이다. 고양이와 강아지는 서로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 으르렁댄다고 들었다.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절감하게 된다. 우리들의 생각이나 느낌을 전달하는 도구로 문자나 언어는 완벽하지 못하다. 이에 행간을 읽는다는 말의 의미와 입장 바꿔 생각함의 참뜻을 깨닫게 된다. 우리들은 너무나 당연시 여기던 사실이나 지식이 어느 순간에 실제와 다름을 알게 될 때 당혹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기존에 인식된, 이른바 지식이란 것도 얼마나 가볍고 알량한지를 새삼 되묻게 된다. 최근 중앙의 한 일간지가 본격적으로 다룬 국화(國花), 즉 나라꽃의 문제가 한 예가 된다. 우리나라 꽃이 무궁화로 다들 알고 있지만, 이는 국가나 정부가 지정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 중국과는 달리 미국도 일본도 어떠한 구체적인 꽃을 지정한 것은 아니니 일본의 사쿠라, 즉 벚꽃도 그들의 국화는 아니다. 하지만 사전 상 국화의 정의는 한 나라를 상징하는 꽃이니 국가지정 여부와는 별개로 우리나라의 무궁화나 일본의 벚꽃은 그들의 나라꽃으로 이해해도 틀린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보물이나 국보로 지정받지는 못했으나 그에 버금가는 문화재를 일반적으로 국보나 국보급으로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때로는 기존의 인식 때문에 전체를 제대로 못 보는 경우도 발생한다. 조선의 그림 신선으로 불리는 김홍도는 교과서에 <무동>, <씨름>, <글방> 등이 실려 흔히 풍속화가로만 간주되기 쉽다. 그러나 풍속화는 그에 두 세대 앞서 윤두서와 조영석 같은 문인화가들이 시작했으니 김홍도가 풍속화를 창시한 화가는 아니다. 아울러 산수화, 사군자, 신선 그림, 호랑이와 까치 등 각종 동식물, 그리고 불화까지 전통회화의 모든 분야에 두루 뛰어났다. 풍속화만 그린 화가로 봄은 분명히 틀린 것이다. 그는 그림뿐만 아니라 글씨도 잘 썼으며 피리와 거문고 등 악기를 다뤘고 시조도 남겼다. 서양의 르네상스 때 천재 예술가와 비교해 뒤지지 않는 거장이라 하겠다. 중인 신분의 직업 화가이나 그의 예술 세계는 별개로 시대를 넘어 모든 이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우리 문화예술의 위상과 특징을 대변했으니, 중국과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준 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 화가였다. 결국 조금 아는 것 때문에 진면모나 전체를 못 보는 우를 범하게 된다. 조선왕조를 세운, 우리나라에서 김씨에 이어 가장 많은 성인 이씨의 경우 오얏 이라 하는 데 오얏을 배[梨]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도 있으나 자두[李]를 지칭한다. 타인에게 자신의 본관과 성(姓)을 별 생각 없이 경주 김씨나 전주 이씨 등으로 말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씨가 아닌 경주 김가나 전주 이가로 말함이 옳다. 이때 사용되는 가는 성 밑에 붙는 접미사로 노래 가(哥)이니 집 가(家)가 아니다. 싹이 터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은 이 수확의 계절, 내 자신 앎이란 열매는 모른 채 싹이나 꽃 단계에서 서성이는 애송이나 철부지 모습임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문화카페] 가을이 오면

언제부터인지 젊은 세대들 사이에 로망이라는 단어가 즐겨 사용되기 시작했다. 간절한 꿈이나 소망을 뜻하는 말로, 아마도 프랑스어의 로망(roman)이라는 단어가 그 근원일텐데 어떻게 우리 말에 들어와 통용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프랑스어의 로망 또는 로망스(romance)란 매우 비현실적인 무용담이나 연애담을 형식이나 규칙에 구애받지 않는 중세 시대의 문학 장르를 지칭한다. 로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진 것은 유럽 식자들의 공용어(lingua franca)인 라틴어가 아니라 지역 언어들, 즉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 프랑스어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로망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로맨스, 로망스, 로맨틱 등과 관련된 단어인데,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부터 사용한 한자어라고 생각하는 낭만(浪漫)이란 단어도 로망이란 음을 가차(假借)한 것일 뿐이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유행한 철학예술사조인 낭만주의(romanticism)가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은 로망이라는 중세 문학장르에 나타나는 비현실성, 공상, 환상 등의 특징이 이 사조와 어울린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사조는 이성과 합리성을 숭상한 18세기의 계몽주의와 연관이 있다. 극단의 이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다 한계를 직시하고 비현실과 비이성, 환상 등으로 빠져나가게 된 것이다. 초기에 낭만주의 사조를 이끌었던 이들은 다름 아닌 독일 합리주의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칸트(Immanuel Kant)였다. 그는 사물의 본질 즉 물자체(Das Ding an sich)를 인간의 오감과 이성으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이성의 한계를 직시했으며, 우리가 어떤 예술작품에 몰입해 무아지경에 이를 때 물자체를 가장 근접해 경험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칸트의 생각이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사상적 기초가 됐다. 바야흐로 가을이 깊어가는데 우리의 일상은 바쁘기만 하다. 잡다한 생각을 버리고 가을 석양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들기를 언제부터 하지 않게 됐을까? 우리는 매일 일터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효율 지상적인 두뇌활동을 강요 받고 살아왔다. 어린 시절 가졌던 꿈과 환상 따위는 잊은지 오래다. 잠깐이라도 일상을 떠나 낭만주의자가 돼보는 것은 어떨까 하고 작곡가 한 사람을 소개하려 한다. 슈베르트와 슈만 등의 독일가곡이나 쇼팽, 리스트 등의 피아노 음악은 그야말로 낭만주의 음악의 아이콘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필자는 낭만주의적 자의식을 가장 뚜렷이 지녔던 작곡가가 누구보다도 프랑스의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환상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은 예술가 스스로의 자서전적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으며 낭만주의를 작곡가의 온몸으로 분출해낸 걸작이다. 곡 전체에 걸쳐 아름다움과 그로테스크함이 거짓말처럼 병치되어 있지만 그것들이 어우러져 놀라운 유기체를 만들어낸다. 오케스트라를 위한 트리스티아(Tristia, Op. 18)라는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장면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마지막 악장인 햄릿의 종막을 위한 장송행진곡에는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포효와 어우러지는 무언의 합창이 압권이다. 둘째 악장인 오펠리아의 죽음(La mort dOphlie)에서 베를리오즈는 냇물에 떠내려가는 오펠리아의 차가운 주검과 그 비극적 아우라를 소리의 팔레트를 사용하여 회화적으로 묘사했다. 가을이 가기 전 꼭 들어보시라. 베를리오즈의 작품들을 가을에 어울릴 음악으로 소개하고 보니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이문세의 가을이 오면이나 김광석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도 올 가을에 듣기에 괜찮겠구나 하는. 양승렬 수원오페라단 지휘자

[문화카페] 가을날의 인문학 공부

지독히도 힘들었던 지난 여름이 문득 떠나간다. 아직 대낮의 태양은 여전히 따가워 그 여름의 진한 열기를 상기시켜주지만 이 뜨거움은 분명 이전만 못하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과 서늘한 기운이 은총처럼 다가온다. 이렇게 또 한 계절이 사리지고 새로운 계절이 변함없이 찾아온다. 이른 추석을 보내고 이제 다들 책상에 앉아 이내 짧아진 햇살을 아쉬워하며 책을 읽거나 빛바랜 문장을 더듬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어두운 시절일수록, 답답하고 가물거리는 시대일수록 책 읽는 이들의 뒷모습은 여전히 감동적이다. 책은 배신하지 않고 쌓인 공부는 넘치는 법이 없다. 우리가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이유는 자신의 사는 시대와 현실, 내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반성의 시간이자 자리이다. 공부는 인간의 삶과 문화 전반을 다시 보고 이해하며 그것의 경과와 사정을 온전히 통찰하여 앞으로 이어질 생의 자리를 찾아가는 일이다. 그러니 반성이란 단지 지난 시간의 것을 추억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다시 살아갈 자리를 준비하는 일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직시하고 이해하며 그로 인해 빚어진 모순이나 어긋난 자리를 예리하게 들여다보아 잘 맞추려는 시도이다. 공부란 우선적으로 이러한 안목과 통찰, 사유의 깊이를 지닌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시각점과 반성과 성찰의 마음을 지니게 하는 것이 공부다. 인문학이란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근자에 여기저기서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고 다양한 인문학 강좌가 열리고 있다. 월터 카우프만은 인문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문학은 현재의 지배적 관점에서 벗어나 비판적이면서도 다른 대안에 입각해 비전을 마련하려는 학문이다. 나 또한 인문학강좌의 일환으로 현대미술과 관련된 여러 강의를 하고 다닌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러한 강의가 상투화된 상식이나 얄팍한 교양을 전도하는 역할에 머물까 두려워한다. 최근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는 인문학 강좌란 게 대부분 그런 혐의에서 자유로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새삼 생각해보지만 인문학은, 학문의 중요한 가치와 의미는 삶의 가치에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비판적인 정신과 깨어 있는 눈을 지닌 정치적 시민을 양성하고 독려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러한 인문학의 과제는 지워져버리거나 망실된 채 시장에 편입돼 얄팍한 지식, 말랑말랑한 교양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것은 지식조차 상업주의나 소비주의에 이용당하는 꼴이다. 지식조차 상품처럼 소비되고 유통되고 트랜드가 되어 소모되고 있다. 인문학은 이른바 정치적 시민을 어떻게 양성해내느냐의 본질적 과제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인문학은 보편적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의 삶과 문화, 역사를 배우고 이를 통해 진정한 인간다움과 그 인간다움이 가능한 현실을 만드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인 가치가 지금 이곳에서는 망실돼가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 이 가을에 책을 읽는 진정한 이유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요즈음 유행이 되다시피 한 인문학이 무엇인가도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독서는 사물과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과 마음을 생성시켜주며 이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간형으로 환생시키는 기이한 체험을 안긴다. 오로지 독서만이 그런 마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영화소비자 운동을 시작합니다

영화란 무엇일까요? 영화란 오락이며, 동시에 예술입니다. 영화는 예술가, 상업인, 관객, 삼자가 공히 만족해야 성립합니다. 영화예술가가 상업적으로 흥행시키지 못하고, 관객이 없는 영화를 만든다는 건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영화상업인 역시 예술가와 관객이 없는 영화를 배급하고, 상영하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지금 이 땅에는 영화상업인들만 있지, 예슬가와 관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영화들이 극장에서 많이 상영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극장에 가면 인기 영화 몇 편만이 거의 독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극장은 관객을 무시한 것이고, 고로 관객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관객이 뭘까요? 관객은 상업적으로 보면 영화라는 상품을 사용하는 소비자입니다. 소비자는 존경받을 만한 존재입니다. 혹시 소비자 기본법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소비자들이 공정한 소비생활을 하기 위해 보호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들을 법적으로 규정하여 놓은 법입니다. 소비자 기본법에 의하면 소비자라 함은 사업자가 제공하는 물품 또는 용역을 소비생활을 위하여 사용하는 자 또는 생산 활동을 위하여 사용하는 자(제1장 2조)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사업자란 영화로 적용하면 제작자, 배급업자, 극장주를 말합니다. 물품이란 영화를 말하고, 관객은 소비생활을 위해 혹은 생산활동을 위해 사용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소비자는 소비만을 위하여 물건을 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생산적인 일에도 그 물건을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영화도 마찬가집니다. 단지 소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활동을 위하여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소비만 하는 것은 오락을 위한 영화감상이지만, 인생을 깊이 생각하는 문화적 감상에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생산적 수단으로 영화가 차용되는 것이지요. 소비자의 기본적 권리는 물품 등을 선택함에 있어서 필요한 지식 및 정보를 제공 받을 권리(제2장 4조)와 물품 등을 사용함에 있어서 거래 상대방, 구입 장소, 가격 및 거래 조건 등을 자유로이 선택할 권리(제2장 3조)가 있습니다. 극장의 예매사이트에 들어가서 일주일후 예매하려고 해보십시오. 상영스크린, 일시가 떠있지 않습니다. 길어야 2~3일 전 예매밖에 안 됩니다. 잘 나가는 특정영화만 예매가 가능합니다. 관객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소비자 기본법을 어긴 것입니다. 특정 영화의 예매율은 관객의 선택치곤 일방적인 선택이어서, 다른 영화들과의 형평성으로 보면 불공정합니다. 프랑스의 극장에는 일주일 전 예매가 당연합니다. 왜 한국의 극장에선 일주일 전 예매시스템이 가동하지 않을까요? 주말에 영화가 끝나면 흥행스코어가 나오고, 그 결과에 따라 실적이 나쁜 영화들은 나쁘게 배정하고, 좋은 영화들은 더 좋게 배정해서,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하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주말까지 기다리니까, 개봉 일주일 전에 미리 스크린과 시간을 배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영업권만 생각하지, 소비자의 영화 선택할 권리를 고려하지 않은 처사입니다. 극단적인 영업권추구가 견제되어야 예술가, 상업인, 관객 삼자가 다 같이 살지 않을까요? 정재형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

[문화카페] 강세황, 안산에서 백수시절 의미

성리학이 주체이념인 조선왕조에서는 평생도가 보여주듯 과거급제로 관직에 진출한 뒤 고위직에 승승장구한 뒤 노년에 이르러선 벼슬을 내려놓고 물러남(致仕)이 양반가의 자제들이 추구한 가장 바람직하며 모범적인 일평생이었다. 여기서 소외된 이들은 삶의 목표나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불행한 이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추사 김정희가 제주 귀양시절 기득권 모두를 잃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등 불후의 명품을 남겼으니 걸작은 반드시 좋은 환경에서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표암 강세황(1713.윤5.13~1981.1.23)의 아버지 강현(1650~1733)은 84세의 수를 누렸고 슬하에 3남 6녀를 두었다. 64세 때 서울 남소문동에서 낳은 막내가 다름 아닌 강세황이다. 노년에 얻어 손자보다도 어린 자식이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지옥엽 그 자체였다. 표암은 15세에 진주 유씨와 결혼해 17세에 장남 인을, 55세 때는 서자 신 등 아들만 다섯을 두었으니 첫째와 막내의 나이 차는 38년에 이른다. 32세 때는 처가인 안산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30년 가까이 머물렀다. 그에게서 백수시절이 사뭇 오래이나 그 긴 세월은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학문과 예술 전반에 두루 전념, 오랜 사색과 연찬(硏鑽)이 이루어진 값진 시절이었다. 환갑을 맞이한 해에 비로소 관직에 나갔으니 출사(出仕)는 사뭇 늦다. 61세 영릉참봉으로 첫 벼슬길에 오르고 그해 서울로 다시 이주한다. 27년 가까운 관직생활 중 72세 때는 청 건륭제(1711~1799) 천수연에 부사로 북경을 다녀왔고, 71세와 77세 두 차례 오늘날 서울시장인 한성부판윤을 역임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했다. 무더위가 대단했던 올 여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18세기 예원의 총수로 지칭되는 표암의 탄생 300주년을 맞이해 표암 강세황 시대를 앞서간 예술혼(6.25~8.25)이란 제목으로 대규모 특별전이 열렸다. 이 전시에 앞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지금 글 쓰는 이가 기획한 1월의 문화인물 강세황 특별전(1995.1.30~2.12)이, 이어 8년 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표암 강세황푸른 솔은 늙지 않는다(2003.12.27~2004.4.2)가 열렸다. 대체로 10년 단위로 전시가 개최된 셈이다. 훌륭한 전시는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진 뒤 비로소 가능하다. 표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로는 현 문화재청장인 변영섭 선생에 의해 이화여자대학교에서 1987년 6월 발표된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해 그의 시서화에 대한 논고 등 시문학 및 작가론과 작품론 및 산수ㆍ초상ㆍ사군자ㆍ화회초충 등 회화의 장르별 연구가 다수 발표됐다. 시간의 물리적 계량치는 모두에게 평등하다. 그러나 그것은 돈의 가치만큼이나 천차만별이니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수치로 다가온다. 그냥 흘려보내는 것일 수도 있으나 채워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시간의 흐름은 부패의 악취를 동반하는가 하면 발효의 향기를 뿜기도 한다. 성장이 멈추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니 성숙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표암에서 이를 엿보게 된다. 표암이 71세에 그린 자화상은 옥색 도포에 관모를 쓴 우습고 다소 시니컬한 좌상이다. 관직에 몸담았으나 마음은 삼림에 있다고 제사로 피력했다. 우리 옛 초상화는 그림으로 예술적인 성취와 초라함 아닌 그야말로 의연하며 관조의 여유와 탈속 등을 진솔하게 드러내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은 아닌지. 얼굴은 살아온 삶의 기록 그 자체이다. 나이 40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지라고 링컨이 말했듯, 얼굴은 타고나는 것에 더하여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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