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보듬는 살고 싶은 마을 [동행공간, 문화도시 수원이 보인다]

서로 마음은 있으나 말 한 번 걸기 어렵고 눈길 주는 게 조심스러워진 시대다. 너와 나의 거리두기가 자연스럽고 개인의 삶이 사회의 흐름이자 진리가 돼버린 요즘, 사실 많은 이들은 누군가를 필요로 할지 모른다. 수원 곳곳에서는 이러한 느슨한 연대의 동행공간들이 각자 피어나 큰 줄기를 잇고 있다. 이번에 만나본 동행공간은 권선구 서둔동의 마을공동체 벌터온이다. 벌터온은 지역 주민들 스스로 ‘서로를 살피고 문제에 맞서며’ 살고 싶은 마을, 기억하고 싶은 동네로 가꿔 나가고 있었다. ③벌터온 지난 16일 찾은 수원특례시 권선구 서둔동 벌터마을회관은 이른 아침부터 주민들의 도란도란 대화 나누는 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마을회관을 빌려 지역공동체와 돌봄공동체를 운영하는 벌터온의 취미 활동 모임 ‘코바늘 수업’이 한창이었다. 내부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부엌과 아이들이 쉴 수 있는 방, 아이들과 마을 주민들이 만든 작품으로 빼곡했다. 이날 코바늘 강사로 나선 신평옥씨(48), 코바늘을 배우러 온 염미화씨(44), 김선례씨(53) 모두 벌터온 주민이다. 강사로 나선 신평옥씨는 ‘무보수’로 주민들에게 코바늘을 알려준 지 3년째. 신 씨는 “처음엔 코바늘을 할 줄 몰랐지만 문화사업을 할 때 강사가 외부에서 와 배우게 됐다. 이후 관심 있는 동네 엄마들과 서로 시간을 맞춰 취미반을 이끌고 있다”고 말했다. ■ “우리가 해보자” 문제에 맞서고 바꿔 나간 주민들의 힘 벌터마을은 나지막한 지붕과 담벼락이 정겨운 동네다. 오래된 집들이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골목골목이 이야기를 머금은 채 살아있다. 하지만 지역산업 쇠퇴와 전투기 소음 등으로 비교적 낙후된 동네로 꼽혔다. 동네에 유일한 놀이터는 가꿔지지 않아 막걸리병 등이 굴러다녔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아이들이 배회하던 장소였다. 인근 서호초등학교의 전교생은 260명 남짓, 고령 인구가 많아 동네 여기저기엔 홀로 앉아 시간을 때우는 어르신들도 많았다. 주민들은 마을이 안고 있는 장점을 살리고 싶었다. 아이들이 나고 자란 동네가 좋은 기억으로 남길 바랐다. 2018년 송진영 벌터마을 대표를 비롯한 주민들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어노는 곳, 살기 좋고 정이 넘치는 마을로 만들자고 마음 먹었다. 시작은 동네에 유일하게 있던 놀이터였다. 때마침 진행되던 수원시지속가능재단의 놀이터 구조대 공모사업에 참여해 후원을 받았다. 낡은 미끄럼틀, 고양이 똥으로 가득한 흙바닥을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으로 바꿨다. 엄마들은 소매를 걷어올려 직접 놀이터 청소를 하고, 미니 책장을 설치해 아이들의 하교 시간에 맞춰 그림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놀이터는 아이들 웃음소리로 가득했고 서로를 알아보고 인사를 주고 받는 어른들이 늘었다. 늦은 시각, 아이들이 놀이터를 배회하면 모른 체 지나가던 어르신들도 애정어린 잔소리와 관심을 건넸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마을이 키워냈다. “모이면 힘이 된다”, “우리도 시도하면 바꿀 수 있구나!” 벌터어린이공원에 스위치를 켠다(ON)는 의미의 벌터온의 도전이 시작됐다. ■ 더 많은 이웃이 담장 밖으로 나와 ‘무언가’를 나누길 스스로 동네 환경을 바꿔낸 힘을 경험한 주민들은 마을 축제를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운영하는 ‘문화마을 만들기’ 사업을 진행하던 팀과 협업해 벌터마을축제를 공동 주최했다. 외부인들이 와서 하던 축제는 오롯이 지역주민들이 만드는 축제로 바뀌었다. 5월과 9월엔 계절을 반영한 마을축제를 열어 기타 연주와 주민들이 선보이는 공연, 음식 나눠먹기 등이 진행된다. 마을 축제가 열리고 연일 동네가 들썩들썩 하자 문을 닫고 있던 홀몸 어르신,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던 이웃이 한 걸음씩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엔 외로운 사람이 없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실 누군가와 나누면 더 행복하고 즐거운데,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벌터온은 동네의 어른 공동체, 학교 공동체와 끊임없이 마을의 연속성을 위해 무언가를 해나가고 만들어 나갔다. 경로당 어르신들과 아이들은 함께 텃밭 가꾸기, 마을 정원을 진행했고 학교와 업무협약을 체결해 환경 수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또 주민들이 멀리 나가지 않아도 마을 안에서 소소한 무언가를 배우고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강사는 주민들이다. 수원역 인근까지 마음을 먹고 나가 무언가를 배워야 했던 주민들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원하는 취미활동을 동네에서 나눴다. 수공예, 독서모임, 도자기 만들기, 미술활동 등등이 벌터온에서 이뤄졌고 서로가 서로의 강사, 말벗이 돼줬다. 취미활동이 이어지는 공간 한 편에는 아이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취미활동뿐만 아니라 급히 아이를 맡겨야 하는 엄마들, 맞벌이 가정이지만 지역아동센터에 들어가지 못해 늦게까지 마을을 배회하던 아이들, 돌봄의 손길이 부족한 아이들, 놀이터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아이들에게 문을 열었다. 주민들이 보살피고 아이들이 서로에게 친구가 돼주자 동네 아이들이 모였다. 밥을 짓고 돌봄 활동은 주민들이 날짜를 맞춰 무료 봉사를 했다. 늦은 시각까지 동네를 배회하던 아이들도 벌터온에서 쉬어갔다. “돌봄은 아동뿐만 아니라 그 가정이 아이 걱정 없이 안심할 수 있도록 가정을 돌봐주는 역할을 하더라고요.” “이렇게 큰 청사진이 이뤄질거라고 처음엔 꿈도 꾸지 못했지만 끝없이 시도를 이어왔다”는 벌터온은 앞으로도 새로운 이웃, 또 아직 문을 열지 못한 주민들과 함께 소소한 삶의 재미를 나눌 예정이다. 살면서 힘들 때 견딜 수 있게 지탱해주는 것은 누군가에게 받았던 지지와 위로, 돌봄이란 것을 송 대표와 벌터온을 꾸려나가는 주민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 송진영 벌터온 대표 “외로운 사람 없게… 마음 나누는 동네 만들고파” Q. 공동체 활동으로 마을에 생긴 변화는 무엇인가. A. 마음을 열기 어려웠던 이웃들이 인사를 나누고 서로를 알아보고 어울린다. 어르신들이 무료한 시간을 벤치에 앉아 때우시다 마을 행사에 함께 참여하려고 일어서실 때 정말 감동적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 우리 모두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전업주부이거나 평범한 직장을 다니던 엄마들이었다. 서로 변화를 꿈만 꾸다 모이니 힘이 나고, 무언가 이뤄졌다. 동네의 힘, 주민의 힘을 우리가 알았다. Q. 6년째 공동체를 이끌어 온 원동력이 궁금하다. A.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마을의 내일이 계속 기대됐다. 참여하는 아이들은 커 가면서 동네 동생들을 돌봐주고 가르쳐 주고 함께 하더라. 이런 활동이 있기 전까지 옆집에 사는 주민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이제는 함께 취미활동을 하고 우리 마을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함께 고민한다. 때론 고민을 나누며 같이 엉엉 울기도 하면서 인간과 연결되는 느낌, 그 소소하고 자잘한 감동이 계속 이어져 왔다. 위로와 돌봄, 지지를 우리 마을 아이들과 어르신들, 또 아직 밖으로 나오지 않은 주민들과 함께하고 싶다.

'자유로운 공간' 속 '삶의 이야기꽃' 활짝 [동행공간, 문화도시 수원이 보인다]

문화도시 수원에서 ‘동행공간’을 찾아나서는 일은 언제나 설렌다. 혼자가 아닌, 함께할 때 빛나는 순간들을 위해 지금도 시내 곳곳에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공간들이 엔데믹 시대를 맞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에 찾아가 볼 공간은 수원특례시 영통구 망포동의 한적한 골목에 자리잡은 ‘서른책방’이다. ②서른책방 커피 머신이 원두를 분쇄하는 소음, 재즈 뮤지션 쳇 베이커의 애달픈 트럼펫 선율,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일정한 리듬으로 울려 퍼지는 노트북 타자 소리.... 다양한 사람들이 지닌 삶의 흔적이 스며드는 이곳을 처음 찾는 이들은 다소 어수선한 느낌에 붕 뜬 인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서로 눈치보지 않고 자유롭게 소통하고, 서로의 생각과 의사를 사려 깊게 존중하는 분위기가 서른책방을 지탱하는 핵심이다. 서른책방의 주인장인 서장원 책방지기(32)는 원래 서울에 거주하며 직장을 다녔다. 지친 일상의 위안이 되는 힐링 스폿을 찾아다니는 게 그의 취미였다. 서울엔 유명한 책방과 핫플레이스가 많았지만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거나 시간을 보내기엔 어려운 경우가 있고, 인근 수도권에 관심을 가지면서 수원에 있던 이곳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트렌디하고 힙한 매력보다는 한 줌의 낭만이 서려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설명했다. 책방이 주는 여유에 매료된 그는 전임 사장에게 2019년 10월께 가게를 넘겨받아 손님에서 주인장이 됐다. 그가 이곳을 운영한 지도 어느덧 4년째인 만큼 그의 취향과 감성이 제법 묻어날 법도 하지만 재밌게도 서 책방지기는 이 공간이 자신만의 감성으로 물들기를 원하지 않는다. 서른책방은 방문객 각자가 지닌 색이 뒤섞이고 더해지는 과정에서 피어나는 이야기를 긍정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남기고 간 사진과 그림, 각종 프로젝트를 통해 시민들과 함께 만든 포스터나 에코백, 추억이 깃든 잡동사니 등 다양한 사연을 지닌 물건들이 책방 곳곳에 스며들었다. 서 책방지기는 책을 큐레이션할 때도 특별한 기준이나 섹션에 얽매이지 않는다. 단골들의 취향을 고려하면서 책장을 정리하는 그는 책방이자 카페인 이곳의 여유 공간을 활용해 작가들과 협업 전시를 펼치기도 한다. 그는 “책방을 거쳐가는 손길이 많으면 많을수록 오히려 좋다”며 “창가 쪽 자리에 걸려 있는 외투가 오늘은 하얀색 점퍼지만 내일은 검은색 코트일 수도 있지 않나. 사소하지만 매일 이곳은 달라지고 또 달라진다. 언제나 예상치 못한 새로움과 생동감으로 가득 채워지는 셈”이라고 웃어 보였다. 그의 철학이 반영된 독서·필사 모임, 소설시·그림책·나만의 책 만들기·공예 클래스 등의 다채로운 연결망 속에서 사람들이 각자 교류의 의미를 되짚어 보며 공간에 녹아든다. 특히 지난해 8월 임발 작가(소설가)와 김승일 시인이 함께했던 ‘소설시 클래스’는 소설과 시를 융합한 이색 프로그램이다. 김 시인이 책방 측에 “이곳은 언제나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들었다”라며 “소설과 융합한다면 이색적인 시도이자 도전이 될 것 같다”는 의견을 전했고, 서 대표 역시 강의를 이끄는 주체나 배우러 온 시민들 모두에게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우당탕 시작된 클래스를 무사히 마쳤고, 참여했던 이들의 이름으로 11월에 출판물도 발간하는 뜻깊은 성과도 냈다. 글을 써 왔든 써오지 않았든 누군가는 작가가 됐고, 누군가에겐 소중한 추억이 생겼다. 각자 인생 스토리의 여백을 채워나가는 데 서른책방이 중요한 거점이 된 셈이다. 지난달 28일 오후엔 방문객 7명을 데리고 박소담 작가(32·여)가 그림책 클래스를 진행했다. 박 작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을 찾는데, 그는 서른책방이 삶에 큰 영향을 줬다고 말한다. 그는 “작품 활동을 이어가다 슬럼프에 직면했을 때가 있었다. 그 때 여기서 클래스를 진행하며 사람들과 만나다보니 위안과 치유를 얻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했겠지만, 소통하다보니 달라질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박 작가는 이곳을 향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책장에 꽂힌 그의 책, 여기저기 걸려 있는 그의 그림들에선 공간과 사람을 잇는 소통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망포동에 사는 오세인씨(34·여)는 서른책방의 주인이 바뀌기 전 오픈 당시부터 이곳을 찾았던 단골 중의 단골이다. 바쁠 때는 자주 찾지 못하지만 SNS로 팔로우를 해놓고 틈틈이 소식을 확인한다. 오 씨는 “서른책방의 묘미는 자주 오는 사람들이 또 찾게 되는 데 있다”며 “무언가 열중해서 시간을 보내기에 참 좋다. 각자의 삶의 방식을 긍정하는 느낌이 드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인터뷰 서장원 책방지기 “딱딱한 서점 이미지 탈피... 가치 존중 있는 화합의 장” Q. 서른책방을 운영하는 철학이 궁금하다. A. ‘화합’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단지 내 이야기로만 채울 수 없는 곳이기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담고자 한다. 언제든 찾아와 사색에 잠겨도 좋고, 밀린 과제와 업무를 처리하기도 하고, 책을 집어들고 잠깐 읽어도 좋다. 그저 각자 지향하는 가치와 목적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품을 수 있는 공간이다. 또 많은 이들과 격식없이 소통하기 위해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오늘 도넛을 만들고 싶다면 판매할 메뉴는 도넛이 된다. 매일 선곡하고, 메뉴를 고르고, 책을 큐레이팅하고, 인테리어를 신경쓰는 데 있어 세부적인 가이드라인을 마련하지 않는다. Q. 코로나19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 있다. 올해의 계획이 있다면. A. 코로나19의 긴 터널은 마음을 단단하게 먹는 계기였다. 내부 취식 금지, 모임 제한 등의 악재를 딛고 꾸준히 방문하는 고마운 단골들을 보면서 버텼다. 집 앞의 프랜차이즈 카페를 마다하고 먼 거리를 달려온 손님부터 서울에서 먼 거리를 달려 찾아오는 손님들까지. 이 공간의 핵심이 ‘사람들’에 있기 때문에 특히 이들에게 더 고맙다. 공간과 사람을 잇는 데 몰두해야 하기 때문에 올 한 해는 책방 운영의 내실을 다지고 손님들께 진심을 다하겠다.

여행자들의 쉼터... 설레는 추억 선물 [동행공간, 문화도시 수원이 보인다]

①낯설여관 수원을 거닐다 보면 곳곳에서 ‘동행공간’을 만날 수 있다. 평범해 보이는 한 카페, 작가들의 흔적이 맴도는 공방, 아날로그의 온기로 채워진 독립서점 등 다양하다. 2021년 법정문화도시로 선정된 수원특례시가 지난해부터 곳곳에 가꿔놓은 ‘문화도시 동행공간’은 지역주민이 주도하는 다양한 문화예술활동이 연일 피어난다. 우리가 안고 있는 일상과 도시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 줄기를 잇고 있다. 수원화성, 북수원, 서수원, 영통, 광교 다섯 개의 생활권역으로 나뉜 수원 구석구석에 퍼져 있는 58개의 동행 공간을 방문하면 문화도시 수원을 엿볼 수 있다. 먼저 들여다볼 공간은 수원특례시 장안구 정자동에 자리 잡은 ‘낯설여관’이다. 계단을 올라 2층의 복도 끝에 다다르면 203호와 204호가 눈에 띈다. 203호는 동네 사진관이면서 작은 영화관으로, 204호는 동네 책방이자 제로웨이스트숍으로 운영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203호로 들어서자 주인장이 반갑게 맞이했다. “여관은 ‘나그네 여’와 ‘집 관’, 그러니까 여행자들이 묵어가는 집이잖아요. 일상 속 여행자들이 평상시 소화하던 리듬에서 잠시 벗어나 쉬어가는 공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우선식 대표(37)와 한지혜 책방지기(35) 부부는 ‘낯설여관’을 운영해온 지 어느덧 3년 차에 접어들었다. 수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직장생활을 하는 등 오랜 시간 이 지역과 함께해온 부부는 사실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는 터를 잡을 때 고민이 많았다. 부부의 마음은 자연스레 어릴 적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 느슨한 여유로 둘러싸인 정자동 한구석으로 향했다. 당시 동네에 시민들이 편하게 와서 책을 구경하거나 읽다 갈 수 있는 공간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 부부의 마음에 걸렸다. 증명사진을 마음 놓고 찍을 곳이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무엇보다 일상 여행자들이 이 공간을 통해 지친 마음을 달래고 쉼을 얻길 바랐다. 부부는 그런 마음을 하나하나 모아 지역민들을 향한 애정으로 빚어냈다. 우 대표는 자주 오는 단골에게 1년 전 모습과 오늘 찍은 모습을 비교할 수 있게 서비스 컷을 제공한다. 또 매년 인근 지역의 어린이집을 찾아 매 계절에 한 번씩 아이들의 모습을 찍어 졸업 앨범으로 엮어내고 있다. 그가 셔터를 누를 때마다 사람과 지역을 연결하고, 사람 사이의 틈을 머금는 순간들이 오래도록 잔상처럼 지속된다. 204호로 발길을 옮기면 비슷한 듯 색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독립 출판물과 잡지, 인터뷰집 등이 배치된 책방이다. 여기에 비건 그래놀라 크래커, 대나무 칫솔, 삼베 마스크 등 친환경 생태 가치를 품은 물품도 진열돼 있다. 주인 부부의 친환경 의식이 녹아들어 있는 이곳은 다른 가게와 다르게 세제나 먹거리 등을 원하는 용량에 맞춰 살 수 있다. 영화동에서 방문한 이종훈씨(38)는 “혼자 살아 제로웨이스트숍 코너에서 생필품을 자주 사는 편”이라며 “이곳은 다른 가게와 다르게 생활용품 등을 내가 원하는 용량에 맞춰 구매할 수 있어 자원 낭비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3호와 204호는 콘셉트와 규모에 따라 모임과 활동 등이 매달 여러 차례 열린다. 테이블을 치우고 영화를 본 뒤 서로 생각을 나누는 자리, 외부의 작가와 함께하는 북토크, 양모펠트 공예 클래스 등 다양한 방문객 참여형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이곳에서 여행자들은 잠시 머물며 생각을 나누고, 좋아하는 것을 함께하고 교류를 확장하기도 한다. 낯설여관에서는 이 공간만이 뿜어내는 고유한 리듬과 속도가 몸을 기분 좋게 감싼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 역시 그 점에 매료됐기 때문일까. 손님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이곳을 방문했지만, 하나같이 여행자의 휴식을 존중하는 느슨한 배려 덕분에 환대 받는 기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얼마 전 강아지를 데리고 와서 온가족이 모여 203호에서 사진도 찍었다는 김민지씨(40·수원시 천천동)는 이날도 딸의 손을 잡고 낯설여관을 찾았다. 출판업계 경험이 있는 김 씨는 “이곳은 생태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주인장의 따스한 마음이 잘 느껴지는 공간”이라고 운을 뗐다. 그는 “기후위기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며 “제로웨이스트는 혼자서는 실천하기 어렵다. 지역 단체, 관련 경험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주위에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저와 타인의 세계를 연결해주는 고마운 곳”이라고 설명했다. 물건을 사러 오지 않아도 좋다.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책방을 찾는 사람도 있다. 서둔동에 사는 고지현씨(25·여)는 힘들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마다 낯설여관을 떠올린다. 그는 “사장님과 간단히 근황을 나누고, 클래스에 참여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따스해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인터뷰 우선식 낯설여관 대표 “소박·따스함이 가득한… 마음을 달래는 곳” Q. 낯설여관에 녹아든 가치관이나 철학이 궁금하다. A. 누구에게나 ‘일상 여행자들의 쉼터’였으면 한다. 각자의 바쁜 상황 속에서 손님들이 많이 온다. 대개 주말에 찾는 분이 많다. 그래서 평일에 열심히 각자의 삶을 꾸려가다가 주말에 쉬어갈 곳을 찾는 이들을 위한 곳이면 좋겠다. 화려함, 풍족함, 편리함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낯설여관에선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 빠르게 뒤바뀌는 현실과 다르게 소박함, 따스함, 불편함이 묻어나는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는 공간이다. Q. 지역주민들과 어떻게 녹아들고 있나. A. 그저 그동안 해왔던 일들을 함께 꾸준히 해볼 생각이다.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사업을 진행할 때는 되도록이면 가까운 곳에 계시는 분들을 선발하려고 한다. 이 지역 주민들이 공간과 함께하는 문화를 만끽하길 바란다. 누구나 쉽게 유입돼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대는 공간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이곳을 찾는 소수의 사람들이 환대받는 공간이었으면 한다. 특히 이곳을 찾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오시는 분들이 책이나 물품을 사지 않아도 좋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바로 나가셔도 좋다. 어떤 목적으로 이곳을 찾았고, 어떻게 여기로 흘러들어 오셨든 그저 몇 분간이라도 잠시 머물면서 잘 쉬다 가시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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