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차 그림 두 점 - 중인들의 흥취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일 모두를 지칭하나 좁은 의미로는 이를 문자로 적은 기록만을, 나아가 이에 대한 해석이나 연구까지를 포함한다. 역사는 객관을 표방하지만, 기록한 이의 관심과 관점의 차이, 정보와 인식의 한계, 나아가 행간의 의미가 말해주듯 해석상의 문제로 항상 늘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에 역사는 늘 새롭게 써야 한다는 명제가 설득력을 지닌다. 기록 외에 고고학이나 미술사의 대상인 유물과 유적 및 조형예술 또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잘 알려진 김홍도나 신윤복의 풍속도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사회 분위기를 어떤 기록보다도 실감 나게 전한다. 석농 김광국(金光國1727~1797)은 지체는 높지 않으나 부를 축적한 대물림한 의관(醫官) 가문에서 태어났다. 서화골동에 대한 애정과 감식안을 바탕으로 명화를 모아 조선왕조 전기 안평대군에 이어 후기를 대표하는 대수장가이다. 석농화원(石農畵苑)이었으나 해동명화집(海東名畵集)으로 이름이 바뀐 화첩엔 폭마다 별지에 쓴 제발이 첨부되어 있다. 나중에 수집한 화원별집(畵苑別集)은 고려 말 공민왕부터 18세기에 이르는 이름난 화가들의 명품에 중국 명청 그림까지 포함한다. 그의 관심은 중국과 일본을 넘어 서양의 에칭(銅版畵)까지를 아우른다. 이들 모두는 화첩에 속한 소품들이나 그린 화가의 대표작이며 기준작으로 제시된다. 이두 화첩만으로도 우리 옛 그림의 흐름과 대세를 읽을 수 있다. 역시 수장가로 이름을 얻은 상고당 김광수(金光遂1699~1770)의 집 와 룡암을 석농이 방문한 때는 1744년 한여름이었다. 둘은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고 서화를 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소나기가 세차게 퍼부었다. 이때 현재 심사정(沈師正1707~1769)이 옷이 흠뻑 젖은 채들어왔다. 소나기가 곧 그치자 대저택의 정원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하니 화가로 하여금 붓을 잡지 않을 수 없었으니 현재의 와룡암에서의 조촐한 모임(臥龍庵小集)이 바로 그 그림이다. 마당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뒷모습을 보이는 갓 쓴 현재와 상고당, 두 손을 모아 공손한 자세로 앉은 정면의 끼끗한 젊은이는 석농, 시중드는 두 동자까지 화면에는 5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당시 석농은 18세, 상고당은 46세, 현재는 38세였다. 석농이 쓴 발문에 의해 270년 전 당시 양반 아닌 중인들이 향을 피우고 차를 즐긴 구체적인 상황이 확인된다. 1853년 음력 3월 3일은 서성(書聖)왕희지(王羲之307~365)가 회계 난정(蘭亭)에서 모임 1천500년이 되는 뜻 깊은 날이다. 이를 기념하고자 조선에서 김석준(金奭準1831~1915)이 주축이 되어 잡과인 역과 율과 음양과 출신 등 여항문인 30명이 남산아래인 현 한남동이나 옥수동 부근에 모였다. 1830년 전후에 태어난 이들로 20대가 주류이나 60대 변종운(卞鍾運1790~1866), 40대 후반 장지완(張之玩1806~1858) 등도 참가했다. 중앙에 놓인 탁자를 중심으로 모인 인물은 옥색 도포에 긴 담뱃대나 합죽선을 들고 있으며 자세가 다양하나 의관을 갖추고 있어 사대부에 뒤지지 않은 의연함을 보여준다. 참가한 이들 30인 모두 예외 없이 지은 시들도 그림 다음에 이어 붙여 총 8m에 이르는 기념비적인 걸작이 다름아닌 수계도권이다. 이 그림은 현재 경기도박물관에서 개최 중인 차, 즐거움을 마시다 말미에 출품돼 특별전의 대미를 장식할 예정이다. 부를 축적한 중인들은 서화의 애호가이자 수요자로 화단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추사의 영향 아래 사회 일각에서 역할이 두드러지는 이들 중인에 의해 미래는 새롭게 준비되고 있었다. 그들 모임에 등장한 차는 과시적인 면도 없지 않으나 동시대 차 마시는 습속의 성행을 드러낸다. 차는 이들 중인의 자긍심 고취와 함께 단순한 기호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문화카페] 신에게 투영된 인간의 욕망

누구에게나 뇌리에 오래 남는, 여러 번 보아도 질리지 않는 추억의 명화가 한두 편쯤 있을 것이다. 필자는 무엇보다도 밀로스 포먼 감독의 1984년 작품 아마데우스(Amadeus)이다. 18세기 후반의 비엔나라는 역사적 공간과 모차르트, 살리에리 등의 역사적 인물들을 다루었지만, 플롯이 상당히 허구적이다. 그러나 역사적 팩트만이 진실을 말한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영화의 잘 짜인 허구는 시대와 문화권을 뛰어넘는 인간사의 진리를 오롯이 담고 있다. 주인공은 비엔나 궁정악장이었던 살리에리이다. 정신병자 수용소에서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였다며 자살을 시도하는 일그러진 늙은이 모습의 그가 등장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그에게 고해성사를 해주러 온 젊은 신부에게 자신의 삶을 토로하는 것으로 영화의 본격적인 플롯이 전개된다. 이탈리아의 소소한 농촌에서 자란 그는 음악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신앙심을 키워간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노력은 마침내 비엔나 궁정악장이라는 최고의 영예를 안겨주었으며, 그는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음악가로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 날 모차르트라는 애송이 천재가 나타나자 자신의 레종데트르에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형편없이 너저분한 삶을 사는 젊은 녀석이 신이 내려주신 능력이 아니고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완벽한 음악을 별 어려움 없이 구사해내는 것이 아닌가? 신앙심이 깊었던 살리에리는 신을 위해 독신으로 살아가면서 신이 자신에게 음악적 영감을 내려주시면 그것으로 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삶을 살겠노라고 기도해오던 터였기 때문이다. 살리에리는 신에게 왜라고 하는 질문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자신이 겪는 상황이 신의 조롱이라고 믿게 된 살리에리는 겉으로는 모차르트의 친구가 되지만 주도면밀하게 모차르트를 죽이려는 음모를 키워간다. 그것이 자신을 배반한 신에게 앙갚음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익명의 후원자로 위장하여 모차르트에게 레퀴엠(망자를 위한 미사곡)을 의뢰하여 그 작품을 가로채 자신의 작품으로 둔갑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이 작품을 모차르트의 장례식에서 자신이 직접 연주함으로 자신이 숭고한 동료애와 인간애를 보여준 위대한 예술가로 영광을 얻으려는 음흉한 계획을 세웠다. 이 영화는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니 음악이 주된 모티브인 듯하지만, 필자의 관점에서는 그보다도 다분히 신학적인 질문들이 이야기 전개의 핵심 쟁점으로 보인다. 평생 순결까지 바치면서 성실하게 노력하는 삶을 산 살리에리는 그야말로 신앙심이 남다른 독실한 인물이었다. 신에 대한 자신의 헌신과 성실한 삶이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은 응당 그러한 열심에 보답해 주시리라는 믿음이 그의 지고의 신경(creed)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신념은 자신의 욕망을 신에게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그는 은밀한 살인자라는 무시무시한 악마가 되어갔으며, 남의 열매를 속임수로 가로채 자신이 영광을 누리려는 이기심의 화신이 되어버렸다. 신이라는 단어가 어느새 주변의 여러 인사가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다. 일제 식민지배는 하느님의 뜻이었다, 세월호 사고는 하느님이 국민에게 기회를 주신 것이다 등의 표현들은 신이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한정되어 있는 존재라는 독실한 오해에서 비롯된 공언이리라. 모두 그 배경에는 신이라는 개념에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있는 것만 같다. 양승렬 수원오페라단 지휘자미주리대 박사

[문화카페] 수원미술이 지녀야 할 인문 정신

현재 한국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가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중 대부분은 서울과 그 주변에서 살고 있다. 사실 경기도에 거주하는 작가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다. 서울에서 작업실을 운영하기에는 경제적 부담이 크다는 점이 주변 경기도로 밀어내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양평과 안성, 강화와 포천, 파주와 마석, 여주와 이천 등등 곳곳에 산개하면서 작업실을 운영하고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당연히 인천과 수원, 부천, 의정부, 일산, 성남 등 도시에도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경기도 전역이 작가들의 작업실인 셈이 되었다. 그만큼 작가들은 많고 작업실 또한 그 숫자에 비례하고 있다. 작가들이 작업을 하면서도 마주치는 가장 큰 고민은 경제적 문제와 함께 작업실일 것이다. 전세와 월세 부담이 크지 않은 곳, 비교적 넓은 작업공간은 모든 작가들의 로망이고 꿈이다. 갈수록 쌓여가는 작업과 이런저런 짐들을 수장할 수 있는 창고가 딸린, 채광이 좋고 천장이 높은 작업실을 번듯하게 구비하고 있는 작가들은 사실 극소수다. 사실 경기도는 이처럼 타지역에 비해 많은, 좋은 작가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이 거주하며 작업하는 공간에서 미술을 생산해내는 한편 그 지역문화, 미술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아니 영향을 끼치도록 권유하고 배려하고 지원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수원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작가들의 경우라면 이들은 수원이 지닌 문화적 전통과 연계되어 자신의 작업을 흥미롭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꼭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수원지역 작가들이 단지 이곳에 있는 문화유물을 소재로 그리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통을 박제화시키는 일이다. 나로서는 수원이 지닌 인문학 정신의 전통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알다시피 조선은 청으로부터 연행사를 통해, 일본으로부터는 통신사를 통해 새로운 학술 정보를 수용해왔다. 특히 17세기 이후 연행사를 통해 많은 지식인들은 신서와 신지식을 흡수하여 조선의 학술과 문화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북학을 열렬히 주장한 인물은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이고 정조는 이러한 북학파 학자들을 적극 지원한 군주다. 주자학을 깊이 연구여 방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긴 호학의 군주인 정조는 북학파 학자들의 사상을 경청하고 북학의 필요성에 대해 지지했다. 박지원과 박제가가 북학을 제창하면서 우선 주목했던 것은 벽돌과 수레였다. 이는 수원화성건축에 잘 반영된다. 따라서 수원은 조선시대 인문학 정신의 발현으로 이룩한 도시고 문화다. 전통과 새로운 학문의 조화를 통해 조선적인 것을 추구한 것이다. 이런 정신은 이후 수원이 낳은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에게도 이어진다. 나혜석의 인문학적 자세는 수원 및 나씨가문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강신주의 말을 빌면 인문정신이란 일체의 초월적 가치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삶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타자와 관계하려는 정신을 의미한다. 한국의 인문전통은 변화가 필요한 위기의 시점마다 외래의 선진문화를 적극 끌어들이고 이를 전통문화의 절충 융합하여 자기혁신과 자기성장을 이룰 수 있는 논리와 방법을 개척해왔다. 수원이 지닌 이 실학정신의 전통, 그리고 새로운 사상과 학문, 예술을 수용하고 융합하여 그 실천에 앞장 선 나혜석의 전통이 지금 이곳 수원미술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궁금하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드라마 ‘정도전’의 눈물이 좋지만은 않은 이유

드라마 정도전이 장안의 화제라 들었다. 특히 이 드라마는 남자 드라마다. 정도전, 이성계, 이인임, 정몽주 등의 남자들이 야망과 절망, 회한 등을 그려낸다. 재미 있는 현상은 최근 미국에서 방영된 미니시리즈 하우스 오브 카드(2014)와 거의 흡사한 드라마라는 점이다. 대통령과 부통령, 장관 등의 각료와 국회의원의 활약을 그린다는 점에서 같은 정치 드라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같은 역사적 현실을 다루는 데 있어서 판이하게 다른 자세를 보인다는 점이다. 미국 드라마는 정치와 역사를 다루는데 있어서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비해서, 한국은 멜로 드라마 장르적 요소가 너무 강해서 현실의 박진감이 덜 하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울음의 남발이다. 정도전은 거의 매회 인물들이 운다. 정도전은 이인임의 세도정치 속에서 미천한 몸으로 여러 번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면서 흐느껴 운다. 그 울음이 서러움이었다면 이제 절친 정몽주와의 이견으로 인해 동지면서도 적이 되어야 하는 아픈 눈물을 흘린다. 주군 이성계의 고집불통 때문에 답답함의 눈물을 흘려야 했고, 마지막엔 권력을 해체하기 위해 스스로 권력이 되는 모순을 겪으며 공신들과의 내분 속에서 눈물을 흘린다. 도처에 눈물 장면이 출몰하고, 시청자들은 눈물에 중독이 되어, 이제 눈물이 없으면 한 회도 견딜 수 없을 정도다. 반면 놀라운 것은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는 거의 눈물의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드라마의 내용이나 국면은 흡사한데, 철저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인물들의 행동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과는 달리 미국정치가들은 절대 울지 않는다. 그들은 시련이 닥칠 때마다 쿨하게 전략의 실패를 반성할 뿐이다. 아, 내가 이런 실수를 하는 바람에 이런 시련을 당하는구나. 다음부터는 절대 이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해야겠다. 이런 식이다. 어느 드라마가 현실의 정치인들을 리얼하게 그린 것일까? 과연 조선의 정치가들이 그렇게 눈물을 뿌려댔을까? 정치가가 울어서 되겠는가. 우는 것은 서민이고, 정치가는 그 순간에도 냉정하게 전략을 짜지 않았을까. 울음은 연출의 작용일 뿐이다. 왜 한국은 미국처럼 쿨하고 리얼하게 역사를 그려내지 못하고, 과장되고 정감적으로 그릴까?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한이 많아서 그런 것인가? 시청자들은 역사 드라마를 보면서 역사의식을 갖기 보다는 마음의 정화작용을 더 하는 편이다. 소위 치유의 효과 말이다. 한참을 흐느끼다 보면 자신의 설움이 감정이입 되어 다 풀어져 나간다. 우는 효과가 분명 나쁘지 않다. 그러나 감정의 치유만을 위해 역사 드라마가 존재해선 안 될 것이다. 역사 의식이라는 것은 명징한 이성적 작용이며, 그 메카니즘을 이해하는 것도 인간이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얼마 전 선거가 있었고, 그 이전에 세 명의 정치가가 울었다. 그중 두 명은 낙선했고, 한명은 대선과는 상관없이 다른 일로 울었지만, 좀 일찍 울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을 남겼다. 세 명 다 잘못을 인정하는 자리에서의 울음이었다. 한국 국민들은 정치가들이 울면 일단 다 용서하는 것 같다. 문득 정도전과 하우스 오브 카드가 생각이 났다. 드라마라 할 지라도 서구인들은 정치인들의 현실을 냉정하게 그릴 줄 안다. 따라서 일반인들도 정치인들의 현실을 어느 정도는 실감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시민들은 현실과 드라마를 혼동할 수 밖에 없다. 드라마와 현실이 거의 같은 지점에서 움직인다. 왜냐하면 드라마들이 눈물로서 치장하면서 현실의 냉정함을 숨기기 때문이다. 소위 역사의식, 판단의식을 갖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의식을 깨우는 드라마는 한국에선 불가능한 것일까, 생각해 본다. 정재형 동국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낭랑? 18세, 경기도박물관

시국이 어수선한 1970년대 초. 대학 도서관문도 닫았던 그 시절, 박물관은 내게 안식처 이상이었다. 전시실은 늘 조용했고, 고요가 밴 곳에서 선조가 남긴 유물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그들이 전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가슴 설레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역사학도에게 그곳은 학문의 도량이자, 과거와 미래를 헤아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삶의 흔적만이 아닌 혼과 얼이 깃든 아름다운 문화재를 자주 접하며 어질고 착하며 해맑은 마음과 정신을 지닌 민족임을 스스로 깨닫게 됐다. 지난해 봄, 37년 2개월간 몸담았던 국립박물관을 다시 찾았다. 별도의 퇴임식을 거부했었던 터라,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달에 서울 용산의 한 식당에서 전국 국립박물관에서 온 70여명의 연구직 동료들과 저녁을 함께했다. 퇴임사에 대해 사전 준비가 없던 내게 그 자리에서 마이크를 받아든 순간 눈시울이 촉촉해지고, 새삼 벅차오르는 가슴과 함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아른거렸다. 두서 없이, 그러나 평소 담고 있던 이야기가 술술 풀렸다. 조상이 남겨준 아름다운 많은 문화유산과의 조우, 일본과 미국 등 국외 전시의 현지 관리관으로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데 대한 감사로 시작했다. 1975년에 치른 제1회 학예직 공채 동기 15명 중 가장 어린 탓에 보직에 대한 의견표명을 하지 않은 일화 등도 술술 나왔다. 보직(補職)은 연극의 배역과 같은 것이니 꽃방석인 줄 알았다가 가시방석임을 깨닫게 된 적도 있고, 초라한 주연과 빛나는 조연이 있음도 첨언했다. 곧 어머니인 고향이 있는 경기도박물관이 부르자 내게 주어진 미션이 무언가를 곰곰 생각하며 조심스레 응했다. 몇 차례 국립박물관 이전과 지역박물관의 재개관 등이 뇌리를 스치자 분명한 목표가 보였다. 민족의 젖줄인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는 구석기는 물론 신석기시대부터 똬리를 틀어 민족을 형성해 고대국가 백제가 탄생한 곳이다. 신라에 의한 민족통일도 한강을 껴안아 비로소 가능해졌다. 고려와 조선왕조 각 왕조를 500년간 지탱한 저변에는 경기의 역할이 실로 지대했고, 오늘만이 아닌 미래의 역할도 크게 기대된다. 4년 뒤인 2018년은 경기 1천 년이 되며, 금년은 정도 600년이다. 정말 도약을 위한 좋은 시기가 아닐 수 없다. 오는 21일은 경기문화의 메카인 경기도박물관이 18세가 되는 날이다. 그동안 경기도의 문화유산을 조사발굴해 학술조사보고서를 발간하고 지역 문화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등 적지 않은 역할을 수행해온 것으로 평가된다. 경기도를 대표하는 박물관에 대한 높은 기대치와는 달리 우리가 처한 현실은 부끄럽기 그지없고, 열악하며, 참담하다. 하지만 이 현실을 더 이상은 감출 수만은 없다. 박물관은 나름의 장기 플랜을 준비하고 있으나 예산이 부족해 모든 것이 답보 상태이다. 전반적인 리노베이션이 요구되는 낡은 건물, 많은 유물이 발굴과 연구 성과를 제대로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비좁은 공간, 쾌적한 관람을 위한 새로운 전시기법에 요구되는 전시실, 연구 인력의 축소, 단절된 외국과의 교류, 박물관의 핵심인 유물의 구입비가 전무한 점 등 첫째가 꼴찌가 된 몰골 정도를 넘어섰다. 이쯤 되면 문화에 대한 무관심을 넘어 모독이다. 낭랑(朗朗) 18세 아름답고 풋풋하고 발랄할 시기를 맞이했건만 경기도박물관은 우울하다. 아픈 만큼 성숙하며, 겨울을 견딘 나무만이 동량(棟樑)이 됨을 모르는 바 아니다. 나아가 젊음의 특권인 갈등과 고뇌나 성장통(成長痛) 정도로 비칠지 모르겠으나 박물관의 현 상태는 의외로 심각하며 중병이 아닐 수 없다. 겉은 그럴 듯해도 마음과 정신이 죽으면 모든 것은 끝이다. 역사건, 사회건, 사람이건 모두 예외가 아니니 존재가치를 상실하면 살았으되 산 것이 아니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문화카페] 음악사에서 읽는 보수와 진보

지난 64 지방선거는 우리 자신도 몰랐던 자화상을 일깨워줬다. 진보성향 교육감이 대거 당선된 결과는 마치 기성세대들은 현실에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일할 테니 아이들만큼은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교육을 하고자 하는 범국민적 열망이 꽃 피운 것이다. 이번 광역기초 자치단체장 투표 결과는 우리나라의 팽팽한 보혁 대결구도를 가감 없이 보여줬지만, 우리 국민은 여전히 보수적 성향을 강하게 띄는 것이 분명한 듯하다. 서양음악사도 역시 진보와 보수의 대결 구도로 전개돼왔다. 물론 그 갈등이 정치사에서처럼 혁명이나 전쟁 등의 소용돌이를 잉태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작곡가들은 항상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진보 또는 보수의 진영에 속해 경쟁하면서 작품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러한 진보보수의 기운은 음악사의 풍성한 변증법적 전개를 이뤄낸 동력이 됐다. 중세 후기인 14세기에 이미 중요한 진보보수의 대결이 있었다. 드 비트리(Philippe de Vitry)를 비롯한 프랑스의 몇몇 진보적 작곡가들은 음악에서 리듬이라는 요소의 중요성을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인식했으며 리듬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표현하고자 새로운 기보법을 만들었다. 이를 아르스 노바(Ars nova신예술)라고 한다. 이에 대항해 드 리에지(Jacques de Lige) 등의 음악가들은 아르스 노바의 음악이 복잡한 리듬과 정제되지 않은 화성 때문에 듣는 이를 괴롭게 할 뿐이니 과거의 양식 즉 아르스 안티쿠아(Ars antiqua구예술)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러나 오늘날 드 리에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며, 리듬만이 아니라 화성 및 악곡 구조의 탄탄함을 보여준 아르스 노바의 음악양식은 이후 15~16세기에 꽃을 피운 르네상스 음악의 양식적 토대를 제공했다. 16세기 말~17세기 초 진보적 음악가들의 과제는 이와 조금 달랐다.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에게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재현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언어에 더 충실한 음악이 필요했으나, 당시의 음악양식은 여러 개의 성부가 동시에 등장하는 다성음악(polyphony)으로 그러한 목적에 들어맞지 못했다. 이들은 감정을 충만하게 표현할 수 있는 독창과 이를 반주하는 지배적인 베이스 선(basso continuo)의 두 굵은 선을 뼈대로 하는 더 간단명료하면서도 감정표현이 짙은 양식을 창안해 냈다. 이를 모노디(Monody), 스틸레 모데르노(Stile modern근대양식), 제2작법(Seconda prattica)이라고 일컬으며, 카치니(Giulio Caccini)와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등이 이 양식의 대표적인 작곡가였다. 당시 아르투지(Giovanni M. Artusi) 같은 보수적인 작곡가들의 반발이 거셌다. 아르투지는 이러한 새로운 양식으로 된 몬테베르디의 음악이 화성 규칙에 어긋나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며 교조주의적 견지의 비판을 펼쳤다. 그러나 카치니와 몬테베르디 등은 이 모노디 양식을 기반으로 하여 오늘날까지 유행하고 있는 장르인 오페라의 기초를 다졌으며, 이 양식은 17~18세기 바로크 음악의 근본적 구조로 발전해 갔다. 그러나 항상 진보적인 음악가들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음악사에도 알맹이 없이 잠깐 등장했다가 도태되는 진보의 예가 있다. 바로 14세기 말의 아르스 숩틸리오르(Ars subtilior미묘한 예술)가 그 예이다. 당시 교황청이 있던 아비뇽을 중심으로 유행한 이 양식은 아르스 노바의 새로운 리듬 양식을 기교와 과장이 강조된 극단성으로 끌고 간 것이다. 악보를 보면 현대 아방가르드 작품을 방불케 하는 복잡한 리듬과 화성이 두드진다. 무언가 참신하고 혁신적이려는 몸부림이 보이지만, 겉으로만 과시하는 복잡함과 미묘함일 뿐 예술적 깊이도 진솔함도 결여 돼 있다. 이 양식은 이후 어떠한 영향도 발전도 이루지 못하고 곧 사라져버린다. 실력 없는 진보의 운명은 그런 법인가 보다. 양승렬 수원오페라단 지휘자

[문화카페] 한국 현대미술과 전통 논의

한국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작가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작업을 전통과 현대의 결합 내지는 전통을 현대화하거나 서구현대미술을 토착적인 정서로 해석해내고 있다고 말한다. 대다수 작가들이 그러한 알리바이를 만들며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니 작업을 한다는 것의 목표는 너무도 명확하고 선명하다. 그러나 미술에 목표라는 것이 있는가? 아니 미술의 과제라는 것이 있기나 한 걸까? 나는 작가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전통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지. 현대화한다는 말의 뜻이 뭔지, 더불어 과연 전통과 현대는 만날 수 있는 것인지 말이다. 오랫동안 한국현대미술은 예외 없이 현대와 전통 사이에서 현재적 정체성의 의미를 모색해왔다. 아울러 현재적 자기정체성에 대한 전통적 환원이라는 방법론에 기초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논리적 모순이다. 전통이란 것이 허깨비가 아니라 사회규범과 제도 등의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힘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음을 상기하면 현재라는 시간을 메우고 있는 그 제도들 밖에 전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은 보존되고 전승된 어떤 것이 아니라 고안된 어떤 것이다. (에릭 홉스봄) 그러니까 전통이란 이 시대의 여러 가치관 중 하나일 뿐이다. 또한 전통이란 현재가 과거에 대해 덧씌운 프레임이다. 사전에 의하면 전통이란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날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사상이나 관습, 행동 따위의 양식, 또는 그것의 핵심을 이루는 정신이라고 정의한다. 전통은 한 세대를 뛰어넘는 영향력의 지속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유행과 다르고, 완전히 소화되어 주체적 인식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유산과 구분된다. 기존에 한국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논의하는 입장들은 마치 문화라는 것이 한국으로 국경 지워진 영토에 자연스럽게 귀속되어 있는 동물계나 식물계 같은 자연현상처럼, 한국문화는 한국에 토착적인 그 무엇이라는 식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반면 이 같은 보수적, 정태적 관점에 반해 전통이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특정 조건이나 목적 하에서 의식된다는 관점이 있다.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으로 권력적인 것이며, 타자를 소외시킴으로써 스스로의 힘과 정체성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근대화의 역사적 필연성에 내재한 여러 문제점과 모순을 인식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한국적 정체성 논의, 그리고 전통논의의 출발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무엇이 한국적인 것이냐를 가지고 풀리지 않는 고민에서 벗어나 구체적으로 우리의 문화적 현실을 읽어가는 일이 필요하다. 덧붙여 전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어떠한 조건에서 다수의 동의를 획득하고 그토록 질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를 고민하는 것도 필요하다. 오늘날 젊은 작가들의 전통에 대한 인식과 그 해석은 이전과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한국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과다한 고민 대신 원본(전통)의 자유로운 참조와 이에 대한 독창적 변역을 과감하게 구사하고 있는 것이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태도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전통이미지라는 텍스트들은 고유한 의미를 발현하는 오리지널리티로서의 권위를 지닌 것이라기보다는 원본의 무게가 탈각된, 언제든지 인용하고 조합할 수 있는 수많은 텍스트들 중의 하나로 기능한다. 그에 따라 이 복수적 텍스트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작가에 의해 조작 가능한 수많은 기표들로 다루어지고 서로는 자유롭게 접합되고 연쇄된다. 그러나 그저 유희적인 차원에서 소비되고 있다는 아쉬움도 크다. 전통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특정한 시대에 고안된 것이기도 하다. 전통은 당대의 현실적인 여러 제도에 의해 호명되고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왜곡된 가짜 전통, 박제들이다. 새삼 드는 생각은 한국현대미술에서, 당대 우리 문화에서 시급한 문제는 이 전통과 현대라는 기존의 굴절된 인식의 교정과 이의 반성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씨네컬’ 들어보셨나요?

씨네뮤지컬(Cine-Musical), 즉 씨네컬(Cinecal)이란 말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와 뮤지컬을 합친 말이다. 영화면 영화고, 뮤지컬은 뮤지컬이지 씨네컬은 무슨 말일까? 언뜻 연상이 되지 않겠지만, 앞으로 이 장르는 새롭게 개척해야 할 미래의 부가가치 예술상품이다. 지난 22일 한국영상자료원 40주년 기념식이 있었고, 개막작으로 이국정원 공연이 있었다. 이국정원은 1958년 홍콩 쇼브라더스와 한국연예주식회사가 합작한 최초 한홍합작 영화로서 김진규, 윤일봉 등과 홍콩 여배우가 공연한 작품이다. 감독도 한중일의 세 명이 공동으로 했다. 이 영화는 소실된 것으로만 알려졌다가 최근 발견돼 공개된 것인데, 사운드 부분은 복원이 되지 않아, 영상자료원에서는 뮤지컬 배우들을 기용, 대사부분을 대신해 공개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1934) 이후 두 번째이다. 영상자료원은 2008년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 상영에 변사를 기용해 일제시대 변사 무성영화를 감상하도록 상영회를 한 결과 대중적 인기를 얻는데 성공했다. 이번에 이병훈 원장은 다시 그 뒤를 잇는 기획으로 이국정원 변사영화를 선보인 것이다. 청춘의 십자로와 이국정원은 그 경우가 다르다. 청춘의 십자로는 일제 시대 변사무성영화를 현재 복원했다는 의미지만, 이국정원은 무성영화의 복원이 아니라, 유성영화의 사운드를 무대극으로 새롭게 변환시켰다는 의의가 있다. 이국정원 공연은 단순한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현대극의 창조다. 이국정원 공연은 기존의 영화를 다른 매체와 결합시켜 제3의 매체를 창조해낸 융복합예술이다. 그 원형을 분석해보면, 이국정원 원본은 영화이고, 무대에 등장하는 악단은 음악이고, 이국정원의 연기자들 목소리를 담당하는 성우들의 연기는 연극이고, 중간 중간 춤과 노래가 나오는 장면을 무대에서 보여주는 부분은 뮤지컬이다. 이국정원 공연은 그런 의미에서 영화, 연극, 뮤지컬, 음악이 하나로 융합된 미래 창조예술이며, 현정부가 추구하는 문화산업의 전형적인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이국정원 공연은 청춘의 십자로보다 진일보한 예술형태이고, 서로의 기능을 달리한다. 청춘의 십자로는 단지 복고적인 양식으로 관객들의 향수 내지는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반면, 이국정원 공연은 젊은 세대들과 호흡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다. 현대인에게 예술은 그 장르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관객의 감동을 끌어내고 동시대를 호흡할 수 있는 소통력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국정원 공연이 남긴 교훈은 이국정원 같은 지나간 고전 뿐 아니라, 현재 창작되는 영화를 이러한 융합상품으로 기획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준다. 그것을 씨네컬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다. 이 씨네컬은 최근 한국에 불어닥친 뮤지컬 열풍과 영화, 드라마의 강세를 몰아 전 세계에서 독특한 한국만의 상품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 그 근거는 씨네컬이 한국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예술적 상품이란 점에 있다. 씨네컬이 기반하고 있는 한국의 고전은 판소리와 변사이다. 물론 변사는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공유되고 있지만 이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지는 미지수다. 한국도 변사의 전통은 거의 끊어져 있다. 마지막 변사인 신출옹의 검사와 여선생(1958)은 곧 사라질 운명에 놓여있다. 그 뒤를 이어 청춘의 십자로가 맥을 잇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예술은 이렇듯 독자적인 고전적 맥을 갖고 있고, 그것을 현대화한 개성적 예술만으로 능력을 인정받는다. 씨네컬은 정부가 육성해야 할 중요한 품목이며, 미래의 문화상품으로 각광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작품들로 하여 미래는 좀 더 풍요로운 문화시대를 향유할 거라 생각한다. 정재형 동국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茶, 즐거움을 마시다

아침에 기상하면 찻물부터 끓인다. 새벽에 깜박 졸다가 물 끓이는 주전자 몇을 태우기도 했다. 그야말로 내삶에 있어 항다반사(恒茶飯事)가 된 녹차를 접한 지도 근 40년에 이른다. 오늘날처럼 상품으로 크게 유통되기 이전인 1970년대 중반부터이다. 30년 전 햇병아리 시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겁도 없이 나의 다론(茶論)을 발표하기도 했다. 차는 자신하고의 만남 나아가 우주와 내가 하나 됨 등을 피력했다. 이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붉어진다. 차와의 본격적인 만남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몸담게 되면서부터다. 간송미술관에서는 1971년 가을부터 봄과 가을에 2주일씩 1년에 두 차례씩 특별전이 열린다. 이를 보기 위해서나 유물대여를 위해 이곳을 찾았다. 보화각 2층 연구실에선 가헌 최완수 선생은 직접 차를 우려서 건넨다. 내년이면 이곳에 몸담은 지 50년이 되는 최 선생을 처음 뵐 때 직접 차를 준비하던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며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같은 정경은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내 자신 차 그림에 대한 관심은 여기서 비롯했으니 그 동안 조사하고 감상한 조선시대 차 그림은 300점을 웃돈다. 아울러, 일본인 학자들이 국립중앙박물관 방문 시 관장께 선물로 가져온 고급 녹차들은 세밑이면 재고정리 차원에서 내 몫이 되었다. 녹차는 묵으면 향과 맛이 크게 떨어지나 다시 덖으면 맛이 어느 정도는 회복됨도 일찍 알았다. 일본에 공무출장 중 사찰에서 조우한 말차(沫茶)에 대한 기억도 새롭다. 2005년 일본 교토에서 열렸던 차연(初風爐の茶事) 등 차 모임에도 몇 차례 참석했다. 중국 절강성에 위치한 차 박물관을 방문할 기회가 주어졌다. 국내 지인들이 손수 덖은 차를 보내주어 끊이지 않아 차복(茶福)까지 타고 났음을 절감한다. 매년 어김없이 새 차를 보내준 박동춘 선생은 우리 박물관에서 지난달 말일 조용히 개막한 차, 즐거움을 마시다 (4.308.24) 특별전 자문과 함께 옥고(玉稿)까지 주셨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이 특별전은 우리나라 전통 차 문화 전체를 조명한 전시이다. 같은 주제로 지금까지 국내에서 개최한 비중 있는 전시로는 31년 전 숭례원 주최로 한국방송공사에서 열렸던 한국전통차문화자료전(1983.5.35.22)과 12년 전 광주비엔날레 전시의 일환으로 의재미술관에서 연 다향(茶香) 속에 어린 삶과 예술(2002.3.29 6.29)을 들게 된다. 이들과 비교할 때 이번 경기도박물관 전시는 질과 양 모두에서 단연 돋보인다. 이는 그간 차 문화전반에 대한 다방면에 걸친 학계의 연구에 힘입은 바 크며, 이세 전시 기획에 모두 참여한 자신을 되돌아보면 격세지감과 더불어 감개무량으로 가슴이 뭉클하다. 출품작 중 그림은 보물로 지정된 16나한과 독성탱 등 불화, 우리나라 차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정약용 김정희초의의 초상, 조선시대 각시기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명화들로 먼저 조선중기 화단을 연 문인화가 이경윤과 화원 이흥효, 조선후기는 윤덕희심사정이인상 등 쟁쟁한 문인화가와 활동이 두드러진 직업화가인 김두량김홍도이인문이명기이재관이방운이한철을 비롯해 말기의 허련등의 명품이 망라되었다. 인류에 있어 차의 역사는 오래다. 단순한 기호식품의 영역을 넘어 문화사적인 측면서도 의미가 지대하다. 물이 좋지 않은 곳에서 맥주가 크게 발전했다. 한편 아시아 각국에서 차는 생리적인 갈증해결이란 일차적인 기능에 그치지 않는다. 불교와 도교 나아가 유교에 이르기까지 정신을 맑게 하고 졸음을 물리치는 등 수행과정 및 신불(神佛)께 올리는 헌다(獻茶)등 여러 의식에도 포함된다. 로마와 그리스는 인간의 몸을 빌려 신을 표현했지만, 동아시아는 차와 향을 통해 그윽하고 유현한 신의 경지를 넘나 들었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문화카페] 거장들의 결혼생활

대한민국은 자살률도 그렇고 이혼률도 OECD 회원국 중 단연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를 보게 됐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도 정서적 이혼의 상태에 있는 부부가 매우 많다는 것인데, 이는 실제 법적인 이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주변의 안목이나 체면 등을 이유로 무늬만 부부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일컫는다고 한다. 더욱 씁쓸한 일이다. 문득 음악사를 이끈 거장들의 결혼생활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흔히, 예술가들은 삶이 불안정하고 정서적인 기복이 심하니 결혼생활이 안정적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견해가 틀렸다고 반박할 수 있는 통계자료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예술가들이라고 해서 모두 삶이 불안정하여 부부관계가 비정상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곡가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는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극적인 사랑을 통한 결혼을 이뤄낸 사람이다. 한 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여인에게 교향곡(환상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을 작곡해 바칠 정도로 열정적이었던 그의 사랑은 마침내 결혼으로 이뤄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남다르게 열정적인 사랑은 남다르게 식어버리는 법인가? 그들의 결혼생활은 5년이 채 못되어 성격과 의사소통 등의 문제로 파경을 맞게 된다. 음악가들 중 작곡가 바그너(Richard Wagner) 만큼이나 애정관계가 복잡하고 다양했던 사람도 드물다. 그는 스물 세살 때 미나(Minna)라는 미모의 배우와 결혼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그녀는 어떤 돈 많은 군인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해버린다. 그러나 새로운 애정생활이 그렇게 신통치 않았던지 미나는 바그너에게 곧 돌아와 그와 30년을 함께 살게 된다. 물론 바그너가 그녀를 받아주었지만, 그는 나이 마흔 넷 즈음에 자신을 성심으로 도와주던 후견인의 아내 마틸데 베젠동크(Mathilde Wesendonck)에게 집요하게 구애를 벌인다. 그의 애정행각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십이 넘어서 자신의 절친이었던 지휘자 한스 폰 뷜로(Hans von Blow)의 아내 코지마(Cosima)와 부적절한 관계로 딸 이졸데(Isolde)를 낳게 된다. 사람 좋던 뷜로는 이를 용서하고 이졸데를 자신의 딸로 받아주지만, 바그너와 코지마의 부적절한 관계는 계속된다. 마침내 그가 57세 되던 해에 둘은 결혼하게 되며 코지마의 아버지였던 리스트(Franz Liszt)조차도 이들의 결혼소식을 신문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서양음악의 거장들의 결혼생활이 이렇게 파란만장하거나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다. 음악사 최고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바흐(Johann Sebastian Bach)는 비록 첫 아내와 사별하게 되어 결혼을 두 번 하게 되지만 아내와 금슬이 좋았다. 이는 바흐가 자녀를 스무명이나 낳았다는 것에서 짐작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음악을 사보해주는 아내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아내만을 위한 작품집을 써준 것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소곡집Clavier-Bchlein vor Anna Magdalena Bach) 일찍이 안나 막달레나는 멋지게 오르간을 연주하는 서른 다섯의 바흐를 보고 존경심과 사랑을 키워갔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실력있는 소프라노 가수였으며 음악적인 소양이 풍부했으므로 남편과 음악을 통해 어울리고 소통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위풍당당으로 알려진 20세기 영국 작곡가 엘가(Edward Elgar)는 지극히 아내를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의 또다른 유명한 작품, 현을위한 세레나데(Serenade for Strings, Op. 20)는 결혼기념일에 아내에게 바친 사랑의 노래이다. 작품의 이곳 저곳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선율과 화음에 그의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이 오롯이 베어있다. 필자도 아내를 위한 세레나데를 하나 준비해야겠다. 양승렬 수원오페라단 지휘자미주리대 박사

[문화카페] 위안을 주는 달빛

잔인한 시간을 지내다 문득 고개를 들어 달을 본다. 도저히 이 끔찍한 현실을 지켜보기가 힘들어졌다. 까만 어둠 저편에 발광하는 하나의 돌/달은 보는 이의 시선과 심장에 그대로 와 박히면서 가장 장엄한 구경거리를 선사했다. 어둠을 구원하고 중력에 저당 잡힌 이 현실계 너머를 꿈꾸게 해준 것은 달이었기에 달은 늘 그리움과 몽상, 희망을 비추는 거울처럼 자리했다. 사람들은 달을 보면서 비상에의 욕망을 꿈꾸었다. 달이 없었다면 지상의 모든 이들은 꿈을 잃었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달 속에 어른거리는 그 누군가의 얼굴을 애타게 찾는다. 고독과 외로움, 상처를 진정시켜주었던 이미지는 바로 달과 함께 오버랩 되어 떠오르던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달은 만월이어야 제격이다. 달은 인간의 얼굴을 상상하게 해준 결정적인 공간이다. 어두운 밤하늘에 등처럼 떠있는 밝고 둥근 달은 모두에게 심리적인 안정과 위로를 선사해주었다. 달은 그 달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인 자연존재의 하나다. 밤의 시간대에 내리는 달빛은 사람들의 몸으로 적셔 들어가 내내 혼곤한 정서에 놓이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의 영향력과 기운을 두려워했다. 오늘날도 달은 여전히 신비스러운 존재다. 그것은 물리적, 과학적인 판명과는 다소 무관하다. 여전히 불안한 사람들의 마음과 슬픔, 상처를 달래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 면에서 달은 주술적인 대상이다. 낮과 밤이라는 두 세계가 나름대로 낭만적으로 존재했던 시간은 근대에 와서 달라졌고 그래서 밤을 지워낸 인공의 조명과 시간 아래 요정과 귀신, 신비스러운 밤의 문화가 지닌 주술성은 상실되어갔다. 달은 무엇보다도 풍요와 관련된다. 유럽에서는 달빛 아래에서 식물이 자란다는 믿음이 있는데 그래서 지금도 프랑스 농부들은 달이 떴을 때 파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단다. 아울러 달빛이 충만한 밤에 성행위를 하면서 여자가 달을 보면 수태를 하게 된다는 믿음도 있다. 우리 선조들도 여성이 임신을 원할 때 달빛을 한껏 쐬곤 했다. 동시에 달의 주기적 변화는 인간을 두렵게 만들었다. 변화하는 주체인 달은 불완정성을 뜻했던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달을 광기의 상징으로도 여겼다. 달의 모습이 시시때때로 변하듯 그렇게 변하는 정신의 상태를 미친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여성의 생리주기는 달과 일치한다. 그래서 달은 여성, 음을 상징한다. 중국인들은 가을의 달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달의 차가운 느낌은 군자의 덕을 상징했으며 맑고 높은 절개의 상징이기도 했다. 또한 재생과 부활의 기본적 원형이었으며 특히 달의 밝은 빛은 정화하는 힘의 상징이었다. 달은 밝고 원만하되 한 모습을 고집하지 않기에 불교에서는 불법을, 도교에서는 초월이나 승화를 의미했다. 인간의 발이 달의 대지를 이미 밟아버린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달을 보며 이런 저런 상념에 부침하기도 하고 더러 위로를 받거나 깊은 감정에 빠지기도 한다. 달은 어딘지 쓸쓸하고 아련하고 슬프고 적막해야 제 맛이다. 지치고 힘들고 고독한 이들이 고개를 들어 저 달을 본다. 거기 위안처럼 달이 떠있다. 세상에 속하지 못해 세상을 등지고 싶은 이들에게 달은 안식처를 제공한다. 특히나 이런 식의 삶에 대해 저항하고 슬픔의 힘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들에 위로의 시선을 던지는 예술가들에게 달은 그 어떤 것보다 영감과 상상력의 근원으로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저 달 하나가 있어 그나마 사람들은 위안을 얻는 것이다. 잔인한 시간을 보내면서 저 달을 바라보고 있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교수미술평론가

[문화카페] 어른들 죄를 대신하여 바다로 간 아이들

청소년은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일부 학생들은 학교집단폭력으로 순진한 다수의 학생들을 자살로까지 몰아가는 악마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반면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 보여준 것처럼 법을 준수하고 어른들의 명령을 따르는 순수한 천사의 모습이다. 청소년들의 공통점은 아직 어른이 아니므로 판단력이나 성숙도가 떨어진다는 것, 어른들처럼 세상에 물들지 않아 약지 않다는 점, 어른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정도가 심해 거의 순종하듯이, 존경하듯이 따라간다는 점 등이다. 반면 어른들은 어떤가? 힘이 강한 어른, 힘이 약한 어른. 힘이 약한 어른들 중에는 청소년들처럼 보호받아야 할 성인들이 또한 많이 있다. 장애우, 여성, 가난한 사람, 성적 소수자 등 소위 사회적 약자다. 이번 세월호 사건을 보면 한국의 사회적 관습이 이들 사회적 약자를 어떤 시각으로 대하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어른들이 만들고 어른들이 이끌고 있는 이 나라의 시스템, 사회관습 말이다. 그 문화적 매뉴얼에는 사회적 약자를 자신의 일처럼 솔선수범해서 지켜내고 보호하자는 행동지침이 없는 것 같다. 세월호 선원들 뿐 아니라 한국의 어른들은 장애우의 인권에 대해 무관심 하기는 마찬가지다. 장애우들의 버스, 택시, 지하철의 시설들이 선진국에 비해 너무 부족하고 불편하다. 여성인권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여성들은 직장에서 출산휴가, 생리 휴가 등을 받아야 하므로 남자에 비해 불편한 직원이란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다. 집에서도 남편은 텔레비전 보고, 여자는 밥 짓는 구조가 우리 부모 세대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유아든 어른이든 가리지 않고 여성을 성폭행하는 사이코 남성들. 그들에 대한 처벌도 약하고 방비도 허술하니까 여성들은 법에 의존하기 보다 자신들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안한 처지에 놓여 있다. 어른들은 세월호사건을 통해 청소년들을 가장 잔인하게 대했다. 배안에 남은 청소년들을 가만 있으라고 무책임하게 말하고, 그대로 수장시켜 버린 것이다. 자신들의 체면치레만 하느라고 수백명의 잠수부가 동원되었다는 둥 거짓말만 하고, 겨우 몇 십명이 잠수하느라고 시간을 다 낭비했다. 선원들이 보여준 초동대처는 잔혹하고 비겁한 어른들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던 윗선 어른들의 행태는 전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교감선생님을 제외하곤 어떤 어른도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는 사람이 없었다. 차제에 어른들이 문화계에서는 또 어떤 일을 저지르는지 살펴보겠다. 영화나 방송 등의 대중문화계에서 일어나는 갑을관계는 연예계가 정글의 법칙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약자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짓밟아버리는 갑의 상도덕은 약자들이 이 땅에서 더 이상 밥을 먹을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을 느끼게 할 뿐이다. 갑을관계에서 상생이란 없다. 한국 어른들의 세계는 강한 것이 약한 것을 눌러야 하는 정글의 법칙일 뿐, 동반자승객이란 생각이 전혀 없다. 아이들이 마치 죄 많은 우리 어른들을 대신하여 바다에 잠긴 것처럼 느껴진다. 바다에 있을 사람들은 우리들인데 말이다. 그들은 평온하게 우리를 바라보며 잘들 사세요, 지켜보고 있어요, 하고 묵시의 눈길을 보내는 듯하다. 논어에 이런 말이 있다. 내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한국의 어른들에게 상대방의 이익도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우고 싶다. 이 5월에 우리 모두는 남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남을 위한 마음으로 나머지 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게 어른들의 죄를 대신하여 바다에 잠긴 수많은 어린 예수들을 위한 진정한 속죄의 삶일 테니까. 정재형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

[문화카페] 매듭, 과거와 현재를 잇다

올 봄엔 꽃들이 순서를 무시하고 다투어 얼굴을 내미니 글자 그대로 백화제방(百花齊放)이었다. 4월 하순도 되기 전 철쭉이 박물관 뜨락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봄 처녀가 머뭇거릴 틈도 없이 이어 여름 아씨가 잰걸음으로 다가온다. 어둡고 칙칙하며 무거운 무채색 공간은 하루가 다르게 생명의 색 초록으로 변한다. 눈만이 아닌 마음과 가슴까지 풋풋한 싱그러움이 스며들어 생명의 약동을 절감하게 한다. 올 들어 새봄 맞아 경기도박물관에서 개최한 첫 테마전은 기증실에서 펼친 매듭, 과거와 현재를 잇다(2014.3.20~4.15)였다. 여인의 손끝에서 다양한 꽃으로 피어난 매듭을 모은 것으로 전시를 일요일 아닌 지난 화요일 조용히 막을 내렸다. 이 전시는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지난해 초대전으로 연 일상을 위한 매듭, 전통의 응용과 창작(2013.11.26~2014.2.23)을 우리 박물관이 유치한 것이다. 제주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예산이나 우리 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유물을 다수 포함시키는 등 제주와는 차별을 꾀했다. 유소가 달린 옛 장황을 유지한 족자로 화면 내 매듭이 있는 여러 선현의 초상, 우리 지역 명문가의 음택(陰宅)에서 출토된 유물들, 우리 선조들의 체취와 할머니의 따사로운 손길이 감지되는 전세품 등을 두루 포함한 아주 오래된 매듭 이야기등을 새로 첨가했다. 시기를 현대에서 300년 이상 끌어 올려 비록 퇴색했으나 고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유물들은 특별전의 격조를 더했다. 마치 잘 리메이크된 음악처럼 결과적으론 청출어람(靑出於藍)을 이룬 것으로 평가됐다. 길고 오랜 역사를 통해 다채로운 모습으로 발전한 전통 매듭에, 이에 바탕을 두어 새롭게 창작된 것 등 여섯 갈래 소주제로 나눴다. 옷과 함께하다나를 표현하다실용품에 예술을 담다아주 오래된 매듭 이야기아름다운 실내장식전통 매듭의 재창조로 분류해 펼쳤다. 매듭은 다양한 형태에 화려함과 정교함 나아가 품위와 격조 및 멋을 함축하고 있다. 거주공간과 의상 및 휴대품 등 실생활 공간을 두루 점한 매듭은 과거만이 아닌 현대인의 삶에서도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조선시대 풍속화의 단초를 연 관아재 조영석(趙榮1686~1761)은 시서화 삼절로 산수와 인물에 능했다. 조영석이 영춘으로 귀양 간 맏형을 그린 보물 제1298호 조영복초상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인화가 그린 흔치 않은 초상인 점에서도 주목된다. 이 초상에 그려진 홍색 허리띠(세조대)는 한국매듭연구회 김혜순 회장이 복원해 진열장 초상화 아래 놓여졌다. 이 세조대는 24가닥의 실을 꼬아 안에 금박을 넣은 것으로 길이가 396㎝에 이른다. 세조대는 1품에서 3품은 홍색이며 4품에서 9품은 청색인데 옷을 여미는 기능과 더불어 의상에 멋을 더함을 엿볼 수 있다. 심익창(沈益昌1652~1725)은 과거시험 부정과 영조의 왕세자(연잉군) 시절 독살사건에 연관되어 그의 손자인 심사정이 평생 화가의 길을 걷는 단초를 제공했다. 경기도박물관에선 2008년 봄(4.21~6.5) 49일간 파주에 위치한 심지원(沈之源1593~1662) 등 18기에 분묘를 발굴조사 했다. 이 중 7기에서 복식유물이 160여 건 출토되었다. 심지원의 4남 심익창 묘에선 단령과, 14세에 시집와 21세에 타계한 익창의 첫 부인 성산이씨(1651~1671)의 직금봉황문 스란치마와 주머니들(조낭두발낭향낭진주낭)과 동반유물인 가지와 용머리 장식 노리개 등이, 두 번째 부인 사천목씨(1657~1699)의 원삼 등이 출토되었다. 이번 전시는 박물관이 콘텐츠의 보고(寶庫)임을 웅변한다. 전시가 막을 내리자 복식유물이 적지 않은 우리 박물관에 김희진 매듭장과 김혜순 회장은 각기 대표작인 고목에 핀 매듭과 즐거움을 흔쾌히 기증하셨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문화카페] 몬테베르디를 아십니까?

음악은 당연히 기쁜 음악과 슬픈 음악으로 나뉘는 것 같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떤 음악을 들으면 즐거운 기분이 드는데 어떤 음악은 슬픔을 느끼게 해준다. 음악은 예로부터 응당 기쁘고, 슬프고, 분노하고, 즐거워하는 등의 인간 개개인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해주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되겠지만, 서양음악사에서 이렇게 인간 개개인의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개별적 인간과 그의 개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16세기 말~17세기 초에야 비로소 소수 선구적 음악가들이 다양한 인간의 감정을 음악으로 가감 없이 표현하여 듣는 이를 감동시키도록 하는 새로운 양식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서양음악사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바로크시대(Baroque Era)가 시작된다고 기술한다. 바로 이 시기의 정점에 있는 작곡가가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1567~1643)이다. 그의 잊혀진 오페라 아리아나(LArianna)에 등장하는 아리아나의 비가(Lamento dArrianna)는 마치 춘향전의 쑥대머리처럼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려 노래하는 이가 표현하는 슬픔에 저절로 빠져들게 만든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의 연기에 몰입되어 마치 내가 겪는 일인 양 눈물을 흘리는 것과 흡사하다. 놀라운 것은, 이 작품 이전에 등장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어떤 음악도 이와 같이 슬픔을 가감없이 표현하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무대에서 연기(연주)하는 이의 감정을 관람하는 사람이 동감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몬테베르디를 비롯한 이 시기 공연 예술가들의 공통된 목적이었으며, 이후 전개되는 서양 예술음악 발달을 위한 매우 중요한 방향설정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고 관객으로부터 진한 동감을 자아내기 위해 몬테베르디는 다음과 같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즉,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감정은 크게 겸손 또는 기도하는 마음 (humilt또는 supplicatione), 절제(temperanza), 그리고 분노(ira)의 세가지 인데, 당시의 음악 양식은 겸손과 절제 두 가지를 표현할 수 있지만 세번째인 분노를 표현할 수 없다는 고민이었다. 이에 몬테베르디는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양식, 즉 스틸레 콘치타토(stile concitato격정의 양식)를 창안해 냈다. 이는 현악기에서 한 음을 재빠르게 아래위로 여러번 활쓰기를 하여 연주하는 트레몰로(tremolo)라는 주법으로 표현된다. 오늘날에는 이미 일반적인 주법이지만, 당시에는 연주자들이 트레몰로 연주하기를 거부하는 소동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주법은 곧 많은 후배 작곡가들에 의해 분노의 감정 뿐만 아니라 강한 바람이나 폭풍우 등의 자연을 묘사하거나 (비발디의 사계) 신의 위엄 (핸델의 메시아) 등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어떤 것이 우리와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천재적 예술가란 바로 몬테베르디처럼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문제점을 직시하고 그것에 대한 해결을 제시하는 이가 아닌가 한다. 우리가 당연시하는 눈물을 자아내도록 슬픈 음악, 강렬하게 분노와 격정을 표현하는 음악은 몬테베르디 이전에는 소위 듣도 보지도 못한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였을 것이다. 바로 그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예술가에게 매우 필요한 덕목이다. 필자는 부끄러워진다. 양승렬 수원오페라단 지휘자 미주리주립대 박사

[문화카페] 나를 찾는 여정

우리는 늘 너무 많은 이미지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사실 매일 같이 접하는 그 무수한 이미지가 결국 미술이다. 또한 사람들은 직접 미술 작품을 만들지 않더라도 미술적 행위라고 부를 만한 일을 날마다 한다. 자신의 집안 인테리어에서부터 시작해 소소한 물건을 하나 고르더라도 디자인과 색상을 따져보는가 하면 무엇보다도 그날그날의 옷차림에 신경을 쓰고 화장을 하는 일, 남의 옷차림과 치장에 관심을 기울이며 은밀히 관찰하는 일, 카페나 음식점의 실내장식과 분위기 등에 대한 품평을 비롯해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받을 때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일 모두가 실은 광의의 미술 감상이자 체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미술과 충분히 낯을 익히고 있으며 그와 깊숙이 연관되어 있고 실생활에서 이미지 제작행위를 적극적으로 감행하고 있다. 다만 그러한 일련의 행위를 결코 미술이라고 생각지 않는 것이 문제다. 미술이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만 존재한다고 여기거나 미술을 전공한 전문가들만의 것이라고 쉽게 믿어버린다. 미술은 특정 전시 장소에만 걸려있거나 놓여있지 않다. 오히려 전시장 밖에 너무 많은 이미지들이 바글거린다. 그것들을 날카롭고 정치하게 들여다보고 생각하고 그 이미지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미술 감상이자 공부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술을 전공했느냐가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이미지를 건성으로 보아 넘기지 않고 관심 있게 응시하고 이를 곰곰 생각해보면서 그 이미지를 책을 읽듯이 독해하고, 그런 맥락에서 미술적 행위를 하고 있느냐를 질문해야 한다. 오늘날 미술은 정해진 소재를 동일한 방식으로 재현하거나 아름다움이란 것을 강박적으로 구현하는 그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이른바 현대미술이란 동시대의 보편적인 미술개념을 회의하고 불식시키는가 하면 미술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결국 미술이란 미술이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질문하는 일이다. 미술이라 불리는 개념을 문제시하고 동시대의 시각 환경을 이루는 이미지들을 독해하면서 나를 둘러싼 사물과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 그것이 미술이다. 일상의 사물과 세계를 새롭고 낯설게 보여주는 것이며 상투적인 사고를 전복시켜주는 것이 좋은 미술이다. 그것은 기존의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시선으로 사물과 세계를 보는 안목과 감각을 확장시켜나가는 일이다. 궁극적으로는 나를 둘러싼 세계를 온전히 통찰하고자 하는 것이며 진정한 주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술은 상식적이고 규범적인 모든 명명(命名)의 체계를 흔들고 교란하는 행위다. 그것을 행하는 작가란 존재는 우리에게 새롭고 낯선 존재를 보여주는 이다. 미술은 전시장의 안과 밖에서 왕성하게 번식하고 있으니 우리는 그것을 열심히 사유의 대상으로 먹어대야 한다. 그렇게 먹어대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를 둘러싼 세계와 사물을 진정으로, 제대로 알고 싶기에 그렇다. 그래서 타자에 의해 훈육되고 길들여지고 학습된 나를 버리고 오롯한 주체가 되고 싶기에 그럴 것이다. 나라고 믿었던 미망을 지우고 참된 나를 찾는 일이다. 불가에서는 나라고 부르는 나를 버려야만 비로소 보이는 나를 찾는 일을 일러 수행이라고 한다. 라캉식으로 말하면 나는 여기에 없다. 그래서 자기다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것이 수행이다. 자기 참모습에서 살자는 것이 수행의 선(禪)인 것이다. 선은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일컫는다. 번뇌 망상을 제거시켜 때가 묻기 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데 이를 견성이라고 한다. 수행자는 그 생명 같은 화두 하나를 들고 덤벼들어 공부한다. 왜 공부하는가? 수행하는가? 적멸락(寂滅樂), 그러니까 영원한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미술을 제대로 향유하고자 하는 공부의 의미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문화카페] 봄날 성곽에 올라

박물관 주변의 까치는 나뭇가지를 부리로 물어 열심히 나르더니만 둥지 보수가 끝났는지 이젠 짝을 부르는 듯 짖는 소리가 커진다. 시야는 하루가 다르게 칙칙한 색에서 싱그러운 연두색으로 변해간다. 봄 하면 바로 꽃이 연상된다. 바야흐로 천지가 꽃 대궐로 바뀌는 생명의 약동이 빚는 소생의 계절이다. 형형색색 모든 꽃은 아름답다. 어린 시절 진달래는 서울에서도 야산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화전(花煎) 부꾸미까지는 아니어도 꽃을 입에 넣으면 약간 달착지근한 맛이 감돌던 기억도 새롭다. 벚꽃 필 때면 소풍 장소로 초등학생들 행렬이 이어진 창경궁에 이르는 길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벚꽃놀이를 위해 가로수에 매단 등불로 거리는 온통 잔칫집 분위기였다. 일제강점기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건립과 더불어 식재된 벚나무들은 왕궁복원 차원에서 모두 제거되었다. 동대문에서 종로 5가에 이르는 길가에는 차도 쪽으로 작은 노점의 꽃가게가 이어져 행인의 눈을 즐겁게 했다. 언제가 사라져 서운했는데, 길 건너 충신동 쪽으로 옮김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중고등학생 때는 혜화동 교차로를 지나 복개한 구 서울대학교를 지나 동대문의 헌책방이며 종로를 걸으며 꽃 시장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시선을 멀리해 수려한 산세를 뽐내는 당당한 인수봉이며 도봉을 바라본다. 혜화동에서 혜화문을 벗어난 성 밖은 성북동과 삼선동으로, 예전엔 고양 군에 속했다. 인간의 수명이 한계가 있듯 각 민족이 세운 왕조의 수명은 대부분이 3백년 내외이다. 서구 학자들은 인류역사상 예를 찾기 힘든 5백년 내외를 견지한 우리의 고려와 조선의 두 왕조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굴절된 시각인 일본 식민주의사관에선 이 같이 긴 왕조를 마치 썩기 직전의 고인 물인 양, 변화와 발전이 없는 정체(停滯)된 사회였다고 폄훼한다. 그러나 한국동란 이후 미국의 사회학자들을 비롯한 국내외 학자들은 견해가 달랐으니 그 같이 오려 견지한 힘이 무엇인가를 찾았다. 무력에 의한 지배가 아니며 우리 땅에서 성숙한 불교와 조선성리학이 이를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자리매김 하는데 의견을 같이하다. 이들은 더 이상 외제(外製)나 외래사상이 아닌 우리 손으로 키우고 완성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서구의 기독교가 탄생지를 떠나 지중해로 들어가 세계종교로 성장한다. 마찬가지로 원효와 의상 및 퇴계와 율곡 및 우암 등 우리 선조들은 인도와 중국에서 싹튼 붓다와 공자의 가르침을 적극,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천착(穿鑿)해 심화, 발전시킨 점에서 위대성이 드러난다. 위대한 사상은 시공의 틀을 벗어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와 조선왕조는 물론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 한강 그 문명의 젖줄의 몫과 역할은 지대하다. 이를 껴안고 있는 경기지역의 역할은 실로 지대하며 큰 역할을 한 분들이 한 둘이 아니다. 허공에 시선을 두니 불현 듯 조선 후기를 사셨던 다산(茶山)과 추사(秋史)가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린다. 두 분은 탁상공론(卓上空論) 아닌 실사구시(實事求是)로 민초들의 삶의 질적 향상 등 구체적인 시무책을 제시해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닮은 점으론 애민(愛民), 차가운 지성과 따듯한 마음으로 대변되는 학예(學藝)를 아우름, 적지 아니한 시련 등을 들게 된다. 맹자(孟子)도 언급했듯 큰일이 주어진 이들에겐 강한 쇠를 위한 담금질 같이 시련과 고통은 성장통(成長痛)이자 필수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세상사가 모두 뜻대로 되면 과연 행복할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지면 늘 변함없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과연 있는가. 당나라의 대시인인 시선(詩仙) 이백(701-762)은 장진주(將進酒)에서 하늘이 날 낳은 것은 반드시 쓸 곳이 있어서다라 읊었다. 물론 우리가 모두 대통령이나 빌게이츠일 수는 없다. 다만 토끼면서 호랑이인 양, 호랑이가 자신을 토끼로 여김은 분명한 잘못이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자신에게 불확실한 한두 가지가 전부인 양 강요함은 아닌지.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문화카페] 지금 이 시기 독립영화가 가장 중요하다

영화가 지금 이 시기 가장 중요하다.(Film is the most important art in our times.) 1920년대 블라디미르 레닌이 한 말입니다. 레닌이 말한 지금 이 시기란 혁명기의 소련을 말한 것이죠. 레닌은 혁명을 완수했지만, 혁명은 모스크바에서만 해당되었을 뿐이었읍니다. 지방 소도시, 시골에서는 여전히 봉건잔재가 남아있었고 혁명이 일어났는 지 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레닌은 서둘러 혁명의 대의를 인민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영화였습니다. 영화만큼 빠르게 대중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예술이 없었습니다. 시대가 변하여 지금 그 영화가 영상으로 확장됐고 텔레비전, 컴퓨터,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역을 확보하는 바야흐로 영상시대가 펼쳐졌습니다. 그런 시기에 정치는 여전히 과거 역사를 반복합니다. 아베의 군국주의가 다시 부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제로부터 36년간 지배받았던 나라로서 그와 같은 경험을 갖는 많은 아시아국가들과 함께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경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평화의 시기라서 일본국민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게 사실이지만, 정치가의 잘못된 판단으로 언제든지 그 좋은 관계는 전쟁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게 역사의 교훈입니다. 중국은 하얼빈 역에다 안중근 기념관을 만들었고, 이등박문을 저격한 현장을 공원화해 시민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새기는 예술작업을 했습니다. 이때 한국에서 안중근의 독립운동을 그린 영화를 만들어 상영한다면, 시의적절하여 크게 흥행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제작해도 늦지 않는 게 아베의 군국주의가 일, 이년 안에 사라질 것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저는 우당기념관으로부터 전화 한 통화를 받았습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 영화를 제작하고 싶은데 한번 상의하고 싶다는 요지였습니다. 이후 깊은 논의를 하지 않아서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나, 우당기념관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저에겐 신선했습니다. 우당 기념관이 영화의 매체적 의의를 뭔가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우당선생에 관한 영화는 만들어져야 합니다. 독립운동이야기 하면 교과서적인 애국계몽영화만을 떠올립니다. 그런 까닭에 그 이야기가 오락적이지 않을 것이란 선입관이 앞섭니다. 독립운동 영화뿐만 아니라 어떤 영화도 계몽적으로 만들면 안됩니다. 대중영화는 오락이기 때문에 관객을 즐겁게 해주는 게 목적이어야 합니다. 만일 부러진 화살이나 변호인도 계몽적으로 만들었으면 흥행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재미있는 드라마가 되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지요. 독립운동지사들의 삶은 그 이상으로 드라마틱하고 인간적이라 생각합니다. 우당 이회영선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운동가입니다. 부자집의 일곱 형제중 여섯 가족 50여명이 만주로 이주하고 전재산을 독립운동에 헌납하였습니다. 이런 정신은 독립운동을 떠나 지금 이 시대 한국의 정치가들에게 많은 각성을 주는 대목입니다. 여섯 형제중 셋은 투쟁하다 모진 고문에 사망했고, 우당선생 역시 옥사하였습니다. 그의 독립정신과 투쟁은 당시나 지금 불멸의 역사로 기록됩니다. 그런 이야기를 극영화로 잘 성공시키면 우리 국민들은 민족적 자부심을 갖을 것이고, 아베가 진격해 온다 할지라도 더 이상 나라를 빼앗기는 일은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전세계에서 군사력 23위를 다투는 일본이 군국주의로 재무장하여 평화헌법만 수정하면 침략도 할 수 있는 준비가 끝납니다. 독도를 찾겠다고 함대를 몰고오면 한국은 방어할 힘이 없습니다. 국제사회가 우리를 얼마나 도와줄 지 솔직히 장담할 수 없습니다. 과거엔 미국이나 우방국들이 없어서 나라를 뺐겼나요? 독도에 관한 영화를 누군가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독립운동 영화들이 지금 이 시기 가장 중요합니다. 독립운동에 있어선 보수, 진보도 없으니, 국론이 분열될 이유도 없고, 국민이 아베군국주의에 맞서 단결도 되니 일거양득이지요. 정재형 동국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문인화가 경기관찰사, 윤의립과 홍수주

오늘날 도지사인 도백(道伯), 즉 조선시대 관찰사의 임기는 매우 짧았다. 조선시대 경기도는 600명에 가까운 도지사를 배출했는데, 2회와 3회 나아가 4회까지 임명된 이들도 있다. 이들 중에는 정사개국원종 등 공신들과 천문지리수학역학의약에 정통했거나 아악을 정리한 이들도 있다. 청렴과 근신 및 효자로 이름을 얻었거나 명필들 그리고 학문과 문장에 능해 저술을 남겼거나, 드물지만 그림으로 이름을 얻은 문인화가들도 있다. 조선중기 화단에서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손꼽히는 17세기 전반의 윤의립(1568~1643)과 후반의 홍수주(1642~1704)는 각기 몰년과 타계 전해인 1643년과 1703년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일반적으로 전통사회에 그림을 홀대한 것으로 간주되기 쉬우나 실상은 이와 다르다. 중국 최초의 미술사서로 지칭되는 역대명화기를 지은 당나라 장언원은 일찍이 그림의 공은 6경(經)과 같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그림은 교화를 이루며 인륜을 돕고 신묘한 조화를 탐구하며 그윽하고 미묘한 것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어진 임금으로 지칭되는 세종숙종영조정조 등은 그림 감상만이 아닌 직접 붓을 들어 사군자를 치는 등 그림 그리기를 즐겼다. 한자문화권의 문인화가의 존재가 말해주듯 위로는 서화를 즐긴 관료 및 선비가 한둘이 아니다. 다만 조선왕조는 신분사회로 제도권 내에서 활동한 화원 등 그림이 본업인 화가들의 신분이 양반 아닌 중인이기에 이에서 비롯된 폄훼일 뿐이다.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인 윤의립은 그의 조부가 선조의 어린 시절 사부였고, 부친이 공조판서를 역임한 명문가의 후예이다. 그 또한 27세에 문과급제 후 공조예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50년 가까이 관직에 있었다. 경기도에 앞서 경상도함경도충청도 관찰사를 거쳤다. 유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6폭의 산수화첩은 네 계절을 여덟 폭에 담은 원래 8폭의 사시팔경도 계열이었으나, 2폭이 산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끝 폭인 겨울 장면엔 그의 호 월담(月潭)이 들어간 붉은 먹으로 쓴 행서체 관서가 있다. 소품의 정형산수로 크기와는 별개로 특징 있는 계절의 표현, 화면 구성과 세부 묘사에서 녹녹하지 않은 기량과 격조를 읽게 된다. 그의 아우 윤정립(1571~1627) 또한 조선후기 대 수장가인 김광국이 모은 화첩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원별집 내에 폭포 아래서 피서(瀑下避暑圖)와 개인소장의 관폭도와 행선도 쌍폭 등 3점이 알려져 있다. 관폭도에는 폭포를 바라보는 두 노인 주변에서 시중드는 세 동자가 등장하며, 이 중 한명은 차를 준비하고 있어 시선을 모은다. 윤의립정립과 형제가 함께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홍수주는 청신하고 기발한 근체시로 동시대 시단에서도 높게 평가되었다. 그는 묵매와 묵죽 특히 함께 황집중과 이계호에 이어 묵포도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다소 늦은 나이인 41세에 과거에 급제했으나 2년 뒤 파직된다. 김정희가 그러하듯 43세부터 10년에 이르는 유배생활 겪어야 했으니 이 시기는 학문과 서화에 잠심한 참으로 값지고 의미 있는 시절로 사료된다. 귀양서 풀린 뒤 타계 까지 10년은 사신으로 연경에 다녀오고 동부승지로 원접사로 청 사신을 맞이했고 예조참의, 경기도 관찰사, 도승지,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청빈한 삶을 산 홍수주는 회갑 때 가난하여 변변한 옷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 어린 딸은 남의 옷을 빌려 입었는데 그만 치마에 간장물이 튀자 치마폭에 묵포도를 그려 중국 북경에서 비싼 가격에 판 일화도 전한다. 유작도 여러 점 알려져 있으며 포도 대련 중 한 폭은 잎뿐 포도송이를 그리지 못한 미완성인 채로 유작이 된 것이 있었다. 그의 둘째 아들 홍우열은 어릴 때 부친이 타계해 직접 그림수업을 받을 기회가 없었는데 물려받은 천재성으로 부친의 포도 그림을 완성했으니 그야말로 부전자전이 아닐 수 없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문화카페] 서른 두살 청년 음악가의 유서

최근에 매우 가슴 아픈 일들이 있었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세 모녀가 동반자살을 하는가 하면, 역시 생활이 어려운 30대 주부가 어린 자식을 데리고 아파트에서 투신했다. 얼마전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알리기 위해 분신한 40대 가장도 생각난다. 대한민국은 자살공화국인가? 우리가 OECD 가입국 중에서 일본을 제치고 자살률 1위국이라는 불명예도 이미 식상한 사실이 됐다. 2010년 WHO 발표에 따르면 인구가 얼마 안 되는 그린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이어서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세계 3위이기도 하다.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의 누군가가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하고 있을지 모른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베토벤도 32살 즈음에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했었다. 당대 비엔나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촉망받는 작곡가로 자리매김하던 그에게 27살 무렵부터 청력을 상실하는 비운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5년 동안 귀 상태가 악화될 뿐이었으며 이제 영영 청력을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음악가에게 청력을 잃는다는 것은 사형선고와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냉혹하고 인정사정없는 비엔나의 사교계와 음악계가 젊은 베토벤이 귀머거리가 되어간다는 것을 알면 그를 헌신짝처럼 버릴 것이 분명했다. 청년 베토벤은 수치심과 자괴감에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선택을 했다. 의사의 권고에 따라 비엔나 근교의 한적한 휴양지인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에서 6개월을 요양하던 베토벤은 귓병이 점점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다. 그러한 절망의 32살, 그는 무엇을 했을까? 베토벤은 다름아닌 유서를 쓴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The Heiligenstadt Testament)라고 불리는 이글은 베토벤이 죽은 후 동생들(카를, 요한)이 읽을 수 있도록 변호사에게 맡긴 것이다. 유서를 읽어보면 그 무렵 자살을 심각하게 고민했다가 이미 이를 극복했음을 알 수 있다. 절망에 빠졌던 베토벤이 자살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예술 그리고 선(善)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러한 상황들(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자괴감과 수치심)이 나를 거의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절망감이 조금만 더했더라면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나를 극단에 이르지 못하도록 한 것은 바로 나의 예술이었다. 내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내어놓지 않고서는 이 세상을 떠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난 이 저주받은 삶을 이어 가련다.(중략) 자식들이 선을 추구하도록 가르쳐라. 돈이 아니라 선만이 행복을 가져다준다. 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다. 이 비통함에서 나를 일으키는 것은 다름 아닌 선이다. 나의 예술과 선 때문에 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 베토벤의 유서는 죽음의 유서가 아니었다. 처절한 고통일지라도 그것이 삶이라고 긍정하는 삶의 유서였다. 절망적 운명에 짓눌려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어만 가는 선택이 아니라, 절망적 운명을 끌어안고 희망의 발돋움을 내딛고 일어서는 젊은 베토벤의 기개에 깊은 경외감이 든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사건 이후 베토벤은 본격적인 작곡가로서의 길을 걸으며 그의 작품세계는 더욱 심오해지며 더욱 숭고미를 더해간다. 그의 소위 중기 걸작으로 손꼽는 발트슈타인 소나타와 영웅 교향곡 그리고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는 모두 하일리겐슈타트 직후에 세상에 나온 작품들이다. 베토벤이 자괴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했다면 음악사의 지평을 넓힌 소위 운명교향곡(교향곡제 5번)이나 합창교향곡(교향곡제 9번, 환희의송가), 그리고 장엄미사 같은 작품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글에 언급한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양승렬 수원오페라단 지휘자

[문화카페] 죽음에 대한 예술적 성찰

금기시되었던 죽음이 최근 다시 관심의 대상이 됐다. 그만큼 죽음이 다반사가 된 저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너무도 심한 죽음의 과잉인 시대에 살고 있다. 시간당 수십 명이 죽는가 하면 자살률이 세계 최고이며 기가 막힌 죽음이 연이어 줄을 잇는 나라다. 이 열악하고 흉흉한 나라에서 목숨을 유지한다는 사실이 거의 기적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인지 인문학과 예술에서도 죽음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죽음이 새삼 성찰의 대상으로, 문제적 대상으로 부상한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다. 무엇보다도 주변에서 자살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졌고 잔혹하게 살해당하거나 안타깝게 죽어가는 이들 또한 늘어났다. 그만큼 죽음이 빈번한 사건이자 핵심적인 문제로 부상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죽음으로 내모는 이 사회현실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요구되는 한편 인간의 바람직한 삶과 죽음의 조건에 대한 인식도 뒤를 잇고 있다는 생각이다. 타자들의 죽음은 나의 실존에 영향을 끼치는 매우 중요한 변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타자의 죽음에 주목해야 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실 죽음에 관한 사유는 불가피하게 근대성 자체에 대한 반성의 측면을 요구하게 되었고 사회적, 정치적, 인문적 문제로 부상했다. 당연히 예술이 자신의 삶에서 유래한 모든 문제를 시각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이라면 한국 사회에서 빈번한 여러 죽음에 대해 예술가들이 고민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인식 아래 한국의 구체적인 정치와 현실, 그리고 문화적 현상 속에서 왜 죽음이 초래되고 있으며 어떤 죽음이 문제적인지, 과연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예술에서도 긴요하게 요구되는 일이다. 예술이 인간다운 삶과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려는 본능적인 욕망의 실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죽음과 죽음으로 이끄는 모든 것에 대해 저항하고 반성하려는 것은 당연한 시도다. 그러니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유를 보여주려는 예술은 결코 죽음을 회피할 수 없다. 이미 인간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떨쳐낼 수 없는 비극적인 조건 속에 놓여 있다. 그 안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아마 애도일 것이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더 많은 앎과 성찰, 애도를 통해 삶을 더 존중하게 된다. 죽음을 불러내고 그 죽음에 대해 깊이 사유하며 비극적인 죽음을 위무하고 치유하는 기능이 예술 안에는 숨 쉬고 있다. 애초에 예술은 애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미술에 국한해 보면 그간 한국 근현대미술에서는 상대적으로 죽음을 다룬 이미지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이나 경험 혹은 근원적인 부재에 대한 사유를 반영하는 미술 작품이 많지 않다는 점은 의아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과 같은 컴컴하고 무시무시한 것은 가능한 배제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근대기에 형성된 순수 미술은 미술이 오로지 아름답고 감각적인 것들을 다루는 것이어야 한다는 인식을 강제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누드와 아름답고 싱싱한 과일과 꽃 등을 반복해서 그렸으며 생명 있는 것들만이 예찬되었다. 어둡거나 죽은 것들은 추방되었다. 또한 시각적인 아름다움이나 미술 내적인 문제만을 형식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현대미술에서 인간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가치들은 사라졌다. 사회와 현실 문제를 반영하는 것도 가능한 한 미술에서 배제되었다. 이는 서구 현대미술과도 조금은 구분되는 우리의 특별한 경우다. 분단 상황과 반공 이데올로기, 권위적인 정치권력과 통제된 사상, 그리고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져 온 순수주의 미술관이 오랫동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결과로 보인다. 더불어 우리가 그만큼 미술을 장식적이고 아름다움 속에서만 이해해 온 결과이기도 하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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