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세계를 품다] 9. 호국불교의 성지

성(城)은 전쟁의 산물이다. 전쟁은 문명의 비극적인 사건이자, 역사발전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를 만든다. 도시의 성이든, 산성이든 간에 다른 이질적인 문명의 충돌을 예견하는 문화유산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 중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 담긴 장소라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산성도 그러하다. 우리나라 많은 산성들 중에서 민족사적으로, 동아시아적인 입장에서 여러 의미를 간직한 문화유적이 바로 남한산성이다. 특히, 남한산성에는 유난히 사찰이 많았다. 조선시대에만 10개 사찰이 존재했다고 하는데 왜 사찰이 많았을까. 남한산성에는 장경사, 망월사 등 모두 10개의 사찰과 500여 명(사찰당 50여 명)의 승군(僧軍)이 주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승군들은 남한산성 축성과 보수, 군사적 방어를 맡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수호에도 참여했다. 이처럼 남한산성은 축조와 운용과정에서 사찰과 스님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가치가 있다. 군인이나 전문가들이 동원된 것이 아니라 스님들이 돌을 나르고 성벽을 쌓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무엇보다 조선시대 인조 임금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250여년 이상 산성을 수비한 사찰과 스님들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 작업이 시급하다. 어쩌면 스님들이 없었더라면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은 지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무기고와 화약고 등을 이유로 1907년 8월1일 무참히 파괴될 때까지 남한산성 내 소재한 사찰들은 국난극복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 10개의 승영사찰 세계적으로 드문 호국불교의 상징 남한산성이 호국불교의 성지이자 백성과 스님들이 이 땅을 지켜낸 숭고한 정신이 간직된 곳이라 점은 경기 광주(廣州)의 지방지인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 권3 불우조(佛宇條)에 기록돼 있다. 살피건데, 인조 2년에 성을 쌓을 때 각성 스님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삼아 성 쌓는 일을 전임케 하여 8도의 승군을 소집하게 하고 또 성내의 각 사찰에 영을 내려 8도에서 일을 하러 온 승군들에게 음식을 공급해주는 일을 나누어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각각의 절에는 처음으로 각 도의 의승(義僧)을 주관하는 입번 및 승총(僧摠)절제(節制)중군(中軍)주장(主將)의 명칭이 생겼다. 대체로 성내에 있는 아홉 개의 절은 인조 2년에 시작된 것이니 망월사가 가장 오래 되었고 옥정사가 다음이며 나머지 일곱 개의 절도 모두 새로 세운 것인데 동림사가 가장 뒤늦고 영원사는 또 그 뒤에 두었다. 모두 성을 지키는 일을 맡았으며, 아홉 개의 절에는 각각 군기(軍器)와 화약(火藥)을 보관하였다. 이처럼 중정남한지 기록을 근거해 보면 남한산성의 사찰은 처음에는 성역에 동원된 승려들의 뒷바라지를 위해서였지만 이후에는 그대로 거주하면서 평상시에는 성곽을 관리보수하고 비상시에는 성첩 구간별로 획정된 신지(信地)를 수비하기 위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남한산성은 군영과 사찰이 결합한 승영사찰이 10개나 되는 곳으로, 8도에서 스님들이 모여 10개의 사찰에 나눠 오랜 세월동안 산성을 쌓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나라를 잘 방어한 세계적으로 드문 호국불교의 상징이다. 이 같은 남한산성 사찰은 전국에서 상경한 수백 명의 원승군과 의승으로 산성 승번제도를 유지했는데 갑오개혁 때 의승방번제가 폐지되면서 쇠락하기 시작되었고, 1907년 일제에 의한 군대해산령으로 인해 산성의 무기수거와 함께 대부분 파괴된 것으로 보여진다. ■ 남한산성 전체가 하나의 도량 남한산성을 따라 걷다보며 곳곳에 절이 있다보니 마치 남한산성 전체가 도량인듯했다고 전한다. 국청사, 개원사, 천주사 등 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나라를 지키고 국가를 안위하는 절들이었다. 지금은 대개 폐허가 되었지만 말이다. 우선 경기도 기념물 제111호 망월사터는 남한산성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사찰로 고려 때 한양에 장의사(壯義寺)가 있었는데 태조가 도읍을 세울 때 이를 허물고 불상과 금자(金字)화엄경 한 벌, 금솥을 이곳에 옮겨 보관했다고 한다. 장의사는 통일신라 때인 659년(무열왕 6)에 세운 사찰로서 고려시대에는 법인국사 탄문, 자정국존 미수 등의 고승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남한산성의 축조에 승군(僧軍)이 대거 참여하면서 이들을 수용할 사찰이 필요함에 따라, 개원사를 비롯한 7개 사찰이 창건되었고, 그 전부터 있어왔던 망월사와 옥정사를 포함해 9개 사찰에 승군이 머물면서 산성의 축조와 방비를 담당했다. 망월사에도 적지 않은 승군이 거주했을 것이고, 또 다른 사찰의 경우처럼 호국도량의 성격을 지녔을 것이라 추측된다. 망월사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기록이나 유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대개 인근의 8개 사찰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옛터에 지어진 현재의 사찰은 1991년 성법 스님에 의해서였는데 현재는 대웅전과 극락보전, 요사, 13층 석탑 등으로 가람이 형성되었다. 경기도 기념물 제119호 개원사터는 남한산성 가운데서도 이들의 총지휘소로 사용됐다. 개원사는 이 승군들을 지휘하던 이른바 남한총섭(南漢總攝)의 본영(本營)이 되었으며, 안에 군기, 화약 등의 기물과 승병들이 집결돼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개원사가 단순히 승군들의 집합처로서만 기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대장경의 봉안처로도 유명했다. 곧 1637년(인조 15) 이래 대장경의 경판을 이곳에 모셔두었다. 개원사는 또한 병자호란의 와중이던 1636년 당시 숭은전에 봉안됐던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진영을 이곳으로 잠시 옮겼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 다시 숭은전에 봉안한 사실도 있는 등 인조의 각별한 관심을 받아오던 사찰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 법당과 누각 등의 건물이 화재로 없어지고 그 안에 있던 대장경도 함께 전소되고 말았다. 한편 옛 절터 한쪽에는 근래에 세운 개원사가 들어섰는데 대각전과 요사 등의 건물이 있어 옛날 개원사의 법등을 잇고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호 장경사(長慶寺)는 성내에 존재했던 사찰 중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사찰이다. 남한지에는 절 뒤에 철쭉이 많고 노송 숲에서는 송이버섯이나, 진남루 남쪽에는 망대가 있어 올라가 보면 눈앞에 펼쳐지는 그윽한 경치가 절중에서는 으뜸이라 했다. 이 사찰은 인조 2년(1624년) 남한산성 수축 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건립됐다. 1907년 일제의 군대 해산령에 의해 성안의 무기고와 화약고를 파괴할 때 다른 사찰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그 중 장경사가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 사찰 내의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해 진남루, 칠성각, 대방(大房), 요사채 등이 있었다. 이처럼 남한산성은 불교와 관련된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는 문화재와 스토리를 많이 보유하고 있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냈던 공간유산이자 정신적 유산이다. 특히 남한산성 내 승영사찰은 조선 후기 사회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에도 매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뿐 아니라 남한산성이라는 큰 틀에서 보아도 진정성 회복을 위해 그리고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남한산성 가치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팔도 사찰의 복원과 정비가 시급하다. 강현숙기자 사진=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제공

제3회 ‘道종교화합 어울림한마당 축제’ 성료

경기도종교지도자협의회가 주최하고 천주교 수원교구가 주관한 제3회 경기도 종교화합 어울림 한마당이 19일 경기도 인재개발원 실내체육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는 남경필 경기지사, 이용훈 마티아 주교 (천주교 수원교구 교구장), 성무 스님(조계종 제2교구 부주지), 고흥식 목사(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 부총회장) 등 천주교, 불교, 개신교의 3대 종교계 대표 지도자를 비롯해 신도 등 600여명이 함께 어울려 한마음체육대회 내 다양한 게임을 통해 함께 땀 흘리며 화합하는 장이 됐다. 이번 축제에 참여한 신도들은 종교별로 구분하지 않고 만남, 나눔, 친교, 일치 4개 팀으로 나눠 1부 공식행사, 2부3부 어울 마당, 4부 행운정리마당 등 4개의 장으로 프로그램을 편성해 한마음 넘기, 한마음 띄우기, 한마음 달리기, 한마음 전달, 한마음 동산, 한마음 받기 등 다양한 게임을 즐겼다. 3부 어울 마당에서는 종단 족구대회를 개최해 불교, 개신교, 천주교 종교지도자 간 친교를 다졌다. 특히 이번 행사에서는 용주사, 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 천주교 수원교구는 종단 내 다문화시설을 선정, 행복한 이주민센터, H-net 학교, 갈릴래아 어린이집에 각각 성금전달식을 가졌다. 천주교 수원교구 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는 개회사를 통해 신앙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일치와 화합과 친교의 장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강현숙기자

양평 신라 돌방무덤 발견… 극심한 도굴로 유물은 거의 없어

양평 신라 돌방무덤 발견 극심한 도굴로 유물은 거의 없어 경기 양평에서 신라시대 돌방무덤(石室墳) 2기가 발견됐다. 지난 13일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중부고고학연구소(소장 김권중)는 양평군 의뢰로 양평군 지평면 대평리 산23-1번지 대평저수지 북쪽 산 구릉에 위치하는 대형 봉토분(封土墳) 2기를 조사한 결과 이들 무덤이 무덤방으로 통하는 길을 별도로 마련한 신라시대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지난 9월12일 이래 조사를 계속한 결과 50m가량 거리를 유지한 채 남북 방향으로 선 두 고분은 원형으로 만들어 올린 봉분에서 흙이 흘러내림을 방지하기 위해 쌓은 돌담 시설인 호석(護石)을 이중으로 갖췄으며, 무덤길을 향해 바깥과 통하는 무덤방은 아치형인 것으로 드러났다. 시신을 안치하는 공간인 매장주체시설은 봉분 중앙에 마련했다. 무덤길은 남쪽에 마련했지만 배치 양상에서는 두 무덤이 약간 차이를 보였다. 북쪽에 위치하는 1호분의 무덤길은 남쪽에 마련하되 왼쪽 편으로 치우쳐 배치하는 좌편연도식(左偏羨道式) 구조인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전면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2호분은 봉분 지름이 바깥 호석 기준으로 26.5m, 높이가 6.5m에 이르되 돌방 가운데 무덤길을 마련한 중앙연도식(中央羨道式)이었다. 특히 유물은 극심한 도굴로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1호분 시상대 남동쪽 모서리 부근에서 쇠뿔 모양 토기 손잡이 조각 정도가 수습됐다. 이와 관련해 조사단은 "고분 축조 방법과 석실 구조로 볼 때 충주 일대 누암리 고분군이나 하구암리 고분군과 유사한 점으로 보아 신라가 한강유역에 진출한 6세기 중엽 이후에 만들었다고 추정된다"면서 "무덤 주인공은 이 지역 수장층으로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에 조사한 두 고분은 약 20년 전 양평 TCP골프장 건설 과정에서 사라진 동남쪽 약 1㎞ 지점 봉토분과 한데 합쳐서 지역사회에서는 '삼태봉'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가 1999년 토지박물관이 양평군 일대 지표조사를 실시하면서 정식으로 학계에 보고됐다. 온라인뉴스팀 사진= 양평 신라 돌방무덤 발견

원주 법천사지 금당 터 발견…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쌍탑 1금당 가람 구조

원주 법천사지 금당 터 발견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쌍탑 1금당 가람 구조 아직 정확한 범위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한반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경주 황룡사나 익산 미륵사와 비교해 밀리지 않는 거대 사찰인 원주 법천사(法泉寺)의 구조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쌍탑 1금당 가람 구조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6일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강원고고문화연구원(원장 지현병)은 문화재청과 원주시 의뢰로 유적 정비 차원에서 사적 466호인 법천사 터에 대한 올해 제9차 조사 결과 이들 건축물이 있던 흔적을 확인함으로써 법천사가 경주 불국사 등지에서 볼 수 있듯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쌍탑 1금당 가람 구조임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또한 금당 터 주변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건물터도 확인됐고, 서탑터 앞에서는 공양보살좌상의 지대석(址臺石)으로 보이는 육각형 기단석(基壇石)이 발견됐다. 또한 중심 사역 서쪽 편에서 확인한 건물터를 조사한 결과 양쪽에 붙어 뻗어나온 부속 건물인 익사(翼舍)를 거느린 대형 건물을 중심으로 공용 생활공간으로 추정되는 건물지터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된 사실도 드러났다. 이에 대해 조사단은 "이러한 조사성과로 볼 때 법천사가 계획적으로 구획된 공간 안에 다양한 기능의 건물이 복합적으로 들어선 다원식(多院式) 가람 배치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법천사는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시대 어느 무렵에 창건되고 특히 고려시대에 크게 융성하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며 소실된 것으로 알려진다. 온라인뉴스팀 사진= 원주 법천사지 금당 터 발견

태안 마도 해역서 조선 백자 인양… '조선시대 배 첫 발견' 가능성 높아

태안 조선 백자 인양 '조선시대 배 첫 발견' 가능성 높아 충남 태안 마도 해역에서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선박이 발견됐다. 5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소장 소재구)는 '바닷속 경주'로 일컫는 마도 해역을 지난 6월1일 이래 발굴조사한 결과 '마도 4호선'으로 명명한 침몰 고선박을 발견했으며 주변에서 조선시대 백자 111점을 인양했다고 밝혔다. 발견 당시 종류별로 10점씩 포갠 상태였으며, 꾸러미 아래쪽에는 그릇이 깨지지 않도록 완충재로 사용했을 볏짚도 함께 확인돼 화물로 선적됐음을 엿보인다. 또한 백자 촛대는 발굴된 사례가 없이 전세품(傳世品)만 남아있어 도자기 가치가 특히 크다고 평가된다. 제작 상태, 기종 등을 고려할 때 이번에 발견된 백자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지방 생산 백자로 추정된다. 특히 선박 내부에서 조선 초기 분청사기 2점이 발견됨에 따라 추후 자세한 조사와 분석이 있어야겠지만 한국 수중고고학사상 최초의 조선시대 선박 실물 출현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다만 이들 백자 다발이 이번에 확인한 마도 4호선에 적재한 것인지는 아닌지는 "아직 확실치 않으며, 상관관계는 추후 면밀한 조사를 해 봐야 판단이 가능하다"고 문환석 수중발굴과장이 설명했다. 지금까지 마도 해역에서는 태안선, 마도 123호선으로 명명한 고려시대 고선박 4척을 발굴했다. 조선시대에도 마도 해역에서는 무수한 배가 침몰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상하게도 조선시대 선박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문환석 수중발굴과장은 "좀 더 조사가 필요하지만 분청사기가 선박에 실린 유물이라면, 이 선박이 현재까지 한 번도 발굴된 적이 없는 조선시대 것일 가능성이 크다"며 "지금까지 해양에서 발굴된 고선박 12척 중 최근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드러난 옹진 영흥도선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고려시대에 속한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팀 사진= 태안 조선 백자 인양

문화재청, 남해 용문사 대웅전 보물 지정 '예고'

문화재청, 남해 용문사 대웅전 보물 지정 '예고' 문화재청이 경남 남해 용문사(龍門寺) 대웅전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지난 3일 문화재청은 18세기 다포계 팔작지붕을 갖추었으며 조선후기 바닷가 건축물 특징을 잘 보이는 경남 남해 용문사(龍門寺) 대웅전을 국가지정 문화재인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밝혔다. 이 대웅전은 중창(重創) 기록과 건축 양식으로 볼 때 조선 현종 7년(1666)에 일향화상(一香和尙)이 건립했다가 영조 47년(1773)에 중수(重修)한 상태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인 이 건물은 기단은 지형을 고려해 전면은 2단으로 높게 만들고 뒷면과 측면은 1단으로 삼았다. 또한 기둥과 기둥 사이 여러 개 마련된 공포는 화려하고 장중한 느낌을 주며, 공포를 구성하는 부재 중 하나인 살미에는 장식성이 강한 연꽃과 연봉을 표현했다. 특히 대들보가 기둥을 뚫고 나온 부분인 보머리에는 봉황과 용 머리를 장식해 18세기 특징이 잘 보이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재청은 이 대웅전이 "평면 구성과 공포의 표현기법, 상부 가구와 닫집 등에서 수려한 장엄 수법을 잘 간직한다"며 "남해안 지역의 사찰건축 중 흔치 않은 귀중한 불교문화유산으로서 건축사적 가치가 크므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서 가치가 있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팀 사진= 남해 용문사 대웅전 보물 지정

[남한산성 세계를 품다] 8. 남한산성 제1남옹성

경기개발연구원은 지난 6월 22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에 대한 사업비 투자로, 20년간 8천억 원이 넘는 생산 유발 효과가 발생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경기개발연구원은 남한산성 지역경제 파급효과분석과 활용방안 연구 보고서에서 올해부터 20년간 남한산성 정비사업에 모두 3천900억 원이 투입돼 8천80억 원의 지역경제 파급 효과와 3천600여 명의 고용 유발 효과가 파생될 것으로 분석했다. 또 남한산성의 이용객수(지난해 201만4천명)는 연평균 7.2%씩 늘고 있는데 세계유산 등재로 한해 10% 증가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처럼 남한산성의 경제적 가치는 단순하게 복덩이 수준을 뛰어 넘어 경기도를 대표하는 역사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무한대의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가치를 한층 더 높여주는 등재 후 첫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 초축 당시의 원형 유지하고 있는 제1남옹성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원장 조유전)은 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의 제1남옹성(南甕城)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3일 현장설명회를 개최했다. 이번 조사는 남한산성이 지난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된 이후 실시된 첫 번째 발굴조사다. 제1남옹성은 제2, 제3남옹성과 연주봉옹성 그리고 장경사신지옹성(長慶寺信地壅城)과 더불어 남한산성 5개 옹성 중 하나이다. 이들 5개 옹성 중 이번 제1남옹성을 제외한 4개의 옹성은 이미 발굴조사를 거쳐 정비복원이 거의 마무리 된 상태다. 따라서 제1남옹성에 대한 정비복원이 완료되면 남한산성 전체 옹성에 대한 정비복원은 완결되는 셈이다. 옹성(甕城)이란 주로 성문을 보호하고자 성문 밖으로 마치 독을 놓은 것처럼 별도 성벽을 둥그렇게 만든 성곽 부대 시설로 방어 기능을 겸한다. 제1남옹성의 규모는 상단 기준으로 길이 166m, 너비 9~20m, 둘레 426m이며, 면적은 2,381㎡로, 이번 조사는 발굴(800㎡)과 시굴(1,581㎡)로 구분돼 진행됐다. 제1남옹성은 다른 2곳의 남옹성들과 함께 병자호란 직후인 1638년(인조 16년)에 축성됐다. 제2남옹성과 제3남옹성의 포루가 청나라와의 외교적인 문제로 축조 이후 곧 헐어내고 다시 축성한 것과 달리, 제1남옹성은 초축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남한산성 옹성 중에서 유일하게 옹성 내부에 장대(將臺, 전쟁 시나 군사훈련을 위해 마련한 장수의 지휘소)를 설치해 본성의 수어장대와 나머지 남옹성 간에 연락을 취할 수 있게 한 점이 주목된다. 장대의 축조방법은 대형석재로 측벽과 계단을 구축하면서 내부를 할석과 토사를 이용해 성토다짐을 했다. 한편 장대상부에 있는 2.93.5m 규모의 석축시설은 조사결과 장대와 관련 없는 시설로 밝혀졌다. ■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가치 한층 더 높여 제1남옹성의 기록은 축성 이후 고지도첩에서 보인다. 고지도첩의 남한산도에 제2남옹성과 제3남옹성은 옹성으로 표기돼 있는 반면 제1남옹성은 남포루로 표기돼 있다. 또한 중정남한지에서 보이는 1779년(정조 3년)의 증개축에 대한 기록은 포루부분의 여장에 대한 개축으로 추정되며, 이번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여장부에 사용된 다량의 전돌이 출토돼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장대와 1곳과 포루 8개, 군 초소인 군포 1곳, 배수시설인 수구 등을 확인해 옹성의 기본적인 구조와 단위 시설들을 밝힐 수 있었다. 또한 지형상으로 제7암문과 남서쪽 회절부 사이에 축조돼 그 위치적 이점을 활용하기 위해 장대를 설치한 점, 성부는 본성에서 구릉을 따라 내려오면서 지형조건에 따라 세부적 축성기술을 달리하면서 축조한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조사의 성과로는 제1남옹성 내부의 주요시설과 축성방법을 정확하게 규명, 정비복원에 필요한 학술적 정보를 확인한 점을 우선적으로 들 수 있다. 아울러 제1남옹성은 다른 제2, 3남옹성과는 달리 청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훼철(毁撤, 헐어서 치워 버림) 되지 않고 초축 당시의 원형이 유지된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또 제1남옹성이 포루라는 고유 기능뿐만 아니라 신남성, 본성의 수어장대, 남장대, 여타의 남옹성과의 연결고리를 목적으로 축조된 사실 등을 확인한 것도 중요 성과라 할 수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 조유전 원장은 남한산성 남벽 구간에 대한 탐방객이 북벽구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적기 때문에 남옹성의 존재를 잘 모를 경우가 많다며 제1남옹성에 대한 정비복원을 마무리하고 활용방안을 강구한다면 남한산성의 역사적ㆍ문화재적 가치를 더욱 고양시킴은 물론, 탐방객 분산에도 일조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조 원장은 남한산성이라는 세계유산을 보유했다는 것은 곧 유구한 역사와 문화, 인류 모두가 보존해야 할 유산을 가졌다는 것을 뜻한다며 남한산성이 지닌 정치적경제적 위상과는 함께 문화적 위상이 높아질 수 있도록 앞으로도 다각적인 보존과 관리에 힘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고 끝이 아니다. 세계유산을 보유한 국가는 6년마다 세계유산의 상태에 대한 정기보고를 세계유산위원회에 해야 한다. 또 세계유산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변화가 발생할 경우 보존현황을 의무적으로 보고해야 한다. 왜 왕관을 쓰려는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말이 있듯이 세계유산이 된 이후에는 더 까다로운 관리와 감독이 기다리고 있다. 왜냐, 더이상 대한민국만의, 경기도만의 소유물이 아닌 전 세계인들이 함께 지켜나가야 할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한산성 제1남옹성이 향후 제대로 정비 복원된다면 남한산성의 새로운 역사고고학적 가치를 부각시킬 수 있음은 물론, 남한산성의 남쪽 지역을 관망할 수 있는 전망대의 구실도 톡톡히 할 것으로 기대된다. 강현숙기자 사진=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옹성(甕城)이란? 옹성이란 일반적으로 성문을 외부에서 2중으로 둘린 성벽을 옹성이라 한다. 이러한 옹성의 기능은 출입이 편리한 성문지역에 2중으로 성벽을 둘러싼 반원형(半圓形)이나 방형(方形)의 형태로 조성된 예가 많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문에 마련된 이중벽인 옹성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남한산성에 마련된 옹성은 서북측에 연주봉옹송, 동쪽에 장경사 신지옹성(長慶寺信地壅城), 그리고 남쪽 검단산을 마주하는 지점에 3개의 포대인 옹성이 있다. 이러한 옹성은 일반적인 옹성이 아니고 용도(勇道) 시설이라 하는 것이 더욱 적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옹성이라 하는 것은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서 이러한 시설을 옹성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에는 병자호란을 치른 경험을 바탕으로 중요지점에 5개의 옹성을 마련했다. 남한산성에 마련된 옹성은 성문지역과는 관계가 없이 적의 접근이나 포격을 가하는 곳에 대응하기 위한 시설로 마련됐다.

농악, 세계유산 등재 눈앞

농악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될 것이 확실시 된다. 문화재청은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 산하 임시소위원회인 심사보조기구가 우리 정부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농악에 대해 등재권고 의견을 제시했다고 29일 밝혔다. 등재권고 판정은 이변이 없는 한 그해 개최되는 무형유산위원회에서 그대로 인정된다는 점에서 농악은 한국의 17번째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올해 제9차 무형유산위원회는 오는 11월24~28일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린다. 심사보조기구는 활력적이고 창의적인 농악은 일년 내내 다양한 형태와 목적으로 많은 행사장에서 공연이 이뤄지고 있으며, 공연자와 참여자들에게 정체성을 제공하는 유산으로서 농악의 등재는 인류의 창의성과 문화 다양성에 이바지함으로써 무형문화유산의 가시성을 높이고 국내외 다양한 공동체들 간의 대화를 촉진한다고 평가했다. 한편 한국이 이미 등재한 인류무형유산은 아리랑 외에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2001), 판소리(2003), 강릉단오제(2005), 강강술래남사당놀이영산재제주칠머리당영등굿처용무(이상 2009), 가곡대목장매사냥(이상 2010), 택견줄타기한산모시짜기(이상 2011), 김장문화(2013)가 있다. 강현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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