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종교] 계사년 설날을 맞으며

계사년 설날을 맞이했다. 서양력으로 인해 새해를 맞이하였으나 음력설이 지금 우리의 설이다. 정말 정답고 가슴 설레이게 하는 날이다.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새로운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고, 새학기, 새직장 등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계절이다. 하지만 새로운 설레임 대신 걱정이 태산이다. 오르는 물가는 서민들을 더욱더 힘들게 하고, 늘어나는 청년실업률, 급변하는 세계정세 등 하루라도 편안한 날이 없다. 이럴수록 우리는 희망과 용기를 갖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바꿔야겠다. 인간은 태어날 때 세가지 삼독심(三毒心) 즉, 탐, 진, 치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욕심을 내게 되면 화가 생기고 그렇게 되면 지혜의 종자가 사라져 항상 번뇌와 망상에 사로잡혀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나니, 그것을 버리면 항상 맑고 바르게 생활하게 되며 자비심으로써 베풀게 될 것이다. 천지동근(天地同根), 만물일체(萬物一)라 하늘과 땅도 나와 더불어 하나의 뿌리이고,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한 몸이라 하였는데 법성(法性)과 나의 성품이 같은 뿌리이고 진여(眞如)와 무명(無明)이 하나의 몸통이라 하지 않았던가 모든 자존심과 허상을 벗어버린다면 우리에게 참된 성품으로 관(觀)할 것이다. 세상만물은 모두 생명을 지니고 있다. 중아함경에 보면 올바른 진리를 깨닫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땅, 물, 불, 바람의 생명현상을 개인의 소유물로 파악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 고 하셨다. 서해안을 바라보는 덕숭산 수덕사의 만공스님 사리탑에는 지금도 너와 나, 해와 달, 하늘과 땅, 공기와 물이 둘이 아니라 같은 뿌리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다 는 뜻의 세계일화(世界一花) 라는 문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누가 잘하고 누가 잘못을 하는가를 가리기 전에 스스로가 잘잘못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가 반성을 하고 참된 진리의 깨달음을 체득을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생명에 두고 우리가 생존하는 모든 생명에 대해 서로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올해 교수들이 뽑은 사자성어가 거세개탁(擧世皆濁)이었다. 이 말의 뜻은 온세상이 모두 탁해 홀로 맑게 깨어있기 힘들다 라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초나라의 충신 굴원이 지은 어부사(漁父辭) 에 담겨있다. 모함으로 벼슬에서 쫓겨난 굴원이 강가를 거닐며 시를 읊고 있자 고기잡이 영감이 그를 알아보고 어찌 그 꼴이 됐냐고 물었다. 이에 굴원은 온 세상이 흐린데 나만 홀로 맑고 뭇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어 쫓겨 났다고 답했던 고사에서 비롯됐다. 어떠한 상황과 어려운 경우가 닥치더라도 밝은 지혜로써 처신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배려하고 자비를 베푼다면 절망이 희망으로 불신이 믿음으로 바뀌어 질 것이다. 昨夜夢中頭頭佛(어젯밤 꿈속에 서는 머리 머리마다 부처이더니)今朝開眼物物薩(오늘 아침 눈을 뜨니 물건 물건마다 보살이구나!) 遠着窓外處處主(멀리 창밖을 바라보니 곳곳마다 주인이요) 秋來黃葉念念一(가을이 와 잎 노라니 생각 생각이 하나로구나!) 이 게송은 우리 모두 부처가 되자, 주인공이 되자 는 뜻의 게송이다. 부처를 이루려면 보살도를 실천해야 한다. 보살이란? 나보다 남을 이롭게 하는 이를 가르킨다 보살도를 실천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니, 가까운 곳을 한번 살펴보는 계사년 한해가 되기를 서원한다. 우리 속담에 원수는 모래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다.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은혜는 모래에 새겨 금방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버려야 할 원수는 돌에 새겨 두고두고 기억하는 것이다. 은혜를 마음에 새기면 고마움이 남아 누구를 만나도 무슨 일을 만나도 즐겁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음에 원수를 새기고 나면 그것은 괴로움이 되어 마음속에 쓴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된다. 우리는 정말로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고 있다. 한나라의 대통령도 새로운 정책을 준비하고 세계의 모든 나라가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는 작금에 우리 스스로도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믿음이다. 성 행 청계사 주지

[삶과 종교] 궁합

목사가 쓰기에는 좀 거시기한 제목인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요리를 좋아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직접 만들어 먹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어제 아침에는 요즘 한창 바쁜 아내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남은 갈비찜 약간과 신 김치를 넣고 볶다가 밥을 넣어 깊은 냄새가 베도록 하고, 약간의 후추와 참기름을 얹어 볶음밥을 준비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갈비와 김치가 너무 잘 어울립니다. 음식을 만들 때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궁합입니다. 몸에 좋은 음식들을 많이 먹는다고 할지라도 궁합이 안 맞으면 오히려 독이 됩니다. 몸에 좋은 장어이지만 복숭아와 함께 먹으면 안 좋다고 합니다. 장어는 지방이 많아서 소화가 느리기 때문에 복숭아와 함께 먹으면 설사를 유발한다고 합니다. 굴과 꽃게, 모두 건강에 좋은 음식입니다. 그러나 굴에는 타닌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부패가 빨리 되는 꽃게 요리와 함께 먹으면 소화불량과 식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합니다. 시금치와 두부도 모두 좋은 건강음식이지만, 함께 먹으면 시금치의 수산성분이 두부의 칼슘과 결합하여 수산칼슘을 만들게 되는데 이로 인해 담석을 유발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함께 먹으면 좋은 음식도 있습니다. 궁합이 좋은 음식들이죠. 돼지고기를 먹을 때 새우젓을 함께 먹으면 좋다고 합니다. 새우젓이 돼지고기의 지방과 단백질이 잘 소화되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소주를 자주 먹는 분들은 오이를 함께 먹으면 좋다고 합니다. 술을 섭취하면 몸속의 칼륨이 빠져나가게 되는데 오이에는 칼륨이 풍부해서 빠져나간 칼륨을 보충해 준다고 합니다. 한 잔의 커피는 정신을 맑게 해 주고 피로를 풀어줍니다. 그러나 공복시에 마시는 커피는 위산 분비를 촉진하기 때문에 우유나 치즈와 함께 먹으면 좋다고 합니다. 멸치를 볶을 때 풋고추를 넣어주면 멸치의 칼슘이 몸에 잘 흡수되도록 풋고추의 철분이 도와준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어쩐지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잘 어울리는 것들이 있고,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잘 어울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전혀 내 인생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고, 일어나지도 말아야 할 것 같은 일들이 내 인생을 참 맛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 여러분 인생 가운데 끊임없이 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 가운데에는 계획했던 일도 있지만 계획하지 않았던 일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하나 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우리의 삶을 참 맛깔 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치즈를 한 장 얹으면 어떨까요? 좀 느끼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삶에 고추장을 한 스푼 풀어본다면 어떨까요? 좀 매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삶에 소금 한 스푼을 넣는다면 어떨까요? 좀 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는 대신 기대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로 인해 오히려 더욱 맛난 인생이 시작될 거라고 기대해 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일에 궁합을 만들어가는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승리하는 한해가 되길 축복합니다. 김 병 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삶과 종교] 침묵의 힘

어떤 종교든지 침묵하는 행위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고 이를 통해서 종교가 목적하는 곳을 향해 많은 수행자 수덕자들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4대종교라고 할 수 있는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그리스도교 등은 구원을 향한 인간들의 부단한 노력 즉 자기 수행의 과정을 통해서 절대자와의 관계 속에 들어가려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방법이 바로 침묵을 통한 수행 수덕의 과정입니다. 불교에선 동안거, 하안거라 하여 거의 1년에 6개월여 동안 수행에만 전념하면서 참다운 깨우침을 하게 되거나 진정한 진리를 터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석가모니가 고행과 법을 통해 정각(正覺)을 하게 되는 과정을 본받는 행위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창시자 예수는 광야에서 침묵 중에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소명을 깨우치게 됩니다. 지금도 천주교의 사제들이나 수도자들은 일 년에 의무적으로 약 10일간 피정(避靜)을 하게 되는데 대침묵이란 분위기에서 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그런가 하면 마호메트도 명상과 기도를 통해서 신의 음성을 듣게 되고 추종하는 신도들도 기도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힌두교도 고행과 요가를 통해서 보다 높은 인간의 경지에 오르려 합니다. 이를 볼 때에 침묵의 행위는 종교적인 것에서부터 인간 모든 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침묵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했는지 실감했습니다. 대선에 나선 사람들끼리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책제시보다도 신랄한 비판에만 몰두하는 것을 보면서 청중들은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입후보자가 이 사람은 절대로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고 이를 적극 저지하기 위해 나섰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을 때 바로 침묵 중에 있는 일반 국민은 서서히 분노를 하게 되고 힘이 모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SNS를 통해서 일반 대중을 우롱하는 것을 보면서 침묵의 힘이 심하게 격분하였음을 봅니다. 결국 투표의 결과를 보면서 많은 국민들이 의외로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침묵하는 국민들이 힘을 모을 수 있게 되면서 선거에 임하는 출마자들이 이젠 침묵하는 국민들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절실히 깨우치게 됐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여러 가지 선거를 통해서 출마하는 사람들이 어떤 양식을 갖고 예의 바르게 서로를 존중하고 비록 결점이 있더라도 서로 인격적으로 대중들을 대면하는가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국민의식이 진일보한 성숙한 선거의 장이 되었습니다. 우리 천주교회에선 교황을 선출할 때에 선거권이 있는 추기경급들이 로마의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의 콘클라베(conclave:열쇠로 잠근 방)에 모여 선거에 임하는데 바로 중요한 것은 침묵과 기도 중에서 투표를 하게 됩니다. 우리 성당에서 봉사자를 뽑을 때엔 투표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침묵 중에 누가 훌륭한 지도자가 될지 마음속으로 그려보면서(일명 소명 의식) 참여합니다. 이젠 어떤 형태의 선거이든 모든 출마자들이 침묵 중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국민 대중을 의식할 것입니다. 이번 대선은 또다시 우리 국민의 선거의식을 진일보시킨 선거를 통해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비록 내가 선택한 사람이 선출되지 않았다 해도 이젠 그와 그의 협력자들이 펼쳐가는 정책들을 위해 온힘으로 함께 도와야 할 것입니다. 최 재 용 천주교 수원교구 원로사목자

[삶과 종교]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길

2013년 계사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맘 때면 우리는 새롭게 각오를 하게 됩니다. 설사 그것을 다 이루지 못하더라도 뭔가 더 낫게 살아보려는 의지여서 아예 생각조차 않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봅니다. 희망으로 가득 찬 모든 분들에게 올해는 지혜로운 한해가 되도록 정진하기를 권하면서 그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이 온통 다 번거롭게 보입니다. 반면,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세상 또한 맑고 깨끗해질 것입니다. 또 가까운 이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좋아하고 가까운 이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함께 힘들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스스로 좋은 일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 것이며, 스스로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또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처럼 시시각각 변해가는 것이 세상이치인데, 중생심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거기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각자가 겪는 행복과 불행, 기쁨과 즐거움, 고통과 괴로움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자작자수요 자업자득이며 자승자박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 곳에만 집착을 하고 거기에만 온통 정신이 매몰되어 결국에는 일을 그르치고 마는 것이 중생들의 삶이요 인생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불자라면 한 곳에만 집착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마음을 제어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기쁨과 즐거움, 고통과 괴로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무지함과 의심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번뇌가 동반합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마음속의 번뇌는 결국 고통과 괴로움을 가져다주게 됩니다. 인생을 살만큼 산 분들에게 물어보면 대다수가 괴롭다고 대답합니다. 어떤 이는 괴로워서 못살겠다고 합니다. 괴로워 못 살겠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왜 사람들은 매일 매일 고통과 괴로움 속에 내몰려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탐진치 삼독이라는 번뇌로 인해서 오욕락이라는 망상이 죽 끓듯 끓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얽매임이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은 전도몽상으로 드러나는 공포를 다 여의게 되고 헛된 삶으로 끄달리는 그릇된 집착이나 속박으로부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바새계경에서 신심이라는 생명력을 가진 이가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좋은 벗을 가까이함이요, 둘째는 성내는 마음을 끊음이요, 셋째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름이요, 넷째는 연민의 정을 일으킴이요, 다섯째는 부지런히 정진하는 일이니라. 보리심은 자기의 본심인 참마음을 의미합니다. 참마음을 지니고 있고 참마음을 일으키는 이는 좋은 벗을 가까이할 수 있고, 성냄을 끊을 수 있으며,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연민의 정을 일으키며, 진지한 자세로 부지런히 정진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성행 청계사 주지

[삶과 종교] 아름다운 채움

많은 종교와 명상은 비움에 대해 강조합니다. 욕심도, 명예도, 돈도 다 비우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비우려고 노력해도 정말 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엇인가를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비우고 버리려고 노력해 본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무모한 일인지 금방 알게 됩니다. 제가 목사로 돈에 대해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고 참 많은 노력을 합니다. 저는 목회하는 동안 통장에 돈을 모으지 않고, 제 이름으로 집을 소유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청빈이라는 명예욕이 머리를 듭니다. 내가 이렇게 버리고 포기한다고 산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 생깁니다. 기독교 역사에도 보면 청빈하게 살려고 돈과 가족도 다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들 사이에 명예 때문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 많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서로 주교가 되겠다고 음모를 꾸미고 속이고 하는 일들이 실제로 수도원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비워서 진공 상태가 되면 블랙홀이 되어 무엇이든지 빨아들인다 무조건 비운다고, 포기한다고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요즘 다이어트를 하는 분들이 많은데 가장 흔한 다이어트 방법이 무조건 먹지 않는 거라고 합니다. 살을 빼겠다고는 욕심에 밥을 먹지 않고 수일을 버팁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며칠 동안 먹지 않으면 허기가 심해지게 되고 결국에는 폭식으로 이어져 결국 얼마 정도 줄었던 몸무게가 오히려 늘어나게 됩니다. 제대로 살을 빼기 위해서는 적당히 먹어야 합니다. 무조건 안 먹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음식을 섭취하는 겁니다. 탄수화물을 줄이고 야채와 단백질 섭취를 늘리는 식단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적당한 운동을 해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비운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무조건 포기한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 갈 때에 건강해지고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기차가 달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개구쟁이들이 괜스레 지나가는 기차를 향하여 돌멩이질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별생각 없이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기차의 유리창이 깨어지기도 하고, 타고 있던 승객들의 머리가 깨지는 등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그래서 시간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구쟁이들의 장난질은 끊어지지를 않았습니다. 하루는 선생님 가운데 한 분이 좋은 생각을 해 내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철로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기차가 지나갈 때 이렇게 아이들에게 외쳤습니다. 얘들아! 저 기차를 향해서 손을 흔들어 주자. 그래서 선생님과 더불어서 아이들이 손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열차 안에 타고 있던 승객들도 덩달아서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은 손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돌멩이를 던지는 장난질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돌멩이를 던지지 말아라는 말로는 장난질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손을 흔들면서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으로 바뀔 때, 자연스럽게 돌멩이를 던지는 장난질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삶에 무조건 비우려고 하기보다는 선한 것으로 채워가면 어떨까요? 그럼 더욱 아름다운 세상으로 바뀔 겁니다. 김 병 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삶과 종교] 투표하는 우리의 손을 거룩하게 하소서

오늘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게 될 최고의 어른을 선택하게 됩니다. 참으로 거룩한 날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선거운동기간 중에 들은 것과 기대하고 있는 것들을 경건하게 생각하면서 투표장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과 함께 나라의 모든 것들을 진두지휘할 강력한 집단이 형성되기에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저는 한 종교의 봉사자이기 때문에 나의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마음을 갖고 투표장에 가서 거룩한 한 표를 행사할 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하면서도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어른을 선택함에 있어서 북한까지 품어 안을 수 있는 넓은 가슴과 도량을 겸비한 분이 선출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발표된 수많은 공약들 가운데 정작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본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어서 참으로 아쉽습니다. 이것은 바로 도덕 정치입니다. 즉 도덕이 사회의 근본 바탕이 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관은 결코 물질이나 감각적인 것에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것이 행복추구의 첫걸음인 경우는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의 목표는 아닌 것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과 강의를 통해서 정의와 공정이 무엇인지 세계인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미국 하버드대의 마이클 샌델 교수가 쓴 왜 도덕인가?라는 책을 통해서 지구촌의 성실한 지도자들은 다들 이것을 공감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여러 나라에의 정치 논쟁은 복지와 자유를 큰 이슈로 삼고 있는데 행복한 인간의 삶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삶 즉,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희생과 봉사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시민 의식의 형성과 도덕적으로 함께 공감을 할 수 있는 시장의 환경을 조성하고 그리고 불평등을 해소하고 결속의 공감대를 만들며 시민들이 덕성의 소중함을 추구할 수 있도록 일깨우고 그래서 결국 도덕적 참여의 정치를 펼쳐나가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오늘 선거에 임하면서 제가 늘 읽고 기도하곤 하는 신약성경의 이런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마태오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세 가지 유형으로 유혹을 받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만민을 위한 구세주의 삶을 계획하면서 광야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지내던 중 한 유혹자가 와서 세 가지 유혹을 하게 됩니다. 이중에 가장 첫 번째 유혹은 바로 40일 동안 단식을 한 상태에서 돌에게 빵이 되라고 했을 때 예수님의 허기가 극에 달한 상태라 가장 쉬운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라고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약 30여 년 전만 해도 너무 가난했기에 당시엔 먹을 것, 입을 것, 쉴 곳이 모두 인줄만 알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아님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이젠 우리가 정신적인 것에서 삶의 풍요로움을 찾아나서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이클 샌델 교수가 제시하는 좋은 삶 즉, 개인의 욕심을 뛰어넘어 공유의 삶 안에서 행복을 찾아 나서도록 우리 새 대통령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도덕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는 분을 우리가 모셨으면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온 국민의 투표하는 손들을 거룩하게 하소서라고 빕니다. 최 재 용 천주교 수원교구 원로사목자 신부

[삶과 종교] 행복도 불행도 내가 짓는 것

여보시게 친구 산을 오르면 절이 있고 절에 가면 부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절에 가면 인간이 만든 불상만 자네를 내려다보고 있지 않던가? 부처는 절에 없다네. 부처는 세상에 내려가야만 천지에 널려 있다네. 내 주위 가난한 이웃이 부처고 병들어 누워있는 자가 부처라네. 그 많은 부처를 보지도 못하고 어찌 사람이 만든 불상에만 허리가 아프도록 절만 하는가? 천당과 지옥은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가? 살아있는 지금이 천당이고 지옥이라네. 내가 살면서 즐겁고 행복하면 여기가 천당이고, 살면서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하면 거기가 지옥이라네. 자네 마음이 부처고 자네가 관세음보살이라네. 여보시게 친구 죽어서 천당가려하지 말고 사는 동안 천당에서 같이 살지 않으려나? 즐겁고 행복하면 여기가 천당 자네가 부처라는 걸 잊지 마시게 그리고 부처답게 살길바라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에 있어서 어떻게 하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 또한 어떻게 하는 것이 불행한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여기 한 예를 들자면 어느 마을에 유명한 의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모두 그를 찾아가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는 환자의 얼굴과 걸음만 봐도 어디가 아픈지 알아내 처방을 하는 명의(名醫)였습니다. 그런 그가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사찰의 스님은 임종을 앞둔 의사를 찾아가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죽음을 앞둔 그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보다 훨씬 훌륭한 세 명의 의사를 소개하겠습니다. 그 의사의 이름은 음식과 수면과 운동입니다. 음식은 위의 75%만 채우고 절대로 과식하지 마십시오. 12시 이전에 잠들고 해 뜨면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걷다 보면 웬만한 병은 나을 수 있습니다. 말을 하던 의사가 힘들었는지 잠시 말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음식과 수면과 운동은 다음 두 가지 약을 함께 복용할 때 효과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조금 전보다 의사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육체와 더불어 영혼의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웃음과 사랑입니다. 육체만 건강한 것은 반쪽 건강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고루 건강한 사람이 되십시오. 웃음은 평생 꾸준히 복용해야 합니다. 웃음 약은 부작용이 없는 만병통치약입니다.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많이 복용해도 됩니다. 사랑 약은 비상 상비약입니다. 이 약은 수시로 복용하십시오. 가장 중요한 약입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거기가 지옥 의사는 자신이 살면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을 알려준 후 평안한 모습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우리는 돈도 안 드는 이 약을 얼마나 섭취하고 있습니까? 성 행 청계사 주지

[삶과 종교] 최선의 선택

해안선에 등대가 우뚝 세워져 있었습니다. 배들은 항상 등대 불빛을 보며 방향을 잡고 안전하게 항구로 들어오곤 하였습니다. 등대 기름 창고에는 기름이 늘 충분히 공급되어 있었습니다. 등대에 불을 밝히라고 정부에서 공급해 주는 기름이었습니다. 어느 날 자동차가 지나가다가 기름이 떨어져 오도가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주유소가 없는 곳이라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기름을 조금 주었습니다. 이튿날 가난한 할머니가 오더니 추워서 못 자겠다면서 기름 보일러에 기름을 좀 채워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정이 딱하여 조금 주었습니다. 또 한 자매가 와서 내일이 시험인데 등을 밝힐 기름이 떨어졌다고 기름을 달라고 하기에 입장이 난처하여 조금 주었습니다.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조금씩 기름을 주다보니 등대에 넣을 기름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기름이 떨어진 그 날 밤 배 몇 척이 파선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며칠 후에 조사단이 파견되었습니다. 기름을 충분히 주었는데 왜 등대 불이 꺼졌는지를 조사하였습니다. 등대지기는 사정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그 말을 다 들은 당국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기름을 공급한 이유는 오직 하나 등대에 불을 꺼뜨리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직무 유기입니다. 구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선택을 하면서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핑계를 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기에 내리는 결정은 잘못된 결정인 경우가 많으며, 최선이 아닌 차선인 경우가 많습니다. 올바른 결정, 최선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삶에 원칙이 세워져야 합니다. 원칙은 상황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원칙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스프라울(R.C.Sproul) 이 쓴 반대 의견의 극복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에는 독일에서 성장한 유대인 소년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 소년은 자기 아버지를 존경하며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유대인 회당에 충성을 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들도 신앙으로 하나가 되게 하였습니다. 10대 소년이 되었을 때 그의 가족은 조그만 시골 마을로 이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는 유대인이 없어서 유대인 회당이 없었습니다. 다만 루터교회 하나가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 거의가 다 루터 교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가족을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유대교를 포기하고 루터교로 개종한다 가족들이 물었습니다.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버지가 대답하였습니다. 이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루터 교인이다. 루터 교인이 되어야 사업상 유리하다 이 말을 들은 소년은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얼마 후 그 소년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유명한 이론을 정립하였습니다. 종교는 아편이다. 하나님 없는 민중, 종교 없는 나라를 만들자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를 만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공산주의를 창설한 칼 막스(Karl Marx)입니다. 원칙이 없이 상황에 따라 자신의 선택을 번복하여 최선이 아닌 차선의 선택을 한 아버지 때문에 공산주의가 생겼습니다. 내 삶의 중요한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지키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차선이 아닌 최선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원칙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 치열한 헌신과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드는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김 병 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삶과 종교] 한국의 신자본주의 정신

위의 제목은 2005년 박우희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 두 분의 석학들이 공저로 펴낸 책의 제목입니다. 이 두 분의 석학들이 특강도 겸해서 했던 출판기념회에 저도 참석했는데 이 자리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한국의 정치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하거나 할 수 있는 젊은 학자들이 대거 참석한 것을 보면서 한국에 싱그러운 경제정신이 새롭게 탄생될 수 있겠구나 하는 설레는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위의 이 두 분이 제시한 한국의 신자본주의 정신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나눔이란 큰 틀을 형성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즉 국가 경제규모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에 복지사회를 위한 막대한 자금은 세금이란 제도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해 경제발전을 해 나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 근본 바탕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 이윤추구를 허용하는 체제라서 어느 체제보다도 성장 동력이 강력하지만, 이에 반해서 경제혜택을 함께 공유할 수 없는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형성되기 쉽고 환경파괴가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 있게 되고 자원고갈 등을 통해서 어쩔 수 없이 유전자 조작이라든지 변형된 생산품에서 인류가 시달림을 받게 될 수밖에 없는 현상이 사회를 혼탁하게 만들어 가는 부정적인 면이 대두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유럽이나 미국은 빈부의 격차는 우리 모두의 책임임을 의식하고 동반성장이라는 결코 쉽지 않은 경로이지만 이를 향해 부단히 헤쳐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함께 나누는 크리스천 정신과 같은 맥락에서 비롯됨을 봅니다. 그런데 인간의 속성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욕망에서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가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세금제도를 통해서 부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방법이 얼마나 힘든지를 공산주의 탄생과 우리나라에도 최근엔 지난 노무현 정권의 예를 통해서 볼 때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오 복음 19장 24절과 마르코 복음 10장 25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인간의 약점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교회는 국민 모두가 함께 행복하자는 복지사회를 위한 여러 가지 사업에 열심히 동참하고 있습니다만 많은 교회들이 국가의 예산을 더 많이 따내서 자기 복지 시설을 크게 키우려는 일들을 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교회기관은 면세혜택을 보는데다가 여러 다양한 복지 기관들이 대부분 국가의 예산을 받아서 하는데 많은 교회들이 자체로 부담해야 하는 법인 지원금에는 별의별 방법을 써서 명목만 걸고 실제로는 국가예산만을 갖고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기업가는 자기에게 부과되는 세금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사회에 환원해야함을 위의 두 분 학자들이 제시하고 있고 교회는 더 많은 부를 나눌 수 있도록 기업가나 기득권층에 있는 부자들과의 중간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교회의 세를 불리는데 혈안이 되고 있는 현실은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참신한 학자들이 주장하는 신자본주의 정신은 크리스천 정신에 입각해서 함께 나누고 동반성장을 하자는 강력한 뜻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아름다운 기업풍토가 조심스럽게 생기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 사회적 기업정신이란 말 그대로 기업주나 근로자들이 함께 행복하게 그리고 이익창출은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정신입니다. 바로 교회가 이런 아름다운 운동에 앞장서자는 것입니다. 최 재 용 천주교 수원교구 수원대리구장ㆍ신부

[삶과 종교] 겸손·학습·성실 베푸는 삶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무리 정직하고 노력하고 고생을 해도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 이유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치 서울을 가야 할 사람이 대구를 출발해 부산 방향으로 간다면 서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길을 돌아가야 할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열심히 노력하지만 자신의 목표는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한다. 먼저 자신의 운명을 또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의 의미를 분명히 파악하고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조금만 노력해도 자신의 성공을 찾아가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그 원리는 불교의 연기관에도 잘 표현하고 있다. 법구경에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는 의미이다. 고집과 아집 내려놓기 위해 마음공부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겸손하라. 길을 모르면 물어서 가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계속 고집하다가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면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될지를 생각해야한다. 그러니 절대 고집(固執)은 안 된다. 고집과 아집은 모두에게 고통만 줄 뿐이다. 그러기에 고집과 아집을 내려놓기 위해서 불교에서는 마음공부를 시키는 것이다. 또 한 방편으로는 지관 좌선법(호흡법)과 자기 자신을 내려놓기 위해 절하는 수행법도 가르치는데 108배, 500배, 1080배, 3000배, 기타 등등 불교의 수행법은 무궁무진하다. 둘째, 학습하라. 지식은 버리는 공부이며 지혜는 나누는 공부이다. 지식은 말하려 하지만 지혜는 들으려한다. 어떤 일이든지 시작하기 전에 충분한 지식을 습득한 뒤에 그 지식을 잘 다스려 지혜를 발휘한다면 보다 훌륭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성실하라. 누구나 인생을 살다보면 많은 일들이 생기게 마련인데 그저 넋 놓고 있다면 자기 앞에 다가올 운명은 불을 보듯 뻔한게 아니겠는가?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 어느 누구라도 고비가 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이득이 없듯이 최선을 다하여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넷째, 베푸는 삶을 살아라. 지식은 버리는 공부, 지혜는 나누는 공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게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나누는 기쁨이다. 그것은 재물도 높은 권력도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작지만 가장 큰 삶인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대기업이던 작은 구멍가게를 하더라도 누군가가 자신의 일을 분담하는 이가 없다면 자신의 경제적 가치를 유지할 수가 없다. 반면 아무리 가난해도 몸과 마음으로 위로하고 함께 즐거워해주고 축복하고 기도해준다면 언젠가는 그들도 당신을 위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줄 것이다. 성행 청계사 주지

[삶과 종교] “당신의 미래는 당신의 과거와 같지 않으리라”

늘 지나고 나면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도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대하는 태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좋았던 기억들, 행복했던 시간들은 잊지 않도록 깊이 간직해 두어야 합니다. 아픈 상처들, 힘들었던 시간들은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아픔을 통해 배운 가르침은 깊이 새겨두어야 합니다. 행복한 추억들은 오늘을 살아갈 힘이 되어야 하고, 아픈 상처들은 다시는 똑같은 일로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교사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요즘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고, 과거의 아픈 기억 때문에 미래에 대한 소망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즘 리사 비비어의 통제 불능의 상황에서도 나는 즐겁기만 하다라는 책을 보고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으로 넘어져 울고 있는 시온의 딸을 향해 선지자가 부르짖습니다. 일어나라! 너의 미래는 결코 과거와 같지 않으리라! 그런데 우리는 과거의 상처와 실패를 기억하면서 우리의 미래도 실패한 과거와 다르지 않다라고 미리 절망하며 낙심하고 있습니다. 이번 대선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선택입니다. 이 땅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위험한 발언이긴 하지만 대통령 후보에 대해 말을 좀 하려고 합니다. 누구를 뽑든지 간에 우선은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은 안 될 것 같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되 과거의 일들 때문에 미래의 발목을 잡으려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미래를 이야기하되 소망을 주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쓰레기 더미를 밑거름으로 사용하여 비옥한 땅을 만들어 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황무지도 개간할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민족의 역사를 인정하고 서로를 칭찬해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혁명과 유신 군부정권, 민주화 투쟁,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매 시대마다 이렇게 가다가는 나라가 무너질 것 같은 위기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마다 아픔을 딛고 누군가의 피와 헌신을 통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도 위기이지만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의 말과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아는 사람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아침 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찾고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그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반드시 찾게 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야 저도 다가오는 미래 역사를 책임지는 한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묵상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미래가 결코 과거와 같지 않으리라는 것,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삶에 기가막힌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서도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일어설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야 일어서라! 일어서라! 저도 한 번 일어나 보렵니다. 사람 때문에, 과거 때문에, 내 경험 때문에 주저 앉았던 일들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두 다리에 바짝 힘을 주고! 김병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삶과 종교] 종교의 힘과 마력(魔力)

저는 그리스도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 자칫하면 편파적인 신앙관을 갖고 때론 이 편협된 교의를 신자들이나 비신자들에게 잘못 전하지 않을까 늘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종교와 종파의 교리서적들을 학생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 왔습니다. 물론 니체의 초인적 사상을 조심스럽게 넘나보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종교의 힘은 무엇이며 그 영향이 어떻게 인류에게 미치고 있는가를 유심히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덴마크의 사상가인 키르케고르는 두려움과 떨림이란 저서에서 구약성서의 아브라함이 자기의 귀한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을 받는 과정에서 하느님을 독대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사상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니체는 교회가 허상을 쫓고 있다고 하면서 인간 실존 자체에 더 큰 의의를 부여하게 되는 사상을 폈습니다. 바로 이것은 당시의 교회집단이 예수님이 세우신 참다운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에 의해 교회가 무섭게 변질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 종교지도자들의 경우를 보면 오히려 사회를 자기들의 세속적 이익을 위해 앞장서는 것 같이 보이는 때가 허다합니다. 프랑스에서와 같은 유럽의 반 교회운동이나 니체시대엔 적어도 교회집단은 호되게 야단을 맞아도 유태인 출신인 시몬느 베이유라든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같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는 깍듯한 예의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회 분위기는 예수님을 재물의 신, 명예의 신, 욕망의 신, 광란의 신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 교회집단이 이기주의에 빠졌거나 물질주의 그리고 현실주의에 빠져버린 타락한 집단으로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를 기업경영과 같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이 운영하는 여러 상점에 가보면 대부분 자네 시작은 보잘 것 없었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라는 욥기 8장 7절의 말씀이 걸려있는 것을 쉽게 보게 됩니다. 성경 말씀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현세적인 것에 너무 치우치다 보니 금권 및 정치권력이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의 영성과는 동떨어진 이익 집단으로 변질된 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개탄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신도들이 날로 증가하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요. 그러나 이로 인해 재물에 따른 물의가 빚어지는 것은 분명 교회의 타락인 것입니다. 교회는 재물을 쌓아두는 창고가 아니라 불우한 이웃을 위한 자선 배급소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꼭 해야 할 몫이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내용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대권을 향한 선거열풍이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이럴 때 나타나는 현실은 대권을 향한 사람들이 자기 신앙과는 전혀 다르거나 어떤 때는 못마땅해 하는 교회나 사찰에 가서 합장을 하거나 부복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라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부패하였는가를 보게 됩니다. 현재의 우리나라의 종교 지도자들이 분명히 알아차려야 할 것은 종교집단이 이 사회를 정의롭고 아름다운 환경을 만들어 가는 큰 힘도 있지만 사회를 부패시키는 상상할 수 없는 마력(魔力)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보면 정확히 지적되고 있습니다. 단언하건데 대권을 향한 누군가를 종교 집단에서 공공연하게 지지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뿌리부터 타락한 것이라고 봅니다. 종교는 현세적인 정치집단, 기업집단이 아니라 인간영혼을 위한 영원한 가르침을 제시하고 인도하는 곳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최재용 신부천주교 수원교구 수원대리구장

[삶과 종교] 용감한 사람은 자신을 이기는 사람

세존께서 라자가하의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무실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욕쟁이 바라드와자 바라문이 자기 족성을 가진 바라문이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세존을 찾아가 오만불손하고 거친 말로 욕하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안온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실 뿐이었습니다. 욕쟁이 바라드와자는 자신이 참기 힘든 심한 욕설을 했기 때문에 세존이시다 하더라도 이에 대응할 줄 알았는데, 이에 동요치 않으시자 오히려 당황하며 화를 내지 않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바라드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의 친구와 동료나 가족과 친척들이 그대를 방문하러 오는가? 고따마 존자여, 때때로 나의 친구와 동료나 가족과 친척들이 나를 방문하러 옵니다. 바라문이여, 그러면 그대는 그들에게 여러 가지 음식들을 내놓는가? 고따마 존자여, 때때로 그들에게 여러 가지 음식들을 내놓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런데 만일 그들이 섭수하지 않으면 그 음식은 누구의 것이 되는가? 고따마 존자여, 만일 그들이 섭수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 것이 됩니다. 욕하고, 모욕주고, 시비 걸어도 섭수하지 않으면 그대 것 참으로 그러하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우리가 아무 욕도 하지 않는데도 욕을 하고, 모욕을 주지 않는데도 모욕을 주고 시비를 걸지 않는데도 시비를 건다. 그러나 우리는 그대의 것을 섭수하지 않으므로 그것은 그대의 것이 된다. 바라문이여, 욕하는 사람에게 맞서서 욕을 하고, 모욕을 주는 사람에게 맞서서 모욕을 주고 시비를 거는 사람에게 맞서서 시비를 걸면 이것은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고 서로 교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대와 함께 음식을 먹지 않고 서로 교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대의 것이 된다. 왕과 왕의 신하들은 고따마 존자에 대해서 아라한이라고 말하던데 고따마 존자는 지금 화를 내고 있습니다. 유순하고 바르게 생계를 유지하고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하였고 지극히 평화롭고 모든 것에 여여하고 분노가 없는 자가 어떻게 분노하는가? 분노에 맞서서 분노하는 그런 자는 더욱 더 사악한 자가 되나니 분노에 맞서서 분노하지 않으면 이기기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하도다. 그런 사람 자신과 상대 둘 다의 이익을 도모하는 여여한 사람이니 상대가 크게 성이 난 것을 알면 마음 챙기고 고요하게 처신하노라. 그런 그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까지 둘 다를 구제하나니, 이런 그를 어리석다 여기는 사람들은 법에 능숙하지 못한 자들이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눈 있는 자 형색을 보라고 어둠속에서 등불을 비춰 주시듯,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에 출가하고자 합니다. 욕쟁이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 곁으로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분노 맞서서 분노하지 않으면 자신과 상대방 둘 다 구제 부처님께서는 가장 용감한 사람은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지금 내가 부처가 되어서 천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홀로 삼계를 거닐며 안온한 마음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다 인욕수행으로 인한 공덕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인욕은 험난한 바다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커다란 배와 같고, 병을 고칠 수 있는 좋은 약과 같아서 중생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공양 올려 마땅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 성행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주지

[삶과 종교] 공감능력

리더의 7가지 언어 라는 글에 실린 내용입니다. 2011년 12월 과학잡지 사이언스에 연구 결과 하나를 발표했습니다. 두 마리의 쥐를 2주 동안 함께 생활하게 한 뒤에 한 마리는 우리 안에 가둬두고, 한 마리는 자유롭게 풀어놓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잠금 장치를 걸어두었는데 안에서는 열 수 없고, 밖에서만 풀 수 있도록 해 놓았답니다. 그랬더니 자유롭게 풀어놓은 쥐가 우리에 갇힌 쥐를 꺼내주려고 사력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자유로운 쥐 옆으로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떨어뜨려 주었더니 실험한 쥐의 48%가 동료를 포기하고 먹이를 택했다고 합니다. 반대로 갇혔던 쥐를 풀어주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쥐를 가둬놓고 실험을 했더니 결정적인 순간에 먹이가 떨어졌는데도 먹이를 택하는 쥐는 20%에 지나지 않았고, 80%가 먹이를 포기하고 동료를 구하는 것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공감능력! 우리 주변에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동료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엄청난 재물과 명예가 떨어졌을 때 무엇을 선택할까요? 어려움에 빠진 동료를 구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나를 구하기 위해 엄청난 재물과 명예를 포기할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그 인생은 참 행복한 인생일 겁니다. 인간의 전두엽에는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거울뉴런이 설계되어 있는데 계속해서 반응하는 습관을 가져야만 퇴화하지 않는답니다. 만일 타인과 공감하지 않는 시간이 계속되면 공감 자체를 할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공감하는 것도 훈련이고 습관입니다. 늘 관심을 가지고 주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무엇 때문에 아파하고, 무엇 때문에 행복해 하는지 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내치신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더라도 그들 한명 한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의 사정을 다 들어주시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병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쫓아주시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먹이시며,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처럼 공감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대한민국의 정치를 보면서 참 마음이 아픈 것이 있습니다. 정치라는 것이 우리들 살아가는 삶을 그대로 반영하기 마련인데, 요즘 정치를 보면 누군가의 허물을 들춰내고 끝까지 물어 뜯고, 끌어내리고 하는 모습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누가 잘 되는 꼴을 못 봅니다. 이상적인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공감해 줄 수 있는 정치가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해 줄 수 있는 정치인이라면 그가 이 사회와 우리들의 삶의 자리를 바꿀 수도 있다는 기대를 걸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정치 이야기는 잘 안하려고 하는데 요즘은 그런 기대를 자꾸만 하게 됩니다. 요즘 경기도 불황이고 젊은이들이 직업을 갖고 결혼하는 것도 너무나 어려운 현실입니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참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함께 아파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이겨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열흘 넘게 요로결석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진통제도 맞아보고, 물 먹고 운동도 해 보았지만 돌이 나오지를 않아서 병원에서 돌 깨는 시술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돌이 나오지 않아 고생하다가 오늘 아침에야 돌이 나왔습니다. 아마 혼자라면 견디지 못했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픈 내내 옆에 붙어서 밥을 해주고 함께 해주는 아내가 있어 힘이 났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오늘도 누군가를 공감해 주고, 공감 받으며 현실보다 큰 행복을 맛보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김병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삶과 종교] 신앙인의 행복

신앙인도 여느 인간과 함께 행복한 삶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위해 지금도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계인의 영적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삶의 의미를 귀담아 듣습니다. 삶의 목표는 행복에 있습니다. 종교를 믿든 안 믿든, 또는 어떤 종교를 믿든, 우리 모두는 삶에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삶의 모든 행위가 행복을 향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성자께서 제시하는 행복이란 어떤 형태의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마음의 상태입니다. 한 예를 들어서 우리는 보통 탐욕의 반대를 무욕이라 하는데 이 분은 이것을 만족이라는 것입니다. 즉 탐욕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만족감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현대는 돈과 같은 재물들이 인간이 꿈꾸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경제 발전을 제일의 정책으로 내세우면서 국민들에게 호응을 얻으려 합니다. 그런가 하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경제가 발전되고 결국은 여기서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 점에 다다를 수 있다고 기대하는 유물사관적 집단들이 세상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은 유물사관적 사고에서는 얻을 수 없음을 우리는 산업발전 과정을 통해서 충분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도록 제시하신 분이 무소유의 법정스님과 무저항주의를 내세운 인도의 성인 간디입니다. 즉 소박함과 우직한 삶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 오히려 경제발전에 따른 과학과 기술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보다 인간의 감성적인 면에서 볼 때 더 나은 것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달라이 라마가 제시하는 행복의 개념입니다. 그러면 친절함과 자비심이 쉽게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구성요소가 평화로움과 고요함인데 이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랑과 자비심에서 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대형 종교 집단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물질만능에 빠져 있는 사회보다도 더 재물이나 명예 같은 것을 누리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거기엔 인간의 욕망을 채우려는 상상할 수 없는 무서운 독버섯이 도사려 있음을 우리 가톨릭교회는 과거에 중세기를 통해서 뼈저리게 겪었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대형 종교 집단에선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재산분쟁과 자리다툼이 치열하게 이뤄지고 있는데 더 가관인 것은 신께서 자기 쪽 편을 들어 축복해 준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목불인견입니다. 요새 대형 금융부정 사건들은 대부분 대형 종교 집단에 소속된 신자들이 연루돼 있습니다. 허긴 유태인의 역사를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게다가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의 참 행복의 조건인 마태오 복음 5장 1절-12절과 루카 복음 6장 20절-23절을 악용해 지금 예수님께서 자기들 편에 서 있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우리 종교집단도 유물사관에 젖어서 신도들이 간절히 바라는 예수님의 참다운 행복을 세속적으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과 기술에 의해서 얻어지는 여러 기기들과 방법들, 그리고 재물들을 사용하면서도 그와 함께 따라오는 무서운 독소들에 빠지지 않고 예수님이 제시하는 진정한 행복과 달라이 라마가 전하는 행복을 향해 조심조심 이웃과 함께 재물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최재용 신부천주교 수원교구 수원대리구장

[삶과 종교] 불공은 성불의 씨앗

8월 24일은 칠석이며, 9월 1일은 우란분절(백중)이다. 칠석과 우란분절은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 모두를 부처님과 인연 맺도록 하는 날이다. 많은 종류의 불공이 있지만 크게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불공과 망인을 위하는 천도불공으로 나눌 수 있다. 다가오는 칠월칠석과 우란분절은 우리 불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주일을 사이에 두고 자연스럽게 정해진 불공을 올리는 날이다. 특히 7월 칠석은 동쪽의 소 기르는 견우와 서쪽의 비단을 짜는 직녀가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누는 날이다. 그 사랑이 너무나 애절해 칠석날 저녁에는 견우와 직녀가 흘리는 눈물이 구름이 되어 하늘을 가리고, 비가 되어 땅으로 내린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백중은 목련존자인 나복이가 아버지 부상 장자와 어머니 청제부인을 위해 지극 정성을 다해 무간지옥에 빠져 있던 어머니를 왕생극락 시키고, 그 인연법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사람들이 목련존자의 효심을 배우도록 한 불공일이다. 금년 윤3월이 들어 있어 각 사찰과 불제자들은 영산대재라든가, 수륙대재 등 불공준비에 그 어느 해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냈었다. 이러한 불공들을 깊이 생각해 보면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불공이든, 죽은 사람을 위한 불공이든 모두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공은 이렇게 믿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믿음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욱 더 신뢰하게 만들고 근본 도리를 지키고 행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불공을 올릴 때는 선량한 마음을 바탕으로 거짓 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으로 행하고 몸과 마음에 모든 정성을 다해야 한다. 형식에 치우친다거나 남을 의식해서 마지 못해서 올린다거나 하는 마음 바탕은 불공의 참뜻이 아니다 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을 해야 한다. 불공을 크게 생자와 망자를 위한 불공으로 나눈다면 말과 행동은 불공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달라서는 안 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말과 행동이 하나로 화합이 되고 실천이 되었을 때 그 정성이 불공으로 나타날 수가 있고 소원성취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가장 훌륭하고 거룩한 재산과 보배는 따뜻한 말 한 마디라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만법이 말에서 시작되고 말에서 끝이 나게 되어 있다. 말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르는 행동이 없는 것은 불공이 아니라 오히려 업장만 짓게 되는 것이다. 천수경의 첫머리가 정구업 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로 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것이 말이고 길이길이 닦고 또 닦으며 발전시켜 나아가야 하는 것이 말이라는 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진실한 마음과 선량한 말 거룩한 행동은 바로 불공의 초석이다. 견우와 직녀의 사랑이야기와 목련존자의 효 사상 모두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옛 속담과 같이 불공은 지극한 정성과 노력, 말과 행동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잘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 또한 말과 행동 노력과 정성에 달려있다.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으면 남에게 존경을 받을 수가 없고 업신여김의 대상이 되고 만다. 성행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주지

[삶과 종교] “속지 마십시오!”

만나교회의 담임 목사가 된 후 참 바쁘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해야 할 일도 많았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습니다. 그 모든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 이리 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몸에 조금씩 무리가 오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올해 여름은 건강을 회복하는 충전의 시간으로 계획했습니다. 읽고 싶었던 책도 읽고, 말씀 준비도 하고,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또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바이올린 연습도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바이올린을 꺼내 들었는데 바이올린 조율부터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겨울에는 그렇게 잘 풀어지는 줄이 여름에는 습기와 온도 탓에 꽉 조여져서 풀리지가 않는 겁니다. 덕분에 조율하는데에만 꽤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바이올린은 매일 관리해 주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습도와 온도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 악기입니다. 물론 바이올린을 매일 매일 관리하고 연주하면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저처럼 오랫동안 연주하지 않고 묵혀두면 바이올린은 조금씩 조금씩 망가져 버립니다. 비단 악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이올린 연주실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연습해야만 기량이 녹슬지 않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후반 클래식 음악계를 이끈 지휘자이자 작곡가, 연주자였던 마에스트로 레너드 번스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아내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속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연습하지 않아도 내 실력은 변함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달을 연습을 쉬더라도 조금만 노력하면 이전처럼 뛰어난 연주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고 다른 사람까지도 속이려 합니다. 성경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순교하기 전 마지막 지하 감옥에서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당부하는 내용을 적은 편지입니다. 그 책 가운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마지막 때가 되면 우리와 교회를 미혹케 하는 이들이 생길 것이니 그것들에 속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속아서도 안 되지만,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 정도는 죄도 아니야. 나보다 훨씬 큰 죄 짓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잘 살고 있어, 이 정도는 나쁜 것도 아니야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합리화시킵니다. 그러다보면 회복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고 맙니다. 매일 영적으로 점검하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에 침식당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적이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배가 가라앉는 이유는 배가 물 위에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이 배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지금 괜찮다고 속으면 안 됩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가늘게 조금씩 내리는 비는 조금씩 젖어들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옷이 젖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랑비라도 계속 맞다보면 속옷까지 흠뻑 젖게 됩니다. 오늘도 영적 조율과 민감함이 필요합니다. 악한 세력에 자신도 모르게 침식 당하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고 교정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가을은 쉬기에도 좋지만 영적 삶을 조율하기에도 참 좋은 때인 것 같습니다. 이 가을에 영적 민감함을 가지고 스스로를 조율하며 올바른 길로 걸어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김 병 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삶과 종교] 그리스도교 삼위일체론과 불교의 체상용론

<體相用>저는 1960년대 신학교 교육 과정에서 당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장으로 계셨던 이기영 박사님의 강의를 2년여 동안 들으면서 불교의 심오함을 많이 깨달았습니다. 최근 학계에선 통섭(統攝-通涉)이란 용어가 큰 화두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과학과 종교, 인문학과 자연과학, 예술과 과학이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영역이라며 통섭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학계의 논쟁이 우리 종교계에서도 오래 전부터 회자되어 오고 있었습니다. 동양의 대표적 종교 즉 불교에서 열심히 수행의 길을 걷던 중국의 큰 분이셨던 오경웅 박사는 천주교로 오면서 나는 불문에서 씨줄을 얻고 천주교에 와선 날줄을 얻었노라라고 하였듯이 종교의 영성을 여러 종교의 분야에서 찾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젠 여러 종교에서 그 가치와 본받을 면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토속신앙이라든지, 무속신앙을 우리 천주교 신학교에서 한 과목으로 받아들여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성부(聖父)성자(聖子)성령(聖靈)의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비를 통해서 풀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에선 절대교의로 받아들입니다. 개신교의 대부분의 종파에서도 똑같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또한 불교에선 삼라만상을 체(體)상(相)용(用)이란 원리로 풀어갑니다. 이기영 박사는 원효대사의 세계관에 대해서 여러 논증을 펴가면서 체상용의 이치를 우리 같은 평범한 구도자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이해하기 불가능한 하느님의 속성을 바로 이런 불교의 원리를 통해서 접근하는 학문적 방법을 통해서 동양의 신비와 서양의 종교가 서로 맞닿으면 많은 부분이 쉽게 이해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삼위일체 원리란 하느님은 성부성자성령으로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시지만 하나의 본성으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교의인데 이런 교의를 이해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영역이라서 그저 믿는 길 밖에 없구나 하고 받아들이고 마는데, 이 신비를 원효의 체상용의 원리를 원용(援用)할 때 어느 정도 이해의 폭이 좁혀짐을 학창 시절에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기본 속성의 바탕을 갖고 하느님은 사랑 자체로서 유일한 분인데 언제나 아버지아들영으로 존재하고 활동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관계사귐공동체의 하느님이고 그러기에 삼위일체로서의 속성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삼라만상의 원리를 체상용을 바탕으로 해서 풀어갑니다. 이것은 인터넷을 통해서 전달되는 지명스님의 교리산책을 인용한 것입니다. 체(體)-중심적이고 보다 근원적인 것=성부, 상(相)-체는 눈에 잘 보이지 않으나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 모양=성자 예수그리스도, 용(用)-체가 모양을 통하여, 혹은 물체를 이용하여 작용하는 것=성령 그러므로 체는 만물의 근원이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지만 거기서 상이 나왔으므로 갖가지 작용이 있게 된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삼라만상의 신비를 불교에서는 보다 깊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보게 되기에 절을 찾아갈 때마다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면서 진심어린 마음으로 보다 더 깊은 예의를 드리게 됩니다. 최 재 용 천주교 수원교구 수원대리구장신부

[삶과 종교] 88서울올림픽과 지방자치, 원효대사 그리고 경기일보

경기일보가 독자들에게 첫 모습을 보인 것은 1988년, 88서울올림픽이 열리고 지방자치법이 제정된 해입니다. 어느새 24년 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제24회 서울올림픽에 앞서 열린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은 사회주의 진영 국가만 참가하고, 제23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자본주의 진영 국가만 참가한 반쪽의 축제였지만 88서울올림픽에는 양 진영의 국가가 모두 참가했습니다. 때문에 88서울올림픽은 탈냉전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화해의 장이었고, 또한 일촉즉발의 세계적 군사긴장지역인 한반도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평화의 장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가 1991년 러시아(구 소련)에 이어 1992년에는 중국과 잇달아 수교를 하는 등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과 교류와 협력을 시작한 것은 바로 88서울올림픽의 역사적 의미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중단됐던 우리나라의 지방자치제도가 다시 실시되게 된 것은 빼앗긴 국민의 권리를 되찾았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지방자치법이 제정된 후 비록 3년이 지난 1991년에 지방의회가 구성되고 1995년이 되어서야 자치단체장이 선출되는 등 미흡한 점이 있었지만 그 지방자치법은 중앙독점 권력의 분권화와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 지방의 특성화와 지역균형발전이라는 한국의 새로운 미래전략을 배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경기일보는 화해와 평화, 자치와 분권, 지방화 등의 새로운 역사의 변화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고, 이를 반영하듯 지난해 창간 23주년 기념호에서 갈등의 조화에 대한 각별한 다짐이라는 뜻의 어울림 23을 기념표어로 제시했습니다. 각기 다른 소리의 악기가 아우러져 어울림음을 내는 오케스트라처럼, 역동적 협화음의 기능을 살리는 지역사회와 국가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던 어울림 23은 안타깝게도 1년이 지난 지금 만족을 말하기가 어려운 처지입니다. 더욱 고단하고 희망을 찾기가 힘들어지는 서민들의 삶, 더욱 심해진 사회적 갈등, 되풀이되는 권력형 부패와 실망스러운 정치, 남북의 대립 격화 등으로 양심과 지성, 위민의 그 어떤 목소리도 귓등의 바람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 것이 세상이치. 소납은 경기일보가 상황에 굴하지 말고 더욱 힘을 내어서 새벽종의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새벽종의 역할에 대해서는 우리의 역사에서 그 지혜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지혜 중의 하나가 원효대사의 화쟁(和諍)사상입니다. 화쟁사상은 극단을 버리고 화(和)와 쟁(諍)의 양면성(不二)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먼저 화쟁사상에서는 세상 모든 것은 일심(一心)에서 비롯되므로 모든 대립적인 이론들은 결국 평등하다고 봅니다. 소납이 경기일보에 원효대사의 화쟁사상을 권하는 이유는 사상적 위대성 말고도 경기도가 원효대사와 각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효대사에 대한 얘기 중에 해골과 물에 얽힌 내용이 있습니다. 많이 알려져 있듯 원효대사가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던 중에 동굴에서 자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몹시 목이 말라 물을 마셨고 아침에 보니 그 물이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 놀라서 구역질을 하던 원효는 순간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했다. 이런 줄거리입니다. 이 얘기에서 경기도와의 인연은 동굴의 위치와 연관이 있습니다. 동굴의 위치는 신라가 당나라와 교통하는 중요 항구의 역할을 했던 당항성(黨項城) 인근, 지금으로 보면 평택 포승과 화성 남양 인근입니다. 모쪼록 경기일보가 화해와 평화, 자치와 분권, 지방화 등에 앞장서야 하는 시절 인연과 원효대사와의 지역적 인연을 조화롭게 잘 살려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경기일보 가족 여러분의 노고에 경의와 감사를 표하며 사랑과 신뢰를 보내 주시는 애독자 여러분과 함께 보다 큰 역할을 하는 언론으로 발전해 나가기를 기원합니다. 영담 부천 석왕사 주지불교방송 이사장

[삶과 종교] 반복되는 실수는 더 이상 실수가 아니다

지금은 자주 하지 못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주 토요일이면 후배 목사님들, 전도사님들과 함께 같은 책을 읽고 요약하고 느낀 점에 대해 나누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면 이야기가 길어지게 되고 저도 제 나름대로 선배의 입장에서 후배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을 위해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곤 했습니다. 그때 했던 이야기입니다. 리더의 입장에서 보면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 회의 시간에 조금씩 늦는다든지, 일 마감 시간을 지키지 못한다든지, 혹은 최선을 다해 일하지 않고 요령을 부리는 모습을 보면 신경이 쓰이고 속이 상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모습을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잔소리라도 하고 바로잡아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자신이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다가 시간 지키는 것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탓에 그런 모습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년전 많이 아프고 난 후부터 이런 제 생각이 조금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한번 건강이 무너지고 나니 제 의지와는 달리 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아졌습니다. 어떤 선배 목사님이 목회자 세미나에서 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인 세 가지가 있는데 영력, 지력, 체력 그런데 그 중에 제일은 체력입니다 라고 말씀하실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이제는 그 말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본론으로, 우리의 삶에서 불가항력적인 일들을 만날 수 있고 그런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불가항력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반복되는 실수는 어느 순간 실수가 아닌 습관이 되어 버립니다. 아침 출근 길에 차가 막혀서 한 번 지각할 수는 있지만, 계속해서 같은 이유로 지각하게 된다면 그것은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차가 막힌다면 차가 막히는 시간을 피해서 더 빨리 출발하는 것이 맞기 때문입니다. 계속 지각이 반복된다면 그에 따른 따끔한 징계가 필요합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용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용서가 필요한 것은 맞지만 무조건적인 용서는 사람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용서가 필요한 이유는 삶을 바꾸기 위한 것이지 실수와 잘못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반복되는 실수는 더 이상 실수가 아닌 습관이다! 특히 젊은이들이 가슴에 꼭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실수를 방치하면 나쁜 습관이 됩니다. 나쁜 습관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게 됩니다. 때문에 실수가 나쁜 습관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동시에 좋은 습관을 들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의도적인 좋은 습관은 준비된 사람을 만드는 힘이 됩니다. 제가 목사가 되어 은혜를 체험하고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새벽을 사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새벽 예배를 드리고 나면 아침 일과가 시작하기 전까지 2~3시간 정도 여유 시간이 생기는데 보통은 그 시간에 쉬거나 잠을 자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그 시간을 말씀을 묵상하고 책을 보고, 책을 쓰면서 제 자신의 발전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으로 사용했습니다. 몸이 피곤해서 쉬고 싶거나 자고 싶은 유혹이 들 때에도 꾹 참았습니다. 그렇게 보낸 20년은 저에게 황금 같은 자산이 되었고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1년 전부터 아침마다 페이스북에 묵상글을 올리는 습관을 시작했는데, 이 습관을 통해 하루하루 제 삶을 잘 정리하게 되었고 글 쓰는 훈련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당신이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습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은 준비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김 병 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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