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타이어 김종상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 저렇게 낡아질 때까지 사람을 위해 이날까지 무거운 짐을 받쳐 싣고 매일 바쁘게 달렸겠지 진창길이고 자갈밭이고 가리지 않고 동동걸음으로 숨 가쁘게 일만 하다가 낡았다고 이제 버려져 경로당을 찾는 노인네처럼 썩은 고물들만 모인 자리에 쓰레기로 한몫 끼인 타이어 이제는 갈 곳이 분명한데도 또 무슨 할 일이 주어질까 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다. 낡고 위대한 희망 폐타이어는 구멍이 나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타이어를 말한다. 그러니까 이미 타이어로서의 생명이 다한 것이다. 시인은 저 많은 소재를 놔두고 왜 쓸모없는 폐타이어를 노래하는 걸까. 짐작하건대 시인 자신을 폐타이어에 빗대어 쓴 건 아닐까 싶다. 김종상, 그 이름은 한국아동문단의 전설이다. 1935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59년 새벗에 동시 ‘산골’이 입상되고 196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산 위에서 보면’ 당선으로 문단에 나온 이래 현재까지도 젊은이 못지않은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이제는 갈 곳이 분명한데도/또 무슨 할 일이 주어질까 하고/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다.’ 이 시에서 눈여겨봐야 할 구절이다. 생명이 다한 폐타이어가 그래도 행여나 또 무슨 일거리가 있나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얼마나 눈물겨운가. 아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일지라도 뭐라도 하나 더 하고 싶다는 저 폐타이어 정신! 우리네 인간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삶의 정신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를 존중할 줄 아는 사회 또한 꼭 필요로 하는 삶의 분위기란 생각이 든다. 아, 이 땅의 위대한 폐타이어들이여, 폐타이어 정신이여! 윤수천 아동문학가
휠체어 김재수 휠체어에 앉은 백발의 할머니를 어린 손자가 밀며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손자를 유모차에 태우고 밝은 미소로 황단보도를 건너던 할머니 이제 임무 교대다 손자도 할머니도 얼굴이 환하다. 인생의 바통 터치 휠체어와 유모차를 내세운 할머니와 손자 이야기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는 세월이란 강이 있다. 어린 손자를 유모차에 태우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할머니가 어느새 세월이 흘러 이제는 자신이 휠체어에 앉는 신세가 됐다. 임무 교대를 한 것이다. 임무 교대, 그건 바통 터치다. 타원형의 경기장을 한 바퀴 돌고 난 선수가 다음번 선수에게 바통을 넘겨 주는 육상경기와 조금도 다름없다. “자, 이젠 자네 차례야! 열심히 달려줘.” “수고했어. 이젠 좀 쉬어.” 육상경기에만 바통 터치가 있는 건 아니다. 인생에도 바통 터치가 있다. 곧 임무 교대다. 할아버지가 앉았던 의자에 아버지가 앉고, 아버지가 앉았던 의자에 아들이 앉고, 아들이 앉았던 의자에 손자가 앉고. 필자는 수원의 성곽 길을 산책하면서 먼저 걸어간 이들의 발자국을 내려다보곤 한다. 수많은 이들이 밟고 지나간 길. 오늘 필자가 밟고 간 길을 내일은 또 누군가 밟고 지나갈 것이다. 길은 곧 인생이다. 이를 깨닫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손자도 할머니도/얼굴이 환하다.’ 시인은 임무 교대하는 할머니와 손자를 통해 아주 간단하지만 심오한 인생 공부를 가르쳐주고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지금 이 시각 안종완 마음속 깊이 숨어있는 나를, 천천히 들여다본다. 숙제를 미루고 있는, 친구 민서를 부러워하는, 설렁설렁 공부하는, 내가 보인다. 너는 너 자신에게 솔직하니? 너 자신을 믿고 있니? 네가 하는 공부가 재미있니? 질문을 던져본다. 지금 이 시각 환한 빛으로 내게 온 나를 찾는 시간이다. 마음속 거울 거울 앞에 서면 나를 제대로 볼 수 있다.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마음속에도 나를 볼 수 있는 거울이 있다. 이 동시는 마음속의 거울 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재미난 동시다. 너 자신에게 솔직하냐고, 자신을 믿느냐고, 공부가 재미있느냐고. 질문의 수준이 퍽 어른스럽다. 시인은 아이를 내세워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누구든 이런 질문을 한번 던져 보라고 넌지시 ‘명령’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란 사람들은 도통 알 수 없는 것이 누구에게 딱 말하지 않고 허공에다 대고 하는 말처럼 들리는 소리를 하기 좋아하니까 하는 말이다. 그건 그렇고 이 동시의 해답은 맨 끝 구절에 있다. ‘지금 이 시각/환한 빛으로 내게 온/나를 찾는 시간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다만 어렴풋이 “나는 이런 사람일 거야”라는 자기 나름대로 판단할 뿐이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를 봐야 한다. 이때 ‘남’은 곧 거울이 된다. 내가 나를 보는 것보다 남들이 나를 보는 게 더 정확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거울 앞에 선 아이를 내세워 이를 얘기하려 한 건 아닐까. 윤수천 아동문학가
젤리 할머니 고순례 어느 날 손녀와 만났다 자주 만나지 않다 보니 낯가림하는 손녀 “할머니 손잡고 산책 좀 해!” 엄마의 말에 내 손을 잡은 손녀 “할머니 손이 젤리 같네요.”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난 갑자기 젤리 할머니가 되었다. 손, 따뜻한 안테나 대가족 시대와 달리 요즘엔 어느 집이고 할머니와 손녀가 떨어져 산다. 그러다 보니 끈끈한 정이 없다. 이 동시는 핵가족의 일면을 보여준다. 오랜만에 만나다 보니 할머니와 손녀 사이가 조금은 서먹서먹하다. 이를 본 엄마가 다리를 놓는다. 그게 손잡는 일이다. 손, 그건 무전기나 텔레비전으로 치면 ‘안테나’나 다름없다. 전파 대신 감정을 느끼게 하는 수신기다. 어릴 적 엄마들은 딸들에게 일렀다. 사내들한테 함부로 손 주지 말라고. 손 한 번 주면 나머지 것도 하나씩 주게 된다고. 손은 그만큼 신체 중에서 가장 예민한 감각을 지녔다. 그래서 예전엔 제아무리 친해도 남녀 간에 손 잡기를 꺼렸다. 손은 ‘전기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할머니 손이 젤리 같네요.” 할머니의 손을 잡아본 손녀의 이 말은 손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난 갑자기 젤리 할머니가 되었다.” 손녀와 할머니는 손을 잡음으로 해서 이미 하나가 된 것이다. 시인이 말하고자 한 게 바로 이것이라고 본다. 요즘엔 산책길에서 할머니와 손녀가 손잡고 걷는 것 대신 애완견을 데리고 다니는 광경을 자주 본다. 그 귀엽던 손녀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이 동시를 읽으며 필자는 가슴 한 구석이 쓸쓸하다 못해 썰렁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뛰어다니는 말들 이재순 쉬는 시간 쏟아진 말들 교실에 가득하다 고삐 풀린 말들로 교실은 온통 말들의 들판 딩동 딩동 벨 소리에 말들은 모두 우리 속에 들어가 숨었다 스륵스륵 선생님 슬리퍼 소리 들린다 쉿! 우리들의 들판 수업이 끝난 교실은 시장바닥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소란스럽기 짝이 없다. 그게 초등학교 교실의 풍경이다. 시인은 이를 놓치지 않고 작품 속에 고스란히 살려 넣었다. 재미있는 것은 아이들이 쏟아내는 말과 들판을 달리는 말을 교묘히 섞어 작품의 향기와 함께 ‘맛’을 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있다. 교실에 쏟아내는 아이들의 말이 들판을 달리는 말만큼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것도 은연중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살아 있는 소리, 꾸미지 않은 말은 아이들만이 지니고 있는 동심의 힘이자 삶의 에너지다. 그건 때 묻은 어른들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필자도 그런 초등학교 경험을 갖고 있다. 휴식시간. 그 짧은 시간은 우리들의 독무대였다. 칠판에 낙서하는 아이, 노래 부르는 아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아이, 책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아이, 운동장인 양 뛰어다니는 아이…. 그야말로 지상 최대의 쇼였다. 그 풍경은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줄 안다. 저 들판을 달리는 말이 돼야 하니까. 그러면서도 선생님의 슬리퍼 소리가 나면 쉿! 조용할 줄도 알아야 하니까. 윤수천 아동문학가
밤 5형제 박재성 까칠까칠 까칠한 밤송이가 입을 쩍 벌리면 윤기 자르르한 알밤 5형제가 투두두둑 떨어져요 누가 형일까요? 모닥불에 올려놓으면 서로 형이라고 뻥뻥 소리쳐요 누가 형인지 정말 정말 모르겠어요. 조용할 날 없는 아이들 가을은 마음이 넉넉해지는 계절이다. 높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들녘마다 곡식과 과일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이 동시는 가을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밤을 소재로 하고 있다. 하나의 밤송이에서 나온 알밤 다섯이 서로 형이라고 우긴다. 그것도 ‘뻥뻥’ 소리 높여 외친다. 시인은 밤 5형제를 통해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들은 잠시도 조용할 날이 없다. 모였다 하면 온 방을 운동장으로 만든다. 방뿐인가. 골목이며 공원 같은 곳도 저희들의 안방이나 다름없다. 시끄럽기 그지없는 게 아이들의 노는 모습이다. “시끄럽다”느니 “제발 조용히 놀 수 없니” 하는 말은 무용지물이다. 우린 알아야 한다. 아이들이 가만있지 못하고 시끄러운 건 곧 살아 있다는 것이고 성장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그렇게 어른이 돼간다. ‘누가 형일까요?’... ‘누가 형인지/정말 정말/모르겠어요.’ 시인은 끝내 누가 형인지를 밝히지 않는다. 아니, 일부러 밝히지 않은 걸로 안다. 알밤 다섯 개가 모두 형이기 때문이다. 외아들로 태어난 필자는 어릴 적 형이 있는 친구가 몹시도 부러웠다. 형과 같이 다니는 친구를 보면 나도 형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했다. 다 지난 얘기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시골집 오명희 공부하러 서울 간 똑순이 누나 일 찾아 서울 간 똑독이 형아 누나가 쓰다만 화장품 냄새 형아가 두고 간 운동화 두 짝 누나가 보고 싶나봐 형아가 보고 싶나봐 시골집은 오늘도 고개가 아파요. 그리움이 남긴 흔적 사람의 감정 가운데 그리움처럼 맑은 게 어디 있을까. 순백의 얼음 같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물에 비친 달의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이 동시는 서울 간 누나와 형아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마음을 담았다. 재미있는 것은 누나와 형아가 두고 간 그리움의 흔적이다. 누나는 ‘화장품 냄새’로, 형아는 ‘운동화 두 짝’으로 보여준다. 왜 아이가 직접 보고 싶다고 하지 않고 그것들이 보고 싶다고 했을까. 이게 더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문학적 기법이다. 자기 대신 뭔가를 내세워 은근슬쩍 감정을 표현했을 때 몇 배의 효과를 낸다. 사랑도 마찬가지. “나 너 좋아해” 하는 것보다 “내 그림자가 말이지, 너를 많이 좋아하나 봐” 했을 때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가. 문학에 있어 비유는 요리의 양념이자 소스다. ‘시골집은 오늘도/고개가 아파요.’ 이 또한 얼마나 가슴을 울리는 구절인가. 아이의 마음을 시골집이 대신해 주고 있다. 오명희님은 적잖은 나이에 첫 동시집을 낸 이후 꾸준히 동시를 쓰고 있다. 손자 손녀들과 함께 문학 속에서 삶의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해서 말인데, 글쓰기는 혼자서 갖고 놀 수 있는 가장 좋은 ‘장난감’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특히 노후엔. 윤수천 아동문학가
충전 김재수 휴대폰에 충전기를 꽂았다 한 시간 걸린다는 문자에 10, 20, 30%... 점점 채워지는 숫자도 보인다 오늘따라 힘이 없어 보이는 엄마 힘내라고 두 손을 꼭 잡았다 10, 20, 30%... 엄마가 충전되고 있었다 엄마가 빙그레 웃어 주었다. 삶을 충전하는 온기 충전은 기계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사람에게도 필요하다. 이 동시는 휴대폰을 통해 엄마를 이야기하고 있다. 엄마, 참 고단한 이름이다. 한 가정의 살림을 꾸려 가는 사람. 살림뿐 아니라 한 집안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사람. 요즘엔 여기에다 바깥일(직장)까지 떠맡고 있다. 그러다 보니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발은 스무 개가 있어도 부족하다. 아이는 고단한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슬며시 다가가 손을 잡는다. 휴대폰에 충전기를 꽂듯이. 이에 힘을 얻은 엄마가 대답 대신 빙그레 웃는다. 휴대폰의 충전기와 아이의 손,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초등학교 강연을 할 적에 필자는 어린이들에게 꼭 당부한 말이 있었다. 집에 들어갈 때 ‘씩씩하게’ 들어가라고. 그러면 부모님은 제아무리 힘든 하루였다 할지라도 피곤하지 않다고. 여러분의 그 씩씩한 모습 하나가 부모님에겐 삶의 충전이 되는 거라고. 우리 어머니도 그러셨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꼭 내 얼굴을 살피셨다. 나중에 커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자식은 부모님에게 하나의 충전기다. 이 동시는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김재수 시인은 거의 하루에 한 편씩 동시를 써내는 생산성 높은 작가다. 부럽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비의 손 이재순 두두두두, 다다다다 수만 개비의 손가락을 가진 손 터진 논바닥 말라가는 밭고랑 꿰매고 목마른 벼 시든 콩잎 어루만진다 애타는 할머니 마음도 젖은 손이 꿰맨다. 생명의 단비 비도 손을 가졌나 보다. 그것도 수만개의 손가락을 가졌나 보다. 이쯤 되면 그 손은 인간의 손이 아니라 ‘신’의 손이 분명하다. 역시 시인의 생각은 일반인과 다른 면이 있다. 이 동시가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비의 수많은 손이 말라가는 밭고랑을 꿰매고 벼와 콩잎에 물을 길어다준다. 어디 그뿐인가.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할머니의 마음도 적셔준다. 어릴 적 이웃에 사는 감나무집 할머니는 비를 그냥 비라고 하지 않고 꼭 ‘님’자를 붙여 빗님이라고 말했다. 비는 사람이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늘이 내린다고 해서 존칭어를 썼다. 어떻게 보면 그게 옳은 말인지도 모른다. 문명이 발달하다 못해 오히려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는 오늘날에도 비만은 어쩔 도리 없이 하늘만 쳐다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시인은 이런 비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썼다. 터진 논바닥, 말라가는 밭고랑, 목마른 벼, 시든 콩잎. 이를 바라보는 시골 할머니 마음까지를 보듬는다. ‘젖은 손’은 비의 손이자 곧 시인의 마음이다. 시인은 얼마 전, ‘티슈, 손 내밀고 있는 하얀 손수건’이란 동시집을 내어 금년도 이주홍문학상을 받았다. 사물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독특한 표현으로 감동을 준다는 게 심사 소감이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반딧불이 이성혜 반딧불이는 왜 반짝일까요? 그건 아마도 달빛 한 스푼, 별빛 한 스푼, 내 웃음도 한 스푼 그래서 반짝반짝 빛나나 봐요. 어둠을 밝히는 반짝임 여름밤의 총아는 뭐니 뭐니 해도 반딧불이 아닌가 한다. 어둠 속을 날아다니며 반짝반짝 빛을 내는 아기의 눈빛 같은 반딧불.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은 그 반딧불이를 잡아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추억을 갖고 있을 줄 안다. 이 동시는 여름밤의 그 반딧불을 노래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반딧불이가 어떻게 빛을 내는가를 설명해준다. ‘달빛 한 스푼, 별빛 한 스푼…’ 그러니까 반딧불이가 내는 빛은 ‘자연’의 빛이라는 것이다. 맞다. 다 알다시피 반딧불이는 맑은 계곡물에서 서식한다. 그래서 맑디맑은 빛을 낼 수가 있다. 필자는 오래전에 반딧불이를 동화로 쓴 적이 있다. 아이는 그 반짝이는 반딧불을 갖고 싶어 간신히 반딧불이를 잡아 유리병 안에 넣었다.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유리병 안의 반딧불이가 빛을 내지 않는다. 이에 실망한 아이는 유리병 속에 든 반딧불이를 내보내 준다. 그런데 유리병 안에서 나온 반딧불이가 고맙다는 듯 하늘로 날아가며 반짝하고 빛을 내는 게 아닌가. 필자는 그 동화를 통해 ‘자유’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반딧불이는 누구의 지시나 강요가 아닌 스스로 내고 싶어 빛을 낸다는 것을. 이 동시도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본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수박 씨 김경옥 엄마 수박 속에 잠자는 아기 수박 살살 꼬여내어 밭에다 놀게 해줬다 푸른 싹 틔워보라고 줄기도 뻗으라고. 싹 트는 아기 수박 과일 가게마다 여름 과일이 풍성하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수박이다. 덩치도 클 뿐 아니라 왕성한 초록빛이 보기에도 시원하다. 이 동시는 수박을 소재로 삼되 그 속에 들어있는 ‘씨’를 노래하고 있다. ‘아기 수박’이라고 한 것도 귀엽지만 이를 ‘살살 꼬여냈다’는 표현이 너무도 재미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꼬임의 목적이다. 그냥 놀자고 꼬여낸 게 아니라 스스로 생성의 맛을 느껴보라고 한 것이다. 이쯤 되면 꼬임 그 자체는 결코 지탄받을 일이 아니라 칭찬받을 일이다. 우린 누구나 어릴 적에 친구를 꼬여냈거나 꼬임을 당한 일이 한두 번은 있을 것이다. 그중 가장 많은 꼬임은 대체로 같이 놀자는 것이었을 것. 그게 친구였고, 꼬임을 당한 쪽도 즐겁기 그지없었다. 김경옥 시인은 시조가 전문 분야임에도 간간이 동시조(童時調)를 보여주고 있다. 동심을 한껏 우려낸 이 동시조의 매력은 귀엽고 재미있음에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 동시는 무엇보다도 귀엽고 재미있어야 한다. 간혹 문학성 운운하면서 어렵게 쓴 동시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느끼는 필자의 감정은 억지로 넘기는 알약과 같다. 요즘엔 알약도 넘기기 좋게 코팅을 해 제조한다. 동시도 그래야 한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하느님의 회초리 오순택 빗금으로 오는 비는 하느님의 회초리 회초리 맞고 풀잎은 푸른 멍이 들고 꽃잎은 얼굴이 붉어진다. 더 푸르게 더 아름답게 피어나라는 하느님의 매운 회초리 풀꽃이 아름다운 이유 필자는 이 동시를 읽고 나서 세 번 놀랐다. 한 번은 하느님은 말씀으로만 훈계를 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었고 또 한 번은 응징의 뜻으로 회초리를 드시는 게 아니라 격려의 차원에서도 회초리를 드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놀란 것은 이 비밀을 오순택이란 시인은 어떻게 알았느냐는 것이었다. 아무튼 흥미로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온 세상의 풀잎과 꽃잎이 푸르고 아름답게 피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회초리 덕분이라는 사실이 놀랍고도 반갑다. 50, 60대 이상 된 이들은 회초리에 대한 추억을 한두 개쯤은 갖고 있으리라. 부모님한테서 받은 회초리 추억이거나 선생님한테서 받은 회초리 추억이거나. 그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잘못한 일에 대한 응징? 아니면 잘되라고 내린 격려? 같은 회초리라도 생각하기에 따라 아픔의 차이가 달라질 수 있다. 이 동시 속의 하느님은 ‘더 푸르게’ 그리고 ‘더 아름답게’ 피어나라는 뜻으로 풀잎과 꽃잎에게 회초리를 들었다. 이를 안 풀잎과 꽃잎은 웃으며 하느님의 회초리를 달게 받았다. 해서 말인데, 하느님에게 부탁드리고 싶다. 풀잎과 꽃잎에게만 회초리를 들지 마시고 제발 우리들한테도 따끔한(?) 회초리를 내리시옵소서. 윤수천 아동문학가
제비꽃 박민순 큰 꽃은 대충 넘겨보지만 쪼그리고 앉아 가까이서 본다 어린아이가 기도하는 듯한 너를 자세히 본다 잘났다 뽐내지도 못났다 숨지도 않고 작은 키 곧추세워 꽃을 피우니 아름다운 네 모습에 내가 젖는다. 평범함 속 아름다움 제비꽃은 키가 작다. 키뿐 아니라 생김새도 조그맣다.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 만큼 쪼그리고 앉아야 간신히 눈을 맞출 수 있는 꽃이다. 시인은 하고많은 대상 속에서 왜 제비꽃을 시제로 삼았을까. 시인은 제비꽃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들을 찬양하고 싶었다는 생각을 했다. 잘났다고 뽐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목소리조차 소음이 될까 봐 조심하는 이들. 먼저 달려 나가기보다는 함께 가고 싶은 이들. 남을 배려하고 이해해주려는 이들. 더불어 사는 삶이 곧 행복이라고 여기는 이들. 운동회 때 두 사람이 짝을 이뤄 다리를 묶어 달리기를 한 경험이 있다. 결승선까지 넘어지지 않고 달리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보조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일이지만 잘났다고 뽐내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사회를 튼튼히 받쳐주고 있는 것을 본다. 목소리만 커가지고 나라니 국민이니 앞세운 사람들은 오히려 가만히 있는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이 더 많았다. 이 동시는 그런 뜻을 은연중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네 모습에/내가 젖는다.’ 그렇다. 꽃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나비처럼 걷다 송영숙 아파트 뒷동산 오솔길 짧은 오르막길 지하철 타러가는 지름길 내가 즐겨 걷는 길 배롱나무 꽃잎 잔뜩 떨어진 오늘 아침 오솔길 떨어진 꽃잎, 밟히면 아플까 나비처럼 가볍게 걷는다 오솔길 옆 작디작은 풀꽃 위를 팔랑거리는 나비처럼 꽃은 꺾는 게 아니라 보는 것 오솔길은 혼자 걷도록 난 길이다. 그래서 실처럼 가늘다. 굳이 넓을 필요가 없다. 사람 하나 빠져나가면 되는 길이 오솔길이다. 반면에 오솔길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길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이 동시는 지하철을 타러 가는 아이의 마음을 보여준다. 엊저녁에 비가 왔는지 길에는 배롱나무 꽃잎이 떨어져 있다. 아이는 땅에 떨어진 꽃잎을 밟지 않으려고 걸음을 조심스레 떼 놓는다. 아이의 마음이 천사 같다. 어릴 적 읽은 동화가 생각난다. 공원에서 뛰놀던 아이가 바람에 날려 모자가 꽃밭으로 들어가자 그만 울음을 터뜨린다. 꽃밭에 들어가면 꽃이 망가질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마침 공원에 산책 나왔던 노신사가 이를 보고 지팡이로 꽃밭의 모자를 건져 내준다. 동심은 어렵게 얘기할 것 없이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를 내 몸처럼 여기는 것이다. 지난번 화마에 잿더미가 된 산과 들을 보며 우린 많은 생각을 했다. 한순간의 부주의가 엄청난 재앙을 불러온다는 것을 체감했다. 그와 함께 자연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절실히 깨달았다. 인간의 행복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자연 속에 있다는 것도 뼈저리게 느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골탕 이성자 엉뚱하기로 소문난 우리 반 대풍이 4학년으로 올라온 첫날 -선생님,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뭐예요?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그야, 된장찌개지. -그럼 제일 싫어하는 음식은요? 잠시 생각에 잠긴 선생님 활짝 웃으며 -그야, 골탕이지. 한 방에 아웃된 대풍이 일 년 내내 힘 못 쓰겠다. 짓궂은 학창시절 추억 어느 학급이고 짓궂은 친구가 있다. 특히 선생님만 골라서 골탕을 먹이기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이 동시 속의 대풍이도 그중 하나다. 4학년이 돼 처음 맞는 선생님을 골탕 먹이려고 잔뜩 벼르고 있는 대풍이. 그런데 이를 눈치 챈 선생님이 먼저 한 방을 먹인다. 가장 싫어하는 음식은 ‘골탕’이라고. 이때의 대풍이 표정은 어떠했을까. 보나 안 보나 우거지상이었을 것 같다. 학창시절은 참 많은 추억을 남긴다. 그 가운데는 아름다운 추억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추억도 있다. 친구도 마찬가지다. 좋은 친구도 있지만 못된 친구도 있다. 남을 골탕 먹이기 좋아하는 친구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그런 친구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모범생보다 말썽꾸러기가 더 기억에 남는다고 하던가. 글도 다를 게 없다.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은 글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반면에 못된 짓만 골라 하는 골칫덩어리는 항상 글의 중심에 선다. 위 동시에서 대풍이가 착한 아이였다면 이성자 시인은 글을 못 썼을 것이다. 고맙게도 말썽꾸러기였기에 작품 하나를 얻은 것이다. 작가들은 이처럼 고약한(?) 아이들을 찾아다닌다. 그러고 보면 작가들도 참 못된 취향을 갖고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웃음꽃 권말순 벚꽃 목련꽃 개나리 이런 꽃보다 더 예쁜 꽃은 웃음꽃 내 친구가 나를 볼 때마다 보내주는 웃음꽃 결코 시들지도 않는 항상 싱싱한 꽃 친구야, 고마워. 가까운 행복 한세상 사는 데 친구처럼 좋은 것도 없다. 얼굴만 봐도 좋은 게 친구다. 어릴 적엔 아침부터 꼬박 하루를 같이 놀고도 다음 날이면 또 놀고 싶은 게 친구다. 그래서 나온 말이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하지 않던가. 이 동시는 친구의 웃는 얼굴이 꽃보다 더 예쁘다고 노래한다. 웃음꽃이 벚꽃, 목련꽃, 개나리보다 더 보기 좋다고 한다. 그 이유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웃음꽃은 결코 시들지 않기 때문이란다. 맞다! 친구의 웃음 한 바가지는 상대방의 가슴을 환한 물결로 넘치게 한다. 여기에다 웃음은 전염성도 강하다. 웃음 한 바가지를 선물받은 이는 만나는 이에게 또 옮겨준다. 어릴 적 읽은 만화 생각이 난다. 아침에 꾸지람을 들은 아이가 강아지한테 화풀이를 하고도 모자라 빈 깡통을 냅다 발로 걷어찼다가 하필이면 그 깡통이 지나가던 아주머니의 종아리를 때리고 울상을 짓는 만화였다. 날로 각박해지고 웃음기가 메말라가는 요즘이다. 이런 때일수록 나부터 웃음꽃 한 송이 피우는 일은 어떨까. 그리고 그 웃음꽃을 만나는 사람들의 가슴에 꽃씨를 심듯 넣어준다면? 행복이란 게 어디 별건가. 고된 삶일지라도 이렇게 작은 웃음꽃 한 송이 주고받으며 사는 게 행복 아니겠는가. 윤수천 아동문학가
까치집 정용원 미루나무 꼭대기 반쯤 지은 까치집 아빠 까치는 서까래 구하러 가고 엄마 까치는 솜털 담요 사러 간 사이, “주추와 기둥은 튼튼한가?” 바람은 한바탕 흔들어 보고 “아기 까치 태어나면 둥지 안은 포근한가?” 봄 햇살은 뱅그르르 둥지 안을 돌아본다. 사랑의 보금자리 까치는 주로 미루나무 꼭대기에 집을 짓는다. 왜 낮은 곳을 마다하고 그 높은 곳에 삶터를 장만하는 걸까. 높은 곳일수록 바람도 세고 빗줄기도 강할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까치들은 지금까지 미루나무 꼭대기를 고수해 왔다. 거기에는 필연코 그들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까치집은 엉성하기 그지없다. 비쩍 마른 나뭇가지와 진흙을 얼기설기 얹어놓은 데 불과하다. 이 동시는 바로 그 점을 걱정하고 있다. 바람은 얼기설기 지은 까치집이 튼튼한지 어떤지 흔들어 본다. 또 햇살은 까치집 안이 포근한지 어떤지 둥지 안을 들여다본다. 까지집을 걱정해주는 바람과 햇살의 마음이 참 어여쁘다. 무엇보다도 까치 부부의 사랑이 너무도 아름답다. 머잖아 태어날 새끼 까치를 위해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부부의 정성어린 행동이 따뜻하기 그지없다. 그러고 보면 까치나 인간이나 부모는 같은가 보다. 그 많은 가운데서 만난 인연을 함께 가지고 간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변함없는 삶을 이어간다. 정용원 시인은 원로 아동문학가로 얼마 전에 산수 기념으로 ‘동심문학 반세기’란 문집을 출간했다. 50년의 동심문학을 총정리한 것이다. 축하와 함께 앞으로의 건승을 기원한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새싹 장춘희 들썩, 연노랑 새싹 아기의 작은 어깨 짓 대지를 들어 올린다 또 한 번의 안간힘으로 언 땅을 밀고 올라온 왼쪽 어깨 세상마저 들어 올린다 봄은 늘 여린 몸짓으로 우주를 여는가 보다 어여쁜 ‘봄’ 봄은 참 대견하다. 겨우내 꽁꽁 언 땅을 비집고 올라온다. 봄은 참 귀엽다. 연둣빛 싹을 쏘옥 내미는 것을 보면 꼭 잠에서 막 깬 아기 얼굴을 보는 것 같다. 이 동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여린 몸짓으로 우주를 연다’는 것. 시인은 왜 ‘강한 몸짓’ 대신 ‘여린 몸짓’이 우주를 연다고 했을까. 강한 몸짓이 우주를 여는 데 더 좋지 않았을까. 세상에는 강한 것보다 여린 것이 더 힘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는 법. 두꺼운 외투를 벗기는 것은 북쪽의 찬 바람이 아니라 따사로운 햇볕이다. 마찬가지로 봄은 왁자지껄하게 오는 게 아니라 소문도 없이 온다. 그게 봄의 어여쁨이다. 필자의 친구 가운데도 ‘봄’ 같은 이가 있었다. 중학교까지 같은 학급에서 공부한 그 친구는 언제나 조용했고, 은근했고, 말이 없었다. 그냥 좋으면 배시시 웃는 것으로 대신했다. 싫어도 내색을 하지 않는 게 그 친구의 태도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미적지근한’ 친구로만 대했다. 그러나 그가 다른 학교로 전학 간 후 우리는 그의 존재를 새삼 깨달았다. 그의 조용한 태도와 은은한 미소가 종종 떠올랐다. 요즘처럼 시끄러운 세상에 봄 같은 그 친구가 생각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봄은 예나 지금이나 목소리가 낮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나도 엄마 강금순 휴일 아침 늦잠 자는 엄마 대신 화장대에 앉은 꼬마 아가씨 분첩 꺼내 조심스럽게 톡톡톡 눈썹연필로 삐뚤삐뚤 입술은 붉은 립스틱으로 범벅 —나도 엄마다! 거울 들여다보고 미소 짓는다 큰 가방 둘러메고 현관으로 달려가서는 엄마구두 신고 뒤뚱뒤뚱 큰소리로 —회사 다녀올게! 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어른이 돼서 더 너른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 이 동시는 엄마가 되고 싶은 아이의 마음을 재미있게 보여준다. 화장대 앞에 앉아 엄마가 하던 행동을 흉내 내본다. 얼굴에 분도 발라보고, 눈썹도 칠해보고, 입술에 립스틱도 발라본다. 그러고는 나도 엄마라고 미소 짓는다. 어디 이것뿐인가. 회사에 출근하는 엄마의 흉내까지 내본다. 큰 가방도 둘러메보고, 엄마 구두도 신어보고. 어릴 적엔 누구나 이런 짓을 한두 번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른들 눈에 띄어 한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어른이 뭐 그리 좋다고. 쯧쯧쯧.” 살아보니 어른만큼 걱정 많은 인생도 없다. 눈만 떴다 하면 하루가 걱정으로 시작해 걱정으로 끝난다. 집 걱정, 일 걱정, 돈 걱정, 자식 걱정. 걱정을 내려놓고 지낸 날이 과연 몇 날이나 되던가. 언젠가 한 잡지에서 엄마를 반납하고 싶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게 소원대로 이뤄진다면 어른을 반납하기 위한 엄마들의 줄이 끝도 없을 것이다. 이 ‘나도 엄마’는 그런 의미에서 미소 짓게 한다. 동시는 때로 어른들 앞에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된다. 그러면서 혼자 쓸쓸히 미소 짓게 한다. 아, 서글픈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어른들이여! 윤수천 아동문학가
세찬 비바람에도 쑥 햇님의 사랑을 받아 쑥 자고 일어났더니 또 쑤욱-쑥 매일매일 다르단 말이지 넌 바로 너 말이야 이 동시를 읽다 보니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아침마다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해 벽에다 표시를 했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옆집 수동이도, 태식이도, 영자도 그랬다. 우린 그렇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키재기판이 없던 시절 이야기다. 시인도 어릴 적에 그랬나 보다. 하루라도 빨리빨리 자라고 싶어 ‘쑥’이란 어휘를 사용했다. 매일 조금씩 자라고 싶은 게 아니라 단숨에 쑥쑥 자라고 싶었나 보다. ‘세찬/비바람에도/쑥//햇님의/사랑을 받아/쑥’. 그리고 또 있다. 시인은 여기서 키만 노래한 게 아니다. 아이의 마음도 함께 노래했다. 쑥쑥 자라는 만큼 마음도 튼튼해져야지 다짐한 것이다. 내 어릴 적에 비하면 요즘 아이들은 키도 크고 체격도 당당하다. 좋은 환경에서 영양가 있는 음식 먹고 자유롭게 자라는 덕분이다. 그러다 보니 서양의 청소년들과 비교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 국제경기에서도 당당한 체격을 보여주는 우리의 청소년들이다. 기왕 자라는 김에 튼튼한 체력만큼 꿋꿋한 의지와 인내심까지 지니기를 바라고 싶다. 시인은 몇 해 전, 동시집 ‘아기별 탄생’을 일본어판으로 내 왕인 박사를 흠모하는 일본 어린이들에게 좋은 선물을 하기도 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