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아침] 청룡의 해 단상

갑진년 2024년을 청룡의 해로 풀어서 여러 생각을 해 보자. 동양의 음양오행 사상인 목, 화, 토, 금, 수 오행 중 목(木)은 청록색, 용, 봄, 오전, 좌측, 동쪽이 포함돼 있어 좌청룡이라 부른다. 그래서 풍수지리에서는 좋은 터를 표현할 때 좌청룡 우백호라는 표현을 한다. 용 중에서도 청룡이 최고며 청룡은 동쪽을 수호하는 신성한 동물로 창조, 생명, 신생(新生)을 의미한다. 용을 뜻하는 순우리말은 미리라고 한다. 미리내(은하수)도 용천(龍川)이라는 의미다. “개천에서 용 난다.” 백성들에게는 큰 희망과 성취의 상징이다. 그리고 청룡은 높이 솟아오르는 산봉우리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유로움을 상징한다.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며 성장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청룡은 우리에게 그러한 도전의 의미를 상기시키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청룡은 또 자유와 창의성을 상징한다.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문화에서 용이 차지하는 부분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왕권의 권위와 보호로 궁궐에는 용을 조각하거나 그렸다. 사찰의 닫집에도 부처님 위에 용을 조각했다. 또 나라에 가뭄이 들면 용신에게 기우제를 지내고, 바다에선 용왕에게 풍어와 안녕을 기원했다. 왜구를 물리친 거북선의 용 머리, 천개가 넘는 용(龍)자가 들어간 지명, 용은 현실엔 없지만 살아있어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함께해 온 희망의 동물이다. 올해 한국경제인협회는 2024년 새해를 맞아 간절하게 바라면 이뤄진다는 뜻의 심상사성(心想事成)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소개했고, 중소기업의 사자성어 운외창천(雲外蒼天)은 어두운 구름 밖으로 나오면 맑고 푸른 하늘이 나타난다는 뜻으로 희망을 잃지 않고 난관을 극복하면 좋은 미래가 있다는 의미다. 교수신문이 교수들의 설문으로 사자성어 견리망의(見利忘義)를 선정했는데 선정된 2024년 사자성어는 이익을 보고 의리를 잊는다는 뜻으로, 마땅히 좇아야 할 바른길을 등지고서 자신의 편에 유리한 방향으로 기꺼이 나아가는 현 세태를 고발하는 모습이다. 즉, 국민이 바라는 갑진년 청룡의 새해는 희망을 잃지 않고 간절히 소원을 빌며 노력하자는 의지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정의를 버리고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이 시대를 걱정하는 모습이다. 국가 발전과 번영을 위해 밤낮없이 고생하고 걱정하는 국민을 위해서라도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청룡의 기운인 창조, 생명, 신생으로서 민족 공동체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서로 욕심부리고 싸우지 말고 아름다운 소통과 관용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인천의 아침] 가족이 흔들린다

가족이 흔들린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개인주의, 고령화, 저출산, 이혼율 증가 등으로 가족의 분리와 해체 현상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사람들이 결혼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여기면서 결혼율이 감소하고, 이는 저출산으로 이어졌다. 또 이혼율 증가로 한부모 가정이 늘어나고, 교육이나 직업 등의 이유로 1인 가구가 늘어가며 가족이 분리되고 해체되고 있는 추세다. 가족은 운명적인 인연과 혈연으로 맺어진 삶의 보금자리다. 주로 부부(인연)를 중심으로 한, 친족(혈연)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이거나 그 구성원을 말한다.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뤄진다. 가족은 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서 우리 삶과 가장 가까운 사회 집단이다. 가족은 인류 역사와 함께 그 형태와 기능이 변천해 왔다. 근대 이전 농경사회는 거의 대부분의 기능이 가족에 집중돼 있는 대가족 형태였다. 그러나 근대화와 함께 농경사회의 생산단위적 성격이 많이 희석되면서 가족의 의미는 사회 문화적 성격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되고, 핵가족이 가족의 주요 유형으로 자리잡게 됐다. 더욱이 오늘날 급격히 가족의 분리와 해체가 진행되면서 기초적인 인간관계의 장이라는 사회 문화적 역할조차 퇴색되며, 겨우 숙식 정도의 원시적인 기능만 건재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됐다. 이제 가족의 구성원들이 각자도생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가족은 자녀 출산이라는 본래적인 기능을 통해 사회가 필요로 하는 구성원과 노동력을 재생산해 왔다. 또 양육과 보호 기능을 수행하며, 사회화 기능을 담당한다. 또 가족은 구성원에게 경제적·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며 삶의 보금자리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러나 가족 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가족의 기능도 변화하고 있다. 가족 세대 간의 단절로 부모와 자녀 사이는 점점 멀어지며 가족 결속력과 정서적 유대가 줄어들고 있다. 그런 한편 유교적이고 가부장적인 권위가 사라지고 민주적인 가족관계가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권위·지배·복종 등의 가치에 기반한 수직적 방향에서, 자유로운 인간 간의 대등한 결합·인격적 유대라는 가치를 우선에 두는 수평적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족의 분리와 해체 현상을 위기로 보고 전통적 가족 관계와 기능의 회복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이제 그런 현상을 수용해야 할 사회적 변화로 바라보면서 이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시대에 접어든 오늘날, 가족의 형태와 기능은 또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아무튼 가족이 흔들리면 사회도 국가도 흔들리게 된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가족만 한 보금자리와 안식처가 또 있겠는가.

[인천의 아침] 우리말 바로 쓰기 계획

새해 들어 인천시교육청이 ‘우리말 바로 쓰기 기본 계획’을 발표했다. 올해부터 시교육청이 추진하는 정책이나 사업에 쉽고 고운 우리말을 쓰겠다는 내용이다. 그린스마트 미래학교, 학부모 에듀 페스티벌, 캐릭터 굿즈 이미지 공모전.... 이처럼 굳이 안 써도 될 외국어나 어려운 한자 등을 쓰지 않고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말을 쓰겠다는 말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교육을 책임진 기관이 우리 말과 글을 살리는 데 나선다고 하니 무척 다행스럽고 고마운 마음이다. 하지만 그동안 몇몇 지방자치단체가 이와 똑같은 발표를 했다가 얼마 못 가 흐지부지한 사례들을 보아왔기에 “혹시나 또...” 하는 걱정도 든다. 외국어를 많이 써야 ‘국제화·세계화 시대’에 발맞추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청소하는 날’을 ‘클린업 데이’라 하고, ‘깡통 분리수거 행사’라 하면 될 것을 ‘캔 크러시 챌린지’라고 부르는 식의 일들이 거듭 벌어진다. 따로 설명을 듣지 않고 이런 이름들이 무슨 내용인지 한 번에 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말과 글은 소통(疏通)이 핵심이다. 특히 시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공공기관이나 업체들은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쉬운 말과 용어를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야 시민들이 그 내용을 잘 몰라서 손해를 보거나, 잘 지키지 않는 일이 안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반대로 가고 있다. 앞서 말한 구체적 사례들뿐 아니라 경찰·검찰·법원에서 쓰는 난해한 법률 용어, 죽을병에라도 걸린 것인가 하고 겁부터 먹게 만드는 병원 용어, 읽다가 지칠 지경인데도 핵심은 알기 어려운 보험이나 금융상품의 약관(約款)을 보라. 이들은 모두 시민들의 일상에 깊이 관계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어렵고 아리송하게 표현하는 것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책임을 고스란히 피해자인 시민에게 덮어씌우려는 꿍꿍이속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쉬운 말과 글을 쓰도록 사회 환경을 바꾸는 일은 시민 각자가 자신의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국제화·세계화’도 각자 다른 언어와 문화를 잘 발전시키고 서로 존중하면서 조화롭게 섞여 사는 것이지, 내 것을 버리고 남의 것을 흉내 내는 일이 아니다. 말과 글이라는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문화 자산을 스스로 낮춰보고 남의 것을 무작정 숭배하는 얼빠진 사람들이 어떻게 국제적인 도시와 품격 있는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이번 시교육청의 계획이 잘 지켜지고, 다른 곳으로도 널리 퍼져나가길 바라는 마음이 사뭇 간절하다.

[인천의 아침] 본인 말고, 국민 살리는 운동 좀 하자

옛날 초등학교 운동회엔 만국기가 펄럭이고 아이들이 신나서 뛰어다녔다. 한동안 운동권 폐해가 입에 오르내렸다. 대체 본인 말고 누구를 위한 운동인가. 3∙1 독립운동도, 새마을운동도, 식목일의 나무심기운동도 모두를 위한 것이었는데, 40년 전 독재 타도 몇 년 했다고 몇십 년 공치사만 읊조리니, 제발 본인 말고 국민 살리는 운동 좀 하자. 선거철이 왔다. 본인 뽑아달라는 현수막이 즐비하다. 해킹 선거 조작 막으려면 전자개표기 쓰지 말고 투표관리관 개인 도장을 찍어야 한다 해도, 선관위는 사람이 기다리니 도장을 안 찍겠단다. “기다리니 사고 나더라도 교통신호 무시하고, 조작돼도 도장 안 찍겠다”는 억지에 야단치는 정치인도 별로 없다. 그렇다면 주인인 국민이 외쳐야 한다. 위조지폐 만들 듯 위조 투표지를 만든다면, 한 사람의 투표지는 휴지가 된다. 투표권은 시민 한 사람의 값이다. 선출 당사자인 정치인이 먼저 선거제도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본인 당락에만 관심이 있다. 게다가 평등을 주창하던 이들에게 1인 1표의 투표권은 목소리를 더 높일 주제건만 아무 소리도 없다. 사전투표와 전자 개표는 문제가 많고 투표관리관 도장은 꼭 찍어 공정 선거를 해야 한다는 한동훈 위원장의 관훈토론에도 변변한 반박조차 없다. 운동권의 타락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과거 운동은 농민운동이든 환경운동이든 민주화운동이든, 저만 잘되자는 운동이 아니라 남을 위하겠다는 운동이었다. 모든 국토가 녹화되자 산림녹화운동은 생활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다 환경운동이랍시고 태양광 사업은 자신이 독점하겠단다. 어디에서나 획득한 기득권을 내주기는커녕 저만 자리 차지하겠다는 정치꾼 운동만 난무하니, 나라에 거짓말만 가득하다. 국회의원의 특권 폐지 운동이 절실하다. 산동네 비탈 아래로 차가 내려가는데, 폐지를 담은 인력거가 골목 옆으로 비켜선다. 승용차에 탄 의원이 언덕 아래의 수레 노인에게 ‘세상에 위아래가 없다’라고 평등을 팔면서, 본인 뽑아 언덕 위에 다시 세워 달란 모양새다. 땀 흘려 담은 재활용 폐지마저 힘겹다. 공명선거가 무너지면 주권이 무너진다. 투표관리관 도장 찍으란 현행법도 무시하고, 형상복원용지 쓴다고 뻔한 거짓말도 하고, 채용 비리가 있어도 검찰수사조차 안 받으니, 이야말로 입법∙사법∙행정부를 무시하는 선관위의 횡포 아닌가. 국민이 최고 헌법기관이다. 본인 뽑아 달라는 출마자분들, 제발 비밀스러운 사전투표자 수를 국민도 알 수 있게, 종이 사전선거인명부를 투표소마다 쓰게 외쳐주소.

[인천의 아침] 우정 어린 친구, 신이 내린 선물

살아가는 데 참 정겹고 소중한 단어 하나, ‘친구’(親舊). 오래도록 가까이 친하게 사귀어 온 사람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함께 어울리며 친해져 사실상 반쯤 가족인 인간관계가 친구요 친구관계다. 친구관계는 또래로서 지나온 삶의 체험과 환경이 유사하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공유영역이 넓을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인간관계 중 가장 자유롭고 편안한 관계다. 그러나 관계를 맺고 푸는 것은 각자의 자유이기에, 친구관계는 쉽게 형성되지만 반대로 구속력이 적어 해체되기도 쉽다. 따라서 친구관계는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약화되고 파괴되기 쉬운 인간관계이기도 하다. 여러분에게 친구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 자신의 주변에 사람이 많다고 해서 그만큼 친구가 많은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친구’라는 단어를 너무 남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주변의 사람들, 특히 좋아하는 사람들과 보내곤 하지만, 그들이 꼭 친구일 수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우정’(友情∙ Friendship)이다. 우정은 친구 사이에 나누는 정신적 유대감을 이른다. 우정은 단순히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이나 단순한 친구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 친구 사이에 진심과 진실로 빚어지는 것이 우정이요, 그 우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 ‘진정한 친구관계’다. 물론 우정 어린 친구 사이에도 갈등과 다툼이 있을 수 있다. 아무리 친구라도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진정한 우정을 위해서는 친구관계가 기본적으로 다 같으면서도 또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편견과 차별이 아닌 ‘차이’다. 그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다. 각자의 개성과 특성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자기와 친구에 대한 바른 인식과 수용을 통해 자신과 친구를 깨달아 가야 한다. 그리고 그 차이를 넘어서는 인간적인 호감과 유대와 신뢰가 ‘진한 우정’으로 묶여지지 않겠는가. 친구와 불편 없이 친밀히 소통하는가? 친구와의 소통은 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할 때, 그리고 친구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할 때 제대로 이뤄진다. 긍정적 자기개념으로 자신과 친구를 제대로 인정하며 사랑할 때 제대로 소통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그 바탕 위에서 진정한 우정이, 진정한 친구관계가 성립되지 않겠는가.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드셨다고 한다. 또 신은 모두를 치유할 수 없기에 우리에게 우정 어린 친구를 만들어 주셨다고 한다. 그 우정 어린 친구, 신이 내리신 선물이요 축복이다.

[인천의 아침] 청룡의 해, 아암도 유감

송도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연수구의 청량산(淸凉山)은 불교로 인해 이런 이름을 갖게 됐다. 중국의 4대 불교 명산(名山)으로 꼽히는 산시(山西)성 오대산(五臺山)이 그 연결고리다. 이곳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머무는 성스러운 산으로 대접받는데, 다른 이름이 바로 청량산이다. 불교에서 문수보살은 용(龍)의 화신(化身)이며, ‘최고의 지혜’를 상징한다고 한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이곳에서 7일 동안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한 뒤 문수보살을 만났다고 전해온다. 이어 그는 신라로 돌아와 우리나라 오대산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이 산을 문수보살 신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 뒤 우리나라에서도 문수신앙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곳곳에 문수산이나 문수바위 같은 이름이 생겼고, 청량산이라는 이름도 함께 퍼졌다. 이곳 연수구의 청량산에 이 이름을 처음 붙인 사람은 고려시대 공민왕의 왕사(王師)였던 나옹화상이라는 얘기가 있다. 이와 달리 중국 당나라 때 징관(澄觀)이라는 고승(高僧)의 두 제자가 스승의 예언에 따라 이곳에 와서 붙인 이름이라는 전설도 있다. 한편 우리 자료인 ‘동국여지지’에는 “사람들이 이곳 청량산을 청룡산이라고도 부른다”는 내용이 있다. 문수보살이 용의 화신이니 청룡산으로도 불린 것이다. 그리고 청룡산 아래에 있는 작은 섬 아암도는 이 청룡이 뱉은 여의주라는 전설을 갖고 있다. 이 아암도는 1980년대까지 가족들의 나들이나 학생들의 소풍 장소, 특히 연인들의 데이트 명소로 큰 인기를 끌었다. 썰물 때면 바닷물이 빠진 개펄 위 길을 따라 송도유원지에서 이 운치 있는 섬을 오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했으니 나이가 좀 든 인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암도에 얽힌 아스라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 이 섬 앞으로 스치듯이 해안도로가 놓이고, 2011년에는 송도유원지마저 문을 닫으면서 아암도는 이제 시민들이 거의 찾지 않는 버려진 섬이 돼 버렸다. 그 옆에 작은 공원이 있다지만 해안도로를 오가는 차량들 때문에 너무 시끄럽고 위험해 섬에 가기도, 섬에서 무엇을 하기도 어렵다. 무릇 좋은 도시는 이야기를 품고 산다. 그리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에 그럴듯한 전설까지 안고 있는 아암도는 그런 면에서 인천이 지금처럼 내버려두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 주위에 사람들이 편하게 찾아와 쉬고, 작은 공연이라도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다면 큰 역할을 하지 않을까. 정말 고맙게도 섬이 아직 제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는데....

[인천의 아침] 투표관리관, 투표용지에 개인도장 찍어야

작년 말 KBS 9시 뉴스에 따르면, 프랑스는 2003년 전자투표를 도입했다가 2017년부터 대부분 기표소 직접 투표와 수 개표로 전환했고, 독일은 연방헌법재판소가 전자 투∙개표기 사용이 위헌이라 판결하며 2009년부터 수 개표로 전환했다. 중국의 해킹을 우려한 대만은 물론 캐나다, 스위스, 스웨덴도 전자 투∙개표 시스템을 폐지하고 수 개표로 전환했다. 해킹한다는 것은 무단으로 컴퓨터 시스템에 접근하여 제멋대로 기록을 빼가고 조작하는 것이다. 영토 대신 전산망을 침공한다. 국정원이 작년 발표했듯 해킹으로 유령 투표자도 만들고 투표자 수도 마음대로 줄이고 늘리고, 1번 찍은 투표지를 2번 찍은 투표지로도 바꾸는 것이다. 스마트폰에 온 부고장 문자의 링크를 눌렀더니 단숨에 정보를 빼내 은행에서 돈을 빼가듯, 해킹은 데이터를 빼가고 바꾼다. 선관위의 컴퓨터가 해킹당하면 선거 조작으로 주권이 침해될 수 있다. 선관위는 작년 말 투·개표 개선안을 내놓으며 전자 개표 후 수검표로 확인한다고 교묘하게 말을 돌리는데, 중요한 건 해킹을 막기 위해 전자기기를 없애는 것이다. 손으로만 세면 된다. 굳이 쓰겠다면 법대로 수 개표를 먼저 하고 후에 보조 장치로 써라. 전자개표기는 투표지까지 스캔한다. 신원이 파악되는 QR코드를 쓰지 말라 해도 선관위가 그동안 써서 비밀선거 침해 가능성도 있었다. 1번을 찍었는지 2번을 찍었는지 그 기록을 해킹한 자나 내부 조력자가 여론조사 회사에다 넘겼다면, 그리고 여론 조사기관이 의도적으로 1번 찍은 사람 600명, 2번 찍은 사람 400명에게 전화기를 돌렸다면 당연히 여론조사 결과는 1번 우세 60%로 나왔을 것이다. 선거 조작을 막으려면 법대로(공직선거법 제158, 157조), (사전) 투표관리관은 투표용지에 개인 도장을 찍으면 된다. 한국경제에 따르면 정부가 현장 날인을 주장했으나 선관위가 사람이 몰리면 기다린다며 줄다리기했다 한다. 한 사람에 1초도 안 걸리는데 도장 안 찍고 그냥 인쇄 종이로 대신하겠다니, 선관위 공무원은 집 매매 계약 시 자기 도장도 안 찍나? 투·개표개선안이라면서도 핵심은 빼놓으니 도대체 공무원인가 공범인가. 국민을 위하겠다면 선거 후 폐기되는 디지털 사전선거인명부와는 별도로 사전투표소마다 종이 선거인명부에 투표자가 주소와 이름을 작성하게 해달라. 해킹으로 인한 주권 침해를 막기 위해 인천 시내 10여곳에 ‘법대로 투표관리관은 투표용지에 개인 도장을 찍자’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인천의 아침] 인천이 세계 10대 도시가 되려면

세계 10대 무역항구 도시는 중국이 6개나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공항 크기 순위로 보면 중국은 10대 안에 드는 공항은 없다. 인천공항은 세계공항 순위 4위다. 그것은 한국이 중국보다 문화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문화 강국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증거다. 경제적 물류 왕래가 잦은 것도 중요하지만 정신적 문화의 왕래가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과거 문화 강국이 위대한 나라로 평가받는 것이 그 이유다. 광복 이후에는 주로 미국에 의해 현대적인 문화와 문물이 수입됐다. 하지만 현재는 한류 문화라는 큰 물결이 세계를 향하고 있다. 인천은 그 한류 문화를 세계에 전하는 핵심 도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세계 허브 인천공항과 여러 가지 지정학적 요소로 가장 장래가 밝은 도시다. 서양 문물이 최초로 들어온 출입로가 인천이었다. 그러나 인천은 그동안 서울로 향하는 패싱 역할만 했다. 개화기에 인천으로 들어온 돈이 문학산을 넘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전국의 돈이 인천으로 모였으나,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 경제문화는 서울 공화국이라는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변해만 가고 있다. 그것은 국가균형 발전법을 만들어 놓고 역대 정부가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헌법 제9장 119조, 120조, 123조, 각 2항을 지키지 않은 결과다. 어떻든 이제라도 인천이 세계 10대 도시로 도약하려면 먼저 문화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춰야 할 것이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중략)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라고 했다. 문화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한 가장 위대한 글이다. 그런데 현재 인천의 문화 수준은 전국 특·광역시 중 일반회계 대비 문화 예산 비율은 인천이 가장 낮고, 광주가 가장 높다. 인천과 광주 비율은 무려 3배 이상 차이가 난다. 전국에서 꼴찌라는 소리다. 한 예로 신포동에 있는 인천문화재단 건물은 조그마한 옛날 2층 건물로 많은 지방 문화재단 건물과 비교해 보니 너무 초라하다. 앞으로 인천시는 문화기반시설 확충뿐만 아니라 한류 문화 콘텐츠 업체 지원과 예술인의 안정적 창작 지원을 위한 인건비, 작품 구매비, 활동비 등 문화 현장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 문화재에 대한 지원과 관리 소홀은 도를 넘은 수준이다. 주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상박물관과 문화재가 있는 옆 건물에 개 훈련장을 허가해 주는 수준의 행정력이다. 무엇보다도 세계 10대 도시가 되려면 강력하고 다양한 인천시 문화 정책을 구상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인천의 아침] 자기 효능감으로 신년 계획 실천하기

새해가 밝았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보통 신년 계획을 세우기 마련이다. 열심히 세우고 나름대로 몇 주나 한두 달 정도는 애쓰며 실천에 옮겨 보지만, 어느새 게을러지고 제 풀에 꺾여 용두사미가 되곤 한다. 그래서 늘 연말이면 후회막심이고, 또 연초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신년 계획에 몰두하곤 한다.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을 아는가? 자기 효능감은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행위과정을 조직화하고 실행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념이다. 영어로 비유하면 “I can do it”이다. 일반적으로 자기 효능감이 높은 사람은 목표를 설정하거나 과제를 수행할 때, 이미 ‘성공’에 대한 기대를 갖고 출발하며 불안, 스트레스, 심리적 문제 등을 긍정적으로 또 효과적으로 대처해 나간다. 따라서 어려운 일을 할 때라도 ‘해낼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으로 접근하기에 그만큼 성공 확률이 높은 것이다. 반대로 자기 효능감이 낮은 사람은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 미리 포기하거나 일을 그르치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효능감이 높은 사람이라면 신년 계획을 성공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서 잘 실천해 갈 것이다. 그만큼 성공 확률도 높을 것이고,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서 주위로부터 환영받으며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게 됨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 효능감을 어떻게 개발하며, 신년 계획과 실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첫째, ‘통달(성공) 경험’을 높이자. 어떤 문제를 해결했다는 통달(성공) 경험은 자기 효능감을 증진시킨다. 우선 달성 가능한 쉬운 목표부터 설정하고 꾸준히 실천해 보자. 그리고 수행 과정에서 일부 실수나 실패가 나온다 해도 실망치 않고 그것을 긍정적 마인드로 차츰 극복해 간다면, 그것은 값진 통달 경험이 된다. 이는 신년의 다른 새로운 도전에도 자신감을 갖게 하며 꾸준히 실천에 옮기게 할 것이다. 둘째, ‘대리 경험’을 높이자. 원하는 목표를 제대로 실천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실생활에서 여러 제한과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효과적으로 수행한 타인을 멘토나 모델로 삼아 잘 관찰하며 따라해 보자. 즉, 대리 경험을 높여가는 것이다. 실생활에서의 멘토(모델) 관찰과 따라하기가 쉽지 않다면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화나 드라마, 또 책 속의 주인공을 통한 간접적 대리 경험도 자기 효능감 증진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새해에는 이 통달 경험과 대리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기 효능감으로 신년 계획을 잘 실천하며 올 한 해를 멋지게 장식하도록 하자.

[인천의 아침] 영혼 없는 SNS, 제발 좀 멈추자

연말연시는 한 해 중 SNS가 가장 뜨거울 때다. 성탄 인사를 시작으로 송년과 신년 인사가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 상에 넘쳐난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손수 작성한 글과 이미지는 점차 사라져가고, 소위 ‘퍼 나르기’ 식의 출처 불명의 보고 또 본 이미지와 동영상들로 홍수를 이룬다. 퍼 나르기를 하더라도 간단하게나마 본인의 인사를 곁들인다면 낫겠지만, 아무런 텍스트도 없이 무작정 전달에 전달로 그치는 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영혼 없는 인사’로 영 달갑지도 않고, 계속 받다 보면 짜증만 날 뿐이다. 디지털, 인터넷, SNS로 오늘날 세계는 어쩔 수 없이 가상공간이 늘어나고 있다. 실제 모습으로 소통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이지만, 그래도 예의와 매너는 필요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소위 ‘네티켓’이다. 네트워크(network)와 에티켓(etiquette)의 합성어로 네트워크상에서 지켜야 할 상식과 예절을 의미한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994년 미국 플로리다대 버지니아 셰어 교수가 제시한 ‘네티켓의 핵심원칙 10가지’로 아래와 같다. △가상공간에서 만나는 상대방도 나와 같은 사람임을 기억하자 △실제 생활에서 적용된 것과 같은 기준과 행동을 고수하라 △현재 자신이 어떤 곳에 접속해 있는지 알고, 그곳 문화에 어울리게 행동하라 △다른 사람의 시간을 존중하라 △온라인상의 당신 자신을 근사하게 만들라 △전문적인 지식을 공유하라 △논쟁은 절제된 감정 아래 행하라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존중하라 △당신의 권력을 남용하지 말라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서하라. 정확히 30년 전 제시된 기본적 네티켓임에도, 가상공간상에서 우리가 갖춰야 할 행동양식으로서 여전히 손색없이 인정되고 있음이 오히려 씁쓰레하다. 그만큼 네티켓이 제자리걸음 아니 퇴보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그래, 다 차치하고 네티켓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새해부터는 더 이상 ‘영혼 없는 SNS’는 제발 좀 멈추자! 무작정 복사해 ‘전달에 전달 퍼 나르기’는 더 이상 메시지도 인사도 아니다. 그건 한낱 영혼 없는 ‘SNS 쓰레기’일 뿐이다. 새해에는 솔직하고 순수하고 따스한 SNS를 펼쳐 보자! 인터넷과 SNS 초강대국인 한국 사회에서부터 새로운 한류로 그런 ‘SNS 문화 운동’이 갑진년 용틀임처럼 피어나길 소망한다.

[인천의 아침] 선배 시민과 어르신

어릴 때는 얼른 어른이 되길 바랐지만 막상 어른이 되니 해가 바뀌는 게 달갑지만은 않은 게 나이 든 사람들 대부분의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늙었다”거나 ‘노인(老人)’이라는 말을 들으면 질색을 하기 십상이다. 고령화사회에 접어들었지만, 전(前) 시대의 같은 나이 때보다 훨씬 젊게 사는 요즘은 이런 현상이 갈수록 더해지고 있다. 급기야 얼마 전 경기도에서는 65세가 넘은 사람을 ‘선배 시민’이라 부르자는 조례를 만들어 통과시켰다. 이 조례가 무얼 말하려 하는지는 물론 잘 안다. 그럼에도 그 호칭이 영 어색하기만 하다. 이를테면 나이 든 사람에게 길을 물어야 할 때 “선배 시민님, 길 좀 묻겠습니다”라고 할 건가. 이런 어색한 호칭 대신 우리에게는 이미 오래전부터 쓰이고 있는 ‘어르신’이라는 단어가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의 본뜻을 모를 것이다. 현대어의 ‘어른’은 중세국어의 ‘얼운/어룬’에서 나온 말이며, 이는 ‘얼우다/어루다’라는 단어의 관형형이다. ‘얼우다’는 ‘시집 또는 장가를 보내다’, ‘혼인하다’라는 뜻이다. ‘어루다’는 ‘성교(性交)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얼운/어룬’은 ‘혼인을 한’ 또는 ‘성교를 한’이라는 뜻이며, 이 단어의 발음이 바뀌어 ‘어른’이 된 것이다. 원래는 ‘얼운/어룬’ 뒤에 ‘사람’이라는 말이 들어갔지만, 이 말 없이도 사람의 뜻으로 쓰였다. 결국 ‘어른’이란 ‘결혼을 해서 남녀 간에 성행위를 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요즘도 결혼을 안 한 사람은 웬만큼 나이가 많아도 어른 대접을 안 해주는 풍습이 조금 남아있는데, ‘어른’이라는 말에 그 이유가 담겨 있다. 결혼을 하고, 어루는 행위를 해야만 말 그대로 ‘어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국어에서 ‘얼우신/어루신’이었던 ‘어르신’도 ‘어른’과 똑같은 구조에 높임을 나타내는 어미 ‘-시-’가 붙은 말이다. 곧. ‘얼우/어루 + 시 + ㄴ’으로 구성된 단어가 명사로 굳어져 쓰이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살이의 이치와 순서를 따라 ‘어른’이 되고 ‘어르신’이 된 사람들을 굳이 다른 말로 부를 필요가 있을까. 세월이 흐르면 늙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그리고 그 섭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게 바로 노인이고, 어르신일 터이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나이 든 사람을 뭐라 부를 것인가’가 아니라 늙었으면 늙은 대로, 젊었으면 젊은 대로 세대 간에 서로 존중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려는 사회적 노력이 아닐까.

[인천의 아침] 수도권매립지, 어찌할 것인가

우리가 버린 쓰레기를 누가 치울 것인가. 수도권매립지가 꽉 차는 2026년부터 어찌할지, 인천, 경기, 서울의 단체장이 여러 차례 모였다. 기존 매립지(제1과 제2 매립장은 종료, 제3-1은 매립 중)는 거의 다 차서 태워서 매립량이라도 줄이려고 서울, 경기, 인천에 그나마 소각장을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 서울 난지도 쓰레기 처리장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정부는 1992년부터 서울, 경기, 인천 공동으로 수도권매립지를 2016년까지 쓰게 했다. 종료 시점이 되자 2015년 6월, 서울, 인천, 경기, 환경부 4자 협의체는 수도권매립지를 제3-1 매립장 매립 완료인 2025년까지 연장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단, 3개 자치단체는 3-1 매립장 매립 완료 이전에 자체적인 대체 쓰레기 처리장을 마련하기로 했다. 누구나 사는 지역에 매립지 생기는 걸 바라지 않으니, 새 매립지 선정은 물론이고 소각장 확충조차 만만치 않다. 인천시 시정혁신단은 주민 반대 등으로 제자리걸음인 소각장 확충 절차가 시급하다며 ‘2026년 (환경부의 수도권매립지) 직매립 금지에 따른 폐기물 정책 전환 정책간담회’를 했다(본보 8월25일자). 서울시가 신규 생활폐기물 소각장 건립지로 상암동 등 2개 필지를 결정하자 마포구청장은 즉각 반대 기자회견을 했다(Y뉴스 9월4일자). 김포시가 올 3월 하루 500t의 생활 쓰레기를 소각할 후보지로 양촌읍 등을 선정했지만, 다른 지역 쓰레기를 실은 트럭이 서구를 지난다며 서구 주민과 구의회 등이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서구청도 입지선정위원회가 소각장 지을 곳을 찾고 있어, 추후 김포시 인근에 소각장을 만들 수도 있는 똑같은 처지다(I인터넷신문 12월8일자). 매립지 선정 후에도 용출수 처리장치 등 일이 많으니, 빨리 대체 매립지를 확보해야 할 단체장들은 우선 내년 4월14일까지 3조원대의 지원보상금을 내걸고 희망 지자체 공모 절차에 들어갔다(C일보 11월21일자). 무턱대고 ‘3-1공구의 사용이 완료되는 시점까지 대체 매립지가 선정 안 되면 106만㎡까지 추가 매립지(3-2)로 사용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 속에 숨어 후세에게 빚을 넘겨 또 10여년을 더 끌 것인가. 우선 합의대로 대체 매립지를 만들고, 관련 여건을 서로 참작하라. 혈액이 우리 몸 곳곳을 연결하듯 각 지역 사랑이 수도권 전체를 살린다. 하나가 곧 여럿이라는 화엄경의 말처럼 함께 살아야 할 것이니 사랑으로 매립지를 선택하라.

[인천의 아침] 좌탈입망

법력이 높은 고승들이 세상과 인연이 다할 때 택하는 방법으로 참선 자세로 앉아서 돌아가시거나, 혹은 서 있는 자세로 세상과 인연을 다하는 모습을 좌탈입망(坐脫立亡)이라 하며, 죽음마저도 마음대로 다룬다는 것으로 입적, 원적, 열반했다고 한다. 좌탈입망을 중시하는 이유는 마지막 죽는 순간의 의식 상태가 우주의 근본 상태를 느끼고 생사를 초월한 도를 보는 사생관 때문이다. 즉 좌탈을 했다는 것은 죽는 순간에도 각성 상태에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고통과 번뇌의 원인 덩어리인 몸을 벗어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깨달음의 자리에서 다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좌탈입망은 요즘 이야기되는 ‘웰 다잉(Well dying)’의 최고 수준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사명대사는 해인사에서 설법을 마친 뒤 가부좌를 틀고 입적했다. 승찬 스님은 뜰을 거닐다 나뭇가지를 잡은 채 서서 열반했고, 당나라의 등은봉 스님은 물구나무선 채로 열반했다. 한국의 근현대 고승들 가운데서도 밧줄을 붙잡고 화두를 외며 죽음을 맞은 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스님 외에도 오대산 상원사의 한암, 백양사의 만암, 순천 송광사의 초대 방장 구산, 조계종 5대 종정을 지낸 백양사의 서옹스님 등이 모두 좌탈입망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스님이 좌탈입망했는데, 나의 스승인 기산 스님도 앉아서 열반하셨기에 관을 앉은 자세 모양으로 급히 만들어서 입관한 기억이 생생하다. 좌탈입망은 초기 경전에 많이 나온다. 자신의 의지대로 의식이 몸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원하는 시간에 이 몸을 버리고 열반에 든다. 그리고 경전에는 좌탈입망하는 방법과 원리가 자세히 나온다. 당나라 지 한 선사는 ‘좌탈입망도 거꾸로 열반해도 그저 그렇다’면서 일곱 발자국을 걷다가 열반에 들었다. 즉 행사(行死)는 걸어가다가 죽는 것이다. 또 다른 입적으로 화욕(火浴)은 불 속에서 죽는 것이다. 당나라 선지 덕성 화상은 ‘땔나무도 필요 없고 땅 팔 일도 없다’면서 강물에 들어가 수몰(水歿) 열반했다. 몇 년 전에는 선방에서 열심히 수행하신 스님이 도반들과 같이 개울가에서 목욕하다 사라졌는데 얕은 물인데도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하니 수몰등공(水歿登空) 열반이다. 등공은 글자 그대로 공중으로 올라간다는 뜻이다. 보화존자는 관속에 들어갔으나 시체가 없어졌다. 세상에 태어나 100년을 살다 간들 이 세상 1겁 시간이 극락세계의 하루의 낮과 밤밖에 안 된다고 한다. 이 땅에서 받은 내 몸은 흙, 물, 불, 바람으로 돌아가고 나의 참 성품만이 영원하다. 형상과 소리로 나를 보려고 하지 말자. 우리는 그런 물질적인 현상에서 벗어나 인과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깨달음의 길을 찾는 마음공부가 중요하다고 본다.

[인천의 아침] 신체 언어, 그 사람의 인상과 인격

늘 당당한 배우 김혜수가 지난달 24일, 제44회 청룡영화상을 끝으로 지난 30년간 한 해도 빠짐없이 이어 온 진행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1993년 스물셋의 김혜수는 이덕화와 함께 청룡영화상 첫 진행을 맡았다. 그 후 30년 동안 매해 겨울이면 그는 어김없이 청룡영화상 무대에 섰다. 오죽하면 ‘청룡의 안주인’ ‘청룡의 여신’으로 불렸을까. 사회석의 김혜수는 딱 부러지는 진행과 함께 ‘영화제 패션’의 아이콘이었다. 그녀의 드레스 차림은 늘 파격적이고 또 아름다웠다. 실로 당당하고 우아하게 빛나는 레드카펫 드레스의 정석을 보여줬다. 그것은 정작 화려한 드레스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녀만이 소화해 낼 수 있는 ‘신체 언어’ 능력에서 기인한 것이다. 우리가 의사소통하는 데 있어 말과 글 등 언어적 신호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얼굴 표정부터 몸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비언어적 신호로도 많은 정보를 얻고 또 전달할 수 있다. 이러한 비언어적 신호는 일상적인 의사소통에 있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가 의사소통하는 데 사용하는 대표적인 비언어적 신호가 ‘신체 언어’다. 많은 커뮤니케이션 실험 결과에서, 인간의 정보 습득 패턴에 있어 정작 말에 실리는 단어나 문장보다는 오히려 얼굴 표정이나 몸 움직임(제스처)을 통해 얻는 정보가 훨씬 앞서는 걸로 나타난다. 그만큼 비언어적 신호인 ‘신체 언어’의 영향과 중요성이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체 언어를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좋을까? 우선 신체 언어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외모와 옷차림에 대해 그 활용 노하우를 소개한다. 외모는 신체 언어의 시작이다. 외모는 당신이 전하는 첫인상이요 첫마디다. 선천적 외모도 있겠지만, 후천적으로도 얼마든지 가꿀 수 있는 것이 외모다. 성형 수술을 하라는 게 아니다. 평소의 마음가짐과 운동, 훈련 등으로 가꾸면 된다. 밝고 호감 가는 외모를 갖춰라. 당신의 첫인상이 달라진다. 배우 김혜수의 사례에서 보듯, 옷차림은 신체 언어의 주요 요소다. 외모를 잘 받쳐주며 돋보이게 하는 게 옷차림이다. 옷에 투자하라. 비싼 옷에 투자하라는 게 아니다. 가격과 상관없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적절한 컬러와 디자인 등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궁극적으로 시간, 장소, 목적, 상대, 상황에 맞는 옷차림이 정답이다. 신체는 또 하나의 언어요 그 사람의 인상과 인격이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한 외모와 옷차림에 대한 신체 언어를 잘 이해하고, 일상생활에서 적극 활용하도록 하자. 여러분의 의사소통에 날개를 달아주며 인간관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인천의 아침] 김치의 날

지난 22일은 ‘김치의 날’이었다. 김치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20년 우리 정부와 한국김치협회가 이날을 ‘김치의 날’로 지정했다. 11월22일은 여러 재료가 하나하나(11) 모여 22가지 효능을 가진 김치를 만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다소 억지스럽게 끼워 맞춘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긴 세월 우리의 밥상을 지켜준 김치니까 그 정도는 넘어가 줄 수 있겠다. ‘김치의 날’은 현재 캘리포니아·뉴욕 등 미국의 7개 주(州)가 함께 기념하고 있다. 또 영국·브라질·아르헨티나 등 여러 곳에서 이에 동참하는 도시가 계속 늘고 있다. 그런데 김치가 이처럼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기까지는 일본·중국과의 치열한 국제 분쟁을 거쳐야만 했다. 우리 김치가 인기를 끌자 일본도 자체적으로 김치를 만들어 ‘기무치’로 상품화했다. 여기에 중국도 가세해 절임 채소인 ‘파오차이’를 상품화하고, 김치처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어느 것이 진짜 김치인가’를 놓고 분쟁이 생긴 것이다. 이 분쟁에서 우리가 승리를 거뒀다. 식량농업기구와 세계보건기구가 함께 운영하는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가 2001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24차 총회에서 우리나라 김치를 ‘국제규격식품’으로 승인한 것이다. CODEX는 식품 분야의 국제 표준을 정하는 국제협의체로, 정밀한 심사를 거쳐 국제규격의 식품을 공인(公認)한다. 여기서 ‘김치’는 ‘절임배추에 고춧가루·마늘·생강·파·무 등 여러 양념을 섞은 뒤, 적당히 숙성이 되고 잘 보존되도록 저온에서 발효한 제품’으로 국제규격화됐다. 이는 기무치나 파오차이와는 다른, 우리 김치의 특성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특히 ‘발효 음식’이라는 점이 중요한 차이다. 이에 따라 김치가 국제사회에서 ‘kimchi’라는 영문 이름으로 확실하게 통하게 됐다. 이처럼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김치이건만, 정작 그 종주국(宗主國)인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김치를 멀리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언론에 보도되는 여론조사들을 보면, 우리나라 초등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피자와 햄버거이고, 가장 싫어하는 음식이 김치라는 결과가 심심치 않게 나오기 때문이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의 김치가 한 세대쯤 뒤에도 지금과 같은 위상(位相)을 갖고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그에 대한 대응책은 결국 김치 스스로가 찾아내야 할 일이다. 완전히 새로운 변신을 통해 새로운 세대를 사로잡을지, 전통의 맛을 끝까지 지키면서 그 일을 해낼지, 아니면 그 중간 어디쯤 되는 곳에서 길을 찾아야 할지....

[인천의 아침] 소리의 진실

감정을 끌어내는 데는 아름다운 소리가 으뜸이다. 과거부터 인류는 음악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전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음악은 진동 주파수의 세기마다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을 듣기 좋게 조합해 만든 형식으로 조화롭게 결합해 청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예술이 됐다. 아마 모든 생명체도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감정을 소리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세상은 아름다운 소리보다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자동차 등 자연을 파괴하는 기계 소리가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특히 우리가 만든 종교의 틀 속에 사람들은 도취돼 신의 사명이라는 잘못된 인식에 사로잡혀 이성을 잊어버리고 정신적 환상에 빠져 과격한 주장의 목소리와 폭력, 심지어 살생을 저지르는 어리석은 종교전쟁을 벌이고 있다. 자신의 목숨조차 신에게 바치며 죽음을 미화시키는 전도몽상의 정신으로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고 있다. 내 종교, 내 나라, 내 이념, 내 이익 등 절대적인 독선적 가치관으로 끝없이 싸우는 모습이 마치 지옥과 같은 세상이 돼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아비규환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약자는 약자대로 목숨을 걸고 소리를 지르며 투쟁하며 산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소리가 절대적이고 독선적이라 세상은 대화가 없는 싸우는 소리만 난무하는 세상이 돼가고 있다. 또 국민을 대변하는 국회의원들은 말의 예의와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고 상대를 향하는 고성과 비판으로 가득 차 국민이 피곤할 정도다. 소리를 잘 내지 않는 백조가 죽기 전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하는 말이 있다. 말을 아끼고 조심하며 정말 필요할 때 멋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가장 작은 주파수의 소리는 우리는 들을 수 없다. 고래는 20Hz의 소리를 낸다. 20Hz는 피아노가 내는 가장 낮은 소리에 해당한다. 바닷속에서 그렇게 낮은 주파수의 소리는 거의 흡수되지 않아 잘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남극해에 사는 고래와 멀리 알류샨열도에 사는 고래는 사랑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잘 들리지 않는 거대한 민심의 주파수의 소리는 안 들린다고 해서 함부로행동하는 정치인이 너무 많다. 민심의 소리를 어리석은 정치인들은 듣지를 못한다. 세상이 평화롭고 아름다워지려면 절대적 진리보다는 상대적 진리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두 손을 모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진정한 진리의 소리를 느낄 줄 아는 종교인과 정치인, 국민이 많았으면 한다.

[인천의 아침]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을 높여라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절대 먼저 고개 숙이지 않고 서로 먼저 숙이라고 으르렁댄다. 정치계를 비롯해 우리 사회 대부분 조직에서, 또 신구 세대를 비롯해 세대 간에도 마찬가지다. 요즘 우리 세태요 민낯이다. 우리는 자기 존중감을 줄여서 흔히 ‘자존감’(自尊感)이라 부른다.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이다. 자존감이라는 개념은 자존심과 혼동되어 쓰이는 경우가 있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자신에 대한 긍정’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한 긍정’을 뜻하고, 자존심은 ‘경쟁 속에서의 긍정’을 뜻하는 등의 차이가 있다. 자존감이 결핍된 사람들에게는 흔히 허풍이나 과장, 헐뜯기, 자기합리화, 강박장애와 완벽주의, 수줍음과 위축, 자기평가 절하, 방어적 순응, 외톨이 되기, 냉소적 태도, 과잉 성취욕구, 타인에게 절대적으로 좋은 사람 되기 등의 행동이 나타나곤 한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자신의 이상 행동들이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것임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를 기준으로 하여 자신의 현재 행동들을 결정한다. 자신에 대한 타인의 부정적 평가가 있다면, 그에 맞춰 자신의 업적, 아이디어 등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자신의 장점보다 약점이나 결함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자신보다 남들이 더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와 반대로 지나치게 자존감이나 자신감, 자존심이 높은 것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경우다. 주위 사람보다 자신이 훨씬 뛰어나다고 느낀다. 오만하며 제멋대로고, 스스로 특권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인생을 살면서 어느 정도의 자존감과 자신감은 중요하다. 그러나 지나치면 ‘자만심’으로 발전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결여되고,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끼려 한다. 문제는 본인이 자존감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여기거나 오도된 자신감과 자만심으로 키우는 경우이다. 그것의 부정적 결과가 소위 ‘자존심 부리기’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균형 잡힌 건강한 자존감’이 중요하다. 건강하고 바람직한 자존감은 두 극단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자존감이 건강하다는 뜻은 자신을 공정하고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가치를 잘 알고 자신을 좋게 평가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지만, 부족한 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자존심을 부리지 마라. 대신에 자존감을 높여라. 결국 자존심이 아닌 ‘균형 잡힌 건강한 자존감’이 자신은 물론 자신과 관련된 인간관계와 사회관계를 균형 있게 또 건강하게 만들 것이다.

[인천의 아침] ‘가짜 나’를 버리고, ‘진짜 나’를 찾아라

요즘 우리 사회에 ‘가짜’가 만연하다. 입고 먹고 사는 것, 곧 ‘의식주’ 전체에 온통 가짜와 모조품, 소위 ‘짜가’와 ‘짝퉁’이 가득하다. 이제 사람마저 ‘가짜 사람’이 늘어가며 온갖 사회 문제를 낳고 있다. 이럴수록 정신 똑바로 차리며 ‘가짜 나’를 버리고, ‘진짜 나’를 찾아야 한다. 타인과 소통할 때 자기 존중감, 즉 자존감이 떨어지는 사람은 흔히 ‘심리적 화장’을 하곤 한다. 없는데도 있는 척, 모르는데도 아는 체 등 자신의 상태나 수준을 과장하거나 연기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상대와의 사이에는 거짓의 벽과 허울이 쌓이게 마련이다. 건강한 소통을 위해선 당연히 ‘심리적 화장’을 한 ‘가짜 나’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아울러 자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습관(선입견, 거짓평가, 자포자기 등)도 버려야 한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할수록 자존감은 높아지게 마련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올바른 ‘자기 존중감’을 통해 ‘진짜 나’를 찾아야 한다. 냉철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자신을 올바로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사랑받기 충분한 존재인지를 발견하고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면, ‘진짜 나’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삶에서 바로 적용할 지침을 드린다. 1.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비관적 생각에 치우치면 부정적 결과를 낳기 싶다. ‘잘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도 긍정적으로 맞닥뜨릴 수 있다. 2. 자신을 용서하고 격려하고 통제하라. 인간이면 누구나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게 마련이다. 중요한 건 자신을 용서하고 다시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또 자신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엄격히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3. 자신의 기준과 원칙을 만들라. 타인의 기준과 원칙에 끌려 다니지 마라. 자신만의 기준과 원칙을 세워 자기 스스로 결정하라. 그런 만큼 타인의 기준과 원칙, 그리고 타인의 자존감도 존중해야 한다. 4. 자신의 강점과 장점을 찾고 이를 부각시켜라. 그 강점과 장점을 확실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남들도 충분히 인정할 만큼 이를 부각시켜 나가라. 5.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하라. 자기를 계발하려는 노력 자체가 자긍심과 자존감을 고양시킨다. 스스로 자기 계발을 정성껏 기획하고 공부하고 실천하라. 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할 때 상대방도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과의 소통은 물론이고 타인과의 소통도 원활해진다. ‘진짜 나’와 ‘진짜 너’가 어우러지는 세상, 정녕 건강하고 아름답지 않겠는가.

[인천의 아침] 제물포구 제물포역

인천에 제물포구가 새로 생긴다. 인천시의 행정구역 통합·조정 계획에 따른 것이다. 행정안전부가 이를 받아들여 지난달 ‘인천시 제물포구·영종구·검단구 설치에 관한 법률안’을 입법예고했다. 이에 따라 법률안의 국회 본회의 의결 등 남은 절차가 계획대로 진행되면 2026년 7월1일 제물포구가 태어난다. 제물포구는 지금의 중구에서 영종·용유·무의도를 뺀 시내 전부와 동구를 합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개항기 이후 같은 생활권인 인천의 원도심이며, 인구도 합쳐 11만명 정도이니 하나로 묶이는 것이 옳다. ‘제물포’라는 구 이름도 아주 적절하다. 제물포는 조선 초기 이래 지금의 중구 중앙동·항동 일대에 있던 작은 포구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그것이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지금의 중구청 주변을 중심으로 중구·동구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1954년 자유공원 밑, 웃터골에 문을 연 제물포고가 ‘제물포’라는 이름을 쓴 것도 그래서였다. 이처럼 중구의 시내 지역과 동구를 합해 제물포구를 만드는 일은 어느 면에서든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하나 걸리는 것이 경인전철 제물포역이다. 지금 미추홀구 도화동에 있는 제물포역은 1963년 경인철도 ‘숭의역’이 이름을 바꾼 것이다. 왜 이렇게 이름을 바꿨는지는 관련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아마 기차를 이용하는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인천에 왔음을 알려주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이전에 있었던 ‘축현역’의 사례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1899년 경인철도 개통 당시 생긴 축현역은 그 뒤 ‘상인천역’을 거쳐 1955년 ‘동인천역’으로 이름을 바꿨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축현역에 와도 인천인지 몰라 내리지 않고 종점인 인천역까지 가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당시 기록이 밝히고 있다. 숭의역도 같은 이유에서 이름을 바꿨을 것 같다. 역 이름에 ‘인천’이라는 말을 넣으면 좋겠지만 이미 ‘인천역’과 ‘동인천역’이 있으니 인천의 다른 이름으로 꽤 널리 알려진 제물포를 차선책으로 택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은 제물포역 주변이 제물포인 것처럼 돼버렸지만 진짜 제물포는 중·동구 일대다. 그동안은 이를 “그런 거지” 하고 그냥 넘겨 왔다. 하지만 제물포구가 생기면 제물포역이 미추홀구에 있다는 게 영 어울리지 않게 된다. 그렇다고 60년을 써온 이름 ‘제물포역’을 달리 바꾸자니 그것도 간단한 일은 아니다. 어떤 해결책이 있을지 이제는 시민들의 생각을 한번 모아 봐야 하지 않을까.

[인천의 아침] 라면 탄생 60주년

지난 15일은 ‘인천상륙작전 기념일’이었다. 6·25전쟁 중의 인천상륙작전이 워낙 강렬한 사건이었으니 9월15일은 단연(斷然) 그 기념일로만 기억되곤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이날은 ‘라면 탄생일’이라는 또 하나의 엄청난 기념일이기도 하다. 지금과 같은 즉석식품으로서의 라면이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인 것이 1963년 9월15일이었다. 오늘날 ‘삼양식품’의 뿌리가 된 ‘삼양공업’이 일본으로부터 기계와 기술을 들여와 만든 ‘삼양라면’이다. 지금도 그 이름 그대로인 이 라면의 당시 판매가격은 10원. 대중식당에서 파는 백반 가격이 30원 정도였던 시절이다. 일제(日帝)의 식민지배 피해에 6·25 전쟁의 상처까지 겹쳐 너무나 가난했던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음식찌꺼기들을 모아 끓여 만든 ‘꿀꿀이죽’으로 겨우 연명했다. 그때 ‘삼양공업’ 창업자인 고 전중윤 회장이 남대문시장에서 한 그릇에 5원인 꿀꿀이죽을 사먹으려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본 것이 우리 라면의 출발이 됐다고 한다. 일본 출장 중에 먹어본 라면이 식량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 시절 라면의 등장은 그야말로 구세주의 등장에 버금가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돈도 시간도 없는 사람들이 그나마 배가 좀 덜 고프게, 얼른 한 끼를 때울 수 있게 해준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죽도록 일하면서 오늘날 세계 10위권에 들어선 경제강국 대한민국의 기틀을 세워준 1960~80년대 근로자들의 허기진 배를 달래주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도 바로 라면이었다. 그 시절 만약 라면이 없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지 짐작조차 쉽지가 않다. 그 뒤로도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 임춘애 선수의 “라면만 먹고 뛰었어요” 오보(誤報) 사건처럼 숱한 사연을 만들어 온 라면은 이제 ‘한국인의 제2의 주식(主食)’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라면협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한국인들은 1인당 평균 77개의 라면을 먹었다. 이는 1인당 평균 85개를 먹은 베트남에 이어 세계 2위의 기록이다. 한국은 2020년까지 이 통계에서 거의 늘 1위였다가 2021년부터 베트남에 자리를 넘겨줬다. 하지만 이 수치만으로도 한국인들의 ‘라면 사랑’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제 라면은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했던 가슴 시린 음식에서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50대 이상이라면 너나없이 어려웠던 옛 시절 라면에 얽힌 가슴 짠한 사연을 한두 가지씩은 안고 있을 것이다. 우리 라면 탄생 60주년을 맞은 이제, 누구하고든 한번 ‘라면의 추억’을 얘깃거리로 삼아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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