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자유, 그 이상에 대하여

오빠, 저 자유예요. 너무 행복해요 며칠 전 모르는 번호의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목소리였다. 순간 당황했다. 한껏 들뜬 여성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숨돌릴 틈도 없이 여기서는 숨 쉬는 공기조차 틀려. 마음이 너무 편해라는 말도 이어졌다. 이내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됐다. 바로 향림원에서 각종 인권침해를 당했던 장애인 K씨였다. K씨는 향림원에서 드디어 나왔어. 핸드폰도 장만했다고 말했다. 이어 요새 허리가 아파서 몸은 아픈데 너무 행복해. 걱정없이 살 수 있어서 너무 좋아. 활동보조인도 잘해주셔서 크게 불편한 것도 없어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컥했다. 향림원에서 거주하던 K씨와 Y씨는 최근 향림원에서 벗어났다. 광주시내 작은 빌라에서 함께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은 기초생활수급비를 받고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으며 평범한 일상을 찾아가고 있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을 당할까 하는 걱정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향림원에서의 나날과 달리 이제는 마음 편히 단잠을 잘 수 있어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단다. 문득 몇달 전 향림원 뒤편에서 몰래 이들과 만났던 추억이 떠올랐다. K씨가 전화를 걸어 너무 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치킨과 맥주가 너무 먹고 싶다는 얘기를 듣고 며칠 지난 뒤였다. 이미 취재는 끝난 다음이었지만, 외롭고 힘들다고 전하는 이들의 절절한 마음은 우리를 향림원으로 이끌었다. 그들의 절실함은 모든 것이 통제된 생활속에서 숨 쉴 공간을 찾고자하는 몸부림이 아니었는가 싶다. 그리고 그때 또하나를 약속했다. 2015년에는 놀이동산에서 함께 놀고싶다는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기로 이제 이들은 심리적으로 억눌려왔던 무엇인가에서 벗어났다. 진정한 자유를 느끼고 있는 중이다. 취재를 통해 알게된 이들과는 어느덧 단순한 취재원과 기자와의 만남 그 이상이 됐다. 그들은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인연이다. 이번 봄은 기대된다. 날이 따뜻해지면 이들과 함께 콧구멍에 봄바람을 실컷 넣을 수 있기에. 이명관 사회부 차장

[지지대] 복고열풍

수습기자 시절 술자리에서 모 선배와 나눈 대화가 요즘 생각난다. 당시 선배는 수습기자의 고달픈 생활을 위로하려고 자신의 신입기자 생활을 자세히 이야기해 줬다. 밤새도록 파출소를 돌고, 사건 취재를 위해 고속도로 갓길을 달렸던. 선배 술자리 얘기의 요지는 나 때는 더 힘들었다 그러니 열심히 해라 였다. 그 말을 듣고 형식적으로 대답하며 선배에게 술잔을 권하곤 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 술자리에서 선배가 한 것처럼 내 과거 무용담을 후배들한테 늘어놓는 자신을 인식하면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세대를 불문하고 술자리 주요 안줏거리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산다는 말이 맞다. 최근 세대를 불문하고 복고 열풍이 불고 있다. 그 중심은 대중문화가 주도하는 형국이다. <응답하라 시리즈>,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토토가>, 영화시장에서는 <국제시장>, <강남 1970>, <쎄시봉>까지 대중의 성향을 간파한 콘텐츠 제작자들이 너도나도 복고 문화상품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복고 문화상품은 서로 이해득실을 따지며 공감할 수 없는 현실에서 과거 추억을 통해 공감대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몇 년 전 가수 수지를 톱스타로 만든 영화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을 떠오르게 했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와 무한도전의 <토토가>는 이른바 엑스세대로 불렸던 신세대들이 오랜만에 90년대 왕년의 인기가수들을 보며 추억에 빠졌다. 영화 <국제시장>은 6ㆍ25 한국전쟁, 파독 광부ㆍ간호사 이야기, 이산가족의 아픔 등 우리 민족 근현대사의 주요 이슈를 등장시켜 관심을 모았다. 우리는 왜 복고에 열광하는가. 현실의 피곤함에 대한 해방구. 급변하는 경쟁사회에 살면서 과거 시절을 회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복고 열풍은 내가 과거에 느낀 감정과 경험을 세대가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소통하고 싶은 심리. 결국 복고열풍은 누군가에게 다들 있을 법한 왕년에 잘 나갔던 무언가를 표출하고 싶은 욕망이 표출된 결과가 아닐까. 복고열풍도 얼마지나지 않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소통부제의 시대에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효과를 내는 것은 분명하다. 이선호 문화부장

[지지대] 테러, 누군가엔 해방?

BBC 언론인 데이비드 제슬은 1985년 방송된 사태의 핵심(Heart of the Matter)에서 말했다. 테러리스트의 극악무도함에 직면해서도 균형 감각을 잃지 않는 것이 평화의 열쇠다. 미국 랜드 연구소의 제프리 사이먼도 1987년 비공식 보고서에서 지적했다. 수년 동안 워싱턴은 테러리즘에 대한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혐오감이 테러리즘의 위험성에 대한 합리적 평가를 간과하도록 방치했다. 테러리스트는 대(對) 테러리스트의 어떠한 승리조차도 단 한 번의 잘 설치된 폭탄으로 역전시킬 수 있다. 테러에 대한 정규군 투입을 억제하는 당시의 논리가 그랬다. ▶이런 주장에 재갈을 물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911 테러로부터 2개월이 흐른 추수감사절에 부시 대통령이 연설했다. 미국은 세계 모든 국가에 드리는 메 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테러리스트를 돕는다면 당신도 테러리스트입니다 세계의 어떤 곳에서든지 그리고 끝나는 날이 언제든지 우리는 이런 악마들과 싸울 것입니다. 그렇게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ism)은 시작됐다. 그리고 10년 뒤인 2011년 5월 2일, 오사마 빈 라덴이 살해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알 카에다의 괴멸을 선언하며 이라크에서 철수했다. ▶그로부터 3년여. 세계인이 경악하고 있다. 더 잔인하게 돌아온 테러리즘 앞에 할 말을 잃고 있다. IS(Islamic State)의 등장이다. 일본인 2명을 참수했다. 요르단 군인을 화형시켰다. 미국 여성도 참수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괴멸시킨 알 카에다의 하부에서 기생해온 조직이다. 2003년 만들어진 이들이 급성장한 것은 공교롭게도 오사마 빈 라덴이 살해된 직후다.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주인을 자처하며 부각됐다. 알 카에다 보다 더 부유하고 더 잔인한 테러로 무장했다. 미국 행정부 내에서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영국의 찰스 타운센드는 그의 저서 테러리즘, 누군가의 해방 투쟁에서 테러에 대한 무장 공격은 또 다른 테러를 낳을 뿐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런 분석은 알 카에다에서 IS로 이어지는 이슬람 테러의 질긴 생명력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그런 테러와의 끝없는-결코 승리할 수도 없는- 전쟁을 미국이 또 시작하려 한다. 그 사이에 대한민국이 끼어 있다. 2004년에는 한국인 김선일씨가 이라크 무장 단체에 참수 당했다. 연초에는 10대 김모군이 IS에 가입하겠다며 사라졌다. 지금 이라크에는 1천여 명의 한국인이 먹고 살기 위해 일하고 있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이 대한민국 국민 누구에겐 테러 속 생존 투쟁이 될 수도 있다. 김종구 논설실장

[지지대] 압둘라 열풍

요르단의 압둘라 2세 이븐 알후세인 국왕이 국내 네티즌들 사이에 인기다. 압둘라 신드롬이라 할 정도로 열풍이 불고 있다. 이는 압둘라 국왕이 요르단 공군 조종사 마즈 알카사스베 중위를 산 채로 불태우는 영상을 공개한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대한 대규모 공습에 나선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숨진 조종사의 이름을 딴 순교자 마즈 작전이란 이름하에 가차없는 전쟁을 시작한다며 전투복 차림으로 직접 군을 진두지휘했다. 압둘라 국왕은 1999년 아버지 압둘라 1세 국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기 전까지 군인으로 복무했다. 영국 샌드허스트 왕립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요르단에서 공군 헬리콥터 부대 전술교관, 특전사령관을 역임했으며 코브라헬리콥터 조종사로 명성을 날렸다. 방미 중 알카사스베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한 국왕은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주인공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극 중 대사 나는 나에게 총을 쏜 사람과, 그의 아내와 모든 친구들, 그리고 그의 집까지 모두 불살라 버리겠다를 인용한 뒤 IS는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응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투복을 입고 진두지휘하는 모습은 압둘라 국왕의 단호한 리더십을 국내 정치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합니다라는 글과 함께 인터넷 포털 커뮤니티와 SNS를 통해 급속히 확산됐다. 진정한 국왕, 요르단 국민이 부럽다는 글도 있고, 요르단은 군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왕이 국민을 위해 앞장서는데. 대한민국과 너무 비교된다는 글도 올라왔다. 압둘라 국왕이 공수낙하 훈련을 직접 지휘하는 모습을 담은 유튜브 동영상도 수백 건씩 공유되고 있다. 압둘라 국왕의 강력한 대응에는 요르단 정부가 알카사스베 중위를 구출하는데 소홀했다는 국내 비판을 잠재우려는 측면이 있다. 군인 출신의 국왕이 전투복을 입은 것 자체가 대단한 화제도 아니다. 그럼에도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건 위기때 국가 지도자의 역할과 리더십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등 국가적 난제가 벌어질 때마다 국론이 사분오열됐던 대한민국이다. 우리 국민들 입장에선 국가적 충격과 위기 상황에서 국민들이 분열되지 않고 통합할 수 있게 한 압둘라 국왕의 리더십에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국가 위기에 용감하게 나서는 지도자, 위기 속에서 국민을 통합시킬 수 있는 지도자가 부러운 거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SNS 감옥

현대인들은 하루 종일 스마트폰에 매달려 산다. 마치 감옥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사람처럼 휴대폰에 끌려 다닌다. 때론 자의로, 때론 어쩔 수 없이. 한꺼번에 수십 명이 초대된 카카오톡 채팅방에서 특정인에 대한 욕설과 험담이 오간다. 피해자가 내용을 보지 않으려 채팅방에서 나가도 다른 사람이 끊임없이 다시 초대한다. 마음대로 나가지도 못한 채 채팅방에 갇히게 되는 카톡 감옥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청소년들의 의사소통 수단이 되면서 SNS상에서 집단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가하는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 피해가 늘고있다. 카카오톡에서 집단 따돌림을 하는 카따, 떼 지어 욕을 하는 떼카, 채팅방에 초대한 뒤 한꺼번에 나가버려 피해학생만 남기는 카톡방폭(대화방 폭파) 등 유형도 다양하다. 오프라인에선 학교 폭력이 줄고 있다지만 SNS에선 더 심각해지는 양상이다. 카톡은 회사원들 업무에서도 필수다. 부서별 대화방에서 업무를 지시하고 확인하는 메시지가 주말에도, 퇴근 후에도 수시로 날아온다. 스마트폰을 소지한 이상 업무 지시에 항시 대기 상태가 되다보니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퇴근을 해도, 휴일에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업무의 연장선상 같은 느낌에 맘이 편치않다. 밴드 또한 마찬가지다. 직장 상사가 밴드에서 논의하자며 초대 메시지를 보내면 꼼짝없이 대화방에 가입해야 하고 수시로 날아드는 메시지에 응답을 해야 한다. 친구ㆍ지인과 소통하던 SNS 계정이 업무에 투입되면서 일과 삶의 경계도 흐릿해졌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발표한 정보통신기기에 의한 노동 인권 침해 실태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의 63%가 SNS를 통해 업무 지시를 받은 경험이 있고, 스마트폰과 회사 e메일을 연동해 사용하는 사람이 36%였다. 응답자들은 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로 사생활 침해(36.3%), 업무 시간 증가(22.5%), 피로 증가(22.5%)를 꼽았다. 유럽은 퇴근=로그아웃을 제도화하고 있다. 지난해 4월 프랑스 경영자총연합회와 노동조합은 엔지니어ㆍ컨설팅 등 일부 직군에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회사 e메일 발송을 금지하는 협약을 맺었다. 독일도 업무시간 외 e메일 전송을 막는 안티 스트레스법을 추진하고 있다. 결국 문제는 도구가 아니라 쓰는 사람인 셈이다. 스스로 감옥을 만들고 있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화장장과 비행장 그리고 역지사지

수원과 화성의 갈등 양상이 우려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화성 종합 화장장과 수원군공항 이전 문제 말이다. 수원 호매실 주민들의 화성 공동형 종합장사시설 설치 반대가 극에 달하고 있는 반면, 화성시의회는 수원군공항 화성시 이전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등 두 지자체의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화장장과 비행장 문제는 별개로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화성과 수원은 생활권을 공유하고 있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로 합리적인 소통으로 두 문제가 반드시 해결돼야 한다는 점에서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본다. 화성에서 태어나 40년 가까이 살면서 고교시절 수원으로 유학, 20여 년을 수원에서 활동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번 사태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 어느 누구보다 크다. 더욱이 우려되는 것은 정치권까지 가세해 당리당략에 의해 해결 불가 사태로 치닫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경기도가 중재를 약속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문제는 정치권은 한발 물러선 채 양 지자체 및 주민들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으로 합리적인 타협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으로 사료된다. 우선 호매실 주민들은 용인시와 불과 180m 떨어진 영통구 하동에 수원연화장을 운영하고 있는 수원시가 화성 공동형 종합장사시설 설치에 반대할 수 있는 명분이 약하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만 화성시와 수원시는 협약 등을 통해 호매실 주민들이 우려하는 건강 및 환경피해 방지에 최선을 다하고 만일 현실화 될 경우 시설 가동 중지 등을 약속하는 등 호매실 주민들을 안심시켜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오죽하면 종합장사시설 유치를 염원할까 하는 화성시 및 시민들의 절박함도 한번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다. 사업대상지는 수원시와 경계에 있긴 하지만 개발제한구역(GB)으로 묶여 농사밖에 지을 수 없는 전형적인 낙후지역으로 재산권침해를 받아온 매송면 숙곡리 주민들의 고통을 헤아려야 한다. 아울러 국방부와 수원시는 수원 군공항 이전 대상지가 어디로 결정되든 이전지 주변 주민들의 피해 최소화는 물론 이전의 당위성을 납득시키는 것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말이다. 박수철 사회부 차장

[지지대] 노인요양원의 비애(悲哀)

-공고문- 사망일시 : 00년 00월 00일. 성명 : 김 * *. 주민번호 : 24**** - *******. 유품 통장 1개 14K 반지 1개. 상기 물품을 공고일까지 찾아가지 않으면 본원 경비로 처리합니다 얼마 전 지인의 할머니가 계신 노인 치매요양원을 찾았다가 우연히 게시판을 통해 본 내용이다. 공고문 내용을 추론하자면 요양원에서 사망한 고인의 시신을 후손들이 찾아가지 않아 법적 절차에 유품을 처리하거나 미처 유족들이 챙기지 못한 유품을 뒤늦게 알려주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노인복지법상 연락이 불가능한 입소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 유류금품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으며, 장례비용 처리 이후 남은 유류금품에 대해선 민법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한참을 우두커니 요양원 게시판을 보고 있자니 무엇인지 모를 울컥한 감정이 치밀었다. 물론 망자는 필자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분이다. 누구나 저승길로 향할 땐 빈손으로 간다지만 이승에서 구순(九旬)을 넘게 살다 가신 분의 유품이라고는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게다가 유족들이 찾아가지 않은 유품을 알려주는 공고문이 붙은 만큼 망자는 가족 하나 없이 쓸쓸히 장례를 치렀을 것으로 짐작해 봄직했기 때문이다. 너무 부정적인 망상일 수도 있지만 만약에 통장에 넉넉한 액수가 들었거나 금덩어리 값어치의 유산이나 유품이 나왔다면 과연 이런 공고문이 붙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분명 요양원에는 망자의 비상연락처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유족들 중 누군가는 사망사실을 알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고인은 외면 아닌 외면 속에 다시는 못 올 머나먼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도내 노인 치매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경기지역 요양원과 요양병원은 각각 1천340개소와 276개소에 이르고 있다. 이들 요양원 중에는 지금도 위 내용과 같은 공고문이 곳곳에 붙어 있을 것이다. 훗날 공고문의 대상자가 우리 부모 형제이거나 나 자신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씁쓸한 맘을 감출 수가 없는 대목이다. 정이 메마른 삭막한 사회를 대변하듯 가족의미가 상실된 현시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노인요양원의 비애(悲哀)가 아닐까 싶다. 이용성 사회부장

[지지대] 맥아더 죽이기 회고록

1950년. 더글러스 맥아더는 71세였다. 태평양 전쟁의 영웅이며 실질적인 일본의 통치자였다. 현역 미군 가운데 가장 높은 계급이기도 했다. 그가 한국 전쟁의 지휘관이 돼야 함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모두의 기대는 맞아들어갔다. 역사상 최고로 평가되는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했다. 북한군이 퇴각했고 전쟁의 판도는 바뀌었다. 자신감에 찬 그가 기자들에게 말했다. 우리 병사들은 크리스마스까지는 집에 갈 겁니다. ▶그즈음 웨이크 섬에서 맥아더와 트루먼 대통령이 만났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이날 만남에서 맥아더는 장담했다. 중국은 결코 참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예상은 틀렸다. 추수감사절 하루 뒤, 중국이 26만의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했다. 빠른 승리의 기회는 사라졌다. 대신 확전 시나리오와 함께 세계대전 가능성이 짙어졌다. 이미 일본에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했던 트루먼에겐 가장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었다. ▶맥아더의 항명(抗命)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언론을 통해 중국과의 확전 필요성을 주장했다. US 뉴스 앤드 월드 誌에는 트루먼의 지시를 사상 유례가 없는 전쟁 수행상의 걸림돌이라고 공격했다. 대만을 통치하던 장제스를 전쟁에 끌어들여야 한다고도 말했다. 백악관이 군지휘관의 인터뷰는 검열 후에 하라는 대통령령까지 내렸다. 하지만, 맥아더는 이 명령을 수십 번도 더 어겼다. ▶1951년 4월. 결국,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했다. 해임 후 48시간 동안 4만4천통의 전보가 상원에 배달됐는데 이 중 344통을 제외한 나머지가 트루먼을 규탄했다. 상원의원 매카시는 트루먼 측근인 애치슨을 반역자라고 공격했고, 트루먼을 개새끼라고 표현했다. 외교위원회와 군사위원회의 합동청문회가 개최했다. 갤럽 여론조사에서 69%의 지지를 얻고 있는 전쟁 영웅을 해임한 트루먼이 겪은 후유증은 그토록 컸다. ▶맥아더의 해임은 지금도 두 나라에서 정반대로 해석된다. 한국에서는 완전 통일의 기회를 막은 악수(惡手)로, 미국에서는 천방지축 지휘관을 다룬 강수(强手)로. 트루먼은 퇴임 3년 뒤 회고록을 출간했다. 여기서도 맥아더에 대한 풀리지 않은 노기(怒氣)를 드러냈다. 나의 모든 지침을 깡그리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헌법에 의거한 대통령 권한에 대한 도전이었다. 더 이상 그의 불복종을 참아 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보면 미국 대통령들의 회고록은 참회와 반성, 교훈으로 가득하다는 일부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대통령의 시간(이명박 著) 속 자기 합리화, 자화자찬도 그렇게 흔한 대통령 회고록 중 하나일 뿐이다. 호들갑 떨 일이 결코 아니다. 김종구 논설실장

[지지대] ‘하사 아가씨’

지난 주말 여성들만 모이는 어떤 모임이 있었다. 이야기 끝에 자연스레 이슈가 되고 있는 송영근 의원의 하사 아가씨 발언으로 이어졌다. 모임 참석자들은 열을 올리며 부적절한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송 의원에 대해 집중 성토했다. 그리고 송 의원은 국회의원의 자질이 부족한 웃기는 아저씨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송영근 새누리당 의원(비례대표)은 육군 3성 장군에다 기무사령관을 지낸 육군 엘리트 출신이다. 그런 그가 지난 29일 국회 군 인권개선 및 병영문화혁신 특위에서 최근 여군 하사관 성폭행 혐의로 체포된 육군 여단장 사건에 대해 이런 발언들을 했다. 그 여단장이 지난해 거의 외박을 안 나갔다. 40대 중반인데 성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측면을 봐야 한다 전국 지휘관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외박을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가정 관리가 안 되고, 섹스 문제 관리가 안 되는 것들이 문제를 야기시킨 큰 원인 중 하나다. 여단장 문제가 나왔을 때 그 하사 아가씨가 옆에 (하사관) 아가씨한테 얘기했다. 송 의원의 발언에 도종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하사 아가씨가 뭐냐. 여군 하사관을 아가씨라고 보는 관점이 바로 앞선 (성폭행) 사건의 근본 문제점이라고 지적했다. 도 의원의 말처럼 송 의원은 여군을 군인으로 보지 않고 여자로 인식했다. 피해자인 여군 하사를 아가씨라 지칭한 것은 여군 모독이나 다름없다. 이런 성차별적 발언은 군대 내 여군이 처한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단장의 성폭력을 두둔하고 여군을 모욕하는 그의 발언은 잘못된 성윤리 의식과 여군 전체를 모독하는 몰지각한 행태로 비춰진다. 송 의원이 뒤늦게 궁색한 변명을 하고, 군 병영문화혁신 특위 위원직을 사퇴했지만 논란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이유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망언을 하고도 변명에만 급급한 송 의원이 책임을 통감하고 국회의원직을 즉각 사퇴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한국여성단체연합도 해당 특별위원 사퇴로 그칠 일이 아니다. 국회 윤리위원회가 신속한 징계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여군 1만 명 시대를 앞두고 있다. 군은 해마다 늘고 있는 군대 내 성폭력의 심각성을 직시해야 한다. 지도부부터 철저하게 양성평등의식으로 무장하고 성폭력 척결 의지를 담은 강력한 재발방지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광주 조선백자요지

용재총화에는 세종조부터 백자를 전용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세종 때부터 왕실에서 분청보다 백자를 애용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왕실의 백자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왕실용 백자 가마인 분원 관요(官窯)가 경기도 광주에 설치됐다. 조선은 건국 초 전국의 가마를 조사ㆍ정비하고 도자기 번조를 맡는 중앙기관으로 사옹원(司饔院)을 뒀다. 세종 때는 광주지역에 사옹원의 분원을 둬 궁중에서 쓸 도자기 일체를 생산케 함으로써 지방관요였던 광주관요가 중앙기관으로 승격됐다. 사옹원은 궁중 내에서 왕에게 올리는 모든 진상품과 식사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궐내 식사에 소용되는 그릇을 제작하는 일도 맡았다. 백자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생산되는데, 성종에서 중종 연간은 조선백자의 절정을 이룰 만큼 우수했다. 중기 광주의 중앙관요에서 생산된 백자 중에 발색이 아름다운 갑번(匣燔)백자가 늘어났다. 후기의 청화백자는 푸른빛이 감돌 만큼 순백색의 자태에 안정감이 있고 원만하며 선의 흐름이 유연해 기품이 넘쳤다. 광주 분원은 500여년 동안 왕실에 최상품의 백자를 상납하며 조선 도자기 생산의 최대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는 광주의 백토가 품질이 좋고 땔감이 풍부하기 때문이었다. 또 수도인 한양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한강과 그 지류를 이용해 원료와 자기 운반도 수월했다. 퇴촌면 일대와 중부면 번천리ㆍ오전리, 초월읍 무갑리 일대를 비롯해 광주엔 백자가마터로 밝혀진 곳이 300여 곳이나 된다. 광주 전역이 도요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백자 연구의 핵심이 되는 이곳 가마터들은 국가사적 제314호로 지정돼 있다. 경기도가 우리나라 백자문화의 산실인 광주 조선백자요지(朝鮮白磁窯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시동을 걸었다. 김흥식 경기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광주 조선백자요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대응전략 연구보고서를 통해 광주 조선백자요지는 조선시대 백자 도요지로서의 고고학적 유산이라는 유형적 가치와 조선백자 생산기술의 무형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이라고 설명했다. 관청이 사기제작을 위해 설치한 관요 운영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하며, 탁월한 보편적 가치 및 진정성ㆍ완전성 확보가 가능한 조선 도자사 연구에 가치 있는 문화자산이라는 것이다. 남한산성에 이어 광주 조선백자요지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광의 날을 기대해본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투명한 법인카드

경기도청을 6년 넘게 출입하면서 피부로 느낀 가장 큰 변화는 직원들하고의 술자리였다. 또 신참 기자였던 14년전 공무원들을 만나 식사를 하면 으레 술이 들어왔고 점심 시간이지만 취할 정도로 술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경기도를 출입하면서 이같은 풍경을 없어졌다. 다른 출입처들도 마찬가지였고 경제부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출입처와의 식사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직도 국민들의 머릿 속에 공무원, 공기업하면 70ㆍ80년대 개발 시대가 각인되어 있다. 가끔 매스컴에서 비리 뉴스가 터져나오면 일부가 아닌 전체의 모습인 것처럼 비난하기도 한다. 이런 국민들의 변하지 않는 인식은 각종 감사기구의 권한을 강화시켰고 자발적인 청렴이 아닌 강제적인 청렴을 강요하게 하고 있다. 감사 관련 기관들은 징계 수위를 강화하고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한 각종 기법, 제도들을 개발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감사원, 권익위, 각 정부부처의 감사부서에 국회, 지방의회, 기관별 감사실까지 모두 경쟁자들이기 때문이다. 청렴도를 높여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면서 경쟁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민들의 고층을 처리하고 국민의 권리보호 및 구제를 위해 출범한 국민권익위가 최근 도마위에 오르고 있다. 공공기관들의 방만한 경영을 막겠다면서 포장마차나 치킨집, 막걸리집 등에서의 법인카드 사용 금지를 권고했기 때문이다. 말이 권고지 사실상 감사 처분과 같은 수준이다. 아마 이를 어기면 징계도 요구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건은 좀 아니다 싶다. 치킨 한마리, 꼼장어 한접시 금지로 투명한 법인카드 문화를 만들어가겠다는 발상 때문이다. 정부기관이나 공공기관 근처의 치킨집이나 대포집에게는 큰 타격이 될 거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영세상인들만 피해를 볼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투명한 법인카드 문화를 바탕으로 공기업의 방만한 경영을 잡겠다는 정책은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법인카드 사용이 줄어들고 영세상인들의 생계도 투명(?)해질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김동식 경제부 차장

[지지대] 슈틸리케 감독의 ‘매직’

한국 축구대표팀이 27년 만에 2015 호주 아시안컵 축구대회 결승에 진출, 31일 개최국 호주를 상대로 55년 만의 우승에 도전한다.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하는 한국 축구지만 아시안컵 우승의 인연은 1956년 1회 홍콩 대회와 1960년 2회 한국 대회에서 연속 우승한 이후 55년이라는 세월이 경과했다. 그동안 한국은 2002 월드컵 4강 신화,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우승 등 아시아 강호의 명맥을 이어왔지만 아시안컵 우승과는 반세기가 넘도록 인연을 맺지 못했다. 특히, 지난해 브라질 월드컵의 조별리그 탈락으로 국민적 실망감이 커지면서 한국 축구는 다시 외국인 사령탑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 주인공은 독일 출신의 울리 슈틸리케 감독으로, 그는 1970~80년대 스페인 명문클럽 레알 마드리드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했으며 지도자로 스위스와 코트디부아르 대표팀을 이끌기도 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까지 4년간 지휘봉을 맡긴 슈틸리케 감독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55년간 난공불락(難攻不落)으로 여겨진 아시안컵에서의 우승이었다. 모든 여건은 녹록치 않았다. 이동국, 김신욱, 박주영 등 간판 골잡이들이 부상과 부진의 이유로 전력에서 제외되면서 걸출한 스트라이커도 없이 이번 대회에 임해야 했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단 한번도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이정협을 깜짝 발탁해 소속팀 감독조차 놀라게 했다. 모험으로까지 여겨진 그의 선택은 결국 적중해 이정협은 호주와의 조별리그 3차전에서 결승골을 뽑아냈고, 3경기 연속 선발 출장한 이라크와의 4강전서도 결승골을 터뜨리며 슈틸리케의 기대에 부응했다. 이정협의 성공 신화에 축구팬들은 2002년 월드컵에서 무명의 박지성을 발굴해 세계적인 스타로 키워낸 거스 히딩크 감독을 연상한다. 하지만 체력에 바탕을 둔 히딩크식 축구에 비해 다양한 전술적 변화를 통해 실리축구를 구사하는 슈틸리케 감독의 지도력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독일과 스페인에서 선진축구를 경험한 슈틸리케 감독은 팀내 상황과 선수들의 마음을 읽는 안목에다가 경기 결과에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않는 이성적인 판단으로 대표팀을 연승으로 이끌어 한국 축구팬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그가 아시안컵 우승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는 매직을 기대하는 축구팬들에게서 지도자의 자질과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느끼게 된다. 황선학 체육부장

[지지대] 범근·두리 父子의 마지막 질주

2008년 가을 어느 날. 차범근 감독이 사무실에 들렀다. 정규리그 우승에 대한 인사차 방문이었다. 평소 말수가 적기로 유명한 그다. 방송에서 보여지는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젊은 시절 건방지다는 평이 따라다녔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차 감독이 꽤 긴 시간을 사무실에 머물렀다. 함께 방문했던 삼성 블루윙즈 오근영 당시 단장은 그날의 모습을 아주 특별한 기억으로 지금도 증언한다. ▶분데스리가에서 대단했잖아요. 98골을 넣었는데 PK는 한 번도 안 차셨죠. 각도가 없는 곳에서의 골도 여러 번 있었고. 덕담(?)으로 던진 이 말에 차 감독이 윗옷 단추를 풀어 제쳤다. 아니, 축구를 좀 아시는 거 같은데요. 이어 모두들 내가 독일에서 실패할 것이라고 했다는 얘기부터 축구 인생에 대한 자랑을 이어갔다. 차범 근이냐 김주성이냐는 경쟁도 있었죠라는 질문에는 익살스럽게 흥분까지 했다. 주성이는 나한테 안 되지. 무슨 얘기를. ▶정치를 하실 생각은 없나요라고도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정치 유혹이 왜 없었겠어요. 여러번 있었죠. 안 해요. 축구인이 왜 정치를 합니까. 실제로 그랬다. 1992년 1월 8일자 신문에 실린 기사다. 차범근 프로축구 현대 감독이 14대 총선에 출마할 것으로 알려졌다정주영 전 현대 그룹 명예회장으로부터 지난해 말 신당 입당과 총선 출마를 권유받았다이에 앞서 민주당으로부터도 공천을 전제로 입당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한 바 있다. 최고라는 자부심과 축구가 전부라는 고집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던 기억이다. ▶그 차범근이 검색 순위 상위로 돌아왔다. 아들 차두리의 폭풍 드리블 이후다. 우즈베키스탄전에서 차두리는 60m를 치고 달려 골을 만들었다. 경기 뒤 차범근이 야, 내가 하던 걸 네가 하냐며 좋아했다고 한다. 사실 차범근의 전성 시절 30~50m 드리블은 흔한 일이었다. 동영상 속 차범근의 질주는 차두리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그래서였을까. 차두리를 통해 차범근을 추억하려는 검색어가 인터넷을 달궜다. 차범근과 차두리 허벅지 차범근 전성기. ▶한국 축구가 27년만에 아시안컵 결승에 올랐다. 모처럼 국민들이 웃고 있다. 그 기쁨의 중심에 차씨 부자가 있다. 35세 아들은 나이를 잊고 질주한다. 62세 아버지는 추억을 담아 응원한다. 그리그 그 아들이 31일 마지막 경기를 한다. 1972년 아버지부터 이어온 차씨 부자의 국가대표 역사가 이제 막을 내린다. 국민을 행복하게 했던 43년이다. 모두들 고마워한다. 결승전 결과는 상관없다. 차씨 부자의 외길 인생을 향한 기립박수는 이미 준비돼 있다. 김종구 논설실장

[지지대] 투명성 보고서

인터넷 포털 네이버와 다음카카오가 개인정보 보호와 관련한 투명성 보고서를 냈다. 국내 처음으로 이용객들의 관심이 높다. 투명성보고서는 세계적으로 정부기관이 인터넷기업이나 통신사에게 수사 등의 목적으로 이용자 정보나 콘텐츠 삭제 요구 등을 요구하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작됐다. 구글은 2010년 전세계 정부기관들이 요구한 데이터 검열 요청의 범위와 정도에 대해 조명한다는 취지로 투명성보고서를 처음 발간했다. 애플, 페이스북, 트위터, 에버노트, 마이크로소프트, AT&T 등 외국의 대표적인 인터넷기업과 통신사도 최근 2~3년 사이에 이 보고서를 냈다. 투명성보고서는 인터넷기업의 새로운 규범이 되고 있다. 네이버와 다음카카오의 투명성보고서 발간도 이런 흐름에 동참한 것이다. 이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수사당국의 압수수색영장 요청과 집행 건수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카카오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카카오에 대한 압수수색영장 집행 요청은 3천864건으로 2년 전에 비해 5배 가량 늘어났다. 감청 요청은 지난해 81건으로 2년 새 두 배 늘었다. 네이버도 압수수색영장 요청과 집행 건수가 2012년 1천487건에서 2014년 9천342건으로 6배 이상 증가했다. 국민생활이 온라인과 모바일로 옮겨가고 있는 현실에서 사이버 검열이 무분별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은 그동안 범죄 수사에 필요한 범위를 훨씬 넘는 개인정보와 대화ㆍ통신 내용을 확보해왔다. 대상과 범위, 기간 등을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영장을 청구해왔다. 개인정보 보호나 인권침해 위험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법원도 마찬가지였다. 수사기관이 요청하면 엄밀하게 따지지 않고 그대로 발부해줬다. 포털이나 통신사도 자진해서 정보 제공에 협조해왔다. 이런 이유로 지난해 9월 카카오톡 사용자 수백만명이 독일의 텔레그램으로 옮겨가는 사이버 망명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투명성보고서는 국가기관의 광범위한 인터넷 개입을 수치로 보여줌으로써 국가기관에 압력을 가하고, 이용자들에겐 권리침해의 위험성을 알려주며, 인터넷기업엔 이용자 보호를 위해 내적 규율을 강화한다. 다음카카오와 네이버는 단순히 과거 통계만 보여줄 게 아니라 앞으로 이용자 보호를 위한 자율규제 방안 등을 담아내야 한다. 정부도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법과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청년 니트족

니트족(NEET族)은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청년 무직자를 뜻하는 신조어다.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줄임말이다. 학생도 아니고 직장인도 아니면서 교육이나 직업 훈련을 받지 않고 일도 하지 않는 무업자(無業者)들이다. 특히 10대 후반에서 30대 사이의 미혼 취업인구 중 취업에 대한 의지가 없는 이들을 가르킨다. 취업에 대한 의욕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일할 의지는 있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실업자나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는 프리터족과는 구별된다. 1990년대 경제상황이 나빴던 영국 등 유럽에서 처음 나타났으며 일본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고용환경이 악화돼 취업을 포기하는 청년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니트족도 증가했다. 한국 사회에도 오래전 니트족이 등장했다. 2005년 현대경제연구원은 한국경제주평을 통해 2004년 한국의 니트족은 18만7천여명이며, 2015년에는 85만3천900여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니트족은 급속도로 증가해 전경련이 2009년 발간한 청년 니트 해부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상반기에 벌써 113만명에 달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얼마 전 펴낸 청년 니트족 특징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청년 니트족이 163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니트족 가운데 구직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경우는 56.2%에 달했다. 이들 비구직 니트족의 절반 가까이는 육아나 가사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그냥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니트족의 취업 경험을 분석해본 결과 상당수가 질 나쁜 일자리에서 이탈한 것으로 나타났다. 42%는 취업을 해본 적이 전혀 없으며, 취업 경험이 있어도 1년 이하 계약직이나 일시 근로 등을 겪은 비중이 일반 청년취업자에 비해 훨씬 높게 나타났다. 미취업 기간이 1년 이상인 장기 니트족은 42.9%에 이르고 있다. 소득이 없는 니트족은 소비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늘어날수록 경제의 잠재성장력을 떨어뜨리고 국내총생산도 감소시키는 등 경제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장기적으로는 국가 경제에 부담을 주고 빈곤층 증가와 중산층 붕괴 같은 사회문제를 낳을 수 있는 경제 불안 요소다. 청년 니트족을 취업자로 전환시킬 수 있는 맞춤형 고용대책이 시급하다. 비구직 니트족에겐 직업체험 기회를 확대해 직업의식을 함양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동시조합장 선거

선거때마다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농ㆍ축협, 수협, 산림조합의 잘못된 선거 관행을 바로잡고자 올해 처음으로 경기지역 177곳을 포함해 전국 1천364곳에서 오는 3월11일 동시 조합장 선거가 치러진다. 돈 선거로 통용되는 각종 불법 행위를 사전에 차단한다며 선거를 위탁 받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강력한 선거 지침을 내놓았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현직 조합장이든 출마를 준비 중인 후보자이든 간에 안된다는 지뢰밭을 건너뛰어야 선거 레이스를 완주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타 선거와는 달리 예비 후보 등록기간이 없다. 또 선거운동기간(2월26일~3월10일)에 후보자 본인 이외에는 누구도 선거운동에 나설 수 없다. 특히 토론회와 연설회 등 실질적으로 후보를 검증할 수 있는 선거운동 방식도 이번 조합장 선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선거를 준비 중인 잠재적 후보군 사이에서 현직만 유리한 선거라는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깜깜이 선거로 전락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다양한 방식으로 후보자의 손발을 묶어 조합원들조차 누가 선거에 나왔는지 그 사람이 가진 비전은 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반면 기대되는 측면도 있다. 조합장 선거는 돈 잔치라는 오명을 어느 정도 씻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선관위는 선거와 관련해 금품을 받으면 과태료 최고 3천만원, 식사대접의 경우도 금액의 최대 50배의 과태료 부과, 위법행위를 신고하면 최대 1억원의 포상금을 주겠다고 천명했다. 물론 이 같은 강력한 지침에도 불구하고 불법 선거 방식을 택한 이들도 있긴 하다. 이달 20일 기준 13건(고발 5건, 경고 8건)의 위법행위가 적발됐다. 하지만 여느 조합장 선거보다는 위법행위 건수가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대와 우려. 이번 동시조합장 선거가 깨끗하고 공정하게 치러져야 기대는 조합원들에게 즐거운 현실이 되고, 우려는 괜한 걱정으로 끝나지 않을까. 김규태 경제부 차장

[지지대]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배우 김혜자씨가 월드비전과 함께 아프리카 국가들을 중심으로 전 세계의 아동을 도우며 겪은 체험담을 엮어 펴낸 책 제목이다. 빈곤과 굶주림에 피골이 상접해지고 삶의 의욕조차 잃은 아이들을 보면서 그녀는 전쟁으로도, 노동착취로도, 부(富)로도, 심지어 꽃으로도 아이들에게 어떠한 고통과 아픔을 주지 말라고 호소했다. 왜 그랬을까? 전 세계 아이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 미래 그 나라의 동냥이자 세계의 동냥으로서 그 존엄성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헌데, 작금의 우리 아이들의 실상은 어떤가. 인천을 비롯한 전국 곳곳의 어린이집이 아동폭력과 학대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밀치고 꼬집고 하는 것은 약과다. 엊그제 인천에서 공개된 동영상은 그야말로 충격이다. 주먹으로 아이를 구타하는 장면은 모든 어머니, 아버지를 공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교사나 원장은 그런 의도가 없었다, 몰랐다, 주의를 줬는데의 핑계나 회피성 발언으로 일관해 아이들을 키우는 어른이 맞나하는 개탄을 하게 한다. 그들에게는 혹시 아이들이 돈벌이 수단에 불과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 마저 든다.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라고 했거늘 ▲언제나처럼 일이 터지자 정부나 지자체가 뒤늦게 아동폭력에 대한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교사의 처우개선이니,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니, CCTV 설치니 등등.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자,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다.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다르지 않게, 어쩌면 똑같은 형태다. ▲그렇다고 하지 말라 할 수도 없다.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그나마의 대책이 없거나 또다시 슬그머니 넘어갈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왕할 거면 제대로 해야 한다. 특히 아동폭력과 학대를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차원에서 이번만큼은 더더욱 그렇다. 망설이지 말자. 아이를 꽃으로라도 때려야겠다는 의식과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어른들은 이번 기회에 아동교육 현장에서 즉각 퇴출시키자. 정일형 지역사회부 부국장

[지지대] 담배 애국심

양담배, 高級化粧品外國衣服(고급화장품외국의복) 등이 혹은 商街(상가)에서 혹은 行商人(행상인)을 통하여 暗去來(암거래) 되고 있다 516 革命(혁명)의 가장 두드러진 成果(성과)의 하나가 바로 特定外來品(특정외래품)의 團束(단속)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消費生活(소비생활)에 있어서의 事大主義根性(사대주의근성)은 아직도 沒知覺(몰지각)한 特殊屬(특수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매우 서글픈 생각이 앞선다.-1963년 4월 15일 자 동아일보 사설-. ▶20년이 흐른 1984년 2월, 같은 신문에 이런 기사가 또 게재됐다. 집권당인 민정당이 일부 의원의 양담배 적발로 시끌벅적하다. 정례당직자간담회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한 끝에 당 소속 의원 가운데 양담배를 피운 의원이 있는 것은 유감이며 자숙의 계기로 삼아야겠다고 결정했다고 김용태 대변인이 발표했다. 당 소속 하모 의원이 양담배를 피우 다 적발된 데 대한 기사다. ▶그로부터 또 20여년이 흐른 2000년대. 이제 외국산 담배 수입은 자율이다. 하지만, 뿌리 깊은 담배 애국심은 여전하다. 일본의 독도(獨島) 망언에 맞서는 첨병으로 담배가 등장했다. 터미널 매점에서 뒷골목 수퍼까지 독도망언, 교과서 왜곡으로 일본담배 마일드세븐을 판매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내걸렸다. 마일드세븐 불매 운동이 국민적으로 일어났다. 결국, 제조유통회사인 JTI코리아는 2014년 7월 지점 통폐합, 매점 정리라는 최악의 구조조정에 착수해야했다. ▶2015년. 그랬던 담배 애국심이 흔들리고 있다. 말보로, 팔리아멘트(한국 필립모리스)와 던힐, 보그(BAT 코리아)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마일드세븐 제조 회사였던 JTI 코리아의 카멜까지도 없어서 못 판다. 국산 담뱃값이 인상되면서다. 국산 담뱃값이 1월 1일부터 2천원 인상됐다. 반면 외국 담배들은 인상 폭을 적게 해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상황이 녹록지 않다. 업계에서는 KT&G의 아성이 무너질 것 같다고 전망한다. ▶양담배의 질(質)가격(價格) 공세에도 반세기를 버텨오던 담배 애국심이다. 단순히 가격 경쟁력만으로는 지금의 상황이 설명되지 않는다. 세금 인상, 공공요금 인상, 연말정산 삭감. 온통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터는 정책뿐이다. 그런 불만이 거침없는 양담배 구매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애국심의 출발은 정부에 대한 믿음과 사랑 아니었던가. 양담배로 몰리는 지금의 현상을 극명한 민심의 척도로 받아들여야 한다. 김종구 논설실장

[지지대] 식구(食口)의 해체

식구(食口)가 뭐여, 같이 밥 먹는 입구멍이여. 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부하들과 밥상을 앞에 놓고 마주한 주인공 병두(조인성)의 얘기다. 밥상은 각자 바쁜 가족들을 한데 불러 모아 서로의 얘기를 꺼내놓게 하는 소통의 매개체이고, 가정이 사회의 기초 구성단위로 따뜻한 유대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었다. 밥 짓는 냄새, 김이 피어오르는 주방 풍경은 편안하고 안락한 가정을 상징하는 기호 같은 것이었다.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이라는 식구(食口)의 의미가 퇴색하고 있다. 점심은 물론 아침과 저녁 식사도 가족과 함께 못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식구는 어딘가 어색한 느낌마저 든다. 보건복지부가 남녀 7천여명을 대상으로 한 2013년도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가족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는 사람의 비율은 46.1%로 전체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아침 가족동반식사율은 지난 2005년 62.9%에서 2010년 54.7%, 2012년 51.3%로 계속 낮아지다 2013년에 50% 아래로 떨어졌다. 저녁 가족동반식사율도 2005년 76.0%, 2010년 68.0%에 이어 2013년 65.1%로 줄었다. 가족 구성원이 대개 학교나 직장에 있는 시간인 점심 때의 동반식사율은 14.4%로 가장 낮았다. 또 도시에 살수록 가족과 식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족과 함께 식사하지 않는 이유를 따로 조사하진 않았으나 가족 구성원들의 외부 활동이 과거보다 활발해지고 혼자 사는 가구도 점점 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 현상은 유통가에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내고 있다. 가정에서의 따뜻한 식사를 그리워하는 이들을 겨냥해 집밥을 내세운 상품이 속속 나오고 있고, 낯선 사람들과 모여 식사를 하는 소셜 다이닝도 젊은층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 집 사는 가족끼리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는 자리를 자주 마련해 식구의 의미를 되살리는 게 가족공동체 회복이다. 밥상머리 대화에선 구성원간 소통과 따뜻한 가족애를 느낄 수 있고,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인성도 살찌울 수 있다. 가족간 식사는 단순히 음식을 먹는 행위를 넘어선다. 현대화ㆍ도시화ㆍ산업화를 받아들이면서 가장 먼저 버린 것 가운데 하나인 식구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잃어버린 밥상을 챙겨보도록 하자.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2015 세계 책의 수도 인천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의 혈의 누(1906)에는 윤선(輪船)으로 가득한 인천항의 모습이 나온다.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인천항에 떠있는 윤선을 처음 본 소감을 이렇게 적고있다. 옥련의 눈에는 모다 처음 보는 것이라. 항구에는 배 돛대가 삼대 들어서듯 하고 저자거리에는 이칭 삼칭집이 구름속에 들어간 듯 하고 지네같이 기어가는 기차는 입으로 연기를 확확 뿜으며 풍우같이 달아나고 넓고 곧은 길에 왔다갔다하는 인력거 바퀴소리에 정신이 얼떨떨한데. 신소설 작가 이해조는 제국신문에 연재된 빈상설에서 개항으로 변한 인천을 여기가 어디냐? 우리나라인지 타국인지 모르겠구나라고 했다. 주요섭의 장편 구름을 잡으려고는 조선인 최초로 하와이로 떠난 이주노동자들의 역사를 기록한 소설인데, 근대화의 요람이 된 제물포항을 위험한 출입문으로 표현했다. 인천은 개항기 때부터 문인들의 작품에 자주 등장했다. 시대 흐름 따라 다른 어느 도시보다 다이내믹한 변화를 겪어왔기에 문학 속 단골 소재가 돼 다양하게 그려졌다. 한국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은 인천과 연관된 3편의 시를 남겼다. 김기림은 제물포풍경이란 시에서 인천항을 부끄럼 많은 보석장사 아가씨로 묘사했다. 최찬식의 해안, 염상섭의 이심, 이효석의 주리야, 이광수의 사랑에서도 인천이 서정적으로 그려졌다. 전쟁 직후 현대문학에도 인천이 자주 등장한다. 분단과 실향의 아픔을 그린 바닷가 소년 포구의 황혼,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과 투쟁을 그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쇳물처럼 내일을 여는 집, 이주민들의 소외된 삶을 그린 중국인의 거리 중국어 수업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수많은 문학작품 속의 배경이 된 인천이 유네스코 선정 2015년 세계 책의 수도가 됐다. 유네스코는 1995년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4월23일)을 지정한 이후 2001년부터 매년 세계 책의 수도를 선정하고 있다. 현재까지 14개국 14개 도시가 책의 수도로 선정돼 독서ㆍ출판 진흥과 저작권 보호를 위한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15번째 책의 수도 인천시는 모두를 위한 책, 책으로 하나 되는 세상(Books For All)이란 비전 아래 올 한해 특색있는 사업들을 진행한다. 인천이 교육ㆍ문화도시로 거듭나고 독서ㆍ출판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하길 기대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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